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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마스터]Cinderella Lady - Track_0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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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5, 2015 23:59에 작성됨.

— 伸びた影を報道に並べ、夕闇の中を君と歩いてる。
(길어진 그림자를 길에 드리우고 땅거미 속을 그대와 걷고 있네.)
— 手をつないでいつまでもずっと傍にいれたなら泣けちゃうくらい。
(손을 맞잡은 채 언제까지고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눈물이 날 것 같아.)

 

"할 만큼은 했군요."

 

노트북 화면으로 흘러나오던 영상을 잠시 정지시키고 피곤한 눈을 꾹꾹 눌러댔다. 한창 키보드를 두들기던 손을 멈추고 구경하러 온 치히로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만만치 않게 피곤한 얼굴로 스테미너 드링크의 뚜껑을 돌려 뜯은 후미히로가 의아한 눈초리로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커버곡으로 가시는 겁니까?"
"이제 와서 어떻게 바꾸겠어요? 보시다시피 뮤직비디오는 나왔고, 이대로 가는 수밖에요."

 

반쯤 자포자기한 대답에 이젠 후미히로마저도 설레설레 머리를 젓고 말았다. 일정을 꽉 졸라매서 여기까지 온 건 좋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좋은 방법 같지가 않다. 신인으로서 최대한 위험부담을 줄이고 싶은 심정이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첫 데뷔곡을 커버곡으로 한다는 건 마냥 박수만 쳐줄 수 있는 결단은 아니었다.

 

"…곡의 퀼리티야 보장되어 있으니 그 점이야 문제없을 테지만, 첫 데뷔부터 커버곡을 들고 나가는 게 마냥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게다가 선곡도 그렇고요."
"나카시마 미카의 눈의 꽃(雪の華). 음반사업부에서 직접 선곡한 건데 그것도 위험하다는 건가요?"
"커버곡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미지가 강제될 수 있어요."

 

신인이 자기 이미지를 구축하지 않고 선배의 곡을 들고 나온다. 기성 가수들이 커버곡 들고 나오는 거야 대단할 것도 없지만, 신인이 데뷔부터 커버곡으로 시작하면 자칫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강제될 수 있다. 여러 실험으로 가장 시장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찾아가야 하는 신인 시절에 커버곡이라는 건 사업적으로 봤을 때 좋은 선택은 아니다. 신인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도 있다.

 

게다가 원곡과의 비교는 거의 필수적으로 따라올 테고, 그렇게 될 경우 막 구축되기 시작할 팬덤 내에서도 실력에 대한 이런저런 논란이 따라붙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카에데의 가수로서의 역량은 이제 갓 데뷔한 아이돌로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수준이지만, 벌써 가수로서 완숙기에 접어든 선배와의 비교를 감수해도 될 정도로 무작정 자신만만하게 밀어붙일 수준이 되는 것 또한 아니다.

 

"물론 지금 적어도 실력에 대한 건 접어둬도 될 수준인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한들 논란은 필연적입니다. 이건 안전한 길이 아니에요. 어쩌면 무엇보다 위험한 도박일 수도 있습니다."
"…걱정하시는 건 알겠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이보세요, 과장님."
"앞으로 한 달… 아니, 한 달도 안 남았습니다."

 

시간 얘기가 나오자 후미히로도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카즈키가 걸었다는 황당무계한 내기에 대한 소문은 이미 사내에서도 알음알음 퍼진 뒤다. 굳이 사실 여부를 되물을 정도로 새삼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자기 입으로 이렇게 확언을 들이니 몸에서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오리지널 싱글을 준비하고 싶어도 기약이 없고, 저희는 일분일초가 급합니다. 일도 못 잡고 단역만 전전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저쪽이 목 졸라오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승부수를 걸려면, 디메리트 감수하고 이런 식으로라도 밀어붙여야 합니다."
"…다나카 이사한테 잠깐 고개 숙였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전 이제 그렇게 비겁하게 못 살겠습니다."

 

전 직장에서도 이렇게 엎드려서 눈치만 보다가 끝장났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짓을 하라는 건가. 악 다문 입술 사이로 빠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리자 눈치만 살피던 치히로의 안색이 살짝 해쓱해졌다.

