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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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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8, 2012 12:27에 작성됨.

히비키를 조수석에, 마코토를 뒷좌석에 태우고 바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히비키는 원래부터 떠들썩한 성격이고, 마코토 역시 낯을 가리는 스타일은 아니라 차 안은 곧장 두 사람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그러니까 너도 내가 현역 때 뛰는 모습을 봤단 말이지.”

“네. 아버지와 가끔 야구장에 가기도 했었으니까요. 야구선수 씨가 프로에서 활약하신 건 딱 2년뿐이긴 했지만, 아버지가 응원하는 우리 지역 연고팀 상대로 워낙 잘 치셔서 아버진 야구선수 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흠… 내가 그랬었나? 난 아무 팀하고나 붙어도 다 잘 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거야 그랬지만… 그래도 특히 우리 지역 연고팀을 상대하면 날아다녔죠. 그건 저도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열다섯 살 때. 그러니까 2년 전에 가족끼리 한 번 홈경기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경기에서 야구선수 씨가 5타수 4안타에 연타석 홈런을 친 적이 있었죠. 그 날만 혼자 6타점을 쓸어 담으셔서 저희 팀 3대11 대패의 일등공신이 되셨어요. 그 경기는 워낙 임팩트가 강렬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요.”

“호오… 그랬던가.”

내가 리그 통합 타격 2위를 기록했던 그 해의 성적은 0.351 18홈런 78타점 23도루. 다른 리그였다면 리그 타이틀을 석권할 수도 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속한 리그의 타격왕이 0.358로 통합 1위. 나는 리그에서도 양대 리그 통합에서도 2인자가 돼버리고 말았다.
여러모로 아깝긴 아까웠지. 홈런 두 개만 더 치면 20-20도 가능했는데. 어쨌든, 마코토는 내가 그해 때려낸 18개의 홈런 중에 2개를 현장에서 직관한 셈이 된다. 

“특히 야구선수 씨가 쳐낸 두 번째의 홈런. 그게 바로 그 팀의 11점째였어요. 그 홈런 타구는 저희 가족이 앉아있던 외야석 바로 옆 스탠드에 꽂혔죠. 그 장면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해요. 그리고 그 장면을 본 아버지는 곧바로 그날 경기 끝나고 있을 외식을 취소시켜버리고 곧바로 집으로 가셨죠. 아아… 그때 정말 낙담했었어요.”

…나도 모르게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힌 꼴이 되나. 이렇게 되니 조금 미안해지는군.

“그렇게 날 아는 녀석이 처음 봤을 때는 잘도 변태 취급을 했더군.”

“그, 그땐… 아하하… 뭐라고 해야 할지. 그때 워낙 경황이 없었고, 유니폼을 입은 야구선수 씨만 보다가 사복을 입은 모습은 처음 보기도 했고…”

“그때의 업어치기에서 팔 꺾기로 이어지는 연계기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등이랑 팔이 찌릿찌릿하다.”

“죄, 죄송해요…”

“아니. 신경 쓰지 마. 근데 뭐야? 그 엄청난 실력은.”

“어릴 때부터 도장에 다녔으니까요.”

“여자애답지는 않은 취미인데.”

“그러게요… 아하하. 아버지는 제가 남자이길 바라셨나 봐요. 어릴 때부터 저에게 남자아이 같은 취미를 갖게 하셨죠.”

“그다지 유쾌한 얘기는 아니군.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데 말이야.”

내가 툭 내뱉은 말에 마코토는 갑자기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얼굴을 팍하고 들이밀며 소리쳤다.

“그렇죠! 역시 야구선수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응? 아… 응.”

갑작스러운 마코토의 반응에 놀란 내가 말을 더듬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코토는 주먹을 꾹 쥐며,

“그래요. 이게 다 아버지 탓이야! 여자아이 옷장에 치마가 한 벌도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도장에 다니게 된 것도 다 아버지가 멋대로 등록시키는 바람에(중략…) 난 조금 더 여성스러운 취미를(중략…) 그렇지 않으면 제가(중략…)”

“마, 마코토. 너무 흥분하지 말라구.”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히비키가 말릴 정도면 이미 말 다한 거지.

“마코토. 네 고충은 잘 알았으니까. 조금 화제를 바꿔보는 게 어때?”

“예? 아…”

마코토는 그제야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폭주했다는 걸 알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럼 무슨 이야길 할까요?”

