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14-

댓글: 2 / 조회: 1766 / 추천: 0


관련링크


본문 - 11-04, 2012 16:57에 작성됨.

히비키와 추격전을 벌인 끝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더위 먹은 강아지마냥 헥헥대며 자리로 돌아오니, 리츠코가 마침 잘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저희 좀 찍어주시겠어요?”

“응? 아. 응.”

그때까지 자리에 남아있던(타카네는 어딜 다녀온 모양이지만.) 네 사람이 같이 사진을 찍으려는 모양이다. 왼쪽부터 미우라 씨, 리츠코, 치하야, 타카네가 서서 각자 포즈를 취했다. 미우라 씨나 타카네의 가슴에 일일이 놀랐다간 저녁쯤에 협심증으로 급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제 가슴에 신경 쓰는 건 자제하기로 했으므로 별 문제가 없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미키의 말대로라면 미우라씨 91 타카네 90 리츠코 85.
그 사이에 낀 아크릴판 하나가 요상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흰 것 사이에 검은 것을 두면 더 검게 보이듯, 큰 것 사이에 작은 것 하나가 끼니 엄청나게 작아보였다. 문득 ‘수영복 상의는 필요 없지 않아?’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눌렀다. 자신도 그걸 인식하는 듯, 자신의 양 옆에 있는 타카네와 리츠코(의 가슴)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다음엔 천체망원경을 가져올게.”

“예? 야구선수 씨? 뭐라고 하셨나요?”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리츠코가 들었나보다. 하여튼 귀는 밝네.

“아무 것도 아냐. 찍는다고.”

“아. 예!”

“자. 웃으라고. 하나, 둘, 셋!”

리츠코에 비해 키가 큰 미우라 씨가 허리를 살짝 숙여 키를 맞추려 했기에, 자연스레 계곡…은 여름에 가면 참 시원하지. 어쨌든 눈이 즐거웠다. 

“자. 제대로 찍었다.”

이쯤 되면 내가 가슴만 클로즈업해서 찍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사진은 정말 제대로 찍었다. 나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며, 현실과 망상의 경계 또한 구분할 줄 안다. 만약 구분할 줄 몰랐더라면 난 이미 이 시원한 바닷가가 아닌 차가운 감방에 갇혀있었겠지.
그건 그것대로 새로운 피서법인가.

“우아~ 역시 바다는 재미있는 거야.”

“전 이미 지쳤을지도.”

미키와 야요이가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으며 물 위로 올라왔다. 그녀들에게 아이스박스 안에 있는 음료를 건네주려 걸어가는데, 갑자기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왁-!”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데자뷔인가 생각도 들었지만, 아까 히비키에게 당했을 때는 그나마 물이기라도 했지. 이번엔 짤 없이 모래사장이다. 완전히 넘어지기 전에 정신을 차려 코가 깨지는 것은 면했지만 그래도 아팠다.

“어떤 놈이야. 여기다 함정을 파놓은 게!”

그 녀석들이냐? 또 그 녀석들이야? 한 번 혼이 나고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잡히면 이번에야말로 울면서 싹싹 빌 때까지…

“죄, 죄, 죄, 죄송해요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리, 내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유키호였다.

“응?”

“그 구덩이… 제가 판 거에요오…”

“우째서.”

“그냥… 파다보면 재미있으니까… 흑. 죄송해요…”

여자가 남자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 여자가 남자에게 사과를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잘못을 저질렀지만 여자가 눈물을 보인다. → 남자가 여자에게 사과를 한다.
가슴 사이즈가 80이상인 여자가 남자에게 잘못을 저질렀지만 여자가 눈물을 보인다. → 남자가 석고대죄.

“미안! 내가 미안해! 한때 운동선수였던 놈이 그런 구덩이 하나 못 피하다니! 내가 나쁜 거야! 내가!”

“하, 하지마안…”

“아냐. 넌 잘못 없어. 하나부터 끝까지 다 내 잘못이라고!”

“흥. 당연하지. 너 같은 사람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잘못이야.”

마침 지나가던 이오리가 내가 유키호 앞에 엎드려있는 걸 보고 툭 내뱉었다.

