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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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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8, 2012 12:26에 작성됨.

“여보세요? 리츠코?”

[에? 실례지만 누구신지…]

“나야, 나. 아침에 미키랑 같이…”

[아. 야구선수 씨? 무슨 일로? 제 번호는 어떻게 알고?]

“미키에게 들었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지금 사무실에 남는 사람 있어? 다른 프로덕션에서 한 명을 펑크 내서 급하게 한 명 찾고 있는데. 거기도 안 돼?”

[에…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셔도…]

리츠코가 고민하는 동안 나는 스텝에게 혹시 모를 조건이 있나 물어보기로 했다.

“조건 말입니까? 그러니까… 아무래도 섹시 컨셉이니…”

[치하야가 있긴 한데.]

“걘 안 돼.”

섹시 이미지랑은 거의 광년 단위정도로 떨어진 녀석이잖아. 안 돼. 분위기도 그렇고 가슴도 그렇고. 여러 가지 의미로 탈락이다.

[히비키도 있네요.]

오. 히비키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는데. 건강미도 넘치고 흘끗 봐선 몸매도 좋아보였다.

“역시 늘씬해야겠죠.”

스텝의 말에 옆에 있는 미키를 포함해 멀리 있는 다른 아이돌들을 슥 둘러보았다. 그리고 계산을 끝냈다.

“미니어처도 안 돼.”

[미, 미니어처?]

“어쨌든 안 돼. 다른 사람은?”

[그 외에는… 야요이, 유키호, 마코토, 이오리 정도가 있네요.]

뭐 그리 동떨어진 애들만 가득이지. 그나마 유키호가 가능성이 있겠지만, 나만 보고도 깜짝깜짝 놀라는 녀석에게 섹시 컨셉의 촬영을 시켰다간 징징 짜고 난리가 나겠지. 이걸 어떻게 한다…

“아저씨. 타카네나 아즈사는 없대?”

미키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아. 그래. 그 둘 중 하나라면… 특히 미우라 씨라면!

“미우라 씨는 어디 있는데?”

[에? 지금… 댄스 레슨을 받고 있을 거에요. 지금이라면… 거의 끝날 시간이려나.]

그곳의 위치라면 알고 있다. 이오리의 하인 노릇을 한 어제 가본 적이 있다. 사무실과 가깝기도 하고.

“어. 그래. 그래. 그거다. 아즈사 씨. 이후에 스케줄 비면 어떻게 안 될까? 내가 지금 바로 차 끌고 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저도 지금 야요이와 이오리의 잡지 인터뷰가 있어서… 시간이… 코토리 씨! 아즈사 씨 다음 스케줄이 언제죠?]

아니. 분명 나를 꼬실 때마다 녀석들이 말하길, 매일 널널하니까 괜찮다고 했건만, 어째서 내가 끼어들 때만 바빠지는 거지 이놈의 사무소는? 아니면 아무리 널널하다고 해도 12인의 스케줄을 리츠코 혼자 관리하는 건 역부족인 건가.

내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기다리자, 미키와 스텝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보는 나마저 불안해지려고 할 때쯤, 드디어 리츠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구선수 씨?]

“아. 응. 어떻게 됐어?”

[됐어요. 아즈사 씨. 지금부터 네 시간 정도 비니까. 사장님께 허가도 받았고, 아즈사 씨에겐 제가 연락을 해둘 테니, 바로 오시면 돼요.]

“그런가. 다행이구만. 그럼 바로 출발할게.”

[예.]

전화를 끊자, ‘다행이구만.’이라는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의 얼굴이 다시 활짝 펴졌다.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가서 한 명 더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스텝의 얼굴은 마치 좋아하는 선수에게 직접 사인볼을 건네받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바로 데리러 출발할 겁니다. 보아하니 저쪽은 벌써 시작하고 있는 모양인데. 왕복 한 시간이면 안 늦을까요? 대충 빨리 잡아도 그 정도는 걸릴 것 같아서.”

“이, 일단 최대한 빨리 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촬영이 끊기게 되면 좀 곤란하긴 하겠습니다만…”

“…미키.”

“응?”

“어떻게 최대한 시간 좀 끌어봐. 저쪽에 협조를 구한다는 건 문외한인 내가 봐도 무리인 거 같으니, 네가 도와줘.”

그러자, 잠시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던 미키는 곧 소악마를 연상케 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저씨. 미키에게 해줘야 하는 게 한 가지 더 늘게 되는 거야.”

