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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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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1, 2015 19:06에 작성됨.

신데렐라 걸즈의, 하야미 카나데와 사기사와 후미카의 글입니다.

 책을 읽는다. 도서실의 책장에서, 하드 커버가 씌워진 책을 골라내어, 때때로 오래되고 손을 많이 타 닳은 종이가 넘어가지 않을 때면 손끝에 침을 묻혀가며 다음 페이지를 향한다. 문장, 단어, 글자 하나 하나를 읽어가는 눈길은 때때로 너무 느려서 단지 잡념에 잠겨있을 뿐인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눈동자 앞으로 흘러내린 앞머리에 개의치 않고 몇 문단인가 읽고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가는듯한 착각에 빠진다. 실제로 지난 2년간 그녀는 오후 수업시간에 지각하는 일이 잦아서 동급생들이 찾으러 오는 경우가 꽤 있었지만 이제는 그들도 굳이 찾아오지 않는다. 정이 떨어진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기꺼이 그 자리를 맡았기 때문이다.

 귓등을 넘어 옆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후미카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신비한'…그런 눈동자가 미소지었다. 하야미 카나데는 그녀보다 두 살 어렸다.

 "수업…시작했어요?"
 "아니, 끝났어요."
 "에."
 당황한 푸른 눈을 두고 그녀가 읽던 책을 카나데가 전부 정리할 쯤에야 후미카는 카나데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창문 너머 운동장에서 야구부가 부활을 시작하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후미카가 다시 맞은 편에 앉은 카나데에게 당혹스러운 듯 물었다.
 "그렇지만…수업 시작할 때 알려달라고…했는걸요…."
 "음…뭐. 예뻤으니까."
 "…예쁘다니…?"
 당신이. 다시금 미소짓는 카나데를 마주보지 못하고 후미카는 얼굴을 떨궜다. 붉어진 뺨을 머리카락 사이에 감췄다.
.
 본의 아니게 오후 수업을 전부 불참한 후미카였지만 다음날이 되서도 딱히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후미카는 워낙에 모범생으로 유명해서 교사들에게 신뢰받는 학생이었고, 카나데는 다소 자기 흥미에 충실한 면이 있지만 흔히들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별 탈 없이 지나갈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수업을 건너뛸 수 있었을 것이다. 카나데는 자신감이 있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이라면 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이 언뜻 보이고는 했다.
 그렇다면 후미카 자신이 카나데에게 반하는 것도 확신하고 있었을까. 
 답은 모른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으로 도시락을 대충 먹고 나서, 언제나처럼 도서실에 가기 전에 교실으로 찾아올 카나데를 기다린다. 카나데는 대체로 후미카가 식사를 마칠 때를 잘 맞춰서 그녀의 교실로 올라오는 경우가 많았다. 정말로 우연의 일치구나. 카나데는 강운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어쩐지 후미카의 동급생들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몇분인가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나서도 여전히 그녀가 보이지 않자 후미카는 의문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나데의 교실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
 그러고보니, 후미카는 생각했다. 카나데가 오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도서실에 갔으면 되는 일 아닐까. 실제로 올해 초에는 그렇게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카나데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더해서 그녀의 교실을 찾아가고 있다. 사람을 대하는게 서툴러 책을 읽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을 가엾이 여기면서도, 먼저 다가갈 기회가 올 때는 망설임에 멈춰서고 말았던 때도 있었건만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었을까. 간혹 읽어왔었던 로맨스의 주인공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어렴풋이 생각하다가 후미카는 순간 자리에 멈춰섰다. 그렇다면 남주인공은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새삼스럽게도 자신이 가진 사랑이 세간에서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카나데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스럽다, 아름답다는 말을 하는 편이고 그런 편에 있어서 딱히 편견이 없는 듯이 보였지만…그녀에게는 그녀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도 꽤 많다. 간혹 대화 중에 그런 얘기를 섞어가며 눈을 마주치고, 또 실망한 듯이 보였던 것은 어쩌면 후미카를 향한 일종의 경고는 아닐까. 자신이 떠날 수도 있다는 어필이라면. 식은 땀이 뒷목을 미끄러져 내려서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어쨌든 아직 시간이 있었고 카나데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과연 그녀가 괜한 오해를 일으키지 않고 제대로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후미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카나데의 반을 찾아가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멈춰세웠다. 흠칫 놀라 돌아보면 서있던 사람은 후미카가 모르는…아니, 도서관에서 몇 번인가 스쳐지나갔던 남학생이었다. 그와는 한 두 번 정도밖에 대화한 적이 없었기에 후미카는 의문과 함께 희미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
 나무 끄는 소리와 함께 미닫이 문이 열렸다. 숨쉬는 듯 자연스럽게 3학년 교실에 들어온 1학년 하야미 카나데는 기대했던 사람이 보이지 않자 순간 교실을 헷갈렸나 멈칫했다. 자연스레 뒷걸음질쳐서 반을 확인하려는 그녀를 후미카의 친구가 불러세웠다. 카나데가 입학하기 전까지는 도서실에 박혀있는 후미카를 데리러 오던 사람이다. 당연히 카나데와는 안면을 튼 사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일어나 카나데에게 걸어왔다. 먼저 말한 사람은 카나데였다.
