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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천 엔 포장마차 입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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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23, 2013 04:16에 작성됨.


하기와라 유키호.

나이는 올해 열 여섯, 밤색 단발 머리카락에 소극적이며 소심한 부끄럼 많은 소녀.

취미도 그 성격만큼이나 얌전해 시짓기라던가 다도에 소양이 있다.

그 소녀의 어느 평범한 휴일이었다.

본인의 성격을 고쳐야한다고 생각해 아이돌이 되겠다고 나섰지만 아직 그리 개선되지 않은 그 문제의 성격은 아이돌 활동에 지장이 있음이 분명했고 때문에 데뷔는 했지만 정식적인 활동은 거의 없다.

그 탓에 잠재력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이돌들에 비하면 방송활동보단 레슨에 치중된 생활을 보내던 중 모처럼의 쉬는날을 맞아 그동안 레슨에 지친 몸을 휴식하고 있던 중.

"네에엣?! 오, 오빠가요오?!"

마시던 차를 무심코 뿜어버릴 정도로 크게 놀라 소리치고만다.

그의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사실 하나.

"글쎄 그렇데도. 그녀석도 오늘 쉬는날이라고 하길래 모처럼 기회다 싶어 같이 저녁식사라도 할겸 불렀다."

"그, 그치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다른 누군가라면 이렇게 놀라지도 않았을것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라고 딱히 뭔가 큰일을 하러 오는것도 아니고 그냥 저녁식사를 함께 하러 온다는건데 굳이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냉정한 생각과 달리 가슴은 여전히 여운이 남아 빠르게 뛰고있다.

어릴적 희미한 추억속의 사람.

그때의 기억이 남은 탓인지 남성이라면 아버지를 제외하면 누구라도 질색할 정도로 심한 남성공포증을 앓고있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남성.

너무나 갑작스럽게 헤어졌다가 우연히 다시만난 그 남성을 떠올린 유키호는 역시 신경쓰이고 만다.

그 안절부절못하는 유키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에 짖궃은 미소가 어린다.

"너도 그녀석이 온다니까 표정관리가 안되는구만? 그렇게 좋냐?"

"조, 좋다뇨?! 그게 무슨?!"

"푸하핫! 예전과 달리 나도 꽤나 너그러워 졌고 이제 네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긴 하다만 역시 어떤 망할 놈팽이가 엉겨붙는건 생각만해도 열받는단 말이지. 하지만 뭐 녀석이라면……."

"무, 무슨 뜻이에요 아빠?!"

"글쎄다?"

대답을 회피하며 능글맞게 말을 돌린 유키호의 아버지는 '가만, 나이차가 좀 있는데? 뭐, 나이치곤 젊어보이고 생긴건 반반하니까 상관없나?'라는 말을 중얼거리다 다시 유키호가 지른 고함에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난다.

"그럼 난 일이 있어서 가보마. 너도 준비할게 많을텐데 수고해라."

"아아아~! 정말!"

끝까지 놀리던 아버지는 찻잔을 집어던질듯 들어올린 유키호를 보고 화들짝 놀라 도망친다.

그렇게 이제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아버지의 모습에 유키호는 더이상 붉어질것도 없이 발개진 얼굴로 비어있는 찬에 다시 차를 따른다.

한모금 마시며 고양된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방금전 대화의 주제였던 그 사람을 다시 생각한다.

어렸을적엔 분명 상당히 따랐었다.

당시 한창 세력다툼으로 좋지 않았던 집안사정 때문에 폐쇄된 환경속에서 지내던 중 유일하게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고 또 위로가 되었던 대상이었으니까.

때문에 그때의 그 이미지가 남아 지금도 분명 좋은 인상인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그렇지 아빠도 참……."

그런 투정 비슷한 말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짖궃은 장난에 마냥 화만난건 아닌것을 알아차리고, 누가 보는것도 아닌데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정말이지 이래서야 이따 만나게될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칠 수가 없어진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남기고 간 말을 떠올린다.

준비할게 많다라.

가만히 생각해본다.

