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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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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7, 2012 21:37에 작성됨.

오늘도 어김없이 무료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산책을 나왔다가 조금 쉴 겸 다리 난간에 기대어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찍찍 하품이나 하고 있는데, 물위를 지나가는 오리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근심이 없이 평온하게, 그저 물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으아암… 나도 저 오리처럼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구만.”

헤엄치는 오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더니, 나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서 말했다.

“아. 오늘도 왔다. 선생님.”

선생님?
슬쩍 옆을 바라보니, 머리를 금색으로 물들인,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외모의 소녀가 반가운 표정으로 오리를 보고 있었다. 

“선생님이라니.”

나도 모르게 궁금했던 바를 입 밖으로 꺼내자, 소녀는 나와 비슷한 포즈로 다리 난간에 기대며 대답했다.

“응. 오리 선생님.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존경해왔어.”

“오리를 말이지.”

“자면서도 둥실둥실 떠다닐 수 있으니까. 미키도 저렇게 편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 그거 좋겠네. 안 그래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걱정 없이, 생각 없이 산다는 건 무척이나 좋은 일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인간보다 오리나 금붕어의 삶 쪽이 훨씬 매력적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흐응. 아저씨는… 에엣?”

내 쪽을 흘낏 보던 소녀는 곧 뭔가 의아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직 한창 때인 나를 아저씨라고 지칭했다는 것에 한 마디 쏘아주려 했건만, 설마 저 아이. 날 알아본 건가.
라고 생각했더니, 나 역시 저 아이를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 얼빠진 케이블 방송에서…

“너. 아이돌이지?”

“아저씨. 야구선수?”

두 사람의 말이 동시에 엇갈렸다. 그 이후 장시간의 침묵. 결국 대답은 내가 먼저 하기로 했다.

“였었지. 지금은 안하지만.”

내 대답에 소녀는 ‘역시!’라고 소리치더니 내가 빤히 바라보자, 빙긋 웃으며 내 질문에 답했다.

“응. 미키는 아이돌이야. 아직 케이블 방송에 가끔 나오는 게 전부지만.”

“역시. 널 방송에서 본 적이 있어. 개구리… 뭐시기 채널에서 춤을 추고 있었지.”

“아. 개구리 TV! 응! 미키. 그 날 처음 방송데뷔였어. 그 방송 봤어?”

그다지 주의 깊게 보진 않았다만. 애초에 그 채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하지만 이 아이라면 기억하고 있다. 웬만한 메이저 아이돌보다 뛰어난 비주얼이었으니까. ‘얘는 꽤 이쁘구나.’ 정도로 알고 있었지.

“그러니까 이름이… 호시노 미키였던가.”

내 말에 소녀는 양 볼을 부풀리며 손가락으로 가위표를 만들었다.

“뿌뿌-! 틀렸어. 미키의 이름은 호시이 미키야!”

“…전직 야구선수니까 이해해 달라고.”

소녀의 이름을 기억해내면서 순간적으로 호시노 감독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나저나 아저씨. 작년 초까지만 해도 가끔 뉴스에 이름이 나와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은퇴했었구나.”

“그래. 그랬지.”

자랑은 아니지만, 3년 전 프로 입단 첫해에 슈퍼루키라는 말을 들었었고, 프로 2년차인 재작년에는 타격 2위까지 올랐었던 이가 바로 나다. 사람들은 언젠가 이치로를 능가하는 타자가 나온다면 그것이 바로 나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달고 살았으며 천재라는 단어는 나를 위한 단어라고도 했었다.
하지만, 3년차인 작년. 나는 4월 한 달 동안 1할도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내고 곧바로 은퇴했다. 이유는 한 가지. 모든 게 귀찮아졌으니까.

고등학교 때만해도 팀의 중심은 나였다. 약체였던 모교를 거의 나 혼자 힘으로 코시엔까지 진출시켰으니까. 그 당시에 나를 건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령 감독님이라 할지라도. 그로 인해 나는 내 방식대로 자유롭게 훈련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는 달라서, 팀의 중심이 더 이상 내가 아니었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 역시 없었다. 내 나름대로의 훈련방식과 팀 훈련은 너무나도 차이가 있었다. 첫 2년간은 어느 정도 팀의 스케줄에 맞춰갈 수 있었지만, 3년차를 맞이하는 봄의 스프링캠프에서 느꼈다.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고.

곧장 감독에게 달려가 팀의 훈련 스케줄에 따르지 않고 나 혼자 내 방식대로 알아서 훈련하면 안 되겠느냐 물었지만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음은 물론이요, 야구배트로 흠씬 두들겨 맞을 뻔했다.
어떻게 참고 스프링캠프는 마칠 수 있었지만, 시즌 개막 후 나는 극심한 타격 슬럼프에 빠졌다. 그 이전 시즌에 4할을 넘겼던 나의 한 달간 타율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1할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자 감독은 머리를 식히고 오라며 나를 1군 엔트리에서 제외시켰고, 난 그 날로 은퇴를 선언했다. 더 이상 야구가 즐겁지 않게 변했기 때문에.

물론 매스컴에선 난리가 났었다. 그러고 보니, 날 뉴스에서 봤다는 녀석이 막상 은퇴했다는 건 모른다는 게 신기하군. 그때가 더 시끄러웠는데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사회인 야구팀에 들어가 간간히 선발로 나서고는 있지만, 역시나 처음으로 프로 무대에 입성했을 때만큼의 즐거움은 찾기가 힘들다. 일은 모름지기 자기가 즐거워야 하는 법. 

“이런 얘기야. 근데 왜 내가 너한테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어차피 이런 얘길 해봤자, 내 마음을 알아주는 녀석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친구들마저, 내 어리석음을 탓했다. 너는 너무 제멋대로라나, 뭐라나.
물론 내 앞에 있는 이 아이 역시 한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역시 자기가 편한 게 제일 좋지?”

“응?”

“미키가 아이돌을 꿈꾸게 된 것도 느긋하고 편안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겠다 싶어서 선택한 거야. 나도 아저씨의 기분. 약간이지만 알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 처음으로 내 생각에 동조해 주는 사람을 찾았다. 그게 막 데뷔한 아이돌이라는 건 조금 의외의 일이지만. 
아니. 그나저나.

