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3.5~5-

댓글: 0 / 조회: 1729 / 추천: 0


관련링크


본문 - 10-27, 2012 21:40에 작성됨.

“그러고 보니 어제 아미랑 마미라는 이름의 쌍둥이 자매를 만났는데 말야. 걔들도 설마…”

“어머. 아미쨩이랑 마미쨩도 만나보셨나요?”

이럴 수가. 미우라 씨의 말에 나는 곧바로 양손을 이마에 대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저씨. 왜 그래?”

“조용히 해. 지금 복권을 사야 될지 파칭코를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니까.”

“으응?”

거의 벼락을 맞을 확률 아닌가 싶은데. 이 정도면. 집에 가는 길에 복권이라도 하나 사 보자.

“그리고 아저씨라고 하지 마.”

“아저씨를 아저씨라고 하는데.”

“야. 내 나이가 스물 셋이야. 어째서 이 꽃다운 나이에 아저씨 소릴 들어야 하냐? 그리고 잠깐. 미우라 씨? 실례지만 나이가…”

“스물 둘이에요.”

“미키는 미우라 씨를 뭐라 부르니.”

“아즈사는 아즈사야.”

“한 살 차이잖아! 어째서 미우라 씨는 아즈사고 난 아저씨냐!”

“미묘한 차이인 거야.”

“그것 참 미묘하시네! 잠깐잠깐. 그럼… 아. 니네 사무소 사장! 사장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냐. 나보다 훨씬 많겠지? 한 오십대? 그럼 사장은 고조할아버지라고 부르겠네!”

순간 미키는 물론이요 미우라 씨와 야요이, 막 통화를 끝낸 히비키의 표정까지 괴상하게 변했다.

“아저씨 이상해. 사장님은 당연히 사장님이라고 불러야지.”

…그, 그렇겠지.
나는 그 이후로 주문한 라면이 올 때까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지금 먹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문득 생각나서 입을 열자, 히비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네가 부른 그 타카네인지 하는 아이돌. 올 때쯤이면 우리는 거의 다 먹을 시간 아니냐.”

“아. 그거라면 걱정말라구. 타카네는 그런 일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니까.”

“그런가. 그럼 다행… 어. 왔다. 저 사람 맞지?”

눈에 확 튀는 은발. 덕분에 어딜 가던지 사람 찾긴 쉽겠네. 
내 말을 들은 히비키가 뒤로 돌아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자, 그녀는 살짝 미소 짓고는 천천히 우리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뭐라고 할지. 아직 한 마디도 나눠보지는 못했다만, 걷는 모습만 봐도 그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생각될 정도로 기품이 느껴졌다. 마치 옛날의 왕비 같다고 할까.

“일찍 왔네. 타카네.”

“예. 다른 분들에게 최대한 누를 끼치지 않게 발걸음을 재촉했답니다.”

“자. 앉아, 앉아. 아. 이쪽이 야요이가 말했던 야구선수 씨라고.”

히비키가 나를 가리키자, 타카네의 시선이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내게 머물렀다. 그러자 그 눈이 아래로 내리깔리고, 고개가 살포시 숙여졌다. 그 일련의, 아주 작은 몸짓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사람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미키나 미우라 씨와는 다른, 마치 마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시죠 타카네라고 합니다.”

“아… 응…”

그녀의 은발은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박력까지 느껴진다고 할까. 완전히 내가 압도당해버리는 느낌이었다. 미우라 씨를 처음 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빠, 빨리 주문해. 아직까지 저녁을 안 먹었다면 배가 고플 텐데. 내가 사는 거니까 마음껏 시켜도 좋아.”

그러자 타카네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야구선수 씨가 사시는 것입니까. 저는 당연히 각자 내는 것 인줄 알고…”

“아. 신경 쓰지 마. 팬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먹으라고.”

“하오나…”

“괜찮아. 괜찮아.”

“…알겠습니다. 그럼 사양 않고.”

이때까지만 해도 타카네의 저 ‘사양 않고.’라는 소리는 형식적인 인사치레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 ‘사양 않고’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질 줄은 그때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아저씨. 얘기하다 말고 어딜 자꾸 보는 거야?”

‘야. 그럼 안 보게 생겼냐?’ 라고 미키에게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옆의 옆자리에서 라면을 먹는다. 라는 개념이 아닌 라면을 흡입한다. 라는 신개념 식사가 펼쳐지고 있는데 저걸 안 보는 게 이상한 거 아니겠냐고. 그런데 다른 일행들은 저게 익숙한지 타카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설마 진짜 내가 이상한 거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 테이블만 다른 세상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쥔 컵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설마 ‘나를 마셔요’라고 써져있는 건 아니겠지? 마시면 작아진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내가 얼빠진 생각이나 하는 순간에도 타카네의 앞에는 라면그릇이 차곡차곡 쌓여져가고 있었다. 어린애들 공작놀이 하듯이. 나는 그제야 사양을 했으면 좋았을 걸. 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와서 ‘슬슬 그만 먹지그래?’라고 말은 못한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염치와 체면이 있다. 마음껏 먹으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말리면 이들 사이에서의 내 이미지는 맨틀까지 파고들어가겠지.
슬쩍 히비키 쪽을 바라보자, 내 시선을 느낀 듯 히죽 웃었다. 그래. 그런 거였나. 이게 모두 공명의… 아니. 히비키의 함정이었나. 이럴 수가. 하늘은 어찌하여 나를 낳고 히비키를 낳았단 말인가.

“고맙다. 덕분에 아이돌에 대한 인식을 대폭 수정할 수 있었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넘겨들어.”

더 이상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 더 이상은. 내가 힐끔힐끔 본다고 먹는 것을 멈추진 않을 것 같으니까. 저렇게 먹고 저 체형을 유지하는 건 아이돌 비전의 다이어트 수법 같은 건가.

“아까 키사라기 치하야에 대해 묻다가 말았는데 말이야. 그 애. 사무소에서도 그렇게 말주변이 없어?”

“말주변이 없다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하나. 타인과 거리를 둔다는 느낌? 깊게 엮이는 걸 피한다고 해야 하나.”

