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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 죄책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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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28, 2016 03:52에 작성됨.


 "수고하셨습니다!"
 6시에 맞춰 앨범 수록이 끝났다. 오늘의 스케줄은 모두 마무리했다. 이젠 단둘만의 약속이 남았다. 고대하던, 그토록 기대한 만남이 얼마 남지 않았다. 미키는 해맑은 표정으로 녹음실에서 나왔다. 콧노래를 부르며 프로듀서를 지나쳐 옷걸이에 걸려 있던 얇은 코트를 손에 쥐었다. 옆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계산한다. 이 정도면 충분한 시간.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기다리려는 사람도 없지만, 미키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랐다.
 "미키? 어디가?"
 미키를 따라 나온 프로듀서가 물었다.
 "먼저 가볼게~."
 코트에 팔을 대충 집어넣은 미키는 프로듀서에게 손을 흔들었다. 프로듀서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해서 가라고 배웅을 해주었다. 반 바퀴 핑 돌아 몇 걸음 걷던 도중 누군가 뒤에서 급히 미키를 불렀다.
 "저기, 호시이 씨! 잠깐만요!"
 이 목소리는 분명 음향 담당 디렉터다. 미키는 또각거리는 구두를 급히 멈춰 세웠다. 숨을 헐떡이는 디렉터를 바라보던 미키의 표정은 급격히 굳어졌다.

 

 그는 녹음 작업에 사소한 문제가 생겨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마지막 구절의 재녹음을 부탁했다. 미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미소를 지어 괜찮다고 디렉터를 먼저 들여보냈다. 한숨을 푹 쉰 미키는 시간을 확인하려 했지만, 주머니엔 휴대폰이 없었다.
 "어디 갔지?"
 "여기, 놓고 갔더라고. 뭐 이젠 상관없어졌다만…."
 건물에서 나온 프로듀서가 휴대폰을 건넸다.
 "고마워. 허니."
 "미안, 중요한 일인가 본데."
 미키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다시금 끝날 시간을 예상한다. 이번에도 늦는다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미키는 마구 뛰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았다.
 "응. 일이 좀 생겼어."
 "끝나고 내가 차로 태워다 줄까?"
 미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허니도 허니가 좋아하는 일을 해."
 "응? 어, 알겠어. 그럼 택시라도 불러 놓을게."
 미키는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디렉터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마구 뛰는 감정을 내려 앉힌 뒤 가사에 몰입했다.

 

 

#

 

 

 녹음을 시작한 지도 벌써 서너 시간째. 미키는 고작 몇 소절의 녹음만을 끝냈다. 연거푸 죄송하다며 스태프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모두가 곤란한 이 상황속에서, 여전히 미키는 가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아, 으음…."
 아무리 목을 다듬어봐도 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어딘가 꽉 막혀 풀어지지 않는 답답함에 미키는 헛기침을 수차례 했다. 작디작은 잡념일 뿐인 전화 한 통. 잊히지 않는 그녀의 말. 그저 장난이란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심은 아닐 거라 자신을 가져봐도 마음은 점차 불안해져 갔다.

 