막상 화제를 바꿨는데, 이야기할 주제가 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졸 신분으로 프로데뷔 2년차에 타격 2위를 차지한 이 몸 전설에 대한 이야기라도 해볼까.”

“이 몸…”

“전설…?”

“뭐, 뭐야. 그 표정은.”

두 소녀는 동시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날 바라보았다. 이래보여도 한 때는 이치로 다음가는 타격의 천재라고 불렸던 난데. 전설이라고 표현하는 게 불만이냐?

“한 때는. 이잖아.”

히비키는 웃는 얼굴로 비수를 꽂았다. 역시 이 녀석과 나는 상성이 맞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임마. 짧고 굵은 게 훨씬 더 임팩트 있다고. 프로 2년차에 규정타석 3할 5푼이다. NPB 역사를 통틀어서 이런 성적 낸 선수는 이치로 말고 아무도 없어. 아니. 이치로도 능가한다고. 이치로도 91년에 드래프트 뽑히고 94년이 돼서야 풀타임으로 뛰었으니까.”

“근데 그 94년도 성적이…”

“야. 내가 더 잘 알아. 알고 있으니까 얘기하지 마.”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히비키는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마코토 역시 씩 웃었다.

“히비키. 네가 야구를 잘 몰라서 그래. 야요이한테 내 성적 들려주니까 기절을 하려고 했었다고.”

“그래? 이런 말 하면 야요이에게 실례 같지만. 야요이는 할푼리 계산하는 법도 모를 거라구.”

“그렇게 말하는 넌 아냐.”

“윽. 어, 어쨌든!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어. 스포츠에서 2등은 꼴찌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니까 야구선수도 꼴찌나 마찬가지인 셈이야.”

“그딴 거지같은 계산법이 어딨냐! 그럼 올림픽에서도 1등 밑으로는 메달도 주지 말아야겠구만!”

“아. 내가 잘못 들었나봐. 야구에서 2등은 꼴찌나 마찬가지라고 했던가.”

“어째서 야구만? 차별 하냐? 애초에 그 말은 어떤 작자가 한 거야?”

“몰라. 나도.”

“얼버무리지 마!”

“헤헤. 하지만 전 알아요. 3할 5푼이 얼마나 놀라운 타율인지. 그걸 프로 2년차에 달성한 야구선수 씨의 능력도.”

“역시 마코토구나. 남의 위대한 업적을 멋대로 깎아내리려는 불한당 같은 녀석과는 다르네.”

“누, 누가 불한당이라는 거야!”

“여기 나랑 마코토를 제외하면 또 누가 있냐?”

“우갸--!! 말 다했어?”

“으아! 불한당이 사람 친다! 그것도 운전하는 사람을!”

뭐. 결국 도착할 때까지 대화의 거의 80%는 나와 히비키의 말다툼이었다. 마코토가 적당히 중재시켜주지 않았으면 우리 두 사람은 아마 내려서까지 계속 입씨름을 했을 것이다. 이것 참. 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자고 다짐한 지가 그제인데.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구만. 

촬영에 앞서, 나는 마코토와 히비키에게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던질 때 공을 잡는 그립을 가르쳐주었다. 야구용품 광고모델이라면 역시 공 쥔 손을 앞으로 쭉 뻗고 찍는 컷이 한 장이라도 있을 텐데. 그때 공을 제대로 쥐어 보이면 왠지 더 폼이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왜 하필 포심과 슬라이더냐고 물으면, 내가 제대로 아는 게 그것뿐이라고 답하겠다.

“야구선수 씨는 촬영장에 안 들어오시나요?”

“그래. 이 업체. 마이너 하긴 해도 내 전 소속 팀 선수들 몇몇이 애용하던 업체니까. 혹시라도 내 얼굴 알아보면 골치아파질까봐 안 들어간다.”

“그랬군요… 그럼 다녀올게요!”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라구!”

그래. 그럼 히비키가 말한 대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자.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기분 탓이겠지. 그럼 한 숨 자볼까.



자고 일어나니, 저편에서 두 사람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차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잘 됐냐?”

“흐흥~! 이 정도는 낙승이라구.”

“야구선수 씨 말대로 공을 쥐니까 칭찬받았어요. 뭔가 더 전문적인 느낌이랄까, 멋지다고 할까. 그렇게 말하던데요? 전 또 멋지다는 말을 들어버렸지만요.”

“뭐 어때. 스포츠용품인데. 귀여운 것보단 멋있는 게 더 어필할 수 있겠지.”

