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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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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7, 2012 21:43에 작성됨.

“아. 아. 아~ 으아… 젠장.”

할 게 없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라고 말하며 이오리가 미키와 미우라 씨와 하루카와 함께 들어간 이후,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연습실 밖에 서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밖으로 새어나오는, 발성연습을 하는 소리를 따라도 해보고, 노래도 따라 흥얼거려봤지만 이걸로는 소용없었다. 

아. 그래. 누나가 지금 쉬고 있다면, 메일이나 보내면서 시간 때울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보내보자.
휴대폰을 꺼내어 누나에게 어떤 내용으로 메일을 보낼까 생각하다 깨달았다. 오늘 아침에 휴대폰 배터리를 갈지 않았다는 걸. 
황급히 용량을 확인해보니 20% 남았다. 이 상태로 메일 몇 번 보냈다간 하루 종일 꺼진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결국 메일로 시간을 때우는 것도 무리라는 결론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으아아@#@(#(@)#!!”

“뭐하고 있는 거야! 시끄럽잖아!”

한바탕 괴성을 지르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오리가 머리를 불쑥 내밀고 소리쳤다. 곧바로 한바탕 해주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여긴 이오리 말고 미키와 하루카와 미우라 씨도 있는데다 무엇보다도 레슨 중이었다. 그래. 여기선 내가 참자. 앞으로 얼마나 더 참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참자.

“아… 미안.”

“흥!”

이오리가 다시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그쪽을 향해 맹렬히 주먹을 날렸다. 실컷 쉐도우복싱을 하고 있다가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대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둘이 웃긴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 배로 슬퍼졌다.

보컬 레슨이 끝나고, 네 사람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는지 주변 식장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오늘 하루 이오리의 부속품인 나 역시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점심은 당연히 하인이 사야지! 물론 얘네들 것도 같이.’라는 말이 나올까봐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하지만 막상 식당에 도착하자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놀랍게도.

“네 몫은 내가 내는 거야. 주인이 하인의 밥값을 책임져주는 건 당연하니까.”

나는 거의 20초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서 있었다.

“무슨 반응이 그래?”

“아, 아니. 지금 내가 꿈을 꾸나. 싶어서.”

그러자 이오리는 곧바로 내 뺨을 강하게 꼬집었다.

“으아아! 오아으이이야(뭐하는 짓이야!)!!”

“이래도 꿈이야?”

“으으… 확실히 현실이군. 너. 의외로 착한 면이 있었구나.”

내 말에 이오리의 뺨이 살짝 붉어진다 싶더니, 곧 고개를 맹렬한 속도로 돌렸다.

“의외로 라니! 이 이오리쨩은 원래 착한 미소녀라고.”

“아. 미키. 내가 거기 앉을게.”

“사, 사람이 말하면 들어!!”

“응? 아. 미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

이오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의외로 놀리는 보람이 있는 녀석이다. 라고 생각했다. 남을 놀리기 좋아하는 만큼, 자신이 놀림을 받는 데에는 면역이 그다지 없는 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배경도 그렇고, 자신이 놀림을 받는 입장에 서 있던 적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는 둘째 치고, 이런 소소한 복수밖에 할 수 없는 내가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거기서 내가 역전 쓰리런 홈런을 딱! 이때 저 녀석 표정이 볼만했지. 기념사진을 찍어도 될 정도였어.”

“어머, 어머.”

“야구선수 씨 굉장하네요!”

“헤에… 역시 아저씨는 야구 잘하네.”

“물론이지.”

여기서 목소리를 조금 낮춰야만 했다.

“지지난 시즌에 폼으로 타격 2위를 한 게 아니라고. 이 몸의 천재적인 야구센스가…”

주문한 걸 기다리는 동안, 미우라 씨가 어째서 내가 이오리의 일일하인이 되었는지 물었기에,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어쩌다 모니 완전 내 무용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이지. 어제 내가 아니었으면 역전이고자시고 그대로 끝났을 테니까.

“흥. 그래봤자 진 주제에.”

“…그건 내 능력 밖이야. 내가 투수냐? 9회말 역전 당하는 내내 우익수 쪽으로는 공도 안 왔다고.”

