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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 웬디는 네버랜드를 꿈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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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7, 2016 16:12에 작성됨.

웬디는 네버랜드를 꿈꾸지 않는다

칭찬은 지나치게 달콤한 꿀물과도 같아서, 때로는 그 아래에 흐르고 있는 독기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반들거리는 표면에 눈가루 같은 설탕이 흠뻑 묻어있는 붉은색 독사과. 등이 굽은 노파의 쭈글거리는 손에 들린 선명한 악의에 대해 상상하고 있다가, 어린 소녀는 눈을 두어번 깜박거렸다. 흠뻑 꿀이 발라져 있는 음식을 받는다면 그 안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의심하라.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염세적인 문구를 다시금 중얼거리고는 소녀, 타치바나 아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야, 오늘도 좋았습니다.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저어, 감사합니다. 그게......모두 신경을 써주신 덕분에......”
“사기사와 씨가 중심에 놓이는 방송이니 당연히 뭐든 맞춰드려야지요. 아, 아리스도 물론.”
“......타치바나입니다.”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고는 남자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 모양새가 얼마나 역겨운지 본인은 조금도 깨닫고 있지 못하겠지. 나중에 거울에 대고 같은 표정을 지어보시죠. 독기 어린 싸늘한 대답을 마음 속에 파묻어두고서 대신 늘상 꺼내곤 하는 투덜거림을 내뱉은 뒤 아리스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내색하지 않고 상대의 장단에 호응해주는 처세술을 자존심 강한 어린아이가 벌써부터 터득하고 있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아리스가 대화를 잘 이끌어줘서......항상 도움을 받고 있어요.”
“확실히 그렇죠. 아직 어린 나이인데 꽤 어른스러우니. 사기사와 씨와 유닛 활동을 하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이니까 말이죠.”

사기사와 씨, 사기사와 씨. 라디오 프로그램의 편성을 담당하고 있다는 남자의 입에서 그녀를 부르는 말이 나올 때마다 아리스는 작게 숨을 들이삼켰다. 더러운 먼지구름을 남기고 달려가는 트럭을 길에서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역겨운 속내를 말투에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헤죽거리며 늘어진 입가와 똑같은 모양새로 기분 나쁘게 쭉 뻗은 눈매 사이로 음험한 눈동자가 보인다. 그 눈동자가 사기사와 후미카의 몸을 위아래로 훑을 때마다 아리스는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하였다.

 

처음 정규 방송의 제의가 들어왔을 때부터 남자는 후미카를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저급한 욕망이 흐르는 눈과는 달리 입으로는 듣기 좋은 말만을 늘어놓으면서. 유닛 데뷔로 얻은 호평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려면 정기적으로 소식을 알릴 수 있는 코너가 좋을 거라고 했던가. 후미카의 곁에 앉아있는 아리스의 존재를 반쯤 무시한 채로 사내는 망설이는 아가씨를 설득했었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에 좋은 기회인 거겠죠?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는 그렇게 속삭여오는 언니에게, 아리스는 차마 부정하는 답을 꺼내들 수가 없었다. 세상이라는 게임판 위에서 그녀들에게 주어진 패는 많지 않았다. 애시당초 선택의 권한이 자신들에게 오롯하게 주어진 게 아님을 아리스는 어린 나이임에도 어렴풋하게 깨닫고 있었다. 마주 앉은 상대를 흘끗 쳐다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었지.

“처음 말씀드린 대로 사기사와 씨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조금만 꾸며도 확 살아나는 외모도 대단하고, 이야기도 갈수록 적절한 템포로 이어나가고......”
“조금은, 나아진 모습으로 바뀐 걸까요.”
“예에, 예전보다 어엿한 아이돌이 되었다고 해야겠죠. 하하, 이런 기세로 쭉 이어나간다면 차후 다른 코너들도 부탁드릴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그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언니, 바람 쐬고 싶어요. 여기에 오래 있으니 답답해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잘라내며 아리스는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언니의 손을 꾸욱 붙들고 늘어지며 입술을 괜히 삐죽 내민다. 대화를 방해받은 탓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가 남자는 곧 이해한다는 듯 허허 웃음을 흘렸다. 아직 그럴 나이니까, 하고 넘겨짚는 중이겠지. 타치바나 아리스란 소녀가 어리광 부리기를 얼마나 꺼려하는 편인지 모르고 있을 테니까.

