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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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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7, 2012 21:42에 작성됨.

“끄아아아--!! 이 자식아!! 당장 시합인데 무슨 짓이야!”

“너야말로 감히 이 이오리쨩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으어… 거 더럽게 아프네. 이 망할 녀석이 미키가 말했던 그 ‘마빡쨩’인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야요이…”

“네. 야구선수 씨.”

“얘도 설마 너랑 같은…”

“네! 같은 765 프로덕션 소속 아이돌 미나세 이오리쨩이에요.”

“흥!”
이로서 세 명 남았다. 이쯤 되면 정말 우연이 아닌 운명을 생각해도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돌이라면서 뭔 성격이 이래. 처음 보는 사람을 냅다 걷어차고 말이야. 이래가지고 팬이나 있겠어?”

“니가 신경 쓸 바는 아니거든? 너 같은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하등의 이유가 없네요!”

“꼭 다른 사람한테는 친절하다는 것 같이 말하네. 너 같은 성격은 내가 잘 알지. 이 성격 나쁜 꼬맹아.”

“꼬, 꼬맹이? 말 다했어?”

“야, 야구선수 씨. 이오리쨩은 친절하다구요.”

“친절! 저런 녀석이 친절하면 카다피는 성인이다!”

“키이이잇---!”

이오리라는 꼬맹이는 내 말에 화를 버럭 냈지만 나는 그걸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야요이는 여기 어떻게 온 거야?”

“너!! 날 무시하는 거야!!”

무시했다.
야요이는 그런 이오리를 불안한 눈으로 힐끔힐끔 보았지만, 나는 끝까지 무시했다.

“제가 야구를 좋아하는 걸 이오리쨩이 잘 아니까. 오늘은 이오리쨩네 집에서 후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러오라고 했거든요.”

“아아. 그래? …잠깐. 누구네 집에서 후원?”

“이오리쨩네 집이요.”

“쟤네 집이 뭐나 된다고 후원을…”

자, 잠깐. 저 녀석의 풀네임이. 
마빡쨩. 이오리쨩. 미나세 이오리쨩. 

“미, 미, 미나세에에??”
그랬지. 이 팀. 미나세 그룹에서 후원하는… 아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저 성격 나쁜 꼬맹이가 미나세?? 아니, 아니. 그것보다 먼저 태클 걸어야 하는 게…

“미나세 가의 딸이라는 거지? 저 녀석.”

“네. 그랬나 봐요. 저도 얼마 전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럼 어째서 아이돌을 하는 거야? 가만히 집구석에만 있어도 돈이 그냥 굴러들어올 것 같구만!”

내 외침에 야요이는 눈만 꿈벅거릴 뿐이었다. 아. 야요이한테 물어봤자 모르겠지. 나는 바로 이오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흥! 돈밖에 모르는 속물이 내 뜻을 알 리가 없지.”

“뭐라고? 돈밖에 모르는 속물!!!!”

열 받는다는 듯이 소리쳤지만, 차마 반박할 수가 없다는 것이 슬펐다. 네 녀석들은 어리니까 모르겠지. 크면 다 돈이다. 돈이 최고라고.

“후… 좋아. 야요이에겐 미안하지만, 너희 팀을 박살내야 내 속이 후련하겠다.”

“흥! 당신 같은 아마추어가 우리 팀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어머~ 말이야 쉽겠지. 그 못생긴 얼굴이 경기 끝나고 왕창 일그러지는 걸 보면 속이 시원할 것 같네.”

“못생긴 얼굴이라니! 어디 가서 잘생겼다는 소리는 들어도 못생겼다는 소린 못 들어봤건만… 너야말로 우리한테 깨지고 나서 그 마빡이 홀랑 다 벗겨지는 건 아니냐?”

“뭐가 어째?”

“너야말로!”

“저, 저기… 이오리쨩… 야구선수 씨…”

““야요이는 빠져있어!!””

나는 눈앞에 있는 망할 녀석에게 살기를 있는 대로 뿜어냈고, 그건 그 녀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젠장. 이 망할 꼬맹이를 어떻게 골탕 먹일 수 있지?
그리고 그 수를 먼저 제안한 건 이오리였다.

“내기를 하는 게 어때?”

