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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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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16, 2016 01:28에 작성됨.

최악이다.

 

정말 최악이야.

 

잠들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뒤척거렸다.하루라도 빨리 무너진 컨디션을 회복해야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숨을 차분하게 쉬려 애를 써도 잘 되지않았다.

 

최악이다.

 

저 멀리 꿈의 저편으로 의식을 가라앉히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않는다. 짜증이 치솟았다. 이 이상 억지로 잠을 청해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하아.....”

 

힘이 잘 들어가지않는 팔로 스스로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불덩이 같다. 이럴 때는 푹 쉬는 게 제일, 이다만 그럴 수 없다. 화가 머리 끝까지 솟았다. 기분 나빠. 짜증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울렁거린다.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아. 몸 전체를 집어삼킬듯이 넘실거리는 불쾌감에 시달리는 와중에, 불현듯이 떠오르는 어느 한 사람의 이름.

 

"사노, 미코코로......"

 

돌연 오디션에 모습을 나타낸 실력자. 아이돌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수수한 겉모습 때문인지 처음에는 다들 별 볼일없는 사람으로 생각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입을 열고 노래를 시작한 순간.....현장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방심한 마음이 통째로 얼어붙었다. 다른 건 몰라도 노래 하나는 대단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오디션을 통과했다. 하아, 정말이지.....바보같은 모습이었어 그 심사위원. 모든 노래가 질렸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턱을 괴다가 그 녀석의 노래가 터져나오는 순간 두 눈을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는 꼴이라니.

 

저 정도 수준의 녀석이라면 우리 사무소의 치하야하고도 비견될 정도. 속으로 그렇게 판단을 내린 나는, 무척이나 긴장했었다. 참 한심한 이야기이지만 내 아이돌 랭크는 D.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사무소에서 날고기는 다른 녀석들과 비교하자면 더더욱. 그런데, 저런 거물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순간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별로 신이라는 걸 믿거나 하지는 않지만.....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무척이나 심술궂은 존재일 것이다. 나는 난데없이 나타난 높디 높은 허들과 대면하면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반드시 뛰어넘어주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던 것이다. 노리는 것은 정점. 그 어떤 난관이 이 이오리님을 가로막는다해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설사 뛰어넘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져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장래의 슈퍼 아이돌인 미나세 이오리는 이런 데에서 무너질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째서. 상황은 내가 예상하지도 못한 쪽으로 변하고 말았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노래 하나로 깨부수고 바로 내 코 앞까지 다가온 그 녀석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독보적인 위치를 달리던 그 녀석이 사라진만큼 오디션은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의 도토리 키재기였고, 그나마 가장 위로 튀어나온 내가 오디션에 합격했다.

 

“으읏.....”

 

바보 멍청이 프로듀서는 속도 모르고 합격한 나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정작 나는 피가 싹 식는 기분이었다. 왜 그 녀석이 사라진 걸까. 무슨 사정이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변덕이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이어진 끝에 다음과 같은 추론이 저절로 떠오르고 말았다.

 

어쩌면 나한테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그도 그럴게.....나는 그 때 안심하고 말았다. 사노 미코코로가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최악이었다. 나라고 하는 사람은.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큰 장벽이라도 넘어도, 넘지 못해도 당당하게 맞서겠다는 결심은 어디로 갖다버리고. 그저 눈 앞의 승리에만 안주하는 나 자신은.....스스로 보기에도 너무나도 한심했다.

 

미나세 이오리는 겨우 이 정도밖에 안되는 사람이었어?

 

아니다. 그렇지 않아.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했다. 그래서 움직였다. 연습의 양을 크게 늘렸다. 실력이 부족하다면, 늘리면 그만 아니겠어! 그렇게, 때가 타고 비뚤어지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마음을 뒤늦게나마 잘라내려고 했다. 하지만 뭐야. 난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으흑, 우우......흐아앙......."

 

화가 났다. 화가 난다. 불쾌해. 기분 나빠. 나라고 하는 모든 것이, 전부가!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란 말이야.....가득 흘러넘쳐오는 눈물을 닦아낼 기력도 없다. 구겨진 시트가 방울 방울 젖어간다. 그렇게 나 말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한참 울고 있을 쯔음.....