“그런가… 어쨌든, 이제 돌아가요.”

“응. 그래. 뭔가 급해 보이는데. 할 거라도 있냐?”

“네. 오후에 댄스 연습실에서 단체 연습이 있어서요.”

“단체 연습? 호오… 그렇다면야 후딱 돌아가 주지.”

돌아가는 동안에는 두 사람이 이번 촬영에 대해 떠드는 걸 들으면서 갔다. 출발하게 전에 ‘오랜만에 들어온 일’이라더니. 꽤 들뜬 기분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사무소에 도착해 녀석들을 내려주자, 두 소녀는 각자에 걸맞은 상쾌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오늘은 고마웠다구.”

“정말 고마웠어요. 야구선수 씨. 나중에 꼭 보답을…”

“아니, 아니. 니들한테 보답…받으려고 한 건 아니니까.”

보답? 잠깐. 내가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인데… 보답?

아차.
나는 황급히 두 사람을 부르려 했지만, 이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이래! 본래의 목적은커녕, 완전히 애들 프로듀서 노릇이나 해버렸잖아. 이거 완전 주객전도 아냐?  
이렇게 된 이상, 다른 기회를 노릴 수밖에. 일단 지금은 철수하고, 오후에 다시 오도록 해야겠다.



그날 오후 1시 40분. 사무소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잠복한지 20분 째. 
드디어 사무소 안에서 타겟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왁자하게 떠들며 댄스 연습실로 이동하는 타겟들을 보며, 나도 슬슬 움직일 준비를 했다.

전원 연습실로 들어간 지 30분 정도 지나고(이때의 30분은 정말이지 체감 2시간 정도는 되었던 것 같았다.), 나는 차 밖으로 나와 슬금슬금 연습실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는 문 앞에 쪼그려 앉아 귀를 기울였다.

[선수오빠 말로는 내일이랑 4일 후에 있대.]

[아. 그럼…    하면……  ……네.]

[정말 기뻐……     ……할까?]

[우리 힘내서 해보자!]

젠장. 뭔가 들릴락 말락 했다. 안 들릴 라면 아예 들리지 말 것이지. 더럽게 감질나네. 문을 확 열어볼 수도 없고. 일단 아미가 한 말은 제대로 들렸는데. 내일이랑 4일 후에 있는 건 바로 경기가 있는 날이다. 그날 뭘 할 셈인가? 댄스 연습실에서 뭔가를 준비한다는 건 설마…?

[…은 처음 ……것 같아요.]

[응. 나도 처음이야. ……면 뭔가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 나지 않을까?]

왜 중요한 부분만 안 들리는 거야? 저건 하루카의 목소리인데. 뭘 하면 힘이 솟아난다는 거지? 콘 프로스트라도 먹고 있는 중인가?
나는 조금이라도 더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 몸을 문 쪽으로 더 구부렸다가…

몸이 확 고꾸라지는 바람에 이마를 문짝에 제대로 부딪혀버렸다.

“아오…읍!”

나는 재빨리 내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문짝에 성대하게 박아버려 난 소리는 나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곧 그녀들이 놀라면서,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이제 와서 도망쳐봤자 소용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발조차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대로 끝장인가. 이렇게 들킬 거 차라리 미키나 타카네나 미우라 씨나 야요이가 문을 열었으면… 아니면 최소한 아미나 마미라도!!

“누구야?”

문을 연 사람을 본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미나세 이오리였다. 고르고 골라서 하필이면, 그나마 안전할 확률 1/2도 거르고 1/12의 최악의 패를 뽑은 것이다!

“뭐, 뭐, 뭐야! 어, 어,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놀랄 만도 하다. 오늘 나를 만난 사람이라고는 마코토와 히비키가 전부인데다, 그 둘도 내 신신당부 덕분에 오늘 내가 차를 태워줬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만일 했다고 해도, 내가 돌아간 줄 알았겠지 여기서 구차하게 쭈그려 앉아 귀를 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이나 했을까.

무명의 아이돌 12인이 모두 모여 있는 연습실 밖에서 쭈그려 앉아 뭔가를 엿들으려는 성인 남성. 이건 석가모니나 예수나 공자가 봤어도 범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할 만한 장면이다. 

