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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마스터]Cinderella Lady - Track_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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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2, 2015 23:59에 작성됨.

"센카와 군. 짐 싸게."

 

아침에 출근하기 무섭게 전례 없이 상기된 표정으로 집무실에 들이닥친 노부오가 예고도 없이 그 얘기를 꺼냈을 때 순간 자기도 모르게 치히로는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다. 최근 1주 동안 이어진 무지막지한 야근 퍼레이드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터라 휴식이 절실한 상태였고, 게다가 입사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들로 인해 나름대로의 불만도 쌓여있었기에 그런 그의 명령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다른 입사 동기들은 야근도 없이 설렁설렁 자기 할 일만 끝내면 일찌감치 퇴근해서 놀러 가고 데이트도 한다는데, 나는 왜 이 꽃다운 20대 청춘을 모조리 회사에 쏟아 부어야만 하는가. 맘만 같아서는 때려치우고 싶지만 그럴듯한 대기업 입사라며 온 집안이 뒤집어질 정도로 환호하시던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니 차마 사표를 내밀 용기조차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뭘 밉보였는지 드디어 짐을 싸라고 하지 않는가. 어느 부서로 가든 이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그래, 드디어 내 회사 생활에도 조금이나마 볕이 들려는 징조가 분명해!

 

"…그런데…."

 

막상 신바람 나서 골판지 상자에 개인 사물을 모조리 집어 처넣고 지시받은 부서에 가보니, 상상도 못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켠 수북이 쌓인 서류 뭉치들을 뚫고 서류 가방 하나를 쑥 뽑아내는 젊은 과장의 모습이 눈부시다. 분명 이사님이 직접 뽑은 사람이라고 했지. 경력직이라고 하지만 굉장히 파격적인 인사였기에 사내에서도 화제가 됐고, 게다가 얼마 전에 자기가 회사 안내도 해줬으니 누군지 모를 수도 없었다.

 

이름이 분명… 마시로 카즈키라고 했었지. 옆에 계신 분은 사카가미 후미히로 과장님. 얼마 전에 관리 1과 책임자로 오신 분이고, 아마 이런저런 소문도 달고 있….

 

"과장님.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가불가 여부는 상관없습니다. 해야만 해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어서 사무실 앞에 우두커니 선 치히로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카즈키가 구겨져 있던 양복 소매를 탁탁 털어서 폈다. 구김 방지 처리가 되어 있어서 값도 만만치 않지만, 혼자 사는 처지에 일일이 다림질할 여유가 없다 싶어서 투자하는 기분으로 산 양복은 아직까지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못한 채로 한 달 넘게 보낼 수는 없습니다. 기껏 뽑아놓은 아이돌 후보생이 손발 묶인 채로 놀고만 있는 사정을 이해해줄 리가 없어요. 특히 다나카 이사 쪽은 더할 테죠.“
"물론 그거야 그렇긴 한데… 이거 정말 제대로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카즈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그 또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제법 참신한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광고 대상이 상품이 아닌 사람이라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미히로의 뇌리로 썩 좋지 않은 예상만이 포탄처럼 어지러이 오고 갔다.

 

"제대로 방송을 잡고 밀어주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단역으로 수십 초씩 얼굴만 비춰주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노출 빈도를 높게 잡는다 해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이상 효과가 떨어져요. 게다가 드라마 같이 등장인물이 많은 경우는 더하죠."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스케줄로 시간을 뺏길 바에는 다른 일정을 충실하게 준비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안 그래도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뮤직비디오 촬영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도 많다고 할 수 없습니다. 레슨할 시간도 쪼개야 할 판인데 이건…."
"과장님."