 미키가 심호흡을 내쉬고 있는 사이 프로듀서가 녹음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멍해진 머리를 정신 차리게 만드는데 시간이 좀 걸린 듯, 벌써 스태프 중 몇몇 이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잠깐 쉬자."
 "응…."
 미키는 녹음실에서 나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프로듀서는 미키에게 컵 하나를 건넸다. 차가 담긴 컵에선 따뜻한 연기가 올라왔다. 미키는 컵을 얼굴에 가까이 대기만 했을 뿐 마시진 않았다. 갈증은 느껴지지만, 이런 걸로는 해소하지 못했다.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풀리지 않는 고민에 미키는 입술이 촉촉해질 때까지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영 안 좋아 보이네. 보통이면 한두 시간도 안 돼서 끝날 텐데 벌써 5시 반이라…."
 프로듀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미키 옆에 따라 앉았다. 미키는 정면을 향해 한숨을 푹 쉬었다. 입이 툭 튀어나와 마치 삐지기라도 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고민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무슨 일 있어?"
 프로듀서의 물음에도 미키는 말없이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하루카…."
 마음속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하루카가 왜?"
 "아, 아무것도 아냐."
 자연스럽게 말해버릴 뻔했다. 알려질 뻔했다. 비밀이 들킬 뻔했다.
 "흐음, 어떻게 하면 기분이 풀어지려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던 미키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수록 잘 마치면 같이 딸기 바바로아 먹으러 가는 거야!"
 "뭐?"
 "그러면 완벽하게 끝낼 수 있어!"
 확신에 찬 미키의 말에 프로듀서는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음, 오늘 안에만 끝내준다면야 같이 가줄게. 대신 변장은 제대로 해야 한다."
 "문제없어~."
 "그나마 다행이네."
 프로듀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와의 약속은 대체다. 마지못해서라도 의욕이 생길만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것이라도 해야 했다.
 "호시이 씨, 시작할게요."
 프로듀서의 동의를 받은 디렉터의 신호가 왔다.
 "네인 거야~."
 일어서려는 순간 의자에 올려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긴급!!'이라는 제목을 한 문자가 하나 왔다. 발신자는 아미. 미키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화면을 눌렀다.
 "미키미키! 무지무지 좋은 소식 알려줄게! 오늘도 하루룽이 사무소에 놀러왔지롱~. 빨리 오면 아마 만날 수 있을지도?"

 

 별거 아닌, 일상적인 문자 한 통에 잡념이 모두 잊혔다. 조금 전의 약속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단순히 만날 수 있다는 예정에, 우울한 마음 따위 녹일 새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

 

 

 

 "딸기 바바로아는 나중에. 좀 나중으로 미루는 거야."
 제대로 일을 끝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온 미키는 미리 불러놓은 택시를 탔다. 배웅하는 프로듀서에게 잠시 잊어버렸던 약속을 재확인했다. 조금 전의 문제만 없었으면 순조로운 계획이었을 텐데, 조금씩 꼬여가는 상황에 미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무소의 주소를 운전사에게 말한 미키는 휴대폰을 꺼내 하루카에게 통화를 걸었다. 뚜르르, 계속해서 들려오는 전자음만이 귀를 울렸다.
 "전화가 꺼져있어……."
 바닥을 시선을 향했다가 휴대전화의 전원을 눌러보는 반복. 자각하지 못한 손의 흔들림. 거세게 차오르는 불안감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키는 미리 꺼내놓은 지폐를 건넸다. 잔돈은 팁이라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소로 뛰어갔다. 엘리베이터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로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왠지 전혀 힘들지 않았다.

 

 문앞에 선 미키는 급하게 왔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잠시 서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손잡이를 밀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사무소. 그 공허함 만큼 미키의 그림자는 커졌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 골똘히 잔업을 도와주던 하루카의 뒷모습이 보이자, 모든 걱정이 사라져버린 미키는 그대로 뛰어가 안겼다.
 "좋아하는 거야 하루카!"
 "우와왓?! 미, 미키? 자, 잠깐 넘어가아앗!?"
 정적인 사무소의 공기를 확 퍼트리는 큰 소음. 이에 소파에 기대 졸던 코토리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안 졸았어요! 리츠코 씨…… 응??"
 코토리는 허공을 향해 변명을 중얼거렸다. 비몽사몽 한 눈동자를 굴려보니, 바로 앞에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 하루카와 미키는 쓰러진 의자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엣. 괘, 괜찮아 미키 쨩, 하루카 쨩?
 코토리는 급히 둘을 향해 다가왔다.
 "아하핫,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으읏, 난 깜짝 놀랬다구-!"
 하루카는 항의했다.