 

"어딜 가든 자기편부터 찾고 뭐 할 때마다 적인지 아군인지부터 묻는 사람, 저도 여럿 봐왔습니다. 거기 정신 팔려 있다가 지금 여기까지 왔죠. 사카가미 과장님, 과장님도 그런 건 느껴보시지 않았습니까?"
"도와주겠다고 할 땐 그냥 모르는 척하고 넙죽 받아먹는 거 가지고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사회생활의 처세라는 거죠.""타협은 전 직장에서 충분히 했습니다. 질릴 만큼요."

 

나를 죽이고 내 꿈과 열정을 죽이고 밑바닥만 열심히 핥아왔다가 결국 일이 수틀리자 가장 먼저 뒤집어쓰고 떠밀리듯 사직서를 썼다. 이미 한 번 데여봤으니 오히려 주관은 확실해졌다. 정중하고 공손한 것도 좋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주관이 중요해진다. 그 어떤 때에도 자신을 잊지 않게 하는 결단과, 그 결단을 내리게 하는 주관.

 

그리고 설령 그런 자기류 처세술이 아니라 한들, 더 이상 이 일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내 책상 건사할 궁리만 하면 그만이었던 그 때와는 또 다르다. 피곤한 눈으로 미소 지은 카즈키가 화면에 멎어있는 카에데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한 사람의 미래, 꿈, 열정을 받아놨습니다. 저는 숙여도 되지만, 그녀가 자신을 숙이게 해서는 안 될 겁니다. 제가 어디에 고개 숙이고 줄을 선다면, 결국 그녀 또한 저를 따라 나란히 줄을 서게 되겠죠. 그렇게 하나하나 빚지고 책잡히기 시작하면 앞으로 될 일도 안 될 겁니다. 여긴 기업이니까요. 철저하게 이익을 따르는."
"……."
"그런 기업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꿈을 지켜줘야 한다면, 그건 누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까?"

 

뻣뻣하다. 참 뻣뻣하기 짝이 없다.

 

전 직장의 경력으로 막연히 그에 대해 판단하고 있던 것이 전부 틀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 번 고개 숙여서 일어난 비극을 알고 있기에, 그는 오히려 더욱 뻣뻣하고 강직한 남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가끔 그 모습이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긴 해도, 그 답답함 때문에 멀리 돌아가는 광경을 마냥 나쁘게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한 때 가진 것이라고는 패기와 두 주먹뿐이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지금의 내가 진작 잊어버린 줄 알았던 그 모습이 아직 그에게 남아있었다. 결국 이 길의 끝에 있는 건 무엇일까. 그는 다시 한 번 현실의 냉엄함에 무릎 꿇고 말 것인가, 아니면 어떤 기적 같은 승리가 다시금 걸어 나가는 그의 다리에 힘을 더해줄 것인가.

 

"…생각하시는 게 정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나이 먹고서도 가슴 펴고 솔직하게 답할 수 있는 건 하나.
그런 그의 올곧은 젊음이 앞으로도 굴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하긴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죠. 타카가키 양은 마시로 과장님의 아이돌이니 말입니다."
"…이해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아무튼 다시 나가실 때까지 잠깐 눈이라도 붙여두시죠. 센카와 군, 우린 그만 일 보러 가세나."
"아, 예."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인 치히로가 후미히로의 뒤를 따라 다시금 자기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타닥타닥 자판 두들기는 소리가 엇박자로 귓가를 울리는 가운데, 피곤해서 후끈거리기까지 시작한 눈가를 덮은 카즈키가 각오 서린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질 수 없어. 져선 안 돼."

 

내가 밀려버리면, 그 때부터 카에데는 혼자다. 잊을 수 없는 그 각오조차 결국 쏟아지는 졸음이 한 순간에 휩쓸어가고 말았다.

 

 


그렇게 전쟁 같은 몇 개월이 흐르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예. 개막 무대 시작했다고요? 알겠습니다. 이쪽도 확인하죠. 현장 모니터링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연관리과의 파견 직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끊기 무섭게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굳이 채널을 돌릴 것도 없이 삽시간에 화면이 화려한 무대와 환성으로 가득 차고, 쏟아지는 꽃가루 아래 반짝이는 스테이지의 모습이 아플 정도로 시리게 망막을 두들긴다.

 

"시작됐군요."

"그렇군요."