“난 올해로 스물 셋이다. 아직 아저씨 소리 듣기엔 너무 억울한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미키는 열다섯이니까. 아저씨는 아저씨인 거야.”

“뭐? 아직 여덟 살밖에 차이가 안 나잖… 열다섯?”

저 키에 저 몸매에, 저 볼륨에 열다섯이라니. 어떻게 된 거냐, 요즘의 일본은! 
확실히, 그야말로 아이돌에 최적화된 몸인 것 같긴 하다만.

“그럼, 아저씨는 지금 무슨 일해?”

정곡을 찔렸다.

“지금 말이냐? 지금은… 뭐라고 할까… 아직 만나지 못한 꿈을 쫒고 있지.”

“호오? 왠지 멋있어 보여.”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직 만나지 못한 꿈을 쫒고 있다. 라고 쓰고 잉여인간이라고 읽지만. 그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백수라지만 아직 돈은 많다고. 아니. 돈 문제가 아닌가.

“아저씨. 괜찮다면, 내 프로듀서 되지 않을래? 아저씨랑은 왠지 잘 맞을 것 같아.”

프로듀서라면… 그거겠지. 대체 뭐하는 아이돌 사무소이길래 방송까지 나오는 아이돌한테 프로듀서도 붙이지 않는 거지?

“이미 날 아저씨라고 부르는 시점부터 괜찮지 않거든. …각설하고. 프로듀서라니. 대충 무슨 일을 하는 건지나 들어보자.”

“음… 아이돌의 스케줄 관리라던가, 영업에 같이 나간다던가, 뒷바라지를 해주는 일일까나. 지금은 리츠코…씨가 전부 맡고는 있는데 요즘 들어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여.”

“우와. 그거 더럽게 귀찮겠네. 기각. 귀찮은 것도 귀찮은 거니와, 난 내가 즐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단 말이다.”

“그래? 유감이야.”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나와 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을 만났으니 기분은 좋군. 프로듀서는 못 되어주지만, 팬 1호라면 되어주지.”

미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것은 마치 미(美)로도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내게 일깨워주기라도 하는 것 같은 미소였다.

“고마워. 팬 1호 아저씨. 나. 꼭 아이돌이 될게.”

“지금도 이미 아이돌이잖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뭔가 나에 대한 호칭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긴데 뭔가 빼야겠다는 생각 안 들어?”

“그럼 빼고 그냥 아저씨.”

“아니. 그걸 빼. 그걸.”

미키와는 그 이후로도 몇 마디 더 나눈 후에 헤어졌다. 그때까지 아이돌이라고는 가끔 시구하러 온 녀석들밖에 본 적이 없었는데. 왠지 아이돌이라면 가식으로 똘똘 뭉친 것들이라고 생각지만, 미키가 내 인식을 많이 바꿔준 셈이 되었다.
그 녀석. 자신에 대한 말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아이는 나와 같은 부류. 소위 ‘게으른 천재’라고 불리는 타입임을.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걸.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난 이 만남이 앞으로의 내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있었다.



미키를 만난 지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스트라이잌-! 삼진 아웃!”
 
경기 끝. 오늘의 성적은 4타수 무안타 1볼넷.
나의 마지막 타석이자 팀의 마지막 타석을 헛스윙 삼진으로 멋지게 장식한 후, 덕아웃으로 들어오니 팀원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오늘로 벌써 4연패니까.

“죄송합니다.”

“기대도 안 했어. 임마.” 

“이런 놈이 재작년에 타격 2위였다니. 우리가 프로 나가도 되는 거 아냐?”

“이 자식아. 다음 경기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마.”

“어? 그럼 저 그날 안 나와도 됩니까?”

맞을 뻔했다.
다들 나에 대해 한 마디씩 구시렁거리며 갈 채비를 했다. 이런 말이야 몇 번이나 들어왔고, 이 팀에 오기 전부터, 프로 입단하기 전부터 계속 들어왔다. 스타플레이어가 부진하면 보통 선수들의 몇 배는 더 욕을 먹으니까. 이런 비난에는 익숙하다. 그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이 팀에서는 내가 자처해서 욕을 먹는 것이라고 할까.
여기서는 그다지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예전같이 쳐댔다가 괜히 언론에 이슈라도 됐다간 귀찮아질 테니까. 대충 2할 초반정도 쳐주면 불필요한 관심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예 야구를 버리면 될 것을. 더 이상 야구가 재미있지 않은데도, 난 무슨 미련을 가지고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슬쩍 텅 빈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프로의 그것에 비하면 볼품없기 짝이 없는 곳이지만, 이곳은 아마추어 야구인들만의 피와 땀이 흐르는 또 다른 성소다. 가끔은 내가 괜한 아집으로 이들의 야구를 망가뜨리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만큼.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어봤다.

“다음에 기회가 나면 좀 쳐볼까.”

어느새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야구장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데, 옆의 철조망에서 누군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웬 여자아이였다.

“거기서 뭐하냐.”

배트와 글러브를 가방에 대충 쑤셔 박고 가방을 들쳐 맨 다음 철조망을 향해 걸어갔다. 언뜻 보기에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 초반으로 보이는, 약간 곱슬곱슬한 머리를 양 옆으로 땋은 아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울먹이고 있었다.

“어째서?”

난 내가 나도 모르게 여자아이를 울릴만한 짓을 했는지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무리 아마추어 사회인 야구팀이라지만 우리 팀도 소수의 팬은 보유하고 있다. 설마 우리 팀의 열렬한 팬이라 4연패에 충격 받고 운건가? 그럼 결과적으로는 내가 울린 게 맞다만…

“저기… 무슨 일이니?”

“히, 힘내세요!!”

“아?”

내 얼빠진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아이는 눈물을 쓱 훔치고는 짐짓 기합이 들어간 표정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열심히 연습하면 다음 경기에서는 꼭 잘 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철조망을 사이에 둔 나와 여자아이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마 내가 모두 나간 뒤에도 그라운드를 바라보던 모습이 여자아이에게는 다른 의미로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차마 나를 위해 눈물까지 그렁거리는 아이에게 일부러 안쳤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황급히 말할 거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 응. 그래. 다음엔 잘 할게. 그러니까 울지는 말고…”

“저, 다음 경기도 응원하러 올 테니까요!”