“이, 이, 변태앳!! 당장 꺼지지 못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전속력으로 계단을 내려갔더니, 계단의 가장 마지막 층에서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고 있는 건 리츠코였다. 여우를 피해 도망가려다 호랑이를 만난다. 라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리는 상황이 있을까.
결국 그 자리에 선채로 20분 가까이 설교를 들었다. 더 이상 비밀을 캐고 자시고 할 기분이 들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아니. 거기서 뭘 더 꾸민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실격인 것 같은 기분이지만.

다음 날 시합에는 야요이와 히비키와 타카네가 찾아왔다. 또 보는 눈이 생겨버린 탓에, 대충 멀티히트(한 경기 안타 두 개 이상) 정도는 해주기로 했다. 팀원들은 이제야 슬슬 감각을 찾는 거냐며 좋아했지만, 난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야구선수 씨. 어제 저희 댄스 연습실에 오셨었다고 이오리쨩이…”

“응? 어허. 어허헛. 그, 그럴…리가…라고는 하지 못하겠군. 그래. 갔었어. 니들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것 같아서 캐볼라고. 하지만 실패했지. 리츠코한테 실컷 혼만 나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울한 날이었지.”

“숨기다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야요이랑 타카네는 내가 직접 전화해서 알고 있을 텐데. 그저께 아미가 한 말이 수상쩍었어. 이 몸의 눈은 속일 수 없지.”

“아미가 한 말이라며. 그럼 귀 아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좀 알아서 해석해라. 어쨌든. 솔직히 말해봐. 대체 그 보답이란 게 뭐야? 안 받겠다느니 뭐하겠다느니 그런 말은 안 할 테니 뭔지라도 좀 알자. 궁금해 죽겠다.”

말을 끝내며 흘끗 타카네를 봤더니, 타카네는 빙긋 웃으며 집게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가져다댔다. 나는 그녀가 집게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댈 때부터 이미 뭔가를 짐작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역시나였다.

“후훗… 유감스럽지만 그건 톱 시크릿이랍니다. 아마 3일 후면 자연스레 알게 되실 겁니다.”

“그래. 그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했어. 도루 실패 후 안타. 뭐 그 정도로 당연한 대답이군.”

잠깐. 3일 후?

“3일 후?”

“응! 기대하고 있으라구!”

“웃우-! 저도, 다른 분들도, 모두 힘내고 있으니까요!”

“야구선수 씨는, 차분한 마음으로 다음 경기를 준비하시길. 모두 야구선수 씨에게 힘을 불어넣어줄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뭐야 대체. 단체로 회식이라고 할 셈인가? 깜짝 파티. 뭐 그런 거?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그때까지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깜짝 파티. 지금 생각해보면, 댄스 연습실에서 단체로 뭔가를 한다. -> 다음 경기를 기대하라. 이 힌트에서 저걸 연상 못한 내가 멍청하긴 하지만…
거 참. 스팩터클하구만.

5회말 우리 팀의 공격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갑자기 분홍색의 치어복을 입은 열두 명의 소녀들이 관중석에 나타났을 때, 나는 눈이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맙소사. 저것들이 지금 뭘 하려는 거야? 
미국이나, 일본의 프로야구에는 치어걸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 듣자하니 한국의 프로야구는 팀마다 치어걸이 필수라는 말이 있긴 하다만. 어쨌든 우리는 아니다. 나도 치어걸을 본 건 고교 이후로 처음이다. 하물며 일반인이 절대다수인 우리 팀원들은 오죽할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오늘 상대팀을 취재한답시고 꽤 메이저한 케이블 방송의 다큐멘터리 촬영 팀이 구장을 방문했는데 말이지. 아무리 케이블이라지만 내 얼굴 또한 팔리는 일이라서 일부러 범타로 두 타석을 보낸 참에, 저렇게 의욕만만으로 응원하면 난 뭐가 되는 거야!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신주님. 부처님. 이나오님. 누구라도 좋으니 절 이 지옥에서 빼내주세요.

“자! 다들! 시작이야!”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츠코의 지휘를 시작으로 12인의 치어걸은 밝은(그렇지 않은 녀석도 있는 것 같았지만.) 표정으로 각자의 응원도구를 흔들었다. 센터에 선 하루카는 선두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는 것에 맞춰 힘차게 소리쳤다.

“브레이브스! 파이팅-!”

“오오---!!!”

주변의 관객과 상대팀은 물론, 우리 팀의 팀원들까지 벙찐 표정으로 그녀들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심판들까지. 이런 후원사 하나 없는 그야말로 생 아마추어 팀에게 갑자기 치어걸이 와서 응원을 하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까. 흘끗 봤더니 상대팀을 취재한다던 카메라까지 그녀들 쪽을 향해 있었다.