 

뒷짐을 진 채 성큼성큼 걸어온 후미히로가 조용히 카즈키의 뒤에 시립했다. 반쯤은 자조, 반쯤은 기대. 될 대로 되라는 듯 포기의 기색까지 담고 있는 주름진 눈가가 카즈키와 TV 화면을 은근히 오락가락 오고 갔다.

 

"뮤직비디오 첫 공개치고는 시끄러운 무대를 잡으셨군요. 아이돌 얼티메이텀의 뮤직비디오 송출 코너라니."
"주목도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송은 이것뿐이니까요."

 

아이돌 얼티메이텀.

 

평범한 가요 순위 프로그램과는 달리, 제목 그대로 오로지 아이돌만 참여할 수 있는 일종의 특화 방송이다. 765 사단의 급성장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아이돌 붐에 편승하여, 언제나 실력 논란에 시달리는 아이돌들의 가수로서의 역량을 같은 스테이지에서 겨루게 한다는, 마치 검투사들이 날뛰는 콜로세움 같은 발상으로 만들어진 방송이기도 했다.

 

애초에 제작진들도 그런 걸 인식하고 있는 모양인지, 방송 스케줄마저도 격투기 결승전의 그것과 유사하다. 방송은 각 분기 당 한 번. 인터넷을 통한 실시간 인기투표와 음반 누적 판매량을 합산하여 순위를 정하고, 이 모든 과정을 가감 없이 그대로 화면을 통해 일본 전국으로 발송한다. 심지어는 유사한 속성의 아이돌들에게 라이벌 기믹을 붙이거나 같은 스테이지에서 같은 곡을 부르게 하여 실력을 겨루게까지 하는 등, 그야말로 아이돌들의 진검승부라고 부를 수 있을 만치 흉흉한 분위기를 연출하기까지 해서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자극적인 포맷이 잘 먹힌 것인지 매회 시청률은 수직 상승, 최근 방송에서는 드디어 시청률 30%를 돌파했다. 지금의 아이돌 붐을 상징하는 첨병과도 같은 프로그램으로, 단연 이 시즌이 되면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신경전이나 직접적인 비교 같은 것도 횡행한다. 비주얼적인 이미지를 걷어낸 아이돌의 가수로서의 능력을 직접 검증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창구이고, 때문에 팬들의 주목도 또한 극히 높다. 평범한 음악 방송이 아닌 일부러 수라장이라 할 수 있는 아이돌 얼티메이텀을 선택한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어제부터 주요 방송사에 보도자료 뿌렸습니다. 타카가키 양이 346이 기르는 아이돌이라는 건 이미 알려졌어요. 아마 오늘 오전부터 일간지 기자들 엄청 바빠졌을 겁니다."
"…일부러 그렇게 조장하신 거군요?"
"화제성이 없을 수 없죠. 2년 동안 765가 독점하다시피 하던 걸 방관하던 346이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2년이나 묵힌 끝에 드디어 346이 움직인다고 하면, 아이돌 팬뿐만이 아닌 일반인들의 관심도 끌어올 수 있을 겁니다."

 

아이돌은 스타다. 스타의 움직임은 그 자체가 드라마가 된다. 실상이 비즈니스건 뭐건, 그것을 포장하는 순간 아이돌의 움직임은 드라마로 화하고, 거기서부터 드라마의 행방은 아이돌이 아닌 그 아이돌을 끌어나가는 사람, 대표적으로는 프로듀서의 역량에 달리게 된다.

 

그리고 이미 드라마는 만들어졌다. 아이돌 팬 입장에선 346의 타카가키 카에데는 765의 아성에 대항하는 가장 유력한 다크호스일 터이고, 업계를 아는 사람 입장에선 765라는 신화에 드리워진 가장 크고 실재적인 위협일 것이다. 하지만 765와 346, 어느 쪽이 선역이고 악역인가 하는 건 상관없다. 드라마는 만들어졌으며, 그 주역은 765와 346이다. 그래, 346의 첫 번째 아이돌, 타카가키 카에데야말로 주인공이다.

 

"그냥 뮤직비디오 공개일 뿐이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346의 선전포고, 앞으로 765에 맞서게 될 그녀를 궁금해 할 사람들은 차고 넘쳤죠."
"…겨우 커버곡으로 그게 될까요?"
"걸 만큼 걸고, 할 만큼 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거죠."