 "안녕하세요. …사기사와 선배는?"
 "'사기사와 선배'라니 내숭은."
 "후미카씨는 어디 갔어요?"
 너 찾으러 간다고 했는데? 돌아온 대답에 카나데가 눈썹을 찡그렸다. 도서실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찾아와준다니 기쁘기야 하지만…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후미카 아무리 멍한 면이 있다고 해도 학교에서 길을 잃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
 잠깐 생각에 잠긴 후 카나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미카를 찾아볼 요량이었다.
 "찾아보려고? 도와줄까?"
 "괜찮아요. 도서실에 있겠죠."
 그러나 그녀는 무언가 찝찝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도서실에서도 카나데는 익숙한 뒷모습을, 혹은 어둡게 내려앉은 앞머리 사이의 푸른 눈동자를 찾을 수 없었다. 쉬는 시간이나 방과후에 그녀가 간혹 후미카를 반쯤 끌고 나와서 앉아있었던 교내의 벤치에서도, 항상 멍하니, 혹은 약간 지친 모습으로 앉아있었던 체육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막연한 어두움이 점차 형태를 갖추고 옥죄어오려는 것을 카나데는 내심 담담한 척 털어냈다. 교내에서 잠깐 찾지 못한다 해서 무슨 일 있을까. 수업이 시작할 쯤이면 알아서 돌아올 것이고 그 후에 다시 만나러 가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막연하게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교사를 전부 도는 한이 있더라도 후미카를 찾아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어쩐지 보모나 그 비슷한 것이 되었다고 농담처럼 생각하며 그녀는 단추를 하나 끌렀다.
.
 기어코, 카나데는 후미카를 찾아냈다. 교사 뒷편의 다소 좁은 샛길─그렇게 부르는 것인지는 제쳐두고─의, 벽을 등지고 피어난 이름모를 풀과 꽃들을 곁에 두고 그녀는 서있었다.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잠시 미뤄두고 그녀에게 다가가려다가, 낯선 인영이 눈에 들어온 카나데가 흠칫 제자리에 멈춰섰다. 상대, 본 적 없는 남학생도 이쪽을 바라보고 이어서 후미카가 등을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맑은 파랑에 어린 떨림을 순간 눈에 담은 카나데가 재차 다가가자 소년이 다소 다급한 듯이 후미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그러면 고백의 답 기다리겠습니다. 내일…내일 여기서."
 "됐어."
 예?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는 남학생을 향해서 눈길을 주지도 않은 채 카나데는 후미카의 팔목을 잡았다. 다시금 눈이 마주치고, 손으로 전해지는 가냘픈 손목과 딱딱하게 닿는 뼈의 형태, 그 밑으로 전해지는 체온과 두근거림을 마음에 담고서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털어놓았다.
 "이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 하야미씨."
 "그러니까 당신 고백은 아무 쓸모도 없어요. 그럼 이만."