“이런이런, 어쩔 수 없구나.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오늘 수고했어요.”
“네, 항상 감사합니다.”
“......”
“자아, 아리스. 나갈까요.”

돌아서는 남자를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다가, 아리스는 자신을 향한 상냥한 목소리에 눈빛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다정함이 감도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여태까지의 불쾌함이 깨끗하게 씻겨나간다. 후미카 언니. 속으로 상대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고는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미카라는 그 이름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아리스는 몇 번이고 생각했었다. 마치 그녀를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들을 묶어서 존재를 확인받은 게 아닐까 싶기까지 하였다. 그 이름만큼이나 사기사와 후미카라는 아가씨는 단아하고 고결하였다. 깊은 밤 내린 눈처럼 살결은 희고 고왔고, 그와 또렷하게 대조되는 짙은 흑발은 흑진주를 녹여 늘어뜨린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이 만들어내는 그늘 속에 수줍게 숨어있곤 하던 푸른색 눈동자는 깊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정갈함마저 느껴지게 자리잡은 이목구비가 만들어내는 미모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따로 꾸미지 않더라도 보는 이를 홀리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평가를 떠올린다면 그걸로 충분하겠지.

에히메 현의 작은 서림에 머물고 있던 그녀가 환하게 빛나는 무대로 걸어올라온 다음, 여기저기서 사심 어린 시선들이 모이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으리라. 아무리 좋게 돌려말하려고 해도 결국 아이돌이란 그 시대 군상들의 욕망이 응집한 결과물이니까 말이다. 사기사와 후미카를 갈구하는 손짓들은 무대 바깥의 관객석에서는 물론, 그녀가 발을 딛고 있는 무대 안쪽에서도 뻗어나오곤 했다.

그 사실이, 타치바나 아리스는 너무나도 싫었다.

“......그 남자, 후미카 언니의 가슴만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요.”
“응?”
“PD라는 작자 말이에요.”

그 자에 대해 언급한 순간, 입에 끈적하게 고여있던 혐오감이 덩어리로 뭉쳐져서 바깥으로 내뱉어진 기분이 들었다. 어린 아리스의 입에서 성적인 언급이 나온 게 부끄러웠던 건지 후미카는 비스듬히 눈길을 내리깐 채 뺨을 붉혔다. 그게, 남자들은 어쩔 수 없으니까. 후미카의 웅얼거림을 듣고서 아리스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언니 말이 맞아요. 대부분의 남자들은 추잡하고 더러우니까.

그들은 오로지 사기사와 후미카라는 아가씨의 외면만을 원할 따름이다. 얇은 천으로 감싸인 보드랍고 탄력 있는 육체에만 눈독을 들일 뿐.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 이상의 가치를 후미카가 지니고 있다는 점에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아가씨가 얼마나 상냥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지, 또한 얼마나 숭고한 가치관을 품고 있는지......그 모든 고결함은 껄떡거리는 자들의 충혈된 눈에는 비치지 않으리라. 어떤 남자가 오더라도 언니의 곁에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언니는 더럽혀져서는 안되는 성역과도 같은 존재인데.

아리스는 후미카를 존경하고 있었다. 나아가 사랑하는 마음을 품기도 하였다. 그건, 평이한 친애의 감정을 훨씬 넘어서는 애착이었다.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늦은 시간까지 진행된 촬영이 끝난 다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동생의 자그마한 어깨에 둘러주며 상냥하게 미소짓던 얼굴을 보았던 때였으려나. 아니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동생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주던 모습을 마주했던 순간이려나. 아니, 그보다는......

처음으로 만났던 날, 같은 눈높이를 한 상대를 맞이하듯 ‘타치바나 양’ 이라고 공손하게 불러주었던 그 순간부터일지도.