 

듣다 못한 카즈키가 가방을 내려놓고 후미히로를 똑바로 바라봤다. 힐난도 비난도 없는 그저 올곧고 똑바른 시선. 그 투명한 눈에 후미히로의 눈꼬리가 꿈틀거리고, 카즈키가 가벼운 한숨을 뱉어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여기는 346이고, 상대는 다나카 라인입니다. 346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는 과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레슨이나 하면서 시간 보내봐야 일감은 안 올 겁니다. 아니, 올 수가 없죠. 이쪽이 고개 숙이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물꼬 틀어막고 있을 거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자력갱생이죠."

 

다른 사무소였다면 사내 정치로 이 정도 사단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346 프로덕션. 업계를 지배하는 걸로도 모자라 업계 그 자체라고도 불리는 단연 일본 제일의 연예 기획사다. 모든 방송에 걸쳐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346의 영향력은 단순한 사내 정치의 파급효과만으로 멀쩡한 사람의 인생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 풍파에 정면으로 맞서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이제 걸 수 있는 건 이런 꼼수와 편법, 그리고 그 때 그 때를 버텨낼 수 있는 번쩍이는 재치와 기지 뿐. 비록 346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약자다. 어딜 가든 명함 한 장 내민 것으로 대접받을 수 있던 토야마 모터스의 정사원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든 해볼 겁니다. 아니, 해내야 해요."
"…그건 타카가키 양을 위해서입니까?"
"예. 약속했거든요."
"약속…?"

 

멍한 반문에 가방을 움켜쥐고 있었던 손이 살짝 느슨해졌다. 살짝 멋쩍게 뺨을 긁적이던 카즈키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돌아온 것도 그 때였다.

 

"마법을 걸어주기로 했습니다."
"마법이요?"
"이 세상 모두가 당신의 노래를 부르게 해주겠다고.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철없는 장담이었다. 난 요정도 마법사도 아니다. 전 직장의 경력과는 단절된 채 들어온 346의 신입 사원일 뿐. 정말로 마법을 부려서 드레스와 호박마차와 유리 구두를 준비해줄 수는 없다. 동화 속 요정은 마술지팡이 하나면 뭐든 다 해결해주겠지만, 이 현실에 그런 턱없이 편리한 물건이 있을 리도 만무하다.

 

그러니까 이건 마법이 아니다. 원리를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작업, 말하자면 비즈니스.
하지만 원리를 알건 모르건, 결국 드레스와 호박마차와 유리 구두만 준비해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결국 마법이랑 다를 거 없지 않겠는가.

 

"요정이 무리라면 마차 끄는 말이라도, 그것도 무리라면 말 흉내 내는 쥐새끼라도 될 겁니다. 반드시 그녀를 멋진 성에 데려다줄 겁니다. 그럴 각오로 여기에 왔고요."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솔직히 무슨 비유인지는 모르겠다만, 다른 건 몰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뜨거운 열정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잠깐 들었던 의심을 치워버리고 흡족하게 웃은 후미히로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녀는 그럴 가치가 있죠. 멋진 성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아가씨니까요."
"당연하죠. 제가 데려온 사람인데.“

 

뒤를 돌아보며 자신만만하게 웃는 모습은 이상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늙어버린 마음 한 구석에 사진처럼 박힌 미소에 조금이지만 마음이 훈훈하게 차올랐다. 젊은이다운 치기, 젊은이다운 모습. 언제부터인가 내 안에서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던 모습이 이상한 반가움과 향수를 안고 속내를 적신다.

 

그래, 맞아. 젊은이가 저런 미소를 지을 때, 세상은 뒤집힌다. 믿을 것은 젊음뿐이지만 그 젊음이야말로 세상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최고의 무기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믿고 기다려 보자. 저 미소에는 그럴 가치가 있다. 젊은이의 미소에는 그런 믿음 또한 합당하다.

 

"다녀오시죠."

 

저런 미소를 짓는 사람이 실패할 리가 없으니까.