 코토리는 하루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이어 옆의 손도 잡으려 했지만 미키는 손을 뻗지 않았다. 코토리는 미키의 마음을 눈치챈 듯 자연스럽게 손을 올려 의자를 가지런히 세웠다. 그 후 둘을 뒤로 한 채 탕비실로 향했다. 하루카가 손을 내밀어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미키는 일어나지 않았다.
 "읏챠."
 하루카는 미키의 한쪽 팔을 양손으로 잡고 일으켰다. 미키는 코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도 잊고 들떠선 하루카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아미한테 들었어. 하루카가 사무소에 왔다고. 그래서, 그래서 같이 돌아가려고 왔어!"
 사무소에 온 뒤로 한껏 상기된 목소리.
 "미리 전화해 주지."
 "전화 무지했는데 하나도 안 받고…."
 미키의 불만에 하루카는 책상 위에 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수 통의 부재중 전화가 걸려왔다는 알람이 떠 있었다.
 "앗, 미안. 코토리 씨가 주무실 때 음소거로 해놓은 걸 깜빡했어."
 코토리는 쟁반에 컵 세 개를 얹은 채로 둘에게 다가왔다. 컵에선 달짝지근한 향기가 풍겼다.
 "코-토-리…."
 "미안 미키 쨩! 다음부턴 사무소에서 안 졸게!"
 코토리는 양손을 모아 미키에게 사과의 뜻을 보냈다.

 

 코토리는 둘에게 조심히 컵을 건네주었다. 미키는 코코아를 마시다 말고 고개를 살짝 들어 하루카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응? 왜 미키?"
 미키의 오랜 시선을 눈치챈 하루카는 커피잔을 내려놓곤 물었다.
 "오늘 데이트 하자!"
 "해도 다 져가는데?"
 하루카는 노을이 지고 있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치만 내일도, 모래도, 그 다음 날도, 다음다음 날도, 다다 다음 날도 스케줄이 꽉 차있는걸? 예전처럼 돌아가면 이렇게 보기도 힘들단 말야..."
 점차 미키의 어깨는 축 처졌다.
 "으흥-. 뜨겁네 뜨거워~. "
 코토리는 커피잔을 든 채로 둘에게 다가왔다.
 "이 언니는 다 이해할 수 있단다! 개인마다 취향은 모두 존중받아야 해. 그럼, 그럼."
 코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토리가 무슨 말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 거야. 그리고 하루카는 내가 데려가도 되지?"
 "앗. 미키, 잠깐만…."
 미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라벤더 색 가디건과 위장용 모자 등 걸치는 옷을 하루카에게 주고 억지로 사무실 바깥으로 내보냈다.
 "엣? 미키 쨩, 벌써 가?"
 마저 하루카의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가던 미키는 돌아서서 코토리를 째려봤다.
 "여기서 자도 상관없는 거야. 단, 하루카한테 이것저것 안 시켰으면 좋겠어."
 "응…. 잘 가렴."
 "그럼 바이바이 코토리~."
 웃는 얼굴로 미키는 코토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코토리도 그에 답해주었다.

 

 사무소 밖으로 나온 미키가 하루카에게 가방을 주자 그녀는 난색을 보였다.
 "미키, 아직 코토리 씨 일 다 못 도와줬는데…."
 "안 돼. 저건 코토리가 할 일이야. 하루카는 아직 쉬어야 하는 일이 남아있어."
 "쉬는 것도 힘드네."
 "오늘 미키가 도와주면 되는 거야. 아핫."
 미키는 하루카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근데 조금 전에 하던 일. 내가 볼 땐 엄청나게 많아 보였는데, 코토리 씨는 괜찮으실라나…."
 가방을 어깨에 멘 하루카는 뒤돌아 문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후. 다 자업자득이야."
 "으, 응."
 미키는 하루카의 팔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동시에 울리는 코토리의 절규에 둘은 웃음을 참았다.
 "히익?! 아직 잔업이 이렇게나…. 그, 그래! 원래 내가 할 일이었어! ……그래도 이건 너무 많잖아~!!"

