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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마스터]Cinderella Lady - Track_0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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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31, 2015 23:59에 작성됨.

노부오로부터 밀린 월차 사흘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 동안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맘만 같아선 사흘 동안 집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고 방바닥만 긁다 나오고 싶었지만, 내가 있건 없건 사회는 굴러가고 스케줄도 잡히며 방송도 시작되는 법이다. 지난 3개월간의 발악으로 얻은 인간관계를 날려버릴 수는 없으니, 아무리 힘들어도 지친 몸을 채찍질하며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미 요우조 눈에 찍혀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그러했다.

 

"이야아, 정말 지난달에는 감사했습니다! 국장님께 말씀 안 드렸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이 친구 말하는 것 좀 보세. 형 동생 사이에 그게 무슨 대수인가? 앞으로 힘든 거 있으면, 나한테 말만 하라고! 내가 다 해결해줄 테니까!"
"어휴, 그렇다면야 감사하죠! 자자, 아무튼 가시죠. 아, 저기 택시 있네요!"

 

그리고 오늘 나온 것도 그러한 인간관계 조정의 일환이었다. 한 바탕 시끄럽게 웅성거렸던 방송 관계자 사이의 회식 자리가 파한 후, 당장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은 속을 붙잡은 채 창백한 얼굴로 앞서나가는 뒤에서 잔뜩 취한 하지메의 목소리가 뭐가 그리 즐거운 것인지 경박하게 낄낄댔다.

 

"이야아, 아무튼 자네 볼 때마다 재밌어. 그 때 기억나나? 방송국 로비에서 내 앞에 두고 대뜸 무릎 꿇었던 거!"
"그 때야 뭐 동아줄 잡는 심정이었죠, 하핫."
"그 때는 너무 쉽게 무릎을 꿇어서 정말 뭣도 없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다시 보니 사람이 참 좋아! 역시 사람을 겪어봐야 아는 거라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아하하, 꿇어도 될 사람 앞에서 꿇은 것뿐이죠. 이제 보니 PD님 신수도 훤하시고, 앞으로도 잘 지내서 결코 나쁠 건 없겠다 싶었던 겁니다. 일 이전에 인간적으로 말이죠!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푸하하하하! 이 친구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그렇게까지 말해주니 내가 가만있을 수 없지! 내가 그건 힘 좀 써볼게!"
"…예?!"

 

순간 허우적거리며 택시 정류장을 향해 달려가던 카즈키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그건 힘 좀 써보겠다? 설마 그건가? 진짜 그건가?!

 

"나만 믿고 있으라고. 다음 시즌 저녁 드라마에 주인공은 무리라도 조역 정도는 가능해! 생각해보면 내가 진작 배려를 해줬어야 하는 건데. 346이 기르는 아이돌이 단역만 전전하면 또 우습지 않나?"
"저,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나한테 고마워할 타이밍 아니라니까? 하하핫, 아무튼 앞으로도 잘 해보세! 본관에서 보세나!"
"물론입니다! 그 때는 타카가키 양과 같이 찾아뵙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90도로 고개 숙이는 카즈키를 등진 채 하지메를 실은 택시가 빨간 후미등을 밝히며 느긋하게 거리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젠 저 길 끝까지 멀어져 보이지도 않는 택시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사이 주변을 오가던 시선 몇 개가 이쪽을 향한다. 필시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겠지. 그것도 아니면 새끼 야쿠자라던가.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이윽고 차가 완전히 멀어져 보이지도 않게 됐을 때, 천천히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고 카즈키가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씨발. 죽겠네."

 

월차 사흘 중 첫 날은 음반 관계자 회식. 둘째 날인 오늘은 방송 관계자 회식.