 

"좋은 결과 기다리겠습니다."
"앞으로 사무실 들리기 힘들 테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걱정일랑 붙들어매셔도 됩니다. 마침 도와줄 사람도 저기 도착했고요.“

 

후미히로의 손짓에 비로소 우두커니 서있던 치히로를 발견한 카즈키의 눈으로 화색이 감돌았다. 마치 달려드는 것 같은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몇 발짝 뒤로 물러나자니, 코앞에서 벽처럼 우뚝 선 카즈키가 난데없이 저 구석에 쌓여있는 서류 뭉치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센카와 씨, 죄송하지만 제가 없는 동안 서류 작업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예…?"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메일로 발송할 테니까 매 시간마다 체크하면서 확인해주세요. 그럼 시간 없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후다닥 사무실을 나선다. 인사도 받지 않고 허둥지둥 자리를 비우는 그의 모습에 황당해하는 것도 잠시, 이윽고 방금 전 그가 가리킨 서류 뭉치를 향해 눈을 돌린 치히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오, 맙소사…."

 

얼추 봐도 내 앉은키 이상. 결코 쉽지 않을 몇 개월의 대장정을 예고하는 서류의 산은 여사원을 절망시키기에는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방송업계 종사자에게 있어 346 프로덕션의 사원이란 저승사자랑 얼추 치환되는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일단 눈앞에 나타났을 때 복지부동으로 엎드려야 하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더라도 최소한 들어보기는 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상통하며, 아무리 거지같은 내용이라 한들 어쨌든 장단에 맞춰 춤은 춰줘야 한다는 점에서 그 끔찍함은 차라리 운명적이기까지 하다.

 

평범한 방송업계의 계약 관계에서 연에 기획사와 방송사 중진의 관계는 전형적인 갑을관계의 행태를 띄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PD로 대표되는 방송 기획 측의 요구에 기획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따라줘야 한다. 일거리를 쥐고 있는 방송사의 눈 밖에 났다간 좋은 꼴 보기 힘드니 아무리 불합리한 대우라도 보통은 기획사 측이 한 수 져주는 식으로 끝나곤 한다. 방송업계의 일반적인 불합리가 전부 이러한 계약관계의 불평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이제 와선 시시한 가십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허어.“

 

하지만 그 상대가 346 프로덕션이라면 이 계약관계는 일거에 뒤집히게 된다. 방송사와 잡지사, 출판사까지 보유하고 방송업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346 프로덕션 앞에서는 아무리 잘난 PD와 감독이라 한들 일단 엎드리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346은 연예 기획사이며 동시에 방송국의 가장 중요한 스폰서다. 스폰서의 요청이라면 죽는 시늉도 불사해야 하는 방송사 입장에서 346은 문자 그대로 상전이며, 설령 스폰서가 없다 하더라도 346의 영향력은 이후에 이어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끔찍한 보복을 연상시킬 수 있게 한다.

 

방법이야 많다. 경쟁 기획사의 배우를 겨냥한 악질 스캔들을 터뜨려 삽시간에 매장시킨다거나, 특정 방송사를 겨냥한 소속 인원들의 출연 거부로 방송 자체를 파행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 방송업계에서 막연하게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보복수단을 다종다양하게 갖추고 있는 346은 말 그대로 방송 권력 그 자체고, 상황이 이렇다보니 방송업계에서는 346 본사의 직원과 마주치는 것은 되도록 피해야 하는 일로 권고되고 있었다. 마주쳐서 좋을 게 없고, 설령 마주쳐도 최대한 잡음 일으키지 말고 끝내야 한다는 암묵의 룰인 셈이었다.

 

"저기… 이봐요. 마시로 씨."

 

하지만 아무리 그런 346이라고 한들, 웬만해선 그냥 받아들이기 힘든 일도 있기 마련이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은 M 방송국 예능국 총괄 PD, 코바야시 하지메(小林一)는 로비에서 자신을 가로막은 그림자를 향해 대뜸 구겨진 인상부터 향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든 해주시면 감사하다는 의미에서…."
"저도 웬만해선 협조하고 싶은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사무실에 쳐들어왔을 때 대뜸 346 프로덕션 명함 내미는 거 보고 감 잡았다. 제기랄, 아무튼 이래서 이 친구들은 상대하기 힘들어. 괜히 짜증스러운 기분에 머리를 짧은 머리를 벅벅 긁고,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눈앞에서 비킬 기색도 보이지 않는 카즈키를 향해 짜증 섞인 눈빛을 보냈다.

