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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 담당 프로듀서는 죽을 만큼 후회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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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4, 2016 01:47에 작성됨.

원작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A-1 Pictures

-내 심상은 삐뚤어졌어. 노력하는 게 싫어, 최소한의 과정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고 싶어. 노력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야.
그저 힘을 덜 들이고 싶을 뿐이지.  

-내 심상은 삐뚤었었어. 노력해도 소용없다.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건 일부. 노력을 부정하고 싶었지. 근데, 어느 날 어떤 소리를 들었어.

3월 12일

세상은 숫자로 이루어졌다. 부의 축적은 수치로 나타나며 그 수치로 남은 인생의 안락함을 가늠할 수 있다.

금고의 비밀번호를 맞출 필요 없이, 지갑을 쓸데없이 두둑하게 불릴 필요 없이 통장 하나와 카드 한 장이면 재산의 숫자가 변동한다. 인터넷 쇼핑은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끝난다.

그 몇 번의 행위로 숫자가 변한다. 정말 편리한 세상이지만 그런 편리한 행위로 노동의 대가가 쉽게 날아가는 무서운 세상이기도 하다. 쉽지만, 쉬워서 무심결에 돈을 낭비하고 만다.

후타바 안즈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런 간편함을 경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즘 세상의 편리한 쇼핑에 길든 나머지 상품을 클릭하고 카드 번호를 입력하는 절차마저 귀찮게 여겼다.

위에는 위가 있고 아래에는 아래가 있는 법.

이런 편리한 세상에도 안즈 같은 게으름뱅이는 존재한다. 그리고 게으름의 대가는 참혹했다. 안즈는 나태의 대가로 게임샵 앞에 늘어선 행렬 안에서 4시간 동안 서서 중력과 씨름했다.

체력이 없는 안즈에겐 서 있는 것조차 중노동이다. 안즈는 핸드폰 소셜 게임을 건드리며 다리의 고통을 애써 무시했지만 다리의 떨림이 조금씩 진해지며 안즈를 괴롭혔다.

줄은 여전히 움직일 기세가 안 보인다. 안즈는 새파란 안색으로 핸드폰을 슬립 모드로 돌렸다. 손가락을 움직일 힘조차 바닥났다. 그리고 슬슬 안즈의 인내심도 바닥났다.

안즈는 줄 앞과 뒤를 둘러보며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지금 안즈가 자리한 쪽은 줄의 한가운데. 더 기다리긴 괴롭고, 지금 빠지기엔 아까운 자리다.
줄은 움직일 기세가 안 보였지만, 어쩌면 지금 안즈가 빠지면 움직일지도 모른다. 그런 딜레마에 빠져 고민하던 차에,
"거기 너,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니?"
누가 안즈를 불렀다.

안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한……. 처음 보는 얼굴. 안즈는 게으름뱅이지만 기억력은 쇠퇴하지 않았다.

정장을 입은 청년이 모르는 사람이란 걸 알곤
"미안하지만 줄에는 안 끼워줄 거야."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 괜찮아. 이미 나오는 길이거든."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게임샵의 봉투를 보란 듯이 흔들었다. 비닐 봉투가 흔들리며 안즈를 약 올리듯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냈다.

"그럼 볼일 없을 텐데?"
"그랬는데 네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거 성격 참 특이하네……."
이상한 사람이다. 수상한 사람이다. 안즈는 청년 때문에 자리를 뜨기로 마음을 굳혔다.

"네이 네이, 우리 인연은 여기서 끝. 난 이만 집으로 돌아갈 거니까 더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럼 이만."
"너 혹시 디지몬 스토리 사이버 슬루스 사려고 줄 섰어?"
안즈는 순간 멈칫했다. 청년이 안즈의 목적을 알아맞혔다. 하지만 안즈는 이 인파의 줄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 떠올리곤 곧바로 다리를 움직였다.

이 정도야 게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간파할 테지. 초보적인 추리다. 탐정 만화와 탐정 게임으로 추리력을 기른 안즈는 그렇게 이해하곤 마음을 가라앉혔다.