다음 경기는 출전 못 할 텐데 말이지. 상관없나. 어차피 이 아이도 형식적으로 한 말일 테고, 다음 경기는 3일 후인데, 얼마 안가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 그래주면 고맙겠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왔니? 너 혼자 온 거야?”

“네. 일 끝나고 마트에 들렀다 집에 가던 도중에 야구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 저. 야구는 하는 것도 보는 것도 좋아하니까요.”

아래를 바라보니 여자아이의 양 손 밑에는 두툼한 비닐봉지가 두 개 놓여 있었다.

“그러냐.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는데, 너도 슬슬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앗! 내 정신 좀 봐. 어서 저녁을 만들러 가지 않으면…”

나는 잠시 내 차 안의 청결도를 생각해본 후에, 철조망을 툭 건드려 여자아이의 시선을 끌었다.

“집이 어디냐? 태워다 주지.”



“아. 저기. 저기서 좌회전이에요.”

타카츠키 야요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 나이는 열네 살. 놀랍게도 6남매의 맏이인데다 집이 가난해서 부모님이 일을 나가있는 동안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 집안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 아이돌을 하고 있다고.

“그럼 학업에 아이돌에 집안 살림까지 혼자 한다고.”

“물론 집안일은 큰 동생 쿄스케가 도와주긴 하지만요.”

“…니가 나보다 어른이구나.”

“에?”

새삼 부끄러웠지만 그렇다고 생활패턴을 바꿔보자는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야요이는 야요이만의 삶이, 나는 나만의 삶이 있는 거다. 그래. 난 언젠가 만나보지 못한 꿈을…
젠장. 그게 뭐야.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으면 그냥 없는 거 아닌가.

“아. 그래. 아이돌 하니까 생각났는데. 호시이 미키라고 알아?”

“미키 씨? 네! 같은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어요. 미키 씨를 아세요?”

“팬 1호다.”

“대단하네요!”

“하지만 아저씨는 아니야. 미키를 만나면 꼭 그렇게 전해.”

“에에??”

야요이가 말하는 대로 좁아터진 길을 여기저기 지나자, 곧 야요이가 밝게 소리쳤다.

“아! 다 왔어요. 저 목조건물이에요!”

2층집이구만. 목조건물이라니 왠지 운치가 있네. 삭막한 맨션보다 오히려 나을지도.
대신 화재라도 발생하면 홀라당 날아가겠지만.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팔을 뒤로 뻗으며 고개를 푹 숙이는 야요이는 꽤나 귀여워보였다. 저런 컨셉의 아이돌인건가, 저 녀석은. 아니. 지금까지의 대화로 미루어봐서는 천성인 건지도.

“저녁 맛있게 먹으라고.”

“죄송해요. 찬거리만 넉넉했으면 저녁식사에 초대해 드리는 건데.”

“됐네요. 보아하니 온통 콩나물뿐인데. 난 집에 가서 더 맛있는 거 먹을 거다.” 

“에- 콩나물은 맛있어요!”

“아. 그래, 그래. 콩나물 먹고 키나 쑥쑥 자라라. 아이돌처럼.”

“지금도 아이돌이에요!”

확실히… 저 나이에 저 키와 몸매라면 4~5년 후엔 엄청나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만. 그건 그때의 이야기겠지. 그리고 나는 야요이보다 단 한 살 위인데도 충분히 엄청난 소녀를 한 명 알고 있다.

“어서 들어가. 나도 가게.”

“예. 경기 3일 후라고 하셨죠? 저 꼭 응원하러 갈 테니까요.”

“어… 그, 그래.”

야요이가 집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후에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어째 화장실에서 큰일을 치른 다음 밑을 안 닦고 나온 기분인데. 차마 그 날 선발로 뛰지 않는다는 말을 야요이에게 할 수는 없었다. 야요이가 잊거나 바빠서 오지 못하는 걸 바라는 수밖에 없나.
생각해보면, 애초에 야구를 좋아한다는 녀석이 내 얼굴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야구를 좋아한다는 말도 아마 그냥 해본 말일 것이다. 그래. 야요이는 안 온다.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라고 생각하는데우왓--!!”

고민에 빠져 차를 몰다가 앞에 가는 사람을 못 봤다. 황급히 차를 세웠지만, 차에 살짝 부딪치는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그 사람이 털썩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머리가 백지장이 되는 기분이었다. 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재빨리 차문을 박차고 나왔다.

“괘, 괘, 괜찮으신가요?”

“아야야…”

주저앉은 사람은 여자. 그것도 엄청나게 예쁜 여자였다. 미키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느낌이라고 할지. 키도, 볼륨도 신체스펙은 물론이고 미키에겐 없는 어른의 향기까지 물씬 풍겨왔다. 급박한 상황인데다 새하얗게 탈색되었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 정도라면 대충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아… 으… 저기…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 한눈을 판 바람에… 몸은 괜찮으세요?”

“예. 괜찮아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길을 찾던 중이라 미처 신경을 못 쓰고…”

“아닙니다.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자.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엉겁결에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맞잡은 그녀의 손은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이 부드러워,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에도 난 잠시 맞잡았던 내 손을 하염없이 보고 있어야만 했다.
야구를 하는 동안에는 이성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라고 변호하고 싶다. 아니. 비록 나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도 남자라면 누구나 이런 미인 앞에서는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과 다리를 털더니, 별 생각 없이 엉덩이를 털다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대로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으니 아픈 게 당연할 것이다. 그래도 다른 곳은 다친 것 같지 않아 다행이다.

“저기… 실례지만,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길을 잃어서.”

유감이지만 여긴 나도 처음 와보는 곳이다. 그래도 목적지를 안다면 카 네비게이션으로 어떻게 알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목적지가 어디시죠?”

“에… 그러니까…”

여자가 가르쳐준 목적지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했다. 
맙소사. 여기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차로 대충 3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요?”