 

"이미 그렇게 기획서가 올라간 뒤라, 이제 와서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습니다. 자꾸 이렇게 생떼 쓰시면 저희도 곤란해요."
"어차피 한 분기 보내는 파일럿 프로그램 아닙니까? 반응이야 어떻든 한 번 해 볼 가치는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자꾸 이러세요?"

 

이 친구 과장씩이나 달았으면서 왜 이렇게 업계 생태를 몰라? 카즈키의 정확한 입사 경위를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는 감상이었다. 한숨과 함께 살짝 미안한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조신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던 여성이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카와시마 미즈키(川島瑞樹) 양."
"아뇨."

 

가느다란 눈동자에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마치 고급 여관의 여주인 같은 말 못할 꼿꼿함과 기품을 여성용 정장과 함께 몸에 두르고 있는 여성이었다. 살짝 앳돼 보이면서도 당당한 커리어 우먼의 기백이 보기 좋게 공존하는 미인으로, 다음 분기 파일럿 프로그램 구성을 위해 오사카 분국으로부터 본국에 출장 온 오사카 분국 소속의 아나운서였다.

 

듣기로는 오사카에 한해선 웬만한 지방 아이돌보다도 더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한다. 본국에서도 그런 그녀를 눈여겨봐서 본격적으로 본국 프로그램 진행을 맡겨볼 생각이었고, 그로 인해 자신이 출장 미팅을 진행하게 됐다. 그런데 미팅 첫날부터 눈앞에 이런 귀찮은 물건이 달라붙었으니 하지메 입장에선 이만저만 면목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 계시죠. 곧 따라갈 테니 일단 차에서라도…."
"아뇨, 괜찮습니다. 이런 것도 다 공부가 되는 법이죠."
"그렇게 열의 안 내셔도 되는 겁니다만… 하아."

 

그녀가 듣던 것 이상으로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건 지금 같은 상황에선 복인가 독인가.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기 옆에 있고 싶어하는 모양이고, 눈앞의 저 진드기는 웬만해선 떨어질 기색이 안 보인다. 346 소속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생떼 쓰는 건 결코 좋지 않다. 옆에 출장 온 사람까지 있는데 대체 내 입장이 뭐가 되냔 말이지.

 

"…좋습니다. 좀 실질적인 얘기로 들어가 보죠."

 

안되겠다. 상대가 346이건 뭐건, 일단 내 할 말은 다 해야겠다. 결국 짜증이 한계치를 돌파해버린 얼굴로 하지메가 눈앞에 버티고 선 카즈키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파일럿 프로그램이라고는 하지만 이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다음 시즌까지 연장 편성되거나, 아예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기도 하죠. 누구한테 부탁받았다고 맘대로 바꿔 넣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
"게다가 그 안에 들어가는 건 전부 다 스폰서한테 협찬 받은 거예요. 말이 좋아 협찬이지, 이거 결국 광고입니다. 당장 마시로 씨가 요청했던 그 노래방 기계 말인데, 그것도 광고비 받고 간접광고 들어가는 거예요. 광고에요, 광고. 스폰서라고요. 일개 PD가 스폰서 말을 어떻게 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스폰서. 모든 사건의 발단은 그거였다. 적어도 오늘 오전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던 것이긴 했다만.

 

이번 분기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편성되는 예능 방송의 새로운 콘텐츠 중 하나였다. 참가한 게스트나 패널들이 노래방 기계로부터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그게 어떤 노래인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알아맞히는 일종의 노래 스피드 퀴즈. 딱히 대단하게 참신한 건 아니지만 비는 시간 짬짬이 채워 넣기에는 무난한 구성이었기에 별 무리 없이 승인까지 받았고, 광고 협찬으로 노래방 기계까지 받아놔서 이제 촬영만 들어가면 되는 거였다.

