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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CHEMY] 눈물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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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7, 2016 23:56에 작성됨.

 

 갑자기 울린 날카로운 종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거리에는 밤의 어둠이 내려앉았고 가게들은 저마다 불을 밝혀놓은 참이었다. 하루종일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내내 걷기만 했다 보니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정신을 놓고 다니면서도 건널목에 곧 열차가 지나가기 때문에 통행을 막기 위해 울리는 종소리에는 무의식적으로 발을 멈추다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노란색과 검은색이 번갈아가며 칠해져 있는 긴 봉 앞에 멈춰 서니 반짝이는 붉은 신호가 눈에 들어왔다. X자로 교차되어있는 표지판, '정지'라고 쓰여 있는 붉고 둥근 표지판, 위협적으로 깜빡이는 빨간 불빛, 귀를 찌르는 종소리까지. 그저 팅팅하고 울리는 단순한 소리일 뿐이었는데 어디에 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가 한번씩 더 나서 팅동팅동 하는 4박자의 소리로 들렸다.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기다릴 때는 비교적 폐쇄된 공간이어서 플랫폼에 열차가 들어오기 직전에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뻥 뚫린 철로 위에서도 열차는 바람을 몰고 다녔다. 

 

 그러고보니 요즘 젊은 여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도시전설이 유행이라고 했다. 어두운 밤에 달리는 열차엔 그리운 사람이 타고 있어서 열차가 지나가는 사이에 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면 반드시 만날 수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였다.

 

 종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열차가 지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무심코 열차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신칸센도 아니었고 열차는 생각보다 느릿느릿하게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정말로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도 스쳐 지나가듯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열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꽃잎을 흩날리는 저 벚나무 아래에 시체가 묻혀 있다는 쪽이 오히려 더 믿을만한 도시전설일 것이다. 애초에 열차 도시전설은 아무런 설득력도 개연성도 없었다. 그저 몇몇 사람이 우연히 들어맞았거나, 그런 이야기를 믿고 싶어서 머릿속에서 어딘가 착각한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억은 제법 불안정한 법이니까.

 

 열차가 다 지나가자 종소리가 한순간에 멎고 내 키보다도 커다란 차단봉이 서서히 올라갔다. 내 옆에서 열차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만져대던 여학생도 고개를 들더니 철로를 건너갔다. 하지만 나는 그저 제자리에 서 있었다. 혜성의 꼬리처럼 열차의 뒤를 쫓아 날아가는 벚꽃잎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몇 사람들이 나를 피해 지나가고 결국에는 시야에서 벚꽃잎이 다 사라졌다. 벚꽃잎 때문에 서 있었던 건 아니지만, 누군가 말을 걸지 않았다면 나는 홀린 듯이 그 자리에서 계속 서 있었을 것이다.

 

 "프로듀서?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주황빛 머리를 가지런히 땋아 내린 소녀였다. 흰 블라우스의 교복 위에 검은 외투를 입은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웠고, 머리의 색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어두운 호박색 눈동자는 거리의 노란 불빛을 비추며 깜빡였다.

 

 "네가 여기 왜…"

 "지나가다가 프로듀서 같은 사람이 보여서 말이야. 가만히 서 있길래 이상해서 가까이 와봤더니 역시 프로듀서라서 말을 걸었지."

 

 그녀는 장난스럽게 내 등을 두드렸다. 정말로 내가 이상해진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실감이 느껴지는 손짓이었다.

 

 "밤에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나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정말로 걱정스러워서라기보다는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누군가의 관리를 맡은 사람의 습관이었다.

 

 "겨우 7시인걸? 드라마에 나올법한 옛날 할아버지 같은 말을 하네."

 

 아직 겨울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이른 시간인데도 해가 빠르게도 졌다. 얼마 전에는 6시가 되기도 전에 해가 지기 시작했으니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보다 약간 뒤처진 걸음으로 옆에 붙어 따라왔다.

 

 "…너는 분명……"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기 두려웠다. 그 눈을 마주하는 것이 무서웠다. 뒤를 돌아봤을 때 아무것도 없을까 걱정이었다.

 

 "프로듀서 씨, 어디 들어가지 않을래? 아직 날씨도 추운데 뭐 따뜻하고 달콤한 거라도 마시자."

 

 벚꽃이 만개할 정도로 따뜻해졌지만 요 며칠 동안 비가 내려서 밤에는 다시 겨울이 찾아온 듯 싸늘한 날씨였다.

