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10-

댓글: 0 / 조회: 1658 / 추천: 0


관련링크


본문 - 10-28, 2012 12:27에 작성됨.

가히 우리 팀 사상 초유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맹세코 내 야구인생에서도 고교시절을 제외하면 저런 건 본적이 없다. 하물며 일반인이 대부분인 팀원들은 어떻겠는가. 

“쟈들 뭐하는 아들이고?”

쌀집 아저씨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녀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그러니까 이야기의 시작은 엿새 전. 내가 미키와 함께 자다가 아미, 마미에게 장난을 당했던 그 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날. 머리끝까지 분노한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미의 휴대폰으로(저번에 내게 행운의 편지를 보낸 그 번호가 마미의 것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앗? 선수오빠한테 먼저 전화가 올 줄은…]

[에에? 선수오빠한테 온 전화야? 응~후~후. 역시 아미랑 마미를 잊을 수 없었다던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하고도 태연하게 웃고 있는 두 악동에게,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무시무시한 말들을 속사포같이 쏟아냈지만, 여백이 부족해 여기에는 남기지 않겠다.
어쨌든, 대폭발 해버린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두 소녀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후였다.

[히잉… 하지만, 선수오빠 자는 모습 귀여웠었고. 그냥 장난으로 했을 뿐인데. 으흑.]

[이렇게 화낼 줄은 몰랐는걸. 흑. 선수오빠 무서워… 으엥…]

결국 이렇게 되면 나쁜 놈은 나였다. 애들 장난을 가지고 그렇게 쏘아댔으니. 나도 정신을 차린 다음에 내가 너무 심했나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 아아. 여자아이의 눈물에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남자.

“미, 미안. 내가 심했던 거 같다. 오늘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지는 바람에 그만… 진짜 미안해. 그만 울어. 응?”

하지만 휴대폰 너머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3년 일생의 반이 넘게 야구만 파온 사람에게 여자아이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리 만무했고,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달리 없었다.

“내, 내일 점심이나 저녁에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잠시 침묵. 5초나 되었을지는 의문인 시간이 나에겐 5분같이 느껴졌다.

[훌쩍… 정말로?]

“그, 그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말해!”

[뭐든지?]

“그, 그, 그래…”

[아미는 회전초밥 먹고 싶어. 마미도 그렇지?]

[응. 그리고 디저트로 고저스 세레브 푸딩도. 아미도 그렇지?]

[응.]

회전초밥에 고저스 세레브 푸딩. 반사적으로 옆에 놓여있던 지갑을 들어 안을 보았다. 한숨이 나왔다. 

[…안 돼?]

마미의 목소리인지 아미의 목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또 울기 전에 막아야 한다.

“돼! 좋아. 사줄게. 내일 저녁에!”

[정말?]

[와! 선수오빠 최고야!]

“그래… 실컷 좋아해라.”

내일은 은행에 들러야겠다. 이번 달 생활비는… 괜찮아. 맥주를 줄이면 된다. 
그날 밤. 나는 리츠코를 포함해 13명의 아이돌들이 내 앞에서 동시에 울음을 터뜨리는 악몽을 꾸었다. 눈을 떴을 때 식은땀으로 침대가 축축해졌을 만큼 무서운 꿈이었다.



다음날 저녁. 아미와 마미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약속장소인 회전초밥집 앞에 도착했다.

“아. 선수오빠. 미안미안. 일이 살짝 늦었어.”

“응~후~후. 오래 기다렸어, 아가씨?”

“누가 아가씨냐. 자. 들어가기나 하자. 나도 배고파졌다.”

““라저-!””

그래. 이미 각오는 했다. 아미랑 마미는 지금 열세 살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체형이기도 하고, 돈이 지금 내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깨져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자아. 와라.

하지만 예상 외로 아미와 마미는 느긋한 페이스로 접시를 비워가기 시작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먹는 게 시원찮다?”

내 말에 아미와 마미는 슬쩍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나를 향해 배시시 웃어보였다.

“사실은 여기 오기 전에 간단하게 요기하고 왔어.”