안즈가 줄에서 빠지자 뒷사람이 재빨리 안즈의 자리를 차지했다. 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사람 한 명 분만큼 짧아졌다.

"저기 잠깐만, 게임은 포기하려고?"
"나중에 프리미엄 가격 붙여서 사면 돼."
이미 게임샵은 저 멀리 멀어졌고 안즈가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는데도 청년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저기, 왜 따라오는 거야? 자꾸 따라오면 불안해."
"아니, 내려가려면 이쪽으로 가야 하잖아."
게임샵의 위치는 백화점 5층. 안즈와 청년이 1층까지 내려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안즈는 남은 시간 동안 좋든 싫든 청년과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한다.

"내려가는 동안만 이야기하지 않을래?"
"어떤 이야기를 할 건데? 지금 너무 피곤해서 말할 기운도 없어."
"그럼 듣는 건 어때?"
"마음대로 해."
청년은 안즈가 한숨을 쉬는 걸 보고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

"너, 학교는 어떻게 하고 왔어? 아직 수업시간일 텐데."
안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 맞다. 듣는다고만 했지? 그래, 그럼 내 이야기를 할게. 나 말이야, 실은 지금 업무시간이야!"
"뭐?"
그만 대답하고 말았다.

안즈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일을 그만둘지도 몰라!"
"뭐?!"
또 대답하고 말았다.

찝찝하다.
남의 이런 사정을 알고 싶지 않다. 안 물어봤어. 안 궁금해. 남의 불행 타령을 듣는 데에도 에너지가 소모되니까.

안즈는 가뜩이나 부족한 에너지로 움직이는 저전력 인간이다. 직장을 그만둔다는 이야기에 '아, 그거 안 됐네요.라며 형식적인 위로를 건네고 인터넷 구직 사이트를 추천하는 것 정도밖에 할 수 없다.

게임 예약 시기를 놓친 대가로 이런 이야기에 시달리다니……. 너무 끔찍하다. 이런 이야기는 SNS에서 텍스트로 된 글귀로 읽어도 피곤한데 현실에서는 더 사양하고 싶다.

안즈는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내려갈까 고민했지만 사고가 날 수 있으므로 걷거나 뛰지 말라는 경고 표지판을 보곤 고민을 물렀다.

"아, 그거 안 됐네요. 인터넷 구직 사이트 중에 정말 괜찮은 곳이 있는데 그게……."
"아니 아니 아니, 어디까지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야."
"저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갑자기 존댓말? 존댓말은 됐어. 편하게 말해."
"으윽."
안즈는 신음하며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로 옮겨탔다.

집에 가고 싶어, 제발 말 걸지 말고 입 좀 다물어줘. 안즈는 말을 삼켰다. 이 말을 입에 올리면 칼로리가 굉장히 많이 소비될 걸 뻔히 알고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집에 갈 때까지 체력을 아끼고 싶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리면 그만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실패하면 그만둘 거야."
"저기 그럼 지금 회사에 가서 업무를 봐야 하지 않을까? 그만두려는 게 아니면……."
청년은 대답 대신 양복 상의에서 명함을 꺼내 안즈에게 건넸다.

"346 프로덕션……? 아이돌 프로듀서?"
"응, 그런 일을 하고 있어."
"와아- 대단하다- 예능 업계인이구나- 굉장하네-"
"그렇게 수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잖아?"
"어라, 티가 많이 났어?"
안즈는 속내를 숨기지 않은 채로 미심쩍은 눈길로 명함을 뒤집고 또 뒤집으며 살펴봤다.

"346 프로덕션이라면 꽤 대기업이잖아? 그런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 시간에 게임을 사러 왔어?"
"응, 엄청나게 하고 싶었거든."
"잘려도 할 말 없겠다……."
"그렇지? 아니 그런 마인드로 왔거든. 잘려도 상관없어. 아~ 일하기 싫다~ 근데 그게 지금 바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도박을 걸고 싶어졌거든."
"파칭코 게임장은 지하에 있어."
"파칭코는 별로 안 좋아해. 왠지 모르게 갑갑한 느낌이라서."
3층까진 아직 멀었다. 안즈는 먼곳에 있는 전망대를 응시하듯 3층 바닥을 바라봤다.