“무슨 내기?”

“오늘 우리 팀이 이기면 넌 내일 하루 동안 내 하인이 되는 걸로.”

“호오. 그래? 좋다. 그렇게 해. 대신 우리 팀이 이기면 그 반대가 되는 거다. 알겠냐?”

“마음대로 하셔! 어차피 우리 팀이 질 리는 없으니까!”

“어디 경기 끝나고도 큰소리가 나오나 보자.”

“흥! 가자. 야요이.”

“으, 응…”

괜히 중간에 선 야요이의 입장만 난처해지는 것 같아보였기에, 나는 한 마디 더 하려던걸 참고 경기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망할 영감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인 후, 차키를 받아서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가 파일첩을 꺼내 와야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경기시작 직전. 감독님은 팀원들을 덕아웃으로 호출했다.

“오늘은 꼭 이겨야 한다. 알았나!”

“하지만 감독님…”

“팀이 팀이잖습니까…”

“무리 아닐까요…”

항상 내가 의욕이 없고 다른 팀원들은 의욕충만인 경기 전이었는데, 오늘은 어째 그 반대가 되었다. 어쨌든, 그 마빡꼬맹이랑 내기한 것도 있고, 오늘은 이겨야 한다.

“무리라니!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겨야 해요!”

내가 버럭 소리치자, 다들 놀란 새우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라팔. 너 오늘 왜 이래? 기합 잔뜩 들어가가지고는.”

“아까 감독님 심부름 갔다 온 이후로 저러던데. 뭔 약이라도 빨았냐?”

“시끄러워요. 중요한 건 오늘 이겨야 한다는 겁니다. 무조건.”

“저 놈의 말이 맞다. 너희들. 오늘은 꼭 이겨라. 설령 그렇게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의 근성을 보여줘.”

감독님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 선수단이 모여 파이팅을 외쳤다. 그리고 나는 슬슬 나만의 작전을 따로 구상하기로 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나이스!!”

오늘 컨디션 좋다던 쌀집아저씨는 놀랍게도 8회까지 던지며 4실점으로 막아냈다. 프로에서도 그럭저럭 좋은 기록인데, 하물며 대량득점이 빈번한 아마추어 야구에서 8이닝 4실점이면 엄청난 호투인 셈이다.

“아저씨. 괜찮아요?”

“괜찮긴, 이놈아! 팔 건드리지 말어. 아프니께. 내일 장사는 알바놈한테나 맡겨야 쓰것네.”

“아니, 그러게. 뭘 그렇게 무리한 겁니까? 대충 5~6이닝만 던지고 들어가시지.”

“자식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안 그러던 놈이 갑자기 기합 팍 들어가니까 나도 필요 이상으로 무리한 거 아녀.”

“어… 그, 그래요?”

“그래 임마! 근데 너 지금 기록이 어떠냐.”

“4타수 1안타인데요.”

“장난허냐, 이눔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상대 투수가 그렇게 잘 던질 줄 몰랐으니까. 아니. 애초에 저 인간. 선수출신이잖아! 지금 2점이나 낸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안 친 이유는 따로 있다만.

“뭐. 기다려 보세요. 기회가 오겠죠.”

“이번 공격이 마지막 공격에, 8번부터 시작하는데 무슨 기회야, 기회는.”

‘나만 팔 빠지게 던졌네.’라고 구시렁거리는 아저씨를 향해 한 마디 해주었다.

“아저씨. 야구는 모르는 겁니다.”

라는 나의 말도 헛되이, 8번 9번 타자가 연속 삼진으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투아웃. 
하지만 1번 타자가 볼넷을 얻어 9회초 2아웃 주자 1루가 되었다. 2번 타자만 어떻게든 출루하면 다음은 내 차례다. 내 시나리오를 완성시킬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나는 타석으로 나서려는 2번 타자를 붙잡았다.

“저 투수가 던지는 구종. 커터, 체인지업, 커브. 그 중에 커브 각이 꽤 밋밋해졌으니 커브만 노리고 들어가요.”

비디오 대여점을 하고 있는 2번 타자 형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가 일러준 대로 커브를 정확히 노려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빼는 안타를 만들어냈다. 주자는 1,2루.

“아저씨.”