 

이제 남은 건 팬의, 관객의 선택뿐이다. 346의 비밀병기, 타카가키 카에데를 과연 그들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막 첫 번째 무대가 시작된 화면으로부터 눈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에 올려놨던 하얀 봉투 한 장을 집어 들자 후미히로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서류도 아니고 봉투를 갖고 온 시점에서 예상은 했다만, 저걸 굳이 가지고 가는 걸 보니 저 안의 내용물이 뭔지도 익히 상상할 수 있었다.

 

"사직서입니까?"
"그렇습니다."

 

웬만해선 이걸 내밀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그러지도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답답한 얼굴로 품속에 사직서를 집어넣고, 진절머리를 내듯 고개를 세게 휘저은 카즈키가 애써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책임자니까요. 책임자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돼요. 확신이 없으면 입도 열지 말아야 하고, 일단 입을 연 이상 무조건 해내야 합니다. 만약 입 밖으로 뱉은 말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책임을 져야하죠."
"그 말씀대로입니다."
"승부수에 따르는 디메리트 치고는 너무 무겁군요."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엔 3개월 만에 사직서 쓰고 퇴직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선례로 남게 될 것이다. 이 남자는 그런 건 두렵지 않은 것일까. 나 같으면 억울한 기분이라도 들 텐데.

 

하지만 잠깐 얼굴을 감돌던 우울함조차도 곧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윽고 잠깐 우울하게 얼어있던 얼굴로 가벼운 미소가 돌아오고, 강하게 주먹을 움켜쥔 카즈키가 환하게 씨익 웃었다.

 

"…뭐, 괜찮습니다. 저도 믿는 구석 없는 거 아니니까요."
"믿는 구석이요?"

"타카가키 카에데 양을 믿습니다. 그녀는 최고에요. 일단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세상 사람들은 분명 그녀에 대해 궁금해 할 겁니다."
"하…."

 

무슨 믿는 구석인가 했더니 그거였나. 하지만 한 마디 해주려고 했던 것도 저 환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패기 넘치고 사려 깊은 저 미소. 정말로 한 점 의심조차 없이 눈앞에 보이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저 자신감 충만한 미소.

 

다 늙어 생긴 주책, 어쩌면 세월이 나한테 만들어준 감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분명 이 내기에서 이겨 돌아올 것 같다. 어떤 황당하고 잔혹한 현실이라도 그를 쓰러질 수는 없게 할 것 같다.

 

"그렇다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젊은이가 쓰러지는 일 따위, 있을 수 없을 테니까.

 

"좋은 소식 들려주시죠."
"곧 돌아오겠습니다."

 

격의 없이 미소 지은 두 남자가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되었다.

 

 


"수고 많으셨어요, 타카가키 양."

"센카와 씨야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뮤직비디오 데뷔라고 한들 없던 스케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마음만 같아선 아이돌 얼티메이텀 실황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레슨을 빼먹을 수는 없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접어둔 채 땀범벅이 된 카에데가 레슨실 바닥에 주저앉기 무섭게, 구석에서 지켜보던 치히로가 생글생글 웃으며 음료수 한 캔을 내밀었다.

 

"타카가키 양의 레슨은 처음 구경하는 건데, 설마 댄스에도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까지 험하게 구르는데 잘 버티는 사람 처음 봤다니까요?"
"무대에서는 이렇게 하라면 못할 것 같지만 말이에요."
"아하하, 설마 이렇게까지 할까요? 아, 거기 아오키 씨도 한 캔 드실래요?"
"오우, 땡큐."

 

사양도 않고 치히로가 휙 던진 에너지 드링크를 받아든 흑발의 트레이너가 반갑게 씨익 웃었다. 현재 카에데 전담으로 배치된 트레이너로, 이름이 아오키 레이(青木麗)라고 하던가. 트레이너 경력은 길지 않지만 그래도 연습생 출신이라 제자들의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는 덕에 대외적으로 평가가 높아지고 있는 관리부의 에이스이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름으로 불러도 돼. 여동생들도 좀 있으면 346에 입사할 건데."
"어머나, 진짜요? 그럼 자매 트레이너인가?"
"그 녀석들 하는 거 봐서 정해야 할 텐데,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솔직히 무대 세우기엔 부끄러운 녀석들이기도 하고."

