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12-

댓글: 0 / 조회: 1671 / 추천: 0


관련링크


본문 - 10-28, 2012 12:27에 작성됨.

765 프로덕션의 아이돌들이 깜짝 치어걸이 되었던 그날 이후.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끝내기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기록한 그 경기는 일주일 후에 케이블 TV에 방송이 되었다. 하지만 내 우려와는 달리 방송의 여파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애초에 그 다큐의 포커스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날 상대팀에 중점적으로 맞춰져 있는데다, 30분 정도의 분량 중 내가 나온 장면은 끝내기 인사이드 파크 홈런과 그 이후 씁쓸히 퇴장하는 상대팀 선수들 뒤에서 축하를 빙자한 폭행을 당하는 장면뿐이었다.
그래도 볼 사람은 다 본 모양인지, 그 날 이후 몇몇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오긴 했다. 거기서 그러고 있으려고 은퇴했냐는 쓴 소리도 들었지만, 내가 은퇴 이후 얼마나 움츠리고 살았는지 알던 녀석들은 대부분 오랜만에 내 활기찬 모습을 보게 돼서 좋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분명히 그동안 날 물어뜯던 녀석들 중에 그 방송을 본 녀석들도 있겠지. 흥. 그치들이 뭐라고 발광하던 내가 알 게 뭐냐. 놈들이 직접 날 찾아오지 않는 이상은 내가 그걸 알 방법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이젠 뭐 초탈했다고 할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까.

주 취재 팀의 상대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 이후 우리 팀은 오히려 인기가 더 많아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게 다 내 극적인 끝내기 덕분이긴 하다만, 아니. 내 자랑이 아니라 확실히 나를 보러 온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 연고지 프로팀은 마코토의 말대로 나에게 농락당하다시피 하던 팀이었기 때문에, 내가 은퇴한 이후 서로의 승률을 엇비슷하게 맞출 수 있어서 내가 은퇴한 것에 대해 환영하는 사람이 있으면 있었지 분노하는 사람은 없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이를 악물고 홈으로 질주하는 것을 보고 나에 대한 평가를 약간 올려준 사람도 몇몇 있는 것 같았다.
팀원들 역시 나를 조금 더 인정해주게 되었다. 물론 그들에게 가장 먼저 받은 질문은 ‘쟤네들이 대체 누구냐.’라는 거였지만, 대충 얼버무렸다. 아는 아이돌이라고. 대체 ‘아는 아이돌’로 어떻게 납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대충 내가 프로 시절에 어떻게 연줄이 닿은 아이돌들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TV에서 본 적 없는데?’라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한 팀원들도 있었지만. 그녀들이 들었으면 슬퍼했겠지.

이렇게 되고 나니 이제 내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몸. 사릴 이유가 없다. 라고. 그전까지 남의 눈에 뜨이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왔던 나는, 그때의 그 사건으로 인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신경 안 쓰고 살 테다! 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날 옭아매고 있던 무언가를 벗어버렸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자포자기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나의 이런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765 프로덕션의 아이돌들 역시 그날 이후로 인지도가 약간은 오른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아미와 마미의 말을 빌리면 ‘아주아주아주 약간’이었다지만. 아직 무명 프로덕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그 일로 나와 765 프로덕션은 좀 더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이젠 내가 자청해서 비는 시간에 멀리 나가는 녀석들을 픽업해주는 일까지 하고 있다. 고교 이후로 처음 보는 치어걸이었고, 그런 보답을 받았으면 뭐라도 해주는 게 정상 아닐는지. 결과적으로는 내 생활마저 바꿔주었으니까.
그래도 프로듀서는 하기 싫다. 귀찮아. 솔직히 픽업해주는 것도 치어걸이 아니었더라면 생각조차 안했을 일이다.



방송이 나온 지 닷새가 지난 어느 휴일.

본격적인 여름방학 시즌에, 본격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가 되었다. 전자는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후자는 관련이 있다. 뭐. 결론은 덥다는 거다. 엄청.

“덥네요. 무지하게.”