 

이틀 연속 과음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카즈키도 대비를 단단히 했다. 가벼운 식사로 어느 정도 속을 채우고, 숙취해소 드링크도 미리 마셔뒀으며, 술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바닥에 흘리거나 엎거나 하는 식으로 한 잔이라도 덜 마시고자 용을 썼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곤 하지만 어차피 다들 취한 상태이니 한두 잔 정도 슬쩍 버리는 것 정도는 눈치 못 챌 것이다. 전 직장에서도 몇 번이고 위기 상황을 버티게 해줬던 나름대로의 처세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덜 마시려 용을 써봤자 많든 적든 결국엔 마시게 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애초에 카즈키 본인조차도 술을 그리 즐기지 않았으니 어떤 식으로든 피로가 누적되는 건 당연지사. 결국 휴일도 즐기지 못한 채 만 이틀 만에 알코올에 절여진 곤죽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틀간의 이 음주 퍼레이드로 얻은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방금 전 그거."

 

행여 자기도 잊어버릴까 싶어서 아예 그 자리에서 다이어리까지 꺼내 박박 문질러 써놓는다. 다음 시즌 드라마 조연 발탁. 동그라미도 빙글빙글 굴려두고 별까지 그려 넣는 것으로 강조 완료.

 

이틀 정도 술자리에 어울려준 대가로 이런 큰 드라마의 조연 하나가 뚝 떨어졌다. 물론 방금 전 자신에게 그 자리를 약속한 하지메의 경우는 예전부터 자신이 공을 들이던 영업 대상이었으니 딱히 이런 결과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 분기에나 노려볼 법한 일감을 이번 분기에 바로 받을 수 있게 된 배경에 지금 같은 밑작업의 공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취했건 안 취했건, 입으로 뱉었으니 빼진 못 할 거다."

 

어쨌든 하지매도 총괄 PD고, 방송 이전에 관리자 경력만 해도 십 수 년을 아우르는 베테랑이다. 자기 정도의 위치에 앉은 사람이 말실수를 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사단을 만에 하나라도 까먹었을 리가 없다. 책임자는 함부로 입을 놀려선 안 된다. 책임자가 공언한 것은, 설령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 책임을 져야지."

 

무슨 책임이 될 지는 자기도 모르겠다만.

 

어쨌든 이걸로 자기 일은 끝. 이제 자기도 돌아가서 그나마 있는 휴일 하루를 게으르게 보내는 것만 남았다. 다이어리를 품속에 쑤셔 넣고 비틀비틀 몸을 돌린다. 휴일도 휴일답게 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얻은 게 있으니 부족한 수면 보충 정도야 그렇게 아깝지는 않다.

 

"…우웁."

 

그보다 지금은 이 속부터 어떻게 해야지. 방금 전까지의 당당한 기백이 무색하게, 입가를 부여잡은 카즈키가 허둥지둥 가까운 골목으로 몸을 던졌다.

 

 

 

"그 친구, 그래도 사람은 참 됐어."

 

사실 영업사원이라는 게 다 비슷한 부류이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자세가 잘 잡혀있는 친구는 또 오랜만이다. 방송 영업이 처음이라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조금 술이 깨어서 밖으로 흘러가는 야경을 힐끗 바라 본 하지메가 낮은 택시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전 직장이 직장이어서 그런가?"

 

마냥 초짜인 줄 알았던 그가 경력직이었다는 걸 들은 게 바로 오늘이었다. 게다가 다른 직장도 아닌 토야마 모터스. 노동 강도라면 대기업 중에서도 수위를 다툰다는 회사에서 몇 년을 버텼을 정도면 그 업무 스킬도 결코 우습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어쩐지 비위 맞추는 것부터 비는 것까지 도저히 신입사원 같지 않더라니, 그런 내막이 있었을 줄이야.

 

대체 무슨 곡절로 인해 전혀 다른 직종으로 이직을 결심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346의 사원과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서 나쁠 건 없다. 게다가 346의 아이돌 프로듀스는 조만간 사내 정규 핵심 사업으로 올라간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이렇게 안면 터두면 나중에라도 게스트 섭외하는 데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제대로 빚 지워두면 미안해서라도 나중에 좀 도와주겠지. 사람이 나쁘진 않으니 이렇게 두고두고 알고 지내면… 응?"

 

부르르르르!