그 응원 때문인지 뭔지. 3점 차로 지고 있던 우리 팀은 한 점을 만회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타순이 돌고 돌아 2아웃 2,3루에서 내 차례가 다가왔다.
정말 나가기 싫었다. 복통을 호소하고 화장실로 도망가고 싶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배트를 질질 끌며 타석에 들어섰다. 

그러자, 내가 타석에 들어서는 것을 본 그녀들의 응원이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다.


♬ GO MY WAY!! - 765PRO ALLSTARS


맙소사.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지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카메라 있는 앞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아아… 신이시여. 그냥 죽어. 죽어버려.

타석에 선 나는 엄청난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이걸 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치자니, 방송에 안 좋게라도 나가면 또 골치 아파질 테고. 그렇다고 안치면 저쪽이 실망할 테고. 미치겠구만. 난 대체 어떻게 해야…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뭐?
심판의 콜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삼구삼진이었다. 2,3루 찬스는 그대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좀비처럼 덕아웃으로 돌아가 팀원들에게 미친 듯이 갈굼을 당하고 응원석을 힐끗 보니, 다들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마음이 두 배로 심란해졌다.

하지만 그녀들의 응원은 다시 재개되었고, 그래도 뭔가를 아는지 상대팀의 공격 때에는 침묵을 유지했다가, 이닝이 바뀌는 시간이나 우리 팀의 공격 때 다시 열띤 응원을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 야요이는 옆 사람과 부딪히고, 유키호는 체력고갈을 호소했으며, 하루카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세 번 넘어졌다. 그리고 히비키와 미키는 페이스가 살짝 빨랐다. 빈말이라도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응원이었다. 하지만, 응원을 잘하냐, 못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도 내 오지랖에 대한 보답이랍시고 이렇게까지 해준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그것도 아이돌 사무소의 전원이. 

어쩔 수가 없구만. 방송에 나가든 말든. 욕을 먹든 말든.

7회말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안타. 물론 후속타는 불발. 하지만 치어걸들은 좋다고 폴짝폴짝 뛰고 난리가 났다. 마음을 다잡긴 했지만 쪽팔려서 덕아웃 사인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약속의 9회말. 그 동안 난타전 양상으로 흘러갔음에도 아직 2점차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1아웃 주자 1,2루. 다시 내 타석이 다가왔다. 12인의 치어걸들은 다시금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MR 따위 있지도 않은 야외에서 육성으로. 어떻게 보면 나보다 더 쪽팔린 건 쟤네들이 아닐까.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초구 밋밋한 포크볼을 그대로 때려냈다. 공은 우익수 키를 넘겨 담장에 맞고 떨어졌다. 나는 치어걸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죽어라 달렸다. 내가 2루를 도는 시점에서 우익수가 공을 헛짚었다. 곧바로 3루로 내달렸다. 이미 두 명의 주자는 모두 홈으로 들어온 상태. 이대로 멈추면 3루타지만, 내가 만약 홈으로 들어온다면 경기는 그대로 내 끝내기 인사이드 파크 홈런(그라운드 홈런)으로 종료가 된다. 이 아마추어 팀에 원활한 연계 플레이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3루 코치의 사인을 보지도 않고 홈으로 내달렸다.

우익수가 던진 공을 2루수가 받고, 곧바로 포수에게 송구하는 것이 보였다. 타이밍이 살짝 늦을라나? 어떻게든 태그를 피해 슬라이딩 해봐야겠다.
포수의 블로킹을 슬쩍 피해 손으로 홈 베이스를 터치하는 것과, 포수의 글러브가 내 팔을 터치하는 게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관객들도, 치어걸들도, 뭔가를 느꼈는지 모두가 그 순간만큼은 숨을 죽였다. 과연 판정은?

“세이프---!!”

됐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맨 먼저 홈으로 들어와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주자들이 나를 두들기는 걸 필두로, 모든 팀원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나를 패대기치기 시작했다. 무슨 일본시리즈 우승한 것도 아니고, 아마추어 경기에서 뭐하는 거야. 아파 죽겠는데!
맞으면서도 시선은 자연스럽게 관중석 쪽으로 향했다. 저쪽도 아주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정말. 저 녀석들 때문에 이게 뭐야. 조용히 좀 살려고 했더니. 도와주질 않는구만.

그래도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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