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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 「넘어지지 않으면 그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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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04, 2015 23:37에 작성됨.

하루카 「넘어지는 게 무서워졌어요」 와 이어집니다

 

"......"

 

저는 바닥에 그어진 검은 선을 넘었습니다. 이걸로 몇 번인지 모르겠지만, 꽤 많은 숫자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에헤헷, 처음에는 앞에 서 있는 것조차 덜덜 떨렸었는데 말이죠.

 

"이 기세라면 라이브 때도 걱정 없을 거라고 생각해."

 

조금 뒤에 서서 제 연습을 지켜봐주고 있던 치하야쨩이 이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지만은."

 

처음으로 둘이서 이 연습을 했을 때를 떠올려봅니다. 테이프 앞에 서 있는 저. 그걸 조용히 지켜보는 치하야쨩. 저는 언제나 그랬듯 그저 멍하니 있거나, 조금 움직여보지만 선을 넘지 못하고, 심지어 넘어질 뻔하기도 했었죠. 치하야쨩은 말 없이 제 추태를 바라보고만 있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무작정 제 팔을 붙잡고 선 너머로 쭈욱 끌고 갔었습니다.

 

에휴, 그 때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저는 아이처럼 무작정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결국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넘게 된 선. 절대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넘으면 아주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는데. 얼떨떨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계기로 해서 더 이상 선을 넘는 것 자체가 그리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게 되었고, 날이 지날 수록 이렇게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틈이 날 때마다 둘이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스케쥴이 맞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요.

 

"아직 무서워?"

 

치하야쨩이 제 표정을 살피며 물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곧 있으면 리허설 시작이네. 그 때 좀 더 연습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선을 넘는 것, 그러니까 무대에 나가는 것 자체가 두렵다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아예 두려움 자체가 사라졌다......? 저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발전에 기뻐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습니다. 목에 무언가가 걸린 것 같았습니다. 속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또 넘어져버리지 않을까 두려운거야?

 

치하야쨩이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날카로운 칼이 답답한 부분을 푹,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 속에 아픔이 쭉 밀려오기도 했지만, 그만큼 뭔가 속 시원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응...."

 

"그렇구나."

 

제 입에서 나온 모기만한 목소리를 주의깊게 들은 치하야쨩이,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곧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넘어지지 않으면 그만 아닐까."

 

"에에엣.....?"

 

그 말을 들은 순간 조금 어이없어서 그만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어요. 하지만 치하야쨩의 말은 실없는 농담도 아니었고 무작정 내뱉은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야. 넘어지지만 않으면 사람들이 널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 아니니."

 

"아하핫, 그거야 그렇긴 해도."

 

확실히, 치하야쨩의 말대로 제가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무대로 걸어가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공연을 한다면 무사히 해결되는 문제일 겁니다. 다만 그 넘어지지 않는다, 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넘어지지 않을까? 나, 연습을 계속해도 솔직히 자신이 없어."

 

"하루카는 좀 더 자신을 믿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런가- 하지만 요즘에 진짜 자신이 없어져서....아, 미안 미안! 쓸데없이 어두운 이야기를 해버려서."

 

저는 뒤늦게 이야기를 수습하며, 치하야쨩의 눈치를 슬쩍슬쩍 살폈습니다. 그냥 아무 말 않고 넘어가주었으면 좋을텐데. 그렇지만 치하야쨩, 제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모양입니다. 눈매가 예리해졌습니다.

 

"하루카."

 

아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저를 부릅니다. 저는 일단 응,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치하야쨩은 막상 불러놓고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이 쪽을 쭈욱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한테 어떤 것이 있는 지 낱낱이 살피는 듯한, 제 마음 속에 담긴 게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하는 그런 눈빛입니다. 평소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열기가 느껴져서, 그만 저는 눈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치하야쨩, 제 시선을 쫒아오고 있습니다. 다른 쪽으로 돌려봐도 똑같습니다. 이건 일부러네요. 시선만의 술래잡기가 한동안 계속되다가, 멈췄습니다. 치하야쨩이 포기한 듯 더 이상 이쪽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 시선에 시달리지 않아서 마음이 놓이긴 하지만, 동시에 살짝 외로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복잡한 감정이네요.

 

"나는 모르겠어."

 

치하야쨩이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습니다.

 

"네가 보았다는 그 시선들이 얼마나 차갑고, 매서웠는지 알 수 없어."

 

사람은 자기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지요. 당연합니다. 지금까지 치하야쨩이 아무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처럼 심각한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잘 모르는 것도 당연합니다. 친한 친구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인걸요. 조금 쓸쓸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루카, 다시 한 번 생각해주지 않겠니."

 

".....어떤 걸?"

 

"그게 진짜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말이야."

 

치하야쨩의 말에, 저는 두 눈을 감고 생각해봅니다. 제 이름을 수없이 부르는 소리, 공연장에 가득 찬 함성들. 그들의 환호에 답하기 위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무대로 달려갑니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움직였기 때문일까요,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집니다. 그리고 그 순간 뚝 끊기는 환성. 옆을 바라보자 보이는 싸늘한 시선. 프로듀서의 부축을 받아 무대 뒤쪽으로 이동하면서도, 그 시선은 끈질기게 제 뒤를 따라붙는 것 같았습니다.