"우, 우선 화장을……."

소녀의 마음은 감출 수 없는듯 하다.



하기와라 씨는 오래된 인연 중 한명이다.

과거 아직 혈기왕성하던 시절 조직간의 항쟁에 끼어들어 도움을 줬던 적이 있는게 그걸 계기로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뭐, 혈기왕성이니 항쟁이니 하는 과격한 단어와는 달리 내가 직접적으로 싸운다거나 한건 아니고 머리를 쓰는쪽으로 도왔던거니까.

싸움 그리 좋아하지 않고 말이지. 굳이 전쟁에 비유하자만 책사 내지 군사 일까?

여튼 이것저것 수를 좀 쓴 덕분에 상대 조직은 연이은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받게 되었고 결국 하기와라 씨 쪽이 완전히 점거하는 것으로 항쟁은 끝나게 되었다.

야쿠자라는게 좋은 이미지도 아니고 실제로도 악질적인 녀석들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하기와라 씨는 정말 보기드문 영화에나 나올법한 집단의 우두머리였고 실제로 그 전이나 항쟁에서 승리한 다음이나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최근에 만나 듣게 된 바로는 그 이후엔 늘어나는 식구들 탓에 불법 쪽에 손대지 않는 야쿠자일 만으로는 한계를 느낀건지 번듯한 사업을 시작해 나름 잘먹고 잘사는 중 인것 같다.

아무튼 지금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건 하기와라 씨를 비롯해 그 쪽 사람들의 대다수가 날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때 그시절 함게 하지 못했던 비교적 신입의 경우에는 그 경우가 덜하지만 그때 부터 하기와라 씨와 함께였던 사람들은 특히나 더하다.

그래서 곤란하다.

"……아니 무슨 국빈이라도 모셔가나."

집 앞에 펼쳐진 검은 양복을 입은 어깨들의 향연.

그 끝엔 새까만 세단이 광택을 번들거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세단까지의 길을 그리듯 양 쪽에 선 어깨들의 모습에 어이없어 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중 발언권을 가진 인물로 보이는 깔끔한 인상의 사내가 다가와 말한다.

"가시죠. 저희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모시는건 좋은데 이건 대체 뭡니까."

"음? 듣지 못하셨습니까?"

"하기와라 씨의 집에 초대받은거라면 알고 있습니다만."

"네, 말씀대로. 형님께서 극진히 모셔오라고 말씀하셨기에 단촐하지만 격식을 차려보았습니다. 부디 이쪽으로."

단촐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어울리지 않은 상황이 있을까 싶다.

거기다 신경쓰이는건 근처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시선.

비록 이 범상치 않은 광경이 내는 기세에 눌려 밖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그 시선만큼은 아프도록 박혀든다.

소문타는건 한순간인데 내일 쯤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춰질지 걱정이 태산같다.

"그보다 말씀좀 편하게 하시는게. 저 상당히 불편한데요."

"제가 어찌 감히. 하기와라에 연을 두고 있는 그 어떤 이라도 형님을 제외한다면 가장 존경과 대우 해드려야 할 분이십니다. 이는 제가 아닌 모두, 그리고 형님의 의견이기도 하니 용서해 주시길."

"하하…."

그래 될대로 되라.

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 검은 기둥들이 이어진 길을 따라 납치되듯 차에 탑승한다.

일단 도착하면 우리 심도있는 대화를 좀 나눠봅시다 하기와라 씨.

그러던 말던 어디서 나타났는지 마찬가지로 새까만 차량에, 대기하던 어깨들이 탑승해 앞 뒤로 호위하는것으로 차는 출발했다.

진심으로 몰래카메라가 아닌지 고민해버렸다.



속도가 줄어는데도 그것을 거의 느끼지 못할만큼 부드러운 솜씨로 멈춰선 차량 너머로 커다란 전통식 문이 보인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나 나올법한 고풍스럽고 위엄넘치는 자택의 외관에 감탄하는사이 앞서 조수석에서 내린 예의 그 깔끔한 인상의 사내가 내가 앉은 쪽의 문을 열어준다.

