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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그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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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0, 2015 22:16에 작성됨.


 소녀는 남자와 함께 걷고 있었다. 무표정한 소녀의 얼굴은 차갑게 느껴졌지만 나는 사실 그 안에 누구보다도 앞으로의 일들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남자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소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녀를 뒷받침했다. 언제나 소녀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소녀에게는 그 목소리가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눈을 감아도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눈을 떴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몇 시 정도인 거지. 나는 머리맡에 있을 핸드폰을 찾으려고 침대 위를 더듬댔다. 곧이어 손에 툭하는 감각이 있더니 핸드폰이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순간 짜증이 났지만 혼자서 짜증을 부려봐야 기분이 나빠지는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들어서 켰다. 핸드폰의 액정에는 03 : 0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따로 전화나 문자가 온 건 아니었다. 그냥 꿈때문에 깼을 뿐인가.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시곗바늘이 째깍대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으면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허무한 기대를 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건 어둠에 적응이 된건지 희미하게 보이는 천장의 형광등 뿐이었다.

 

 문득 눈물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곧잘 흘린 눈물만큼 더 강해지고 넘어온 시련만큼 단단해진다고들 말하지만 전혀 모르겠다. 그저 가슴이 너무 아파서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고 싶었다.

 

 "프로듀서…"

 

 불러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 번만 그를 만나고 싶었다.

 

-

 

 "오늘도 여기서입니까?"

 "네."

 

 나는 집 앞까지 데려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일부러 집 근처의 공원 앞에서 내렸다. 프로듀서의가 직접 집까지 데려다 주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한 두 번도 아닌데 매번 같은 질문을 하고 같은 대답을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시길."

 "수고하셨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검은색 자동차는 조용히 사라졌다. 혼자 남은 나는 뒤를 돌아서 공원의 입구로 향했다. 항상 이용하던 자판기로 가서 100엔짜리 동전을 두 개 넣고서 120엔짜리 커피를 하나 뽑았다. 삑 하는 소리에 이어서 덜컹 하고 커피가 나오는 소리가 났다. 짤그랑 하고 거스름돈 80엔이 나오는 소리가 났다. 언제나와 같았다. 변할 리가 없다.

 

 나는 정처없이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원이어서 생각 없이 걷다보면 금방 반대쪽 입구가 나타난다. 공원을 걷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만히 앉아있지 못해서 안절부절 돌아다니는 어린아이와 같다. 여유를 즐기려는 것도 아니고 남는 시간에 걷기 운동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헤매고 있을 뿐이다.

 

 이런 행동들이 습관이 된건 그가 있었을 때부터다. 그는 일이 끝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아쉬워서였을까, 더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였을까. 우리는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집 앞의 공원을 걸었다. 방과 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려고 일부러 하교길을 돌아가는 먼 길로 선택하는 것처럼 우리는 공원을 걸었다. 공원 입구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하나씩 뽑아들고서 걸었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밤의 공원은 사람이 오가는 일도 없어서 조용했고 차분한 분위기나 어슴푸레 느껴지는 밤의 향기가 매력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결국 지금은 혼자다. 항상 둘이서 공원을 걷던 것을 관성때문에 그만두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어딘가에 남아있는 그에 대한 기억들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같이 앉아서 이야기했던 벤치, 가을 밤에 아무도 모르게 피어있던 코스모스를 찾았던 일, 휴일에 같이 하나코와 산책을 했던 일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발버둥쳤지만 어느새 희미해져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기억의 파편들이 그저 차가운 바람에 떠밀려 날아다녔다. 

 

 그때와 다른 게 한 가지 있다면 지금은 화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엔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기 전에 화장을 지웠지만 지금은 집에 돌아가서 지우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이돌 시부야 린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에게만큼은 시부야 린이라는 한 사람으로써 보여지고 싶었다. 이게 내 진짜 모습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걸 알아채줬으면 했다. 그도 내가 집에 돌아가기 전에 화장을 지우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한번도 내색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정처없이 공원을 떠돌다 집에 들어오니 이미 불이 다 꺼져있었다. 이제는 익숙했다. 더 일찍 올 수 있는데도 늦게 온 거지만 가족들은 내가 아이돌 활동을 하기 때문에 늦게 들어온다고 알고 있기떄문에 다들 먼저 잠들곤 했다.

 

 "다녀왔습니다."

 

 아직은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현관에 내 목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내가 들어온 걸 감지하고 은은한 주황색의 현관등이 켜졌고 나는 조용히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가지런히 넣어두었다. 나는 불이 모두 꺼진 거실을 뒤로하고 곧장 내 방으로 올라갔다. 방 안도 어두웠지만 별로 불을 켜고싶지 않았다. 커튼을 젖히니 달이 밝은 밤이라 그런지 적당히 물건들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는 밝아졌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다지 힘든 일도 없었는데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옷을 다 갈아입고서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나, 땀 많이 흘렸는데. 씻지도 않고 누워버리면 냄새가 배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좀처럼 다시 일어날 힘이 나지 않았다. 다시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들어오기에 방은 더 어두웠다. 전부 그 어둠으로 가려버리고 사라지게 만들 것 같은 장막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계속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로듀서, 나..."

 

 그 목소리에 대답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프로듀서랑 약속했던 것 처럼 여기까지 왔어. 정상의 자리에도 올랐어.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어."

 

 하지만 나는 혼자였다. 같이 손을 잡고 걷던 사람은 곁에 없었다.

 

 "보고있지? 그 날 함께 약속했던 것, 제대로 지키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났다. 

