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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Re;ad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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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04, 2015 16:19에 작성됨.

갑자기 몸이 떨려왔다. 날짜는 나도 모르게 벌써 유월에 이르렀건만 밤에는 아직도 싸늘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아마도 무기질적인 회색 부스 탓일 것이다. 녹음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방은 무심코 바라볼 때마다 무표정한 반응을 돌려줬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 몇 개, 그리고 마이크 같은 것들만 가득한 정사각형의 방. 문은 이미 닫혀있었고 바람이 들어올 창문은 있지도 않았지만 어디선가 바깥의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10분 전입니다. 스탠바이 해주세요."

부스 밖에서 작가인 아야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음을 위해 바깥의 소리는 완전히 차단시키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목소리는 안으로 연결된 기계를 통해 흘러나왔다.

부스 안은 다른 세계였다. 특별한 장치를 통하지 않으면 목소리조차 닿지 않는 곳이었다. 녹음은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의 의식을 집중하고 장소와 환경마저 그 한 가지만을 위해 제한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문을 여는 단순한 행동 하나만으로 사라져버리지만 그 격리된 세상은 나만을 위한 세상이었다. 이 방 안의 모든 것의 주인은 나였고 모든 책임도 나에게 있었다.

"후미카 씨, 괜찮아요?"

내가 아무런 답이 없자 아야 씨가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그렇지, 집중하지 않으면. 10분 남았다고 했으니까.

"벼, 별 일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딱히 죄송하다는 사죄의 표현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말하자면 습관과 같았다. 조금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한다. 아직도 나는 사람의 눈을 잘 바라보지 못한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힘내서 가야죠."

고개를 다시 들어 유리 바깥에 서 있는 아야 씨의 모습을 보니 주먹을 꼬옥 쥐고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아야 씨는 의욕이 넘치는 여자 반장 같은 느낌이었다. 체구가 작고 안경을 쓰고 있는 자그마한 얼굴에는 주근깨가 살짝 남아있었다. 외모와 어울리게 성격도 활발한 것이 소동물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어서 웃음도 많았다. 가끔씩 아야 씨에게 내가 이리저리 휘둘리는 일이 생겨도 그 화사한 웃음을 보고 있으면 나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신비한 힘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렇네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평소의 마음가짐으로 침착하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아야 씨는 내 말을 듣더니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절레절레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커다란 동작이었다. 그녀의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가 이리저리 휘날렸다.

"또 그런 소리를! 사람은 마음 먹기에 따라서! 도리를 무리로 깨부수고! 최고의 하루를 만드는 거에요!"

아야 씨의 활발함은 평소보다 더해서 오늘은 명량을 넘어서 열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차! 5분 전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5분 후에 시작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더 이상 잡담할 여유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준비된 대본을 다시 한 번 읽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대본이라고 해도 드라마나 연극처럼 꽉 짜여진 건 아니었다. 말하자면 플롯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늘의 대략적인 진행 방향, 소재들, 그리고 사연들이 적혀 있었다. 때때로는 사연조차 써져 있지 않을 때도 있었다. 라디오 방송이라는 건 그랬다. 어디까지나 임기응변이 주를 이룬다. 그 탓에 처음 라디오를 시작할 때에는 매 순간이 위기의 연속이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숙련도가 쌓여서 크게 당황하는 일은 없었지만 예전에는 당황한 나머지 폭주해서 방송 진행이 중단될 뻔한 적도 있었다.

"게스트가 있네요? 누구인가요?"

대본을 읽어 나가다 보니 '깜짝 특별 스페셜 게스트!'라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보통 게스트가 있으면 사전에 알려주는 편이었는데 깜짝 특별 스페셜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아놓은 걸 보면 쉽게 알려주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비밀이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게스트가 나오면 상황이 크게 변한다. 혼자서 하는 방송이라면 어떻게든 자신의 페이스대로 나아갈 수 있지만 게스트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게다가 정체도 알 수 없는 깜짝 게스트라면 대응이 어려워진다. 나도 모르게 머리에 손을 짚어버렸다.

"...일단 알겠습니다."

대략적인 진행은 이해했기에 대본을 내려놓았다. 사실 이해할만한 내용도 그다지 없었다. 특별한 구성으로 진행되는 오늘은 간단하게 미니 코너들의 제목만 적혀있을 뿐 자세한 내용이라고는 거의 쓰여 있지 않았다. 코너의 이름들도 평소에 해왔던 것과 제법 달라져 있어서 짐작하기 힘들었다.

시계를 올려다보니 9시 5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분 전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다잡고 심호흡을 했다. 지금까지 나는 잘 해왔다. 오늘도 다를 것 없이 하면 된다. 긴장할 것 없이, 언제나와 같이 편안하게...

"10초 전입니다! 9... 8..."

아야 씨의 목소리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마지막으로 목을 풀었다. 시계바늘이 10시를 가리키기 직전이었다. 자, 그럼... 셋... 둘... 하나...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아야 씨의 무음의 큐 사인과 함께 나는 입을 열었다.

