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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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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7, 2012 21:44에 작성됨.

[아저씨. 미키야. 오늘 마빡쨩을 행사장까지 태워다줬다며? 부탁이 있는데, 미키도 내일 오전부터 먼 곳으로 가게 됐어. 리츠코…씨도 무리일 것 같고. 미키적으로는 역시 아저씨가 차로 태워다줬으면 하는데. 안될까? 미키의 부탁인 거야.] 라는 메일이었다.

이것 참. 누굴 운전기사로 아는 건가. 이오리 때야 내가 하인이니까 그렇다 쳐도, 미키를 위해서까지 내일 하루 투자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대로 계속 해달라는 대로 해줬다간 속칭 호구를 잡힐 우려가 있다. 그러고 보니 내일 연습도 있지 않던가. 무엇보다 더럽게 귀찮기도 하고. 
물론 그 녀석들을 또 볼 수 있다는 건 메리트지만, 그것도 가끔의 행복이지. 너무 잦으면 귀찮기만 하다고.

마음을 정한 나는, 곧바로 미키에게 메일을 보냈다.

[귀찮아. 기각.]

메일을 보낸 뒤 5분 정도 지나고 신호음이 울렸다. 이번엔 전화였다.

“여보슈.”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 임마. 나도 내 생활이 있다고. 내가 진짜 프로듀서라면 모를까. 내 신분은 아직 백… 윽. 꿈을 쫒는 사람이거든.”

차마 백수라고 말하기엔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에에. 아저씨.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할 일 없잖아.]

눈앞에서 미키가 내 가슴팍에 비수를 꽂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 직설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어흠. 크흠. 부정은 못하겠다만 내일은 안 돼. 저녁에 야구연습도 있단 말이다.”

[그거라면 괜찮은 거야. 미키의 일. 오후면 끝나니까.]

“그럼 나보고 그 때까지 니 뒤꽁무니를 쫒아 다니다가 저녁에 바로 야구장으로 가라는 거냐.”

[응? 미키 뒤를 왜 따라와? 아저씨는 미키를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다시 사무실로 데려오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미키가 알아서 하는 거야.]

“음… 목적지가 어딘데?”

[사무실에서 그다지 멀지는 않은 거야. 그러니까…]

미키가 이야기한 곳은 차로 3,4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하지만 그 시간대엔 사람 많은 걸.]

뭐. 그것에 대해선 나도 충분히 미키의 심정에 동의한다.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입장에선 좋지만, 그 틈바구니에 끼기는 죽는 것만큼 싫다고 할까. 사람이 많은 건 좋아하지만 싫어한다.
휴. 그래도 이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시발점이기도 하고, 같은 라이프 모델을 공유하는 입장이기도 하고. 미키라면 한 번 정도는 도와줘도 되겠지.

“쯧. 알았다. 내일 몇 시까지 가면 돼?”

[에? 미키 도와주는 거야?]

“그래. 이번 한 번만.”

[됐다-!]

“됐다-!고 자시고, 잘 들어. 이번 한 번 뿐이야. 두 번은 없어. 그리고 다른 아이돌들도 이젠 안 돼. 아이돌은커녕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와서 픽업해달라고 해도 안 해줄 거야.”

[응! 정말 고마운 거야!]

“됐어. 이 기막힌 인연에 대한 보답 정도로 해두지. 아니면 톱 아이돌이 돼서 갚던가.”

[미키. 톱 아이돌이 되면 가장 먼저 아저씨한테 사인 해줄 테니까.]

“사인은 필요 없어. 그리고 그건 이미 히비키가 내게 써먹었다 실패한 방법이라고. 어쨌든, 그럼 네가 말한 시간까지 사무소로 가면 되는 거지?”

[응!]