“미우라 아즈사라고 한답니다.”

“아? 예. 미우라 씨. 혹시 여긴 처음 오시는 길인가요?”

“저희 집 근처에요.”

자기 집 근처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있다니. 이건 지금 이 여자가 날 놀리는 것이거나, 아니면 거의 우주 레벨의 방향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근데 표정을 봐선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는 아니다.
정말로 있었구나. 집 앞에서 길을 잃는 사람.

“실례가 안 된다면 집까지 태워드리죠.”

“어머. 그래주시겠어요?”

“예… 뭐… 걷기 불편할 것 같으시기도 하고.”

“어머, 어머. 괜찮은데. 그럼 사양 않고.”

빙긋 웃은 미우라 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뒷좌석이 아닌 조수석에 덜컥 타버렸다. 너, 너무 무방비 아닌가. 이거.
맹세코 내가 운전면허를 따게 된 이후 내 차 안에 여성을 들인 건 어머니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던 누나와, 프로시절 내 경기를 보겠다고 멀리서 구경 왔던 내 열성 팬을 제외하고는 미우라 씨가 처음이었다. 자연스레 내 마음은 심란해졌다.
거, 걱정 마. 고작 3분이다.

“죄송합니다. 차에 땀 냄새가 조금… 제가 운동을 해서요.”

“운동? 어떤 운동을 하시나요.”

나는 턱짓으로 뒷좌석의 배트가 꽂혀있는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구를 합니다. 아마추어 팀에 잘 하지도 못하지만.”

“아마추어 팀이라면… 저어쪽의 야구장에서…”

알고 있는 건가. 자기 동네 지리도 모르면서 그건 어떻게 아는 거지.

“예. 맞습니다.”

“가끔 지나가다 본 적이 있거든요. 모두 열심히 연습해서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성의 없는 플레이로 잔뜩 혼나는 것 역시 봤을라나. 하지만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걸 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가면서 언뜻 본 모양이다.

“자. 다 왔습니다.”

“어머. 벌써 왔나요? 아. 우리 집이 맞네요.”

역시나 짧은 거리였다. 중간 중간 옆으로 시선이 가는 걸 참느라 나에겐 꽤나 긴 시간 같았지만.

“…네.”

“고마워요. 정말 친절하신 분이시네요.”

“별말씀을. 연락처 가르쳐드렸으니 혹시라도 몸에 이상이 생기면 연락주세요.”

내 연락처를 가르쳐 준건 정말 큰 용기를 쥐어짜낸 것이었다. 이런 빌미라도 없다면 저 정도의 미인과 연락처를 주고받을 일 따위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프로 때는 정말 쉬웠는데 말이다.

“걱정 마세요. 저 이래보여도 튼튼하니까요. 아. 맞다. 다음 경기는 언제인가요? 저. 응원하러 갈 테니까요.”

“아…?”

완전히 기억에서 지웠던 야요이의 일까지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미우라 씨의 발언에 나는 잠시 모든 행동을 정지했다.

“3일… 후입니다만.”

“장소와 시간은?”

“미우라 씨가 아시는 그곳이죠. 시간이야 뭐 한 저녁 다섯 시쯤.”

“그렇군요. 그럼 그때 보도록 해요. 응원할게요!”

“아…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우후훗. 그럼 저는 이만.”

미우라 씨는 만류하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고개를 꾸벅 숙여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그녀가 아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녀가 고개를 숙일 때 보인 가슴 계곡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그 날에 대한 걱정이고 나발이고, 머릿속에 카메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하루였다.



야요이와 미우라 씨를 만나고부터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다시 말하자면 내일이 바로 시합 날이다.

아침 일찍 눈이 떠진 김에 바로 러닝이나 하러 나가기로 했다. 대충 씻고 대충 운동복을 걸치고 대충 운동화를 신고 나가려 문을 열었는데 맨션 옆 호의 문이 열리고 특유의 무표정이 튀어나왔다. 이름이 뭐더라… 아. 그래. 키사라기… 치하야.
오늘은 휴일이니 학교에 가는 건 아닌 것 같고, 아마 아이돌 사무소에 출근하려는 것 같았다. 거 참. 마주칠 때마다 인사는 하고 있지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도통 하지 않는데다 그런 말을 붙일 기분조차 나게 하지 않는 무표정 일변도였기에 모르고 있었다가, 어느 날 그 멍청한 케이블 방송의 게로게로 키친인지 뭔지 하는 저급한 요리 프로에서 저 아이가 나왔을 때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뻔했다.

그 방송을 본 날 우연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치하야를 만나 물었다.

“너. 아이돌이었어?”

그때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지.

“아니오. 보컬리스트입니다.”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횅하니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굳게 닫힌 그녀의 집 문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와 나의 거의 유일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여어. 안녕? 출근하냐?”

“예.”

오늘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치하야는 그대로 멀어져갔다.
그 아이돌 사무소 사장이라는 작자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네. 이런 목석같은 애를 아이돌로 캐스팅하느니, 차라리 갈라파고스코끼리거북한테 무대 의상을 입혀놓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자칭 보컬리스트라는 걸 보면 노래는 잘하는 것 같다만, 그래도 내가 들어본 적이 없으니 모르지.

에라. 모르겠다. 저 아이는 저 아이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어린 나이에 혼자 살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알지도 못하고 흉보는 것도 결례다. 나는 내 길을 가야지.

점점 무더워져가는 날씨라지만 아직 아침은 선선하다. 귀찮은 걸 몹시 싫어하는 나라지만, 아침 러닝은 이미 하나의 습관화되어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거르지는 않는다.
은퇴 직후엔 이런 일.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지. 소속팀 연고지에서 도망치다시피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은퇴 이후 내가 지금까지 했던 기행들이 모조리 까발려지면서, 팬들은 홀랑 다 떠나가고 보스턴 원정경기의 알렉스 로드리게스만큼 욕을 먹었다. 욕먹는 이유는 다르지만. 어쨌든 그 정도 수준이었다.
물론 지금은 다른 연고지이기도 하고, 시간도 꽤 지났고 해서 나에 대한 여론과 팬의 분노는 누그러진 수준이지만. 어쨌든 이게 바로 내가 아마추어 경기에서 이른바 ‘태업’을 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팀원들이야 그때의 일로 인해 내가 완전 재기불능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맨션 밖으로 나서 슬슬 준비운동을 하려는데,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만 들으면 웬 여자아이가 개에게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은데.