"도착했습니다."

이제와 딴소리 해봐야 달라지는건 없으므로 그냥 그려려니하고 열린 문 밖으로 발을 딛는데 차 밖에서 보는 모습은 더욱 대단하다는걸 느낀다.

하기와라 씨 잘사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줄이야.

아는 사람중에 돈많은 사람들은 많았지만 하기와라 씨도 상당한 수준의 재력가라는걸 깨닫게 되자 새삼 다시보게 된다.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았던 사내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한다.

"형님께서 되도록 빨리 뵙고싶으신 모양입니다. 안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 깍듯한 태도에 거북함을 느끼면서도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안으로 안내하는 그의 뒤를 따라간다.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봤을 때 보다 더 훌륭한 자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넓은 정원에 연못도 있고 저 끝엔 멋지게 가지를 드리운 노송나무를 비롯한 아름다운 조경물들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발은 앞으로 걸으면서도 눈은 바쁘게 그 경치들을 구경하기에 바쁜데 저 멀리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길이 앞으로 돌아간다.

"어이~ 왔냐!"

"왔습니다. 그보다 말입니다."

옳다구나 싶어 성큼성큼 앞에선 사내를 앞질러 하기와라 씨 한테 다가간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내 불만스런 표정을 보인건지 하기와라 씨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뭐냐 그 똥 씹은 듯한 상판은."

"말좀 이쁘게하면 어디 덧납니까?"

"내가 너한테 이쁘게 말하면 네가 날 이쁘게 봐주냐? 기대할 걸 기대해."

"그건 아니지만서도. 아니, 그전에 뭡니까 대체 아까 그건?"

"아까 그거 뭐."

"집 앞에 잔뜩 모셔온답시고 몰려온 그 사람들 말입니다. 누구 인간관계 동네에서 말소시킬 일 있습니까?"

"그정도는 되야 기가 좀 살지 않냐? 명색이 이몸이 직접 초대하는건데."

"그러니까 댁의 기준을 나한테 끼워맞추지 말란말입니다!!"

오랜만에 열받게 하는구만 저인간이!

하지만 넉살좋은 하기와라 씨는 껄껄 웃으며 제 할말만을 이어간다.

"여기서 떠드는것도 좋지만 그래도 재밌는건 이따 저녁식사에 하기로 하고 우선 좀 기다려라.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하며 앞장서 접견실로 보이는 장소에 들어간다.

집안 내부도 훌륭하게 꾸며져 있다.

전통적인 분위기가 한껏 느껴지는 그 고풍스러운 방 한가운데 먼저 앉은 하기와라 씨를 따라 나도 앉는다.

그리고 뒤에 선 사람에게 무언가 말을 전한 하기와라 씨는 갑자기 날 보더니 씨익 웃는다.

……뭐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눈빛으로 물어보지만 대답이 없는 하기와라 씨.

딱히 물어보고 싶지는 않아 나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멍하니 바깥 경치를 보며 시간을 죽이던 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 왔군."

단순히 차를 가져온 사람을 맞이하는 태도치곤 반가움이 묻어나는 하기와라 씨의 말에 나도 눈을 밖에서 부터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돌린다.

"어라? 유키호."

"아, 안녕하세요오…."

차를 담은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유키호였다.

유키호는 가볍게 인사하곤 천천히 걸어와 탁자에 차를 놓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곤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유키호가 따라주는 차를 받는데 이상함을 느낀다.

먼저 차를 받았던 하기와라 씨가 차를 한모금 마시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어디 가십니까?"

"어."

"저기, 제 질문의 의도는 긍정이나 부정을 듣고싶은게 아닌데요."

"그냥 간다. 그렇게 됬으니 느긋하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저기요? 하기와라 씨?"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몇번이고 되묻지만 벌떡 일어난 하기와라 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접견실 밖으로 나간다.

그러다 문을 닫기 전 유키호 쪽을 보더니 한 쪽 눈을 찡긋.

쾅!

마치 안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는것마냥 부숴질듯 문을 닫아버린다.