악마와의 거래인가. 거 참. 내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다 네 사무소에 도움이 되는 일이야. 거기에 뭘 바라면 되겠냐?”

“아후… 미키. 의욕이 없어져버린 거야. 이렇게 되면 촬영도…”

“알겠어. 두 가지. 두 가지 해줄게. 됐냐?”

“정말?”

“그래. 그래. 그래.”

“아핫. 그럼 미키. 조금 힘내볼게.”

“조금 힘내지 마. 전력을 다하라고. 젠장…”

곧바로 차 시동을 걸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스텝과 손을 흔들어주는 미키를 뒤로하고, 차를 몰아 촬영지를 완전히 빠져나와 도로로 진입한 다음 퍼뜩 생각났다.

내가 이렇게 까지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걸.

난 그저 미키를 태우고 왔다 가면 끝나는 일 아니었다. 이 내가 어째서 이런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된 거야! 난 프로듀서가 아니야. 그냥 백…꿈을 쫒는 사람일 뿐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물론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가 왜!!!!!”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밟았다. 마침 도로에 차도 별로 없을 시간이라 창문까지 다 열어놓고 밟아도 누구 하나 날 보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그렇게 분노의 힘으로 40분 거리를 20분 만에 돌파해 댄스 교습소에 도착. 씩씩거리며 문을 열었지만 안에는 트레이너밖에 없었다.

“얼레. 미우라 씨는?”

“아즈사 씨라면 방금 사무실로 돌아갔는데요.”

“그, 그, 그렇습니까. 이만 실례.”

문을 닫고 눈을 감은 후에 한숨을 푹 쉬었다. 뭔가 걷잡을 수 없어지기 전에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다듬어 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으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이쯤 되면 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없는 레벨이다.

“으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차문을 열고 루팡 다이브 수준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차 안에 미네후지코 따위가 있을 리는 없었지만. 

“으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밟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악!!!”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똥개를 칠 뻔했다. 간이 발바닥까지 떨어지는 줄 알았다. 잠시 차를 세우고 안정을 취하고 있자니, 그 이누미인지 뭔지 하는 히비키의 똥개한테 쫒긴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 다시 열이 받았다.

“으아아아아아-------!!!!!!”

골목길에서 혼자 이니셜D를 찍었다. 어찌어찌 사무소에는 도착했는데, 어떻게 도착하게 되었는지의 경위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차문을 박차고 나와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며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입구에 마코토와 히비키로 보이는 두 명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거의 날아가는 기분으로 계단을 훌쩍 뛰어올라 3층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아즈… 아니. 미우라 씨는!”

훗날 오토나시 씨는 그때의 내 표정을 ‘지옥에서 올라온 오니 같았다.’라고 표현했다.

“네, 네. 전 준비 됐답니다.”

“갑시다. 빨리!”

“그 전에, 조금 숨을 고르시는 게 어떨까요?”

“그럴 시간이 있다면!”

백을 매고 일어나 오토나시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미우라 씨를 숨을 헐떡거리면서 보고 있는데(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범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꼴이었다.), 밑에서 마코토와 히비키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야. 역시 야구선수 씨 맞잖아?”

“저번에 본 영화에 나온 그 사람들이랑 똑같은 건 줄 알았다니까.”

“히비키. 그 저번에 봤다는 영화가 뭔데.”

“응? 아. ‘28일 후’.”

“…내가 좀비인 줄 아냐.”

“아냐. 거기 나오는 건 좀비랑 달랐다구. 분명 그… 분노 바이러스였던가. 어쨌든 야구선수 씨랑 똑같았어.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가는 게. 우리 사무실 사람들 다 감염시키는 건 아닌가, 하고 우리도 놀랐다니까.”

“그, 그 정도였단 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이성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다들 놀란 표정으로 날 보고 있군. 유키호는 아예 혼절해버렸는지, 하루카가 옆에서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큼. 크흠. 어쨌든, 미우라 씨. 어서 갑시다.”

“네~에.”

갈 때처럼 폭주한 상태가 아니라 갈 때보단 시간을 약간 잡아먹고 도착했다. 그래도 왕복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게, 역시 갈 때 시간을 단축한 게 좋게 작용하긴 한 것 같다.

“괜찮겠어요? 미우라 씨.”

“예? 무슨 일이세요?”

“아니… 뭐… 갑자기 이렇게 돼서요.”