순간 은퇴 직후 계속되는 비난에 대인공포증 직전까지 갔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아니… 그거랑은 다른가. 만일 그녀의 그것이 선천적인 성격이 아니라 외부의 무언가에 의한 후천적인 것이라면 당장 심리케어든 뭐든 해서 고쳐야 한다. 마음의 문을 닫고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는 게 얼마나 못해먹을 짓인지 나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뭐. 선천적인 성격이 그런 거라면 개인의 자유니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는 없지만.

“아. 맞다. 그 애. 노래는 잘해?”

“응! 치하야 씨가 노래 부르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해. 미키는 치하야 씨를 존경하고 있어.”

“저번엔 오리를 존경한다고 하지 않았냐.”

“존경하는 분야가 달라. 오리 선생님은 그 라이프스타일을 존경하는 거야.”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이미 동의한 바가 있다.

“치하야 씨는 그 가창력이랑 노래에 진지한 태도를 존경해.”

그런가. 그나마 다행이구나. 만약에 반대로 오리의 가창력과 키사라기 치하야의 라이프스타일을 존경했더라면 그야말로 엄청난 인간이 하나 탄생하는 건데.
그나저나 그 정도로 그 애가 노래를 잘 부른단 말이지?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 기회가 된다면. 불쑥 찾아가서, ‘노래 좀 불러줘.’ 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다.

“방법이 하나 있는 거야.”

“오? 뭔데.”

미키의 말에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아저씨가 우리의 프로듀서가 되면 돼. 그럼 얼마든지 치하야 씨의 노래를 들을 수 있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기각이다.”

“에에-”

“무슨 생각이야, 미키. 나. 저런 바보 같은 프로듀서는 필요없다구.”

“나도 너 같이 바보 같은 아이돌은 필요 없거든.”

“그럼 아즈사는 어떻게 생각해?”

프로듀서에 관심은 없었지만, 미우라 씨의 생각은 들어보고 싶었다. 미우라 씨는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대충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질문 한 번 잘했다. 미키.
나는 내심 관심 없는 척을 하며 미우라 씨의 입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까 히비키랑 벌려놓은 일이 있으니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거야…”

그거야??? 기분 탓인지 미우라 씨의 다음 말이 엄청나게 늦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분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애매해!!! 속뜻을 모르겠어!!! O냐 X냐 확실하게 해달라고! 너무 궁금하잖아! 나 이런 거 있으면 잠도 못 자는데.

“흐응~ 그럼 야요이는?”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야요이는 미키의 질문에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그녀에게 찔리는 일을 한 적도 없건만. 빤히 올려다보는 눈빛에 마치 옆구리를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전 괜찮다고 생각해요. 야구선수 씨. 친절하기도 하고. 야구선수 씨가 저희의 프로듀서가 된다면 기쁠지도.”

“내가 알기로는 프로듀서인지 뭔지 하는 그거. 친절하기만 하다고 되는 게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애초에 미키 넌 왜 날 보고 프로듀서가 되라고 하는 거야?”

“그거야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그으래.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충은 알 것 같다.”

“응? 모르는 거야? 재미있다는 건 중요한 거야.”

“물론 알고는 있다만, 평가받는 입장으로 좀 생각해보라고. 의지가 된다거나, 능력이 있을 것 같다거나, 좋은 평가는 널리고 널려있는데 하필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니? 하다못해 야요이처럼 친절할 것 같다고 하던가. 만의 하나 내가 프로듀서가 된다고 해도 난 야요이만 맡을 거야. 니들은 필요 없어.”

말을 끝낸 후, 오른손을 뺨에 가져다대고 있는 미우라 씨를 흘끗 본 다음,

“미, 미우라 씨도 맡고 말이지. 어쨌든 니들 둘은 필요 없다 이거야.”

“웃우-! 잘 부탁드려요. 저. 힘낼게요!”

“아, 아니. 지금 당장 하겠다는 말은 아니고. 만의 하나.”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니네요!”

“글쎄다… 더 이상 야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 한 번 생각해 볼게.”


 
얼음.
계산서를 받아든 나는 계산서가 마치 메두사의 머리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난 분명히 라면집에 왔는데, 어째서 계산서에 있는 가격은 레스토랑 풀코스 정도의 가격인 건지?
그 엄청난 가격의 일등공신인 시죠 타카네는 그렇게 많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어 나를 두 배로 놀라게 했다. 그 정도 먹었으면 배부른 표정이라도 지어야 정상 아닌가?

내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타카네가 몸을 우아하게 틀어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송구스럽습니다. 괜히 제가 끼어들어서…”

“아아니. 저언혀.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나가있어. 아하하하.”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평정을 가장했으나, 초중고를 모두 야구부에서 썩고 프로 2년차에 사회생활이라고 해봤자 겨우 1년 남짓 해온 내 연기력은 고문책을 읽는 남고생의 수준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알아챘는지(누구라도 알아챘을 것이다.), 타카네가 무슨 말을 더 하려 했기에 나는 그녀를 가게 밖으로 떠밀다시피 해서 나가게 해버렸다.

“이번 달 외식은 끝장났군.”

크레딧 카드로 계산을 끝낸 후에 밖으로 나왔다. 타카네는 아직도 내게 보답을 하고 싶어 했기에, ‘그러면 시간 날 때 우리 팀이나 응원하러 와.’라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미키가 갑자기 얼굴을 불쑥 내밀며,

“다음에 응원하러 오면 또 사주는 거야? 미키. 다음에는 달콤한 게 먹고 싶은데.”

“…마음대로 생각해.”

다들 이만 해산하기로 하고, 나는 가는 방향이 같은 히비키를 내 차에 태워주기로 했다. 히비키는 ‘무슨 이상한 짓이라도 하려는 건 아니지? 나. 이래뵈도 강하다구.’ 라는 괴상망측한 발언으로 끝까지 내 분통을 터뜨렸다.

“너네 아이돌 사무소에는 대체 몇 명이 더 있는 거야?”

“음… 열두 명이야. 리츠코 씨는 이제 제외해야 하니까.”

