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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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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29, 2016 17:37에 작성됨.

"치하야쨩."

 

드문 일이었다. 하루카가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은.

 

"나, 앞으로 어쩌면 좋을까."

 

이따금 부는 바람에 밤색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흐트러진다. 그 사이로 보여주는 그녀의 얼굴은, 일상 속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방긋 웃고, 적극적이고, 나같이 붙임성없는 아이에게도 과감하게 손을 내밀어주는 상냥함은 온데간데도 없다. 그저 불안감에 흔들리는 녹색 눈망울이 이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나는 시선을 일부러 다른 곳으로 돌렸다.

 

보고 있기 괴롭다.

 

"미안.....이러면 안되는데. 그렇지만 조금, 두려워져서."

 

그녀의 입에서 주절주절 여러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꽤 힘든 모양인지 몇 번이나 멈추다 서다를 반복했다. 지금까지 나온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지.

 

- 요즘 자신감이 없어졌다.

 

시작은 몇 달 전 있었던 어느 오디션이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다소 규모가 작은 곳과 달리, 이름을 대면 알아보는 이들이 다수 참여할 정도의 대형 오디션. 우리들은 아직 신인이었지만, 최근들어 꽤 상승세를 보였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나는 다른 쪽이 먼저 잡혀있었던 관계로 참가하지 못했지만, 우리 사무소 사람들 몇몇이 참가했었다.

 

그래, 하루카도 그 중 한 명. 그 때 그녀가 냈던 기쁨에 찬 목소리가 아직도 재생이 될 정도였지. 하지만 결과는 낙방. 다른 사람들도 줄줄이 탈락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던 모양이다.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는데.....역시 너무 자만심을 가졌던 걸까."

 

하루카는 그 뒤로도 이어진 각종 오디션에서도 연거푸 낙선했다고 한다.

 

"아, 그.....미안해. 괜히 이런 이야기를 해서."

 

그녀는 뒤늦게서라도 나를 인심시키려는 듯 미소지었다. 어정쩡하다. 평소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는 게 힘든 나조차도 명백히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미지근한 웃음이다. 감출 수 없는 절박함이 똑똑히 보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좀 더 노력해야겠지, 그렇지?"

 

응, 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하루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사무소에서 집까지 전철로 왕복 4시간. 그것만으로도 피곤할텐데 하루카는 꿋꿋하게 레슨에 참여하고, 스스로도 연습한다. 랭크가 낮은 우리들로서는 아직 별 볼일 없는. 때로는 웃음거리가 될만한 일들 투성이.

 

그런데도 하루카는 웃는다. 모두에게 즐거움을, 희망을 전달하려 애쓴다. 어쩌다가 아이돌 사무소에 몸을 담게 되었어도, 아직은 그 아이돌이라는 것에 회의적인 나와는 달라. 하루카는 힘든 내색 하나 보이지 않고 자기의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 노력하고 있다. 이미, 많이.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더' 노력하라고? 무척이나 잔인한 처사였다. 그래서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저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슬쩍슬쩍 그녀의 우울한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저기 있지.....나 실은 이 다음에도 또 오디션이 있어."

 

말하지 않는다.

 

"그 때도 또 탈락하거나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말해서도 안된다.

 

"프로듀서씨는 몇 번이고 괜찮다고 해줬지만, 그 쯤되면 역시.....화낼까나?"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달싹거리는 입을 억제했다. 어설픈 위로는 독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내가 아이돌을 하겠다고 한 건, 어쩌면 잘못된 걸지도 모르겠어."

 

내가 하루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이럴 때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리츠코라면 현 상황을 분석해서 그녀 나름대로 적절한 해결책을 알려줬을 것이고, 미키는 하루카의 하소연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도 도움이 될 조언을 해줬을 것이다. 그 애는 의외로 날카로운 구석이 있으니까.

 

"아, 이게 아니지.....그, 그러니까.....아하하, 그렇지! 이렇게 된 거 화려하게 1등으로 합격하지 않으면. 그, 치?"

 

가나하씨는 같이 레슨이라도 하자면서 하루카를 억지로 잡아끌 것만 같고, 마코토는 어떨까. 하루카의 힘없는 손을 붙잡고 같이 울어주는 게 아닐까. 하기와라씨라면 먼저 마음을 포근하게 해줄 차 한 잔을 대접해주는 걸로 시작하지 않을까. 미나세씨는 따끔하게 의기소침한 하루카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일침을 가할 것이다.

 

"..........."

 

타카츠키씨는 그 넘치는 기운을 나누어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격려의 말을 쏟아내고 있지 않을까. 아미나 마미는 하루카가 기운이 나게끔 일부러 장난을 걸 수도 있을테지. 아즈사씨는 상냥하게 그녀의 등을 찬찬히 쓸어주고 있을 것이다. 시죠씨는.....워낙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렇게나 괴로워하는 사람을 그냥 보고지나치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하루카."

 

그리고, 프로듀서는......아니, 됐어. 더 이상 생각해봤자 의미없는 일이다. 다들 각자 차이가 있어도,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나은 행동을 보였을 테니까.

 

꼬옥

 

".....치, 하야쨩.......?"

 

나는,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나는, 저기 있는 벽이나 다를 게 없다. 아니.....차라리 저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응답이라는 걸 바랄 만한 대상이 아닌 걸. 그와 달리 나라고 하는 사람은 하루카에게 쓸데없는 기대나 심어주고 있을 따름이다.

 

"미안해."

 

의미없는 사죄의 말을 내뱉었다.

 

"엣, 미안하다니......뭘?"

 

"나는 네게 해줄 만한 게 없어. 네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줄 수도 없고, 뭔가 기운이 날만한 말을 건낼 수도 없어."

 

그러자 하루카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좀 더 가까이 느껴지는 그녀의 온기. 코 끝을 간지럽히는 꽃향기. 더 가까이 보이는 그녀의 아련한 미소, 그리고 눈, 물.....? 어째서.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 두 눈에 박혀들어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황하고 있는 찰나에 하루카의 살짝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니 무슨......이미 해주고 있잖아."

 

바로 그 뒤로 그녀의 양 팔이 뒷머리로 파고들어옴을 느꼈다. 무심코 움직인 양 팔은 이미 무언가를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다. 손바닥 가득히 천의 감촉과 함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체온이 느껴졌다. 아, 나는 어느세 앞에 있는 사람을.......

 

"고마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부드럽게 호를 그림과 함께, 저절로 물방울이 한 두 방울 또르륵 부드러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루카는 웃고 있었다. 아직 두려움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안도했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웃음이었다. 나는 가슴이 훅하고 뜨거워지는 걸 꾹 참으면서, 대신 하루카를 껴안고 있는 팔에 힘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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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호이! 플포마스에서도 농후한 하루치하 기원합니다(뜬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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