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Be My Dear

댓글: 3 / 조회: 1161 / 추천: 1


관련링크


본문 - 06-07, 2015 23:09에 작성됨.

“있잖아, 리오는 만약에 나처럼 되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어?”

토요일 밤, 업무로 인해 지친 나와 함께 드라마를 보던 코노미 언니가 말했다. 드라마는 언니가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로, 서로의 신체적, 태생적 차이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이―미드가 대부분 그렇듯―어떤 판타지적인 사건들에 휘말리면서 서로의 사랑을 깨우쳐가는 스토리였다. 나로서는 이름조차 들어 본 적도 없고, 물론 미드 자체를 보지 않지만, 웹에 검색해 보니 드라마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꽤 인기가 있는 것 같았다. 평론가들이 크게 점수를 주고 있는 부분은 그들의 애절한 사랑의 표현 부분인데, 역시 나로서는 하나도 느끼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코노미 언니는 장면마다 울고 웃고 소리지르기를 반복하며 마치 드라마의 한 인물이 나와 있는듯한 모습을 풍겼다. 비율만 된다면 출연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은 마침 드라마의 큰 흐름이 끝나고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는 회였다. 그 장면 중에 어떤 장면을 봤는진 몰라도, 코노미 언니는 그걸 보고 뭔가를 느꼈던 것 같다. 어느샌가 모르게 탁자에는 잔 비운 술이 쌓여 있었다.

“어떤 게?”

“음... 그 어떤 거라도.”

나는 힐끗 언니의 모습을 봤다. 언니는 내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은 없이 그저 TV 속의 미드를 계속 보고 있었다. 술의 탓인지 살짝 볼이 붉어 있었다. 언니는 술을 좋아하고 그만큼 술에 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딱 하나 약하다면 약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어른들의 전유물이기도 한 신세한탄이다. 술에만 취하면 자기의 인생사를 줄줄이 늘어놓는 건 물론이요, 다른 아이돌들과의 일들이나 프로듀서와의 일도 주저리 읊다보면 어느새 해가 밝아 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분명 그런 종류의 하나라 생각했다.

“언니처럼 작아진다면… 일까.”

‘작아’라는 말에서 잠깐 움찔하는 언니를 보며 작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언니한테 한 번 쓰다듬어지고 싶어. 머리를. 고개를 숙이거나 언니를 내 어깨 위로 올려서가 아니라, 제대로 눈을 바라보면서.”

내 말에 언니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몽롱한 눈빛, 불게 물든 뺨, 작은 숨소리와 함께 미약하게 움직이는 어깨. 오늘은 금방 언니를 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뾰루퉁한 볼로 왼손에 담긴 잔을 흔들거리며 나를 보던 언니는, 잔을 쭉 들이키고 바닥에 세게 내려놓은 뒤 말했다.

“리오도 맹한 구석이 있구나아~ 내가 누구냐아! 맏언니! 바바 코노미 왕언니 아니야! 나능 못 쓰다듬는 게 아니라, 누구보다 아래의 시선에서 모두를 돌봐주려고 이렇게 작아진 거에유우~”

배시시 웃는 언니를 보고 나 또한 같이 웃었다. 언니다운 거야. 자신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프로덕션의 모두를 잊지 않는 마음. 난 언제나 코노미 언니처럼 되고 싶어 하는데.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꺼내만 뒀지 쓰지 않은 내 잔을 당겨서 술을 따른다.

“그럼, 언니는 나처럼 되면 뭘 하고 싶어?”

에, 어, 하는 소리를 내며 언니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른스런 눈빛으로 모두를 감싸주는 게 언니라면, 이렇게 가끔씩 귀여운 모습으로 모두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 또한 언니다.

“어디가?”

“어디든.”

언니는 살짝 내 몸을 훑어봤다. 머리에서 발끝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올라오다, 내 가슴에서 멈췄다. 나는 장난스런 얼굴을 하고 놀려본다.

“어라, 혹시 나처럼 되고 싶다는 부분이…”

“아냐! 아냐! 그렇게 풀어헤친 옷을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보게 된다고!”

“하지만 언니도 나랑 같은 옷…”

“에잇, 시끄러! 역시 키로 할래! 키!”

언니는 잠깐만 시간을 달라는 듯 손바닥을 올리고, 끄으으 하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시침은 어느새 남동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레 술을 홀짝이며 TV를 봤다. 어느새 격동적이고 하이라이트랄 법한 장면은 전부 지나가고, 주인공과 그의 연인이 서로의 차이와 결점을 돌아보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런 우리가 사랑을 해도 될까. 앞으로 있을 일들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나는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건 차이도, 결점도 없는 사람이라도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고. 코노미 언니도, 나도. 결점이 많아도, 결점이 없어도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차이는 많아도 서로를 아끼고 있다. 그런 생각으로 술잔을 흔들 동안 코노미 언니가 작게 말했다.

“안아주고 싶어.”

“응?”

“양팔로 리오의 어깨를 가득 안아줄래. 나는… 언니니까.”

새벽이 오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엔딩이 흘렀다. 언니의 뒤에는 해가 떠오르고, 나는 밝은 빛에 눈을 희미하게 깜박이고,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언니지.”

언니는 내 대답에 잠깐 웃음을 보였다. 장난스러움이라고는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그야말로 모두의 언니라는 모습으로. 엔딩곡이 그친 드라마에서는 회상이 끝나고, 서로의 과거를 돌아보며 서로에게 약속하는 두 연인이 보였다. 다르니까, 완벽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찾는 거야. 내겐 네가 필요해. 이런 나라도 필요로 해 줄 수 있겠니. 진부한 대사가 이어지는 TV를 껐다. 어느새 술기는 돌아와 새 술을 따려는 언니의 몸을, 나는 갑작스레 번쩍 들어서 끌어안았다.

“잠깐만! 뭐하는 짓이야!”

“안는 건 지금도 할 수 있는 걸. 드라마도 끝났고, 술은 이제 여기까지만. 해가 밝아오고 있으니까. 어른의 시간은 끝!”

강하게 칭얼대던 언니였지만, 이내 피식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지금도 쓰다듬을 수 있어. 지금 이대로도. 마치 아기를 안 듯 언니를 안은 나는 침대로 걸어갔다.

“언니.”

“응?”

“내가 언니처럼 될 수 있다면, 그땐 안아줄래? 쓰다듬어… 줄래?”

“어?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뭐, 알았어.”

“아 맞다, 내일 요가도 하러 가보고, 떨어진 술도 사고, 저번에 찜해둔 식당도 가고, 못해 본 거 다 해 보자. 내일은… 어라? 자?”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 작은 어깨로 펼치던 안무는, 그 작은 손으로 들던 마이크는, 그 작은 손가락으로 향하던 라이브의 저 끝은 얼마나 커 보였던가. 내게는.

“언니는 내겐 아직도 너무 크니까. 난 더 작아질 수 없어.”

곤히 잠에 빠진 언니를 뉘고, 이불을 덮었다. 옆에 나란히 누워 밝아오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드라마를 녹화해두자. 그 뒤에 어떻게 이어질 지 궁금하니까. 그들의 이야기가.

1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