미키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는 빈 맥주 캔을 들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러는 것도 좋겠지. 비록 귀찮은 건 싫지만, 미키와의 만남으로 시작해 요 며칠간 꽤나 즐거웠던 건 사실이다. 비록 화를 내거나 소리를 버럭버럭 지를 때도 있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 아닌가. 최소한 지금은 화를 낼 상대라도 있으니까. 은퇴 후 한참 시달렸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비하면, 지금은 애교 수준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내게 스트레스와 압력을 가하는 주체가 보인다면 그것에 대항할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고 어떻게든 대항책이야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면 손 놓고 두드려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후자 쪽이 더 아프고 가슴속에도 오래 남는다. 그래서 내 집에는 PC가 없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주먹에 맞을 바에야, 차라리 그들이 날 공격할 수단 자체를 막아버리기 위해.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가해자이고 내가 죽일 놈이겠지만, 그것이 정도를 넘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상황이 나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아마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까지 그들의 말도 안 되는 협박과 욕설은 계속되겠지. 만일 내가 자살이라도 하게 되면 그제야 겨 묻은 놈들이 똥 묻은 놈들을 나무라기 시작할 것이다. 너희의 그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을 상처 입히고 끝내는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고. 웃기는 놈들이지. 다들 똑같은 주제에. 이미 형벌이 끝나 피투성이가 되어 묶여있는 죄인에게 어떤 사람은 작은 돌을, 어떤 사람은 큰 돌을 던졌다고 해서 작은 돌을 던진 사람이 큰 돌을 던진 사람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하는 건가? 왜 돌을 던지는 행위 자체를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뭐. 죄인에게 돌을 던지는 게 무엇이 잘못이냐? 라고 당당하게 따지는 사람이 있다면 나야 할 말은 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하는 거고. 지금의 난 애석하게도 죽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물론 한참 심할 때는 하루에 몇 번이나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지만. 
그때 엄청 시달린 영향인지 지금도 모르는 사람이 다가온다거나 하면 심장이 꽤나 두근거리곤 한다.

만약 은퇴직전의 내가 은퇴하고 나서 이렇게 시달릴 줄 알고 있었더라면, 참고 뛰었을까, 은퇴를 강행했을까.
생각 좀 해보려다 이내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바보 같긴.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지금의 나는 여기에 있다. 뒤로는 갈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처지를 후회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물론 언젠가는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찾겠지만. 그 전까지는 지금같이 자유로운 것도 나쁘지 않다.



어째 휴대폰 벨소리가 어슴푸레 들리는 것 같아 잠에서 깼다. 당연히 배게 바로 옆에 있을 줄 알고 손을 더듬었지만, 휴대폰은 거기 없었다.  

“으아으아어어…”

비몽사몽인 상태로 비틀비틀 일어나 벨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 아니. 기어갔다. 휴대폰은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여, 으암~ 여보세요.”

[아저씨. 지금 어디쯤 와?]

“뭐?”

[어디쯤 오는지 묻고 있는 거야.]

다시 쏟아지려는 잠이 맨발로 달아나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맙소사.

“아아… 어. 그래. 지금 가고 있어!”

미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고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대충 씻고 대충 양치하고 대충 면도하고 대충 머리감고 튀어나왔다. 옷을 대충 갈아입다 양말을 손에다 끼워버린 후, 나도 모르게 ‘오오… 미스터 사코.’라고 중얼거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발에 신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달려 나가려다 거울로 내 상태를 확인한 다음, 부리나케 집 밖으로 뛰쳐나간 직후, 나갈 때와 같은 속도로 돌아와 내 방에 있는 차키를 가지고 다시 나갔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3초 동안 숨을 가다듬은 다음에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시간을 힐끔 봤다. 이대로 미친 듯이 밟고 가면 5분 오버다. 그 정도면 허용범위겠지.

하지만 내 그 생각은 오전의 교통사정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20분 오버타임으로 사무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늦어서 미안!”

사무소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본 것은 한손에는 가방을 들고, 한손으로 허리를 짚은 포즈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미키의 모습이었다.

“늦었어! 아저씨. 대체 왜 이리 늦은 거야?”

“이야… 그건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바다보다 높고 하늘보다 깊은 사연이…”

“뭔가 바뀐 것 같아.”

“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어, 어쨌든 그럴 사정이 있었어.”

사정이 있었다고 쓰고 잤다라고 읽지만. 짐짓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미키는 자신의 뒤편을 살짝 돌아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 아저씨. 그럼 이제 출발하자.”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날 처음 봤을 때도 목소리를 살짝 줄이는 것 같았는데.