석고대죄 중에 80이상인 다른 여자가 끼어든다. → 죽여주십시오.
석고대죄 중에 79이하인 다른 여자가 끼어든다. → 뭐야. 이 LCD는.

“뭐? 뭐야. 넌?”

“너, 너야말로 뭐야? 그 표정은.”

길가다가 어깨를 부딪친 야쿠자들이나 짓는 표정으로 이오리를 노려봐주었다. 이오리는 살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싶더니, 곧 상대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며 가버렸다. 그나저나 저 토끼. 바다에서도 들고 다니는 거냐.

이 표정을 유키호에게도 보여줬다간 기절할 것 같아서 최대한 표정을 느슨하게 하고 고개를 돌렸다.

“휴. 정말 요즘 들어 내가 참 나잇값 못하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에…?”

내 뜬금없는 말에 유키호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또 꽤나 귀여워 보여 씩 웃었더니, 유키호는 몸을 움찔했지만 처음 봤던 날처럼 도망치지는 않았다. 이 녀석도 확실히 그때보단 내게 면역력이 생긴 것 같았다.

“나잇값…이라니 무슨 일 있었나요?”

“아니. 뭐. 문득 든 생각인데 말야. 애들이 장난하는 거에 이성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고 할까. 몸 가는대로 움직여버리니까. 방금 전도 그렇고.”

“다들… 그래서 야구선수 씨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어째서.”

“눈높이가 비슷하니까?”

“그 말인즉슨, 내 정신연령이 10대 중반이라는 말이렷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유키호는 쉽게 주눅이 들어버린다. 이런 타입과는 또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 건지. 그러고 보면 이 녀석들은 참 개성이 천차만별이구나.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냐. 내가 너희들 나이 때는 야구밖에 모르고 살았으니까.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뭐라고 할까.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수학여행 온 기분이라고 할까. 내가 있었던 학교의 야구부는 수학여행기간에도 학교에 남아서 훈련했었거든. …하긴. 니들도 아이돌 일 때문에 학교에는 별로 신경 못 쓰지 않아?”

“예. 그렇죠. 그래도… 여긴 저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겠지. 적어도 열한 명이 함께 같은 꿈을 꾸고 있으니까.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사무소에서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프로의 세계를 떠난 이후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없어졌다. 현재 속한 팀으로는 뭔가 부족하고… 아니. 애초에 지금의 나에게 꿈이란 게 있던가. 내 스스로 만나지 못한 꿈을 쫒고 있다. 라고 말하는 주제에. 

“부럽구만.”

“예?”

“아니. 아냐. 아무 것도. 자. 다들 자리 깐 곳으로 모이는 거 같은데. 우리도 가자고.”

“아, 예.”

 

나도 오랜만에 와보는 바다에 필요 이상으로 들떠있기도 했고, 나잇값이고 나발이고 애들이랑 같이 놀다보니 시간은 금방 갔다. 날이 저물고 모두가 떠난 모래사장에서의 저녁식사는 바비큐 파티였다. 

“괘, 괜찮겠냐. 아이돌이 이런 거 먹어도?”

“하루 정도라면 괜찮아요. 오늘은 처음으로 다 같이 여행하는 날이기도 하고.”

그런가. 리츠코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나도 고기 참 좋아하는데 말야. 한참 때는 혼자 한국식 불고기 4인분 정도는 해치웠으니까.

…는 웬걸. 나는 막 다른 녀석들이 고기에 손을 대기 시작한 후부터 30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고기만 뒤집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걸 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초반에는 미우라 씨도 조금 도와줬지만, 차마 미우라 씨가 그런 걸 하는 것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기에 내가 다 하겠다고 했다.

물론 날 여기 데려와준 걸 생각하면 이런 건 내가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야구선수 씨는/야구선수는/너는/아저씨는/선수오빠는 안 먹어?/안 드세요?/안 먹는 거야?’ 라고 말해주는 사람 하나 없다니. 너무하는 거 아냐? 초단위로 우울해진다. 정말.
한숨을 쉬며 녀석들이 잘도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짝 떨어진 곳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요코즈나도 놀랄 속도로 접시를 비워내고 있는 타카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타카네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아… 역시 타카네밖에 없어.

