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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호랑 마코토] 여름 국화에 내린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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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30, 2012 23:45에 작성됨.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머리를 울리던 매미 소리는 기세가 한 풀 꺾여, 이제 한두 마리가 멀리서 맴맴 거리는 정도에 그쳤다. 며칠간의 폭염과 한두 번의 태풍이 지나간 깊고 푸른 하늘은 풍성한 구름을 안고 있었고, 뭐든지 잡아먹을 듯 타오르던 태양은 은근하게 땅을 덥히면서 여름이 아직 완전히 지나가지는 않았음을 보이고 있었다. 늦여름 시골은 그려놓은 듯이 아름다웠고, 너무나 평화로웠다. 권태감마저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제 아무리 일벌레라고 자부하는 프로듀서마저 이 곳에 있을 땐 라이브의 시끌벅적함도, 생방송의 긴장감도 전혀 들어보지 못한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낄 것이다. 그 분위기에 부응하기라도 하려는 듯, 누구보다도 다사다난했던 두 아이돌이 그늘진 마루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몇 시부터 두 사람이 여기에 있었는지, 마루에서 저 모양으로 자고 있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다만 어느새 매미마저 울음을 그쳐버린 바람에 두 사람의 모습은 사진처럼 멈춰있는 것 같았고, 간간히 들리는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오히려 그 고요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정지화면은 마코토가 깨어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마코토는 손목시계를, 그리고 조금 멀찍이에서 모로 누워 자고 있는 유키호를 천천히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풍경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았다. 여전히 잠에 취한 마코토는 한참을 또 그렇게 앉아있더니, 감긴 눈을 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무릎걸음으로 느릿느릿 유키호에게 다가갔다. 유키호는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유키호, 유키호, 일어나 봐. 벌써 3시라고? 슬슬 밖에 나가보지 않을래?"
   "응... 마코토... 좀 더 자고 싶어..."
   유키호의 중얼거림에 마코토는 무척 곤란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사실 두 사람이 일부러 이 벽촌까지 올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의 일탈은 어디까지나 마코토의 추진력 하나로 이루어 진 일이었다. 마코토는 저녁 생방송 라디오를 마친 유키호를 사무실에서 거의 납치하다시피 이끌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그리고 유키호는 영문도 모르는 채 창가에 앉아 마코토와 함께 시골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올라 속력을 내기 시작했을 땐 해가 저물어 깜깜해질 대로 깜깜해졌고, 시골행 버스인지라 창 밖의 풍경은 가로등도 적고, 불이 켜진 집도 드물어 상당히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겁 많은 유키호가 잔뜩 긴장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과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유키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사실 사무소에서 마코토와 마주쳤을 때부터 버스 정류장까지 올 때까지, 그리고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버스에 올라서도 유키호는 그저 피곤한 얼굴을 한 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유키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일정에 밀려 제대로 쉴 틈이 없었다. 일이 많이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분명히 스스로의 의지만으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대로 집에 돌아갈 틈도 없어서 잠도 이동하는 도중 차 안에서 자거나 사무소의 소파에서 선잠을 자는 게 고작이었던 모양이었다. 언제나 곧장 받던 마코토의 전화도 번번이 자동응답기로 연결되었고, 문자메시지도 몇 통이 쌓인 뒤에야 한두 번 겨우 답장이 올 정도였다. 거기에 마코토는 일정 도중 다리를 다쳐, 유키호와 함께하던 방송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바쁘다는 것은 껑충 뛴 인기의 증거이기도 했지만, 유키호에게는 무척 괴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무소에 아이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유키호가 아이돌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면서 울음을 터뜨렸다거나 촬영지를 이탈하면서 프로듀서가 무척 곤란해 했다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유키호와 누구보다 가까이 지냈던 마코토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사실 마코토 본인은 잘 모르고 있었을 것이지만, 마코토는 유키호가 자신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에 쓸쓸함을 느꼈다. 유키호가 그토록 좋아하는 차도 마시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는 생각에 굉장히 가슴이 아팠다. 따뜻하게 데워진 다기들을 어루만지면서 희미하게 웃음 짓던 유키호를 본 지 너무 오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찻잔에 차를 나눠주며 즐거워하던 유키호를 본 지 너무 오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키호가 우려 낸 차를 마시고 싶었다. 유키호를 보고 싶었다. 그래도 일 때문에 바쁜 것인지라 어쩔 수 없다는 마음에 한 번 쓰게 웃고 지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숨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한 번은 마코토가 사무실의 동료들에게 차를 끓여주게 된 적이 있었다. 적당히 준비해 차를 우려낼 땐 마코토도 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장이 차를 받아들고 '음, 하기와라군이 우린 것과는 맛이 좀 다르군 그래.'라고 말하자마자 마코토는 얼결에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흐느낌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숨을 제대로 가다듬을 새도 없이 마코토는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코토는 가능한 태연하게 유키호를 바꿔달라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거는 것에서 부터 마코토의 평정심이 무너져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길고 건조한 연결음이 끊기고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자 마코토의 입에선 마음에 담아 뒀던 한 마디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프...프로듀....서... 일... 유키호 일정... 언제 끝나요...?"