“아니. 그래도 사무소 분들한테 인사는 하고 가야…”

“그럴 필요 없어. 아저씨 때문에 잔뜩 늦은 거야. 빨리 가지 않으면…”

“어머. 미키. 아직 안 갔니? 에? 어제 봤던 야구선수 씨?”

“코, 코토리!”

옆에서 오토나시 씨가 불쑥 튀어나온 것과 미키가 기겁을 한 건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그 연쇄반응으로…

“예? 미키가 아직 출발을 안했다니…”

뒤따라 나온 리츠코의 얼굴을 본 미키의 표정이 잿빛이 되었다. 리츠코는 놀란 표정으로 미키와 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더니, 뭔가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에서 빛이 번쩍하는 게, 보고 있는 나까지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에 움찔했다.

“미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보실까…”

“윽. 그, 그러니까…”

이쯤 되면 나도 자초지종을 알겠군. 리츠코나 사무소 사람들에게는 날 부른다고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랬다간 리츠코나 오토나시 씨가 당연히 반대했겠지. 

“설마 사무소 직원도 아니신 분에게 억지로 오라고 한 건 아니겠지?”

미키가 구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어미를 잃은 새끼고양이가 연상되는 눈빛이라 순간 두근거렸지만, 이쯤해서 한 번 골탕을 먹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응? 뭐야. 미키. 사무소 분들이 너를 통해 부탁해달라고 한 거 아니었어?”

안 그래도 뽀얀 미키의 피부가 아까는 잿빛이 되더니, 급기야 완벽하게 창백해졌다. 그와는 반대로 오토나시 씨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놀라는 표정이었고, 리츠코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미이키이잇---!!!”

“가, 가, 갔다 와서 설명할게!!!”

미키는 그대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우와. 무지하게 빠르구만.”

“죄, 죄송합니다. 야구선수 씨. 죄송합니다!”

리츠코와 오토나시 씨가 연신 고개를 꾸벅이기에,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어차피 내가 간다고 했고, 마음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싫다고 했을 테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일들 보세요. 지금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뭐.”

“하, 하지만…”

리츠코가 아직 죄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기에,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그녀의 등을 떠미는 시늉을 했다.

“아아.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미키 너무 혼내지 말고. 내가 하겠다고 한 거니까.”

“하지만 아까는…”

“농담이었지. 미키가 사무소에 말하지 않았다는 건 몰랐지만. 미키 스스로 부탁했다는 건 알고 있었어. 자. 늦은 것 같으니 이야기는 갔다 와서.”

“그, 그럼… 수고해주세요.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네이.”

사무소 건물 밖으로 나와 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가자, 얼굴에 ‘나 화났음.’이라는 글씨가 써져있는 것 같은 미키가 서있었다.

“출발하자.”

“흥! 미키. 가기 싫어졌어.”

“이, 이건 또 무슨 소리래.”

“하지만, 갔다 와서 리츠코…씨에게 혼날 걸 생각하면, 갈 마음이 안 나는 거야.”

“미안. 농담이었어.”

“농담도 농담 나름이야! 물론… 미키도 아저씨를 멋대로 부른 건 잘못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화는 내고 싶지만, 제대로 화낼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리츠코나 오토나시 씨에게 말하지 않고 멋대로 나를 불러낸 자신의 잘못이 가장 크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에잇! 이게 다 아저씨가 늦게 와서 그러는 거야! 빨리 왔으면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는데!”

“네. 네. 내가 다 잘못했어. 사과할 테니까 이제 가자. 늦었다며?”

“괜찮은 거야. 버스로 갔으면 늦었겠지만. 자가용으로 가면 충분한 걸.”

“그러냐. 그럼 어서 타자. 리츠코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 내가 다 말해놨으니까.”

우물쭈물 차에 타려는 몸짓을 보이던 미키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그래. 아까 말한 건 농담이고 내가 태워주겠다고 했다고 말했으니까. 리츠코도 별 말 없었고.”

“휴~ 그럼 다행인 거야. 자 어서 가자.”

미키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조수석에 탔다. 나 역시 운전석에 타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며 물었다.

“리츠코가 그렇게 무서워?”