 

똑, 똑

 

"크흥, 흑, 후윽......킁, 우으.....어.....?"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도인가? 아무리 신도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흉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서 티슈를 급하게 찾아 닦아냈다. 하아, 그래도 이 붉게 물든 코와 핏발 선 눈은 감출 길이 없구나. 선반에 놓인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누가 봐도 얘 펑펑 울었구나 확신할 그런 얼굴이었다.

 

".....됐어, 오지마. 나중에 필요하면 부를테니까."

 

안돼, 역시 누구 봤다간 큰 일 날 것만 같아. 목소리에서부터 울었다는 게 티가 나겠지만, 그래도 모습까지 보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신도라면 적당히 모른 척해주며 복도로 발걸음을 옮겨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작게 덜컥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 오지 말라고 했잖아!"

 

뭐, 뭐야. 왜 그러는 거야!? 신도! 너 이러는 사람 아니었잖아! 대체 왜.....

 

끼이익-

 

내 제지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방문을 열어재낀 사람은, 신도가 아니었다. 그 나이대로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통 키의, 검은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소 답답함이 올라오는 얼빵한 인상의 안경남자. 그가 멋쩍은 듯 뒷통수에 손을 가져다면서도 점점 이 쪽으로 걸어왔다.

 

"글쎄, 네 잔뜩 쉰 목소리를 들었더니 그냥은 못 지나가서......"

 

"너, 너, 너어!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그거야 병문안으로 왔지. 음, 연락도 없이 불쑥 온 건 역시 너무 갑작스러웠으려나."

 

"당연하잖아 이 바보야! 올 거면 미리 전화라도 해!"

 

"하하하, 맞아. 그게 예의지. 하지만 그랬다간 넌 절대 오지 말라고 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었어."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흘리면서 그가 이 쪽에 좀 더 가까이 붙었다.

 

"괜찮다면 여기 좀 있다 가도 될까?"

 

"......마음대로 해."

 

이미 들어와버린 사람을 내쫒기는 좀 뭐했다. 그가, 프로듀서가 침대의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러고는 파자마차림의 나를, 너무 많이 울어서 엉망이 된 나를 바라본다. 걱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많이 아팠나보네."

 

"별로."

 

"그러면 왜 울었는지 이유를 알려줄 수 있을까?"

 

말투는 부드럽고, 잔잔한 미소를 띄고 있다.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책망하는 것도 아니고, 집요하게 캐묻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완고하다. 이 남자는 꽤 오랜 시간을 저 태도로 버틸 수 있다. 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참, 쓸데없이 참을성이 대단한 녀석. 하긴, 저런 성격이 아니었으면 나같은 성질 급한 애를 어떻게 지금까지 맡을 수 있겠어.

 

"그냥, 나 자신이 분해서 견딜 수 없었어."

 

"분하다니.....왜? 전에 오디션만 해도 합격했잖아."

 

"하아, 넌 아무 것도 몰라."

 

가장 최저의 부분만 던져주고 끝내야지 생각했는데, 저 녀석의 아둔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보고있자니 새롭게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다. 결국 속에만 담아둬야지하는 것마저 술술 이야기하고 만 나. 그렇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야 저 녀석의 죽은 생선같은 눈에 빛이 감돌았다.

 

"......그랬구나."

 

"응. 이제 알겠어? 내가 얼마나 한심한지. 만족했으면 저리 가봐. 지쳤으니까."

 

"아니, 이오리는 절대 한심하지 않아."

 

"무슨 소리하는 거야."

 

설마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이야기해줘야하나.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싶은 심정에 휩싸이고 있을 때 멍청한 프로듀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건데.....이오리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것 같아."

 

"그럴 리가."

 

"아니, 엄격해. 미키 녀석처럼 너무 풀어질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어깨에 힘 좀 빼라고."

 

"왜 갑자기 그 녀석의 이름을 거론하는 건데."

 

"정 반대의 예시를 들고자 그랬을 뿐이야. 하여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프로듀서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럴 수도 있다니, 뭐가."

 

"사람은 언제나 강하지만은 않다는 거지."

 

그가 작게 손짓한다. 자기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붙을 수 없겠냐는 의미다. 어쩔까. 잠깐 고민하던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기로 했다.

 

"그건 그렇네. 지금의 난, 너무나도 약해."

 

"아니.....이오리는 충분히 강해."