내가 맡고 있는 우익수 쪽으로 공이 와서 어떻게 놓쳤다거나 했다면 모르겠지만, 9회말 역전 경위는 연속 볼넷에 희생번트, 그 후 좌익수 키를 넘기는 끝내기 안타였다.

“5타수 2안타였잖아. 안타를 하나라도 더 쳤으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5타수 2안타 1홈런 3타점이면 꿀리는 기록은 아니거든. 멀티히트라고, 멀티히트. 할푼리로 계산하면 4할이다.”

“어쨌든 진 건 진거네요.”

이오리의 말이 맞다. 진 건 진 거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나는, 내 앞에서 혀를 삐쭉 내민 이오리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근데 아저씨.”

“응?”

“만악에 아저씨네 팀이 마빡… 반빡Wid네 팀을 이겼더라면, 아저씨는 반빡쨩을 어떻게 부려먹을 생각이었어?”

“반빡이라고도 하지 말랬지!”

이오리가 날뛰기 직전(실제로 미우라 씨가 옆에서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꽤 볼만했을 거다.)인 것 같은 표정으로 으르렁거렸지만, 미키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역시나 미키로구나.
그나저나… 만약 내가 이겼더라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군. 내가 어딜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하인으로 삼는다 치면 거의 대부분의 명령을 내 집에서 내렸겠지만, 그럼 당연하다고 할까 누가 봐도 범죄인 꼴이다.

“그건 그것대로 골치 아팠겠네.”

“어째서?”

“아… 따로 설명은 안할래. 너희 둘. 같은 열다섯인데 어떻게 그렇게 발육 차이가 심하냐?”

내 말에 같은 열다섯인 둘의 반응 차이가 확연히 달랐다. 미키는 그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지만, 이오리는 다시 자신의 얼굴을 신호등 비슷한 색으로 바꾸며,

“무, 무슨! 난 지극히 정상적인 15살의 체형이거든? 쟤가 반칙적인 몸을 가진 것뿐이야!”

여기선 나도 이오리의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지만. 애초에 이오리가 빈약한 것도 빈약한 거지만, 미키가 표준 15세 여자아이의 스펙을 훨씬 넘어선 탓이 크다. 그런 미키와 비교가 되니 이오리가 본래의 체형보다 더 빈약하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난 이쪽을 더 쳐주겠어.”

손으로 미키를 가리키자, 그때까지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미키는 그제야 빙긋 웃으며,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키의 승리인 거야!”

“키이잇. 몸매만 좋다고 다 되는 줄 알아? 안 그래? 아즈…”

자신의 옆에 있던 미우라 씨에게 동의를 구하려던 이오리의 시선이 미우라 씨의 거대한 무엇에 닿았다. 어디선가 빠드득.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던 걸까.

“아즈사는 됐어! 하루카…”

“후아. 슬슬 냉방시설 가동하지 않으려나…”

이오리가 하루카에게 말을 걸려던 찰나, 하루카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겉옷을 벗고 살짝 달라붙는 반팔 티 차림이 되었다. 
맙소사. 하루카는 입으면 말라 보이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결국 남자인 나를 제외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패배자는 이오리 한 명 뿐이었다. 

“이오리쨩. 갑자기 왜 그러니?”

“응? 이오리. 어디 아파?”

“반빡쨩. 괜찮아?”

걱정스러워하는 세 사람…의 압도적인 볼륨 사이에서, 이오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침몰했다.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는 나는 속으로나마 이오리에게 동정을 표했다. 이 녀석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녀석이 불쌍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오후 2시. 댄스 레슨.