열두 명. 미키, 미우라 씨, 야요이, 이 녀석, 타카네, 아미, 마미, 치하야까지. 대단하구만. 요 며칠 사이에 한 프로덕션 소속 아이돌 중에 4분에 3을 만나본 셈인가. 아니. 치하야는 예전부터 봐왔다고 해도.

“그건 그렇네. 좋아. 그럼 나머지 네 사람. 이오리, 마코토, 유키호, 하루카까지 우리의 소개 없이 우연히 만난다면, 나도 야구선수 씨를 우리 프로듀서로 인정해 줄게.”

“그러니까 아직 프로듀서는 생각 없다니까. 하지만 정말 우연히 다 만나게 된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그런 걸 큰 인심 쓰듯이 말하지 마. 날 노예처럼 부려먹을 게 눈에 선하다.”

히비키는 ‘이오리면 몰라도, 난 안 그런다구.’라며 중얼거리더니, 

“어? 다 온 거 아냐?”

“뭐가. 너희 집까진 아직이잖아. 너희 집 앞까지는 태워다 줄게.”

“아니, 아니. 됐다구. 난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도 충분해.”

“그래? 집이 여기서 가까운가보지? 어제도 개랑 같이 뛰기도 했고.”

“가깝다면 가깝지. 전력질주하면 한 시간 정도 거리랄까…”

멀잖아! 전력질주로 한 시간이면 적어도 3킬로미터 이상은 된다는 거잖아! 
아니. 잠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녀석 말이 맞다면, 어제 저 녀석은 전력질주로 3킬로미터를 달리고도 나를 지나쳐 계속 달렸다는 건데…
정말 강하잖아. 저 녀석. 요즘 현역 여고생들은 다 저런가? 시대가 바뀐 건가?

어쨌든, 그럼 더더욱 태워주려 했지만, 히비키는 한사코 사양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뜻을 굽히고 맨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오늘 고마웠어. 나중에 또 응원하러 갈 거라구!”

“마음대로 해라. 아직 통장에 여분은 있으니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 아이돌이잖아. 그럴 시간이나 있냐?”

“아직 그렇게 뜨진 않았으니까. 물론 앞으로 톱 아이돌이 될 거지만 말야! 미리 사인이라도 받아두는 게 어때?”

“진짜 톱이 된다면 그때 해달라고.”

내 말에 히비키는 건강미 넘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흔든 후 멀어져 갔다. 저건 저것대로 매력이 있다. 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와 씻을 생각도 못하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뭔가 필요 이상으로 피곤했던 하루였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누워 있다가, 어느새 깜박 졸았나보다.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눈을 뜨고 휴대폰을 꺼내보니 발신자에는…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였다.
한참 비난받던 시절에 모르는 전화를 받으면 무조건 욕이나 협박부터 날아오던 적이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통화종료를 누르려다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받아나 보자라는 생각에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건 인물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차분한 말투의, 목소리만으로도 기품이 느껴지던 그 소녀.

[조금 전에 인사드렸던 시죠 타카네라고 합니다.]

“에? 으에? 무, 무, 무슨 일로?”

[늦은 시간에 폐를 끼친 것 같아 송구스럽사오나, 역시 이대로는 마음이 불편한지라 이렇게 전화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응? 아까 라면가게에서의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거 참.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나저나, 내 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한 거야?”

[아즈사 씨가 알고 계시더군요.]

아. 그랬었지. 처음 만났을 때 차에 부딪친 그녀를 걱정이라고 쓰고 흑심이라고 읽는 기분으로 그녀에게 내 번호를 알려주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가. 어쨌든, 어차피 내가 사는 거였고, 그렇게까지 부담되지도 않았으니까 걱정 말고 쉬어. 아이돌이잖아? 일찍 자야 피부에 좋대.”

[후훗. 야구선수 씨는 친절한 분이시군요.]

친절? 그런가. 난 지금까지 내가 친절이랑은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과거의 행적을 모르니까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어쨌든 간에 타카네 같은 미인에게 저런 소릴 들으니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다.   

[그래도 엄연히 저는 오늘 처음 만나 뵌 야구선수 씨에게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어떻게든, 오늘의 은혜를 갚아 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다음에 응원하러 오는 걸로 끝난 거 아니었어?”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행여, 명일 예정되어 있는 일이 없으시다면 제가 점심을 대접해드리고 싶사온데 괜찮으실는지.]

“아아니… 그런 거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나는 몇 번이고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타카네는 의외로 완고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두 손을 들고 항복해야만 했다. 내일 시간과 약속장소까지 잡은 후, 타카네는 고풍스러운 인사말을 남기고 내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직도 이런 여자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은 다음, 한동안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번엔 메일이 왔다. 역시 모르는 번호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 - 타카네, 모르는 번호로 메일 - ?의 연관성을 생각하며 ?의 값을 구하기 위해 메일을 확인했다. 뭐가 적혀있길래 이렇게 내용이 긴 건지 봤더니…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이하생략)]


…어떤 망할 놈인지 몰라도 깜찍한 짓을 하는군. 곧바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런 최첨단시대에 아직까지도 이런 구세대적 사고를 유지하고 있는 멍청이에게 한 마디 쏴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휴대폰 메일로 행운의 편지라니! 그건 직접 펜이나 연필로 써야 의미가 있던 거 아니었냐? 행운도, 저주도 유행을 타는 거냐?

네 번 정도 연결음이 들리더니,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용~?]

“이미친자식이너누구야임마할일이그렇게도없냐지금세상이어느땐데행운의편지따윌보내고앉았어죽을래!!”

소리를 버럭 질렀더니 한동안 저쪽에서 말이 없었다. 처음 들려온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어린 여자아이 같았는데. 이제 와서 내가 좀 심했나 생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곧 기우로 밝혀졌다.

[웃~후~후~ 상담가이자 야구선수오빠. 오빠가 이런 성격인 거 아즈사 언니도 알고 있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아… 어디서 들었더라. 내 기억력이 이렇게 안 좋은 편이 아닌데. 분명히 최근에…

[앗! 아미도 상담가이자 야구선수오빠랑 통화할 거야!]