"<사기사와 후미카의 처음 뵙겠습니다.>"

오프닝 콜을 하자 조그맣게 노래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오프닝 배경음악이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걸 확인하고 대본에 쓰여 있던 오프닝 멘트를 읽기 시작했다.

"상대성이론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아인슈타인이라는 학자가 만든 이 이론은 오늘날의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엄청난 이론이라고 합니다. 문과계인 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분에게 쉬운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께서는 본질과는 조금 멀어진 이야기라고 하셨지만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저라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거나, 지루한 시간은 하루가 일 년 같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일은 여러분도 겪어보셨겠죠?"

잠시 말을 멈추고 밖을 바라보니 아야 씨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엄지를 척 세우며 계속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러분의 지난 2년은 어떠셨나요? 2년이라고 하는 시간은 정말로 긴 시간이지만 저에게는 왠지 어제 일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어서 그 시간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지만 그 무게는 왠지 무겁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제 인생에서 어느 때보다도 순식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저와 만났던 시간들이 어떠셨나요? 즐거우셨나요?"

만약 라디오가 아니라 생방송의 토크쇼였다면 어땠을까. 곧바로 들려오는 답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잠시 생각해봤지만 역시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여러분과 함께하는 100번째 밤, 사기사와 후미카입니다."

멘트를 마치자 음악이 조금 더 커지면서 오프닝의 끝을 알렸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평소보다도 긴 한 시간 동안의 방송은 막 시작했을 뿐이다. 정해진 멘트도 없이 이제부터는 순전히 내가 이끌어가야 할 몫이었다.

"그렇네요. 벌써 2년입니다. 제가 이 방송을 처음 시작한지 정확히 2년, 104주째 되었답니다. 아직 100회인 건 중간에 두 번 정도 방송이 나가지 못했고 이 방송이 방송되는 건 2주 후니까 정확히 2년... 에?"

저 편에서 아야 씨가 '2주 후라던가 하는 건 NG!'라는 종이를 들고 흔들고 있었다. 제법 당황한 표정이었다.

"조금 실수를 해버린 모양이네요. 그렇지만... 다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청취자들은 라디오 방송의 사정 같은 건 웬만큼 알고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아니었지만 녹음 한 번에 2회 분을 녹음하고 2주에 걸쳐서 내보내는 방송도 제법 많았는데 그런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사실 스스로 방송을 하면서도 그다지 재미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 걸 보면 많은 분들의 성원을 느낄 수 있네요. 감사합니다.'

데뷔 한 지 얼마 안 되어 맡게 된 라디오 방송을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재미있는 소재도 그다지 없이 조용히 이야기를 할 뿐이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그 결과가 오늘의 100회 특집 방송이었다.

"오늘은 100회 특별 방송이니까... 이런저런 것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네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저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서프라이즈에 저도 모르는 '깜짝 특별 스페셜 게스트'라거나... 기대해주세요."

나는 문득 아야 씨를 떠올렸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시간도 넉넉한 편이고...

"우선은 조금 제멋대로지만... 시간도 두 배로 많으니까요. 오늘은 이 방송의 작가님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갑작스러운 내 말에 아야 씨는 크게 당황한 듯 했다. 그러더니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무어라고 말하는 게 안 들어가겠다고 소리를 치고 있는 듯 싶었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못 들은 척을 하기로 했다.

"2년 동안 함께한 소중한 인연이랍니다. 자, 어서요."

아야 씨는 '나중에 가만 안둬!' 라는 종이를 들어 보이더니 시원스레 찢어버렸다. 그리고 부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싫었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등장해주지 않으면 방송사고가 되어버리니까...

"그럼 소개하겠습니다. 작가인 아야 씨입니다."

부스로 들어와 반대쪽 자리에 앉은 아야 씨는 얼굴이 새빨개져있었다. 라디오 방송의 작가를 하고 있으면서도 갑자기 출연하게 될 줄은 몰랐을 거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약간의 환호성을 더해 박수를 쳤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왠지 아야 씨가 나눠준 텐션을 받아서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보통 스태프들은 아야양- 이라고 한답니다. 그렇죠?"

내가 아야 씨의 별명을 말하자 아야 씨의 얼굴은 빨개지다 못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 웃어버렸다.

"그럼 오늘의 특별 방송은 작가인 아야양과 함께 하겠습니다. 잠시 노래 한 곡 듣고 가겠습니다. 시이나 링고의 '깁스'."

준비해둔 노래가 흘러나오고 나는 잠시 긴장을 풀었다. 적어도 3-4분 정도는 안심이다. 문득 반대편을 바라보니 아야 씨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말도 없이! 제멋대로에!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요?!"

화를 내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큰 아야 씨의 반응을 보니 무심코 다시 웃어버리게 된다.