“남자들은 죄다 수준 이하 저질의 바보들이에요. 상대하고 싶지 않아요.”
“아하하, 하지만 좋은 분들도 분명, 무척이나 많아. 아리스를 응원해주는 분들 중에도 말야.”
“......”

이제 곧 13살이 되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팬이라고 자청하는 남자들은 어떠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걸까. 간혹 떠올리곤 하는 의아함을 다시 꺼내들었다가 아리스는 치밀어오르는 혐오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마주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소녀가 내뱉은 연약한 온기를 한순간에 삼켜버린다. 스며드는 한기에 얼굴의 살갗이 경직되는 기분이 들었다.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아리스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조용하게 빛나고 있을 뿐인 밤하늘에는 구름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돌로 활동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는 문제겠죠. 그 정도 직업의식은 있어요.”
“으응......”
“하지만 나중에 다른 길을 걷게 된다면, 그 땐......”

뒤의 말을 잇지 못하고 아리스는 입술을 닫아버렸다. 방송국 앞의 조그마한 공터를 맴돌던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스며들었다. 다른 어른이었다면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한 생각을 한다고, 혹은 보다 더 모멸적으로 되바라진 말을 해댄다고 어린 소녀의 발언에 대해 툭 걸고 넘어졌으리라. 하지만 사기사와 후미카는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서글픈 기색이 스며든 눈으로, 동생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 때가 되면 누구도 허튼 짓을 하지 못하도록 언니를 제 곁에 두고 지켜줄 수 있을까요.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마음 속에 파묻으며 아리스는 언니와 맞잡은 손을 한층 꾸욱 붙잡았다. 살갗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나 좋았다. 세상 전체가 무너지더라도 이 따스함이 있어준다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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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랜드에 가고 싶어하는 아이가 있을 리 없어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날이 오른 소녀의 중얼거림에 끝이 누렇게 변색된 페이지를 넘기던 새하얀 손이 움찔 떨렸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두꺼운 양장본을 닫고서 후미카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동생을 쳐다보았다. 자라지 않는 아이 피터팬. 흐릿하게 적혀있는 제목을 노려보다가, 책 덮개의 모서리에 실밥이 살짝 터져나온 부분으로 시선을 옮긴 뒤 아리스는 입술을 삐죽였다.

“영원히 아이로 남아있고 싶어하는 건 아이들의 소원이 아니라, 어른들의 소원이겠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옛 시절을 막연하게 그리워하면서요. 피터팬을 따라서 네버랜드로 가는 웬디는 결국 어른들이 만들어낸 어린아이의 상일 뿐이에요.”
“웬디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치만, 아이라서 좋을 건 별로 없는걸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항상 무시당해야만 해요. 뭐든 간에 나중에 자라고 난 다음이라고만 하고, 언제나 얌전하게 있으라고 강요당하죠. 하나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렇기에 어떠한 권한도 가지지 못해요. 그게 얼마나 속상한 일인지 어른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거에요.”

아이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는 거의 없다. 간혹 무릎을 굽혀서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태반은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상냥한 자신’ 에 내심 만족하고 있을 뿐이다. 접근하는 방식만 다를 뿐 그들은 늘 아이를 가르치려는 생각 밖에 하지 않는다. 특히 의견이 상충되는 경우에 말이다. 언제든 꺾어버릴 수 있는 연약한 손목을 틀어잡고서 맞춰주는 척 팔씨름을 하는 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제가 어떤 의견을 말하더라도, 그게 존중 받으려면 앞으로 몇 년의 시간이 흘러야만 해요. 지금이나 나중이나 제 생각이 변하지 않더라도 말이에요.”
“아리스는 이미 훌륭하게 한 사람 몫을 하고 있으니, 누구도 함부로 아리스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을 거야.”
“......절 타치바나라고, 성으로 불러준 건 여태까지 후미카 언니 뿐이었어요.”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아리스는 언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포근한 감촉 사이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기가 한껏 났다. 후미카 언니.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속으로 몇 차례나 부르며 소녀는 뺨을 부볐다. 어미의 품을 떠올리게 만드는 담요를 끌어안은 아기 고양이처럼. 그 애정 어린 행위를 가만히 받아들이면서 후미카는 자그마한 동생의 머리를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가치 있는 경험들을 쌓으면서 아리스는 참으로 훌륭한......성숙한 아가씨가 될 거란다. 지금도 어엿한 아가씨이지만.”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서 자꾸 조급해져요. 지금의 제 나이로는......”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곤란한 일들로부터 그녀를 지켜줄 능력도 없으니까요. 도저히 갈무리되지 않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보일 용기가 없어서 소녀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혀를 붙들어야만 하였다. 이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또한 일정 이상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리라. 다정하게 어르는 눈빛으로 시선을 맞춰오는 언니를 올려다보다가, 가슴이 먹먹하게 잠겨오는 감각에 어린 소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유닛 활동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두 사람이 내는 성과는 도드라지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상승세를 그리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담당하는 코너가 있는 덕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사건 없이도 소녀들의 이름은 조금씩 인지도를 높여가며 팬들을 불러모았다. 어린 나이에도 똑부러지는 말을 하는 아리스와 그런 파트너에 맞춰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후미카의 조합이 좋은 평가를 받은 셈이었다.