 

"게다가 프로그램 구성상 기계로 해야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런 데에 대고 갑자기 사람을 넣어달라고 하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무리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아침, 뜬금없이 전화로 미팅 한 번 하자고 하면서 찾아온 이 마시로 카즈키라는 346의 프로듀서는 그 노래방 기계 대신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아이돌을 끼워 넣어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 346이 아이돌 시장에 뛰어든다는 업계의 뜬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현실을 확인하는 건 차라리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애초에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부터 언질을 줬다면 모를까. 오늘 아침 난데없이 찾아와서 졸라대기에는 너무나도 변칙적인 요구다. 아무리 346이라고 한들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까지 들어줄 의무는 없다. 게다가 어쨌든 이쪽도 스폰서를 끼고 있으니 딱히 밀릴 이유도 없다. 스폰서 대 스폰서의 싸움이면 결국 먼저 차지한 자리싸움이 되어버리는 게 보통이니까.

 

"아무튼 이건 정말 무립니다. 웬만해선 저도 들어드리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어요."
"그렇게 딱 자르지만 말고 얘기라도 좀 들어주십쇼! 저희도 필사적으로…?!"
"저도 그렇고 여기 카와시마 양도 그렇고, 이 방송국에서 필사적으로 안 뛰는 사람 없습니다. 마냥 졸라댄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다 큰 어른이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부끄럽지도 않아요?"

 

벌써부터 로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시선이 몇 개인가 이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절로 하지메의 얼굴까지 붉게 달아오르고, 이윽고 냉랭하게 고개를 저은 채 우두커니 버티고 선 카즈키를 피해 살짝 걸음을 옮긴다.

 

"아무튼 그렇게 알아두고 계십쇼. 저도 웬만해선 협조하고 싶지만 이건 정말…."

 

쿠웅!

 

순간 눈앞에 있던 그림자가 불쑥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고개 숙인 채 이를 갈던 얼굴이 난데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자 하지메와 미즈키의 얼굴이 동시에 경악으로 얼어붙고, 절박한 목소리가 그들의 무릎 언저리에서 터져 나왔다.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반질반질한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무릎 꿇은 양복의 검은색이 반질거리며 비춰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미즈키를 살짝 가린 하지메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일그러지고, 아예 고개까지 조아린 카즈키가 피 끓는 목소리로 로비가 떠나가라 절규하기 시작했다.

 

"저희도 필사적입니다! 어떻게든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출연하지 못하면 이대로 프로젝트가 좌초될 수도 있습니다! 저라고 무리한 부탁이라는 거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정말 방법이 없습니다!"
"저기, 잠깐만! 마시로 씨! 일단 진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까지 사내에서 아이돌 프로듀스 계획에 대해 미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입니다! 어떻게든 출연해야 합니다! 선생님, 다시 한 번만 생각해주십쇼! 어차피 스폰서 협찬은 다른 프로그램으로 돌릴 수 있고, 방송 기획 단계에서 올라간 기획서 수정하는 거야 자주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알았으니까 일어나요! 여기 보는 눈이 한두 개도 아닌데 지금 뭐하는 짓입니…?!"
"받아들여주시기 전까지는 못 일어납니다!"

 

피맺힌 목소리가 쩌렁쩌렁 로비를 울린다. 어느새 주변에 자욱이 몰려든 인파 사이로 소란을 감지하고 달려오는 경비원들의 구둣발 소리가 엇박자를 그리며 가까워지자 하지메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라고 한들 방송 경력은 결코 짧지 않고,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보통 뭘 노리고 있는지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부러 이러는 거잖아, 이 새끼!'