"도리를 무리로 깨부수라고 한 건 아야양이잖아요?"
"아야양이라고 하지 마요!"

아야 씨는 아야양이라는 별명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왠지 어린애를 귀여워하는 듯한 느낌이 싫다고 했었나. 나도 너무 가볍게 느껴져서 보통은 잘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왠지 아야양이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았다.

"2주년이니까요. 100회 특집이니까요. 방송의 작가로써 이 정도는 희생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읏..."

아야 씨는 반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방송에 관해서라면 성실한 그녀이기에 책임감을 얹어 주면 도망칠 수 없는 거겠지. 어떻게 보면 나답지 않게 악의가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오늘은 즐거운 날이고 특별한 날이니까 이 정도의 억지는 괜찮지 않을까.

"나중에 꼭 갚아줄 테니까요! 각오하고 있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조금은 무서워졌다. 그 하이 텐션이 이상한 방향으로 향해서 이상한 기획을 들고 오면 곤란해지는 건 나니까.

"슬슬 노래도 끝나가고, 준비할까요."

곧이어 노래가 끝나고 나는 다시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시이나 링고의 '깁스'였습니다. 제 방송에 나오는 음악들은 보통 조용하거나 애절한 분위기의 음악들이 많고 그게 방송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살짝 어긋난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저희들이 평소보다 제법 들떠있어서 그런 걸까요?"

아야 씨는 말없이 고개를 조금 끄덕일 뿐이었다. 굳이 대답을 해야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는 모습을 보니 예전의 내가 생각나서 조금은 놀려주고 싶어졌다.

"아야양은 어땠나요? 지난 2년간 즐거웠나요?"

이번 질문은 피할 수 없을 거다.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 그렇네요... 지난 2년간 참 빨랐죠...'

아까부터 어울리지 않는 아야 씨의 언행을 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정말로 큰 소리를 내어 웃어버렸다.

"사실 아야양은 저랑은 정반대로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히메카와 유키 씨 같은 분인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저보다도 더 조용해져버렸네요. 이래서는 마리아나 해구 정도 되는 걸까요."

예전에 방송에서 '이미지를 한 단어로!' 같은 기획이 있었는데 나는 '깊은 호수'같은 이미지라고 했었던가. 차가운 얼음은 아니고 조용한 호수같다는 말을 들었다. 문득 그 생각이 나서 마리아나 해구라는 말을 꺼냈다. 정말이지, 오늘은 나답지 않은 것 같다.

"우으... 이 빚은 반드시 다음에 갚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의 기대가 한껏 반영된 걸로 말이죠..."

무언가 더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바깥에서 감독님이 '다음 진행!'이라는 카드를 들고 있었다. 보통 아야 씨가 하는 일이지만 이런 사정이 되어버려서 감독님이 직접 하는 모양이다.

생방송은 아니었지만 라디오 방송에도 정해진 시간이 있으므로 너무 길게 끌면 제작 측에서 신호를 준다. 그래도 너무 긴 경우에는 편집이 될 수 있다고 들었다. 들었다고 하는 건 나는 내 라디오 방송을 한 번도 직접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한 이야기를 또 들어봐야 별로 의미가 없다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사실은 부끄럽기 때문에...

"<편지 왔습니다.>"

코너 명을 말하자 약간의 에코가 깔리며 새로운 배경음악이 흘러나왔다. 진행에 따라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 되기도 하고 배경음악이 나오기도 하는 것은 다 바깥에 있는 스태프 분들이 그때그때 효과를 넣는 것이었다. 진행자만큼이나 임기응변이 필요한 역할이었다.

"이 코너는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보내주신 사연을 읽어드리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2주년이나 100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겠네요?"
"그렇네요."
"이미 사전에 공고가 된 모양이고..."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니까요, 후미카 씨."

뿌뿌- 하는 부정의 효과음이 났다. 스태프들이 튼 모양이었다.

"어른의 사정이네요."
"어른의 사정이라는 거죠."

아야 씨와 함께 작게 웃은 후에 앞에 쌓여있는 수많은 편지들 중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요즘에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사연도 인터넷 메일 같은 전자적인 수단으로 오는 일이 많았지만 편지로 오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편지 쪽이 더 정감이 갔다. 사연을 읽는 건 내가 미리 선정해놓거나 스태프 쪽에서 미리 뽑아두거나 아니면 내가 즉석에서 골라서 읽었는데 보통은 내용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위험 때문에 사전에 선정해두는 편이었다. 오늘은 특별하게 즉석에서 선정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흔치 않게 책상에 편지들이 쌓여있었다. 그 중에 하나에 눈이 갔다. 왠지 이 편지를 읽어야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라디오 네임 '쿠레하이'님께서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에, 쿠레나이가 아니라 쿠레하이?"
"그렇네요. 무슨 의미가 있는 이름일까요?"

아야 씨의 지적을 듣고 보니 위화감이 드는 이름이기는 했다.

