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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마스터]Cinderella Lady - Track_0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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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1, 2015 23:59에 작성됨.

"으음…."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지끈거리는 두통이었다. 오만상을 다 쓰며 머리를 짚고 일어나자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격렬한 갈증. 까끌거리는 입안의 느낌에 허겁지겁 옆에 놓여있던 물병을 집어 들었다. 시원한 벌컥벌컥 소리와 함께 미지근한 생수 한 병이 단숨에 바닥을 드러내고, 비로소 여유를 찾은 카에데의 귓가로 타닥타닥 자판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프로듀서?"
"아, 일어났어요?"

 

창밖으로 투명한 아침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경쾌하게 키보드를 두들기는 카즈키의 움직임이 눈부셨다. 충혈된 눈 밑에는 시커먼 다크 서클이 드리워져 있고 입은 반쯤 벌린 채 거의 신음에 가까운 숨소리를 내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분명히 살아있다. 몸의 피로로도 가릴 수 없는 선명한 열기를 온몸으로 뿜어내며 경쾌하게 뭔지 모를 일에 몰두하고 있다.

 

지금 몇 시지? 퍼뜩 생각나서 바라본 벽면의 시계는 오전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출근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고, 그 이전에 저 피로에 찌든 얼굴을 보자니 제대로 쉬지도 않은 것 같다. 맙소사, 대체 아침부터 뭐하는 거야? 그보다 어제 퇴근하긴 한 건가?

 

"프로듀서, 설마…?"
"퇴근길에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그대로 돌아왔어요. 자고 일어나면 다 잊어버릴 것 같아서."
"말도 안 돼, 피곤하지도 않아요? 오늘 평일이라고요. 아무리 체력에 자신 있다 해도 이건…."
"체력이나 피로 이전의 문제거든요. 읏차."

 

카에데의 걱정을 깡그리 무시한 채 피로에 찌든 몸이 경쾌하게 움직인다. 드륵드륵 프린터로부터 뱉어진 종이 몇 장을 낚아채서 호치키스로 덜컹 찍어버리는 것으로 웬만한 건 준비 완료. 그렇게 옆에 놓여있던 서류 뭉치들을 한 아름 안아다가 옆구리에 낀 채, 방금 전 프린트한 서류들을 카에데 앞에 불쑥 내민다.

 

"오늘부터 스케줄 변경됐습니다. 한 번 확인하세요."
"변경이요? 분명 한 달 정도는 계속 레슨이라고…."
"그럴 시간 없어요. 자, 어서요."

 

재촉하듯 불쑥불쑥 내밀기만 하는 기세에 떠밀려 스케줄표를 받아든다. 확실히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단조로운 스케줄표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하루하루 날짜를 넘기는 시선이 흘러갈수록, 숙취에 찌들어 있던 카에데의 표정이 점점 기묘하게 굳어져가기 시작했다.

 

"이, 이건…."

 

오전 8시부터 레슨. 12시부터 1시까지 촬영장 이동.
1시부터 3시까지 촬영. 3시부터 4시까지 본사 복귀. 4시부터 6시까지 레슨.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늘 이후 한 달 간의 거의 모든 스케줄이 이런 식으로 꽉 들어차 있다. 당황한 나머지 올려다보는 카에데의 시선을 향해 카즈키가 피로에 찌든 눈을 억지로 찡그러 미소를 지었다. 세상 모든 걸 가진 것 같은 환한 미소. 그야말로 승리자의 미소.

 

"오늘부터 죽었다고 복창하세요, 타카가키 양."

 

그 홀려버릴 듯 눈부신 미소를 두른 채, 카즈키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아주 그냥 죽을 듯이 바빠질 테니까!"

 

 

 

346 프로덕션의 관리부는 여타 기업의 관리부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공연 및 기획 관리, 경영전략 수립, 홍보 및 광고 전략의 실행과 관리 등 관리부의 전반적 업무는 346 프로덕션이라는 공룡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부분들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346에서 진행되는 모든 종류의 비즈니스는 최종적으로 관리부의 손을 거칠 수밖에 없고, 상황이 이렇다보니 관리부라는 부서의 파워는 타 기업 관리부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막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이 관리부를 이끄는 호리구치 켄지(堀口賢司) 부장은 그런 직위로부터 뿜어지는 막강한 파워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현재 사내의 가장 커다란 축으로 여겨지는 두 이사 간의 권력 다툼에서도 완전히 신경을 끄고 있고, 부하들에게도 행여 휘말리는 일이 없도록 엄중하게 주의를 준 뒤였다. 이런 문제에 얽히고 나서 곱게 끝났던 적은 30년 회사 생활 내내 본 적도 없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일은 굳이 만들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 명예 퇴직하는 것이야말로 최고라는 것이 켄지의 신조였고, 지금까지는 그런 신조가 위협받을 일도 없었다.