“와 부르나.”

“왜 야구 모른다고 하는지 보여드릴게요.”

지체 없이 타석에 들어섰다. 슬쩍 홈팀 관중석을 흘겨보자, 양 주먹이 꼭 쥐어진 야요이와 지금까지의 내 성적을 확인하고 비웃는 표정의 이오리가 보였다. 그래. 마음껏 웃어라. 그만큼 부려먹어 줄 테니까.

오늘 나는 4타수 1안타. 그 1안타라는 것도 빗맞은 안타. 그에 비해 내 뒤에 있는 4번 타자는 오늘 2안타에 타점이 하나 있다. 아무리 저 투수가 내가 선수출신이라는 걸 안다지만, 자기도 선수출신이라는 점과, 내가 앞의 승부에서 맥없이 물러났다는 걸 생각하면 무조건 나와 승부하려 할 것이다.

게스히팅. 투수가 투구하기 전부터 미리 무슨 공을 던질지 추측하고 그 공을 타격하는 방법이다. 홈런타자들이 미리 투수의 공을 짐작했다가 풀스윙으로 받아넘길 때 쓰는데, 유명한 게스히터라고 하면 역시 지바롯데에 입단해 요미우리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오릭스를 거쳐 모국으로 돌아간 한국의 홈런왕이 있다.

물론 그 선수만큼은 아니지만, 프로 시절의 나를 먹여 살린 타격방법 역시 게스히팅이었다.

카운트는 1-2. 투수가 내게 던진 공은 3개 모두 빠른 공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변화구로 내 타이밍을 빼앗을까? 하지만 커브는 이미 힘을 잃었다. 커터 역시 지금 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체인지업…
은 무슨. 이번에도 직구다. 지금까지 던진 직구 세 개에 모두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으니까. 투수는 지금 내가 변화구를 노린다고 생각하겠지.

삼진을 잡으러 들어오는 바깥쪽 꽉 찬 직구. 무조건 노린다.

역시나. 투수는 내가 노린 코스대로 공을 던졌다. 4구 연속 빠른 공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그 공을 잡아당겨 때려냈다. 
공이 배트 중앙에 맞는 짜릿한 느낌.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손맛이었다. 

날아가는 타구를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나는 스윙을 마치자마자 왼손을 번쩍 들었다. 망연자실한 뒷모습으로 넘어가는 공을 확인하는 투수와, 주먹을 불끈 쥐며 베이스를 돌기 시작하는 주자들을 보며, 나도 천천히 베이스를 돌기 시작했다.

역전 쓰리런 홈런. 점수는 순식간에 2-4에서 5-4가 되었다.
베이스를 모두 돌아 홈을 밟자, 기다리고 있던 1,2루 주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나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진짜 약 먹은 거 아냐, 이 자식!!”

“내일 드디어 이 지구가 끝장나는구나!!”

얻어맞으면서 힐끗 관중석을 보았다.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는 야요이와 분통을 터뜨리는 이오리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덕아웃으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축하를 빙자한 폭행을 당한 후, 곧바로 얼마 전에 알아낸 야요이의 번호로 메일을 보냈다.

[옆에 있는 녀석에게 전해. ‘뭐하고 있냐! 빨리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라고.]

곧바로 덕아웃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고 관중석을 보자, 야요이가 보여준 메일을 확인했는지, 이오리가 분을 못 이겨 방방 뛰는 모습이 보였다.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러나 내가 이오리를 하인으로 삼는 일은 없었다.
9회초 공격에 모든 힘을 쏟아낸 우리 팀은
이어지는 9회말에서 거짓말 같은 끝내기 패를 당했다.

“망할… 이건 꿈이야…”

“니히힛.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약속은 지키겠지?”

“젠장. 마음대로 해. 굽든 삶든.”

경기가 끝나고, 의기양양한 표정의 이오리를 보며 나는 그 자리에서 도주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약속은 약속이지 않은가.

“그럼 내일 아침 8시에… 너. 타루키정이라고 알아?”

“알긴 아는데… 젠장. 아침 8시라니! 너무 이른 거 아냐?”

“아. 물론 나는 더 늦게 갈 거야. 넌 먼저 가서 기다리는 거지.”

“이 망할 마빡꼬맹이가!”