"내가 하고 싶은 도박은 진짜 도박이 아니라, 지금 하는 거야."
"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안즈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스카우트하는 거야?"
"응, 그런데?"
"아이돌을 하라고?"
잠시 정적. 둘은 이윽고 3층에 도달했고 2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무리야. 아이돌은 힘들지? 춤추고 노래 부르고 방송에 나오고 오지탐험도 하고 힘들잖아. 체력 소모가 엄청나잖아."
"오지탐험은 딱히 보낼 생각은 없지만 하고 싶으면 넣어볼게."
"아니, 필요 없어. 저기, 안즈가 어디서 노래 부르고 춤출 사람으로 보여? 안즈는 활력형 인간이 아니야. 안즈에겐 충전 배터리따윈 없다고. 집 구석에서 플러그를 꽂고 전기를 공급받아야 하는 인간이란 말이야."
"하지만 게임 사러 나왔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안즈한테는 무리야."
"이름이 안즈구나. 좋네. 만약 아이돌이 된다면 예명은 필요 없겠어."
안즈의 머리에 슬슬 열이 올랐다. 참새 눈물만큼 남아있던 에너지가 증발하면서 안즈의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다.

"그런 거 무리라니까. 애초에 뭐에 열심히 힘쓰는 걸 좋아하지 않아. 이왕 일할 거면 저투자 고수익이 좋아."
"저투자 고수익이라……. 사람은 말이지 어지간하면 일하는 시간이 인생에서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 마련이야."
프로듀서는 그렇게 말하며 하품을 했다.

"아, 이거 실례. 졸려서. 어제 밤을 샜거든."
"거 봐, 일을 하면……."
"디지몬 월드 리디지타이즈 디코드 2회차를 도느라……."
"아, 그래."
평소라면 공감했을 이야기지만. 안즈는 혀를 찼다. 동시에 사회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렇겠거니, 하고 어렴풋이 생각하며 등에 돋는 소름을 느꼈다.

"너는 식탁에 맛있는 음식이랑 그저 그런 음식이 있을 때 어느 걸 먼저 먹어?"
"그야 그저 그런 걸 먼저 먹고 맛있는 걸 나중에 먹지."
"힘든 일이랑 편한 일 둘 다 있을 때, 이 두 일을 다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걸 먼저 처리할 거야?"
"둘 다 하기 싫지만……. 힘든 일부터 처리하고 편한 일을 설렁설렁 하는 게 낫겠지……."
프로듀서는 안즈가 깜짝 놀랄 정도로 손바닥을 크게 쳤다.

"바로 그거야! 힘든 일을 먼저 넘기는 게 중요해! 사람의 인생마다 일해야 할 분량은 대개 정해져 있어. 사람마다 양은 다르지만, 사람마다 절대량이 존재한단 말이지. 그래서 사람들은 젊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악착같이 사는 거야."
"그런 건 귀찮아……. 될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좋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사람은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니까.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일단 논외. 아무튼 돈을 많이 벌어두고, 그걸 소비만 하면서 보내는 인생도 있단 이야기지."
"남은 인생을 놀고먹으며 보낼 정도로 돈을 많이 버는 것 자체가 힘들잖아? 사람은 의외로 살면서 많은 돈을 쓰게 되니까. 그만큼 버는 건 힘들어. 그리고 그만큼 벌기까지의 과정이 힘들잖아."
"아니, 가능해. 아이돌은 그게 돼."
아직 2층까진 멀었다.