뭐지 저사람.

제멋대로인건 알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겪어서 그런가 적응이 안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유키호에게 보낸 윙크는 뭔가 싶어서 유키호를 돌아보자 뭣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전례에 미루어 봤을 때 저럴땐 건드리지 않는게 상책이라고 판단 묻지 않기로 한다.

또 땅판다고 삽을 들어버리는건 사양이다.

하기와라 씨의 의도야 어쨌건 결국 이 넓은 접견실에는 나와 유키호만 남아 차를 마시게 되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아직 저녁까지 꽤나 시간이 남았는데 마냥 이러고 있기는 뭐하다 싶다.

대화를 시도해본다.

"요즘은 잘 지내?"

"네, 네?!"

내가 말을 걸자 유키호가 눈에 띄게 놀라 흠칫거린다.

그 모습에 별말않고 그저 기다리고 있으니 조심스럽게 유키호가 입을 연다.

"잘 지내요오…. 아직 방송일은 별로 없지만 레슨이라면 열심히 하니까요"

"그렇네. 아직 유키호는 TV에서 본일이 없었어."

"몇번 출연했던 적은 있지만 그리 유명한 프로그램도 아니고 그렇게 재밌지도 않으니까요 저…."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꺼낸 이야기가 오히려 유키호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어버렸다.

"아직 처음이니까 그렇지. 앞으로 괜찮아질거야."

"그치만 저 땅딸보에다 소심하고 아이돌인 주제에 남성공포증도 있고…."

"그걸 고치려고 아이돌을 시작한거라며? 그렇다면 이제 시작한 이 시점에선 아직 고쳐지지 않은게 당연하지. 유키호가 열심히 한다면 점점 나아질테니까 걱정마. 그리고 땅딸보라니?"

말을 잠시 멈추고 두 손을 찻잔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인 유키호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그정도면 작은건 아니잖아? 게다가 예전에 비하면 엄청 성장했다구. 너도 그랬지만 나도 처음 봤을때 못알아봤을 정도니까."

몇 년의 시간은 꼬마를 소녀로 바꾸기에 충분하다.

한창 성장하는 아이는 하루가 지나면 못알아볼정도라고 말들은 하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실감이 된다.

잠깐 어릴적 유키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분명 처음만났을 무렵엔 아직 어린아이 였으니까 조그만했지.

그땐 귀여웠는데.

"그렇다고 지금 귀엽지 않다는건 아니야. 지금도 충분히 귀여워. 정말 잘 자라줘서 다행이야."

"하우우…."

부끄러움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유키호의 머리를 몇번 쓰다듬다 예전 생각이 떠올라 흐뭇하게 미소짓는다.

"그래그래 그때도 그랬어. 한참 내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다 졸려서 하품할때 쓰다듬어주면 부끄러워선 얼굴을 숨겼지."

"이야기인가요오…."

"기억안나? 유키호는 거의 밖에서 놀지 못했었으니까 내가 예전에 돌아다니며 겪었던 이야기 해주면 재밌어했었는데."

"아. 기억나요."

유키호가 옛날 기억을 떠올린 건지 눈을 반짝 빛내며 말한다.

어릴적 유키호가 지냈던 환경은 아이가 지내기에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나쁘다고 말해야 하겠지.

한창 조직간의 항쟁중에 조직원의 가족, 그것도 우두머리의 딸이라는 위치는 행동을 조심히 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한 자리였고 때문에 유키호는 학교생활을 제외하면 밖으로 쉽사리 나가지도 못할만큼 쓸쓸한 나날을 보냈었다.

그나마 학교에서도 섣불리 친구를 사귈수도 없었고 설령 친구가 있다 하더라도 같이 논다거나 하는건 꿈도 꿀 수 없었으니 자연히 외로워지기마련.

그 사정에 안쓰러워진 난 하기와라 씨를 돕기 전 세상을 돌아다니며 나에게 있었던 일들이나 재밌는 일화들을 이야기 해주었고 그때마다 유키호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었다.