 

"…저기, 마시로 과장."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까지 뛰어든 이 조그맣고 악랄한 신형 폭탄은 지금껏 30년간 유지된 자신의 그 복지부동 원칙을 철저하게 유린하며 위협하고 있었다. 시뻘건 눈에 부스스한 머리로 대뜸 관리부 문짝을 박차며 미팅을 신청한 이 당돌한 어린 과장의 요구에 켄지는 서서히 쑤셔오기 시작한 머리를 짚으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아, 그게 쉽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든 부탁드리는 겁니다."
"아니, 이봐. 난데없이 이러면 우리도 곤란하지. 벌써 여기저기서 끼워 넣어달라고 날아오는 마당에…."
"주연도 아니고 단역, 아니 엑스트라지 않습니까? 그 정도면 굳이 사무소까지 내려 보낼 필요 없이, 저희 선에서 해결하는 게 최고죠!"

 

그래, 일단 명분이야 그렇지. 하지만 이렇게 원칙 무시하고 날뛰었다가 다나카 이사 라인에 찍혀버렸다간 이상하고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다분하단 말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싼 채 방금 전 카즈키가 들고 온 촬영 스케줄을 바라봤다. 현재 346이 촬영하고 있는 각종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의 스케줄이 일목요연하게 적혀있는 시간표. 그 위에 빨간 색연필로 표시된 약 십 수 개의 강조 표시들이 절로 머리를 괴롭히는 두통을 심화시켰다.

 

"이 수많은 방송들의 단역을… 한 명한테 몰아 달라?“
"불가능할 건 없지 않겠습니까?"

 

관리부의 파워라면 가능한 거 다 알고 있다. 켄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건 어차피 엄살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카즈키의 목소리 또한 전례 없는 흥분을 담고 높아져 있었다.

 

"20분짜리 방송 기준으로 평균 등장 시간은 10초에서 20초, 아무리 길어도 30초. 영화사업부가 배역 인사권을 가진 것도 아니고, 여태까지 관리부에서 하청 사무소에 인력 차출을 요청했던 영역이니 거기서 사람 한 명 채워 넣는 건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야 뭐, 그렇긴 한데…."
"게다가 이미 배역에 대해서도 파악은 끝났습니다. 필요 이상의 연기력이나 경력은 필요없는 배역들이죠. 어차피 장승이나 다름없으니, 비주얼이 화려한 쪽이 훨씬 나을 겁니다. 거기에 대해선 자신 있고요."

 

질보다 양. 굵고 짧은 게 아닌 가늘고 길게.

 

시부야 앞의 대형 전광판을 보고 퍼뜩 떠오른 아이디어의 실체다. 어차피 다나카 라인의 방해가 아니더라도 현재 카에데의 역량으로는 전문적인 예능 영역을 소화하는 건 무리에 가깝다. 토크쇼 출현은 꿈도 못 꾸고 연기력도 아직까지는 미지수. 노력으로 채울 수 있는 영역이지만 다나카 라인이 목을 졸라오는 지금은 시간이 없고, 빠른 시간 동안 인지도를 쌓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찾아낸 게 이거다. 수십 개에 달하는 346 프로덕션의 하청 방송들을 찾아 그 대본과 스케줄을 모조리 뒤져, 카에데가 소화할 수 있는 배역들을 모조리 건져냈다. 그래봐야 갖은 억지를 써도 열 개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지만 어쨌든 이것만 통과되면 거의 모든 방송사에서 황금 시간대에 하루 30여초씩 꾸준하게 등장시킬 수 있다.

 

"부장님. 이건 저희한테 있어서 좋은 기회입니다. 아니, 사실 기회는 이것 밖에 없습니다. 부장님도 지난 번 회의 때 상황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끄응…."
"저희도 그냥은 못 당해줍니다. 부장님, 부장님도 솔직히 다나카 라인이 이래저래 간섭하는 거 부담되시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결단 못 하시면 분명 저 쪽도 얕잡아볼 겁니다. 관리부장입니다. 346에서는 영화사업부에도 꿇리지 않는 부서의 장이시란 말입니다."