[에에- 마미도 아직 몇 마디 못해봤어!]

아. 기억났다.

“너희들. 어제 패스트푸드점에서 봤던 녀석들이구나. 설마 너희들도 미우라 씨나 야요이한테서 번호 알아낸 거냐.”

[응--!!]

[야요잇치한테 얻었지~]

야요잇치라면 야요이인가.
두 사람의 목소리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들려왔다. 남의 사생활이 이렇게 쉽게 알려져도 되는 건가. 그래도 야요이는 악의는 없었을 테니 뭐라고 말은 못하겠다. 히비키 같은 녀석이 그랬다면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아니. 잠깐. 내가 야요이에게 내 번호를 가르쳐줬던 적이 있었던가?
쌍둥이들에게 자초지종을 묻기로 했다.

[야요잇치는 아즈사 언니한테 번호를 얻었다고 했어.]

[처음에는 우리도 그 ‘야구선수 씨’가 우리가 만났던 상담가이자 야구선수오빠를 말하는 건지 몰랐었는데. 방금 야요잇치랑 통화하다가 상담가이자 야구선수오빠가 우리를 만났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제야 야요잇치랑 아즈사 언니가 만났다는 사람이 어제 만났던 상담가이자 야구선수오빠를 말한다는 걸 알게 됐지. 상담가이자 야구선수오빠가 야구선수인 것도 알았고. 그래서 바로 야요잇치한테 부탁해서 번호를 알아냈다는 말씀.]

[음. 음. 역시. 이 아미와 마미의 천재적인 두뇌에 걸리면 사람 한 명 알아내는 것  쯤은…]

그렇게까지 되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거다. 이 꼬맹이들아.
어쨌든 결국 발단은 미우라 씨인 건가. 괜찮아. 미우라 씨라면 뭐든 용서할 수 있다.

“그럼 나한테 그런 메일은 왜 보낸 거야?”

[그냥.]

[심심해서.]

“…끊는다.”

[아? 으아아아! 아직 끊지 마, 상담가이자 야구선수오빠!]

“아까부터 거슬렸던 건데 말이다. 상담가이자 야구선수오빠는 뭐야? 호칭이 쓸 데 없이 길어!”

[그럼 선수오빠.]

“뭐야, 그건! 어감이 이상해!”

[역시 선수오빠로 하는 게 좋겠네, 마미.]

[응!]

“아아…”

빌어먹을 것. 차라리 그냥 오빠라고 하던가. 선수오빠는 또 뭐냐? 종목이 의심되잖아, 종목이!

“이것들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후딱 해버려. 야요이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들었다면, 내가 오늘 경기를 뛰었다는 사실도 알 텐데. 피곤한 사람 붙들고 늘어지지 말고 니들도 빨리 씻고 잠이나 자. 착한 꼬맹이는 이제 슬슬 잘 시간이다.”

[웃~후~후~ 아미랑 마미는 착한 꼬맹이가 아니징~!]

[응, 응. 어느 쪽이냐면 위험한 쪽이라고나 할까.]

[초-위험한 아이돌인 아미 앤드 마미와 함께 이 밤을 불태울 준비는 되었나, 소년!]

[뉴욕은 불타고 있나--!!]

“무슨 흉내냐. 멍청이들아.”

이 녀석들과 계속 통화했다간 한도 끝도 없이 끌려 다닐 것 같아 예고 없이 전화를 끊었다. 거 참 피곤한 녀석들이군. 소년은 뭐고 뉴욕은 또 뭐야. 어디서 본 건 많아가지고 말이야. 부모님이 누군지는 몰라도 참 피곤하시겠어.
그 이후에도 두세 번 정도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벨이 울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다음, 좀비처럼 화장실로 들어가 대충 씻고 나왔다.

자리에 벌렁 드러눕자, 오늘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여자들이랑 이렇게 오래 있었던 적이 있었나. 물론 미우라 씨를 제외하면 다 어린애들인데다, 한참 인기 좋을 때는 여성 팬들도 꽤 많았다만, 그래도 몇몇 열성팬들을 제외하면 다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었던 터라, 지금의 내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인기고 뭐고 다 떨어져나간 지금 와서 이런 인연이 생겨나다니. 확실히 보통의 그것은 아닌 모양일지도 모른다. 정말 히비키 말대로 나머지 네 사람까지 만나게 되면 프로듀서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지도?

라는 건… 역시 내 확대해석일 뿐이겠지. 무엇보다 프로듀서 같은 귀찮을 게 뻔한 일 따위, 내가 할까보냐.

그런 걸 걱정할 바엔, 차라리 내일 타카네를 만날 일이나 걱정해야겠다. 그다지 면식도 없는데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무리 밥만 먹는다고 해도 한 마디 말도 없이 꾸역꾸역 밥만 밀어 넣을 수만은 없으니까.



다음날.

왠지 모를 불안감에 약속시간보다 30분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냥 친절에 대한 보답을 받는 것뿐이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수차례 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여자와 단 둘이 식사를 해본 일이라고는 어머니를 제외하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누나와 한두 번 해본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그것도 이미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하릴없이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다 보니, 어느새 약속시간이 된 것과 동시에 저쪽에서 눈에 확 튀는 은발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맞추는데. 
은발의 아름다운 소녀는 기다리고 있던 나를 보더니 살짝 놀란 표정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오디션이 늦어지는 바람에… 먼저 와 기다리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나야말로 얻어먹는 사람이 먼저 오는 게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고 걱정했다니까.”

“이래저래 야구선수 씨에게 폐를 끼치게 되는군요.”

“폐는 무슨. 일단 들어가자.”

“예.”
 
남자의 데이트 멘트 중 베스트 5 안에는 든다던 ‘나도 방금 왔어.’를 여기서 이렇게 하게 되다니. 알 수 없는 흥분으로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 
타카네와 함께 음식점 안에 들어가자, 그녀 특유의 오라 비슷한 느낌 때문인지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째 우쭐함 반 쪽팔림 반인 요상한 기분인데.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길 바라자.