“누구보고 마빡꼬맹이래? 하인 주제에!”

“비이러머그을…”



다음 날. 아침 8시 30분.
타루키정 앞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비슷한 게 하나 서 있었다. 
…물론 나였다.

혹시나 해서 지시한 시간보다 30분이나 더 늦게 와봤는데, 역시 이오리는 오지 않았다. 그 망할 녀석이 정말 날 골탕 먹이려고 작정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왜 하필 이곳으로 오라고 한 걸까. 그 녀석. 사무소로 출근하는 거 아닌가? 설마 날 여기로 오게 해놓고 또 다른 엉뚱한 곳으로 오라고 불러서 똥개훈련을 시키는 건 아니겠지?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악랄한 꼬맹이. 상상만 해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구만.
왠지 모를 오한에 양손을 교차시켜 팔을 문질렀다. 그리고서는 누가 날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시선을 앞으로 향하니, 척 보기에도 얌전하게 생긴 소녀가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응?”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상당히 동요한 표정으로 슬쩍 뒤로 한 걸음 옮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라도?”

“나, 남자…”

소녀의 말에 나는 그저께 미키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응… 유키호는… 딱 만났을 때, ‘앗! 남자!’ 하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유키호인 거야.’

“아. 설마 네가 유키호라는 이름의?”

그랬더니 소녀의 눈이 거의 화등잔 만하게 커져서는,

“그, 그, 그걸 어어어떻게…”

맞나보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키의 설명은 정확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제 이오리에 이어서.

“아. 그건 말이지…”

“마, 마코토쨔앙--!!!”

유키호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치 치타에게 쫒기는 톰슨가젤 같은 속도로 멀리서 다가오는 소녀인지 소년인지 불분명한 녀석에게 달려갔다. 어째 내가 나쁜놈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단 10초도 안 돼서 현실이 되었다.

유키호와 마코토(유키호가 그렇게 불렀으니 맞을 것이다.)는 잠시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마코토가 약간 화가 난 표정으로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봐요.”

“응?”

“당신 뭔데 우리 사무소 앞에 서있는 거죠?”

“사무소? 무슨 소리야, 그게.”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 마코토는 화를 버럭 내며,

“발뺌하지 마시죠! 사무소 건물 앞에서 유키호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면서요? 이 사람 스토커 아냐?”

기가 막혔다.

“뭐어? 그건 어디에 분리수거해야하는 개소리냐? 누가 누구 스토커? 난 미나세 이오리라는 이름의 빌어먹을 마빡꼬맹이랑 약속한 장소에 서 있는 것뿐인데!”

“이오리?”

“이오리쨩…?”

마코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뒤에 숨은 유키호를 흘끗 보며, 

“그, 그럼 갑자기 유키호를 불렀다는 건 뭐죠?”

“그건 호시이 미키한테 들었다. 남자만 보면 깜짝 놀라는 여자아이를 보면 그게 바로 유키호라고. 가만히 서있는데 날 보고 놀라길래, ‘아. 이 애가 유키호구나.’라고 생각해서 본인에게 물어봤을 뿐이다!”

“어… 그럼…”

“이오리쨩이… 어째서?”

젠장. 괜히 아침부터 불려 나와서 당치도 않은 오해나 사고 말야. 오늘은 시작부터 액이 보이는군. 지금이라도 그냥 도망가 버릴까.

“응? 마코토? 유키호? 여기서 뭐하고 있어? 들어가지 않고.”

“응? 아. 하루카!”

“하루카쨩!”

또 다른 인물의 등장. 두 사람이 하루카라고 부르는 걸 보아, 그리고 뛰어오는 소녀의 머리에 달린 두 개의 리본. 이걸로 나는 765 프로덕션인지 뭔지에 소속된 모든 아이돌을 만나보게 된 셈이다. 이걸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응? 이분은 누구?”

“그, 글쎄… 이오리랑 아는 사이시라는데, 아직은 모르겠어.”

“이오리랑?”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는 하루카에게, 한숨을 쉰 다음 입을 열었다.

“일단은. 솔직히 말하자면 너희들을 제외한 모든 765 프로덕션의 아이돌들과 한 번 정도는 면식이 있지만. 그리고 아마미 하루카. 넌 TV에서 본 적 있어. 게로게로 키친인지 뭔지 하는 프로에서 말이지.”

