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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키의 마음 깊이 감추어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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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30, 2015 13:26에 작성됨.

           사무소 입구에서 냉방이 되지 않는 차가운 복도 끝 한편의 철제문을 바라본다.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보다 상자는 무겁지 않았다. 가와시마 혼자서도 들 수 있을 정도의 무게다. 물론 어느 정도 진땀을 흘리겠으나 만약 이것을 혼자 옮겨야 한다면, 딱히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옮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물며 자신에게는 이 정도의 무게인데 농가의 처녀인 오이카와는 어떠하겠는가? 혹시 자신이 전혀 도움이 되고 있지 않은 건 아닐까? 이렇게 상자가 가벼운 것은 혹시 오이카와가 전부 들고 있기 때문이 아닌 것 아닐까? 슬쩍 시선을 올려본다. 슬쩍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눈동자를 위로 올려보아도 오이카와의 얼굴까지 시선이 닿지 않는다. 과연 그녀의 신장은 크다. 일본 남성의 평균키 에 필적하며 일본 여성의 평균 키를 훌쩍 넘는 그녀를 보기 위해선 자신이 올려다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소에서는 남자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것 이다. 그리고 그런 부탁을 하는 이들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으며 오이카와 역시 남들의 부탁을 거절하기 보다는 자신이 직접 몸을 움직여 타인을 돕는다. 가와시마, 그녀의 가슴속에 품어두었던 물음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의 등에 닿은 철제문의 차가운 감촉은 그녀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괜찮으세요?”

           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안부를 묻는 오이카와와 눈을 마주하기 괴롭다. 어째서인가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던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화’는 곧 ‘무엇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바뀌어 가와시마를 당황시킨다.

           “응. 잠깐 문 열게.”

           혹시 자신이 힘이 쌔서 그런건 아닐까? 자신에게는 무겁지 않은 이 상자가 혹시 자신을 돕고자 하던 대선배인 가와시마를 힘들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걱정에 앞선 그녀의 마음은 그 눈빛으로 자신을 도와주던 스물여덟의 젊은 여성에게 전해졌다. 그것을 본인은 이해하지 못하였음에도 자신의 긴 사회생활 동안 쌓아온 그 경험, 아니 그렇게 긴 경험은 필요 없다. 이 처녀의 눈빛은 분명 누구나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 이다. ‘죄송합니다’, ‘도와주지 않으셔도 되요.’ ‘제가 할게요.’, ‘제가 할까요?’ 그렇게 타인에게 자신을 낮추며 몸을 움직이는 그녀의 행동은 타인에게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가와시마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죄책감’이다.

           문을 열고 왼쪽 발로 닫히려는 문을 고정시킨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상자를 가와시마로부터 번쩍 들어올린 오이카와는 복도의 희미한 빛에 의존한 체 불도 켜지 않은 창고로 성큼성큼 들어가 한쪽 구석의 박스더미 위에 상자를 올려두고는 돌아선다. ‘역시 나 때문에 힘들게 들고 갔던 걸까.’ 정말로 자신이 도움이 되지 않은걸 까 라는 그 걱정은 역시 또 다른 죄책감이 되어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만든다. 그리고 보답으로 받은 순수한 미소에 어째선가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말아버렸다. ‘아.’ ‘왜?’ ‘나는 고개를 돌렸을까?’ 하는 그 복잡한 생각은 그녀의 이성이 아닌 본능에서 나온 결론. ‘멋쩍다’라는 단어로써 형용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감정에 그녀는 뛰기라도 하듯 급히 발을 움직여 복도 한구석에 잠시 내려둔 빈 플라스틱 커피잔을 들어올리고는 다시 돌아 오이카와의 곁으로 돌아온다.

           “깜빡 할 뻔 했네.”

           어색한 자신의 기분을 감추기라도 하듯 남긴 그 한마디에 오이카와는 다시 한번 미소로 답해온다.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 괴로운 감정을 마음 깊이 묻어둘 뿐 이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차가운 캔을 손에든 가와시마는 냉장고의 문을 닫고 캔 하나를 오이카와 에게 건낸다. 무가당 오렌지 주스. 그다지 힘든 작업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녀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 이라는 이기심 때문이기도 하다.

           “감사합니다.”

           캔에서 빠져 나오는 충전제, 그리고 단숨에 시원하게 들이키는 모습은 마치 광고에서나 나올법한 모습이었다. 비록 작은 캔이라지만 빈 캔을 왼손 위에 올려놓고는 그녀는 오른손을 윗쪽으로 가져가 이번에는 곧바로 납작하게 찌그러뜨리고는 쓰레기통에 넣는다. 오른손에 조금 주스가 묻은 것인가, 그녀는 오른손을 바지에 두 번 정도 문지르고는 “앗.” 하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작업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 닳는다.

           “시즈쿠쨩은 도쿄에 오기 전에는 어디 학교 다녔어?”

           이제야 반 정도를 급히 비운 가와시마는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이자 그녀가 품어왔던 물음을 던져본다. 본래 목적은 농가의 딸이 어떤 생활을 하였는가 이지만, 다짜고짜 그렇게 물어보는 것은 그녀를 촌놈취급하며 상처 입힐 뿐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그녀 나름의 배려, 그 이상의 것 이다.