그러고 보니 오라라면…
누나. 지금은 뭐하면서 지내고 있을까. 얼굴 안 본지도 꽤 됐구나. 시간나면 전화라도 해볼까.

각자 메뉴를 고르고, 음식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며 대화할 거리를 생각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분명 오기 전에 이것저것 생각해 두었는데, 막상 앞에 두니까 머릿속이 백지가 된 느낌이다. 으, 으음. 침착하자. 앞에 있는 사람이 조금 더 상대하기 쉬운… 그러니까 히비키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왠지 열이 받는 걸 느끼고 이건 역효과라고 생각했다. 야, 야요이라고 생각하자.

“오디션 봤다고 했지? 어떤 오디션이었어?”

내 질문에 타카네는 입가에 약하게 미소를 걸친 채 입을 열었다.

“케이블 방송의 미니시리즈에 출연할 여배우를 뽑는 오디션이었습니다만… 결과는 차후에 통보해 주신다고 하더군요.”

여기서 타카네는 얼굴을 살짝 굳히며,

“하지만 그분들의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애석하게도 제가 선택될 확률은 낮은 것 같았습니다.”
 
설마. 안쪽은 몰라도 척 보기에 이 정도 스펙의 오디션 지망자라면 당연히 뽑힐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타카네 정도의 지망자를 뽑지 않는다면, 진짜 말고 안 되게 끝장나는 지망생이 또 있거나, 심사위원들이 장님이거나, 아니면 타카네의 다른 부분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밖에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심각한 결함은 얼마가지 않아 밝혀졌다.

“타카네는 고향이 어디야?”

타카네는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살짝 얹은 후,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그것은 톱 시크릿입니다.”

타카네가 고향이 어딘지 대답하면 거기에서 이야깃거리를 꺼내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으나,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나는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다시 안정을 되찾고 다음 할 말을 생각하기로 했다.

“아… 그래? 그, 그럼… 타카네는 어째서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거야?”

“후훗… 그것 또한 톱 시크릿입니다.”

말문을 아예 막아버리려고 작정을 했구나. 애초에 ‘톱 시크릿’이라는 것 최고의 비밀이라는 거 아닌가. 최고는 둘 이상이 될 수는 없는 거 아니었냐? 이게 바로 신비주의 컨셉인지 뭔지 하는 그런 건가?

“신비주의… 컨셉…?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맙소사.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는 타카네를 보며,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틀렸다. 마주앉은 지 15분 만에 나는 그녀와의 대화에 한계를 느꼈다. 내가 이상한 질문만 골라서 한 것도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누구나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을 했는데도 이 정도면… 오디션에서 왜 떨어질 것 같은지 짐작이 갈 것 같았다. 떨어질 것 같은 게 아니다. 떨어진다.
한숨을 푹 쉬며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댔더니, 타카네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어딘가 지금까지의 기품 있는 모습과는 다른, 귀여움이 엿보여지는 표정이라 나도 모르게 슬쩍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예쁘긴 예쁘구나. 하긴 예쁘니까 아이돌이겠지만, 타카네에게는 다른 아이돌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저 은빛의 폭포수 같은 아름다운 머리칼이라던가… 뭘로 염색하면 저런 머리가 되지? 물어보고는 싶었지만 묻는다고 해봤자 내가 들을 수 있는 대답은 뻔할 것 같아 차마 묻지는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그녀를 보고 있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당연히 느꼈겠지. 바로 앞에서 대놓고 쳐다보고 있는데 말이다.) 타카네는 의아함이 담긴 시선을 나에게 보내왔다.

“역시 닮았단 말야.”

“예? 저 말씀이신가요.”

“응.”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분과 닮았다고 하시는지…”

여기서 ‘그건 톱 시크릿이야.’라고 하면 나만 이상한 놈 취급을 받는, 그런 스토리대로 이야기가 흘러가겠지. 왠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누나랑 닮았어. 뭐… 소위 소꿉친구라고 말하는 그런 누나 말야. 조용하고 차분한 것도, 키가 큰 것도 그렇고.”

엉뚱한 것도 그렇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말하고 싶은 건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 치고는 정말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거지만, 그걸 타카네가 알 리는 없었고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정말 좋은 분이셨나 보군요.”

“응? 아… 그랬지. 항상 내게 잘해줬어. 어릴 때나, 내가 한참 야구의 꿈을 키울 때나, 중학교 때부터 프로에 있었을 때까지. 내가 갈채를 받을 때도, 비난을 받을 때도, 누나는 항상 내편이었어. …그런데. 어떻게 누나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안 거야? 설마 너랑 비슷한 사람이라고 해서?”

내 말에 타카네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살포시 가리고 웃었다.

“우후훗. 그런 것이 아니랍니다. 그 분에 대해 말할 할 때의 야구선수 씨는 제가 오늘 본 야구선수 씨의 표정 중 가장 밝아보였거든요.”  

나도 모르게 내 뺨을 만졌다. 그랬나… 나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그 누나라는 분과는 아직 연락을 하고 계신지요.”

“아니…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내 은퇴과정이 꽤나 좋지 않아서. 그때 이후로 누나랑은 만나본 적도 없고 통화를 한 적도 없어.”

“어째서…”

“나란 놈도 최소한의 염치가 있었다고 할까. 그렇게까지 응원해줬는데 누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은퇴해버렸으니까. 그리고 그 직후 안팎으로 엄청나게 시달려버려서 누나와 연락할 여유 따윈 없었어. 물론 누나 쪽에서도 꽤나 전화를 해대긴 했지만, 내가 받는 걸 거부했지. 그냥 받기가 싫었어. 그 지옥 같았던 하루하루 속에서 누나에게 할 말을 생각할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었어. 그런데 그렇게 시달리고도 아직까지 야구를 붙들고 있는 나도 이상한 놈이지.”

“그랬군요…”

“그런 거야. 그럼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

“그렇다면, 그럴수록 더욱 그 분과 이야기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응?”

신경이 급격히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며 타카네를 쏘아봤지만, 그녀의 눈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까지 야구선수 씨를 생각하시는 분이었더라면, 분명히 그런 상황에서 야구선수 씨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셨을 겁니다.”