"그립네. 옛날이라는건. 나도 그땐 훨씬 젊었었던거 같은데."

"아직도 늙진않았어요오…."

"하기야 이제 서른먹은 놈이 나이타령하는건 뭣하지. 그래도 역시 유키호처럼 파릇파릇한 소녀 앞에선 늙다리지만."

어디보자 유키호가 열 여섯살이던가? 어이구 띠동갑도 넘어서 열 넷이나 햇수가 차이난다.

새삼 오빠라고 듣기도 민망한 나이차를 떠올려보곤 쓰게 웃다 찻 잔이 빈 것을 깨닫는다.

"한잔 더 받아도 될까? 역시 유키호가 달여준 차는 엄청 맛있네."

"그, 그렇지 않아요오…."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쭉 이어진 발그레한 얼굴로 유키호는 찻주전자를 들어올린다.

그 나긋나긋한 손짓과 청초하게 은은히 빛나는 가녀린 유키호의 얼굴을 보며 생각한다.

유키호가 활동하는거나 레슨받는걸 본 적이 없어서 어떤진 모르겠지만, 아이돌을 단어 그대로 해석한 '만인에게 사랑받는 우상'이라는 뜻에 비한다면 그에 부족함이 없을만큼 고운 자태다.

하지만 그 발걸음을 가로막는건 아까 말한것처럼 특유의 소극적인 성격과 남성공포증 때문이겠지.

고친다고해도 그리 쉬운일만은 아닐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않고 열심히 노력하는건 역시 본인 스스로 변하고자하는 강한 의지가 있는거겠지.

그렇지 않다면.

"역시 좋아하는걸까."

아이돌일을 말이지.

무심코 생각하던것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별 뜻없었던 혼잣말에 불과한 말이지만 듣게된 유키호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네, 넷?!"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인다.

다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차를 따르기 위해 찻 주전자를 기울이던 중이었고 그 상태에서 몸을 튕기듯 움직이니 자연히 찻주잔자 안에 있던 내용물이 밖으로 쏟아져버린다.

그 낙하위치는 차를 받기 위해 내밀었던 내 팔.

촥, 하는 찻물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뜨거움이 덮쳐온다.

"앗 뜨거!"

"꺄아악?! 괘, 괜찮으세요오!?"

나는 나대로, 유키호는 유키호대로 놀라서 소리친다.

일단 빨리 찻물에 젖은 옷을 걷지않으면 화상에 입을지도 모르니 서둘러 소매를 걷어올리고 입김으로 달궈진 팔뚝을 식히며 상태를 확인한다.

바로 가져온 차도 아니었고 어느정도 식었던거라 크게 다치진 않은것 같다.

별 상처 없는것 같아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유키호가 눈가를 촉촉히 적시곤 울먹거리는것에 헛바람을 삼킨다.

"죄송해요오…. 역시 전 안될아이인가봐요. 사고나치고…우우우…."

금방이라도 터질것 같은 그 모습에 난 과장된 몸짓으로 괜찮다는걸 어필하며 서둘러 달랜다.

"괜찮아 괜찮아. 봐, 화상도 전혀 입지 않았고 그냥 찻물만 좀 닦아내면 돼.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내가 보란듯이 팔을 내밀자 그제야 내 팔을 보곤 멀쩡하다는걸 확인한 유키호는 눈가를 훔치곤 손수건을 꺼내든다.

"제가 닦아드릴게요오…."

유키호가 내 팔을 잡아 들곤 천천히 팔에 묻은 찻물을 닦아나간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과 미안함이 가득 담긴 유키호의 진지한 태도에 민망해져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괜한 헛기침을 하는데 갑자기 유키호가 낸 작은 탄성을 낸다.

"왜 그래?"

"이 흉터…."

유키호의 눈이 멈춘 자리엔 길게 늘어진 오래된 자상의 흔적이 있었다.

그리 큰 흉터는 아니지만 겉보기에도 가벼운 상처로는 보이지 않는 그 자국에 예전에 누가 물어왔을 때 그랬던것 처럼 대충 얼버무리려다 한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아아. 그때 그 상처야."