 

 "분명 프로듀서라면 '아이돌이 그런 우는 얼굴을 하면 어떻게 해.'라면서 날 꾸짖었겠지...?"

 

 그래서 억지로 웃었다. 미소를 지었다. 볼이 아플 정도로 웃었다. 톱 아이돌, 신데렐라 걸인 시부야 린은 웃지 않으면 안되니까. 눈물이 입으로 흘러들어가 짠 맛이 나는 것도 무시한 채로 웃었다.

 

 "...보고싶어, 프로듀서."

 

-

 

 오늘은 사인회 미후에 미니 라이브를 하는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었다. 대기실에서 준비를 하고 있자니 프로듀서가 의상을 들고 왔다. 

 

 "오늘 입을 이상은 이겁니다."

 "...이거인가요?"

 

 의상은 하얀색 계통의 프릴 드레스였는데 하늘색으로 군데군데 강조가 되어있었고 포인트로 조그마한 하얀 날개가 달려 있었다.

 

 "...제 캐릭터랑은 조금 어긋난거 아닌가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 분이나 코디 분들도 괜찮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다지 싫은 건 아니었지만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란코의 생각이 나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내가 의상을 받아들자 프로듀서는 인사를 하고 대기실을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날개인가..."

 

 의상으로 갈아입고 앞쪽에 있는 거울에 몸을 틀어서 뒤쪽을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예쁜 하얀 날개였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나에게 날개는 어울리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래 예전이라면 내 등에도 커다란 날개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순백의 날개라고 해도 그저 의상에 붙어있는 모조품일 뿐이었다.

 

 "시간 됐습니다. 나갈 준비를 해 주세요."

 "...네."

 

 시간에 맞춰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내가 나타나자 팬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나는 무대 가운데에 자리한 책상 앞에 앉았다. 인사와 감사의 말을 하고서 사인회가 시작되었다. 사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인회가 시작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팬들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CD를 가져온 사람들, 포스터나 브로마이드를 가져온 사람들, 심지어 특공복을 가져온 사람들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져오는 물건에 내 얼굴이 나와있었고 그 수많은 것들에 나는 내 이름을 적었다. 때때로 악수를 하고 잡담도 했지만 별로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거의 기계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던 중에 눈 앞에 특이한 물건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다만 눈 앞에 평범한 색지와 캔커피 하나가 놓여졌다. 다들 더 엄청난 물건을 가지고 오려고들 하는데 CD도 아닌 평범한 색지를 가져온 건 누군가 하고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았다.

 

 "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있었다면 분명 주저앉았을텐데 앉아있던 나는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는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다른 무언가를 숨기려 억지로 웃는 것 같았다. 나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랐다. 그래서 손을 잡았다. 손만이 이어진 채로 아무 말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옆에서 시간이 다 되었다며 관계자가 말했다. 그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씁쓸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

 

 라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잠시 휴식시간이 있었다. 나는 대기실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 예전에 아린 듯한 고통이 아니라 너무나도 날뛰어서 짓눌려버릴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이어진 사인회는 정말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씁쓸한 웃음으로 돌아서던 프로듀서의 얼굴만이 남아있었다.

 

 만났다. 만나러 와 주었다.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 아무 말도 못한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어떻게 지냈는지, 건강한지, 다른 수많은 것들도 물어보고 싶었던 게 많았는데. 정작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두 사람이면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채 돌아섰다.

 

 어느새 다시 시간이 되어서 라이브의 시간이었다. 나는 불안한 걸음걸이로 대기실을 나와 무대에 올랐다. 노래를 할 수 있을지도 잘 몰랐지만 그저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싶어서 무대에 올랐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함성들을 무시하고 객석을 눈으로 뒤졌다. 어딘가에 있을 그의 얼굴을 찾았다. 

 

 그리고 가장 뒤쪽 구석에서 찾아냈다. 벽에 기대선 채로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웃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노래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가서 그에게 안기고싶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가능한 건 여기서 노래하는 것 뿐. 그와 약속한 이 길을 혼자서라도 계속 걸어나가는 것 뿐이다.

 

 마이크를 들어 입에 가져갔다.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노래에 마음을 담자. 내가 말하는 가사와는 전혀 다르지만 당신이라면 그 안에 담긴 내 이야기를 알아차리고 들어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지금도, 당신을 좋아해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무슨 일이 생겨서 우리 둘을 갈라놓아도 당신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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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토P - 47 (Vocal. 리부) - https://www.youtube.com/watch?v=tjkTJ6FC1cA

 

한데마스에 접속하니 오늘이 칠석이라고 치히로 씨가 반겨주더군요.

문득 얼마 전에 들어가 본 일데마스 계정이 생각났습니다. 서비스가 시작하고 바로 시작하고서는 1년쯤 하다가 그만둬버렸죠. 얼마 전에 잠깐 들어가서 프론트에 있는 린을 보니 미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작년에도 '네가 모르는 이야기'와 '아마츠키츠네'로 칠석스러운 글을 썼었는데 이번에도 써봤습니다. 팅하고 오는 소재였거든요.

미키토P의 '사리시노하라', '47', '붉은 실'은 예전부터 카에데 씨로 쓰려던 소재였지만.. 이번에 써버렸습니다. 원본이 아이돌에 관련된 내용이기도 하면서 소재가 굉장히 뭐하다보니 쓰기가 좀 그랬는데 이참에 애매하게 슥삭슥삭.

일데마스의 저처럼 함께 정상을 향해 달려나가기로 했지만 포기한 경우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지금도 빛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그래도 만날 수 없는 견우와 직녀라는 느낌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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