그러자, 하루카는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리며,

“와앗- 그 프로, 보신 거에요?”

“그래. 봤다니까.”

내가 기억하는 그 프로그램 속의 아마미 하루카는 놀라는 것과 넘어지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긴 하다만.

“와아… 기뻐요.”

하루카가 나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오자, 옆에 있던 마코토가 그녀를 만류한 다음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아마 아직도 나를 향한 의심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당치 않은 의심을 없애버리려면 빨리 이오리가 와야…

아. 양반은 못 되겠군.

“어이! 이오리!”

내 외침에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뒤로 향했다. 내 목소리를 들은 이오리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려다 세 사람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오리!”

“응? 아침부터 왠 소란이니? 마코토.”

“저 사람 말이야… 이오리가 아는 사람이야?”

“으응?”

이오리의 시선이 마코토와 유키호, 하루카를 향한 후에 나를 향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세 사람이 미처 보지 않는 틈을 타, 나에게 악마의 그것이 연상되는 미소를 지어보인 것을.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설마 이 망할 마빡이가…

“난 저런 사람 모르는데? 갑자기 그건 왜 묻니?”

“야--!!!”

“그럼 난 이만 들어갈게. 너희들도 빨리 들어가는 게 좋을 걸?”

이오리는 횅하니 나를 지나쳐 건물의 옆으로 돌아들어갔다. 물론 나를 지나치며 ‘니히힛.’하는 웃음을 흘리는 걸 잊지 않고 말이다. 멍하니 이오리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흠칫 놀라 세 사람이 있는 곳을 바라보자, 역시나 표정이 가관이었다.

“빌어먹을. 이오리--!!!”

황급히 이오리를 쫒아 달리려고 했는데, 어느새 내 앞을 마코토가 가로막는가 싶더니, 팔을 잡혔다고 느낀 순간 몸이 붕 뜨기 시작했다. 뭔가 경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조차 주지 않고, 내 몸은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 그대로 땅에 매다 꽂혔다.

“커헉!!!”

더럽게 아프다---!!!!!
등짝이 박살나는 느낌이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맞는 건지조차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하루카! 어서 경찰에 신고를!”

“응!!”

‘신고는 얼어 죽을 신고! 저 망할 마빡이가 날 엿 먹이려고 하는 거란 말이다!!’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마코토란 녀석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곧바로 내 몸을 빙글 돌려 바닥에 엎드리게 만들더니 곧바로 팔을 꺾었다.

“아아으아앙(@#*@(#*@(#!!!!!”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서 한다는 게 비명뿐이었다. 고작 고등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는 여자애한테 이렇게까지 굴욕적인 꼴을 당할 줄은 23년 동안 꿔온 꿈에서도 몰랐다. 눈물까지 찔끔 나오려고 했다. 아니. 정말 울고 싶었다!

“콜록! 커흑! 망할. 사람 말 좀…”

“당신 같은 사람 말을 들어줄 것 같아?”

“빌어먹을, 마빡이---!!! 당장 나오지 못해---!!!”

“이 인간이 그래도 끝까지!”

“아아아아!!! 아파! 아프다고!”

“하루카! 신고는!”

“으, 응! 하고 있어!”

“하지마----!!!!”

이대로 경찰서에 끌려가면 난 진짜 끝장이라고! 빌어먹을 언론에서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덤빌 게 눈 감고도 훤히 보인다고! 안 돼!!

“얼레? 하루룽?”

“마코찡이랑 유키뽀도?”

낯익은 목소리였다.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확실히 기억 안 나지만(이 상황에서 날 리가 없었다.), 어쨌든 나를 구원해 줄 확률이 충분히 높은 목소리였다.

“거기서 뭐해? 마코찡은 누굴 쓰러뜨린 거야?”

“아, 안돼! 아미, 마미. 오지 마! 지금 위험한 스토커를 붙잡아서…”

아. 그래. 아미랑 마미! 귀찮다고 한 거 사과할게. 제발 날 도와줘!!

“아미!! 마미!! 나야, 나!!”

“근데 이 자식이 또!”