“나도 알아, 그건. 하지만 말했다시피 나한테 그럴 염치는 남아있지 않았다니까.”

“염치라… 염치가 아니라 용기가 없음이 아니었는지요.”

“어째서 그걸 용기라고 말하는 거냐. 너는.”

“네. 용기입니다. 야구선수 씨가 시련을 딛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설령 잘 아는 그 분이 아닌 본적 없는 타인에게 도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도움을 거부했다는 것은, 결국 그 현실을 극복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했다는 게 아닌지요? 염치가 없었다는 건 핑계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 행위는 야구선수 씨 뿐만 아니라 그분에게도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이런 격양된 반응을 보이는지, 타카네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지도 떠올랐지만, 무엇보다도 말의 내용이 내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나로서는 ‘이미 지난 일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라고 반박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물론 야구선수 씨가 느꼈을 고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제가 말할 처지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제 모자란 생각을 조금이나마 풀어보자면 이렇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분명 그분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라는 겁니다. 저도, 그분도 그 당시에 야구선수 씨의 심정은 차마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야구선수 씨 역시 간절히 돕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응… 미안…”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거 참. 이렇게 혼난 건 문제의 스프링캠프 때 감독에게 혼났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도 신기하게 그때처럼 더러운 기분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개운해졌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후후훗. 사과의 말은 제가 아닌 그 분께 하셔야 하는 게 아닐는지요.”

“…뭐. 그렇긴 하지만, 일단 네게도 해둘게. 그나저나, 무슨 비슷한 일이라도 겪었었던 거야? 갑자기 반응이 거세서 놀랐다고.”

물어봤자 톱 시크릿 운운하겠지.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제가 그분과 많이 닮았다고 하셨지 않으셨나요. 만약 제가 그 상황이었더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테니까요. 아마 그분도 이렇게 생각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가… 이 사실을 확인하려면, 누나에게 전화를 해보는 수밖에 없겠네. 혼날 각오는 해두고 말이다.

“연락하실 마음이 드셨나요.”

“아아. 덕분에. 왠지 모르게 너와 비슷한 말을 하면서 날 혼낼 것 같지만. 네 덕분에 이제 와서야 제대로 혼날 마음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내 말에 타카네는 빙긋 웃었다. 오늘 본 미소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되었으면 좋겠군요.”

“네 오디션도 잘 됐으면 좋겠네. 뭐. 딱히 그게 아니더라도, 넌 충분히 성공할 거라고 봐. 지금까지 아이돌이라면 조금 봐왔던 내가 하는 말이니까 믿으라고.”

라는 건 시구할 때 잠깐 본 것이 거의 전부지만 말이다.

“야구선수 씨가 그리 말하시니 저도 안심이 되는군요.”

“그, 그렇게 안심하지는 말라고.”

대화는 여기서 끊겼다.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기 때문이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타카네는 지금까지 말을 많이 해서 소비한 에너지를 보충하기라도 하듯 무서운 페이스로 접시를 비워갔기 때문에 나는 뭐라 더 말할 기분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상쾌한 기분이네. 누나와의 일이 잘 풀린다면, 물론 잘 풀릴 것 같긴 하지만, 타카네에게 따로 감사의 인사를 해두어야 할 것 같다.



타카네에게 어드바이스를 받았던 그날 저녁. 나는 은퇴 이후 처음으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들려오는 몇 초의 시간이 나에겐 몇 십 분으로 느껴질 만큼 긴장되었다. 설마 단단히 화가 나서 전화를 안 받는다던가 하지는 않겠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던 차에, 드디어 누나가 전화를 받았다.

“저… 누나?”

수화기 저편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순간 움찔 놀랐으나, 누나는 변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에 금세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누나. 생각만 하지 말고 말로 해줘.”

[……다행이야. 이제 괜찮은 거니?]

타카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물이 왈칵 솟구치려는 것을 있는 힘을 다해 참아냈다.

“아… 뭐… 그렇지. 이, 이젠. 이젠 괜찮아.”

[걱정했었어.]

“미안… 그때 일에 대해서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 할까. 아하하…”

[그래도, 지금은 괜찮은 것 같네.]

“으, 응. 그런 셈이지. 그때보단 훨씬.”

[그럼 됐어. 안심했어.]

“화, 화내거나 하진 않는 거야?”

[화를…? 왜?]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냐.”

그러고 보니 어릴 때, 내가 아무리 짓궂은 장난을 쳐도 누나는 절대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비록 목소리만 듣는 것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누나는 너무나도 변한 것이 없는 그대로라서 안심했다.
그 이후, 나와 누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내가 요즘 있었던 연속된 우연에 대해 이야기하자, 

[프로듀서는… 결국 하지 않겠다는 거니?]

“귀찮잖아. 아까도 말했다시피 정말 나머지 네 명을 모두 만나게 된다면, 그땐 ‘이게 운명인가?’하고 심각하게 고민해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 난 네가 프로듀서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우째서?”

[그 편이 네게 더 좋을 것 같아. 그리고… 아. 이건 나중에.]

“으엑? 뭐야. 또 뭐가 있는데?”

[후훗.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나저나 네가 가르쳐 준 이 주소라면… 조만간 너희 집에 찾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응? 여길?”

[응. 오랜만에 얼굴 좀 보고 싶은데, 안 되니? 그리고 여기선 할 일이 있어.]

“아니. 안 될 이유는 없지만. 할 일이란 건 뭔데?”

[지금은 비밀.]

하여간 비밀 하난 많은 누나야. 그러니까 타카네를 보고 누나와 닮았다고 한 거지만. 
그 뒤로 몇 마디 더 나눈 뒤에 통화를 종료했다. 뭔가 마음 한 구석에 있던 응어리 하나가 싹 풀어진 느낌에 난 콧노래를 부르며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들었다. TV를 틀어보니 마침 야구중계를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 전 소속팀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연고팀과 한창 맞붙고 있는 중이었다. 스코어는 9-4. 전 소속팀이 압도적으로 깨지고 있었다.

“더럽게 못하네.”