“응? 왜?”

“하지만… 배고픈 상태로 이것저것 다 집어먹으면, 선수오빠 지갑 사정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게 될 테니까.”

“요즘 선수오빠. 우리들이나 다른 언니들 때문에 지출 심하지 않았어?”

“허이구. 니들이 언제부터 그런 거 생각했다고.”

“하지만. 우리들 엄연히 아이돌인 걸.”

“일을 하는 우리들이 백수인 선수오빠에게 자꾸 얻어먹는 건,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 같달까…”

…이것들이.

“야. 누가 백수라는 거야. 난 아직 만나지 못한 꿈을 쫒고 있는 사람이라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인지 궁금해서 릿쨩한테 물어봤는데. 릿쨩이 말하길, ‘그게 바로 백수야.’ 라고 했어.”

리츠코오오오오오오!!
머리가 지끈거렸기에 잠시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자기들 나름대로 나를 생각해주는 건가. 거 참. 리츠코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발언은 고사하고 일단 고맙긴 하네.

“걱정 마시지. 프로입단 계약금이랑 2년 연봉은 아직 내 통장에 있거든.”

“에? 정말? 얼마나?”

“그건 금지사항이다.”

“헤에… 그럼 우리. 이럴 필요가 없는 거네. 아미.”

“응. 마음껏 먹어도 되겠네. 마미.”

“그럼 일단…”

“대뱃살부터-!”

아아… 그냥 닥치고 있을걸. 역시 이놈의 입이 방정이라니까. 그래도 맨날 장난할 궁리만 하는 꼬맹이들 주제에 날 그렇게 생각해줬다니 거 참 기특하구만. 오늘 정도는 좋을 대로 하게 해줘도 되겠지.

“고맙다.”

“응?”

“뭐가?”

“그런 생각이라도 해줘서.”

내 말에 두 사람은 아까 전과 똑같이 서로를 한 번 바라본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씩 웃었다.

“히히…”

“그래도 탈날 정도로 먹진 마라. 미련하게 먹고 배탈이라도 났다간 또 내가 후폭풍 맞을 것 같으니까.”

““응!!””

그 뒤에는 별 말 없이 서로의 접시를 비우는데 집중했다. 그렇게 각자 배를 채우고, 후식으로 나온 커피와 주스를 마시는 동안에, 그녀들은 내가 알고 싶어 할 것 같다며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난 전혀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들에겐 그저 수다 떨 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마미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아미는 남아서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서 유키뿅이 구멍파고 들어갈게요---옷 하고…”

“저, 정말이냐…”

유키호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남자들도 요령이 없으면 삽으로 자기가 들어갈 만한 구멍을 파는 건 어려운 일인데. 유키호는 의외로 대단했구나.

“아. 맞다맞다. 사장님이 선수오빠가 어제 대활약한 걸 듣고, 선수오빠에게 보답을 하고 싶다고 했어.”

“응? 보답이라니… 난 필요 없는데. 보답 받을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내일 가서 필요 없다고 전해드려.”

“그래서 우리들이…”

“자, 잠깐 아미!”

마미가 깜짝 놀라 부리나케 달려와서 아미의 입을 막았다. 아미는 몇 번 웁웁거리더니, 곧 뭔가 알았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응? 니네들이 뭐라도 하기로 한 거야? 뭔데?”

그러자 마미는 뭔가 대단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으응? 아하하. 아무 것도 아냐. 아무 것도.”

“응! 선수오빠. 어서 잊어버리는 게 좋아. 아, 아하하.”

두 소녀의 표정은 야구장 외야에 축구 골대가 있는 것만큼 어색했다. 이건 뭔가 있다. 나 몰래 뭐라도 하는 건가?
이건 문제다. 내 성격이 또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 아닌가. 이런 찝찝한 걸 그냥 넘어가는 건 절대로 못한다.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지.

“뭔데. 뭐라도 해주려고 한 거야?”

“아,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그, 그래! 선수오빠. 빨리 커피나 마셔. 아니면. 아 아미랑 러브샷이라도 할까용~?”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니들. 뭔가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아아아아아아아니? 아아아아무 것도.”