“야구선수 씨.”

“응!”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쪽에 있는 옥수수를 조금…”

“…아. 그래.”

뭔가를 기대했던 내가 바보천치다. 저번에 그렇게 호되게 당해놓고도 타카네에게 먹을 것에 대한 자비를 바란 건가, 나는!
물론 내가 직접 들고 있는 집게로 먹을 수도 있지만, 그건 여러 가지 의미로 모양이 안 난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 속에 나 혼자인데! 다들 개방적인 분위기인데! 친분도 그럭저럭 쌓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앙~ 하나 해주는 녀석이 없단 말인가. 

그나마 치하야가 마실 것이랍시고 건네준 맥주로 조금이나마 마음이 나아지는 듯 했으나, 한 모금 마신 뒤에 살짝 남은 캔 뚜껑 주변의 거품이 내 눈물 같아 더 슬퍼졌다. 이대로 입에 머금은 맥주를 불판에 뿜어서 나 빼고는 아무도 못 먹게 하려다 참았다.

“그래… 나도 한 때는 인기가 많았지. 하지만 다 잃었어. 모두 잃었다고. 지금의 내 마음은… 꼭 순두부 같아. 나 순두부 참 좋아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선수오빠는.”

“응?”

정신을 차려보니 아미와 마미가 빙글빙글 웃으며 내 앞에 서 있었다. 접시와 젓가락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이 녀석들도 뭣 좀 달라는 거구만.

“자. 아~ 해봐. 선수오빠.”

“뭐…라고?”

나는 잠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지만, 두 녀석의 젓가락에 들린 건 틀림없는 고기였다. 순간 가슴속에 찡하고 뭔가 울리는 게,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이 녀석들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빨리!”

“으, 응. 아~”

마치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새 마냥 입을 벌리고 있자니, 둘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내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자신들의 입에 훌쩍 넣어버렸다.

“…맛있냐.”

“응!”

“응~후~후. 오빠. 혹시 뭔가 기대하고 있었던 거야? 응?”

수치다. 아무리 몸이 달았다지만 이딴 고전적인 클리셰에 넘어가다니…

“니들… 정말… 하아. 아무 것도 아니다.”

이젠 뭐든 좋았다.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 동안 차 태워준 것도 모두 헛수고로다. 역시 사람은 혼자 사는 거야. 

그런 나를 봤는지, 반대편에서 하루카가 고기를 한 점 집어서 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그래. 설마 하루카마저 그런 장난을 치진 않겠지. 내심 기대하던 차에, 
하루카는 어느 한 쪽을 보고는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다 이내 싱긋 웃으며 다시 돌아가 버렸다.

신은 없었다.

라고 생각할 무렵,

“윽!”

누가 뒤에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안 그래도 마음속이 체념과 우울과 짜증의 천하삼분지계였던 탓에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뒤를 휙 돌아봤더니,
이오리가 서있었다. 고기가 집혀있는 젓가락을 들고.

“또 그 표정이네. 인상 좀 펼 수 없어?”

“…농담이지?”

“뭐가?”

“먹을 거면 빨리 먹으라고. 날 또 얼마나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아까부터 굽느라고 먹지도 못한 거 다 봤거든.”

“그럼 내게 주겠다는 거야? 그걸? 네가?”

“그, 그, 그래! 이 이오리쨩이 특별히 주는 거니까 감사히 먹어!”

“네!!”

“뭐, 뭐야. 그 우렁찬 대답은.”

설마 이오리도 아미와 마미같이 고전적인 장난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오리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대로 내 입 안에 고기를 넣어주었다. 입 안에 고기가 들어가는 순간, 뭔가 이것저것 감정이 뒤섞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뻔했다.

“뭐, 뭐야. 너 설마 우는 거야?”

“아, 아니… 고기가… 너무 맛이 있어서…”

“다, 당연하지. 이 이오리쨩이 직접 주는 거니까 맛있는 걸로 정해져 있잖아?”