  갑작스런 마코토의 울먹임에 당황한 프로듀서는 묘한 심각성을 눈치 채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마코토는 전화기를 쥔 손의 떨림을 억누르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은 마코토를 달래보려 애썼지만, 그들도 곧 바쁜 일정에 하나 둘 사무실을 떠났다. 코토리도 볼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워, 마코토는 사무소에 홀로 남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소에서 마코토가 마신 차는 차게 식어 몹시도 썼다. 유키호가 달콤하다면서 좋아하던 수국차임에도 불구하고.
  자초지종을 들은 타카키 사장과 프로듀서는 생각보다 쉽게 마코토의 계획을 허락해주었다. 마코토는 앞 뒤 생각하지 않고 유키호가 일정을 마치고 쉴 수 있는 날을 찾아, 기뻐할 유키호를 생각하며 분주하게 계획을 세웠다. 한적한 시골로의 여행. 유키호의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마코토는 예정한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것 저것 따질 틈이 없다고 생각한 마코토는 유키호를 놀래킬 납치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왕자님에게 이끌려 도피하는 히로인'같은, 유키호가 좋이할 법한 이야기까지 떠올린 마코토는 자신만만했다.

   유키호는 잠이라도 든 양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코토는 조용히 앉아 있는 유키호의 옆모습을 보며 즐거웠다. 유키호와 호숫가에서 낚시를 하거나 느긋하게 앉아 이야기를 할 생각에 이 휴가에 대한 기대는 커져만 갔다. 허름한 정류장에 두 사람이 내렸을 땐 이미 어슴푸레한 새벽이 되어 있었다. 논이나 밭에 둘러싸인 흙길은 차 한 대 다니기도 애매할 정도로 좁았지만 고요한 정취를 느끼게 해줬다. 마코토는 목적지를 잘 선택했다고 생각하며, 흐르고 있던 묘한 침묵을 깼다. 
   "아, 미안! 제대로 얘기도 안 해줬구나. 유키호 요즘 엄청나게 바빴잖아? 이건 고생했던 유키호를 위한 내가 준비한 휴가야! 사장님이랑 프로듀서한테 이렇게 저렇게 얘기도 해 놨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놀다 돌아가면 되는거야! 헤헹~ 어때? 놀랐지?"
   마코토는 자신의 깜짝 선물에 유키호가 기뻐할 것을 기대하며 기세 좋게 말했다. 하지만 유키호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마코토의 말을 끊었다.
   "저기, 마코토... 나, 정말 오랜만에 쉴 수 있게 돼서 기뻐. 그리고 마코토가 생각해 준 것도 고마워. 그런데, 이번엔 그냥 혼자 있게 해주면 안 돼?"
   "응?"
   생각 밖의 반응에 마코토는 말문이 막혔다.
   "저기... 나, 지금 마코토랑 같이 있는게... 왠지 정말 불편해서...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이러면 조금 곤란하기도 하고..."
   "유키...호?"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거지? 마코토... 어디로 가면 되는거야?"