“끄아아아아아------”

나의 외침이여, 달까지 닿아라!!

“얼레? 이 목소리…”

“선수오빠?”

아미인지 마미인지는 엎드려 있어서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를 알아본 거 하나만으로 됐다. 

“그래! 선수오빠다! 젠장. 뭐든 좋으니까 일단 팔부터 좀 풀라고 해봐!! 나 죽기 전에!! 아니. 아니지. 그 전에 신고하는 것부터 좀 막아앗--!!”

“우왓! 진짜 선수오빠야! 마코찡! 안 돼!”

“하, 하루룽도 안 돼!”

“서, 선수오빠?”

내 팔을 꺾는 마코토의 손이 약간 느슨해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아미와 마미는 뭔가 이런저런 표현을 써가며 나와 그녀들의 인연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내 팔을 억세게 쥐고 있던 손의 힘이 풀려가기 시작했다.

“그, 그렇다는 건…”

“저번에 야요이쨩이랑 아즈사 씨가 이야기했던 야구선수 씨가…”

“이, 이분…?”

“응!”

왠지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냐고. 은퇴하고 욕을 바가지로 퍼먹었을 때도 이 정도의 폭력은 당해본 적이 없었는데. 괜히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 두 배로 억울했다.

“저… 저기… 죄, 죄송해요…”

어느새 꺾었던 내 팔을 완전하게 놓고 뒤로 물러난 마코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마빡꼬맹이.”

“예?”

“빌어먹을마빡꼬맹이빌어먹을중성인간빌어먹을톰슨가젤빌어먹을쌍리본!”

내 머릿속에서는 발사 직전의 ICBM이 그려지고 있었다.
5.
4.
3.
2.
1.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분노한 전직 야구선수가 울부짖었다!
…그리고 이 이후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 없었다.



“니히힛! 어때. 세 사람이랑 인사는 잘 했어?”

“캬악--!! 이 망할 마빡머리! 잔디 깎는 기계로 이마빡부터 고속도로를 내버리겠어!”

“으아아! 안 돼요, 야구선수 씨!!”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코토가 내 다리를 있는 힘껏 붙잡고 있었고, 겁에 잔뜩 질린 유키호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으며, 하루카는 아미와 마미 뒤에서 역시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어떻게 서로 사과하는 걸로 수습을 마치고 그녀들과 함께 사무실로 올라오니(그제야 나는 타루키정 건물 3층이 765프로 사무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오리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한다는 말이 저거였다.
당연히 분노한 나는 한 차례 더 날뛸 준비를 했지만, 마코토의 필사의 저지로 간신히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크르르… 이 자식…”

“흥. 오늘 하루 내 하인이 되라고 했더니. 이건 완전 짐승이네.”

“그래. 짐승이다! 네놈을 산채로 뜯어먹기 전에는!”

“어머~ 그럼 잘됐네. 히비키. 짐승은 네 전문이니까 어떻게 좀 해봐.”

“응?”

마침 사무실 저편에서 히비키가 하품을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오리의 말에 무슨 소리냐는 듯 이쪽을 보던 그녀와 내 눈이 마주쳤다.

“얼레. 네가 왜 여기 있어?”

“아. 맞아. 아미도 궁금했었어.”

“마미도.”

“…있고 싶어서 온 게 아니거든.”

“드디어 우리들의 프로듀서가 될 생각을 했다던가?”

“그럴 리가.”

내가 한숨을 푹푹 쉬자, 이오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리가. 저런 인간 이하가 우리들의 프로듀서라니. 농담이 심하네. 히비키는.”

“이인간 이하아? 너 그게 뚫린 입에서 할 소리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자기보고 짐승이라고 했으면서, 이제와 무슨 소리람?”

머리통이 박살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저 녀석의 엉덩이를 화가 풀릴 때까지 두들기던지, 아니면 창문을 박살내고 뛰어내릴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것만 같았다. 이 화를 어떻게 누그려 뜨려야 한단 말인가.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 적어도 반나절을 저 녀석과 함께 해야 할 텐데. 이러다간 오늘 점심쯤에 내 발로 정신병원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도 꿈이 아니게 될 것 같다.

“저, 저기…”

“뭐야!”

“히익!”