흘끗 뒤를 돌아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커다란 개가 나를 향해 거의 돌진하다시피 달려오고 있었고, 뒤에선 피부를 살짝 태운 포니테일의 여자아이가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 대체 뭣 때문에 개까지 시켜서 날 공격하려는 거지? 그때의 일에 아직도 원한을 품은 전 소속 팀의 팬인가?
일단 지금은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다. 저렇게 커다란 개한테 물렸다간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침까지 질질 흘리며 미친 듯이 달려오는 개가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았을 것이라는 보장 또한 없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도망치기로 했다.

“사, 살려줘--!!!”

“컹! 컹!”

“이누미!! @)#i 멈@)#@)(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멈~어쩌구 하는 걸 보면, 아마 ‘저 놈을 멈추게 해!’라는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소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개의 속도가 빨라진 걸 보면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그만해!! 우리 말로 하자고!!”

“컹!!”

“으아아!”

준비운동도 제대로 못하고 전력질주를 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몸에 무리가 왔다.
개와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미친개한테 넝마가 되도록 찢겨지는 건가.

하지만 날 비웃기로 하듯, 개는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가버렸다.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어?”

“기다려!! 이누미!!”

그 뒤를 따라 소녀 역시 그대로 나를 지나쳐버렸다. 

그렇군. 난 헛고생을 한 거군.
스쳐지나간 소녀의 얼굴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걸 생각해낼 기력 따윈 없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고 있는 나를 보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지만, 그것 역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10분 정도 그렇게 있다가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조금 이른 감은 있었으나, 그 상황에서 더 뛰고 싶은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곧바로 씻고 아침을 먹으려는데 그런 일이 있고 나니까 아침식사를 만드는 것도 귀찮아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집에 남아있는 인스턴트식품이 없었다.
내일 경기에 대비해 오늘 연습도 있고, 그런 상황에서 아침을 거를 수는 없으니 귀찮아도 나가서 사오던 먹던 해야겠군.

그전에 일단 한숨 더 자자. 갑작스럽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긴박한 상황에 몰린 관계로 급격하게 피곤해졌으니까.



결국 눈을 뜬 시각은 정오. 이거야 원 아침 겸 점심을 먹게 생겼다. 오후 2시부터 연습시작인데 빨리 뭐라도 먹어둬야겠군. 

집에서 가장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에 가기로 했다. 세트메뉴 두 개 정도면 어느 정도 배가 차겠지. 곧 운동을 할 테니 너무 꽉 채우는 것도 좋지 않다.
곧바로 구장으로 갈 생각에 차를 끌고 패스트푸드점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걸. 온 동네 사람들이 점심을 모두 여기서 해결하기로 했는지 사람이 북적거렸다. 다른 곳으로 갈까 생각해봤지만 역시 귀찮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중 4인용 테이블에 3명이 앉아있길래 그쪽에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실례지만 자리가 없어서 그런데 합석 좀 해도 될까요?”

최대한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사정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라는 표정을 짓기 위해 애썼다. 정장에 안경을 쓴, 마치 OL같지만 얼굴에는 약간 앳된 티가 남아있는 여성은 내 표정을 보고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두 소녀를 향해 ‘괜찮겠어?’라고 물었다. 다행히 소녀들은 승낙해주었다.

“예. 하세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앉은 뒤에도 주문을 기다리며 일부러 시계를 보는 등 바쁜 티를 냈더니 일행들은 뭔가 일이 있겠거니 생각하는 듯 나에 대해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기운 내. 다음에는 꼭 합격할 테니까.”

“하지만 릿쨩…”

“우리들. 정말 재능이 없는 걸지도…”

합격? 뭔 시험이라도 봤나. 슬쩍 바라보니 두 소녀는 내일쯤 세상이 끝장난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두 소녀는 머리모양을 제외하면 생김새가 비슷한 게, 아마도 쌍둥이인 것 같았다.

세트메뉴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세 사람의 대화를 들어본 바로는, 두 소녀는 마미와 아미라는 이름의 쌍둥이가 맞으며 두 사람 모두 아이돌 후보생이라고 했다. 요즘 정말 아이돌들을 많이 만나는군. 우연이라면 우연인가. 
내 차례가 되어 세트메뉴를 받아 다시 테이블에 착석할 때까지도 두 소녀는 침울해있었다.

“릿쨩. 우리. 아이돌 그만둘까?”

“다들 조금씩 일거리를 찾고 있는데 우린 아직도…”

“저, 저기. 아미. 마미…”

우중충한 분위기에 밥맛이 다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입 안에 있던 걸 콜라와 함께 삼켜버린 후에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 물어도 될까? 너희들은 왜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거야?” 

내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꽂혔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잠시. 두 소녀는 표정을 약간이나마 밝게 풀고 말했다.

“그거야 엄~청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빨리 TV에 나오고 싶어.”

무시무시할 정도로 어린아이 같은 이유였다. 모법답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적어도 목표는 있구나.”

“응. 마미. 목표는 언제까지나 톱 아이돌이니까.”

“아미도.”

“목표가 있으면 됐어.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적어도 목표가 있으면 된 거다. 남은 건 너희들의 그 목표를 이뤄야겠다는 마음과… 아주 약간의 운이지.”

“운?”

“그래. 일단 목표를 정해두면, 언젠가 한 번 쯤은 그 목표를 이룰 기회가 찾아오게 되어있다. 너희들에겐 아직 그 기회가 오지 않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지난 일은 잊어.”

“그 기회는 언제 오는데?”

“오빠는 알아?”

“알고 싶냐?”

“응!”

아미와 마미는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표정으로 내 말을 재촉했다. 역시 애들은 애들이라고 할까. 

“정 알고 싶으면 일단 너희들 앞에 놓인, 그 식어빠져 냉기마저 날릴 것 같은 햄버거부터 먹어. 그럼 알려주지.”