   유키호는 마코토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마치고는 돌아섰다. 새벽이었지만 여름답지 않게 싸늘한 공기 때문인지 마코토는 유키호의 말이 더 냉랭하게 느껴졌다. 울음을 참으며 맛 봤던 차가운 수국차의 쓴 맛이 입에 도는 것 같았다.

  "저기, 마코토... 나, 정말 오랜만에 쉴 수 있게 돼서 기뻐. 그리고 마코토가 생각해 준 것도 고마워. 그런데, 이번엔 그냥 혼자 있게 해주면 안 돼?"
   "응?"
   생각 밖의 반응에 마코토는 말문이 막혔다.
   "저기... 나, 지금 마코토랑 같이 있는게... 왠지 정말 불편해서...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이러면 조금 곤란하기도 하고..."
   "유키...호?"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거지? 마코토... 어디로 가면 되는거야?"
   유키호는 마코토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마치고는 돌아섰다. 새벽이었지만 여름답지 않게 싸늘한 공기 때문인지 마코토는 유키호의 말이 더 냉랭하게 느껴졌다. 울음을 참으며 맛 봤던 차가운 수국차의 쓴 맛이 입에 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대로 침묵. 마코토에겐 더없이 힘든 침묵이 흘렀다. 유키호의 냉정한 말에 마코토는 화 난 부모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하는 어린 아이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방적인 수다는 마음에 더욱 무거운 짐을 주기 마련이다. 말하면 말할수록 마코토는 당황스러워했을 것이고, 점점 마음에 품었던 기쁨에 금이 갔을 것이다. 목발을 짚은 마코토의 불편한 발만큼 생각의 걸음도 점점 무뎌져가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계속된 그 내용 없는 말소리 끝에 둘은 목적지인 작은 집에 도착했다. 한 눈에도 아주 오래전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전통가옥이었다.
    "휴, 겨우 다 왔네! 정말, 다리는 왜 다쳐가지고 이 고생인지!"
    "폐가...?"
    "응, 폐가긴 하지만 여행하는 사람들이 묵을 수 있게 마을사람들이 세심하게 손봐 놨다나봐! 봐봐, 벽도 새로 칠해져있고, 자세히 보면 꽤 운치있지 않아?"
    마코토의 말대로 이제 일부러 찾아보려 해도 찾기 힘든 오래된 집이었지만, 곳곳에서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외관과 내관도 잘 손봐져 있었다. 전기는 들어오진 않았지만 수도 시설도 마련되어있었고, 조리를 위해 불을 피울만한 재료마저도 준비되어 있었다. 작은 집이었지만 잘 관리된 덕에 기품마저 느껴지는듯 했다.
    "문고리의 이 장식, 굉장히 보기 드문 건데... 그리고 이렇게 작은 규모인데도 청기와..."
    전통에 익숙해서인지, 유키호는 집의 이곳저곳의 특징을 한 눈에 꿰뚫었다. 들고 있던 손가방을 마루에 내려놓고 신기한 눈초리로 이곳 저곳을 살피는 유키호는 차에서 막 내렸을 때의 차가움이 조금은 풀린 것 처럼 보였다. 
    "오, 유키호 역시 눈이 예리하구나! 이야, 여기 알아보는데 얼마나 애먹었는지말야, 하하! 어때 유키호, 조금 기분이 풀렸으려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키호의 태도가 변하진 않았다. 유키호는 여전히 마코토가 말을 걸면 묘하게 움츠러들었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리고 아침 해가 거의 다 떠오를 무렵까지 이 어색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서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상속에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이야기가 오가더라도 마음이 전해질 리 없는 벽이 느껴졌다. 그렇게 함깨 있는 채로 떨어져 시간이 흘렀고, 어느 틈에 잠들어버린 두 사람은 마코토가 깨어날 때까지 그렇게 멈춰있었다.