힐끗 봤더니 유키호였다. 손을 부들부들 떨며 내민 것은 찻잔이었다.

“아, 미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분을 털어내듯 찻잔 안에 든 차를 한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들이킬 때와 비슷한 속도로 뿜어냈다.

“뜨거워어어어어!!!!!!”

입천장과 혓바닥과 식도가 타들어간다!!!!

하루카와 마코토와 유키호는 놀란 표정을 짓고, 이오리와 쌍둥이 자매와 히비키는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미와 마미는 웃다가 눈물까지 흘려가며,

“서, 서, 선수오빠. 오빠 정말 프로듀서하면 안 돼? 진짜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하늘이 두 쪽 나서 그 틈으로 마귀사탄 같은 게 들어와도 안 해!”

미쳤냐! 이런 곳에서 일하다간 이틀도 안 돼서 가발을 맞춰야 될 거다! 감독님 수준으로 벗겨질 거라고! 더 이상 마빡이를 마빡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고! 동족상잔이 되니까!

“동족상잔이라니! 난 뒤로 넘기고 있는 거거든!”

“뒤로 넘기나 뽑히나 앞머리 까진 건 똑같잖아!”

“키이잇! 오늘 하루 주인인 내가 하인에게 내리는 첫 번째 지시야! 날 마빡이라고 부르지 말 것!”

그렇게 나오면 할 수 없다. 빌어먹을.

“…알겠다고.”

“니히힛. 좋아. 주인의 말은 들어야지.”

언젠가 이 굴욕. 24만 배 정도로 갚아주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릴 것 같다.

“응? 아침부터… 앗! 야구선수 씨?”

“야요이. 야구선수 씨라니… 앗! 아저씨!”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막 도착했는지 문 앞에 야요이와 미키가 서있었다.

“와아- 아저씨. 드디어 우리 프로듀서로?”

“아니야. 자세한 건 저 마빠…아니. 이오리에게 물어봐.”

야요이는 함께 있었으니 이 일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납득한 표정이었지만, 미키가 이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응? 마빡쨩?”

“그래.”

“마빡쨩. 어째서 아저씨가 여기 있는 거야?”

이오리는 미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나를 오만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인. 뭘 하고 있는 거야? 날 그렇게 부르게 하지 않기로 했잖아.”

“난 안 부르잖아.”

“내가 한 말엔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것도 포함이야.”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딴 빌어먹을 구두약속 따윈 지금이라도 박살내버리고 집에 가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보는 눈이 너무 많아졌다. 

“미키. 들었지. 이오리가 더는 마빡이라고 부르지 말란다.”

“에에? 아저씨는 왜 마빡쨩 말을 들어?”

“…그럴 일이 있어. 어쨌든 하지 마.”

“마빡쨩을 마빡쨩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어떻게 부르라는 거야?”

“키잇-! 이오리라는 이름이 있잖아! 이. 오. 리!”

“그래도 마빡쨩은 마빡쨩이야.”

“애초에 내 머리는 반밖에 까놓지 않는다고!”

아. 그런가.
그럼 이러면 되겠네.

“미키.”

“응?”

“마빡이가 아니라 반빡이라고 부르면 되겠네. 이제부턴.”

“아아. 그러네!”

이오리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에게 향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분명히…”

“왜. 마빡이라고만 안 부르면 되잖아. 그러니까 반빡이.”

“두, 둘 다 금지야앗!!!”

“거 참 까다로우시네.”

“까다로운 반빡이네.”

“반빡이라고도 하지 말라니까--!!”



그렇게 765프로 사무실에서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이오리의 하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프로덕션의 사장이라는 사람과, 유일한 사무원인 오토나시 코토리라는 여성과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아키즈키 리츠코(저번에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미, 마미와 함께 있었던 그 사람이었다.)에게 나를 소개했다.
자신을 타카기 준지로라고 소개한 프로덕션의 사장은, 아이돌들이 나를 잘 따르는 것 같다며 프로듀서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그때의 나는 이미 그 말에 경기를 일으킬 지경까지 되어버린 상태였다.

아. 그래. 또 하나 나를 보고 놀란 사람이 있다면…

“어, 어째서 여기에?”

