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힛키마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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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07, 2016 14:22에 작성됨.

학교로 돌아왔다. 즉,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언제나처럼 옥상으로 올라간다. 아니, 언제나처럼이라고 하기도 애매할지도 모른다. 765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하교 후에 곧바로 회사로 달려갔으니까. 일하지 않던 미래를 꿈꾸던 과거의 내가 보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릴지 모른다

 

뭐, 내가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대체 무엇에 홀려있던 것일까. 아이돌이 되어가는 소녀들을 보며 동경심이라도 품었던 것일까?

 

나도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무대 위로 나아간다─라는 것이 아닌, 그저 순수하게, 자신들의 꿈이나 목표를 이루어가는 그녀들의 발자취에 무심코 편승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 정말로 근성 없고 비뚤어진 녀석이니까, 쉽게 갈 수 있는 지름길이나 대리만족을 느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내세우는 예방선도 집어던질 수 있는 것이다

 

"형편없구만, 정말로......"

 

씁쓸함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그때,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학생들 중 하나가 외친다

 

"치하야다! 키사라기 치하야다!"

 

"......"

 

운동장의 정문에서, 키사라기가 당당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바보 같으니, 뭘 하는 거야? 이제 너는 유명한 아이돌이니까, 그렇게 당차게 학교 안에 들어오면 귀찮아지는 입장이라고

 

그때, 딱! 하고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입술만을 움직여 말했다.『거기서 기다리세요』라고. 언제부터 내 시력이 이렇게나 좋아졌는지 모르겠다. 아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도, 다른 애들까지 줄줄히 끌고 와서, 너랑 내가 단 둘이 만나는 걸 보면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하다 못 해 급수탑 위에 숨을까 생각도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때 보았던 그녀가 급수탑 위에 서 있었다

 

등까지 내려오는 길고 푸르스름한 흑발을 하나로 묶어올린 헤어스타일과 늘씬한 장신에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생기 없는 눈동자와 눈물점이 강조되는 미인.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 보더니,

 

"올라오고 싶으면 올라와.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지만, 너와 그녀의 스캔들의 방관자로 있는 것도 싫거든"

 

"......딱히 스캔들을 일으킬만한 짓은 하지 않았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서 딴죽을 걸었다. 나는 결백해. 절대로 그렇고 그런 일은 없다고 당부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겠지. 젊고 어린 미소녀와 미인들이 가득한 그곳에 젊은 남자라고는 프로듀서와 알바생 뿐. 프로듀서는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알바생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구나 나와 같이 알바생 역할로라도 써달라고 부탁할테고 그걸 거절하면 왜 나만 특별취급이냐고, 뭔가 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니냐고 바락바락 우기며 이상한 소동을 만들어 버릴게 뻔하기 때문이다

 

급수탑 위에 올라가 앉자, 그녀도 내 등에 자기 등을 맞대며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너와 나는 그녀의 친한 선배인 거야"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냐?"

 

"그냥 변덕, 이랄까...네가 765 프로의 뒷문에서 나오는 건 지나가는 길에 몇 번 본 적이 있거든"

 

나름 조심히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에게 들켜버린 건가.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녀석은 이 일을 가지고 이용해 먹을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으니까

 

"그래서...너, 이름이 뭐였지?"

 

그러자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는,

 

"카와사키 사키. 넌 자기 반의 동급생 이름도 모르는 거야?"

 

"우연히 귀동냥 하는 거라면 모를까...너도 같은 반의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네 이름 들어본 적 없다고"

 

"어라, 우연이네? 나도 마찬가진데. 넌 이름이 뭐야? 항상 구석에 처박혀 잠 자는 시늉만 해서 이름이 뭔지도 몰랐어(국어책 읽기)"

 

우와아......한 마디도 안 지는구만

 

"히키가야 하치만, 이다"

 

"토베나 하야마는 널 히키타니라 부르던 것 같은데?"

 

"내가 정정하지 않은 것 뿐이야"

 

잠깐, 너 내 이름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여러가지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키사라기가 옥상 위에 올라와 나를 올려다 보았다. 옥상문의 안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린다. 진짜로 다른 애들까지 데리고 올라와 버린 거냐. 아니, 그 녀석들이 먼저 올라온 거겠지

 

"3일만에 뵙네요, 선배"

 

"......무슨 생각으로 올라온 거냐"

 

키사라기. 분위기 파악을 한다면, 조용히 물러가라. 다른 여자애들의 이름이나, 765에 대한 건 언급도 하지 말고

 

"문자를 보내셨더군요. 전화번호부도 지우고, 완전히 없던 사람 취급하라고. 그게 제 앞길을 위해서 좋을 거라고 말이죠"

 

"너는...아이돌이야. 학교 선배라고 해도, 남자와 사적으로 아는 사이라는게 알려지면, 어떤 곳에서 물어뜯으려 들지 모른다. 너, 노래 부르고 싶다고 했잖아. 그 기회를, 사사로운 정 때문에 날려버리고 싶은거야?"

 

가라. 그냥 가. 제발 가다오. 여기서, 나를 또다시 끌어들이지 마

 

"솔직하지 못 하네"

 

등 뒤에서, 카와사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네가 할 소리는 아니라고 보지만...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그녀들을 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돌에게 남자는 팬. 그 이상도, 이하여도 안 되는 존재다

 

"오늘 찾아온 건, 미처 하지 못 했던 말이 있어서 입니다"

 

"......"

 

키사라기는 입술만을 움직였다

 

[모두를 대신해서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다

 

"그동안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열심히 해라"

 

765 프로의 아이돌들은 바보가 아니다. 분명 헤어짐에 아쉬워 하겠지. 그래도, 프로듀서와 사장님 그리고 오토나시 씨가 설득했을 것이다. 본인들도 내 배려를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일반인인 내가 아이돌과 엮였다간, 기레기들에게 신상정보는 물론이거니와 가족들도 전부 털릴 테니까

 

미나세의 배후에 있는 미나세 재벌이 나설 수도 없을 뿐더러, 나서면 나설수록 왜 그렇게까지 감싸는 거냐, 진짜 뭔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을 살 수 있다

 

키사라기는 옥상의 문을 닫고 나갔다. 옥상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학생들은 없었다. 아마 키사라기가 쫓아냈겠지. 침묵이 맴돈다. 답답함이 가슴 속을 채워나간다. 어깨를 넘어서, 섬섬옥수와 같은 손가락이 보인다. 그 사이에는 담배가 끼어 있었다

 

"한 대 피울래?"

 

"......너 담배도 피냐?"

 

"안 펴. 다만, 거리를 벌릴 때에는 이게 좋으니까 그런 거지"

 

그러고보니, 첫 만남 때도 싸구려 라이터를 손에 쥐고 놀고 있지 않았던가. 아니, 이제 그런 건 상관없다. 담배가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고 하던데...한 번쯤 경험해 볼까

 

"불 줘"

 

"여기"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빨아들여 본다

 

"켈룩, 켈룩...!"

 

맛 없어! 연기 구려! 숨 쉬기 곤란해! 목구멍이 아파! 그치만...이거 익숙해지는게 빠르다

 

"산다는 건...정말로 힘든 거구나..."

 

"이제 알았어?"

 

카와사키의 딴죽을 무시하고서, 나는 계속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담배 3대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뒤에, 급수탑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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