이오리와 야요이, 유키호, 타카네의 네 사람이 트레이너의 움직임에 맞춰 꽤 그럴싸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밖에서 기다려야 할 위기에 처했지만, 야요이와 트레이너 씨의 배려로 이번엔 안에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다들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구나. 운동선수가 훈련으로 흘리는 땀이나, 아이돌들이 레슨으로 흘리는 땀이나. 역시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목표를 이룰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하면 기회는 온다. 내 중학교 야구부 시절 은사님이 했던 말씀이다. 노력이라면 치를 떠는 나조차도, 아직까지 믿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도 중고교시절엔 꽤나 노력했으니까. 물론 내 방식대로.
네 사람 모두 그럭저럭 잘 하는 것 같은데. 특히 타카네가 그 중에서 일품이었다. 격렬하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정말 문자 그대로 눈이 부셨다. 물론 내 시선은 그녀의 머릿결보다 그 아래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커다란 무엇에 향해 있었지만(여기서의 커다란 무엇은 식당에서 묘사했던 미우라 씨의 무엇과 일치하다.). 그러고 보니 타카네에겐 아까 사무실에서 고맙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군. 레슨이 끝날 때 꼭 이야기 해야겠다.  
이오리 역시 꽤나 봐줄만한 동작을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타카네와는 달리 그 무엇이 거의 움직이지 않아 다시 한 번 슬퍼졌다. 하늘은 왜 이오리와 미키를 같은 년도에 내셨는가. 그나마 여기 미키가 없어서 다행이지. 있었으면 두 배로 비교될 뻔했다. 
유키호는 왠지 동작이 반 박자 정도 늦다. 처음 봤을 때부터 딱 ‘아. 이 녀석은 체력이 약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답이었다. 벌써부터 숨이 턱까지 찬 것 같은 표정이었다. 게다가 미키의 말과 아침에 나에게 보여준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남자를 꽤나 어려워하는 것 같더니, 지금도 겁먹은 표정으로 나를 힐끔힐끔 보다가 동작이 엇나간 것만 해도 꽤 된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다시 쫒겨나게 생겼다. 최대한 유키호와 시선을 마주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야요이는… 

아…

뭐. 성격이 워낙 낙천적이니 열심히 노력하면 되겠지.

그렇게 첫 번째 쉬는 시간.
타카네를 제외한 다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길래 준비해뒀던 물병을 들고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타카네에게 주려다 또 하인 운운하기 시작할 것 같아서 이오리에게 가장 먼저 내밀었다. 이오리는 자기 앞으로 내밀어진 물병을 보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흐응. 그런대로 착실히 하잖아?”

“잔소리 듣기 싫거든. 자. 타카네도.”

“아.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이쪽이야말로 물병 하나 갖다준 걸로 그런 반응이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구만. 자. 유키호는…”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오리 니가 전해주라.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였는데. 불편하면 말해. 나가있을게.” 

“아,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오…”

“그럼 괜찮다고 봐도 되나… 자. 야요이도.”

“고마워요. 야구선수 씨! 아. 저 춤추는 거 어땠나요?”

차마 느낀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긍정적인 성격의 야요이라지만, 그대로 말했다간 어떤 파급효과를 미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걸 가 재껴 놓더라도, 내 앞에 쪼르르 다가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는 야요이의 코앞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놈은 정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놈일 것이다.

“아… 야요이 춤추는 거 정말 귀여웠(행사장 풍선 같았)어. 이야. 스테이지 나가면 다들 반해버릴지도 모르(로리콘이나 좋아하)겠는데?”

“정말인가요? 웃우-! 칭찬받아서 정말 기쁠지도!”

“아하하…”

이 정도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신주님, 부처님, 이나오님도 모두 용서해주시겠지.



다음 일정이자 마지막 일정은 행사 모델. 이번엔 이오리 단독인 모양이었다. 히비키와 후타미 자매와 함께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이오리가 리츠코와 무언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갈 때는 내 차로 같이 가면 될 텐데. 돌아올 때가 문제구나. 끝나는 시간이 다르니 아무래도 내가 두 번 왔다갔다 해야…”

“난 상관없지만, 그랬다간 리츠코가 불편해지지 않아?”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잖니. 자 어서 준비를…”

“뭔 얘기들 하고 있어?”

내가 불쑥 말을 걸자, 이오리는 흘끗 날 보더니,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놀라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있었지…”

“그러니까 뭐가.”

“행사 나가는 곳이 약간 멀어서 리츠코의 차를 타려고 하는데, 리츠코는 하루카랑 치하야랑 마코토의 오디션 장소에 같이 가기로 되어있었거든.”

“그래서.”

“시작하는 시간은 비슷하니까 상관없지만, 끝나는 시간은 내쪽이 훨씬 늦을 것 같아서 그래. 게다가 너까지 같이 가게 된다면 자리가 없으니까…”

“거기가 정확히 어딘데?”