"일단 사연을 읽겠습니다.

후미카 씨, 처음 뵙겠습니다. 우선 2주년과 100회 축하드립니다. 처음 이 방송을 들었을 때부터 정말로 좋아하는 방송이 되어버렸습니다. 조용한 밤에 마음을 달래주는 듯한 고요함이 매력이라고 할까요. 처음 시작할 때는 후미카 씨가 어떤 분인지도 잘 몰랐지만요. 사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신주십니다. 저희 집은 신사인 셈이지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조용한 분위기에서 자라다 보니 더 마음에 들었지 않나 싶습니다.

이 사연이 읽힐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특별한 축하를 해야 하는 날에 조금은 어두운 이야기여서 걱정스럽지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용기를 내서 써 봅니다.

처음 이 방송을 들은 후에 후미카 씨에게도 관심이 생겨서 직접 이벤트같은 곳에 찾아가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멋대로인 생각이었지만 후미카 씨는 제가 생각한 그대로의 사람이라서 놀랐습니다. 세상에는 보통 기대한 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까요.

아마 사람들은 모두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미카 씨를 바라보면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조용하지만 올곧고 흔들림 없는 그 모습을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벤트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저는 그 자리에 남아 멍하니 텅 빈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보 같은 일일 지도 모릅니다. 그 날 밤늦게 집에 들어가자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화를 내면서 어디 갔다가 이제 들어오냐고 하셨습니다. 제가 솔직하게 말하자 부모님은 더욱 화를 내셨습니다. 쓸데없는 짓거리 그만하고 가서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정말로 우리들 모두는 바보 같은 일을 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의미한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미카 씨도, 다른 분들도, 모두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남는 것이 없다고 해도 그 모든 것들이 사람들에게 힘이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후미카 씨가 가장 힘이 들지도 모릅니다. 사람들 앞에 서서 모두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자리는 고통일 지도 모릅니다. 가려진 앞머리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을 가리기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화려한 의상한 연약한 자신을 감추기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기적인 부탁입니다만, 그래도 후미카 씨는 그대로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매일 생겨나는 힘든 일들에 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항상 빛나는 모습으로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상처투성이라도 동경하는 모습으로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저는 그런 후미카 씨를 항상 지지하며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다시 한 번 2주년, 100회 축하드립니다."

나는 중간에서부터는 홀린 듯이 사연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다 읽은 지금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심이 담긴 묵직한 바람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졌다. 왠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사연을 읽으니 무심코 참게 되어버렸다. 방송 중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굉장히 무거운 사연이네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야 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방송이...

"후미카 씨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너무 부담스럽다던가?"
"그... 그럴리가요. 다 저를 향한 관심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야 씨가 질문을 해줘서 간신히 할 말을 찾아낼 수 있었다. 페이스를 조금 되찾으니 시야가 다시 넓어지는 것 같았다. 바깥쪽에서 감독님이 '일단 노래!'라는 종이를 들고 있었다.

"이 사연에 대한 코멘트는 한 곡 더 들은 후에 하도록 할게요. 하마사키 아유미의 Dearest입니다."

노래의 시작을 알리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자 긴장이 확 풀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야 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멀었네요. 이런 일로 공황상태가 되어 버리고. 다시 생각해보면 그다지 큰일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저 조금 무거운 사연이 왔을 뿐이었다. 길을 가다가 스토커에게 습격을 당한 것도 아닌데 굳어버릴 이유가 없었는데. 평소보다 더욱 긴장해서일까.

"다행이네요. 진정된 듯 해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생기자 사연의 내용을 곱씹게 되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다. 팬이라는 존재는 내 입맛대로 환호성을 보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고 각자 소중한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나에게 보내주는 사람들이었다. 가벼울 리가 없다.

"너무... 감사하네요. 보잘것 없는 저를 그렇게나 생각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에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살면서 이 정도로 강렬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저는 아이돌이 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겁다. 하지만 부담스럽기보다는 너무나 기쁘기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

30분, 그러니까 방송의 반 정도가 지나자 잠시간의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평소같았으면 이미 끝났을 만큼의 분량이지만 이제 절반이었다.

"실례합니다."

스태프 중의 한 명이 부스의 문을 열었다. 바로 들어오지 않고 의자를 가져온 스태프는 하나씩 의자를 안으로 들여 놓았다. 총 세 개였다.

"의자가 더 들어온다는 건... 게스트겠죠? 세 명."
"이제 와서 부정하기도 뭐하네요."

아야 씨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야 씨의 말처럼 여기까지 와서 게스트의 수까지 속일 이유는 없었다.

"휴식 이후에는 바로 게스트 분들도 투입되서 진행될 거에요."
"두근두근하네요."

방송을 진행하느라 잊고 있었는데 게스트가 누구일지 다시금 궁금해졌다.

"단서라도 주세요. 저보다 연상인가요?"
"에에- 비밀이에요... 라고 하면 너무 매정하니까. 후미카 씨보다는 어려요."