그래도 이제 조금만 남았으니 조금 남은 김에 이야기나 들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안즈는 프로듀서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대박을 터트리면 돼. 노래 하나 대박 나면 인세가 어마어마하다고. 대박 하나만 터트리면 엄청난 이익이 돌아와. 정말 잘 나가는 아이돌은 연봉이 얼마인지 알아?"
"어, 얼마인데?"
"수천만엔 씩 번다."
"수, 수천만엔……. 1년에……."
"이게 바로 저투자 고수익 아니고 뭐겠어?"
"듣고 보니 그렇네……. 으응, 그래, 나쁘지 않아……. 앗! 잠깐만, 잘 나간다는 보장이 없잖아! 속을 뻔했어."
"아깝다. 조금만 더 했으면 됐는데……."
프로듀서는 혀를 차고 안즈는 신음한다.

"뭐, 나는 일단 너를 그렇게 만들 생각이야. 그렇게 하고 싶어. 널 마지막으로 도박을 걸고 싶어. 네가 거절하면 난 일을 그만둘 거야.너를 설득하지 못할 정도라면 내 재능과 기량은 여기서 끝날 정도라는 거지."
"왜 나야? 그런 중요한 결정을 왜 안즈를 기준으로 한 거야?"
"원래는 그냥 그만두려고 했는데 우연히 널 보고 정했어. 지금 넌 내 희망이야."
"영문을 모르겠어……. 안즈는 그런 대단한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럼 어떤 일을 하고 싶은데?"
프로듀서는 그렇게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나긋나긋했지만 안즈에겐 프로듀서의 말이 차갑게 들렸다.

프로듀서의 말이 안즈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틈새를 사정없이 벌리곤, 안즈의 내부에 머리를 내다 꽂았다.

비수를 꽂듯이.

넌 어떤 일을 하고 싶니?

그 말은 귓가에서 울리는 것보다 더 가깝게 안즈의 내부로 파고들었다.

"모르겠어."
"그렇구나. 좋아하는 일은 있어?"
"집에 틀어박혀서 게임 하는 거."
"밤새 게임하는 스타일이야?"
"그럴 때도 있지……."
"긍정적이야! 집중력이 있구나!"
"버튼을 두들기기만 하는 일인걸……."
"그 버튼을 두들기는 일을 끈기있게 한다는 점이 중요해."
프로듀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미 안즈의 머리는 피로에 절어서, 당분을 요구한다. 안즈는 지금 당장 입안에 콜라를 쏟아붓거나 사탕을 가득 쑤셔 넣고 싶어졌다.

왜 이렇게 갑자기 피로가 절정에 달한 걸까?
글쎄? 그야, 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피로해지지.

안즈는 속으로 그렇게 자문자답했다.
안즈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에스컬레이터 난간에 팔을 올렸다. 이윽고 안즈의 머리가 팔에 묻혔다.

"미안, 이제 여기까지만 하자. 힘들어."
"나야말로 미안해.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겠지. 미안, 내가 너무 제멋대로였어. 생면부지 사람이 도박용으로 말을 건 것부터가 무례한 행위였고. 역시 도박 같은 건 하면 안 되는 거였어."
둘은 1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로 갈아탔고, 에스컬레이터는 순조롭게 1층까지 둘을 운반했다.

"잠깐, 이야기 들어준 답례……라고 해야 하나, 사과라고 해야 하나. 이거 줄게."
프로듀서는 안즈에게 비닐 봉투를 건넸다. 게임샵에서 프로듀서가 사온 물건이었다.
"재밌게 해라."
프로듀서는 손을 가볍게 흔들곤 안즈보다 더 빠르게 걸어 백화점 밖으로 나갔다.

맨션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안즈는 기계적으로 문을 잠그곤 벽에 기댄 채로 미끄러지며 현관에 그대로 엎어졌다.

방전이다. 배터리 잔량이 없다.

안즈가 쓰러지며 게임샵 봉투에서 내용물이 삐져나와 바닥에 쏟아졌다.
게임 하나와 사탕 몇 개.
게임은 오늘 발매한 PS비타 전용 소프트, 디지몬 스토리 사이버 슬루스. 게다가 아구몬(흑)과 가부몬(흑)이 특전으로 따라오는 초회한정판.