 

그 때 별안간 하지메의 품에서 낮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이 시간에 전화라니 별 일이다. 고개를 갸웃하고 취기 오른 짓으로 대충 품을 더듬어 휴대폰을 꺼낸 하지메가 살짝 술기운이 가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코바야시 휴대폰입…."
— 오랜만입니다. 코바야시 하지메 씨.

 

그리고 그 순간, 전화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하지메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부르르 경련했다.

 

"…다나카, 요우조…!"

 


[iDOLM@STER]

Cinderella Lady

 


"뭐,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경쾌하게 신디사이저에서 손을 뗀 레이의 외침이 레슨의 종료를 알렸다. 순식간에 텁텁해진 목을 옆에 있던 이온 음료로 축이자 목구멍에서 발작을 해대던 갈증이 마치 불을 끄듯 빠르게 가라앉았다.

 

"하아…."
"역시 연습생 출신은 뭔가 다르네. 이대로 바로 녹음시켜서 CD 내도 될 것 같은데."
"과찬이세요. 아직 갈 길이 멀었으니까요."
"그렇게 낮출 필요 없다니까? 정말이라고. 내 장담할게."

 

기운차게 웃으며 어깨를 툭툭 치지만 차분한 카에데의 표정은 여전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시무룩하게 페트병을 기울이는 사이 신디사이저에 커버를 씌운 레이가 옆에 굴러다니던 수건을 집어 카에데에게 내밀었다.

 

"나도 여기서 한 5년 일하면서 이런저런 사람 봤거든. 가수지망생도 여럿 받았는데, 몇 년을 붙잡고도 너 발끝에도 못 미치는 사람들이 수도 없었어. 어찌나 엉망인지 내가 다 눈앞이 깜깜해질 지경이었는데, 그런 사람들도 어떻게 다들 음반 내고 잘 나간다니까?"
"그런가요…?"
"암, 그렇지. 그러니까 그렇게 겸양 떨지 않아도 돼. 게다가 넌 이제 막 데뷔한 거잖아? 앞날이야 창창하지."

 

결단코 농담이 아니다. 몇 번이고 가수지망생도 받아보며 이래저래 쌓인 경력으로 보건대, 카에데만큼 제대로 준비된 연구생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잔잔하고 성숙한 음색으로도 먹어주고, 본능적으로 좋은 음색을 골라내는 감도 갖췄으면서 웬만한 고음도 가볍게 소화해낼 수 있을 정도로 목도 강하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몇 년이나 노래를 쉰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현재는 이사직에 앉아있는 오오타가 부장 시절에 직접 픽업했다고 했지. 이사급의 인물이 직접 데려왔을 정도라면 그 때부터 범상치 않은 재능의 싹이 보였다는 보증이다. 이대로만 간다면 적어도 가창력 같은 문제로 발목을 잡힐 일은 없을 거다. 앞으로 더욱 성장한다면 앞으로 어느 정도의 거물이 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충분히 자신감 갖고 가도 돼. 신인 아이돌이잖아? 이 정도만 돼도 바로 무대 세워도 될 텐데, 그 때 되면 또 얼마나 더 크겠어? 자신감 가져."
"글쎄요…."
"또 이런다. 왜 자꾸 이렇게 주눅들어 있어? 누가 혼내기라도 한 거야?"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레이를 피해 카에데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밝긴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마구 퍼부을 정도로 가벼운 사람은 아니다. 아마 정말로 나한테서 가능성을 발견한 거겠지. 좋게 봐준다는데 기분나쁠 리는 없고, 오히려 황송할 지경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그 솔직한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문제는 다른 사람 이전에 이미 자기 자신이 확연하게 깨닫고 있었다.

 

'생각대로 안 되네.'

 

그 시이나 히데노리라는 노인에게 받은 곡, 연풍은 분명 좋은 곡이었다. 곡의 구성이나 가사도 마음에 쏙 들고, 첫 오리지널부터 이런 걸 들고 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분할 만치 좋은 곡이었다. 노래 자체에는 흠 잡을 게 전혀 없다. 역시 업계의 전설 쯤 되면 이런 노래도 무슨 명함마냥 휙휙 던져줄 수 있는 모양이다.