    유키호는 꿈을 꾸었다. 비가 쏟아지고 난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처마 아래쪽엔 작은 찻잔이 있었다. 유키호는 하염없이 빗방울과 찻잔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은 조금씩이었긴 했지만 쉼없이 찻잔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찻잔 안에는 빗방울이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다는 듯이 찻잔을 빗겨가는 물방울이 답답하고 야속했다. 그런데, 찻잔 안을 자세히 보니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파닥대고 있었다. 비늘의 물기는 모두 말라버린지 오래, 물고기는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불쌍할 정도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물고기에게는 저 빗겨가는 한 방울의 물이 얼마나 애타는 것일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물고기는 계속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거칠어지는 물고기의 숨이 끊기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유키호는 잠에서 깨어났다.       
     유키호가 겨우 눈을 떴을 땐 이미 서쪽 하늘이 붉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이미 반대쪽 하늘은 꽤 어둑어둑해졌다. 유키호는 어딘지 모르게 몽롱하고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자신이 처음 보는 곳에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마코토가 자신을 데려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유키호는 조금 마음이 불편하다는 듯이 살짝 눈을 감은 채 찌푸렸다. 한숨을 쉬며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고, 다짐하는 듯이 손을 꼭 모아쥐었다.
    "저기, 마코토...?"
    유키호는 마코토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코토가 보이지 않았다. 마루에 기대어 놓은 목발은 그대로 있었지만 부엌에도, 방에도, 창고에도 마코토가 보이지 않았다. 유키호도 처음엔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하지만 불안함이 조금씩 밀려왔다.
    "마코토? 어딨어? 놀래키지 말고 빨리 나와줘..."
    유키호의 부름에 대답하는 것은 발에 밟히는 흙소리와 풀벌레소리들 뿐이었다. 유키호는 초조했다. 마코토가 어딜 갔는지 알아 낼 길이 없었다. 잠시 어딘가에 가느라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다. 먹을 거리를 사러 나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 시작한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사실 마코토가 유키호를 데리고 온 이 곳은 인적도 드문데다 지금은 날까지 저물어가는, 어딘지 알 수도 없는 시골중의 시골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겁 많고 걱정 많은 유키호의 입이 바싹 말라왔다.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고, 하나하나가 모두 불길한 생각들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을거야. 마코토는 곧 돌아올거야.' 
   수 없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유키호의 불안함과 어떤 고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기다리자. 아무 일도 없을거야.'
   하지만 걱정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유키호의 자기최면은 오히려 불안함에 확신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마코토 정도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분명 어떻게든 될거야...'
   하지만 남겨진 목발이 게속 가슴을 찌른다. 유키호는 황급히 손가방을 열어 여러가지를 준비하여 작은 집을 등지고 무작정 마코토를 찾아 나섰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길이 단순해서 헤멜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논길이라는 것이 어디를 가도 비슷비슷해 보이는 법이라 유키호는 몇 번 교차점에서 방향을 틀고 난 후엔 방향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해는 더욱 저물어 까맣게 물든 동쪽 하늘에서는 별마저 보일 듯했다. 마코토의 안위는 커녕 스스로의 앞길도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될 것 같았다면 마코토가 깨웠을 때 자는 척 하지 말걸... 마코토가 같이 가자고 할 때 따라나서볼 걸...나는 정말...구제불능이야...'
   유키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걸음은 오래 이어지진 못했다. 멀리에서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뒤이어 또 다른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골 마을에서 기르는 개들이 일제히 길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순간의 유키호에게 그보다 큰 위협은 없었을 것이다. 유키호의 다리가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유키호는 아연하긴 했지만 그래도 개가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닌지라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아직 해도 완전히 저문 것은 아니었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유키호는 우선 기억을 더듬어,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생각보다 복잡한 길에 접어든 것은 아니라서 유키호는 어느정도 알맞은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사라진 마코토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푸른 기와 지붕이 보일 땐 약간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유키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유키호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이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다니 겁도 없는 아가씨로군! 아까 그 짧은 머리 여자애랑 같이 있던 아가씨구만 그래!"
    등 뒤에서 낮은 음색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키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마코토를 알고 있다는 듯한 그의 말에 유키호는 마음을 굳게 먹고 목소리를 향해 되물었다.
   "마, 마코토를 어떻게 한 거예요? 마코토를 돌려주세요...!"