 

 

#

 

 

 사무실 건물 밖으로 나가기 전, 미키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알이 없는 연두색 안경을 꺼내 쓴다. 팔목에 걸어둔 다홍색 머리끈으로 뒷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간단하게나마 변장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원래 변장 안 하지 않았어?"
 하루카는 베이지색 모자를 눌러쓰며 물었다.
 "요즈음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너무 많아져서, 거추장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어."
 미키는 불만을 툴툴거리며 차갑게 식은 철문을 열었다.
 "흐음… 별로 달라 보이지가 않구나."
 "그야 방송에서도 자주 했던 스타일이니깐."
 아직도 변장엔 서툴다. 항상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미키는 아미의 조언과 사무소의 아이들을 어설프게나마 따라 해 모습을 숨겼다.
 "아, 그러면 바꿔입을래?"
 "응?"
 하루카의 말에 미키는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자, 이거 써."
 하루카는 모자를 벗어 미키의 머리에 얹어주었다. 그 후 양쪽 리본은 풀어 가방에 넣어두고, 가디건의 주머니에서 노란색 머리끈을 꺼내 왼쪽 머리만 살짝 올려 묶었다. 마치 아미와 비슷해 보였다.
 "아미?"
 "응. 아미는 이상하다고 했는데 난 마음에 들어서. 여기에 안경까지 쓰면… 어때?"
 하루카는 안경을 치켜세웠다.
 "아미보다 작아서 귀여운 거야!"
 "으읏, 키는 신경 쓰지 말라구-! 그래도 내가 미키보다 두 살 언니인데…으으…."
 "아하핫, 작아서 더 귀여운 거야~."
 미키는 하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루카는 체념한 듯 말없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미키는 그녀가 목도리를 쉽게 둘러줄 수 있도록 허리를 살짝 숙였다.



 하루카는 스스럼없이 목도리를 매주다, 시선이 한 군데에서 멈췄다.
 "이거, 처음 보는 것 같네."
 하루카는 미키의 목걸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 이거…."
 미키는 하루카에게 줄 선물을 찾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휴대폰에, 미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갑자기 어제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언제나처럼 좋아한다는 말을 전했더니, 돌아온 것은 '아니, 난 미키가 싫어'라는 이상한 말장난뿐. 생각해보면 별거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제오늘 내내 미키의 속을 괴롭힌 몇 마디의 말.
 "하루카."
 미키는 힘없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왜?"
 "지난번의 그런 장난, 다시는 치지 마."
 "미, 미안…."
 "몰라. 하루카는 바보야."
 미키는 괜한 심통을 부렸다. 하루카를 만난 지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잊히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풀어지고도 충분하게 남았을 터인데,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하루카는 아직도 모르는 것인가. 모른 척하는 걸까. 미키는 심란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고개를 휙 돌리고 걸음을 멈춘 미키를 곤란한 얼굴로 지켜보던 하루카는 문뜩 무언가 떠올랐는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였다. 봉투 하나를 꺼내봤다가, 다시 넣고는 방금 것과 다른 연두색 리본이 장식된 봉투 두 개를 찾아 꺼냈다. 봉투 안에는 쿠키가 가득 담겨 있었다.
 "미키, 아-."
 검지와 엄지 사이로 보이는 주먹밥 모양의 쿠키 하나. 하루카는 평온한 얼굴로 미키에게 쿠키를 내밀었다.
 "이런 걸로 풀려고 하다니, 하루카도 참 치사한 거야."
 미키는 불평하면서도 순순히 쿠키를 받아먹었다. 달콤한 풍미가 입안을 돌았다.
 "아하하…. 음성사서함에 있는 건 안 들어봤나 보네."
 "딱히 안 듣고 싶어."
 분명 미안하다는 말일 텐데. 미키가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입장은 아닐뿐더러, 그것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내려가는 미키의 시선은, 하루카의 오른쪽 무릎에 붙여진 밴드를 확인했다.
 "하루카, 또 넘어졌어?"
 미키는 밴드를 가리켰다.
 "이건 며칠 전에. 오늘은 안 다쳤지요~."
 "넘어지긴 했구나."
 하루카는 무안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괜찮을걸."
 하루카는 밴드를 때다 말고 왼손만 급히 뒤로 돌렸다. 미키는 뒤로 돌린 손을 주시했다. 손가락에 밴드가 몇 개 붙여져 있었다. 보통이라면 다치지 않을 곳. 느껴지는 어색함.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 궁금해지는 지난밤이다.