 

"이봐, 너. 빙빙 돌리지 말고....좀 더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을래."

 

평소라면 적당히 넘어갈 것도 지금은 짜증이 나려고 한다. 당장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참아내며 요구사항을 내밀자, 프로듀서는 잠깐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한 생각을 해. 그리고 대부분 거기서 멈춰서고 말지. 부끄럽지만 나도 그런 적이 꽤 많아."

 

학창 시절만 해도 말이지, 시험을 볼 때 한 사람이 아파서 결석하거나 그러면 이걸로 내 등수가 조금은 올라갔겠구나 하고 기뻐하고 그랬어. 참 속물같은 생각이지. 묻지도 않았는데 한참 자기 경험을 주절거리던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지은 체 내게 좀 더 다가왔다.

 

"하지만 넌 달라. 안도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다음에 만나면 어떻게든 대적해보려고 하잖아. 그러니까 강해."

 

프로듀서가 내 손을 꼭 붙들었다.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넌 충분히 노력했어. 그러니까 지금은 마음 놓고 쉬어둬."

 

"......."

 

"지금처럼 무리했다간 나중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전력을 다하지 못할 거 아니야. 그러면 억울해서 못 견딜걸?"

 

하인 주제에 어린애를 타이르는 것마냥 굴고.....건방지네. 요즘 너무 많이 봐줬나? 에휴, 됐어. 오늘만큼은 봐줄게. 지쳤으니까. 하인의 별 거 아닌 듯한 목소리도 때로는 귀담아들어줘야지. 그것도 윗사람으로서 중요한 덕목이니까.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그러니까 이 손 놓고, 돌아가. 잘 거야."

 

......

 

그 뒤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나는 프로듀서 말대로 무리하지 않고 차근차근 실력을 키우고, 들어온 일을 척척 해내면서 랭크를 B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 녀석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기본 중에 기본이니까 그렇게 감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 그것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지난 날의 내가 너무나도 미숙했다는 건 부끄럽지만, 인정한다.

 

이 정도 랭크면 꽤 팔린다고 자부할 만하다. 허나 아직 많이 부족하다. 사무소에 왔다하면 소파에 몸을 맡기는 그 녀석만 해도 랭크가 A다. 다른 사무소에도 나보다 랭크가 높은 이들이 천지.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안달복달은 더더욱 금물이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이오리님은 반드시 정점에 오를테니까.

 

그렇게 마음 먹으며 각종 오디션에 몸을 던져보는 나날이었다. 오늘도 어느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나는, 잠깐 프로듀서와 떨어진 체 회장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때, 눈 앞에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저 사람 봐, 랭크가 꽤 낮아보이는데......왜 여기까지 온거지?"

 

"D랭크 주제에 이런 데를 잘도 도전하는구나. 배짱 좋네. 생긴 건 얌전하게 생겨가지고."

 

굳이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려오는 각종 험담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팍 상해 자리를 비키려고 했지만, 그 비난들 속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대상을 잡아냈다.

 

"나중에 털리고 울지나 말라 그래."

 

"아하하, 글쎄~ 저런 애는 자기가 왜 떨어졌는 지도 모를 걸."

 

그래, 저기 있다. 비웃음과 의문의 틈바구니 속에서 마침내 발견했다. 그 사람을. 이제서야! 이 날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던가.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으음.....이번 오디션은 분위기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 같....."

 

"당신이 사노 미코코로? 만나서 반가워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 실례지만.....당신은 누구신가요?"

 

살짝 구불거리는 단발머리에 촌스러운 안경. 전체적으로 순한 인상의 그녀는 자기보다도 키가 작은 내게 예의바르게 고개 숙였다. 정말 긴장감이라곤 요만큼도 없어보인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저 맹한 모습 뒤에 숨겨진 엄청난 실력을.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이길 자신은 없다.

 

하지만.....이렇게 다시 만난 만큼 절대로 못 보내줘. 뭐가 되었던 간에, 승부야.

 

"저는, 미나세 이오리라고 해요. 이번 오디션, 서로 최선을 다해보자고요."

 

니히힛, 잘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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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 미코코로는 원작 게임(아케이드)부터 등장한 npc로 오디션에 종종 참가해 플레이어 측의 유닛과 대결한다고 합니다. 릴레이션즈 코믹스에서도 나왔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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