   "호오, 상당히 기세 좋은 아가씨네? 그 마코토란 애가 어딨는지는 아가씨도 지금쯤이면 잘 알게 됐을텐데?"
   유키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키호의 어깨를 잡고 말을 건 것은 납치범이나 불량배가 아닌, 자신이 찾아 돌아다니던 마코토였다.
   "헤헹~ 유키호, 속았구나!"
   유키호를 씨익 웃으며 바라보는 마코토는 한 손에 두 자루의 낚시대를 들고 있었다. 
   "마코토...? 이게 어떻게 된거야?"
   "유키호, 너무한거 아냐? 아무리 마음이 불편해도 그렇지, 쌀쌀맞아도 너무 쌀쌀맞았다고! 정말이지 유키호는 종종 너무 생각이 깊어져서 곤란하단 말야~ 솔직히 나도 조금 상처받았다고! 그래서 유키호에게 또다시 깜짝 선물을 해 줄 겸 장난을 쳐 봤지. 이야, 그래도 이렇게 유키호가 겁 먹을 줄은 몰랐..."
   "마코토... 정말 바보...! 난 정말 걱정돼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봐... 흑...흐흑..."
    결국 유키호는 마코토를 부둥켜 안고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안도의 눈물이면서 억울함의 눈물인 동시에 미안함의 눈물이었다. 마코토 역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유키호를 달랬다.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이 놀랐나보네... 미안해, 유키호. 그래도 지금 이런데서 그렇게 마음 놓고 울다가는 몸살날지도 모른다고? 자자, 진정하고 같이 낚시나 하러 가자!"
   "...낚시?"
   마코토가 쥔 낚시대에 묶인 낚시줄이 저녁놀을 받아 반짝였다. 유키호는 그 빛나는 낚시줄과 웃어주는 마코토의 얼굴에 줄곧 느끼던 불편한 기분이 스르르 녹아 사라짐을 알 수 있었다. 호수로 향하는 걸음을 옮길 때도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은 적었다. 하지만 침묵과는 달랐다. 새벽의 싸늘함은 간데 없었다. 말과 말 사이에 들리지 않는 또다른 말이 오갔고, 적막했던 시골은 해가 저물었는데도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코토."
   "응?"
   "다 알고 있었던거야? 그게... 내가 이상했던 것들... 왜 그랬는지..."
   "음, 뭐라 해야하나... 처음엔 나도 굉장히 놀랐어. 그렇게 쌀쌀맞은 유키호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유키호는 그대로 유키호일 거라고 믿게되었달까, 말하고 보니까 정말 근거 없을지도 모르는 얘기네... 그냥 저, 뭐냐... '유키호는 나에게 있어서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이니까 어떻게든 괜찮겠지!' 하는 그런... 사실 나도 잘 모르겠네, 하하하!"
   "뭐야 그게! 난 사실 버스에서부터 계속 마코토를 볼 면목이 없어서 불안했단말야!"
   "에이, 뭐 그런걸 신경쓰고 그래! 바쁘면 얼굴 보는게 힘들지도 모르는건 당연한 일이잖아? 사실 나도 엄청 신경쓰이고 아쉽긴 했지만, 결국 같이 여행도 오게 됐으니 괜찮지 않아?"
   "그치만 나도 신경썼다면 연락이라도 종종 했을텐데..."
   "괜찮대도! 유키호, 우린 아이돌이니까 바쁜건 어쩔 수 없잖아! 서로 얼굴 보기 힘들어지는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 그래도 언제 어느 때라도 서로 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조금 마음이 놓이지 않을까? 나 뿐만 아니라 765의 모두들이 하나같이 유키호를 생각해주는 만큼 유키호도 우리들을 생각해주면 되는거지!"
   "헤헤, 그런가...? 마코토는 오늘 정말 멋있는 말을 하는구나."
   "으앗!? 놀리지 말아줘! 난 나름 부끄러운걸 참고 말했단말야!"