“일부러 말 늘리지 마. 더 수상해.”

두 녀석을 지긋이 쏘아보자, 서로 내 눈을 피해 엉뚱한 곳을 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이 더더욱 수상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어, 어머… 그렇게 보시면 부끄럽사와요.”

“마미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잉~”

일부러 그런 건지, 아미와 마미는 목소리를 크게 내서 주변 시선이 자신들에게 향하도록 했다. 지금 상황은 제 3자들이 보기엔 꼭 내가 아이들을 윽박지르는 걸로 보이기에 딱 좋은 상황이기에, 나는 혀를 차며 의심의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만, 꼭 알아내고 말겠어. 내 집념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커피도 다 마셨겠다. 계산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따라오는 두 사람이 티격 대는 소리가 들려 슬쩍 귀를 기울여보니, 마미가 아미를 책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나 뭔가 있다.

회전초밥집을 나온 후, 아미와 마미는 배가 부르니 됐다고 했지만, 이왕 서비스해준 김에 고저스 세레브 푸딩인지 뭔지를 포장해서 두 사람에게 주기로 했다. 물론 내 것도 하나 따로 포장해서.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를 걱정해준 사람은 부모님과 누나를 제외하면 이 녀석들이 처음이었으니까.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 물론 그 걱정의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원래부터 사주기로 되어 있기도 했고.

“역시 선수오빠는 친절해.”

“반해버리겠어.”

“니들이 반했다고 해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아. 적어도 여섯 살은 더 먹고 와서 말해라.”

“그때쯤이면 선수오빠는 선수아저씨가 되어있겠네?”

“…아저씨라니. 지금부터 6년 후라고 해도 30살도 안 되거든? …뭐. 누구한테는 지금도 아저씨라고 불려지고 있지만.”

“그럼 우리도 지금부터 선수아저씨라고 불러볼까?”

“하지 마! 그냥 오빠라고 해.”

“알겠어. 선수오빠.”

“아니, 이왕이면 그냥 오빠.”

“선수아저씨.”

“…그냥 선수오빠라고 하던가.”

내 자포자기한 표정을 본 두 소녀는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 선수오빠. 다음 시합 언제야?”

“다음 경기라면 모레 있는데.”

내 대답에 두 소녀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동시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녀석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럼 다다음 시합은?”

“다음주… 음. 5일 후에 있네.”

“5일?”

“그래.”

“응~후~후. 알겠어. 그럼 선수오빠. 우린 이만 갈게!”

“고마웠어-!”

“아아. 그래.”

아미와 마미를 보냈다지만, 나의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곧바로 알아보기로 하고 슬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와서 곧바로 푸딩을 꺼내들었다. 한 손은 스푼에, 한 손은 휴대폰을 들고 번호를 눌렀다. 바로 미우라 씨의 번호였다. 미우라 씨라면 왠지 술술 이야기해줄 것 같은 이미지니까. 
전화를 걸 명분은… 아. 그거면 되겠다.

[여보세요? 아. 야구선수 씨?]

“아. 예. 아하하…”

[무슨 일이신가요?]

“아. 그게…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 아미랑 마미랑 회전초밥 집에 갔는데…”

[어머, 어머. 셋이서 데이트라도 하셨나요?]

“그럴 리가요. 그 녀석들이랑 데이트를 했다간 뭔가 여러모로 끝장이 날 겁니다. 그게 어제 애들이 장난친 것 때문에 전화로 화를 냈다가 그만… 애들을 울려버려서 사죄하는 뜻으로…”

[후훗. 야구선수 씨. 아미쨩 마미쨩은 아직 열세 살이랍니다. 아직 장난기가 많이 남아있을 나이에요.]

“그, 그렇지요.”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과연 미우라 씨보다 연상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어떻게 봐도 누나 포지션이잖아. 그것보다, 부끄럽구만. 아미와 마미도 그렇고, 이오리나 미키도 그렇고, 녀석들을 상대할 때는 내가 어른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회전초밥 집에 갔는데… 다음은 어떻게 됐죠?]