말이 끝나자마자 둘은 자신들 몫의 햄버거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저러다 체하는 건 아닌지 몰라. 
하지만 내가 그 말을 할 입장이 아닌 것이, 아침을 거른 데다 말까지 늘어놓아 무척이나 배가 고픈 상태였기 때문에, 아미와 마미가 한 개를 먹을 시간 동안 난 세트메뉴 두 개를 해치운 다음 콜라까지 전부 마셔버렸다.

“다 먹었어!”

“이제 가르쳐줘!”

“좋아. 바로 가르쳐주지. 너희가 톱 아이돌이 된다는 목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위해서느은…”

아미와 마미는 거의 나와 박치기를 할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내 옆자리에서 그 광경을 난처하게 바라보고 있던 통칭 ‘릿쨩’이라는 별칭의 여성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 생각을 읽은 듯 표정이 더더욱 난처하게 변해버렸다.

“너희랑 같이 온 저 아가씨에게 물어봐.” 

“에엣--!! 릿쨩. 알고 있었어??”
“왜 우리한테는 가르쳐 주지 않은 거야? 치사해!!!”

“에? 에에? 아니. 그게…”

짐을 떠넘겨버린 후 또 무슨 소리를 듣기 전에 재빨리 일어났다. 두 소녀는 다행히도 완전히 부활한 것 같았다. 그래. 애들은 저렇게 활기찬 게 좋지. 
슬쩍 자리를 뜨려는데 둘 중에 마미라는 이름의 사이드 포니테일의 여자아이가 내게 물었다.

“그럼 오빠는 뭐하는 사람이야? 상담가?”

“나? 목표 없이 사는 사람.”



다음 날.

“어이! 라팔! 그 공 좀 이리로 던져!”

“예이.”

라팔. 이 팀에서의 내 별명이다. 전투기의 이름을 딴 것…은 절대로 아니고. 라이트 8번. 수비 포지션에서는 수비하기 가장 무난한 편에 속하는 우익수이자 타선에서는 가장 약한 타자가 맡는 타순인 8번 타자를 병행하는, 말 그대로 주전 멤버 중에 가장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도 후보보단 낫거니 싶었는데. 저번 경기에서 날 뺀다는 말에 설마 했지만, 역시나 오늘 선발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안 그래도 이번 경기에선 좀 쳐볼 마음이 들었는데, 아예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야요이나 미우라 씨가 여기 오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 거다.

“라팔. 어쩌냐. 감독님이 화가 단단히 났나 보더라. 당분간 선발출장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며?”

“그렇습니까. 저는 못 들었는데. 뭐. 어차피 제가 못해서 그렇게 된 거니까요. 할 말은 없슴다.”

생각해보니 나. 저번 경기까지 28연타석 무안타였지. 아마. 그나마 수비는 평균 이상으로 해주니까 저지경이 될 때까지 날 선발에 박아둔 거였겠지. 하지만 그 인내심도 저번 경기로 인해 바닥이 난 모양이었다.

“자식이 말은. 열심히 해봐, 임마. 혹시 알아. 연습 때 열심히 하면 다시 기회를 줄지.”

“그럽죠.”

오늘 기회가 있었더라면 잘했겠지. 이 팀에서도 몇몇 분들을 제외하면 다른 팀원들이나 감독님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있긴 하지만, 여기 아니면 딱히 날 받아줄 팀이 없다는 것 덕분에 나는 계속 이 팀의 미운털로 남아있는 것이다.

대충대충 시작 전 몸 풀기를 마치고, 경기 시작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결 편하게 벤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약간 섭섭한 것도 사실이지만. 괜히 와서 내가 벤치나 달구는 모습을 보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내가 없어서 그런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경기 초반부터 우리 팀의 타선이 거짓말같이 폭발했다. 4연패하는 네 경기 동안 달랑 5점을 뽑았던 우리 팀은 오늘 3회 만에 6점을 뽑으며 크게 앞서나갔다. 뒤에서 ‘라팔이 없으니까 잘 되네.’라는 소리가 들려와 약간 울컥했지만 내가 자초한 일이니 참았다.

3회까지 6점. 5회에 추가점. 7회에 다시 타자 일순으로 7회가 끝난 시점에 우리 팀은 총 12점을 득점했다. 하지만 역시나 약해빠진 중간계투들이 가을 은행 떨어지듯 우수수 털리는 바람에 스코어는 12-9. 약간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그래도 리드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8회말. 우리 팀의 공격.
1아웃 주자는 3루에 있고, 6번 타자가 볼넷을 얻어내 걸어 나가는 모습을 나는 하품을 하며 바라보았다. 1아웃 1,3루에 7번 타자는 오늘 유일하게 한 개의 안타도 쳐내지 못한 녀석이었다.
속으로 ‘병살이나 치지 마라.’라고 생각한 이후, 목을 이리저리 돌려 풀다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관중석 앞에 쳐놓은 그물망 바로 뒤에 야요이와 미우라 씨는 물론이고 다리에서 만난 미키와 어제 아침에 본 개 소녀까지 와있었던 것이다.

“거…거짓말이지?”

“뭐가?”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옆에서 주장이 불쑥 물었으므로 나는 얼버무릴 말을 생각했다.

“우리 팀이 두 자릿수 점수를 내다니. 거짓말 같아서요.”

“칵-! 너 죽을래? 팀 부진의 원인 중 한 요소가 되시는 분께서 말이 많다!”

하지만 주장의 말이 지금의 내 귀에 들릴 리가 만무했다. 내 시선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네 사람에게 꽂혀있었으니까. 젠장. 언제부터 구경하고 있었던 거지? 진짜 날 응원하러 온 거라면…

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미 7번 타자는 타석을 향해 슬슬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님을 향해 달려갔다.

“감독님.”

“뭐야.”

“부탁드립니다. 절 대타로 써주십시오.”

곧바로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지금까지 이 팀에서 이랬던 역사가 없었기에, 감독님은 물론 날 보고 있던 팀원들까지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곧 무슨 웃기는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웃기고 있네. 네놈을 뭘 믿고 대타로 써.”