“그건 왜?”

“왜냐니. 나. 내 차 끌고 왔거든.”

이오리는 물론 옆에서 나와 이오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츠코의 표정까지 환하게 밝아졌다. 아침에 나오면서 버스를 타고 갈까 차를 끌고 갈까 고민했던 게 생각났다.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 동안 아이돌의 시중을 들려면 차는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끌고 나왔는데 잘 생각했군.

“니히힛. 꽤 하잖아? 비록 하루뿐이긴 하지만, 이 이오리쨩의 하인이라면 그 정도는 기본소양이긴 하지만 말이야.”

“기본소양인 거냐.”

“물론.”

“잘 됐네요! 야구선수 씨 덕분에 살았어요. 그럼 염치불구하고, 이오리를 부탁드릴게요.”

“어차피 오늘은 이오리의 하인이 된 몸이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리츠코의 목소리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그것까지 느껴졌다. 전직 아이돌…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하루 사무소에 있을 때마다 흘낏흘낏 본 바로는 정말 빠릿빠릿하게 잘하는 것 같았다. 사장님과 사무원인 오토나시 씨를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12인의 아이돌을 관리하는 유일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거 참 피곤하지 않나?

“자. 그럼 결정됐네. 어서 가자. 지금 바로.”

“분부대로 합죠.”

“그럼. 야구선수 씨. 다시 한 번 부탁드릴게요!”

“걱정 마.”

곧바로 이오리를 태우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이오리가 말한 행사 장소는, 다행히도 내가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장소였다. 조수석에 앉은 이오리가 토끼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힐끔힐끔 보면서 차를 운전했다.

“가서 뭘 하는 거야?”

“군무야. 한 열 명 정도가 맞춰서 할 거래.”

“열 명이 한다면서 너네 사무소에서 너 한 명만 뽑은 건 뭐야.”

“내가 뽑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난 다시 입 닥치고 차나 운전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계속 운전하면서 생각해보니, 아까 전에 댄스 레슨을 받았던 게 떠올랐다. 이거 완전 미스 아냐? 한 시간 전까지 춤추던 녀석을 또 시키다니. 그러고 보니 야요이가 그랬었지. 오늘의 레슨은 특별히 더 힘들었다고.

“괜찮겠어? 아까 그렇게 몸을 움직여놓고 또 춤을 춘다니.”

“흥. 이 이오리쨩에게 이런 것 따윈 식은 죽 먹기야.”

“그으래… 그럼 됐고.”

“날 신경 쓸 시간에 운전이나 신경 써.”

“이래 보여도 면허 딴 이후로 지금까지 접촉사고 한 번 낸 적이 없거든.”

그 이후로 나와 이오리는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라기 보다는 내가 말을 걸려고 했지만 이오리는 거의 일방적으로 대화를 차단했다. 처음엔 왜 이러나 했지만, 운동선수인 나는 이오리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완벽하게 집중을 하고 싶던가, 체력을 최대한 아끼고 싶을 때. 그리고 이오리의 경우에는 후자라는 것을.

왠지 뭔 일이 날 것 같았다.

“진짜로 괜찮겠냐.”

“괜찮다니까.”

행사장에 도착한 후, 출연자 대기실 앞에서 나는 이오리에게 다시금 컨디션이 어떤지 물었다. 될 수 있으면 이오리가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는 대기실 안에 있고 싶었으나, 대기실을 혼자 사용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난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뭔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내 번호 가르쳐줬지?”

“쓸데없는 걱정이라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흥.”

이오리는 콧방귀를 뀌며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마지막까지 확인한 뒤, 나는 행사장으로 나왔다. 
나 참. 이래선 일일 하인이 아니라 일일 프로듀서구만. 이 녀석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머리가 아픈데. 새삼 리츠코가 초인 같아보였다. 그 가냘픈 몸으로 어떻게 열두 명을 다 보살피는 거지.
저절로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졌다. 역시 못해먹을 짓이야.



결국.
혹시나 했는데 사건이 터졌다.