“그러게 말여. 감독님도 그래서 오늘은 오전으로 시간을 땡겼다는디.”

“…투수가 더 더울까요. 타자가 더 더울까요.”

“그걸 질문이라고 허냐. 당연히 투수제.”

“타자죠. 헬멧 얼마나 더운데요.”

“그래도 투수만 하것냐. 계속 공 던지면 어깨가 얼마나 뜨거워지는데.”

“뜨거운 거랑 더운 거랑 같나요.”

“그리고 타자들은 시원하잖냐. 붕붕 선풍기질이나 허고 자빠졌는디.”

“…선풍기질이라뇨. 그렇게 치면 그 바람을 맞는 건 투수잖아요. 투수가 더 시원하겠네.”

“라파알-! 이 자식 배팅할 차롄데 어디 갔어?”

“얼레. 벌써 내 차롄가. 그럼 아저씨. 선풍기질이나 하고 오겠슴다.”

“다녀온나.”

이 팀에서 하는 야구도 조금은 의욕이 생겨, 그 날 이후 있었던 5경기에서 내 타율은 30타수 12안타 1홈런. 4할을 넘기는 기록을 마크했다. 수비보다 공격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아마추어 야구에서 5경기 4할은 그렇게까지 좋은 기록은 아니지만, 그래도 2할을 설설 기던 그때에 비하면 괄목상대할만한(내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기록이다. 아직 칠 때 안칠 때를 일부러 가리는 건 변함없지만 말이다. 적어도 예전보단 칠 생각이 들 때가 많아졌다고 할까.

그런 이유로 연습 때도 조금 더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역시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조금 더 신경을 쓰게 된다고 할까. 

“라팔이 이놈. 요즘 확실히 좋아졌어. 슬슬 예전의 감각이 돌아오는 게냐? 응?”

내가 쳐내는 타구의 방향을 유심히 지켜보던 감독님이 씩 웃으시며 말했다. 아직 사실을 말할 수 없는 난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놈아. 진즉에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니가 시즌 시작부터 이랬으면 우린 지금 우승권이다.”

내 차례가 끝났음을 확인하고, 배팅볼 투수에게 손을 들어 보인 후, 나는 배터박스를 나오며 감독님께 웃으며 말했다.

“야구에 만약이란 없습니다. 만약이라는 걸 붙이면 다 우승하죠.”

엉덩이를 호되게 걷어차였다. 지금까지 맞은 킥 중에 가장 아픈 것이었다.



“…더럽게 아팠다니까.”

“아하하! 하여튼 아저씨는 말을 되는대로 내뱉는 성향이 있는 거야.”

“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듣고 싶진 않거든.”

“응? 미키는 최대한 말 가려서 한다고 생각해.”

“그게 가려서 하는 거면, 마음먹고 내뱉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게 더 궁금하네.”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도착해 씻고 점심 먹고 살짝 눈 좀 붙였다가 수영장에 있는 미키와 하루카를 사무소로 데려다주기 위해 차를 몰고 출발했다. 
수영장 앞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을 차에 태우고 곧바로 사무소로 향하는 길에, 나는 오늘 연습 때 있었던 이야기를 그녀들에게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주장이 니들 또 언제 오냐고 나한테 물어보더라. 그때의 응원이 정말 인상 깊었던 모양이야.”

“또 리츠코…씨에게 물어볼까?”

“아니. 그렇다고 폐는 끼치지 말고. 그리고 쌀집 아저씨가 하루카 귀엽다던데.”

“에? 저요? 저, 정말요?”

“그래. 자꾸 넘어지는 애 귀엽더라고. 자기 아들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는 아저씨 같은 발언을… 아. 아저씨 맞지.”

“에헤헤… 뭔가 부끄럽네…”

“아이돌이 그런 걸 부끄러워해도 되냐. 아. 그런데 니들 수영장에서 뭐한 거야?”

“아이돌이 수영장에서 할 일이라면 당연하잖아. 비키니 화보인 거야.”

“비키니 화보를 너희 둘이? 미우라 씨나 타카네는?”