무심코 반반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이었지만 나보다 연상인 쪽은 제법 적었으므로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곧 오니까 직접 보면 된다구요."
"궁금한걸요."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는 걸까. 심술도 보통이 아니다.

"그야 후미카 씨는 놀리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그런..."

내 표정의 변화를 읽은 건지 아야 씨가 짓궂게 말했다. 당황하던 아야씨는 없고 완전 부활이었다.

"슬슬 시작이에요."
"스탠바이 부탁드립니다!"

아야 씨가 말하자마자 준비해달라는 말이 날아들었다. 경력이 경력이다보니 보통 감이 아니다.

"카운트 갑니다! 5... 4...'

평소에 아야 씨는 10초 전부터 카운트를 했었는데 갑자기 5초로 바뀌니까 제법 당황스러웠다. 오프닝 콜을 두 번 하는 일도 지금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사기사와 후미카의 처음 뵙겠습니다. 2부입니다. 사실 2부라는 건 없었지만 특별 편성인 관계로 처음 생긴 모양이에요."
"한 번 쯤 끊고 가주는 게 적당한 흐름이니까요."

문득 실제 방송에서는 이 사이의 간격이 어떤 식으로 메워지게 될 지 궁금했다. 광고? 음악? 아니면 그냥 치지직 거리는 노이즈? 그건 조금 심하려나.

"2부는 시작 때 말씀드렸던 게스트 분들과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저도 어떤 분들인지는 잘 모르지만..."
"후후, 깜짝 놀랄 걸요?"

아야 씨가 웃었다. 부스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운 느낌인 걸 보아 게스트 분들이 준비중인 것 같은데 내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오늘의 깜짝 특별 스페셜 게스트는 이분들입니다!"

아야 씨가 말하자 부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들이 들어왔다.

"346 프로덕션의 시부야 린 씨, 시마무라 우즈키 씨, 그리고 죠가사키 미카 씨. 데레라지의 여러분들입니다!"

스태프 분이 가져다 놓은 의자에 세 사람이 모두 앉자 부스가 제법 좁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보통 혼자, 많아봐야 세 사람이었는데 다섯 명이나 들어온 적은 처음이었다.

"데렛...이 아니지, 처음 뵙겠습니다. 시마무라 우즈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부야 린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죠가사키 미카야!"

아야 씨와 나는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오늘은 데레라지의 세 분이 특별 게스트로 오셨습니다."
"지난 번에 후미카 씨가 데레라지에 게스트로 와 주었으니까 답례라고 할까? 그런 이유로 잘 부탁해, 여러분!"

린 씨는 나와 비슷하게 조금 조용한 느낌에 우즈키 씨는 포용하는 느낌이라면 미카 씨는 활발하게 모두를 이끌고 나가는 성격이었다. 아야 씨와 마찬가지로 미카 씨의 높은 텐션도 매번 그다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우선, 물론 이제는 모르시는 분들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나이는 내 쪽이 더 위이고 내 방송의 게스트라고는 하지만 예능계에서는 선배인 세 사람을 두고 진행을 하려니 제법 부담감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위축되는 듯 했다.

"죠가사키 미카야! 후미카 씨와는 같은 346 프로덕션에서 아이돌을 하고 있어!"
"시부야 린입니다. 마찬가지로 346 프로덕션에서 아이돌을 하고 있고 뉴 제네레이션이라는 유닛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 시마무라 우즈키입니다. 마찬가지로 뉴 제네레이션으로 활동하고 있고.. 에...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즈키 씨는 의외로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우즈키 씨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의외네요."
"그러게요. 우즈키 쨩, 불편한 점이라도 있나요?"

나의 물음에 아야 씨도 거들었다.

"아, 아뇨. 사실 저도 후미카 씨의 방송을 곧잘 듣곤 하는데 저희들이 와서 조용한 분위기를 깨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
"괜찮아요. 평소에 이 방송이 조용한 건 의도한 게 아니라 제가 그렇게밖에 하지 못해서일 뿐이니까요. 오히려 제 쪽에서 조금 더 신나는 분위기로 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편이니까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래도 오늘처럼 게스트가 오늘 날이면 방송의 분위기가 바뀌곤 해서 좋았다. 긍정적인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데레라지의 세 분과 함께하는 오늘의 특별 코너! <후미카 공략 작전>!"

아야 씨가 코너 명을 외치자 빰빠밤 하는 묘한 배경음이 나왔다. 원래는 내가 진행을 해야 하지만 서프라이즈가 필요하다며 나에게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기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야 씨를 부스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던 걸까. 그리고 아까도 보긴 했지만 저 신경쓰이는 코너 제목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오늘의 서프라이즈 코너인데요. 지금까지 노력해온 후미카 씨에게 특별한 선물을 줘서 감동을 주자! 라는 기획입니다. 세 분이 준비해온 선물을 받았을 때 후미카 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이야기랍니다. 그리고 후미카 씨는 몇 점인지 평가를 하는 거구요!"
"...평가인가요? 선물을 받는 건 감사한 일인데 제가 평가를 한 입장은 못 되는 게..."
"꼭 점수를 매기거나 하지는 않아도 되니까 간단한 감상이라도 괜찮아요."