           “네, 누마쿠나이 고등학교에 다녔어요.”

           “누마쿠나이 고등학교?”

           “네. 저희 고향에 있는 현립학교에요.”

           가와시마는 그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마 그녀에게 물어보아도 자세히는 알지 못할 것 이다. 그녀의 나이 16세,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아 도쿄로 상경하여 이곳에서 다른 학교를 다니고 있다. 분명 지금 다니는 학교가 훨씬 많은 화젯거리가 있을 터.

           “어떤 학교야?”

           “글쎄요…… 그냥 평범한 학교였어요.”

           역시나 예상했던 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어떻게든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비록 그것이 자신의 착각일지라도 어떻게든 무언가를 기억해낸다.

           “엄마가 2학년때가 되면 진학코스로 진로를 잡으라고 하셨는데……”

           “진학코스?”

           “네. 2학년때부터는 진로가 나뉘거든요. A코스는 취업코스, B코스는 대학진학코스인데, 엄마가 꼭 대학에 가라고 하시면서 무조건 진학코스           로 하라고 하셨었어요.”

           “시즈쿠쨩은 어쩔 생각이었어?”

           “생각 안 해봤어요.”

           그리고 미소.

           “아마 진학코스로 하지 않았을까요?”

           “엄마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네.”

           부모님께 반항하지 않는 착한 아이구나.

           “농가였었지?”

           “네. 오이카와 목장.”

           “목장이면 젖소?”

           “네. 홀스타인을 열다섯 마리 키워요.”

           “열다섯 마리나?”

           “네.”

           “꽤 큰 목장이네.”

           오이카와는 손짓하며 부정한다.

           “그냥 평균이에요. 커다란 목장은 열 마리나 스무 마리가 아니라, 오십 마리 정도를 키우는걸요.”

           “그래도 열다섯 마리라도 힘들지 않아?”

           “네, 뭐. 그래도 목장이라서 다행이에요. 양계장 하던 제 친구 다나카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달걀을 거두는게 얼마나 힘들다고 하던지……           농장도 그래요. 정말 저희 집은 목장이어서 다행이었다니까요.”

           “헤에.”

           고향의 가족을 생각하는 걸까, 그녀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이곳에 온지 단지 몇 개월 이니 아직 향수병이 생길 시기는 아닌걸까. 아마 새로운 생활을 맞이한다는 젊음의 두근거림이 그녀를 지금 지탱해주고 있을 터 이다. 과거 자신이 도쿄에 상경하였을 때와 마찬가지이다. 아니 조금 달라. 그녀는 그렇게 생각을 고친다. 오이카와 시즈쿠, 그녀는 새로운 미래를 찾아 이곳에 온 것 이다. 허나 자신은 다르다.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도망쳐온 것 이다.

           이 어린 소녀야 말로 어른이 아닌가.

           “그럼 우유는 직접 포장해서 파는거야?”

           “아뇨. 저희 목장에서 출하되는 우유는 코이와이에서 가져가요.”

           “코이와이?”

           “네.”

           분명 코이와이 목장이라는 이름을 달고있는 커다란 목장이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 외의 다른 목장에서도 우유를 공급받는 것 인가 하는 새로운 물음이 생겨난다. 과거 그녀가 기자이던 시절의 버릇,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많은 그녀의 버릇이 지금 여기서 조금 되살아났다. 오이카와는 그녀의 그런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설명을 이어나간다.

           “저희 목장은 코이와이 유업하고 계약이 되어있거든요. 그래서 매일 착유되는 우유는 코이와이 쪽에서 매일 가져가고 있어요. 코이와이 우           유라고는 해도 지역의 목장들과 계약을 맺기도 하거든요. 저희 집이 그 중 하나였어요.”

           “그럼 오이카와 목장 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우유는 코이와이 우유로써 나간다?”

           “네. 오이카와 목장 이라는 이름은…… 간단히 말하면 저희 목장의 사업장 이름 일 뿐이에요.”

           오이카와는 과거 아버지가 말하였던 몇몇 전문용어들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설명해나간다. 분명 어른인 그녀라면 이를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면서, 자신은 이해 못하는 어른의 회화를 그녀에게 전달한다.

           “그렇구나.”

           가와시마가 보인 흥미롭다는 표정은 단순히 사회를 이루기 위한 표현이 아닌, 그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 이다. 그녀는 오이카와의 예기를 정말로 즐기고 있었기에. 그런 그녀와 예기를 하면서도 문득 오이카와 시즈쿠 라는 이 소녀가 이곳, 그녀의 고향으로부터 오백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이 신주쿠의 작은 사무소가 바로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가와시마는 떠올린다.

           “나도 처음 도쿄에 왔을 때가 생각나네.”

           “가와시마씨는 오사카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맞아. 근대 나도 대학은 이쪽에서 나왔어.”

           오이카와의 눈이 커진다. 분명 오사카에서 상경한지 이년 정도라고 알고 있었는데, 대학이 여기서 나왔다는 것 은 무슨 뜻일까?

           “뭐, 좀 사정이 있어서 대학 졸업 후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었거든.”

           오이카와의 눈이 다시 작아진다.

 

강을 건너는 가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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