“아. 네. 괜찮겠지요.”

“괜찮겠지요가 아니라… 뭐. 됐습니다. 도착했어요. 저어기 미키 보이시죠?”

“네. 그럼 다녀올게요.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아~”

“별말씀을.”

미우라 씨가 촬영장소를 향해 가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기운이 쭉 빠지네. 나는 할 만큼. 아니. 그 이상을 했다. 이제 남은 건 저 둘이 하겠지. 흘끗 보니 사진작가인지 하는 사람은 미키에게 완전 홀려버린 듯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다른 아이돌들에게도 저랬으려나? 다른 아이돌이 찍는 건 보질 못했지만, 저 정도 극성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미키가 잘하고 있긴 한가보다.

목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가는 내내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으니 당연하지.) 시트를 뒤로 눕혔다. 끝날 때까지 눈 좀 붙여야겠다.



차 유리를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하품을 늘어져라 한 다음에 감기는 눈을 간신히 떠서 소리가 난 쪽을 보니, 문밖에서 미우라 씨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곧바로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끝난 겁니까.”

“예. 무사히.”

벌써? 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시간이 꽤 지나가 있었다. 내가 그렇게 오래 잤나. 
미우라 씨 옆에는 미키가 특유의 ‘아후.’하는 하품을 하며 서 있었고, 아까 전의 그 스텝 역시 같이 있었다. 스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대뜸 머리부터 조아리더니.

“정말 감사합니다. 765프로가 아니었더라면…”

“아. 그러니까 전 사람 태워다준 거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꼭 전해주십쇼. 그리고 여기서만 말하는 거지만…”

스텝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듯 뒤를 휙 돌아보더니, 

“이 두 분. 대단했다고. 촬영감독님이랑 작가님이 흡족해하시더군요.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다면서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1순위로 불러드리겠답니다.”

오. 그거 좋은 건가? 하긴 잘 나왔다면 좋은 거겠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밝게 웃었다.

“자. 그럼. 점심이나 먹으러 갑시다.”

“앗. 미키의 첫 번째 요구인 거야! 점심메뉴는 주먹밥!”

“주먹밥?”

“응!”

“알겠다. 찾아볼게. 미우라 씨도 괜찮겠어요?”

“네. 물론이죠.”

“와아-! 그럼 오늘 점심은 주먹밥인 거야!”



“으음~ 역시 주먹밥은 맛있는 거야.”

의외라면 의외인데. 주먹밥을 좋아할 줄이야. 좀 더 애들 취향의 음식을 선호할 줄 알았는데.

“에에? 미키. 아이가 아닌 걸. 열다섯 살이면 결혼도 가능해.”

“…가능이야 하겠지. 그래. 그럼 주먹밥 말고는 또 뭐가 좋은데?”

“음… 아. 딸기 바바루아.”

딸기 바바루아라면… 그거지? 달아 빠진…

“역시 애구나.”

“우우…”

“야. 주먹밥 입에 잔뜩 물고 말하지 마. 나한테 다 튄다.”

내가 손사래를 치며 의자를 끌고 뒤로 물러나자, 미우라 씨는 쿡쿡하고 작게 웃으며,

“전부터 생각했는데, 야구선수 씨는 미키쨩이랑 잘 어울리시네요.”

순간 움찔했다. 사실 열두 명 중에 취향이 어느 쪽이냐고 물으면 미우라 씨인데, 그 미우라 씨에게 저런 말을 듣는 건 조금 쇼크다.

“어울릴 리가요. 그냥 성격이 비슷하니까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거겠죠.”

“성격이 비슷한가요?”

“대충은.”

“하지만, 야구선수 씨는 어느 쪽이냐고 하면 츳코미 쪽이랄까…”

“에에. 아즈사. 그 말은 내가 보케라는 거야?”

“우후훗.”

그만큼 미키의 성격에 대해 아니까 츳코미를 거는 거지. 다른 사람들 앞의 나는 어느 쪽이냐면 보케라고 대답해야 하는 스타일이다. 실제로 팀에서는 내가 츳코미에 걸리는 쪽이니까.

주먹밥 하날 손에 쥐고 앞에 앉은 두 사람을 보았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미우라 씨를 쏘아보는(그 와중에도 주먹밥은 양손에 쥐고 있다.) 미키와, 한손을 자신의 뺨에 대고 상냥하게 웃고 있는 미우라 씨를 보며, 역시 아이돌은 아이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미키의 손은 보지 않기로 하고.) 