 

말은 저렇게 하지만 쑥스럽게 웃으면서 그런 말해봐야 그냥 부끄럼쟁이 언니일 뿐이다. 흐뭇하게 웃는 사이 비 오듯 흐르던 땀을 대충 닦아낸 카에데가 그 자리에서 가볍게 허리를 튕겨 벌떡 일어났다.

 

"어머나, 어디 가요?"
"잠깐 화장실이요. 트레이… 아니, 레이 씨. 오늘 레슨은 이걸로 끝인가요?"
"보컬 트레이닝 남아있긴 한데… 에이, 됐나. 저도 일정 생겼으니까 오늘은 이쯤 하죠."
"예. 그럼 다녀올게요."

 

예의 바르게 꾸벅 고개를 숙인 카에데가 종종걸음으로 레슨실을 나섰다. 화장실 갈 때까지 꾸벅꾸벅 인사하고 다니니 착실한 건지 자신감이 부족한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살짝 고개를 갸웃한 치히로가 자기 몫의 에너지 드링크를 꼴깍꼴깍 넘기자니, 문득 입가를 미묘하게 비틀고 있던 레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왜 그러세요?"
"센카와 씨.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
"물어보고 싶은 거요?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드리겠지만…."

 

트레이너인 그녀가 자신에게 궁금해 할 일이라는 게 대체 뭘까.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후다닥 그녀 옆에 다가온 레이가 행여 누가 들을까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뭐냐, 그 퇴직빵 진짜야?"
"퇴직… 빵?"
"타카가키 양 프로듀서 말이야. 무슨 조건 걸고 못 지키면 퇴사하기로 했다는 게 오늘이라면서?"
"아…."

 

그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퍼진 건가. 카에데 모르게 잘 넘기려고 했는데 대체 누가 떠들어댄 건지 모르겠다. 정곡을 찔린 듯 살짝 굳어진 얼굴로 레이를 노려보길 잠시, 치히로가 이윽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하아, 그거 아무데서나 떠들고 다니시면 안 돼요."
"왜? 타카가키 양은 모르는 건가?"
"그럼 그걸 대놓고 말해줘요? 자기 프로듀서가 입사 3개월 만에 사표 쓸 상황에 처했다는 걸?"

 

하긴 그야 그러네. 자기라고 해도 사기가 바닥까지 주저앉을 거라는 생각이 잠시 레이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나저나 진짜라 그거지? 와, 그 사람 한 번 호쾌하네. 뭣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나 같으면 제발 목숨만 건사하게 해달라고 바싹 엎드렸을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다나카 이사님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으니 물리지도 못할 테죠. 담력 하나는 최고라니까요?"
"근데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역시 뭐 사내정치 그런 건가?"
"자세한 사정을 제가 어떻게 아나요? 그냥 넘겨짚어서 그런 거 아닐까 싶은 거지."

 

막 입사한 사람이 사내 파워게임의 중심으로 휘말려 들어갔으니, 지금 회사 상황이 말이 아니라는 건 사무원인 자신이라도 알겠다. 질려버린 치히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푸욱 흘러나왔다.

 

"아무튼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라니까요? 오늘 타카가키 양을 실시간 검색어 1위로 못 올리면 퇴사하겠다니. 그런 걸로 조건 걸기 시작하면 진짜 회사에서 하는 만사가 전부 내기거리일 텐데."
"우와, 뭔가 했더니 조건 그거였어? 하려면 하겠는데 그거 좀 빡센 거 아냐?"
"검색어 조작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하겠는데, 내기가 걸린 판국에서 이사님이 설마 그걸 모르실까요? 눈에 불을 켜고 진짠지 어떤지 확인하려 할 텐데, 이러나저러나 실력으로 해결 볼 수밖에 없네요."
"그래도 그 양반 건실해서 다행이네. 보통 그럴 때 되면 스캔들 터뜨려서라도 어떻게든 1위부터 찍고 보려 할 텐데. 왜, 영화사업부에 그렇게 해서 피 본 사람들 좀 된다는 모양이고."
"자주 있는 레퍼토리인 모양이죠? 이 회사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내기를 좋아한담.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눈에 훤히 보이네요."
"남아있거나 퇴사하거나 말이지? 아무튼 궁금증은 풀렸으니 이걸로 됐어. 적어도 오늘 하루 동안은 입 꾹 다물고 지… 낼…."