안즈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탕을 집었다.
포장을 까고 사탕을 입에 넣었다. 사탕의 열량이 혀를 통해 안즈의 온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안즈 혼자 있는 집안에서 오직 안즈가 사탕을 굴리는 소리만이 조용하게 퍼져나갔다.
집에 누가 있었다면 안즈를 꾸짖었을 테지만, 그럴 사람은 이 집에 없다. 아무도 없다.

오직 안즈만이 정적 속에서 사탕을 굴린다.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고? 몰라."
정말 오랜만에 그런 소리를 들었다.
부모에게 들은 이후로 얼마 만이지…….

마지막으로 들은 게 안즈가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이 맨션으로 오게 되었을 때였으니까…….
안즈는 우선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발을 툭툭 털며 난폭하게 신발을 벗었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게임 패키지와 사탕 몇 개를 집어 들곤 거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안즈는 몸을 뒤척이며 게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게임은 여전히 하고 싶었지만, 뜯고 싶은 의욕이 안 들었다. 게임은 나중에 하자. 안즈는 그렇게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겨 정신을 점점 더 아래로 빠트렸다.

-넌 대체 어떤 일이 하고 싶니?
-안즈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재능을 썩힐 셈이냐!
-아, 아니야. 그런 게…….
-넌 재능이 있는 인간이야! 없는 인간들하곤 달라!
-하지만 안즈는…….
-넌 우리의 최고 걸작이야, 어중이떠중이들의 양산품하곤 질이 다르잖니!
-아, 안즈도 다른 애들처럼…….
-약한 소리 하지 마!
-안즈는 좀 더 생각하고 싶어!
-넌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여유? 그런 걸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한정됐어!
-아, 안즈의 이야기를 들어줘…….
-듣기 싫어! 그렇게 재능을 썩히기만 할 거면 나가라! 나가서 살아있는 시체나 되어라!

배가 고파서 눈이 뜨였다.

안즈는 거실 시계를 봤다. 어둠 속에서 야광 분침과 야광 초침이 오후 9시 15분을 가리켰다.
일반 음식점이나 배달 요리점도 다 문을 닫은 시간이다. 편의점은 아직 열었겠지만.

안즈는 형광등을 켜고 냉장고를 열었다. 음료수와 푸딩 같은 디저트 외엔 먹을 만한 게 없다.
찬장을 뒤져봤으나 마찬가지로 과자류만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식사를 과자로 때웠겠지만 묘하게 제대로 된 식사가 하고 싶어졌다.

싱크대 서랍을 뒤져보니 칼로리 바란스가 나왔다.
제대로 된 식사랑은 거리가 멀지만 다른 것보단 낫겠지. 안즈는 칼로리 바란스를 한입 베어 물었다.

"우웩."
놀라울 정도로 맛없어서 뱉었다.
기간 한정 참치회맛.

"이런 걸 재미로 사뒀구나. 미쳤어. 정말……."
칼로리 바란스는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안즈는 결국 다시 소파에 돌아와 털썩 앉았다. 엉덩이에 깔린 사탕을 다시 줍고 사탕 봉지를 까서 입에 털어놓았다. 배가 고파서 사탕을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사탕이 금방 바닥났다.

안즈의 발치에 디지몬 스토리 사이버 슬루스가 보였다. 하지만 안즈는 게임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저 보기만 할 뿐.
하고 싶지만, 손을 대지 않는다.
하고 싶지만.

"난, 안즈는, 뭘 하고 싶은 걸까."
혼자 중얼거린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안즈는 아까 받은 명함을 봤다. 346 프로덕션 사내 번호와 프로듀서 개인 연락 번호에 눈이 간다.

"당신은, 안즈가 뭘 하고 싶은지 알려줄 수 있어?"
안즈는 핸드폰에 프로듀서의 개인 번호를 입력했다.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의 음악으로 설정된 짧은 대기음이 울렸다. 안즈는 목이 타는 걸 느꼈지만 그냥 그 자리에서 통화가 연결되기만을 기다렸다.