어떻게 보면 간단했지만 제법 어려워보였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걸 평가하는 건 더더욱 그랬다.

"우선은 미카 씨부터!"
"나부터?"

미카 씨는 이름이 호명되자 가지고 있던 작은 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가 하고 있던 머리띠를 가져가벼렸다.

"후미카는 얼굴을 가리지 않는 편이 더 보기 좋아."

미카 씨는 남성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다른 머리띠로 내 머리를 정리했다. 검은색 리본이 달려있는 흰 머리띠였는데 이전과는 다르게 내리고 있던 앞머리를 전부 올려버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난 번에도 느꼈지만 후미카는 기본이 엄청나다는 느낌이네."
"그렇지! 그래서 한 번 더! 라는 것도 있고 왠지 두근! 하는 상황 아닐까 해서."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우즈키 씨는 입을 가린 채로 와아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린 씨와 미카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한참 동안이나 굳어있었던 나는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특별한 날을 맞이한 후미카 씨에게 세 분이 남자친구 역할을 해서 선물을 주는 상황을 가정하는 거죠. 그리고 과연 후미카 씨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아야 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원망의 눈빛을 담아 아야 씨를 바라봤지만 아야 씨는 싱긋 웃기만 했다.

"그럼 후미카 씨, 어땠어?"

자리로 돌아간 미카 씨가 나에게 물었다.

"에... 그게..."

미카 씨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을 전부 드러내놓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이건... 상당한 고득점이 아닐까요?"
"그렇지? 후미카 씨, 얼굴 엄청 빨갛다니까 지금!"
"후미카 씨는 지금 평가를 할 상황이 못 되는 것 같으니까 결정은 세 명 모두 한 다음으로 하죠! 그럼 다음은 린 씨입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상황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축하해, 후미카."

린 씨는 어디선가 가져온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받아줄거지?"

린 씨가 나에게 꽃다발을 건네자 무의식적으로 받아버렸다. 영문 모를 이 상황에 말려들면 안된다고 뒤늦게 생각했지만 이미 손에는 붉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꽃집 아이 어필인가요?"
"그래도 뭔가 조금 부족해보이는 감이 있네요."
"린도 부끄럼쟁이니까요."

우즈키 씨는 어느새 아야 씨와 해설 역이 되어 있었다.

"글쎄요. 후미카 씨는 조용한 편이니까 오히려 린 같은 조용한 쪽을 더 좋아할지도요?"
"에이, 그래도 린은 너무 약했다니까!"
"결정은 후미카 씨의 몫! 자 그럼, 마지막으로 우즈키 쨩!"

이번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우즈키 씨가 눈 앞에 서 있었다.

"후미카 씨, 항상 목걸이 하고 있죠? 왠일인지 오늘은 없네요."

우즈키 씨는 나에게 말을 하며 다가왔다. 아무 말도 없이 다가오는 우즈키 씨와 어느새 몸이 제법 가까워졌다. 그리고...

쪽, 하고, 이마에 키스를 해왔다.

"...이건 질 수 밖에 없잖아! 반칙! 반칙!"
"...우즈키...."

나는 10초 정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멍하니 있다가 모든 걸 이해해버렸다. 그리고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펑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아앗, 후미카 씨가 오버 히트!"
"정말이지, 너무해요!"

아야 씨의 놀림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시작부터 계속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방금 일로 한계치를 넘어버려서 오히려 정신이 멀쩡해졌다.

"이런 걸 하려면 적어도 사전에 이야기 정도는 해주세요!"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왠지 더웠다. 앞머리를 올리고 꽃다발을 들고 있는 상황이라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뭐, 이거는 들을 필요도 없이 우즈키 쨩의 압승일 것 같네요."
"헤헤헤..."

우즈키 씨는 부끄러운 듯 웃고 있었지만 정말로 도망치고 싶은 건 내 쪽이었다. 이불 속에 파묻혀서 숨고 싶었다.

"이견이 없는 걸로 이번 코너는 우즈키 쨩의 승리! 후미카 씨는 아직도 행동불능인 것 같으니 우선 다음 코너로 갈까요? 다음 코너는..."


-


"그럼, 엔딩입니다."

평소보다도 두 배 길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열 배 쯤 길었던 한 시간이 끝났다. 방송은 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남아있는 일이 있었다.

"오늘 즐거우셨나요?"
"물론이죠! 후미카 씨랑 이야기해서 즐거웠어요."

우즈키 씨가 가장 먼저 환한 미소와 함께 대답해주었다.

"다음에도 또 같이 방송하고 싶네요. 데레라지에서라도 괜찮고!"