이미 유키호는 이 상처의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을.

"흉터…남아버렸네요."

"어쩔수 없지. 뭐, 남자에게 흉터는 훈장이나 마찬가지야. 신경쓰지마."

"그치만…."

유키호는 쉽사리 그 흉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도 그럴것이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유키호를 보호하다 생긴 상처였으니 본인입장에서 신경쓰일만도 하다.

그래도 역시 좀 그렇네.

"저기, 이제 그만해도 된다니까?"

"그치만 역시 미안해요오…."

"아니 그거말고 내 팔 닦는거. 이미 찻물은 없는데."

내 말에 유키호는 아까부터 쭉 내 팔을 잡고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는걸 깨닫는다.

작은 비명과 함께 내 팔을 놓은 유키호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파묻는다.

그 귀여운 모습에 다시 미소를 짓는다.

"상냥하네 유키호는."

"하우…."

"그 상냥함이라면 분명 언젠가 사람들도 알아줄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해 아이돌. 응원할게."

소심하고 남성을 무서워한다지만 심성은 누구보다 착한아이다.

스스로가 진심으로 변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 밝고 솔직하게 바뀌게 된다면 아이돌로서도 충분히 멋진 모습을 보여줄거라 확신한다.

그 말에 또 부끄러워선 유키호가 이제 슬슬 땅 밑까지 가라앉지 않을까 싶어졌을 때, 접견실의 문이 열리고 고용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온다.

"저녁준비가 끝났습니다. 장소로 모시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됬나.

유키호와 이야기 하는 사이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몸이 찌뿌듯해진것을 느낀다.

"가자 유키호."

"네에…."

뒤따라오는 유키호를 확인하고 앞서가는 고용인을 따라간다.

식사시간에도 하기와라 씨와 함께라면 상당히 요란스러울것 같은데.

하긴 그런것도 한번씩은 나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들었다.

응. 결론만 말하자면 되도않는 소리였지.

하기와라 씨 술에 잔뜩 취해선 옛날이야기를 시작하질 않나 그걸 듣던 예전에 함께한 아저씨들은 날 부여잡고 눈물을 쏟질 않나.

재난이 따로없었다.

나도 엄청 마셔버려선 머리가 깨질것 같아.

내일 장사 어쩌지.



─────그날 밤.

유키호는 오래된 일을 꿈에서 다시 떠올린다.

자신은 나쁜 사람들에 잡혀 어딘가에 갇혀있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길 갑자기 나타난 많은 사람들.

근처에서 지키고 있던 아빠의 동료들이 뛰어나와 싸우기 시작했지만 수가 부족한 탓에 미처 상대하지 못한 몇 명이 강제로 자신을 들어선 차에 태웠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이 어두컴컴한 퀘퀘한 냄새가 나는 창고.

무섭고 또 간절했다.

제발 누군가 구하러와주길.

이곳에서 해방시켜 주길.

유키호가 마음속으로 수도없이 말하며 눈물 흘리고 있을 때, 바람이 닿은것인지 창고를 꽉 매우고 있던 어둠을 가르고 빛이 들어온다.

"뭐야! 누구야 너!"

"어? 저녀석 그 놈아냐? 요즘 하기와라 쪽에 붙어서 우릴 괴롭히던 그 애송이말이야."

"맞아! 전에 본 적있어. 하, 설마하니 또 머리를 쓴거라 이건가? 일부러 딸내미를 납치되게 해놓고 잔뜩 몰려온거야?"

빛에 눈이 적응되자 한 청년이 보인다.

익숙한 얼굴.

그 청년을 보며 유키호를 납치해온 사람들이 하나씩 말을 쏘아내지만 별 감흥없는 시큰둥한 얼굴로 청년은 말한다.

"겨우 당신네들 잡아보겠다고 그런 값비싼 연출을 할 필요가 있겠나요. 솔직히 저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줄은 몰라서 좀 당황했어요. 그리고 잔뜩은 무슨. 난데없이 유키호가 납치됬다고 납치범들의 차를 설명해주는데 마침 그차랑 똑 같은게 여기로 들어오더라구요. 혹시나 싶어 왔는데 역시나네요."