 

순간 별 생각 없이 문가를 향해 고개를 돌린 레이의 얼굴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뭐야, 이 사람이 왜 이래? 삽시간에 사색이 되어 턱을 덜그럭덜그럭 떠는 레이의 모습에 의아해서 고개를 돌리지만, 그 순간 치히로의 얼굴 또한 레이와 마찬가지로 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타, 타카가키… 양?"
"맙소사…."

 

설마 다 들은 거야? 설마? 진짜로?

 

여기서 멍청하게 되묻는 건 매를 버는 짓이고, 게다가 저 얼굴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다 들은 모양이다. 문가에 장승처럼 우뚝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오드아이가 속 쓰리게 심장을 들쑤신다. 딱히 죄 지은 것도 아니건만 어째 고개를 들기 힘들다.

 

"잠깐, 어… 잠깐. 타카가키 양? 일단 진정합시다. 일단 진정하고 내 얘기 좀 들어봐. 서있지만 말고 여기 앉아서 얘기하자고. 응?"
"타, 타카가키 양? 이건 그러니까 말이죠… 부, 불가항력이에요! 어쩔 수 없었다고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저희가 어떻게 그런 걸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
"…무슨 소리에요?"
"예?"

얼빠진 반문 두 개가 멋지게 교차하지만, 웃어주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처참했다. 그렇게 누가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굳어버린 두 여자를 향해, 카에데의 싸늘한 시선이 가감없이 날아와 꽂혔다.

 

"마시로 프로듀서가… 퇴사한다고요?"

 

 


주머니에 손을 푹 꽂은 채 건들거리며 복도를 거닐 때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던 목소리들이 한 번씩 멈추며 자신을 향했다. 벌써 소문이 다 돈 모양이군. 어쩐지 며칠 전부터 자기 보던 눈들이 심상치 않더라니, 어떤 입싼 녀석이 떠들고 다닌 거야.

 

"제기랄, 재수 없음 이게 퇴직 축하연이겠군."

 

회사에 정 붙이기도 전에 이런 꼴이 될 줄은 누가 상상했겠어. 짜증스럽게 머리를 북북 긁어대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본관 최상층의 회의실에 우뚝 선 채 금색 명패를 바라보자 난데없이 품속에 넣어놓은 봉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잊어버리려고 의식했고, 일부러 허세도 부려봤지만 역시 아주 잊어버린다는 건 무리다.

 

"제길…."

 

이제 와서 더럭 겁이 나고 심장이 떨린다. 큰소리는 쳤지만 보장된 게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여기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확신은 확신일 뿐, 현실이 아니다. 만약 내 확신이 배신당한다면? 만약 내가 잘못 짚은 게 있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렵게 잡은 직장, 다시 사표 내밀어야 하나?

 

오만가지 고민들이 뇌리를 둥둥 떠다니며 복잡한 심경을 괴롭게 했다.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부릅뜬 눈으로 오만가지 고민을 거듭한다. 어떡하지? 겁난다고 할까? 들어가서 빌까? 미쳤다고 하고 그냥 엎드릴까?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니, 아냐."

 

하지만 이를 악 물고 다시 한 번 눈을 질끈 감는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올라타는 수밖에 없다.

 

약해지려던 마음에 다시 한 번 채찍질을 가한다. 정신 차려라, 마시로 카즈키. 넌 이미 구석에 몰렸다. 이러나저러나 네 고집 안 꺾을 거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굳이 퇴직 내기가 아니라 해도 어차피 일어날 일이 조금 더 일찍 일어났을 뿐이다. 새삼스러울 건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네가 두려워해야 하는 건 다른 거다.

 

조금이라도 이 각오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 절대로 고개 숙이지 않는 것.
다시는 토야마 때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래, 지금은 그것뿐이다!

 

"…실례하겠습니다."

 

살짝 노크를 하고 살그머니 문을 열자 뿌연 담배 연기가 먼저 자신을 맞이했다. 여전히 싸늘하기까지 한 초강력 냉방에 진저리를 내며 걸음을 옮기자 저 넓은 상석에서 서로를 노려보던 시선 중 하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묵직한 중압감을 가감없이 뿜어냈다.