 

 미키는 하루카에게 받은 쿠키 봉투를 조심스레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방금 주려던 선물은 후일으로 미뤘다. 자연스레 건네줄 시간을 기다리며.
 "미키."
 하루카는 자연스레 미키의 손을 잡았다.
 "왜 하루카?"
 "프로듀서 씨한테 들었어. 진학 안 한다며?"
 "응."
 "저번엔 어디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하루카가 없으니까."
 "엣? 나?"
 하루카는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미키에게 왜냐며 물었다.
 "하루카도 안 했으니까 미키도 안 할 거야."
 "못 한 거긴 한데…."
 하루카는 볼을 긁적였다.
 "어쨌든 안 할래."
 "요즘 부쩍 어리광이 늘었네~."
 "이제 어리광 같은 거 절대 안 부려."
 미키는 손을 놓고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 안 돼요? 진심으로 하고 싶은 걸 마음속에 꿍하고 두다간, 나중에 정-말-로 후회한다구?"
 "후회해도 돼……."
 미키는 중얼거리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후회할 짓은 해버렸다. 그 때문에 더더욱 똑같은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후하-. 나도 다시 도전해볼까나~."
 하루카는 밤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말에 미키의 눈이 확 떠졌다.
 "정말?"
 "응."
 미소를 지은 하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카가 그래 준다면 미키 힘낼게! 꼭 같이 다니는 거야!"
 미키는 하루카의 양손을 잡고 기뻐하다 문뜩 예전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하루카도 같이 하면 안돼?'

 

 분명 억지로 부탁했다가,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다. 그녀의 마음을 이용했다. 거절하지 않는 모습을 보곤 착각해버렸다. 계속 이래도 된다고.
 "아니, 그냥 미키 혼자서도 괜찮아."
 미키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이 하루카씨는 그쯤이야 문제없어요? 그리고 절대 예전처럼 무리하지는 않는다구?"
 하루카는 떨리는 미키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이렇게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더 이상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
 "하루카…."
 화색이 돌아온 미키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는 큰 소리로 같이 힘내자며 외쳤다. 이에 하루카는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 잠깐 미키, 쉿!"
 "앗."
 행인들의 시선을 느낀 미키는 목소리를 낮췄다.
 "꼭, 꼭 힘내서 같이…!"

 

 

#

 

 