바꿔말하면, 그녀들의 손에는 여전히 내밀 수 있는 카드가 몇 장 들려있지 않았다. 크게 인기를 끄는 신인이 되지 못한 아이돌에게 협상의 주도권이 넘어오는 일은 없었다. 간신히 이어지는 현재의 입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건 끝도 없이 뻗은 가느다란 줄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진땀을 흘리는 상황과 마찬가지였다. 떨어지지 않게끔 양쪽으로 팔을 쭉 뻗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행동하기란 불가능했다.

“여름 수영복......콘테스트요?”
“일단은 일반인들도 포함한 자유 참가이긴 합니다만 이런저런 소속사들에서 아이돌들 또한 출전할 계획이라서요. 사실상 방송을 위한 편성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그만큼 주목을 많이 받는 무대란 이야기구요. 어필을 할 타이밍도 충분할 거니 기회인 거죠. 방송 중 언급할 수 있는 소재도 하나 생기는 셈 아니겠습니까.”
“하지만......수영복은......”
“어허, 그렇게 움츠러들지 않아도 좋아요. 사기사와 씨의 몸매는 굉장하니까, 이렇게, 그러니까 적당히 노출을 하면 분명 호응이 폭발적으로 나올 겁니다. 아이돌로 이런 매력을 포기하고 옷을 둘둘 말고 있으면 그거도 곤란해요.”

무신경함을 위장하고서 패드로 게임을 하던 중, 퍼즐을 풀어나가던 손이 바들 떨리고 만다. 화면에 크게 표시된 제한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음에도 아리스는 멈춰있는 패널을 조작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GAME OVER. 우스꽝스런 형태로 글자들이 툭 튀어나오는 걸 보다가 소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는 아가씨에게로 다가붙어선, 들어올린 두 손을 아래로 스르륵 내리며 콜라병 형태를 재차 그리는 남자의 옆모습이 보인다.

“시선을 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부끄러움을 내버리고 나서는 게 아이돌에게 필요한 자세죠, 안 그래요? 사실 기존의 프로그램도 비슷한 구성으로 너무 오래 진행되었고, 이래저래 이미지의 변화를 줘야하는 시점이니까, 그러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
“애청자들이 있더라도 기획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매너리즘에 빠지는 건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할까, 뭐 그런 겁니다. 사기사와 씨께서 판단할 문제죠.”

말을 마치고 남자는 손가락으로 수염이 짤막하게 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고개를 치켜든 채로 마주하고 있는 아가씨를 내려다보는 눈을 하면서. 마치 힘없는 짐승을 잔뜩 괴롭히고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기색이 표정에 흐른다. 상대의 행동을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는 저급한 만족감이 남자의 얼굴에 번지는 걸 아리스는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라고 하셨죠?”
“바로 다음 주입니다. 수영복은 진행하는 쪽에서 준비해드릴 거니까 따로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 좋은 기회가 될 거에요.”
“저만......나가면 되는 거겠지요?”