미카 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후미카 씨와 함께 있으면 왠지 기분이 편안해지고 즐겁다니까. 다음에도 같이 방송했으면 좋겠네."
"그렇네. 데레라지에 후미카가 왔을 때하고는 제법 달랐지만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었어. 다음에 꼭 다시 올테니까. 알겠지?"

세 명이 각자 한 마디씩 한 후에 마음을 맞춘 것처럼 작게 박수를 쳤다.

"감사합니다. 많이 부족한데 과분한 칭찬을 들었네요. 아야 씨는 어땠나요?"

아야 씨에게도 감상을 물었다.

"어쩌다보니 휘말리게 되었지만 즐거웠어요. 앞으로도 이 방송과 후미카 씨를 응원해주세요. 저도 뒤에서 전력으로 서포트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아야 씨."

작게 고개를 숙여 아야 씨에게 감사를 표했다.

"특별히 한 시간으로 준비한 오늘의 방송, 어떠셨나요? 여러분도 즐거우셨나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 되면서 엔딩 음악이 흐른다. 아야 씨와 데레라지의 세 명이 부스 밖으로 나간다. 방송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제가 준비한 게 하나 있습니다."

먼저 나간 네 명도 이미 누군가에게 들었는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축하와 떨어트릴 수 없는 것이라면 바로 감사겠죠. 그래서 여러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지난 2년간을 담은 사기사와 후미카의 사연입니다."

"처음 방송을 맡게 되었을 때 방송의 제목을 정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한참이나 고민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한 제목이 바로 지금의 '처음 뵙겠습니다.'입니다. 처음 시작하는 방송이었기에 나름의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낯가림이 심했습니다. 잘 웃지도 못하고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그건 아이돌로 데뷔하고 나서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나아졌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노래를 할 때도 제대로 노래하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고 촬영을 할 때도 미소를 잘 짓지 못하고 포즈를 제대로 취하고 있는 지도 자신이 없습니다. 과연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걸까, 아직도 무섭고 떨립니다.

그럴 때 힘이 되어주는 것이 팬 여러분들입니다. 기쁘게도 여러분들이 저에게서 힘을 얻듯이 저도 여러분을 의지하고 감동을 받고 의욕을 얻고 보람을 느낍니다. 사기사와 후미카라는 아이돌은 여러분이 있기에 성립합니다. 여러분이 사기사와 후미카라는 사람을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얼마나 감사의 말을 해도 모자랍니다.

그런 제가 여러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노래하는 것, 계속 이 방송을 하는 것, 계속 아이돌로 빛나는 것 뿐이겠지요.

그렇기에 저는 언제나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힘들 때에도, 기쁠 때에도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아쉽게도 한 분 한 분 곁에 찾아가지는 못해도 항상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여러분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팬 여러분들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제가 노력해온 것들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만나러 와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돌이 되어서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아이돌이 되어서 여러분과 만날 수 있어서, 이런 자신으로 성장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을 만날 때에는 '처음 뵙겠습니다'가 아니라 '오랜만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언제나 받기만 하는 제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노래하겠습니다. 들어주세요."


-


정말로 끝났다. 마지막 노래까지 마치고 남아있던 린 씨, 우즈키 씨, 미카 씨와도 인사하고 스태프 분들과 아야 씨, 감독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늦은 시간이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도 확연히 줄어있었다. 다시 살짝 차가운 바람이 불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후미카."

돌아보니 프로듀서가 서 있었다.

"...와 계셨나요?'
"물론이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분명 녹음할 때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분명 없었는데... 어디 계셨던 건가요?"
"조금 바깥...이라고 해야 하나 옆쪽에서 지켜보고 있었지. 오늘은 특별한 날인데 설마 내가 잊어버렸을 리도 없고."

나와 프로듀서 씨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 없이도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부끄럽네요. 오늘은 이래저래 저답지 않았던 것 같아서."
"오히려 좋았는걸. 후미카답지 않았던 게 아니라 숨겨져 있던 후미카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셈이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 생각해봐도 오늘의 내 모습이 나답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면... 2년 동안 나도 조금은 달라진 걸까?

"무겁네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이 자리는, 아이돌이라는 이름은 굉장히 무거운 것이라는 걸. 모두의 기대와 관심과 자신의 욕심마저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길이라는 걸요."

프로듀서는 내 말을 듣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그 시선을 눈치채고 프로듀서를 바라보았지만 프로듀서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내가 먼저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물론 가볍지 않겠지만 후미카 혼자서 짊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네?"
"후미카는 항상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잖아? 조금 더 주변 동료들에게 의지해도 괜찮다고 생각해. 그게 부담스럽다면 나에게 의지하면 되고."

다시 프로듀서를 바라보니 제법 멋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일이니까. 후미카가 의지해주지 않으면 곤란해."
"...네."
"나도 아직 많이 부족한 몸이라 전부 다 맡겨달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야."