 

"....."

 

저는 그 눈빛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 이라고 직접 입 바깥으로 내놓는 순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준엄한 사실이 되어버릴 것 같아, 뻐끔거리기만 할 뿐. 이런 제 모습을 살피는 치하야의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저기 있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네가 그렇게 넘어진 뒤 다시 공연을 재개했을 때도, 사람들은 같은 눈빛으로 너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치하야쨩은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그 말에 저는 뒷 부분을 마저 떠올려보기로 했습니다. 그 시선이 마음 속에 걸려, 침울한 마음으로 다시 나아간 무대. 그 때 당시에는 실수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어 제대로 반응을 살피지 못했습니다만,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어.....?"

 

조금은,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시선들과는 말이죠. 그렇지만,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요- 그 때 정확히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기억 안 나? 라이브가 끝난 뒤의 뒤풀이 때, 하루카의 경우 실수가 좀 뼈아팠지만 그래도 잘 수습해서 다행이라고, 프로듀서가 말했었는데."

 

"아.....미, 미안해."

 

저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 때의 실수만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기억 나는 게 그다지 없는 모양입니다. 으음......저, 그 날 어떻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던 걸까요. 아, 사소한 생각은 제쳐두기로 합시다.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그건 그렇고 하루카, 지금은 어떠니?"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냉혹한 시선과, 그렇게까지 무섭지만은 않았다는 의외의 사실이 교차합니다. 어느 쪽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른 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결국 아래로 시선을 둔 체, 힘겹게 입을 열었습니다.

 

"......잘, 모르겠어."

 

"그러니."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저 텅 빈 레슨실에 서 있을 뿐. 저는 이 고요함이 좀 거북하게 느껴졌기에 뭐라도 말을 꺼내기로 했습니다. 뭐가 좋을까요.....아, 그래. 저를 위해 힘써준 치하야쨩에게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저, 저기 치하야쨩!"

 

"응?"

 

"그, 고마웠어. 네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 분명 아직도 무서워하고만 있었을 거야."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치하야쨩이 작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저 기쁜 것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직 만족스럽지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건, 저도 같았습니다. 아주 꽉 막혔던 속은 전보다 풀렸지만, 그래도 답답한 느낌은 여전합니다. 치하야쨩은 말했습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그만, 이라고. 하지만 저는 의문이 듭니다.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걸까.

 

치하야쨩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실수를 잘 수습했다고. 그렇지만 그것도, 그걸로 괜찮은 걸까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늦었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자."

 

벽면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고는 제게 연습의 종료를 알리는 치하야쨩. 내일도 라이브 대비 연습이 있을테니 지나치게 오래 있으면 안되겠지요.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응. 그러자."

 

우리는 바닥에 붙여진 테이프를 떼서 휴지통에 버리고, 레슨실 구석에 두었던 가방을 챙겼습니다. 그러고는 켜졌던 불을 전부 끈 뒤 레슨실을 나섰습니다. 아, 마지막으로 문 단속도 잊지 않았습니다. 저와 치하야쨩이 같이 연습을 하면서부터 했던 일들. 원래라면 서로 대화가 오고가는 가운데 진행되는 것들이지만, 오늘은 아주 어색한 침묵 속에 있었습니다.

 

"잘 가. 내일 보자."

 

"응. 치하야쨩도 잘 가."

 

어슴푸레한 복도, 삐걱거리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마침내 길가에 도착한 우리는 작별 인사를 하고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습니다. 분명 가로등이 있고, 건물들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온통 새까맣게만 느껴지는 밤거리를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당연하지만, 그 곳엔 제가 찾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벌써 가버렸네."

 

그러나 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참이나 길가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서 있어봤자 오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야할 것 같았습니다.

 

띠리링-

 

앗, 핸드폰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주머니에서 꺼내 확인해보니 메일, 그것도 치하야쨩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조심해서 가렴.'

 

짧은 내용이었지만, 받았다는 것 자체로도 조금 기운이 났습니다. 저는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라이브가 코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우리 둘은 연습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다른 동료들과 리허설을 하면서, 틈틈히 무대 입장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 동안 저는 단 한번도 넘어지지 앟았습니다. 아, 일상에서 넘어지는 건 그,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요. 하여튼, 지금까지는 순조로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걱정했던 것과는 정반대로요. 지금만 같다면 저번의 실수를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 그렇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요. 답답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원래 이 쯤 되면 불안감이 드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 품고 있는 것은 좀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제가 그 날부터 쭈욱 품고 있었던, 치하야쨩의 조언을 듣고도 완전히 없애버릴 수 없었던 것, 이에요. 어떻게 해야 이 정체 모를 답답함이, 불안함이 사라질 수 있는 걸까요. 이런 상태로 라이브에 참여해도, 공연을 해도 괜찮은 걸까요........?

 

저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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