 

 "…그래."

 

 나는 더 말을 꺼내는 걸 포기하고 2층짜리 카페를 찾아 그녀와 함께 들어갔다.

 

 

 규모에 비해 자그마한 카페의 문에서는 유리로 된 풍경(風磬)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점원이 이쪽을 바라보고 인사를 건넸다.

 

 "주문은 맡겨둘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내 팔을 두 번 가볍게 툭툭 치더니 그녀는 먼저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럴 때마다 부담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이어서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메뉴를 한번 살펴보고 점원 앞으로 다가가니 책을 읽고 있던 점원은 밝은 미소를 보였다.

 

 "주문하시겠어요?"

 "네. 민트 초코 라떼 톨 사이즈로 한 잔이랑 카푸치노도 톨 사이즈로 한 잔 주세요."

 

 내 주문에 점원은 능숙하게 POS기를 조작했다.

 

 "민트 초코 라떼 톨 사이즈 한 잔 470엔, 카푸치노 톨 사이즈 한 잔 370엔, 소비세까지 해서 907엔 되겠습니다."

 

 나는 지갑을 꺼낸 후에 동전을 찾아봤지만, 운이 나쁘게도 5엔짜리 동전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혀를 차며 천 엔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거스름돈으로 93엔이나 하는 동전무더기를 받게 되었다. 음료를 만드는 점원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기계에서 하얀 증기와 함께 치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문득 아까 지나간 건널목이 떠올랐지만 나는 애써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잠시 음료가 나오는 걸 기다린 후에 따뜻한 음료 두 잔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니 구석진 자리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손님들은 한두 명 뿐이었는데 한 사람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한 사람은 노트북으로 어떤 문서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어서 우리가 들어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그녀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 민트 초코 라떼를 건네니 그녀는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밖에서는 알아채기 힘들었지만 평소처럼 분홍색의 네일로 꾸민 손이 눈에 들어왔다. 도저히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호호 불어가며 음료를 식혀 한 모금 마신 후에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미소 지었다.

 

 "역시 이게 제일이야. 달콤하면서도 살짝 깔끔하게 시원한 맛이 나는 게 좋다니까."

 

 그녀의 취향은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건 민트 초코 라떼. 그게 없는 집이라면 아주 달콤한 카라멜 마키아토였다. 

 

 "프로듀서 씨, 오늘 한가해?"

 "응."

 

 나는 기계적으로 짧게 대답했다. 정식으로 휴가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요 사이에는 전혀 할 일도 없었고 회사 쪽에서도 나에 대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내버려두는 모양이었다. 

 

 "그럼 같이 관람차 타러 가지 않을래? 오다이바에 있는 커다란 거 말이야."

 

 또 열차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데자뷰랑은 달랐지만 어떤 기시감이 느껴지는 듯 했다.

 

 -

 

 열차를 탔다. 그 건널목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라 기분이 편치 않았다. 내가 떠돌던 건 신주쿠 주변이었던 것 같다. 야마노테센을 타고 신바시 역에서 내린 후에 오다이바로 향하는 유리카모메로 갈아탔다. 그동안 그녀와 나는 별다른 이야기의 진전이 없이 시시껄렁한 잡담만 나누었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가수 이야기, 지나가는 사람들의 패션 이야기, 언젠가 먹었던 맛있는 크레이프 이야기 같은 것들. 사실,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 지 몰랐던 탓이다. 그런 나의 고민은 알아채지 못했는지 그녀는 열차에 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소곤대며 즐거워했다.

 

 열차 바깥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자 우리는 순간 대화를 멈췄다. 경전철은 크게 빙 돌아서 레인보우 브릿지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은 주황색과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말이지, 유리카모메의 맨 앞자리에 타고 레인보우 브릿지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분명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지 않을까 해서."

 

 처음 열차에 탈 때 그녀의 말대로 맨 앞칸에 탔지만 이미 우리 앞에 줄을 섰던 사람이 자리를 차지해버렸고 지금은 사람이 제법 많아 맨 앞자리는커녕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기에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환하게 빛나는 다리 안쪽으로 열차는 달렸다. 달렸다기보다는 미끄러져 지나갔다. 아무래도 고무 바퀴로 된 경전철이었으니까.