"하? 배짱도 좋군. 그 말은 혼자왔다는거아냐?"

"네."

긴장하던 납치범들은 혼자라는 말에 비웃음을 흘린다.

이 안에 있는 청년을 제외한 남성의 수는 여섯 명.

그 여섯이 전부 청년의 적이니 당연히 그 들의 입장에선 혼자들어온 저 청년이 가소로울수 밖에 없다.

그러던말던 청년은 여전히 느긋한 얼굴이다.

"일단 묻겠는데요 대화로 해결해볼 생각은 없나요? 싸움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미 늦었어. 애초에 살려고 빌거였으면 여길 들어오지 말았어야지."

납치범중 리더격으로 보이는 남성의 말에 청년은 한숨쉰다.

"역시 그렇습니까. 그럼 어쩔수 없네요."

그리곤 가장 앞에 선 남자에게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머리쪽을 가리킨다.

"제가 보는 기준으로 우측 관자놀이. 막아요."

그 뜬금없는 말에 대상이된 남성은 어리둥절하다 이내 놀림받았다고 생각했는지 화를 내며 달려든다.

찰나의 순간.

청년에게 달려들던 남성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주먹밥 칼밥으로 먹고사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싸움에 익숙해질 수 밖에없다.

그 익숙함이 주는 경고에 생각하기에 앞서 몸이 반응해 서둘러 팔을 올린다.

"잘했어요."

그런 말이 들렸다고 느낄 때 쯤.

머리를 막은 팔에 묵직한 타격이 느껴지고 그 사실을 머리로 이해하기전에 앞서 충격이 온 몸을 관통한다.

세상이 빙글 돌았다고 생각하는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긴다.

맞는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의 눈으로 봤을 땐 건장한 남성이 청년이 때린 하이킥에 가드째 날아가 기절한 광경.

모두가 그 어이없는 상황에 아연해하고 있을 때 청년은 말한다.

"싫어한다고 했지 못한다고 하진 않았어요. 여섯명이면 많긴하지만 방금 이걸로 다섯명이고 당신들에게 싸움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잖아요? 한때이긴 하지만 이래뵈도 상당히 진지하게 배웠던적이 있어서요. 프로도 아닌 그저 시정잡배 몇명에게 나가떨어질만큼 연약하진 않습니다."

확실히 야쿠자에게 싸움이라는건 이권획득이라던가 세력확장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지 전문격투가처럼 목적자체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그래도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을 한낱 시정잡배 취급한 청년에게 납치범들은 분노를 참지못한다.

기세는 좋다.

하지만 단련의 정도가 다르다.

수만 믿고 달려들던 순서 그대로 급소에 한방씩 얻어맞고 나가떨어진다.

그렇게 둘이 또 전투불능이 되고나서야 보다 신중하게 덤벼보지만 제대로된 타격한번 주지못하고 동료가 먼저 누운 바닥에 엎어진다.

마지막 남은 한 명이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등을 보이고 도망친다.

그 의도를 깨달은 청년은 아차 싶어 따라 뛰지만 이미 출발점이 확연히 차이나는 탓에 먼저 닿은것은 남치범 쪽이다.

"오지마! 더 오면 이 꼬맹이가 성치 못할거야!"

칼을 빼든 납치범의 손이 우악스럽게 유키호를 틀어쥔다.

공포에 질려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그 모습에 청년은 곤란한듯 머리를 긁는다.

"마지막에 와서 귀찮게 하네요. 안될거 알면 그냥 곱게 나오는게 서로 좋은데 말이죠."

"웃기지마! 자꾸 까불면 확 그어버린다!"

"관두시죠? 곤란하단 말입니다 그러면 죽잖아요."

죽으라고 긋는거고 그걸로 협박하는 중인데 무슨 개소리냐 싶어 말하려던 사내가 이어진 청년의 말에 침묵한다.