내 말에 조수석에 앉아있던 미키는 입을 삐죽거리며, 

“나랑 하루카도 충분히 통하는 스타일인 거야!”

“아니, 뭐. 니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둘이 워낙 압도적이니까.”

“그, 그건 반박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래보여도 미키. E컵의 86인 거야!”

대체 어떤 중학생이 자신의 가슴 사이즈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역시 미키답다는 생각이…
잠깐.

“뭐? 뭐가 뭐라고?”

“E컵의 86!”

“E!!! 2!!! 이!!! 以!!!”

세에에상에나. 

“미키. 정말정말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혹시 나이를 한 5살 정도 속였다던가. 사실은 성인인 거지? 그렇지?”

“아니거든!!”

미키는 볼을 부풀린 채로 창문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중학생이 86이라니! 요즘 중학생은 괴물인가!
그렇다면, 뒷좌석에 있는 또 한 명의 사이즈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하루카는?”

“에? 저, 저는…”

하루카는 뭔가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래. 사실은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지금 엄청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다. 성희롱으로 몰려도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남자로서 알 건 알아야지! 그리고 아이돌이 자기 쓰리사이즈 밝히는 건 기본 아닌가!

“저, 저는… 에… D컵의… 83이에요…”

“지저스 크러스트 핏자!!”

“에…?”

“아, 아니. 지저스 크라이스트!!”

입으면 말라 보이는 타입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설마 D라니!! D!! 어딘가의 남고생이 그렇게 사랑한다는 D!! 물론 나도 좋아한다!

“하루카. 넌 최고의 아이돌이 될 거야.”

“아… 예… 감사…합니다…”

“애초에 아저씨는 왜 그렇게 가슴에 집착해?”

“허허허. 미키. 그런 말 못 들어봤니? 가슴에 대한 나의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 라는 말.”

“저언혀. 누가 한 말이야?”

“내가.”

“……”

“……”

두 사람은 침묵에 빠졌으므로, 내가 계속 말을 이어가기로 했다.

“가슴 사이즈 80이상의 여성은 나라에서 보물로 지정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내 지론이야. 아니. 내 지론이라고 하기엔 뭐한 게 고등학교 야구부시절 선배에게 받은 귀중한 가르침이다.”

“흐응. 그럼 미키랑 하루카도 보물인 거야?”

“물론이지. 맙소사. 내 차안에 보물을 둘씩이나 태우게 되다니. 감개무량이다. 감개무량. 특히 하루카.”

“네, 넷?”

“앞으로 잘 부탁해.”

“새, 새삼스러워!”

“으음. 그럼. 마빡쨩은 어떻게 되는 거야?”

“걔 사이즈 알고 있냐?”

“응. 미키. 765 프로 아이돌들 사이즈는 모조리 알고 있는 거야.”

어떻게? 라는 것보다 일단 그 사이즈를 아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본론으로 돌아가면? 그 녀석. 척 봐도 작아 보이던데.”

“77인 거야.”

“하. 그래서 그 녀석이 글러먹었다는 거야.”

“하지만 마빡쨩. 키가 작아서 계산하면 B에서 C컵은 되는 걸.”

“그런 C컵 따위, 인정 못한다. 키로 컵을 결정하는 그런 건 다 허구야. 허구. 다른 애들은?”

“아미랑 마미는 78이야.”

“걔네들은 괜찮아. 아직 클 여지가 있으니까. 나이가 어리잖아. 13살에 78이란 건 엄청난 거라고. 장차 눈여겨 봐야할 유바…아아. 유망주야.”

“응? 아저씨 뭐라고 했어?”

“아냐. 흘려들어.”

수소폭탄 급 말실수를 할 뻔했다. 아무리 본능에 충실하다지만, 지킬 건 지키자.

“그리고 히비키는 83.”

“좋구만. 뭐. 그 녀석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즈사는 F컵의 91.”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두 소녀는 깜짝 놀라며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원채 천천히 달리고 있어서 다행히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뭐, 뭐하는 거야, 아저씨! 미키. 하마터면 코 깨질 뻔한 거야!”