거리를 두고 있는 이쪽에 들리지 않도록 하려는 듯 말을 꺼낸 후미카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작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흘끗, 한 차례 아리스를 바라보고는 후미카는 그녀 나름으로 결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후미카의 물음에 따라서 아리스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가 남자는 피식 늘어지는 웃음을 흘렸다.

“예에, 물론이지요. 일단은 수영복 콘테스트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명단에 올려두도록 하죠. 장담하지만 사기사와 씨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매번 제가 이렇게 신경을 써드리고 있으니까, 하하. 이거 참, 나중에 식사라도 한 끼 대접받고 싶은데.”

허튼 수작을 부리는 인간이 대기실을 나설 때까지 아리스는 꼼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지만 소파에 앉은 채 그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마침내 건들거리는 사내가 문 바깥으로 나간 뒤, 한숨을 내쉰 후미카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아리스에게로 몸을 돌렸다. 어른들의 사정에 얽힌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소외되었던 동생을 배려하려는 듯.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
“아리스?”
“늦지 않을테니까”

전원이 나가 화면이 검게 물들어있는 패드를 소파에 내려두고서 아리스는 자신을 부르는 후미카의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문을 나서는 순간 이유 모를 악취가 코를 찌르는 기분이 들어 소녀는 어금니를 악물며 인상을 썼다. 대기실 바깥으로 길게 뻗은 복도를 걸으며 현기증을 느낀다. 새하얀 벽면이 회색 물결로 인해 일그러지며 흔들거리는 것만 같았다.

화장실 칸막이 안에 들어서자마자 소녀는 상체를 숙이고 구역질을 했다. 목 안쪽에서 물렁하고 끈적한 덩어리들이 역류해 입 바깥으로 쏟아진다. 점심 무렵 후미카와 함께 나눠먹었던 딸기 크레이프가 형체를 잃은 오물이 된 채 수면에 떠오른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을 뱉어내며 아리스는 조금 전 한껏 들이마셨던 역겨운 독기를 털어낸다는 생각을 하였다.

“으읍!”

방금 전의 광경을 떠올리는 순간 소름끼치게 혐오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몸 안에 여전히 찌꺼기가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입에 손가락을 밀어넣어 목구멍 안쪽을 꾹 누르고서 아리스는 연달아 헛구역질을 해대었다. 분홍색 입술을 따라 위액 섞인 침이 아래로 뚝뚝 늘어지다가 변기 속으로 떨어졌다.

이건 순수함을 유지하려고 하는 일종의 방어기제인 걸지도 모른다. 입에 고인 씁쓸함을 혀로 훑어모아 뱉어내고서, 힘겹게 숨을 헐떡이며 아리스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입술을 비트는 웃음을 짓는다. 순수함이라니, 얼마나 뻔뻔한 변명인가. 무엇 하나 지키지 못하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약함에서 비롯된 순수함은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그건 치부를 가리려는 얇은 포장지에 지나지 않을 터.

장차 짊어져야할 삶의 무게감을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피터팬을 따라나섰던 웬디. 어떠한 굴레에도 묶이지 않고서 런던의 밤하늘을 날아오르며 그저 즐거워하기만 했던 여자아이. 자신의 두 다리로 일어선 다음 앞으로 걸어나가는 일을 두려워하는, 그처럼 무지하고 얄랑한 순수함이라면......그런 연약한 순수함은 필요하지 않다.

“......어른이 될 거야.”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아리스는 휴지를 뜯어 입가를 닦아내었다. 흔적이 남겨진 종이를 두 번 접어 안에 던져넣고는 물을 내린다.

대대적으로 진행된 수영복 콘테스트에 아리스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하였다. 행사를 다녀온 뒤 후미카 또한 그에 대해서 동생에게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상냥하게 이름을 불러주며, 동생을 무릎에 앉히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원치 않게 눈요깃거리로 나서게 되었다는 수치스러움을, 그녀 홀로 감내한 희생을 내색하지 않으며.

“후미카 언니.”
“응?”
“곤란한 일이 있으면 제게 말해주셔도 괜찮아요.”