“아. 어쨌든 가서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건데, 그쪽 사무소 사장님이 제게 보답을 하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예? 아. 아아… 그랬지요.]

오오. 넘어온다. 넘어온다.

“그게 무슨 보답이었나요? 딱히 보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내용이나 듣고 싶어서요.”

[어머. 아미쨩이랑 마미쨩이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예. 아미가 말하던 도중에 갑자기 마미가 비밀이라면서…”

[아.]

미우라 씨가 감탄사를 내뱉은 것과 동시에 나 역시 아차 싶었다. 이걸 말해버리면 당연히 미우라 씨도 이야기 하지 않을 게 뻔한 것 아닌가!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 미우라 씨는 ‘그랬었지…’라고 중얼거리며 장시간의 침묵을 유지했다.

“저… 미우라 씨?”

[예? 아. 정말 죄송하지만. 저.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끊어야 할 것 같네요.]

“예?”

[그, 그럼 이만. 편히 쉬세요.]

끊어졌다.
궁금증은 마치 만년설산 위에서 굴린 눈덩이같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알아내야!

[응? 미키는 그런 거 모르는 거야. 아후… 아저씨도 잘 자.]

[저, 저는 모, 모르는 일이에요. 그럼 동생들을 재워야 하니 이만 끊을게요. 야구선수 씨.]

[진실로, 저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답니다. 그럼 편안한 밤이 되시길.]

[뭐? 그런 멍청한 질문이나 하려고 이 이오리쨩에게, 그것도 이런 야밤에 전화를 한 거야? 정말. 바보 아냐?]

[예? 보답이라니… 사장님에게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 걸요. 그런 말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제가 알았겠죠. 아마 아미가 야구선수 씨를 골리려고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요?]

이상. 내가 번호를 알고 있는 765 프로덕션 소속의 아이돌들과 리츠코에게 전화한 결과였다. 염치없음을 무릅쓰고 리츠코에게까지 물어봤는데… 이걸로는 틀려먹었다. 어떠한 정보도 캐낼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야요이가 귀에 확 들어올 정도로 당황하긴 했지만… 역시나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내일 사무소에 직접 찾아가고 말리라. 물론 명분이야 충분히 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곧바로 차를 몰고 765프로덕션 사무소로 향했다. 
어제 아미에게 들었지. 오늘 미키가 혼자 무슨 일을 하러 나간다고 했었지. 미키에게 접근해서 이것저것 도와주겠다고 하면 미키는 당연히 승낙할 거고, 같이 있으면서 정보를 캐내면 간단하다는 말씀. 아아.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작전이다.
나는 사무소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미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리츠코를 만나면 눈치를 챌지도 모르니, 그녀와 만나지 않고 어떻게든 미키를 나오게 해야 했으니까.

“여보세요?”

[응. 미키인 거야.]

“미키. 지금 어디야?”

[나? 세트장.]

응? 뭐라고?

“세트장…이라니?”

[미키. 오늘 케이블방송 미니시리즈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게 된 거야.]

“아, 아니. 그걸 묻고 싶은 게 아니라. 어째서 벌써 거기 있냐고.”

[응? 미키. 오늘 현장직행이었는걸.]

하느님 맙소사. 나의 원대한 계획은 첫발부터 패망의 길을 걷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대체 여기 왜 온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아미에게 더 자세히 들었어야 하는 건데!

“아… 알겠어… 그럼 수고하도록.”

[응!]

전화를 끊자 허탈감이 온몸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건만. 이대로 나는 쓸쓸히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얼레. 야구선수 씨?”

“어. 정말이다.”

차로 돌아가려 몸을 돌리던 차에,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마코토와 히비키였다. 

“여긴 웬일이야. 야구선수. 누구 만나러 왔어? 미키라면 오늘 현장직행이라구.”

“그건 나도 알아. 그나저나, 씨는 어디 갔냐.”

“뭐 어때. 그 편이 더 친근하고 좋잖아.”