어찌됐던 간에 기분 좋은 날이었다.



다음 날. 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감독님이 나를 불렀다.

“어쩐 일임까.”

“너. 내일 원정경기 잡힌 거 알고 있지?”

“알다마다요. 오늘 연습시작부터 강조해 마지않으셨지 않습니까. 뭐 어디 그룹에서 후원하는 팀이라면서요?”

“그래. 용케 기억하는구먼. 항상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던 놈이.”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없으면 전 이만 갑니다?”

“예끼, 이 건방진 자식아! 아직 말 안 끝났어! 흠, 흠. 그 팀 말이다. 말이 좋아 아마추어 팀이지. 실상은 준프로팀이나 다름없어. 아마추어 팀에서 잘하는 놈이 보인다 싶으면 곧바로 영입해서 자기 팀원으로 만드는, 그런 팀이다.”

“호오. 뭔 만화에 나오는 라스트보스 팀. 뭐 그런 겁니까?”

“라스트보스는 뭐야? 우리말로 해. 이놈아.”

“아니. 이런 기초영어도 모르면서 야구 감독은 어떻게 합니까? 히트는 뭔 줄 알아요? 홈런은? 스퀴즈는?”

“이 자식이!”

“아욱!”

인정사정없이 엉덩이를 걷어 채였다. 이 망할 꼰대가! 
물론 지금은 배나온 늙은이일 뿐이지만 현역시절에는 ‘대도’ 타이틀을 얻을 정도로 대단한 도루왕이었다더니, 그래서 그런지 각력 하난 끝내준다. 우리 팀의 어느 누구도 감독님의 킥 공격을 먹고 무사했던 사람은 없었다. 

“아프잖아!”

“어른한테 반말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냐!”

“아, 아프잖아요! 왜 하필 엉덩입니까? 치질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할라고!”

“오냐, 그래. 말 나온 김에 어디 한 번 피똥 쌀 때까지 맞아 볼 테냐?”

“망할… 됐어요. 그래서 절 부른 이유가 뭐냐니까요? 고작 엉덩이 한 번 걷어차려고 부른 건 아닐 거 아닙니까.”

“아. 그랬지. 큼. 어흠. 네놈이 엉뚱한 소리만 안 했어도 얘긴 벌써 끝났겠다, 이놈아.” 

뭐라 확 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내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나로서는 최대한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감독님의 말을 경청하기로 했다.

“뭐냐. 그 띠꺼운 표정은.”

“어디가 띠껍다는 겁니까? 빨리 말이나 해요! 바쁜 사람 붙들고 뭐하는 거냐구요!”

“네놈이 바쁠 수가 있냐? 백수 주제에.”

정곡을 찔려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크흠. 서론이 길었군.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별 게 아니라. 내일은 네놈이 3번이다. 그걸 말하려 한 거다.”

“예? 제가 3번?”

“그래. 이놈아. 지난 경기 보니까 감은 어느 정도 찾은 거 같더구먼. 네놈이 이 팀에 들어오고 나서 그렇게 공을 정확히 맞춘 건 처음 봤다. 이 늙은이 눈은 못 속이지.”

“우연입니다. 우연.”

“그래. 내일 경기엔 바로 그 우연이 필요해. 알겠냐. 이놈아. 내일은 절대로 이겨야 한다. 만약 내일 지면 네놈의 활약 여하에 따라 죄는 다 니가 뒤집어 쓸 테니 명심해!”

“마, 마, 말이 됩니까, 그게? 라스트보스팀이라면서요! 끝판왕이라면서요! 그런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팀을 어떻게 이깁니까?”

“시끄럽다! 할 말 끝!”

망할 영감탱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설마 저 꼰대가 내가 태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건 아니겠지. 
빌어먹을…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이대로 집에 가긴 그렇고, 어디서 바람이나 좀 쐬다 들어가야 할 것 같다.



결국 내가 찾은 곳은 미키를 처음 만났었던 그 다리였다. 오리선생인지 뭔지, 나도 한 번 자문이나 구해봐야 할 것 같았다. 오리가 말을 해줄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머리 식힐 겸 가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막상 도착하자 다리 위에는 이미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 아저씨.”

“아저씨라고 하지 마. 아미랑 마미는 오빠라고 불러주는데 너는 대체 왜 그러는 거냐?”

그 녀석들은 오빠 앞에 이상한 걸 더 붙이긴 하지만, 그걸 굳이 내 눈앞에 있는 소녀. 호시이 미키에게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도 선생님 보러 온 거야?”

“하아… 그런 셈이지.”

“표정이 안 좋아.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뭐라고 해야 하나… 안 좋은 일이라면 안 좋은 일이지. 그다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지만.”

“흐응… 그래?”

아직 나와 미키가 기다리는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여기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 오늘은 아무래도 허탕을 친 것 같았다.

“…미키.”

“응?”

“너희 프로덕션 사장님은 좋은 분이시냐?”

“응!”

나랑 비슷한 성향을 지닌 미키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하는 걸 보면 확실히 좋은 사람이긴 할 것 같지만… 열다섯 살 여자아이와 스물 셋 잉여인간의 취급이 같을지는 직접 만나봐야 알겠지. 아니. 그래도 최소한 걷어차이진 않고 일할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설마 아저씨. 슬슬 결심을 한 거야?”

“그럴 리가.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다. 혹시나.”

“히비키에게 들었는데, 나머지 네 사람을 모두 만나게 된다면 생각해보겠다고 했다며?”

“그렇긴 한데… 말 나온 김에 나머지 네 사람은 누구야?”

“응… 일단 하루카는 아저씨도 알 거야. 히비키랑 치하야 씨랑 타카네가 나온 그 프로를 봤다면.”

“아. 그 리본 두 개의…”

“그리고 마코토 군은… 음… 척 보고 ‘와. 멋있어!’라는 생각이 들면 그게 바로 마코토 군이야.”

그렇게 해서 어떻게 알아. 군이라는 호칭을 보면 남자 같은데. 남자가 남자를 보고 멋있다는 생각이 그렇게 쉽게 들겠냐? 난 지극히 정상적인 성벽을 지닌 사람이라고.   