격렬한 댄스 레슨에 행사장 오자마자 부리나케 군무를 맞추고, 리허설까지. 
결국 실전에서 마지막 순간에 다리가 풀렸는지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열 명이 일사불란하게 맞추는 군무에서 한 명의 실수는 눈에 확 띄고 만다. 그나마 뒷줄이었다지만 그래도 눈에 들어오는 건 들어오는 것이다.

행사가 끝나고, 슬쩍 이오리를 찾아보니, 무대 뒤편에서 공연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혼이 나고 있었다. 그 상황에 내가 끼어드는 것도 뭐해서 슬쩍 뒤로 빠졌지만, 지금까지 실컷 날 골탕 먹였던 이오리가 저런 일을 겪는데도 통쾌한 기분은커녕 속이 쓰렸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공연 시작 직전까지 한 번도 굽혀진 적이 없던 그녀의 고개가 연신 숙여지고 있는 것을 보는 내 기분은 신기하게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대기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는데,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빠져나왔음에도 그녀는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상태로 5분 정도를 더 기다렸는데도 그녀가 나오지 않자, 급기야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황급히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어이. 이오리!”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무언가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오리! 들어간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이쯤이면 충분히 통보했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문을 열었더니…
이오리가 자신의 토끼 인형으로 소파를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뭐, 뭐하는 거냐. 너.”

한달음에 달려가 인형을 빼앗았더니, 이를 악물고 인형을 다시 붙잡으려 했기에 인형을 쥔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내놔!!”

“분한 마음은 알겠는데, 인형이 뭔 죄냐. 너 이거 아끼는 인형 아니었어? 이러다 뜯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하인 주제에 주인의 말을 안 들을 셈이야? 내놔!”

“애초에 니 말은 안 들었잖아. 마빡아.”

“마빡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이오리는 분노로 인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꼭 쥔 주먹을 내게 휘둘렀다. 그러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녀는 울지 않았다.

“내 말 들어. 나도 말이지. 한참 때는 승부욕이 엄청 강했었어. 그래서 시합에서 지거나 내 뜻대로 안 풀릴 때는 쓰던 야구배트를 부러뜨리곤 했지. 그리고 꼭 화가 가라앉은 다음에 후회했어.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지. 알잖아. 인형은 뜯어져도 수선이 가능하지만, 배트는 부러지면 끝이야. 그리고 꼭 부러뜨린 다음에는 공이 더 안 맞더라. 다시 내 손에 길들이는데 시간도 걸리고.”

“………”

이오리는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놀라웠다. 이오리의 프라이드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 조금 진정했다 싶었는데, 이오리는 다시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내가… 이 미나세 이오리가… 키이이잇--!”

다시 폭발하려는 이오리를 간신히 말려 자리에 앉혔다.

“그러니까 가라앉히라고. 애초에 네 잘못이 아니라. 스케줄을 이렇게 짠 쪽이 잘못인 거야. 그렇게 레슨을 받아놓고서 곧바로 또 춤을 춘다는 게 무리지.”

“해야 해! 아이돌이라면 충분히 해야 되는 거야! 아니.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이 이오리쨩이라면! 그 스케줄도 리츠코랑 코토리가 말렸는데 내가 강행하겠다고 한 거니까.”

“우째서?”

“나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내 질문에 이오리는 나를 흘겨보며,

“왜. 설마 또 나로서는 역부족이니 그런 말을 하려는 거야?”

“아니. 전혀. 난 자신의 한계를 정한다거나 하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데.”

이오리는 순간 살짝 놀란 눈으로 말문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프로팀 감독이 이런 말을 했었어. …들어볼래?”

혹시나 해서 이오리의 의중을 물으니,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승부욕. 그건 비단 상대를 향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자신을 이기겠다는 마음. 자신이 스스로 정한 한계를 부술 수 있다는 마음. 그게 바로 자신을 향한 승부욕이라고. 그런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 결국 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었지. 비록 관계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지만, 그 말 하나만은 기억하고 있어. 내가 볼 땐 넌 그 승부욕이 엄청난 거 같으니까 틀림없이 될 수 있어. 아까 널 면박 주던 그 멍청이가 차마 섭외하려 해도 못할 만큼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기운 내라고. 지금은 그 과정에 불과하니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직선으로 치고 올라갈 수는 없어. 지금 이렇게 맞닥뜨리는 벽이 널 더 강하게 만들 거야.”