 멍하니 서있는 관중을 두고 카나데는 움켜쥔 손목을 끌어당겼다. 이틀이나 연속으로 오후 수업을 빠지면 그녀나 후미카나 잔소리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로, 아무래도 좋았다.
 낮의 햇살을 맞으며, 공원 한켠의 의자에 앉아있는 후미카에게 캔을 쥐어줄 때가 되서야 카나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짓을 했는지 비교적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게 됐다. 솟구치는 자괴감이나 부끄러움을 밀어넣고 태연한 척 옆에 나란히 앉아 탭을 따고 한모금 마실 때 쯤 후미카가 예고없이 입을 열었다.
 "…가방…두고 왔어요."
 "…아니…음. 그건, 응…그러네요."
 "저에겐…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풋…콜록."
 부끄러웠던 부분을 콕 집어 꺼내오는 말에 마시던 음료수를 반쯤 뱉은 카나데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 본인은 감정 표현에 솔직한 편이었지만 평소 말이 적은 후미카가 그렇게 말하니 꽤 타격이 있다. 일부러 잔기침을 몇 번 뱉고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앉아 고개를 돌리니 코가 맞닿을 것 같았다.
 "사실이잖아요? …혹시, 아닌가요?"
 "맞아요. 단지…당신이 말하니까 느낌이 다르네요."
 "네…?"
 "후미카씨는 애초에 말도 적고 사랑한다던가 감정표현은 별로, 아니 거의 안하잖아요. 나도 듣고 싶었어요. 언제까지나…언제까지나 주기만 하는건 싫어. 욕심 많아요, 나는."
 후미카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죄책감에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은 카나데에게 어떤 것도 해주지 않았다. 흔한 감정표현 하나마저도 단지 부끄러웠기에, 그녀가 들려줄 때마다 책에 얼굴을 묻고 머리카락을 흘러내려 감추기만 했다. 후미카는 지금이 그녀들 사이의 오해를 풀어야할 순간이라고 느끼고…다음 순간 멈칫했다. 오해를 풀었다고 해서 그녀 자신이 카나데의 곁에 계속 있을 수 있을까. 아까도 생각했듯, 카나데에게는 언젠가 다른 사랑이 다가오는건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미카는 먼저 손을 뻗어 카나데의 손등을 감싸쥐었다. 끌어안듯 상냥하게, 하얗고 다소 창백한 손은 보기와 다르게 따뜻함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할 말을 골랐다. 마음속의 책장을 여는 듯한 느낌.
 정적이 흘렀다.
 "저는…저…카나데씨에게는…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카나데씨를 사랑…사랑하는 사람은 많고, 전, 당신의…당신이 주인공인, 소설의…단역이 아닐까, 그래서."
 "후미카씨, 후미카."
 카나데는 손을 뺐다. 손등에 온기가 남았다. 조금 혼란스러운 듯한 후미카를 마주보며 오른손을 뻗어 앞머리를 걷고 볼을 쓸었다. 바로 눈앞에서, 코를 맞대고, 누군가 본다면 입을 맞춘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가까이하면서도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서로가 서로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카나데는 속삭였다.
 "이건 책이 아니야. 나와 후미카씨는…알잖아요."
 "…그건…."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고 해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저도…저도, 그래요."
 "그럼 됐죠."
 그리고 짧게 입맞췄다. 입술만 맞닿는 키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저질렀지만 후회는 없었다. 드물게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 굳은 후미카의 푸른 눈동자와 새까맣게 떨어지는 머리칼, 햇빛을 받지 않은 피부, 옅은 입술을…방금 맞닿았던 입술을 바라보고 그녀는 잠시 숨을 죽였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랑하니까."
 "네…저도."
 좋아해요. 부끄러움이 남아 말을 다소 더듬었지만 후미카에게서 처음 들을 수 있었던 고백이었다. 카나데는 눈을 감아 잠시 목소리를 되새긴 후에, 눈을 뜨고, 다시 짧게 입맞추고…조용히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게 다음 목표네요. 뭘까…목표가 생겨서 재밌어."
 "…그건…조금 부끄러워서…."
 "내가 참을성을 좀 길러야겠네요."
 그녀에게 맞춰서 후미카도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다음날이 되서, 둘은 조금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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