“사진. 보고 싶네.”

“응? 무슨 사진?”

“무슨 사진이긴. 오늘 너랑 미우라 씨가 찍은 사진 말이다.”

“그거라면, 샘플이 사무소로 올 텐데. 아저씨도 와서 보면 되잖아?”

“언제 올 줄 알고. 그리고 내가 오늘 이 꼴을 당하고 사무소에 또 갈 것 같냐?”

내 말에 미키는 다시 한 번 그 소악마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는 불안해졌다. 이 녀석이 또 무슨 꿍꿍이를…

“미키. 오늘 오랜만에 힘냈던 거야.”

“그, 그랬냐.”

“그게 다 아저씨가 내 부탁을 하나 더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그것 덕분에 힘낼 수 있었던 거야.”

“…생각해봤는데 말야. 나는 이 일과 관련이 하등 없는 부외자인데. 어째서 내가 그런…”

“하지만 이미 그렇게 약속한 거야.”

미키의 말이 맞다. 이미 그렇게 약속한 건 나 자신이다. 앞에 미우라 씨도 있는데 차마. ‘사실 그건 무효.’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언급했다시피 나와 성격이 비슷한 미키라면, 내가 섣불리 저런 말을 꺼냈다간 내게 엄청난 악감정을 가질 게 뻔했다.

“젠장. 마음대로 해봐. 하지만 말했다시피 프로듀서 해달란 말은 안 돼.”

“응.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아저씨. 프로듀서 빼곤 다 들어준다고 했었지?”

“내,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그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모르겠다. 그냥 들어준다고 했었지 다 들어준다고 하진 않은 것 같은데… 

“말했어.”

해, 했나? 어째 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기분이 들었다. 하여튼 이오리 때도 그렇고, 이 망할 놈의 입이 방정이다. 

“조, 좋아. 그럼 네 마지막 부탁이 뭔데?”

“그건 이따가 얘기할게. 아핫!”

더더욱 불안해졌다.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요구를 하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것도 팔자려니 해야 하나.

“어머, 어머. 역시 잘 어울리시네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정말로?”

미우라 씨의 말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건 누가 봐도 시달린다고 생각할 거라고. 그나저나 이 녀석. 왜 이런 말에는 반응하지 않는 거야? …라기보다는, 주먹밥에 온 정신이 다 팔려있군. 누가 저대로 업어가도 모를 것 같다.



점심을 먹고 사무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미키는 차 안에서 역시나 낮잠에 빠졌다. 저렇게 먹고 바로 자도 저 몸매가 유지되는 비결이 뭘까. 정말 비결이 있다면 그것대로 재미있겠네. 이 세상 거의 모든 여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테니. 

“다녀왔습니다.”

“다녀온 거야.”

“…그러니까 난 이만 간다니까.”

사무소에 도착하고, 나는 이오리 때처럼 곧바로 돌아가려 했으나, 미키가 나를 억지로 끌고 나오다시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무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안 돼. 사후보고는 제대로 해야 되는 거야.”

“솔직히 말하시지. 리츠코한테 혼나지 않으려고 날 끌고 온 거라고. 그렇지 않다면 사후보고를 부외자인 내가 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윽. 저, 정곡인 거야…”

하지만 리츠코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야요이와 이오리가 사무소에 있는 것으로 봐서는 또 다른 누구를 데리고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오토나시 씨도 보이지 않았는데, 야요이의 말에 따르면 하루카와 급하게 어딜 갔다고 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났다. 하지만 리츠코도, 오토나시 씨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난 그냥 간다?”

“아, 안 돼! 조금만 더 기다리는 거야!”

“언제까지? 말했잖냐. 나 조금 있다가 연습 있어서 안 돼.”

“그, 그래도 조금만!”

미키는 아예 내가 도망치는 걸 막겠다는 듯이 내 옆자리에 앉아 팔목을 꼭 붙들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태연한척 하기로 했다. 고작 열다섯 짜리 애가 팔을 잡았다고 철렁하다니. 이게 운동부의 폐해다.

“거 참. 그럼 30분만 더 기다린다. 그땐 얄짤없어.”

“으, 응!”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갑자기 피로가 온몸을 엄습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차에서 잠깐 눈 붙였다지만 차에선 개운하게 잠을 잔 게 아니고, 이래저래 정신적으로 몰려있었던 탓에…

“피곤하구만.”