이오리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더니, 약하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본 거야?”

아차. 본 척 안하기로 했는데.

“뭐… 슬쩍.”

“기분 좋았겠네. 하루 종일 널 괴롭히던 사람이 당하는 걸 봤으니.”

“좋을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더라.”

“흥.”

이오리는 내 반대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그녀가 아까보단 확실히 누그러진 것 같았으므로, 나는 그녀를 향해 이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걸을 수는 있어? 업어줄까?”

“웃기시네!”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녀는 완벽하게 원상태로 돌아와, 행사장으로 가던 그때처럼 조용히 토끼 인형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나저나, 회복이 빠르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분해해봤자 내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호오. 생각했던 것보단 어른이군. 외형은 전혀 아니지만.”

“잠깐! 뒤에 쓸 데 없는 말이 붙었잖아!”

“나보다도 어른이네.”

“그건 당연한 거고.”

“그래. 그래. 어떻게 보면 부럽기까지 해. 나에겐 없는 걸 가지고 있으니까. 승부욕이라던가 말이지. 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의 난 그게 없어. 목표도 없고. 그냥 야구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거 외에는 빈 깡통같이 살고 있지. 영화에 나오는 걸어 다니는 시체도 나보단 나을지도. 그놈들은 누군갈 잡아먹는다는 목표라도 있잖아.”

“자, 잠깐. 그렇게까지 자기 비하할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말이다… 오늘은 아니었어. 너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보낸 하루는, 은퇴 이후 가장 재미있는 날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어. 비록 주인이라는 녀석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날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라고 생각할 정도로 좋은 날이었어. 누구 빼고는 다들 친절하기도 했고. 그런 친절. 은퇴 이후엔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

“…왜 자꾸 누굴 빼는 거야?”

“그 누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오리는 한동안 내게서 고개를 돌린 후 말이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을 더 운전해, 이제 765 프로덕션의 사무실이 눈에 보일 때 쯤.

“그렇게 좋다면, 프로듀서… 하는 게 어때?”

“인간 이하가 프로듀스하는 건 싫다며.”

“그, 그건 농담인 게 당연하잖아! 자기가 먼저 자기보고 짐승이라고 해놓고는!”

프로듀서라… 오늘 비록 하루카와 유키호와 마코토를 만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건 이오리가 나를 사무소로 부른 거니까 우연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안 맞는다. 하지만 오늘. 정말 재미있기도 했고 한 번 진지하게 생각을…

“역시 귀찮을 것 같아.”

“흥. 당신의 그런 점이 틀려먹은 거야.”

“윽. 반박을 못하겠구만…”

프로덕션 건물 앞에 이오리를 내려주자, 그녀는 이제 그만 돌아가도 좋다며 내게서 일일하인 직함을 떼어내 주었다. 의외로 빠른 게 아니냐고 묻자, 차를 가져온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말을 했다. 이제 하인의 신분도 아닌데, 굳이 사무소에 들어갈 명분도 없어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가끔이라면… 놀러와도 좋아.”

“어이. 부외자가 아이돌 사무소에 막 들어가도 되는 거냐?”

“상관없어. 내가 허락하는 거니까.”

“니가 사무소의 뭐길래. 그럼 간다.”

“자, 잠깐!”

곧바로 시동을 걸려는 나를 이오리가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며 뭔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고, 고, 고…”

“고?”

고? 뭐라는 거야. 설마 이대로 가라는(Go) 건가? 
아니면… 설마?

“고… 고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우쭐해 하지 마! 흥!”

그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 참.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긴. 저런 걸 보고 츤데레라고 하던가.



그날 밤.
여느 때처럼 야구중계를 보며 맥주를 한 캔 땄다.
내 옛 소속팀은 역시나 깨지고 있었다. 카메라가 슬쩍 감독의 얼굴을 비추는데, 내가 있을 때보다 두 배는 더 늙어 보이는 것 같았다.

거 참.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할지, 씁쓸하다고 해야 할지.

캔맥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려는데, 휴대폰이 신호음을 내기 시작했다. 메일이었다.
뭐라고 온 건지 볼까하고 내용을 확인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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