“그래… 응… 맛있어… 너무 맛있어…”

뭔가 응어리져 있던 것이 한 번에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오리한테 잘해줘야지. 이 고기가 소화될 때까지는.

결국 이오리를 시작으로 한 명씩 내게 고기를 입에 넣어준 덕분에, 바비큐 파티가 끝나고 뒷정리를 할 때쯤엔 완벽부활할 수 있었다. 

“흑흑… 맛있었다. 오늘의 고기는.”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현역 아이돌이 직접 먹여주는 고기라고! 고기 자체도 맛이 좋았지만 받아먹어서 그런지 두 배는 더 맛있었다.

“아. 죄송해요. 조금 더 일찍 생각했어야 했는데…”

옆에서 같이 정리를 하던 하루카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후후. 난 괜찮다. 이 야구선수 씨는 괜찮아요. 어어. 그거 내가 들을게. 이리 줘.”

“아, 아니. 이 정도는 제가…”

“아이돌이 그런 거 들었다가 잔근육이라도 생기면 곤란하지.”

“아하하… 이 정도로 근육이 생기진 않아요.”

“나도 알아. 잠자코 내놔.”

“야, 야구선수 씨. 어째 텐션이 높으시네요.”

“응? 기분 탓이야. 허허허. 엇? 이오리님이시다! 신주님. 부처님. 이오리님!”

내 외침에 접시를 들고 지나가던 이오리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자, 잠깐!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바보가!”

“그래. 난 바보야. 이오리밖에 모르는 바보.”

“지, 지, 진짜 돌아버린 거 아냐? 갑자기 진지한 표정 하고…”

이오리의 얼굴은 완전히 어두컴컴해진 지금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빨갛게 물들었다. 아. 귀여워요. 귀여워.

“후후. 난 이제 알았어. 네가 항상 날 매도해왔던 건, 나에 대한 감정을 숨기기 위한 너의 방패였음을. 지금이라면 난 너에게…”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심했던 모양이다.



정리를 끝내고 리츠코가 미리 잡아놓은 민박집에 묵게 되었다. 아직 잘 시간은 멀었는데 혼자 좁아터진 독방에 있기도 뭐해서, 녀석들의 허락을 구하고 자기 전까지 모두의 방에 있기로 했다.

“역시 다 함께 여행이라는 건 좋구나.”

다다미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자니, 옆에 있던 마코토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야구선수 씨 고등학교 때 합숙이라든가 한 적 없나요?”

“물론 있긴 했지만, 땀 냄새나고 우중충한 야구부 녀석들이랑 가봤자 하나도 즐겁지 않다고.”

“수학여행은?”

“아까 유키호에게도 말했다만, 다른 녀석들 수학여행 갈 시간에 학교에서 배팅이나 하고 있었어.”

“그거… 안됐네요.”

“그래봤자 다 옛날 얘기지. 지금 나는 여기 있다고. 중요한 건 그거야.”

“오. 왠지 멋진 말.”

“과거에 아무리 불행해도 지금이 행복하면 된 거야. 반대로 과거에 아무리 영광의 길을 걸어봤자 지금이 불행하면 아무 소용없어. 과거도, 미래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그 무엇도 지금 당장보다 중요하진 않으니까.”

“그런가요. 하지만, 미래의 나를 생각하며 현재의 자신을 가꿔나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네. 난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미래의 나를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네 말도 맞을지도.”

그래서 내가 목표 없이 사는 건가. 과거는 몰라도 미래 정도면 생각해봐도 될지도.

“그래도, 역시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건 골치 아파. 나한텐 지금 당장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벅차다고. 애초에 머리 나쁜 운동선수한테 뭘 바라냐.”

“하지만 먼저 말 꺼낸 건 야구선수 씨인데다…”

“윽.”

“야구선수 씨. 그렇게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되지 않는 걸요?”

마코토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역시 천재?”

“아니… 그건 좀…”

“…그렇게 쉽게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냐.”

“헤헷.”

과장스럽게 낙담한 표정을 짓자, 마코토는 작게 웃었다. 

“아. 선수오빠랑 마코찡. 무슨 얘기해?”