   웃고 떠들다 보면 어떤 길도 금방 갈 수 있기 마련이다. 둘은 어느 새 멀게만 느껴졌던 호수에 낚시대를 드리워 놓고 늦여름 밤하늘을 보게 되었다. 호수는 무척이나 평화로웠고, 왠지 모르게 따뜻한 감정이 느껴졌다. 한참을 검푸른 호수를 바라보던 유키호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듯이 손가방을 열었다.
    "짜잔~ 마코토를 위한 선물이랍니다!"
    유키호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작은 보온병이었다.
    "오오! 유키호, 그 안에 든 건 뭐야? 음... 역시 차려나?"
    "헤헤헤... 맞아! 그것도 아주 특별한 차!"
    유키호는 베시시 웃으며 보온병을 열어 뚜껑에 차를 가득 따라 마코토에게 건냈다. 찰랑대는 차에선 은은한 빛깔과 함께 더 없이 그윽한 향기가 피어났다.
     "사실 아까 마코토를 찾으러 뛰어 나올 때 챙겨나왔어. 급하게 나오느라 따로 물을 끓이진 못했지만... 이건 국화차야. 원래 국화는 가을에 핀 국화가 제일이라지만 왠지 마코토에게는 이 국화차가 좋을 것 같아서..."
     "어라? 그럼 이건 가을 국화가 아냐?"
     "응. 그게, 마코토 생일이 8월이잖아? 그래서 이 국화차는 8월에 핀 팔월국으로 만들었어. 원래 국화는 준비해 둬서 항상 가지고 다녔어. 생일선물로 주고 싶었는데, 너무 바빠져서 제때 못 주고 말았지 뭐야... 헤헤... 나도 정말로 마코토랑 같이 있고 싶었는데, 연락도 못 한데다 제대로 말도 못 전했고... 그리고...이번엔 마코토에게 심한 말까지 해서... 헤헤, 미안해 마코토..."
   메인 목에 말끝이 크게 흐려졌다. 떨리는 손으로 보온병을 애써 꼭 쥐어보지만 치밀어 오르는 눈물은 이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마코토는 어쩔 줄 몰라하는 유키호를 그대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키호의 가녀린 얼굴이 수 많은 감정에 젖어 있었다. 깨문 입술, 붉게 닳아오른 눈꺼풀과 코 끝,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려고 노력하지만 저도 모르게 다시 보온병으로, 땅으로 돌려버리는 그 시선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엔 마코토 자신이 언제나 동경해 온 '소녀다움'이 한껏 묻어나 있었다. 마코토는 평소라면 순수한 부러움을 조금이나마 느꼈을테지만, 지금은 그저 단짝과 함께, 그것도 서로 꾸밈없는 모습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아련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기어이 유키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보온병 안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유, 유키호! 유키호, 울지 마! 괜찮아, 난 정말로 괜찮으니까, 울음 그치고 눈물부터 닦자. 자, 여기 손수건."
   "응... 고마워. 그런데 마코토도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구나. 헤헤, 역시 마코토 왕자님도 평범한 여자애네."
   "정말, 유키호! 놀리지 말래도!"
   "헤헤, 알겠습니다 마코토 왕자님!"
유키호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마코토의 무릎 위에 풀썩 쓰러지듯 머리를 기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마코토의 바지에 조금 스며들었다.
   "밤공기가 참 좋다..."
   "헤헹~ 그렇지? 데려오길 잘 했단 말이야."
   "응, 고마워 마코토." 
   달아올랐던 한낮의 열기도 숨을 죽이고 있다. 여름이 잠든 호수는 짙푸른 빛에 젖은 채 적막에 잠겨있다. 무릎 위의 유키호가 내 쉬는 숨이 마코토의 셔츠에 스며들었고, 늦여름의 미지근한 바람이 서로의 목덜미에 흘렀다. 머금은 국화차는 차가웠지만 무척 달았다. 머지않아 마코토도 유키호도 다시 바빠지면서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갈 것이다. 국화 피는 가을이 올 것이고, 쌓인 눈 위를 걷는 겨울이 올 것이다. 하지만 날이 바뀌면서 얼굴을 보기 힘들어 질지라도, 함께한 이 여름은 언제까지고, 지금 이 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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