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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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여는 새의 지저귐도 들리지 않는 숲 속의 새벽엔 청량하고 깨끗한 공기가 가득했다. 수천 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곳은 역사도 모르는 고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최고신을 모시는 웅장한 사원조차도 순수한 자연 자체인 그 숲에서는 경건함과 신성함의 격이 낮아지고 말 것 같았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자란 나무의 줄기와 뾰족한 가지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후광처럼 짊어지고서 품위 있고 고귀하게 자라났고, 이따금 숲을 거니는 사슴이나 토끼 같은 짐승들은 땅에서 자라나는 여린 싹 위로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끝없는 숲의 은혜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 숲의 한가운데에는 나무들이 자라지 않는 공터가 있었다. 마치 야영지의 캠프파이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둘러앉듯, 굵은 나무들이 몇십 걸음쯤 물러나 둥근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깊고 깊은 우물 같은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누구도 그 호수를 찾아낸 적이 없었고, 그 호수의 전설은 어느 신화에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 호수에는 이름이 있었다. 깊고 고요하고 차디찬 그 호수의 이름은 헬로트크벨이었다. 숲의 생명력과 특유의 신비로움은 모두 그 호수에서 피어오른 것이었다. 땅 위에 쌓인 나뭇잎이 삭아내리는 씁쓸한 냄새, 빽빽하게 들어선 침엽수의 껍질에서 피어나는 알싸한 냄새, 어두운색의 돌에 낀 이끼가 피워올리는 물 냄새. 숲의 푸른 색채를 떠올리게 하는 온갖 냄새가 서늘한 바람에 실려 은은한 붉은빛을 띤 그 호수 위에 잔잔한 안개처럼 흘렀다.
새벽, 아침을 알리는 새의 지저귐조차 들리지 않는 어슴푸레한 시각이었다. 풍덩 하고 물이 첨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치하야."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여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긴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겨 예쁜 모양의 둥근 이마를 드러낸 것은 헬로트크벨과 그곳을 둘러싼 숲의 주인이자 수호자인 숲 속의 여신 이오리였다. 이오리는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든 아름다운 옷을 벗어 바위 위에 널어놓고서 얼음장 같은 물에 몸을 담그며 멱을 감고 있었다.
"치하야? 얘는 어딜 가 버린 거람."
이오리가 부르는 치하야는 이오리의 곁을 지키며 시중을 드는 님프였다. 지금쯤이면 치하야가 마른 수건을 가져와 이오리의 몸을 닦아주고 있어야 할 때였지만, 이오리가 소리를 높여 치하야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하거나 인기척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오리는 별수 없이 연분홍 물속에 몸을 담그며 손과 다리를 휘저으며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오리님."
따분함을 견디지 못한 이오리가 호수의 물을 허공에 띄워 동물 모양으로 변신시키고 있을 때, 호수 곁으로 다가온 치하야가 이오리를 불렀다.
"늦었잖아."
이오리는 쏘는 목소리로 치하야를 혼냈다.
"죄송합니다."
치하야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수면을 걸어 나오는 이오리의 몸을 닦을 준비를 했다.
"됐어, 내 몸 정도는 내가 닦아."
이오리는 치하야의 손에서 수건을 넘겨받으려 했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치하야는 손아귀에 힘을 주고 말없이 이오리의 어깨에 수건을 둘러 손을 놀렸다.
"반항하는 거야?"
"이게 제 할 일일 뿐이에요."
이오리는 새침하게 콧소리를 내며 잠자코 치하야의 손에 몸을 맡겼다. 치하야는 이오리의 몸이 차가워지기 전에 얼른 바위에서 옷을 집어 이오리에게 입혔다.
"아, 따분해."
옷을 입은 이오리는 치마를 무릎 위로 들어 올리며 얼음판 위에서 썰매를 타듯 물 위를 미끄러지며 빙빙 돌았다.
"따분해 하실 틈이 없어요. 숲을 돌아보셔야죠."
"돌아볼 것도 없어. 여기 있어도 나한텐 다 보이니까."
이오리는 물 위에 앉아 뾰족한 귀를 쫑긋거렸다.
"남동쪽의 큰 상수리나무가 벼락을 맞은 것은 아시나요?"
이오리는 움찔 놀랐다.
"귀여워하시던 토끼는 이번에 새로 새끼를 낳았어요."
아무 대답도 못하는 이오리를 보고 치하야는 한숨을 쉬었다.
"사소한 것들이지만 이런 것들을 살피는 게 이오리님의 역할이지 않을까요."
"숲에 아무도 못 오게 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치하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만 숲을 지키는 건 사람을 막는다고만 할 수 있는 건 아녜요."
"쪼, 쫑알쫑알 시끄럽네."
"쫑알쫑알 시끄러워야 하는 게 제 일이니까요."
이오리는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치하야의 차분한 얼굴을 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요새 반항한다?"
"전혀요."
"호오, 그게 고분고분한 태도라고 생각해?"
"반항하는 것도 아니라 생각하는데요."
"너 많이 컸다?"
"나이는 제가 더 많은걸요."
"시끄러!"
이오리의 높은 목소리에 치하야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오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 정말? 무슨 일 있어?"
치하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딱히."