마치 날씨가 좋다라는 식의 무성의하게 청년은 말했다.

"당신이."

무섭게 노려보는것도 차갑게 식은것도 아닌 그 평범한 눈으로 던진 말에 사내는 얼이 빠진다.

그 순간에 청년은 뛰어든다.

얼마 되지 않은 둘 사이의 거리가 급격하게 좁혀지고 놀란 사내는 반사적으로 칼을 유키호에게 휘두른다.

푹! 살에 날붙이가 박히는 섬짓한 소리가 창고에 울린다.

사내는 자신의 칼이 박힌 장소를 확인한다.

칼이 꽂힌곳은 어린아이의 목덜미가 아닌 청년의 팔뚝.

그리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들어 팔뚝의 주인을 본다.

"아프네요. 사람이 받았으면 그만큼 돌려주는게 예의겠죠?"

 하며 처음으로 청년은 웃는다.

그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수려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사내는 정신을 놓는다.

청년은 납치범들은 전부 처리하고나서야 한숨 돌리고 팔에 박힌 칼을 빼낸다.

잠깐 상태를 체크해보니 다행히 뼈나 힘줄을 건들진 않았다.

그래도 상처가 제법 큰지라 피가 꾸역꾸역 밀려나오는탓에 소매를 뜯어 묶는것으로 지혈한다.

"어디 다친곳은 없어?"

"오, 오빠아…."

그간 공포에 눌려 겉으로 나오지 못했던 울음을 참지못하고 터트리는 유키호가 청년에게 안겨든다.

"흐에에엥~."

"울지마. 이제 괜찮으니까."

어두운 창고안에서 한참이나 이어지던 유키호의 울음은 다독이는 청년의 품에서 조금씩 수그러든다.

이제 어느정도 진정이 된건지 유키호가 퉁퉁 부은 눈으로 청년을 올려다본다.

"그런데 팔은 괜찮아요…?"

"응? 문제없어. 찌른녀석이 제대로 힘을 안줘서 깊히 박힌것도 아냐. 그보다 못볼꼴 보여서 미안하다. 자, 집에가자."

피가 배어나오는 팔을 뒤로 감추며 반대쪽 손을 내민다.

그와중에도 청년은 자신에게 흉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위해 배려한다.

그 따뜻함이 담긴 손을 맞잡으며.

꿈에서 깨어난다.

흐릿한 눈을 뜨자 침대 위의 천장이 보인다.

아직 잠에 취해 몽롱한 기운에 잠겨 방금 전의 꿈을 생각한다.

사무소의 동료이자 친구인 마코토가 가끔 말하는 단어가 떠오른다.

'왕자님…….'

어릴적 기억속의 그 청년은 분명 동화에나 나올법한 왕자님의 모습이었다.


"상냥하네 유키호는. 그 상냥함이라면 분명 언젠가 사람들도 알아줄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해 아이돌. 응원할게. "


어제 청년과 나눴던 대화의 한 소절이 문득 떠오른다.

침대 위에서 유키호는 작게 다짐해본다.

"열심히…할게요오…."

소녀의 마음은 조금씩 솔직해져간다.



그냥 일기.

하기와라 씨의 초대받았다. 오랜만에 유키호와 이야기한것 좋았지만 그후는 지옥이었어. 식사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술판을 벌이더니 난데없이 하기와라 씨가 일장연설을 하질 않나 자리에 있던 수십에 달하는 하기와라 씨네 식구들이 갑자기 은혜를 갚을길이 없다면서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절을 하질 않나. 밖에서 그러면 그냥 이사가버리든지 해야지. 그러고보니 동네사람들은 어쩌지.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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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호의 화 입니다. 아마 지금까지 쓴 글 중에 가장 길지 않을까 싶네요. 지금 시간이 4시다보니 아무리 올빼미인 저라도 졸립니다. 고로 자러갑니다. 굿나잇.

ps. 귀찮아서 안쓰고 있지만 점주의 이름은 생각만 해놓고 여태까지 나오지 않아버렸네요. 어쩌면 완결때까지 한번도 안나올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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