“응. 리츠코…씨는. 화나면 정말…”

미키는 더 이상 아무런 말없이 부들부들 떨었다. 뭔가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자 팟! 하고 깨어난 미키는 빙긋 웃으면서,

“그래도 지각한 건 잘못한 거니까. 미키에게 뭔가 해줘.”

“…뭘 바라는 거냐. 나한테.”

“으응… 프…”

“프로듀서가 되어달라는 말만 빼고 들어주지.”

“윽.”

간발의 차로 선수를 쳤다. 네가 그렇게 나올 줄은 알고 있었지. 

“왜 하기 싫은 거야? 다들 아저씨가 우리들의 프로듀서가 되길 바라고 있어. 어제 마빡쨩이 갔다 와서 한 말 듣고 나서는, 리츠코…씨도 내심 아저씨가 프로듀서를 해주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았어.”

“뭐? 마빠… 이오리가 뭐라고 했길래?”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도움을 받았다고.”

“아니. 난 한 게 없거든.”

정말 한 게 없는데. 아니. 그것 이전에. 이오리가 나한테 도움을 받았다고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응!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데코쨩 기준의 아주 약간이면, 분명 아저씨가 뭔가 큰 활약을 했을 거라고, 우리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는 거야.”

“화, 활약은 무슨. 진짜 개뿔도 한 게 없다니까.”

“응? 아저씨. 개한테는 원래 뿔이 없어.”

“…그건 당연한 거고. 비유적 표현이야. 비유적 표현.”

“흐응. 그래? 어쨌든. 왜 프로듀서를 하기 싫다는 거야?”

“귀찮잖아.”

“화, 확실히 리츠코…씨를 보면 항상 바빠 보이긴 하지만, 아저씨가 들어오면 괜찮을 거야.”

“그건 리츠코가 괜찮은 거지. 내가 괜찮은 게 아니잖아.”

미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마 날 설득할 구실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곧 얕은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거 설마…
옆을 흘끗 보니, 미키는 생각을 하던 모습 그대로 잠이 들어있었다. 정말 뜬금없잖아. 이 녀석. 조수석에서 그렇게 자도 되는 거냐. 완전 운전기사 취급이구만.

깨울까 생각했는데 너무 곤히 잠들어있어 깨우기도 뭐했다. 이렇게 곯아떨어진 걸 보면 어제 잠이라도 설친 거 같은데, 지금이라도 푹 자게 내버려두자. 그러고 보니 미키의 일. 뭔 촬영 어쩌구하는 일이었던 거 같은데 자고 일어나서 괜찮을라나.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미키가 말했던 곳으로 차를 몰고 가니, 저만치서 척 보기에도 뭔가 촬영세트 비슷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슬슬 미키를 깨울 때가 된 것 같았다. 왼손으로 미키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어이. 미키.”

“우우…”

“미키. 이제 일어나. 다 왔다.”

“으응… 벌써…?”

“벌써는 무슨. 정신없이 잤나보구만.”

“아후…”

계속 어깨를 흔들며 이야기하자, 미키는 그제야 귀여운 소리로 하품을 하며 살짝 기지개를 켰다.

“잘 잤냐.”

“응. 좋은 아침.”

“좋은 아침 다 죽었다. 지금이 몇 신데 이제 와서 좋은 아침이야.”

“아저씨. 아침은 안 죽어.”

“당연하지! 말이 그렇다는 거다. 말이.”

“아침은 무적인 거야. …아후.”

“…무적인 거냐.”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미키를 내려주고 멀찍이서 보고 있자니, 다행히 정말 늦지는 않은 모양인 것 같았다. 뭐 사진집인지 잡지에 실을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키 말고도 몇몇 아이돌로 보이는 소녀들이 있었다. 야외촬영이라. 오늘이 덥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겠군. 요 며칠 후덥지근한 게 본격적인 여름이 될 태세였는데 말이다.
목에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카메라를 건 남자가 모여 있는 아이돌들에게 뭐라뭐라 이야기하고 있는 걸 바라보고 있는데, 휴대폰 신호음이 울렸다. 바로 누나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 시간에 별일이네.

“웬일이야?”

[아. 받아줬구나.]

“이제 그때 같지 않다니까. 전화할 일 있으면 바로바로 전화해도 돼. 언제든지 받을게.”