“…조, 좋아. 그럼 나머지 둘은?”

“응… 유키호는… 딱 만났을 때, ‘앗! 남자!’ 하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유키호야.”

점점 더 수수께끼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아니 사람에 대해 설명해 달라면 당연히 외형부터 설명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특징으로 어떻게 알아!

“마지막으로… 마빡쨩은 보는 순간 ‘앗! 마빡이다!’ 라는 느낌이 들면 그게 마빡쨩이야.”

“어이. 그런 걸로 어떻게 알겠냐고.”

이 세상에 이마 벗겨진 사람이 한둘이냐! 당장 우리 감독님만 해도 마빡이라고! 알려주고 싶은 거야, 알려주기 싫은 거야?

“충분히 알겠지?”

“저언혀.”

“그럼 힘내서 찾아봐.”

“아니, 아니. 내가 찾아서는 소용이 없잖아. 나는 우연히 만나게 되면 생각해보겠다고 했거든.”

“그럼 우연히 만날 수 있게 잘 찾아보는 거야.”

“말을 헛들었구만. 미키. 그러니까, 난 어디까지나 우연히 만나면…”

“아. 아저씨 다음 시합 언제야?”

“안 듣고 있어!”

“응? 뭘?”

눈을 귀엽게 깜박이는 미키를 보며,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철저하게 자기 흥미본위에만 반응하는군. 뭐라 하고 싶어도 내 패턴을 그대로 답습한 모양새라 내가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내일이다.”

“에? 그럼 구경 가도 돼?”

“원정경기라서 여기서 좀 멀어. 괜찮겠어?”

“흐응… 그래? 그럼 다음에.”

“역시나.”

어떻게 생각하면 시원시원해서 좋다. 요즘 애들이야 다들 맺고 끊음이 빠르지만, 미키는 이런 점에서는 남들보다 더 쿨하다. 물론 이 녀석을 더 알고 나서야 판단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내가 본 그녀의 행동은 그랬다.

“흐아암… 아후. 오늘 댄스연습을 했더니 피곤해졌어. 그럼 아저씨. 다음에 또 봐.”

“그러시던지.”

미키는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이내 한 번 더 크게 하품을 하며 멀어져갔다. 그녀가 떠난 이후에도 나는 자리에 남아 10분 정도 더 기다려 보았지만 역시 선생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구장이라고 더럽게 넓네요. 시설도 좋고. 프로팀 구장 같네.”

나를 제외한 팀원들은 오늘 맞붙게 될 상대팀 구장을 둘러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 일색이었다. 나야 뭐 프로생활을 했으니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고작 아마추어 팀에 이런 구장은 사치라고 생각될 정도의 규모였다.

3번이라… 프로에서 잘나갔을 때 이후 처음 해보는 타순인데. 그렇게 공갈협박을 받았으니 대충 할 수도 없고. 이거 참 딜레마구만. 왜 하필 날 3번에 놓은 거야. 그 영감쟁이는. 

경기 시작 1시간 전. 감독님이 오늘의 라인업을 공개하자 당연히 화두는 내가 되었다.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며 내게 달려들어 감독님한테 뇌물을 썼다는 둥, 뭔 아양을 떨었냐는 둥, 난리도 아니었다. 몇몇 사람들은 ‘드디어 감독님이 노망이 들었다.’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했다가 뒤에서 듣던 감독님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바닥을 구르기도 했다.

“어이. 라팔! 승진했다며?”

몸을 풀러 경기장으로 나오려는데 우리 팀의 1선발을 맡고 있는 쌀가게 주인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아저씨가 오늘 선발입니까?”

“임마. 이 중요한 경기에 당연하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QS(퀄리티 스타트. 선발투수가 6이닝을 3실점 이하로 막아내는 것.)만 찍었으면 딱 좋겠는데. 쟤네들이 그렇게 해줄랑가 모르것네. 컨디션은 좋은데 말여.”

“쟤네들 연습하는 거 장난 아니던데요. 난 무슨 프로팀에서 왔나 했다니까요.”

“그러게 말여. 감독님은 뭔 생각으로 저 팀을 우리랑 붙게 하는지.”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후, 감독님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는데 공교롭게도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잘 걸렸다는 듯 웃으며 내가 손가락을 까딱거렸기에, 나는 한숨을 쉬며 아저씨를 마주보았다.

“싸게 싸게 가봐. 부르신다. 오늘 득점지원 해주는 거 잊지 말고.”

“…노력해보죠.”

감독님께 달려가자, 감독님은 내게 전력분석용 파일첩을 차에다 놓고 왔으니 몸도 풀 겸 뛰어가서 가져오라는 말을 했다. ‘그거야 감독님이 직접…’까지 했다가 엉덩이에 불이 난 후에 터덜터덜 경기장 밖을 나왔다. 망할.

그리고 감독님 차 앞까지 와서야 생각이 났다.
내가 차키를 안 받아왔다는 것을

“으아어)@i@)#i@)#!!!!!!”

한바탕 괴성을 지르고 나서 주위를 바라보자, 멀찍이서 뭔가 수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두 소녀가 보였다. 게다가 그 중에 한 명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야… 야요이?”

“아. 야구선수 씨!”

야요이는 나를 향해 쪼르르 다가와 입가에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혹시 이오리쨩네 팀이랑 맞붙는다는 팀이 야구선수 씨 팀인가요?”

“이오리쨩네 팀? 이오리쨩? 그건 누구야?”

“아. 소개시켜드릴게요. 이오리쨩! 이리 와!”

야요이의 손짓에 야요이와 함께 있었던 소녀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어째 척 보기에도 귀티를 풍기는, 이른바 ‘아가씨’라는 느낌의 소녀. 한 손에는 토끼 인형을 안고 있고, 새초롬한 표정에 헤어스타일이…

‘마지막으로… 마빡쨩은 보는 순간 ‘앗! 마빡이다!’ 라는 느낌이 들면 그게 마빡쨩이야.’

“앗! 마빡이다!”

“누가 마빡이라는 거야!”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그 자리에서 바닥을 구를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0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