히비키는 덧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매력적인 미소에 더 이상 뭐라 할 기운조차 빠진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근데. 그러는 니들은 어디 가냐?”

“우리? 우리는 저어기. 실내구장.”

“거긴 왜?”

“나랑 마코토. 오늘 야구용품 모델 하기로 했거든. 오랜만에 들어온 일이니까. 기합 팍 넣고 갈 거라구!”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으래… 거기까진 어떻게 가는데? 리츠코가 태워주나?”

“아니? 우리끼리 가게 됐어.”

대쓰요!
어떻게 가든 목적지만 가면 된다. 미키로 안 되면 이 녀석들로 알아내면 되지! 

“이야. 거기까지 좀 멀 텐데. 아늑한 승용차 안에서 가고 싶지 않아?”

“응? 그 말인즉슨, 야구선수가 우리 태워주겠다는 거야?”

“물론. 그리고 나 야구선수잖아. 뭔가 그럴듯한 포즈 같은 거 가르쳐줄 수도 있다고?”

“호오… 그거 괜찮겠는데? 일단 편하기도 하고. 마코토는 어때?”

“괘, 괜찮을까요?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조금… 염치없이 덥석 태워다달라고 하기엔…”

히비키는 곧바로 넘어왔지만, 마코토는 역시 처음 만날 때부터 서스럼 없었던 히비키와는 달리 어느 정도 나와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쉽게 넘어올 것 같지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마. 난 그저 귀여운 여자아이 둘이서 버스타고 먼 곳까지 가는 걸 볼 수가 없을 뿐이니까.”

“헤헤… 역시 야구선수랑은 뭐가 통한다니까. 이런 귀여운 여자아이 둘이 자가용도 없이 가는 건 역시 아닌 것 같지?”

히비키는 씩 웃고 넘겼지만, 마코토는 갑자기 눈을 번쩍번쩍 빛내더니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와서는,

“귀여운 여자아이… 둘이라고 하셨나요?”

“응. 둘. 뭐가 잘못됐어?”

“그 말씀은, 저 역시 귀엽다는 소리?”

그냥 빈말로 한 소리였지만, 두 주먹을 자신의 입 앞에 대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코토는 정말로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마코토도 충분히 귀엽다고 생각하는데. 왜?”

“이야… 이것 참. 쑥스러워서… 에헤, 에헤헤…”

이 정도의 반응이 나올 줄 몰랐던 터라 히비키 쪽을 흘끔 바라보자, 히비키는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마코토는 귀엽다는 말보다 멋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와서 말야. 자신의 여성다움을 어필하고 싶은데 왕자님 컨셉으로 나가게 되서 내심 불만인 모양이더라구.”

“히비키 말이 맞아요. 저도 충분히 여성스러운 컨셉으로 나갈 수 있는데!”

그런가… 뭐. 내가 봐도 마코토는 웬만한 미소년보다 더 미소년 같은 외모이긴 하다만. 반대로 마코토는 진짜 여자이므로 그게 바로 콤플렉스일 수도 있겠지.
그럼 일단 이걸 이용해서 마코토를 꼬시는 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넌 충분히 여성스러운 컨셉으로도 먹힐 거야.”

“여, 역시 그런가요. 에헤헤헤…”

마코토는 금새 고양이 입이 돼서는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이걸로 마코토도 넘어왔군. 뭔가 쉬운데.

“어쨌든, 자. 그럼 내 차로 가게 되는 건가?”

“네! 아… 폐를 끼치게 돼서 죄송해요.”

“신경 쓰지 말라니까.”

“그래, 그래. 마코토. 마음 편히 야구선수 차로 드라이브하자구.”

“넌 제발 신경 좀 써라.”

그렇게 두 사람은 내 차를 타고 촬영장소인 실내구장으로 가게 되었다. 
두 사람이 안보는 틈을 타서, 나는 모 이름만 써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노트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계획대로다. 이대로 이 두 사람을 구워삶아 그 ‘보답’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리라.

“자. 그럼. 출발하자구!”

“차를 출발시키는 건 나거든요.”

0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