-여보세요?
"아, 저기……."
-아, 안즈 쨩이구나! 목소리는……. 어디 안 좋아? 감기 걸렸어?
"조금 전까지 자다 일어나서 그래. 지금……. 바빠?"
-아니, 엄청나게 한가해. 장난 아니야.
"그래? 그럼 상담 좀 해줄 수 있어?"
-응,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범위에서……. 음, 음, 잠깐만, 음, 역시 말이야.
안즈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안 되겠네.
"아……. 역시……. 무리?"
-아니, 중요한 일이지? 괜찮으면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자.
"이 시간에?!"
-그도 그렇군. 역시 이 시간은 힘든가? 하긴 이런 늦은 시간에 여자애한테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 건 좀 위험하겠지……. 그럼 내일…….
"아니, 괜찮아. 나갈게."
-흠 그럼 장소는 내가 정해도 돼? 아는 공원이 있어. 파출소 옆에 바로 딱 달라붙어 있어서 불안하진 않을 거야. 아니면 맥도날드나 넷 카페에서 만날까?
"공원이면 돼. 너무 먼 곳이면 가기 힘들지만."
다행히 프로듀서가 지정한 공원은 맨션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핸드폰으로 찾아보니 도보로 12분 걸리는 거리였다.

"그럼 50분까지 갈게."
-그래, 조심해서 오고.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같이 올 만한 사람 있으면 같이…….
"없어."
-그럼 부모님은?
"없어."
-그래, 알았어. 그럼 50분에 보자.
안즈는 전화를 끊었다.

3월은 봄의 프롤로그지만 겨울의 에필로그이기도 하다. 밤이 되면 여전히 쌀쌀하다.
밖으로 나온 자를 배척하는 것처럼 쌀쌀한 바람이 안즈를 세차게 후려친다.
바람막이 재킷이 그런 심술궂은 바람을 물리친다. 얼굴은 커버하지 못하지만.

안즈는 손을 모아 얼굴을 녹이면서 15분 걸었다. 프로듀서가 말한 공원이 보인다. 약속 장소인 입구 앞 벤치에 프로듀서의 모습이 보였다. 프로듀서는 여전히 정장 차림으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안즈의 기척을 감지한 프로듀서는 게임을 껐다.

"뭐 하고 있었어?"
"소닉2 HD 리마스터. 고전이지만 여전히 재밌어. 터치라서 힘든 걸 빼면. 플레이 스토어에 있으니까 흥미 있으면 다운받아 봐."
"흥미 생기면 그럴게."
"아, 맞아. 사이버 슬루스 해야지? 참, 사이버 슬루스 클리어하고 나서 여유 되면 해."
"아직 안 뜯었어."
안즈는 게임샵 봉투를 내밀었다.

"왜?"
프로듀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돌려줄게. 사탕은 먹었지만."
안즈는 그대로 봉투를 밀듯이 프로듀서에게 건넸다.

"그래, 흠……. 그래도 사탕은 먹었네? 다 먹었어?"
"응, 다 먹었어."
"좋아, 잘했어. 이따가 잘 때 이 닦는 거 잊지 말고."
"안즈가 동안이긴 하지만……. 애 취급 하지 마……. 알아서 하니까……."
"그래? 어른인 나도 어쩌~다 한 번씩 이 닦고 자는 걸 잊어버리거든. 뭐 그건 그렇고, 상담하고 싶은 게 뭐야?"
둘은 벤치에 앉았다.