소곤거리는 말을 듣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후미카는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을 신경써주는 동생의 말이 그녀에게는 그저 귀엽게만 느껴진 모양이었다. 서로 이마를 마주대고는 부드럽게 부빈다.

“아리스에게는......항상 의지하고 있답니다.”
“저는 진지해요.”
“응, 알고 있어. 고마워.”

뺨을 토닥여주는 손길을 느끼며 아리스는 생각하였다. 만약 자신이 나이 많은 성인이었다면, 언니는 제대로 의지하며 기대어왔을까. 참기 힘들 정도로 힘들 때에는 품에 얼굴을 파묻어오며 눈물을 보이곤 했을까. 자신이 그렇게 믿음직한 존재였다면. 사랑을 받기만 하는 대신, 그녀에게 사랑을 안겨줄 수 있었다면.

고백을 하리라. 키도 훌쩍 커지고, 그만큼이나 내면 또한 성숙해져서 누가 보더라도 성인으로 인정받게 되는 날이 오면 쭉 좋아했었다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좋아할 거라고 그녀에게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앞으로 달력에 몇 번이나 붉은 동그라미를 쳐야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래도 그 순간을 위해 꿋꿋하게 참을 거라고 소녀는 결심했다.

“후미카 언니......”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며 아리스는 후미카의 보드라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간지럽다는 듯 부드러운 키득거림을 삼키며 후미카는 뺨을 붉혔다. 자신이 아이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행동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걸 아리스는 알고 있었다. 실상 아이로 대접받고 있다면 그로 인해 얻어지는 특권을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아리스는 한 차례 더 사랑하는 이에게 입맞춤을 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에, 이어서......여러분들의 사연을 받아 하나하나......성심성의껏 답변을 해드리는 시간입니다.”

중간중간 뜸을 들이는 버릇은 여전하였으나 예전에 비해 확연히 능숙해진 솜씨로 후미카는 방송을 진행해나갔다. 맞은 편에 앉아서, 조금 커서 헐렁거리는 헤드셋을 재차 만지작거리며 아리스는 그닥 의미는 없는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그러면, 어디. 건네받은 사연 쪽지를 펼치고는 후미카는 그를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익명으로 전달된 사연에는 지난 주에 있었던 여름 수영복 콘테스트에 대한 일이 언급되고 있었다. 하얀 비키니를 입고서 볼륨감 있는 예쁜 몸을 드러낸 후미카를 보고서 팬이 되었다는 제보자의 이야기에는 불쾌한 웃음기가 느껴졌다. 자기 소개 이후 진행된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의 과정에서 넘어지고 말아 하얀 살결에 모래가 잔뜩 묻었던 광경이 얼마나 요염했었는지, 머뭇거리며 겉에 입고 있던 얇은 조끼를 벗어내리던 수줍은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아마도 남자일 팬은 좋을 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무례한 사연을 따라서 읽으며 후미카는 고개를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지만, 차마 중간에 말을 멈추지는 못하였다.

“평소에도, 너무 껴입지 말고 시원한 모습을......보여주시길 기대합니다, 라고 해주셨습니다......”

의례적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꺼내는 말이 힘겹게 흘러나온다. 고개를 숙인 채 대본에 시선을 주면서 후미카는 필사적으로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끔 방송을 이어나갔다. 이야기를 거들어야 언니를 도울 수 있을 건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리스는 입술을 땔 수가 없었다. 말을 꺼내면 그 순간 역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를 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 이후 방송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온 에어, 라고 표시된 가증스러운 판에 불이 나가고서 아리스는 비틀비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고했어. 스태프가 지나가는 말로 던지는 인사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다. 완전 엉망이 되어버렸겠지.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딱히 그에 대해 걱정스러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거기에 신경을 쓰기에는 소녀의 감정은 다른 방향으로 치우쳐진 상태였다.