나도 오늘은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 했다. 저들이 진짜로 오지만 않았더라면 평화롭게 관전하다 끝났을 경기였다. 하지만, 응원해 주는 사람이 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등학교 때 이름을 날렸을 때부터, 프로에 입문해 승승장구하고 스타의식에 파묻혀 있다가 은퇴를 선택하기 직전까지. 다른 건 몰라도 팬들에 대해서는 진심이었으니까. ‘팬이 있어야 스타가 있다.’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물론 은퇴한 이후부터, 그 많던 내 팬들이 모두 예비 암살자로 바뀐 이후부터는 또 다른 팬이라는 게 생기지도 않았고, 물론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 역시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를 응원해주겠다는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아왔다.

“어차피 3점차에 9회초만 막으면 되는데다, 오늘 저 분 타격감도 안 좋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3루 주자는 불러들일 테니 한 번만 믿어주세요. 속는 셈 치고.”

잠시 동안의 침묵. 

“…마지막 기회다. 이번에도 날려먹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감사합니다!”

감독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구심을 향해 걸어갔다. 교체 사인이 나고, 내가 타석에 서게 된 것이다. 
휴. 혹시나 안 바꿔주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졸여보긴 이 팀에 들어온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타석에 들어서기 전, 헬멧을 슬쩍 벗고 그녀들이 있는 곳을 슬쩍 바라보니, 야요이가 깡충깡충 뛰며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키와 미우라 씨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이름을 모르는 개 소녀는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확실히 힘은 나는데.

지금까지 바깥쪽에 엄청 헛스윙을 해준 전례가 있으니까, 분명 초구는 바깥쪽으로 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속아주자.
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바깥쪽 커브였다. 배트와 공 사이의 거리가 척 보기에도 엄청나게 차이가 날 만큼 어처구니없는 스윙을 해줬다.

“뭐하는 거야, 이 자식아--!!!”

우리 편 벤치에서는 불호령이, 상대팀 벤치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상관없겠지. 뭐든지 결과가 중요한 법이니까. 내가 이렇게 스윙을 해줬으면, 포수는 내가 두 번째 공은 지켜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방금 전보다는 안쪽으로 공을 붙이겠지.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게 말이다.

그럼 난 그걸 밀어 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오오---!!!”

내가 쳐낸 공은 2루수 키를 넘기며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를 완벽하게 갈랐다. 두 명의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2타점 2루타였다. 스코어는 14-9.

팀원들은 죽은 마이클 잭슨이 살아 돌아온 것을 목격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아니. 그 동안 못한 게 있다지만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슬쩍 그녀들이 있는 곳을 보니, 야요이와 미키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방방 뛰는 모습이 보였다. 미우라 씨와 개 소녀 역시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올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맛보는 기분에 나 역시 씩 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경기가 끝났다. 9회초에 3점을 내줘 경기는 14-12로 끝났다. 공교롭게도 내가 8회말에 2점을 내지 않았더라면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팀원들은 내가 무슨 만루 홈런이라도 친 것처럼 내 머리를 인정사정없이 두들겼다. 더럽게 아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내 앞에는 감독님이 서계셨다.

“가, 감독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지.”

“예… 뭐…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이럴 기분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해피엔딩인가.
선수단 해산 후, 나는 그때까지 나를 기다려준 네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녀들은 나를 향해 달려와 나를 둘러싸고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대단했어요--!!”

“멋있었어!”

“잘하시네요.”

“아저씨 진짜 야구선수였네!”

“그럼 가짜겠냐. TV에서 봤다면서. 그나저나, 이 네 명은 대체 무슨 조합인 거야? 다들 어떻게든 안면이 있긴 한데, 서로는 어떻게 아는 거지?”

“그거야, 모두 미키랑 같은 아이돌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미키는 야요이가 아저씨를 응원하러 간다는 걸 듣고 따라왔어. 그랬더니 아즈사도 아저씨를 알고 있다고 하고, 히비키는 그냥 야구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온 건데.”

“뭐?”

미키와 야요이가 아이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우라 씨와 저 개 소녀도 아이돌이었단 말인가. 이건 정말 놀랠 노 자다.

“개 소녀라니. 어감이 이상하잖아. 나. 가나하 히비키라구.”

“어쩔 수 없잖아. 어제의 임팩트가 너무 강렬했다고.”

“근데. 그땐 왜 그렇게 도망친 거야?”

“그거야 그 망할 개한테 물어뜯기는 줄 알았으니까.”

“이누미를 망할 개라고 하지 마!”

“니가 내 입장이 돼봐! 갑자기 덩치가 산만한 게 헉헉대면서 달려오면, 누구든 안 무섭겠냐고! 아직까지 트라우마라고, 트라우마!”

“난 안 무서울 것 같은데. 네가 겁쟁이인 게 아니라?”

“그거야 니가 그 개 주인이니까 그런 거잖아!”

나와 히비키가 서로를 씩씩대며 노려보자, 미우라 씨가 박수를 쳐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 자. 다들 진정하고. 우리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요?”

시간은 7시. 요즘 해가 길어진다지만 이제 슬슬 어두워질 때다. 경기를 끝내서 배도 고프고. 따지고 보면 이들이 응원하러 와준 덕에 팀 내에서의 평판이 쥐꼬리만큼이라도 올라간 셈이니 내가 한 턱 내는 게 맞겠지.

“좋아. 너희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오늘 저녁은 내가 살 테니.”

내 말이 떨어진 순간 히비키와 미키와 야요이의 눈이 광기어린 무언가로 변한 것 같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아니. 무시하고 싶었다.



“으음…”

“뭐, 뭐야. 왜 날 빤히 쳐다보는 거야?”

“너. 가나하 히비키라고 했지?”

“으, 응.”

어제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더니. 옆집의 키사라기 치하야와 같이 게로게로 키친에 나왔었던 것 같다. 그래. 맞다. 

“너. 키사라기 치하야랑 다른 두 사람이랑 같이 게로게로 키친에 나온 적 있었지?”

“응? 오. 그 방송 본 거야?”

“봤으니까 이런 말을 꺼내지.”