 

"2분 남았네."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메마른 눈동자를 돌려대는 요우조의 모습에 주먹을 꽉 쥐었다. 왔냐, 요괴 고양이. 내 목덜미 물어뜯을 생각 만만인 모양인데, 나 그렇게 쉬운 놈 아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그 사이 1분 50초로군. 오오타 이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시로 군이 이기겠지."

 

맞은편에서 턱을 괸 채 삐딱하게 노트북 화면만 바라보던 노부오가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분은 이러나저러나 통상운행이시군.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하던 걸 겨우 참아내자, 노부오가 매섭게 가늘어진 눈으로 두 사람을 흘겨봤다.

 

"인사부 보고도 없이 지들끼리 쿵짝쿵짝 잘 맞아서 사표를 쓰네 마네 헛소리들을 찍찍해대는 걸 내가 뭐라 보고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봐, 다나카. 등기이사 우스워 보이나?"
"젊은이가 패기 있게 나서는 걸 보자니 감동받아서, 조금 무리했습니다. 오오타 이사님도 그 기분 아시지 않습니까?"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 하는군. 아무튼 그 사이 50초 남았군. 다들 자리 앉게."

 

노부오의 손짓에 자리에 앉는 순간 참고 있던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등골은 벌써부터 축축하게 젖었고 바싹 쥔 주먹은 이미 땀으로 흥건해져 있다. 5초가 지나는지 50초가 지나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으로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이를 악 무는 지옥 같은 50초가 지났다. 1초가 10년처럼 느껴지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 그렇게 온몸을 덜덜 떨며 살짝 시계를 살피니, 현재 시간은 2시 59분.

 

"이제 곧."

 

5초, 4초, 3초.
2초, 그리고 1초. 분침은 12시를 가리키고, 현재 시간은 오후 3시.

 

"끝났겠군."

 

땀을 뻘뻘 흘리는 카즈키 앞에서 대수롭지 않은 듯 중얼거린 요우조가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먼저 확인했을 노부오 쪽의 안색을 살짝 살피지만 노부오는 대수롭지도 않은 표정으로 책상 밑에서 자기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뿐. 나이 60을 넘긴 노인이 여고생처럼 휴대폰이나 주물럭거리는 광경에 이젠 화가 날 지경이었지만, 그런 그의 포커페이스를 평가할 심적 여유조차 사라진 지 오래다.

 

"자네도 알겠지만, 1분 정도 여유를 줬네. 검색어 입력할 시간은 줘야지."
"예, 예…."
"좋아, 그럼 어디 젊은 친구 실력이나 보자고. 현재 검색어가… 흐음."

 

타닥. 경쾌하게 엔터 키 누르는 소리. 심장이 그 소리에 맞춰 덜컥덜컥 흔들리고, 살짝 눈을 들자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요우조와 시선이 마주친다.

 

"…이거, 의외로군."
"예?"
"큰소리를 어찌나 뻥뻥 쳐대던지 한 번 두고 보자 싶었는데, 어쨌든 능력은 있는 모양이야. 다시 봤네."
"그, 그건…."

 

순간 마음 한 구석이 환하게 밝아진다. 저 반응, 설마? 설마?

 

순간 회의실 책상 위로 뛰어올라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울렁거리는 식도를 꽉 짓누른 채 몸을 부들부들 떤다. 설마 정말 성공한 건가. 그런 건가. 갑자기 온 세상이 내 것이 된 것 같은 엄청난 환희가 온몸을 사로잡는다. 가히 쾌감에 가까운, 그 엄청나게 거대하고 막막한 즐거움이 덮쳐온다.

 

"그래, 노력했지. 수고했네, 마시로 군."

 

그 때, 요우조의 주름진 손가락이 천천히 노트북을 잡아 돌린다.

 

"난 분명 순위권에도 들지 못할 거라 생각했거든."

 

그렇게 천천히 돌린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검색엔진 실시간 검색어 순위 표시 사이트.
그리고 그 맨 위에 나와 있는 검색어는.

"…아."


1위 - 아이돌 얼티메이텀
2위 - 타카가키 카에데

 

"그래도 2위야. 수고했네."

 

순간 맥이 탁 풀려버린 카즈키를 앞두고, 요우조의 입가에 비로소 짙은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수고한 건 수고한 거고, 내기는 내기지?"


경)마시로 카즈키 퇴사 확정(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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