 

 

 아오미 역에서 내려 조금 걸어 우리는 비너스 포트 앞에 도착했다. 커다란 전광판에는 끊임없이 다른 색깔들의 그림이 떠올랐다 사라졌고 기다란 건물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대관람차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개를 한참 젖혀야만 그 모습이 다 들어오는 대관람차는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꽃잎처럼 보이는 조명 끝에 여러 색깔로 칠해진 관람차들이 느긋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예전에 비해 사람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몇몇 관광객이나 커플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옆에서 함께 걷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우리를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을까. 누군지 들키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보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티켓을 사고 직원한테 건네고 곤돌라에 탔다. 마침 주황색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데, 괜찮을까?"

 

 바닷바람이 불어 와서 조금 흔들거리니 그녀가 불안한 듯 말했다.

 

 "당연히 괜찮지."

 

 점점 관람차가 높이를 높혀가고 보이는 풍경들이 멀어져 작아지기 시작했다. 검은 밤하늘 아래 환하게 빛나는 불빛들, 저 멀리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들, 아래에서 관람차를 바라보는 사람들, 저 멀리 보이는 도쿄타워까지. 나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바깥을 바라보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점점 정점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내가 프로듀서를 만나러 온 건 말이지…"

 

 정적을 깨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있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던 나를 후벼 파는 말이었다.

 

 "프로듀서 씨한테 못다 한 말이 있기 때문이야."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뒤쪽의 유리를 통해 보이는 도시의 야경의 빛깔과 너무도 어울리는 눈동자였다. 밤을 밝히는 그녀의 색이었다. 어느새 그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마워."

 

 그녀는 그래도 웃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항상 좁은 병실에서 창문 바깥의 풍경만을 바라보며 살아오던 나에게 이렇게 빛나는 세계를 알려준 건 프로듀서 씨니까. 한 번 모든 걸 포기했던 나에게 목표를 준 것도 프로듀서 씨니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어."

 

 가장 끝까지 올라왔다.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만히 떠오른 새하얀 달뿐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현실이든 환상이든 이 잠깐의 꿈은 여기서 끝난다는 걸.

 

 "…미안해."

 "왜 프로듀서 씨가 미안해하는 건데."

 

 울면서도 그녀는 푸훗 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핑계일 뿐이었지만, 변명일 뿐이었지만, 비극의 히로인이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그녀가 일어섰다. 반대편 자리에서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좋아했었어. 그리고 좋아해, 언제까지나."

 

 입술에서는 짠맛이 났다. 잠깐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 더 빨리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 모든 것과 바꾼다고 해도 나에겐 당신밖에 없었는데. 왜 그때는 그걸 몰랐을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정말 괴롭고 미쳐버릴 것만 같지만, 당신의 기억에 웃는 모습으로 남고 싶었어."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그 어떤 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최고의 미소였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환생이나 윤회 같은 게 있다고 해도 다시 태어나지 않을래. 당신이 없는 건 싫으니까. 그러니까 기다릴 거야. 그렇다고 너무 빨리 오면 안 돼? 다른 아이들도 있으니까."

 

 후훗 하고 그녀는 웃었다. 다시 한 번 서로의 몸이 겹쳐졌다. 영원보다도 길게 느껴지는 한순간이었다.

 

 

 관람차에서 내려 나는 혼자 넋을 잃은 듯 걸었다. 직원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거는 것도 무시한 채 걸었다. 계속 걸으니 어느새 해변공원이었다. 

 

 "카렌……."

 

 두 사람이 함께 건너온 레인보우 브릿지가 보였다. 여전히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위에 관람차에서 본 새하얀 달이 떠 있었다. 마치 호수 위에 뜬 달처럼 눈물로 흐려진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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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I(시바사키 코우) - 泪月 -oboro- : https://youtu.be/UW0-eHRSyzQ

 

차라리 '열차'나 '기차' 가 주제였다면 쉽게 쓸 수 있었을텐데 그 사진 전체가 주제라고 하니까 뭘 써야할 지 도통 감이 안 잡혔습니다.

이 글이랑, 역에서 일일 차장을 하는 이야기

아니면 정말 그 사진 그대로 열차가 들어오는데 선로에 묶여서... 음음...

 

그래서 뭔가 그런 이미지로 시작했지만 크게 관련은 없는 이야기로 진행되고 말았네요. 

사실대로 말하면 '다시 태어나지 않을래요, 그대가 없기에...' 라는 가사를 듣고 그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을 뿐이지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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