오늘 나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핀치로 몰아넣은 두 악동이 폴짝 뛰어 나와 마코토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응? 별 얘기 안했어. 아. 그래. 이제 와서 새삼 기억났는데, 여름밤하면 역시 괴담이지. 아까 보니까 이오리한테 듣고 있던데. 내 얘기도 한 번 들어 볼 테냐?”

“오오?”

“선수오빠 무서운 얘기 많이 알아?”

“당연하지. 이래 보여도 야구부 여름합숙 때 추정 다섯 명 정도를 오줌 지리게 했었다고. 아직까지 전설로 남고 있지.”

“대단해! 아미도 들어볼래!”

아미와 마미는 반색을 하며 달라붙었지만, 마코토는 약간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그 정도로 무서운 거라면 조금…”

“아. 괜찮아. 지금 다들 방에 있고, 불도 켜져 있으니까. 무서운 게 조금 덜하겠지.”

“그, 그런가요…” 

결국 마코토는 유키호를 불러와 네 명이서 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목마름을 대비한 과실주 캔을 하나 따서 옆의 탁자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유키호가 거품을 물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흥미를 느낀 히비키가 다가왔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아미와 마미가 뛰쳐나갔다. 야요이가 합류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마코토가 유키호를 눕혀야겠다는 구실로 도망쳤다. 야요이는 울기 직전인 표정이라 내가 돌려보냈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히비키를 앞에 두고 네 번째 이야기를 막 하려는 와중에, 잠시 목이 말라 과실주 캔을 찾았는데… 캔이 없어졌다. 어딜 갔나 봤더니,

“이거, 누가 딴 거야? 마셔도 되는 거지?”

하루카의 손에 들려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져서 황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하루카의 목이 들썩이는 게 못해도 두 모금 정도는 들이킨 것 같았다.
그리고는…

“큽, 푸헤-! 이게 뭐야! 써!”

“뭐긴… 술이지.”

“에에? 콜록, 수, 술이라고요?”

“그래. 술. 그것도 쪼금 도수 높은. 잘도 마셨구나.”

“아니 향이 꼭 과일 탄산음료 같았는데…”

“술. 마셔봤어?”

“마셔봤을 리가요! 저. 미성년자인 걸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좀 있음 어지러워질 테니 미리 누워있어. 아니. 그냥 자둬.”

“네에…”

하루카는 벌써부터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살짝 비틀거리며 자리를 깔고 누웠다. 하긴 이제 슬슬 잘 시간이기도 하고. 나도 히비키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먹이고 올라가지 않으면.

“자. 이제 마지막 이야기를 시작 한다…”

“으, 윽. 언제든지 오라구!”

녹다운 직전인 히비키에게 악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이야기를 하려는데, 갑자기 누워있던 하루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와 히비키를 포함해 방 안에 있던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하, 하루카…?”

“후, 후헤헤…”

아아. 완전 가버렸군요.

“쟤 좀 다시 눕혀. 설마 토하는 건 아니겠지.”

“후에… 기분이… 왠지 좋네요오… 붕붕 뜨는 게. 이 기분을, 기분을, 노래로 표현해 보겠습니다앗-!”

맙소사.


♬ 파랑새 - 아마미 하루카


하루카는 갑자기 목소리를 착 깔더니, 듣기에도 우울한 가사를 듣기에도 우울한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마안~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저 녀석을 그대로 놔뒀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하루카를 향해 걸어가 녀석을 다시 자리에 눕혔다.

“흐에에? 왜 그러시나요? 저 아직 부를 수 있는데에~”

“그래. 니가 이겼어.”

“이겨요오?”

“응. 나 방금까지 무서운 얘기 하고 있었거든. 근데 니가 이겼어. 진짜 섬뜩한 노래더라.”




다들 잘 시간이 되어, 나 역시 내 방으로 올라왔다. 
방금 전까지 왁자지껄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니 좀 그렇네. 누워도 잠도 안 오고 말이다. 무엇보다 애들이 잘 시간이긴 해도 내가 잘 시간은 아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떻게든 잠이 오게 운동을 하던지, 아니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볼까. 
자. 어떻게 할까.


0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