“미, 미안. 다시 한 번 말해줄래?”

“응? F컵의 91.”

“F라니. F는 대학교 학점에나 있는 게 아니었던가? 그것도 컵의 단위였나?”

물론 미우라 씨가 크고 아름다운 흉부를 지니고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크다 크다 말만 들었지 그렇게 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80이상이 보물이면, 91인 아즈사는 뭐야?”

“무례하도다. 호시이 미키. 어디 감히 여신님의 존귀하신 이름을 함부로!”

“…미키. 대충 이해했어.”

미키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쏘아봤다. 하지만 아예 아까부터 말 한마디 못하고 있는 하루카보단 나은 반응이었다. 안심했다.

“굉장해… F컵이라니. 나. 그걸 듣기만 했는데도 앞으로 10년 정도 더 살아갈 힘을 얻은 것 같아.”

“…타카네는 아슬아슬하게 E컵의 90.”

“15년 정도 더 살 수 있을 거 같아. 아아…”

“아저씨 표정에서 뭔 생각하고 있는지 다 보이는 거야.”

“남자니까.”

“음… 그리고 치하야 씨는…”

“됐어. 안 들을래. 다음 사람.”

“에에?”

들었다간 왠지 슬퍼질 것 같았다. 느낌이 그랬다. 미키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어깨를 귀엽게 으쓱하더니 곧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댔다.

“아. 리츠코…씨도 85인 거야. 저번에 몰래 아이돌 시절 프로필사진 봤어. 물론 들켜서 혼났지만.”

“그러고 보면 리츠코도 그렇지. 슈트로 꽁꽁 싸매고 있다지만, 오히려 그게 더 가슴을 강조하는 게 돼서 딱 알지.”

이야. 다들 정말 좋구만. 역시 아이돌 만세다. 대충 내가 짐작하기에 80 이상은 다 나온 것 같은데. 미우라 씨, 아니. 미우라 여신님, 타카네, 미키, 리츠코, 하루카, 히비키. 이 정도인가. 나머지는 들을 필요 없다. 

“응? 어째서?”

“왜. 설마 80이상이 또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또 있어? 아. 오토나시 씨?”

“아니. 코토리는 당연한 거고. 유키호도 81인 거야.”

“뭐…라고?”

그건 정말 의외다. 볼 때마다 약간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어서 그렇게 안 봤는데, 유키호도 80 이상이었을 줄은!
유키호는 대단했구나!

“…어째서 남자들은 큰 가슴을 좋아해?”

“큰 가슴은 멋진 거야. 그 안에 희로애락이 다 들어있다고. 남자의 최초이자 최후의 로망이다. 영원히 지켜줘야 할 보물 그 자체.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신비.”

“미키는 잘 모르겠는 거야. 물론 미키의 스타일. 미키가 느끼기에도 멋지긴 하지만, 가슴이 크면 불편할 때도 있는 걸.”

“뭘 모르는군. 하루카는?”

“에, 에, 예?”
그때까지 얼굴이 새빨개져서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모르던 하루카는, 내 지목에 흠칫 놀라 어버버거리기 시작했다.

“저는 에… 저도 역시… 약간 불편하다고 할까? 아니. 내가 왜 이런 질문에 대답을…”

“큰 가슴의 멋짐을 모르는 너희들이 불쌍해.”

“불쌍해?”

“그래.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짜로.”

줄곧 나를 상대해줬던 미키조차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세 사람은 그렇게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는, 그제야 현역 아이돌들 앞에서 가슴 찬양을 몇 십분 동안 해댄 사태의 심각함을 인지했기 때문이리라. 만약 둘 중 한명이 녹화를 했다가 그대로 경찰서에 넘겨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심각함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무소에 도착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하루카가 수고하셨으니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라며 날 잡아끌었다. 그렇게 성희롱을 당하고도 날 대접할 마음이 들다니, 하루카는 사람이 아니라 현신한 천사가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날 사무소로 데려간 다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하려는 건가.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고, 정말 나를 소파에 앉혀놓고 차를 끓이러 주방으로 향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힉? 아. 야, 야구선수 씨… 안녕…하세요.”