"안즈 말이지……. 니트야……."
"응, 그럴 것 같더라."
"안즈는……. 안즈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안즈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많이 생각해봤어?"
"아니."
"그럼 많이 생각하도록 해. 넌 아직 어리잖아.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너무 초조해 하지 말고 다른 애들처럼 충분히 생각하도록 해. 성인이 될 때까지 말이야."
안즈는 잠시 침묵했다. 프로듀서는 고개를 올려 별을 세면서, 안즈가 침묵을 풀길 천천히 기다렸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
"그래? 누구나 할 수 있는 값싼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안즈한테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
"이젠 내가 말해줬어. 그걸로 됐잖아? 앞으로 잔뜩, 들으면 돼. 듣고 싶어지면 언제든 말해. 또 말해줄 테니까."
프로듀서는 그렇게 말했다가
"아, 그래도 언제든지는 힘들겠다. 언제까지고 생각만 할 순 없으니까. 흔히들 젊을 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그 가능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줄어들거든."
말을 묘하게 정정했다.

"프로듀서는……."
안즈는 그렇게 운을 뗐다. 조금 전보다 더 갈라진 목소리였다.

"안즈가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어?"
"아니, 그건 몰라. 그건 네가 찾아야지. 네가 생각해서 하고 싶은 걸 찾아야지. 넌 누가 깔아준 레일을 타고 싶어? 그런 스타일이야?"
안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선택지 나왔네. 네가 찾는 수밖에 없어.“
안즈는 웃었다. 목소리가 생기를 조금 찾았다.

"그래, 맞는 말이네. 당신은 재미있는 어른이야."
"그냥 입만 산 사람이야. 난 딱히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니거든. 애초에 일을 그만둔다면서 너한테 압박감을 줬으니까. 나쁜 놈이지. 넌 날 욕해도 돼."
"못 들은 거로 칠게."
안즈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둠에 잠겨있던 안즈의 얼굴이 다시 가로등 빛을 받았다. 안즈의 코끝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안즈는 코를 삼키곤 말을 꺼냈다.

"나를 스카우트한 이유가 뭐야?"
"얼굴이 새파랬으니까. 줄 한가운데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지. 어디로 튈지 몰라서 흥미가 생겼거든. 그러니까 도박으로 걸어본 거야."
"뭐야 그런 이유였구나……."
"하지만, 정말 눈을 뗄 수 없었어. 그러는 것만으로도 눈을 뗄 수 없었단 말이지. 그게 널 고른 이유야."
"정말 아리송한 이유네."
"원래 감이란 건 대체로 그런 거야."
안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제자리에서 빙글 돌다가 조금 비틀거리며 멈춰 섰다.

"어때?"
"연습 좀 해야겠는걸."
"가차 없네……."
"뭐 연습하면 되는 문제야. 연습하면. 노력하면."
"으윽, 노력 말이지……."
"뭐 네가 좋아하는 저투자 고수익이야. 세상에 투자가 제로인 건 없어."
"안즈가 잘 나가는 아이돌이 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있어. 너라면 톱 아이돌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잘만 갈고 닦으면. 넌 원석이야.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흐응, 그럼 해볼까. 아이돌. 우선 아이돌 하면서 천천히 생각해볼래!"
"그렇구나, 그것도 좋겠어! 응원할게! 열심히 해!"
"헤헤, 고마……워?"
안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남 일처럼 말하는 거지?

"저기, 프로듀서가 날 스카우트해서……. 날 프로듀스하는 게 아니었어?"
"아, 그거 무리야. 아까 사표 냈거든."
아, 그렇군. 사표 냈구나. 그만뒀으면 어쩔 수 없지.
안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이해하고 나서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동그랗고 크게 떴다.

"뭐?! 농담이지?!"
"아니, 아까 냈거든. 아직 수리는 안 됐겠지만."
"그, 그럼 왜 상담을 받아준 건데?! 스카우트하려던 게 아니었어?"
"아니야. 그냥 목소리가 심각해 보여서. 고민이 있나 해서."
프로듀서는 안즈의 말을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다.

"저, 저기 있지……. 그럼 나는……."
“오디션 보는 게 어때? 당장 너를 프로듀스하고 싶지만, 이미 단호하게 사표를 낸 후라서 말이야. 철회하러 가기도 좀 그렇고.”
안즈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벤치에 상체만 걸친 채로 바닥에 무릎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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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 귀여워요 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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