갑자기 멋이 없어졌어요. 하고 작게 말하니 프로듀서는 멋쩍게 웃었다.

"지금까지는 말하지 않았었지만 사실 나한테도 후미카가 첫 아이돌이야."
"그렇게 고백하는 것처럼 말해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뭐? 알고 있었어?"

일부러 살짝 차갑게 말하니까 프로듀서는 정말로 놀란 모양이었다.

"부탁 받은걸요. 프로듀서도 처음이니까 부족한 점이 있어도 서로를 보완해나가면서 잘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이미 충분히 어른이니까 이해할 수 있겠지? 라면서요."
"뒤에서 어린 아이 취급이라니, 너무하는구만..."

생각해보니 프로듀서는 당연히 나보다 연상이었다. 아이돌 일을 하면서 나보다 어린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 보니 나는 나 자신을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것처럼 생각해버리게 된 것 같다. 예전부터 별로 나이에 관해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다가오니 제법 충격이었다. 그래도 아직 충분히 어린 나이인데. 카와시마 씨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화냈을 지도 모른다.

"뭐, 프로듀서가 심각하게 열심힌 건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단지 처음, 신입이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프로듀서는 너무나 열정적이었다. 모든 일에 노력의 낭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힘을 쏟았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비웃는 것처럼 내 주위에는 뜨거운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나도 '쿠레하이'라는 사람과 비슷했거든."

아까 그 사연 이야기인가 보다.

"처음 346 프로덕션에 들어가고 나서, 아이돌 프로듀서를 하게 되었지만 견습일 뿐이었고 담당 아이돌도 없어서 이리저리 견학으로 배우는 입장이었어. 그 때 후미카를 처음 본 거야."

아까 장난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것과 다르게 프로듀서의 진중한 눈은 먼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겨울날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서점에 들어갔는데 어떤 점원이 '어서오세요'라고 말한 순간 나는 천사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어. 저 아이는 누굴까 하고 주변에 수소문해서 알아냈지. 서점 주인의 친척인데 가끔씩 와서 일을 돕는다고. 그저 가게 일을 하면서 항상 책을 읽고 있을 뿐이라 자세한 건 아는 사람이 없다고. 나는 그 길로 달려가서 서점의 문을 다시 열었지. 그리고 아이돌 권유를 했던 거야. 나는 프로듀서로써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말이야."

어느 겨울날에 평소처럼 서점의 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희미하게 있는데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이전에도 왔었던 손님이겠지. '어서오세요.'라고 인사를 하고서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5분이나 지났을까,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는 내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도 책을 골랐구나, 기다리게 해 버린 걸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의문을 담아 바라보는 시선에 남자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이돌 해볼 생각 없으십니까, 하고.

"돌이켜보면 무슨 생각으로 해보겠다고 말했는지 모르겠네요. 처음, 아니 두 번째로 본 사람이 뜬금없이 아이돌을 해보지 않겠냐는데 도대체 왜 고개를 끄덕였는지."

아마도 마법에 걸렸던 것 같다. 여전히 그대로 불타오르는 그 성격처럼 직선적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리는 없다. 사람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왠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즐거울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돌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지만 아이돌이 아니어도 그저 이 사람과 함꼐 하면 무언가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잘 됐다고 생각해. 후미카도 나도 그 날 만났기에 오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어디 가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지만 후미카의 프로듀서를 하고 있다는 건 내 최고의 자랑거리야."

프로듀서는 품속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잘 포장된 봉투 안에서 프로듀서가 꺼낸 건 목걸이였다. 바다처럼 푸른색을 담은 작은 목걸이였다. 프로듀서는 나에게 다가와서 직접 목에 걸어주었다. 우즈키 씨가 다가왔을 때보다도 더 떨렸다.

"...정말이지... 갚지 못할만한 은혜는 만들지 않는 주의인데... 모두들 이렇게나 멋대로 선물이라고 주고서는..."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슴은 별로 아프지 않았다.

"이러면 얼마나 더 노력을 해야 하는 건가요?"
"갚으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갚고 싶다면 후미카가 행복해지면 돼. 그게 우리에게는 보답이 되니까."

프로듀서는 윙크를 하며 말했다.

"언제까지나 후미카가 즐겁게 아이돌 활동을 할 수만 있다면 다들 그걸로 만족할 거야. 그러니까 후미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복해지면 되는 거야. 알겠지?"

정말로 하나도 안 멋있었어요. 라고 말하고선 웃어버렸다. 웃어버려서 눈물이 입에 들어갔지만 이상하게도 그 맛은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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젯켄야 - The Legend of Hakurei-chang : https://www.youtube.com/watch?v=c_Sfmzrg24A

sasakure.UK x DECO*27 - 39 : https://www.youtube.com/watch?v=ecU_uJRzhfk

Sound Horizon - 11문자의 전언 : https://www.youtube.com/watch?v=k4TALUU5d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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