 

그래, 그러니까 노래에는 문제가 없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자기 자신이다.

 

'이상하게 밋밋해.'

 

분명 코드대로, 악보대로, 가사 그대로 불렀건만 어딘지 모르게 밋밋하다. 자기가 부르는 노래에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기교로만 따지면 분명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지만, 이건 애초에 기교의 영역이 아니었다.

 

트레이너인 레이 입장에서는 아마 알 수 없고, 알아봤자 별 수 없는 문제일 거다. 이건 눈으로 보거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에 놓인 문제가 아니다. 뭔지 설명할 수는 없어도, 분명 지금 내 상태에는 문제가 있다 이 곡의 잠재력이 겨우 이 정도가 아니라는 강렬한 확신은 있건만, 정작 내 목소리는 그 잠재력을 반의반조차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노래는 인생. 노래는 영혼. 노래는 삶.'

 

문득 이 곡을 주면서 그 노인이 건넸던 말이 생각난다. 단순한 헛소리치고는 가슴에 깊숙이 새겨진 말. 그 노인 말대로라면, 이 곡에서 빠진 건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는 걸까. 아직 내 목소리에는 인생이, 영혼이, 삶이 없다는 걸까. 그 빠진 것들이 내 목소리에서 힘을 앗아가고 있다는 걸까.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하면 그런 것들을 내 목소리에 부여할 수 있다는 거지?

 

"…하아, 언니가 말하면 좀 들어라. 꼭 그렇게 더 욕심을 내야겠어?"
"그야 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지고 싶다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래, 그래. 욕심쟁이 같으니. 혼자 다 해먹어라, 아주."

 

사람이 칭찬을 하면 좀 솔직하게 들을 것이지. 흥 식은 목소리로 투덜거리긴 하지만 레이 입장에서도 저런 태도가 썩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가만히 서서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없다. 하루하루 일취월장하는 제자들을 보는 것이야말로 트레이너의 보람이고, 저렇게 조금이라도 더 진보하려 발버둥치는 모습은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풀 죽어서 보이지도 않는 문제 때문에 끙끙대는 모습을 보니 좀 가엾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못할 일 같고, 다른 사람이라면 어떨까.

 

"…아."

 

그렇게 고민하기 시작하니, 채 5초도 지나기 전에 퍼뜩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수건을 받아든 레이가 반갑게 카에데를 돌아봤다.

 

"그럼 너네 프로듀서한테 한 번 들려주는 건 어때?"
"마시로 프로듀서… 요?"
"그 사람, 듣기로는 이 바닥 완전 초짜라면서? 나야 이게 밥벌이니까 해줄 수 있는 얘기라고 해도 뻔하지만, 그 사람이라면 좀 다른 감상을 들려줄 수 있지 않겠어?"

 

문외한과 전문가의 감상이 같진 않을 테고, 가끔은 문외한의 의견이 전문가의 분석보다 날카롭게 꽂힐 수도 있는 법이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카에데 앞에서 레이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너 영업 궤도 타면 그 사람도 조금 여유 생길 테니까, 한 번 들려주고 평가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안 그래?"
"으음, 과연…."

 

뜻밖이지만 그럴듯한 제안이었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카에데의 뇌리에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날이 갈수록 지쳐가지만, 그래도 눈빛만은 반짝이는 그의 열의 넘치는 모습.

 

'마시로 프로듀서라….'

 

그 사람이라면 확실히 뭔가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바로 가봐야겠다. 오늘 하루도 트레이닝을 위해 수고해준 레이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옷을 갈아입은 카에데가 살짝 흥겨운 걸음으로 레슨실이 위치한 별관을 빠져나왔다.

 

"과연, 마시로 프로듀서라… 프로듀서라…."