"딱히는 무슨, 요 몇 개월 내내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쫑알쫑알 꿍얼꿍얼. 원래 이렇게 잔소리하는 성격 아니잖아, 너."
치하야는 대답 없이 이오리만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뚫어져라 날아오는 시선에 이오리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왜 그래? 정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이오리는 내심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한참 동안 눈을 깜빡이지도 않던 치하야는 바른 자세로 바위에 걸터앉아 등 뒤에 팔락이던 나비의 날개를 가지런히 접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님께서 순시를 시작하셨다고 해요."
"뭐?"
이오리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왜? 올해는 윤년도 아니잖아."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윤년에만 순시해야 한다는 규율은 없으니까요."
이오리는 팔짱을 끼며 짜증을 냈다.
"아, 정말 뭐야! 내 숲은 내가 알아서 지킨대도 다들 간섭만 하고!"
"별수 없죠. 이오리님이 이곳을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도 몇백 년 밖에 안 됐으니까요."
"으, 대체 몇 년이 지나야 가만히 내버려두는 건데! 나도 이제 엄연히 여신이라고."
"아버님 눈에는 여전히 어린 딸일 뿐이시고요."
이오리는 투덜거리고 짜증을 내며 투정을 부렸다.
"열심히 하셔야 이오리님도 이 숲을 떠나 이오리님의 나라를 다스리실 수 있으니, 조금은 열심히 해주세요."
이오리는 치하야의 말에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이오리님?"
눈을 동그랗게 뜬 치하야가 바라본 이오리의 얼굴에선 조금 전과는 다른 불만스러움이 느껴졌다.
"왜 그러세요?"
"몰라."
치하야는 잠자코 이오리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모른다고!"
"그러시면 더 수상할 뿐이에요."
"아, 몰라. 내가 왜 굳이 여기를 떠나야 하는데?"
"이오리님은 나라를 원하지 않으세요?"
이오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작은 숲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하신 건 이오리님이에요."
치하야는 차분히 말했다. 이오리는 고개를 떨궈 물 위를 바라봤다. 풀죽은 얼굴의 자기 얼굴이 물에 비치는 것을 보고서, 이오리는 발길질로 물을 흔들어버렸다.
"여기도 나쁘진 않아."
"이오리님이 이곳의 시간을 충실히 보내셔야 숲의 님프인 저도 마음이 놓여요."
이오리는 치하야를 돌아봤다.
"너는 내가 가도 아쉽지 않아?"
"네?"
치하야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오리는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말했다.
"내가 열심히 하면 여길 떠나는 게 더 일러지는데, 넌 그래도 괜찮아?"
"혼자 지내는 건 익숙해요."
"익숙하다고는 해도..."
이오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몇 년이고 너 혼자 여기다 두는 건 가엾잖아."
이오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이오리의 얼굴이 호수의 물처럼 불그스름하게 물들어버렸다. 이오리는 얼른 치하야에게서 등을 돌려 얼굴을 감췄다.
"이오리님."
치하야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호숫가에 울렸다. 이오리는 뜸을 들이다 한숨을 쉬고 치하야를 돌아봤다. 눈썹이 아래로 기울어져 있었다.
"치하야."
"네."
쉽게 말을 잇지 못하던 이오리는 슬쩍 고개를 저었다.
"아냐, 숲 돌아보러 가자."
그 말에 치하야는 날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오리도 그 곁으로 날아오며 숲 깊은 곳으로 향했다. 말 없는 비행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해는 이미 꽤 높게 떠올라 온온한 햇볕을 내리고 있었지만, 숲에 부는 바람은 여전히 서늘하기만 했다. 이오리는 찬바람을 맞으며 식어버린 뺨을 문지르고 어깨를 감싸 안았다. 머리카락도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아서 머리를 차게 식히고 있었다. 이오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몸이 싸늘하니 괜히 기분도 아래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꽤 쌀쌀하네."
이오리는 작게 중얼거리며 옆에서 따라오는 치하야는 어떤지 돌아보려 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치하야가 갑자기 이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자, 잠깐, 뭐 하는 거야!"
이오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별달리 몸을 따뜻하게 할 방법이 있나요?"
치하야는 언제나처럼 차분한 말씨로 말했다.
"그, 그건 아니지만 저리 가!"
이오리는 발버둥 쳤지만 치하야는 끌어안은 팔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직도 몸이 차가우신데요."
"끈질기네, 정말!"
"이오리님."
치하야는 이오리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이오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얌전히 대답해버렸다.
"어, 어. 응. 왜. 뭐."
"이오리님은 어리광쟁이시네요."
이오리는 갑자기 온몸에 열기가 확 도는 것을 느꼈다. 쌀쌀한 바람도 차갑게 젖은 머리카락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열기였다.
"무, 무,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갑자기..."
치하야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농담이에요."
드물게 웃는 치하야를 보며 이오리는 눈만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렸다. 치하야는 얼른 손을 풀고 이오리에게서 떨어졌다.
"이젠 좀 덜 추우시죠?"
이오리는 얼얼한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치하야..."
웅얼대는 목소리였다.
"네."
이오리는 한참을 망설였다.
"추워."
그 말에 치하야는 싱긋 웃으며 다시 이오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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