 "치하야 씨, 치하야 씨. 이거이거 잘 모르겠는데 가르쳐줄 수 있어?"
 미키는 포스트잇으로 표시해둔 책을 활짝 펼쳐선 손가락으로 문제 몇 가지를 가리켰다.
 "음? 이건 말이지…."
 치하야는 미키가 준 펜을 들고 문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직후 망설임 없이 식을 술술 풀어 답을 적어냈다.
 "대략 이런 식으로 풀면 돼."
 "역시 치하야 씨인 거야! 다음에 또 물어봐도 돼?"
 "시간 날 땐 언제든지 물어봐. 내가 아는 한에선 가르쳐줄게."
 어제저녁, 하루카와 헤어지고 난 뒤 집으로 들어온 미키는 책장에 조금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꽂아둔 책들을 모두 꺼냈다. 그 일 이후로 영 의욕이 생기지 않아 그만둔 학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무소 안의 학업 열기가 대단한걸."
 가방 안에 서류뭉치를 집어넣고 있던 프로듀서는 감탄했다.
 "하루카,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미키가 저렇게 180도 변한 거야?"
 "그게……."
 "신기하네.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나."
 프로듀서는 하루카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루카는 눈치에 못 이겨 그가 원하는 대답을 말했다.
 "같이… 하자고 했어요. 진학."
 "오, 잘됐다. 드디어 내가 고대하던 하루카의 모습을 보겠구만."
 프로듀서는 하루카를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루카는 곤란하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둘의 대화를 힐끗힐끗 엿듣고 있던 미키는 그제야 둘에게 다가갔다.
 "응? 뭔데, 뭐야 허니?"
 "예전에 하루카의 다른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거든. 그때 난 파티쉐가 좋다고 했었어."
 "역시 허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미키도 하루카는 그게 제일 어울린다고 생각해!"
 "분명 프로급의 실력인데, 이렇게 우리한테만 보여주는 건 희대의 낭비야, 하루카."
 어느새 다가온 치하야는 둘의 말에 동조했다.
 "맞다 치하야, 잠깐 타루키정에서 옷 좀 가져온 다음에 바로 갈게."
 프로듀서는 치하야에게 말한 뒤 서둘러 타루키정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사무소에서 미키가 이렇게 진지하게 있는 건 오랜만이네."
 하루카의 말에 미키의 입이 삐쭉 나왔다.
 "무으-. 하루카한텐 언제나 진지했던 거야."
 이에 치하야도 미키와 같이 대답했다.
 "나도 하루카한텐 언제나 진지해."
 "치하야 쨩은 너무 그래서 싫어"
 하루카의 능청스런 농담 한마디에 치하야는 얼어붙었다.
 "내 딴엔 최대한 힘내고 있는데, 맨날 별로라고 하는걸."
 "아, 아니, 그건."
 치하야는 당황했다.
 "이젠 안 그러니까…, 그러니까… 싫어하지 말아줘…."
 치하야가 울적한 반응을 보이자 반대로 하루카가 더욱 당황했다.
 "치, 치하야쨩?"
 하루카는 치하야를 달랬다.
 "농담이야, 농담…! 난 그런 매사에 철저한 치하야 쨩이 좋아."
 "치하야."
 프로듀서가 옷을 걸치고 돌아왔다.
 "치하야? 이제 슬슬 가도 될까?"
 그는 되물었다.
 "아, 아 네. 그럼 하루…."
 '에-엣취!'
 하루카의 재채기에 사무소의 모두가 하루카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응? 하루카, 감기 걸렸어?"
 치하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서."
 "다행이야. 요즘 환절기니까 혹시나 했어. 그리고 또 저번처럼…."
 치하야의 말에 사무소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응. 아, 치하야쨩도 프로듀서 씨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하루카는 나가는 둘을 사무소 문까지 마중했다. 다시 하루카가 소파에 앉으려는 순간 미키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절실하게 붙잡았다.
 "하루카가 요번처럼 입원하면 미키가 너무 아픈 거야."
 미키는 울먹였다.
 "갑자기 쓰러져서 무지 놀랐다구…."
 "이제 다 나았으니까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정말이지? 정말 괜찮은 거지?"
 "응. 정말로 문제없어."
 하루카가 미키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미키의 죄책감을 조금씩 스러지게 했다. 자신 때문이랴, 굳게 닫혀있던 마음이 풀어져 갔다.

 "응? 하루카 쨩, 쓰러졌다니?"
 사무소의 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유키호의 모습에, 둘의 거리는 급히 멀어졌다.
 "우왓?! 어, 유, 유키호? 아미랑 마미랑 같이 간 거 아녔어?"
 "으응, 두고 온 게 있어서 다시 왔어. 그보다 아까 그게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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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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