 

일부러 보는 눈 많은 로비에서 이러면 이쪽도 마냥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다. 게다가 어쨌든 상대는 영세 기획사의 핫바지가 아닌 346이라는 거대 기획사의 프로듀서다. PD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배경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까지 조아리면 웬만한 냉혈한이 아니고서야 거절은 못 한다. 아니, 설령 거절한다 한들 앞으로 한동안은 보복을 걱정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빌면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어도, 346이 빌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 젊은 프로듀서는 자신의 배경과 위치를 굉장히 극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걸 사용하는 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이 자식 정말 신입인가? 어떻게 이 지경으로 상황을 몰고 갈 줄 아는 거지?

 

"…젠장, 젠장!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일어나요!"

 

결국 오래 고민할 여유조차 사라진 하지메가 기어코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꿇어앉아 있던 자리에서 카즈키가 번개처럼 몸을 일으키고, 질린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던 하지메가 인상을 와락 구긴 채 투덜거렸다.

 

"그 건은 국장님한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기랄, 헌법 위에 떼법 있다더니 정말 못 당하겠군."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 알고 쓴 거 아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시죠. 카와시마 양, 갑시다."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매몰차게 몸을 돌린 하지메가 90도로 연방 고개를 숙여대는 카즈키를 지나쳐 인파 속을 헤쳐 사라졌다. 뒤를 따르던 미즈키의 미지근한 시선이 잠시 카즈키의 등을 향하다 스르르 미끄러지고, 비로소 우루루 흩어지는 인파들 사이에서 겨우 굽실대던 허리를 꼿꼿이 편 카즈키가 땀에 젖은 이마를 슥슥 훔쳤다.

 

"…이걸로 제일 큰 건은 완료."

황금 시간대 주력 예능 방송의 파일럿 프로그램 고정 출현을 확보했다. 다른 방송 출현은 인사부에서 알아서 해줄 테니 앞으로는 웬만해선 이렇게까지 나올 일은 없을 테다. 자존심이야 상하지만 당장의 목적이 확실한 상황에서 그딴 게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이건 영업이니까. 세상을 상대로 해야 되는 영업. 그렇게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개를 돌린 카즈키의 눈이, 저 멀리서 싸늘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오드아이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프로듀서?"
"타카가키 양…."

 

제기랄, 대체 왜? 순간 겨우 멎었다 싶었던 등골의 땀이 다시금 줄줄 쏟아지기 시작했다.

 

 

 

딱히 나쁜 짓한 것도 없지만 괜히 죄 지은 기분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으레 한 마디쯤 돌아올 살가운 인사 한 마디 없이 냉랭하게 앞서가는 카에데를 따라 연행되듯 주차장으로 향했다. 머릿속으로 어째서인지 이런저런 변명이 떠다녔지만, 막상 주차장에 주차된 차의 운전석에 몸을 싣는 순간 그런 변명들마저 씻은 듯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연예인 프로듀스 업무이니 제대로 된 밴이 필요할 터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카에데를 위해 준비된 영업용 밴이 없었기에 빌려온 차 또한 보통 영업용으로나 쓰는 소형차였다. 좁디좁은 소형차 앞좌석에 미인과 나란히 앉아있다는 것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시한 흥분조차 주지 못했다. 마치 시트가 늪이라도 된 것처럼 땀범벅이 된 몸을 깊이 끌어당기자 자기도 모르고 참고 있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옆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려 딴청을 피우며 주머니에 넣어놨던 담뱃갑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한참이나 말없이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 앞유리만 바라보고 있자니, 이윽고 가벼운 한숨과 함께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에데 쪽이었다.

 

"…프로듀서.“
"차에 있으라고 했더니, 왜 나온 거예요?"
"걱정돼서 나와본 거죠. 그리고 말 돌리지 마요."