“오? 오오. 유키호!”

“히익!”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유키호는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 녀석이 남자를 어려워한다는 걸 새삼 느꼈지만, 그래도 보물이다. 보물.

“아. 놀랐구나. 미안.”

“아. 저야말로… 죄송해요오.”

“유키호. 대단한 걸. 다시 봤어.”

“에? 무엇을…”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미키는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다행히 내가 ‘다시 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 응원 말이지. 치어걸. 유키호 그렇게 열심히 하는 줄 몰랐어.”

벌써 열흘 넘게 지난 이야기였다. 둘러대도 어쩜 그런 걸 둘러대냐. 내가 생각해도 멍청하구만.

“아… 그… 감사…합니다.”

먹혔다.
유키호도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타입이었구나.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오늘의 아저씨. 이상해.”

“그러게.”

저녁이 다됐음에도 불구하고 더웠다. 물론 지금의 내 상황에 직면한 사람이라면 모두 갑자기 더워짐을 느끼겠지만, 그게 아니라 오늘은 아침부터 더웠다.

“여기 에어컨이라도 없냐?”

“있어.”

“틀면 안 돼?”

“고장 났는데 틀 수 있다면.”

“망할… 결국 안 된다는 거잖아.”

하루카가 냉차를 가져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루카는 지금 차를 ‘끓이러’ 갔다.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자. 야구선수 씨. 여기 따뜻한 매실차에요. 유키호랑 미키도.”

“아. 고마워.”

“고마운 거야.”

“미안. 하루카쨩. 차는 내가 끓였어야 했는데…”

“아니. 유키호도 가끔 다른 사람이 끓인 차를 마셔봐.”

차는 뜨거웠다. 아니. 더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보니 더 더워졌다. 결국은 더웠다. 순간 차를 냉장고에 처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참고 마셨다. 뭐. 이열치열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 차가 참 따뜻…”

하긴 개뿔! 딱 두 모금 마시고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미키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응? 응!”

“하루카도 덥지? 유키호도.”

“예? 예. 조금 덥긴 한데…”

“그래! 니들 천천히 차 마시고 있어. 내가 당장 가서 사올 테니까! 내 차는 남겨놓고!”

“에에? 저희들 때문이라면 괜찮아요!”

“내가 먹고 싶다!”

걸어도 덥고 뛰어도 덥다면 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달렸다. 편의점을 향해. 
아이스크림을 골라 계산한 후 다시 사무소로 가는 데 10분이 걸렸다. 
사무실 안에는 어느새 타카네와 오토나시 씨와 치하야가 와있었다. 그 세 명을 놔두고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시 수고를 해야만 했다.
도착하니 이번엔 야요이와 히비키와 이오리와 미우라 씨가 와있었다. 결국 다시 갔다.
왔더니 리츠코와 마코토와 아미와 마미가 와있었다. 
그때 난 생각했다. 나는 왜 애초에 모두의 것을 사오지 않은 것인가.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 것인가 보다.

“난 정말 바보야…”

“그걸 이제 알았어?”

이오리의 말에 화를 내고는 싶었지만, 지금의 나에겐 반박할 기운도 명분도 남아있지 않았다.

“매번 폐만 끼치게 되네요…”

리츠코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하기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내가 자청한 일이니까. 저번 그 응원 덕분에 이것저것 많이 나아졌거든. 그 보답을 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래도…”

“괜찮다니까. 뭐. 딱히 또 내게 뭘 해주고 싶다면, 이 더운 거나 좀 어떻게 해줘.”

“아하하… 그건 어떻게 못 해드리겠네요… 아?”

리츠코가 살짝 입을 벌리고 자신의 왼손을 주먹으로 톡 쳤다. 꽤나 귀여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것보다는 왜 그런 제스처를 취했는지가 중요하다. 설마 정말 더위를 어떻게 해주겠다던가?
하지만 리츠코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내일 모레. 시간 있으시면 저희랑 바다에 가실래요?”

0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