 

생각해보니 그한테 내 노래를 들려주는 건 처음이었다. 세 달 넘기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

 

물론 뮤직비디오 정도야 봤을 테지만 그건 편집까지 끝난 완성된 결과물을 확인하는 작업이었을 테니 참관보다는 검품이라고 불러야 맞을 것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카즈키는 지금껏 레슨 현장에 직접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노래는 고사하고 체조나 댄스나 기타 등등, 레슨의 시작과 끝을 제외하자면 그 과정 자체를 참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긴 바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일분일초가 아쉬운 일정을 매일 같이 달고 다니는 사람이 레슨실에서 한두 시간이나 죽일 여유가 날 리 없다. 아마 자신이 레슨을 받는 그 시간에 자기는 영업 뛰러 다니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전 대기업 사원다운 효율적인 일처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가끔은 좀 보러 와줬으면 좋겠지만."

 

사람이 언제나 바쁘게만 살 수 있단 말인가. 가끔은 숨도 돌리고, 쉴 때는 쉬면서 살아야지.
그렇게 아주 살짝, 얼굴 안 보이는 그에게 귀여운 불평.

 

그런 사소한 생각들을 떠올리며 붉게 물든 사내의 뜰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친다. 어느새 계절은 가을, 곱게 팔락거리는 붉은 단풍잎 사이로 제법 서늘해진 가을바람이 한들한들 불어오자 절로 가슴이 설렌다. 차가워진 바람이 여름으로 들떴던 마음을 기분 좋게 식혀준다. 목덜미의 옷깃을 파고드는 서늘함에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아이 같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아아, 가을, 가을. 그렇게 식은 마음이 단풍의 고운 붉은색에 다시금 두근대며 설레는 계절.

 

"카에데는 단풍나무가 좋아(楓ちゃんは楓の木が大好き)… 후훗."

 

사박사박 붉은 낙엽을 밟는 발걸음이 흥겹게 춤춘다. 높다란 본관 현관의 계단을 폴짝폴짝 뛰며 올라간다. 마음까지 단풍의 붉은색에 취해버렸나, 소학생 때에나 하던 짓을 다시 하는데도 남 보기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 이렇게 설레어버린 마음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나. 잔잔하게 흥겹고 가슴이 뛰어서 오늘 밤에 잠이나 제대로 이룰 수 있을까.

 

"맞아, 술을 마시러 가야지."

 

그래, 그러니까 마시러 가자. 프로듀서나 센카와 씨나, 과장님도 함께 모시고 가자.
술은 일본주, 안주는 구운 은행. 가을을 안주 삼아 모두가 함께 마시러 가자.
모두에게 이 흥겨움을 나눠주자. 기분 좋은 단풍의 바람 앞에, 모두가 취해서 웃을 수 있게 하자.

 

"…아!"

 

그렇게 혼자 신이 나 계단을 오르던 끝에 드디어 목적지가 보여 오기 시작했다. 4층 복도 맨 끝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사무실. 하얀 간판에 심장의 고동이 가슴을 꽉 죄어온다.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오늘 저녁의 술자리에 대한 기대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앞에서 노래하는 기쁨일까. 뭔지는 모르겠다. 아니, 아무래도 좋다. 뭐에 설레던 아무렴 어떠랴.

 

설레고 기분 좋으면 그걸로 됐지. 그렇게 웃으며 문고리를 잡은 순간.

 

"그게 무슨 소립니까?!"
"…!"

 

콰앙! 사무실 문 너머에서 터져 나온 거친 고함소리에, 가슴 속을 가득 메운 흥분이 딱 멈춰버렸다.

 

 

 

"아니, 분명 어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배역에 힘 써주신다고요! 설마 까먹으신 겁니까?!"
— 이봐, 이봐. 일단 흥분 좀 죽이게. 지금 이게….
"설마 어제 건은 술기운에 말씀하셨다고 하실 건 아니시겠죠?! 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자기만 믿으라는 것처럼 큰소리를 떵떵 치더니 이제 와서 이러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붙잡고 있는 수화기를 으깨버릴 듯 손등 위에 핏대까지 세운 카즈키가 분노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책임자 아니십니까?! 말씀하신 거에는 책임을 지셔야죠!"
— 나라고 모르는 거 아니네. 그런데 이게 좀… 복잡해.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냐.
"그럴 거면 차라리 말씀을 하지 마시지 그러셨습니까?! 전 PD님만 철썩 같이 믿고 있었는데 이러면…?!"
— 아, 그러니까 나만 탓하지 말라는 거야!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나?