“이야, 오늘도 수고했어요. 딱 마침 콘테스트에 나갔던 걸로 사연이 들어와서 이거다! 하고 생각했거든. 말했었잖아. 분명 인기를 끌 수 있을 거라고.”
“......부끄럽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찮아, 익숙해지면 아무 것도 아닌 거니까요. 어쨌든 기대하던 반응이 들어온 거라고? 앞으로도 사기사와 씨에게 어울리는 일이 있으면 알려줄게. 잘하면 아이돌 채널하고도 이어질 수 있을 거야. 늘 말하지만, 사기사와 씨는 이렇게 남아있긴 아까우니 말이죠.”
“......항상, 신경을 써주셔서......감사합니다.”

어둡게 그늘진 아가씨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걸까. 작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그녀에게로 남자는 흡족하다는 듯 코를 통해 웃음소리를 내고는 어깨를 으쓱여댔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혐오스럽기 그지 없다. 빌어먹을 새끼. 지금까지 단 한번도 쓴 적이 없는 거친 단어를 속으로 내뱉으며 아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리스. 생기 없는 목소리로 후미카가 이름을 불러왔을 때 소녀는 말없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마주잡았다. 맞닿은 살갗을 통해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후미카 언니, 괜찮아요?”
“......응? 으응, 괜찮아. 오늘은......조금 피곤한 날이네.”

대기실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나눈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풀이 죽어있는 후미카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아리스는 그 이상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그녀를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면서, 그를 고민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낀다. 결국, 제대로 된 말은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할 거면서.

“일, 마친 다음에 딸기 파르페, 먹으러 가기로 했었지. 아리스, 기대하고 있었을 건데.”
“피곤하시다면 쉬시는 게 우선이에요. 무리해서 제게 맞춰주지 않으셔도 되니까.”
“아냐. 아리스하고 같이......시간을 보내는 게 휴식하는 거야. 잠깐만, 앉아있다가 일어날게.”

대기실의 소파에 앉은 채로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을 하고서 후미카는 하아, 나지막하게 숨을 쏟아내었다. 어째서 혼자서 다 감싸안으려고 하는 걸까. 곁에 있는 이가 어리기 때문에,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그러면서 지켜줘야만 하기 때문인 건가. 지쳐있다는 기색마저 숨기려고 드는 상대를 쳐다보다가 아리스는 순간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붙잡지 못했다.

“제게, 맞춰주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응?”
“저 스스로 언니의 보폭에 맞춰서 나란히 걸어갈 수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로 어른이라구요. 저를 타치바나 양이라고 불러줬던 언니가 아니었던가요. 왜 언니마저 저를 아이로 취급하려고 하시는 거죠?”

화를 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말을 마쳤을 때에 소녀는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하고 인상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아리스는 자신이 소파 위에서, 후미카의 어깨죽지를 붙잡고 내리누르고 있는 중임을 깨달았다. 깜짝 놀라서 황망함에 동그랗게 뜨여진 상대의 푸른 눈동자를 내려다보다가 소녀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호흡 사이로 말을 쏟아내었다.

“제가 유일하게 아리스라고, 제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허락했던 건......언니가 저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줬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타치바나 아리스는, 언니의 뒤에 숨어있어야만 하는 꼬마가 아니에요.”
“아......”
“아이가, 아니라구요. 언니를, 사랑하고 있는......한 명의 여성이에요.”

고백은, 제대로 인정받는 어른이 된 다음에 하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아리스는 멋대로 움직이는 입술을 붙잡지 못했다. 눈에서 가득 고인 눈물이 툭, 떨어져서 사랑하는 이의 뺨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걸 쳐다본다.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꺼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아가씨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리스? 입술이 옴싹이며 소녀의 이름만을 한 차례 부른다. 그러한 상대의 반응에, 아리스는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말았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어진다. 친애의 감정이 깃든 부드러운 접촉은 결코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 상대를 원하는 달아오른 움직임. 후미카의 입술을 훔친 순간 아리스는 뇌리가 하얗게 탈색되어버림을 느꼈다. 이성이 마비된 채 오로지 본능적으로 행위를 이어나간다. 대기실에 다른 사람은 누구도 없다는 걸 깨달으며 시작한 행동이기는 하였으나, 사고회로에 불이 나가버린 지금에는 갑자기 문이 열리더라도 알아차릴 수 없을 터였다.