내 말에 저만치 앞서가던 히비키는 대번에 내 옆으로 달려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어땠어?”

“뭐가.”

“그 방송 보고 말이야. 소감을 듣고 싶다구.”

“맛있어 보이더라.”

“에에? …이 바보가! 음식 말고 나 말야. 나!”

“아하. 그러고 보니 그때 너보고 뭔가 생각했던 점이 하나 있었는데…”

“뭔데뭔데!”

“스타트 앤 대시가 빨라서 도루 하난 잘하겠구나, 라고…”

히비키는 내 표현력으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좋은 뜻으로 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옆에서 미키가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내 예감은 맞는 것 같다. 내가 틀린 거라면, 대체 뭐에 대한 소감을 말하라고 했던 거야? 저 녀석은.

“각오해. 오늘 빈털터리로 만들어주겠어.”

“제발 비싼 건 봐주라.”

한숨을 쉬던 내 눈에 비친 것은 작은 라면 가게였다. 좋아. 저기로 하자.

“라면 어때? 배도 고픈데 가까운 곳에서 후딱 먹자고.”

다른 사람의 동의를 구하자 세 사람은 곧바로 찬성했지만 히비키 혼자 부어터진 표정이었다. 이 녀석이랑은 어째 궁합이 안 맞는 건가.

“에? 겨우 라면?”

“겨우 라면이라니. 라면을 무시하는 발언이냐, 그건?”

내 반박에 히비키는 ‘그러고 보니 타카네가 들으면 화낼지도…’라고 중얼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얻어먹는 처지에 이것저것 따지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자. 빨리 들어가자구.”

시간대가 시간대다보니 사람들로 북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앉을 자리 정도는 남아있었다. 6인용 테이블 하날 잡고 히비키와 미키와 미우라 씨가 내 맞은편에, 야요이가 내 옆에 앉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말이야. 키사…”

“응? 왜 그래?”

게로게로 키친에 함께 출연했던 키사라기 치하야에 대해 질문을 하려 히비키를 바라보던 내 눈에 뭔가 이상한 게 들어왔다. 맙소사. 아무리 구멍가게만한 곳이라지만 말이야. 이거 위생상태가 개판이잖아?

“주인장!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기 쥐새끼가 있잖아요!”

내가 버럭 소리치자 히비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져서는, 탁자 위에 올라와 있던 쥐를 끌어안더니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쥐새끼라니! 햄조는 햄스터야!”

“뭐? 햄조? 그거 설마 니 애완용 쥐새끼냐?”

“쥐새끼라고 하지 마! 이누미에게도 망할 개라고 그러더니… 명백한 폭언이라구!”

아까 전의 내 외침에 황급히 달려오는 가게 주인을 적당히 상대해 돌려보낸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열 받았다.

“야. 쥐를 쥐라 부르고 개를 개라고 부르는데 뭐가 잘못됐다는 거냐?”

“불필요한 호칭이 붙어 있잖아!”

“우와. 미치겠구만. 그럼 대체 뭐라고 불러야 되는 거야. 내가 지금 시킨 라면은 돼지고기님라면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냐?”

“그거랑은 틀리다구! 얘들은 어엿한 이름이 있다구!”

“혹시 알아. 내 앞에 놓일 돼지고기라면의 재료인 돼지도 생전엔 이름이 있었을지. 부치라던가.”

되는 대로 내뱉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미키는 숨이 넘어갈 듯 웃는 것을 참고 있었고, 야요이와 미우라 씨는 난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우라 씨의 표정을 본 시점에서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라면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다음, 히비키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히비키도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자 사람들의 시선은 각자의 테이블로 돌아갔고, 나는 자리에 앉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올 롸잇. 좋아. 히비키. 우리 냉정해지자.”

“아, 알았다구…”

히비키야 아직 고등학생이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난 성인이다. 이성을 잃고 여고생과 언성을 높여 말싸움을 하다니. 쪽팔린 것도 정도가 있다. 게다가 맞은편에서 미우라 씨가 보고 있는데. 거 참. 체면이 말이 아니군.

“일단 사과는 해두지.”

“일단 사과는 받아두지.”

“뭐야, 이 건방진… 좋아. 됐어. 알겠어.”

여기서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내가 잘못한 건 맞으니까. 

“사과의 표시로. 뭔가 부탁할 게 있으면 해봐.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선 들어줄게.”

“어? 진짜 그래도 되겠어?”

“그래. 아무 때나 오는 기회 아니다.”

“그럼. 나 아는 사람 한 명 더 불러도 돼?”

“뭐? 아는 사람?”

“응. 나랑 같이 게로게로 키친에서 한 팀이었던 시죠 타카네라는 아이돌인데. 기억 나?”

아… 그? 머리색이 워낙 독특해서 기억은 하고 있다. 그 은색 머리. 염색한 거겠지?

“마음대로 해. 한 명 쯤이야.”

“좋아. 그럼 연락한다?”

히비키가 통화를 시작했으므로, 나는 이번에야말로 궁금했던 바를 물어보기로 했다. 내가 ‘아까 물어보려고 했던 것 말인데…’로 운을 띄우자 히비키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나를 바라보았다.

“젠장. 내가 뭘 물어보려고 했더라.”

히비키랑 그 난리를 피우는 통에 머릿속에 있던 게 홀랑 날아가 버린 것이다. 내가 머리를 쥐어짜는 동안, 의외로 야요이가 내 구원자가 되어주었다.

“치하야 씨에 대해 물어보시려던 것 아니었나요?”

“오? 아. 그래, 그래. 그 키사라기 치하야 말이야. 그 애 아이돌 맞지? 히비키와 같이 나온 걸 보면 내가 생각하기엔… 너희랑 같은 소속사일 것 같은데.”

“네. 맞아요.”

나는 각각 다른 곳에서 우연히 만난 네 사람의 직업이 전부 아이돌인데다가 그들이 모두 옆집 사는 아이돌과 같은 아이돌 사무소에서 일할 확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 엄청나게 낮은 거 아냐, 이거?

거기다가, 지금 불현 듯 떠오른 그 녀석들까지 설마가 맞다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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