“아… 뭐…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고나 할까. 아니. 애초에 넌 옆집 사는 사람이 야구선수인 것도 몰랐단 말이야? 야요이가 여기에서 야구선수 씨랑 만난다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어?”

“아. 물론 타카츠키 씨가 그런 말을 하는 건 들었지만… 그래도 설마 옆집 분이실 줄은…”

“하긴 그렇겠네. 우연…이라고 하기엔 좀 배배 꼬였지?”

“…놀랐어요.”

“나도다.”

내 옆집에 키사라기 치하야라는 소녀가 산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치하야와 이렇게 길게 대화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걸로 좀 친해질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웃사촌이라고도 하니까.

“뭘 노닥거리고 있어? 하인이면 하인답게 주인 옆에 서있으라고!”

“아, 예. 예. 빌어먹을… 그럼 난 이만.”

“하인…?”

치하야가 의아한 표정을 짓기에, 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내기해서 졌어. 그래서 오늘 하루 저 마빠… 아니. 이오리의 하인이 되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거고.”

“미나세 씨랑… 말인가요? 무슨 내기를?”

“설명하면 길어. 엄청 길어.”

“빨리 안왓-!”

“간다고!!! 그럼 이만.”

치하야는 누군가 와서 자신을 납득시켜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를 납득시킬만한 시간은 없었다. 그나저나. 항상 무표정 일색이었던 치하야의 다른 표정을 볼 수 있다는 건 약간의 이득일지도 모르겠는데.
차마 움직이길 거부하는 발을 좀비처럼 끌며 이오리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왜 이렇게 늦었냐며 잔소리를 퍼붓더니 내게 수첩 하날 던졌다. 

“오전 열 시 보컬 트레이닝, 오후 두 시 댄스 트레이닝, 오후 네 시 행사 모델…? 뭐냐, 이건.”

“뭐긴. 오늘 내 스케줄이야.”

“이게?”

“그래. 불만있어?”

“아니… 불만은 없는데… 아이돌치고는 너무 널널하지 않나 싶어서.”

“크, 큭. 아직 세상이 이 슈퍼 아이돌 이오리쨩의 진가를 몰라주는 것뿐이야! 언젠가는 나를 섭외 못해서 안달이 나게 만들어 줄 거라고!”

“아. 네. 그때가 언제이려나. 내가 손자 볼 때쯤 되면?”

발을 밟혔다.

“야이 폭력녀야! 아프잖아!”

“아프라고 밟은 거야!”

“왜!!”

“왜냐니! 네가 한 말을 생각해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농담 한 마디 한 거 가지고. 아이돌이 이래서 되겠어? 살짝 원망을 담아 녀석을 바라보니, 곧바로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아아… 오늘 하루 고생문이 훤하다, 훤해. 어쩌다 그런 내기를 해서… 만약에 타임머신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그때의 나에게 돌아가 내기하자는 말을 못하게 입에 본드를 붙여버리리라.
뭐. 하지만 타임머신 같은 게 진짜 있을 리도 없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어쩌겠어. 오늘 하루 시달릴 대로 시달리는 수밖에. 

“하인. 지금 몇 시야?”

“아홉시 반.”

“슬슬 준비해. 보컬 트레이닝이 열 시라고 써져있는 거, 못 봤어?”

“봤지.”

“그럼 뭐하고 있어? 갈 준비 안하고.”

뭐? 갈 준비라니. 이 사무실에서 하는 거 아냐?

“바보 아냐? 이 좁아터진 곳에서 보컬 트레이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마 교습실 같은 곳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뒤에서 오토나시 씨가 ‘그래. 우리 사무실은 좁아 터졌어!’ 라고 눈물을 뿌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오리는 물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아니. 그건 그렇고. 내가 왜 준비를 해야 돼? 내가 트레이닝 받는 것도 아닌데.”

“하인이잖아. 밖에서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이오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말한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지. 밖에서.”

“당연하지. 하인은 주인이 일을 마칠 때까지 밖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지 않는지 기다리는 걸로 정해져 있잖아?”

“아니. 그런 건 처음 듣거든?”

“그럼 지금부터 알아둬. 자. 따라와. 하인.”

이 망할 녀석은 시작부터 나를 폭발 직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또 폭발할 수는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수도 없이 되새기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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