“아, 안돼.”
“으읏.”
“이런 거......”
“언니......”

비단결 같은 황홀함이 찢어진 건 한순간이었다. 후미카의 두 손이 자신의 가슴을 밀어내었을 때 아리스는 딛고 있는 바닥이 무너지는 감각을 느꼈다.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는 언니를 내려다보며 아리스는 뒤늦게 자신 또한 전신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후미카 언니, 저는......언니를......”
“그만......아리스, 말하지......마.”
“어째, 서......”

후미카의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걸 보고서, 아리스는 주춤거리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잠깐 말랐던 빰의 눈물길을 따라 다시금 뜨뜻한 감정이 흘러내렸다. 거부당한 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론을 떠올리며 소녀는 오른손을 자신의 앙가슴에 올렸다. 심장이 뛰고 있음을 느끼고는, 그 부근의 옷깃을 힘껏 움켜쥔다.

“진정하렴. 아리스......감정에, 휘둘리고 있는 거야.”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지금껏 얼마나 생각해왔던 건데!”
“아냐, 이건 아냐......이런 게, 용납될 리가......없어.”
“언니......후미카 언니!”
“괜, 찮아. 아리스......아직 어려서......그래서 이렇게 행동할 수도......”

말이 비수가 되어서 가슴에 틀어박힌다. 세차게 얻어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혀오는 걸 느끼고는 아리스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바닥을 찾아 흔들던 발에 딱딱함이 와닿자마자 지면을 딛고는, 반쯤 주저앉을 듯 휘청이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다. 눈물로 얼룩진 언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소녀는 헛숨을 들이삼켰다.

“이게, 치기로 행동한 거라고......생각해요?”
“......”

실수를 해버린 걸 덮고 어떻게든 예전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꺼낸 말이겠지. 그만큼이나 그녀는 절박한 심정이었을 테다.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그럼에도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와 자신이 함께 쌓아왔던 관계가 산산히 찢어지는 걸 체감하면서, 극심한 고통에 흐느끼며 아리스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저 아래로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아리스.......”
“......타치바나라고 불러주세요.”
“......이러지, 말아줘.”

애원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상처 입을 생각도, 상처를 입히려는 생각도 없었는데. 열어선 안될 상자를 참지 못하고 열어버린 스스로가, 그리고 동시에 마음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상대가 너무나 미웠다. 그저, 그저 영원히 함께 따스함을 공유하며 있고 싶었을 뿐이야. 그 한 마디 변명을 남기고서 소녀는 몸을 돌렸다. 아리스. 한 차례 더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는 이미 반쯤 울음기에 젖어있었다.

“폐를 끼쳤습니다. 사기사와......씨.”

문을 열고서 앞으로 고꾸라지듯 대기실을 나섰다. 한쪽 손으로 벽면을 짚은 채 복도를 걸어가며 아리스는 필사적으로 흐느끼지 않게끔 노력하였다. 이미 통제를 따르지 않는 눈에서 눈물이 솟아나 시야를 흐리고 있었지만, 소녀는 손을 들어 그를 닦아내지 않았다. 지나가던 이가 놀란 목소리로 왜 우느냐고 말을 걸어왔지만 대꾸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간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닫고서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 아리스는 거울에 비치는 여자애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거울 속의 여자애는 붉어진 눈시울을 연신 깜박거리며 볼품없는 표정을 짓기만 하였다. 네버랜드를 꿈꾸지 않는 웬디. 원치 않게 어른이 되어버린 웬디 모이라 엔젤라 달링이 거기에 있었다. 동화는 그렇게나 지독하게 현실적이고 따분한 결말을 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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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아이마스 온리 때 후미카 회지를 내면서 홍보로 썼던 아리스x후미카 팬픽이었습니다. 쿨 속성 내에서 후미카가 다른 아이돌들과 엮이는 게 참 예쁘다고 생각해요. 애니에서 나오기 전부터 아리후미를 좋아했는데 요즘 이래저래 인지도가 올라가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도 아이마스 관련 행사가 열린다면 아리후미로 또 참가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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