슬쩍 옆을 보니, 맙소사. 벌써 잠이 들어있었다. 이대로 몰래 빠져나갈까 생각했지만, 자는 중에도 미키의 손은 내 팔목을 붙들고 있었다. 물론 깨어있을 때보단 그 힘이 약했지만.
그래. 30분만. 30분만 있다 가자. 그 정도면 그리 늦지도 않을 것 같고.


 
“응~후~후.”

“…음. 완성. 어때?”

“어머, 어머.”

아.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뭔가 수군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미와 마미와 미우라 씨가 앞에 있었다.

“뭐, 뭐야.”

“아, 아, 아무 것도 아냐. 선수오빠가 너무 곤히 자고 있길래.”

“응, 응. 정말 피곤했나보다~ 싶어서.”

“정말 미키쨩이랑 어울리신다니까요.”

아미와 마미는 그렇다 치고, 미우라 씨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 것과 동시에, 내 왼쪽 어깨가 어째 무거운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곧바로 금발의 폭포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키가 내 어깨를 배고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지금 상황파악이 안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상황파악이 안 되기인~ 보시는 그대로지. 선수오빠.”

“뭐가 보시는 그대로야.”

“미키미키랑 다정하게 머리를 맞대고 잠든 모습! 이 아미가 휴대폰에 그대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헉!”

“아후…”

내가 몸을 움찔 떨자, 미키가 머리를 뒤척이는 것이 어깨에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얼음이 되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뭐하는 짓이야. 당장 그거 못 지우냐.”

“응~후~후. 역시 선수오빠는 선수오빠네.”

“이름값을 하잖아.”

“이름값은 얼어 죽을 이름값이야. 너 가만 안 둬!”

“하지만 지워도 소용없는 걸.”

“왜.”

“이미 릿쨩도, 피요쨩도, 볼 사람은 다 봤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그걸 반증이라도 하듯, 옆에서 리츠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미키랑 친해지셨나 보네요… 풉!”

“친해지긴 무슨. 친해질 건덕지도 없었어. 근데 갑자기 왜 웃는 거야?”

“아, 아뇨… 그냥 보기 좋은 모습 같다고 할까… 아. 현장에서 있었던 일은 아즈사 씨에게 다 들었어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셨다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필요 없어. 내가 쓸 데 없이 오지랖만 넓어서 그런 거니까. 그럼 얘기 다 들었다니까 난 이만 간다.”

미키의 손에는 완전히 힘이 빠져있어 팔목을 쉽게 빼낸 다음, 어깨를 조심스럽게 빼냈더니 미키의 몸은 자연스럽게 내가 앉아있었던 쪽으로 넘어갔다.

“하여튼 사서 고생이야, 사서 고생.”

작별인사를 해오는 녀석들에게 대충 대답해준 후(그때마다 나를 보고 웃던데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네. 미키랑 자는 걸 봐서 그런가.), 차를 몰고 곧바로 야구장으로 향했다. 살짝 늦은 거 같은데, 또 감독님한테 걷어차이겠군. 엉덩이에 뭐라도 깔아놓고 갈까.
예상대로 내가 도착하자마자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진 감독님이었다.

“이 놈이. 지금이 몇 신…”

감독님은 내게 고함을 지르려다말고 인상을 찡그리더니, 내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는, 마침 옆을 지나가던 주장을 불렀다.

“왜 부르셨습니까. 감독님.”

“이놈 이거. 뭐라고 쓴 거냐.”

써? 뭘 써.
감독님의 말에 주장 역시 나를 빤히 바라보고는,

“로맨…티스트.”

순간 정적.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이, 이, 이놈이!! 혼날 것 같으니까 그렇게 나오는 거냐? 응? 으허허허허허.”

“와하하하핫! 로맨티스트는 임마. 로맨티스트 다 죽었다. 으흐. 푸하하하!!!”

설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을(못할) 상황이라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확인하니, 오른쪽 뺨에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로 로맨티스트라고 적혀있었다.
매직이었다.

그러고 보면, 분명 내가 깼을 때 아미랑 마미가…
이제야 알겠군. 왜 다들 날 보고 웃음부터 참았는지. 심지어 유키호조차도 날 보고 깜짝 놀라려다 풋 하고 웃음부터 터뜨렸었지.

망할 것들. 다음에 보면 가만 안 둘 거야.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것은 면했다만, 이런 걸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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