 

고성까지 오가는 분위기에 사무실 분위기는 끝 간 데 없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제각기 수화기를 붙잡은 후미히로와 치히로가 암담한 시선으로 고개를 젓고, 그 모습을 힐끗 노려본 카즈키마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거 안 되겠다. 여기서 전화통 붙잡고 있어봐야 해결 안 되겠어. 직접 가서 담판을 짓는 수밖에!

 

"…지금 찾아뵙겠습니다. 사옥에 계시죠?"
— 그래, 그래. 차라리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그 편이 나도 편해. 자네도 내 사정 들으면 이해할 수밖에 없을 거야.
"들어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덜컹!

 

마치 내던지듯 수화기를 내려놓은 카즈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 무섭게 후미히로가 피곤한 듯 고개를 저었다. 상황은 치히로 쪽도 다르지 않은지, 막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직이 한숨만 내쉴 뿐. 그 반응만으로도 대강 상황을 파악한 카즈키가 분한 듯 입술을 씹으며 물었다.

 

"업체 전부입니까?"
"…예, 과장님. 다른 곳도…."
"F 방송국이랑 K 출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없는 대답에 오히려 분노만 솟구쳤다. 주먹을 꽉 쥔 채 앞만 노려보는 카즈키를 후미히로가 답답하게 응시했다.

 

"굳이 그 두 곳 뿐만이 아니라, 현재 타카가키 양에게 일을 맡긴 모든 업체로부터 똑같은 회신이 들어왔습니다. 오늘 오후를 기점으로 해서 전부 다, 일거에 타카가키 양이 소화하기로 했던 스케줄을 취소했습니다."
"크윽…!"
"남은 건 혹시나 싶어서 잡아놨던 작은 행사 몇 건, 하지만 이것도 분위기 보아하니 상황은 다르지 않을 것 같군요. 과장님, 이건 역시…."

 

덜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자를 걷어차며 몸을 돌린 카즈키가 가방과 외투를 집어 들었다. 굳이 설명을 다 들을 것도 없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한 날 한 시에 모든 업체가 스케줄을 취소. 지금까지의 흐름으로도 막후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면, 진작 사표 쓰고도 남았다.

 

"빌어먹을 자식들, 설마 이렇게 빨리…!"
"과장님. 일단 대책회의라도 하시죠.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고…."
"할 때 해도 얘기 좀 듣고 해야겠습니다."

 

냉정하게 대꾸하는 눈에 섬뜩하리만치 진한 핏발이 서 있었다. 지난 몇 달 간의 경험으로 보건대, 저런 눈이 된 카즈키를 말릴 방법은 없다. 결국 포기한 듯 후미히로가 도로 자리에 걸터앉고, 재빨리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움켜쥔 카즈키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아."
"아…."

 

깜짝 놀란 오드아이가 빠끔히 열린 문 너머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표정 보아하니 안에서 들려온 외침을 좀 들은 모양이다. 이런 일은 좀 몰랐으면 하지만, 어차피 들어버린 거 어쩔 수 없다. 잠깐 굳어있던 카즈키가 맥없이 고개를 돌렸다.

 

"…레슨 끝났으면 오늘은 먼저 돌아가셔도 됩니다."
"아, 프로듀서. 저기…."
"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습니다, 타카가키 양."
"잠깐…."

 

타앙!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빠른 걸음으로 카에데를 지나친 카즈키가 세게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웬만해선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던 그답지 않다. 그보다 그가 저렇게까지 당혹해서 허둥대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방금 전까지의 흥겨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카에데의 당혹스러운 눈빛이 그가 사라진 사무실 문을 향했다.

 

"이건…."

 

문 너머에서 듣긴 했지만 대체 어떤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마시로 프로듀서는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대체 왜 저런 무서운 눈을 하고, 내 옆을 도망치듯 지나쳐버린 거지?

 

"이건 대체…."

 

생소한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죄송합니다. 어제는 피곤해서 빨리 잠들어버렸습니다 으어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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