 

살짝 흘기는 눈에 미미한 분노가 섞였다. 프로듀서 일이 마냥 좋게만 흘러갈 수 없다는 걸 그녀라고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방금 전 카즈키의 행동은 도가 지나쳤다. 역시 영업 당사자가 직접 얼굴을 비추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방송국을 서성거렸더니 설마 그 사람 많은 로비에서 그러고 있었을 줄이야. 과감하고 헌신적인 건 알지만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던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사람이 자존심도 없어요?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서니 거기서 무릎까지 꿇는 건 또 뭐예요?"
"……."
"절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프로듀서, 정말 걱정돼서 이러는 건데 앞으로도 어디 가서 이러고 다니지 마요. 뭘 하든 사람이 자신감 있게 살아야지 이건 정말…."
"…타카가키 양."

 

문득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즈키가 입을 열었다. 난데없이 말을 자르자 절로 카에데가 입을 꾹 다물고, 기대고 있는 핸들을 붙잡은 카즈키의 손에 새파란 핏대가 불끈 솟았다.

 

"그날 밤 11시 59분에…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기억하나요?"
"예?"
"사실 말이죠, 당신에게 마법을 걸어주겠다고 했지만… 저한테도 당신이 마법을 걸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꿈과 열정이, 그녀를 만남으로 해서 다시 살아났다. 잊고 있던 것들이 다시금 내게 돌아와 힘이 되었다. 고역과 굴욕을 참고 견디게 하는 인내, 그 인내의 근원이 되는 것들이 그녀로 인해 다시금 나의 것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것 또한 참을 수 있다. 지금은 무릎 꿇어도, 지금 이 순간 한없이 즐겁고 보람차다.

 

"심장이 뛰고 있어요. 화나고 분하고 너무나도 자존심 상하지만, 그래도 너무 즐거워요."

 

굴욕을 참고, 짓씹고, 고개 숙이고, 그렇게 숨죽이고 있다가.
단 한 번 고개를 쳐들어 배트를 휘두르는 순간, 멋진 만루 홈런과 함께 세상은 뒤집힌다.

 

사람이 아닌 세상을 상대로 내가 이긴다. 지금은 내가 물러나지만, 어차피 이기는 건 나다.
그걸 알고 있으니 지금 고개 숙이는 것도, 미래를 위한 일보 후퇴에 불과할 뿐.

 

"맞아요. 이런 감각이었어요."

 

미래를 예감하고 두근대는 심장. 이 짜릿하고 흥분되는 감각.
그래, 이것이야말로 나의 일. 미래를 기약하고 지금을 죽이는 나의 일.

 

"분명 이런 감각으로 일을 했었어요. 그러니까 알아요."

 

이것이 바로 영업. 세상을 상대로 승리하는 비즈니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영업의 쾌감.

 

"두고 봐요, 타카가키 양."
"프로듀서…."
"지금까지 제가 고개 숙이고 엎드렸던 새끼들, 내년 되면 저한테 먼저 와서 고개 숙이고 있을 겁니다. 장담할게요."

 

세상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당신과 나의 마법. 그래, 내가 잊고 있던 한 때의 열정.
이 열정이 죽지 않는 한, 난 세상을 상대로 얼마든지 싸워 이길 수 있다.

 

"오후부터 일 있는 거 알죠? 준비하세요."
"…예."
"갑시다."

 

흥분과 동정으로 떨리는 카에데의 눈동자가 살짝 카즈키의 옆얼굴을 향했다. 땀범벅이 되고 자존심이 짓뭉개지면서도 웃을 수 있는 미친 듯한 열정. 아이와도 같은 열정이 지금 주저앉은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당장의 좌절도 절망도, 그 어떤 것도 거꾸러뜨릴 수 없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광채가 오후의 태양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까지 웃게 하는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나는 알 수 있다.
그런 당신의 열정을 알게 된 이상, 나 또한 가만히는 있을 수 없다는 것.

 

"세상을 이기러 가보죠."

 

부르릉. 가벼운 엔진 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한다. 똑바로, 직진으로, 무엇보다 올곧고 곧바르게.


그래, 귀여운 28세인 거지. 나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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