[응… 내가 방해한 건 아니니? 지금 뭐 하고 있어?]

“뭘 하고 있냐고 물으면… 음… 뭐라 대답할지 모르겠네. 일일 운전기사?”

[일일 운전기사? 아르바이트?]

“아니. 부탁.”

[………]

“…누나. 지금 방금 ‘별일이네. 네가 누구 부탁을 들어주고.’라는 생각했지?”

[…맞아.]

“이익… 나도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 때가 있다고. 오늘 같은 경우는 친절이라기에도 뭐하지만.”

[누굴 태워주는 건데?]

“있어. 저번에 말했던 그 미키라는 아이돌.”

[아이돌…]

“응. 왜?”

[아, 아니야. 아무 것도.]

그리고 잠시 침묵. 그러고 보니 누나. 왜 전화한 거지? 누나는 절대 용건 없이 전화할 사람이 아닌데. 

[다음 주 정도에 네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됐어.]

“아. 그래. 다음 주… 뭐?”

[조만간 가겠다고 했잖아.]

부, 분명 그랬지. 근데 그 조만간이 다음 주 정도로 빠를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여기서 살 곳은 구한 건가? 그렇게 빨리?

[아니. 아직]

“그, 그럼 어쩌겠다는 건데.”

그러자 누나는 아주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그야 구할 때까지 네 집에서 신세지려고 하는데.]

“여, 여보세요? 누나?”

[응? 잘 안 들리니? 네 집에서…]

“아니! 잘 들려. 아아아주 잘 들려! 그래서 물어본 거야.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잘 들렸다면 제대로 들었겠지. 내가 지낼 곳을 구할 때까지만 신세질게. …부담되니?]

“다아아앙연히 부담되지! 난 스물셋이야. 누난 스물다섯이고!”

[응.]

“그런데 둘이 지내자고? 누나가 집을 언제 구할지도 모르는데?”

[응.]

“응이라니? 뭔가 느껴지는 게 없어?”

[응? 응.]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한손으로는 휴대폰을 들고 한손으로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데, 촬영장 쪽에서 뭔가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트러블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저쪽 신경 쓰랴, 누나에게 할 말 생각하랴, 머리가 두 배로 아파오는 걸 느끼는데, 갑자기 촬영스텝으로 보이는 사람 한 명과 미키가 허겁지겁 내 차 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대체 뭔일이 생긴 거야?

“누나. 나중에 얘기하자. 뭔 일이 생긴 것 같아.”

[응? 그래. 이따 다시 전화할게.]

“그래줘. 미안.”

전화를 끊는 것과 거의 동시에 차 앞까지 다다른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스텝이 먼저 내게 다가왔다.

“765프로 관계자 되십니까?”

“…관계자…는 아닌데. 같이 온 미키랑 친분이 좀 있어서 차로 데려다준 것뿐인데요.”

“그, 그렇습니까? 이거 곤란한데…”

스텝 표정이 안절부절한게, 뭔가 일이 터져도 터진 모양이다. 설마 미키가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인데요? 들어나 봅시다.”

“아. 다름이 아니라… 다른 프로덕션의 아이돌 한 명이 도타캔을 해버린 바람에…”

“자, 잠깐만요. 도, 도 뭐?”

내 의문에 대한 설명은 미키가 해주었다.

“도타캔. 이벤트 시작 직전에 취소를 해버렸다는 거야.”

“허. 그거 나쁜 프로덕션이네.”

“어, 어쨌든. 그래서 한 자리가 급하게 필요하게 되어버렸는데 765프로에서 어떻게 안 될까하고 말입니다.”

“다른 데는?”

“모두 비는 아이돌이 없다고 하더군요.”

끄응… 이걸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슬쩍 스텝 옆에 있는 미키를 보았다. 

“리츠코한테 전화는?”

“에… 그게… 내가 리츠코…씨에게 전화했다간 혼날 것 같아서.”

“그게 문제냐. 일 얘기잖아. …리츠코 전화번호 좀 줘봐. 내가 해볼게.”

“그래주는 거야?”

미키는 신이 나서 내게 리츠코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다. 
젠장. 뭔가 들여놓으면 안 되는 곳에 발을 들여놓는 기분인데. 이렇게 말려들어가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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