 

당연하겠지만 배역은 전부 엑스트라다. 주역이나 비중 있는 단역은 다나카 라인의 영화사업부가 꽉 쥐고 있으니 무리겠지만, 관리부 관할인 엑스트라는 관리부가 휘하 사무소에 연락하여 일괄적으로 인력을 차출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하나의 방송에 행사할 수 있는 배역 인사권이 두 개. 그렇다면 노려볼 곳은 간단하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수많은 단타 등장이야말로 어설픈 단역 하나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 광고의 기본은 노출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최저 비용으로 최고 효율을 발휘해 상품을 노출시키는 것.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지만 이것도 다 저희가 커보려고 하는 전략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방송사의 황금 시간대마다 고정적으로 한 명이 계속 얼굴을 비춘다면?
10초에서 30초, 짧은 시간 동안 거의 매일 얼굴을 내밀어서 계속 시청자에게 이미지를 각인시킨다면?

 

"부장님도 아시겠죠? 아이돌 프로듀스 프로젝트는 주주 선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주주, 그러니까 회장님 선이란 말입니다. 이게 잘못되면 옷 벗어야 하는 건 한 둘이 아닙니다. 저야 그냥 때려치우고 다른 회사 알아보면 된다 치더라도, 연세 있으신 분들은 어쩔 겁니까?"
"어, 으음… 아니, 잠깐. 이야기를 너무 비약시키는 것 같은데 그게…."
"부장님, 이쪽도 필사적입니다. 죽은 사람 살리는 셈 치고 한 번만 들어주시면 저희도 화끈하게…!"
"그러니까 거 내 얘기 좀 들어달라니까! 젊은 사람이 열의 있는 건 좋은데 이래서야…?!"
"그거 뭐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냥 들어주게."

 

콰앙! 그 때 별안간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꼿꼿한 노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팡이 하나를 앞세운 채 풍채 당당한 위압감을 뿜어내는 노안에 깜짝 놀란 켄지와 카즈키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서른 명 보내 달라 할 거 스물아홉 명 보내달라고 하면 되는 건데 그게 뭐 힘든 일이라고 이리저리 빼면서 쩔쩔매나?"
"오, 오오타 이사님…."
"무슨 대단한 돈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깟 숫자 하나 고쳐 쓰는 거 가지고 너무 쩔쩔매는 거 아닌가?“

 

거인 같은 압박감을 발하는 노부오의 기세에 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푸르죽죽하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신이 관리부장이라지만 상대는 이사다. 주주총회 선에서 선임된 사람은 자기도 어쩔 도리가 없고, 그 이전에 노부오의 성질을 거슬러선 자기도 좋을 게 없었다.

 

이 거대한 346을 양분하는 세력의 선두인 것이다. 척져서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물며 노부오는 그 번뜩이는 아이디어만으로 이사 자리를 꿰어 찬 346의 기인이자 거인이다. 만약 거절했다가 뭔가 이상한 해코지를 하려고 들면 도리어 이쪽이 더 피곤하다.

 

"이사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뭐…."

 

결국 여기서는 한 발 물러서는 수밖에 없다. 노부오의 막막한 시선과 카즈키의 기대에 찬 눈빛에 떠밀린 나머지, 켄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가, 감사합니다! 부장님!“
"기분 아니까 너무 그러지 말게. 아무튼 이건 내가 가져가지."

 

방금 전 마시로가 내민 촬영 스케줄표를 집어든 켄지가 비실비실 노부오에게 고개를 숙이고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리 관리부장이라고 한들 이사에게는 당할 수 없다는 새삼스런 현실을 재인식하는 사이, 달칵 문이 닫히기 무섭게 한숨을 푹 내쉰 노부오가 대뜸 쓴웃음을 떠올렸다.

 

"사람은 착한데 야심이 없어 탈이야. 하긴 뭐, 위치가 위치니까 오히려 야심이 없는 게 플러스 요인일 수도 있겠다만."
"감사합니다, 이사님. 안 그래도 잘못 됐을 경우엔 한 번 찾아뵈려 했습니다."
"이제 와서 금칠하려 하지 말게. 처음부터 나 불러낼 생각 만만이었으면서.“

 

하여튼 입으로는 뭔 말을 못할까. 툭툭 내뱉듯 가시돋친 어조였지만 정작 노부오의 눈가에는 인자한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니까 센카와 군이 그러더라고. 자네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고. 그래서 보고를 받아보니, 대충 그림이 나오더구만."
"역시 이사님이라면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거 잘 먹힐지는 모르겠어. 확실히 괜찮은 마케팅이긴 한데, 이거 가능하긴 할까?"

 

드라마 단역에 잔뜩 집어넣어 끊임없이 이미지를 강제시킨다. 괜찮은 아이디어긴 하지만 아이돌 데뷔에 쓸 방법치고는 제법 독특하다. 무대에 백댄서로 등장시키는 것과도 비슷한데, 어쨌든 이건 방송이고 상대는 아이돌이다. 이런 제품 광고하는 방식이 과연 어느 정도의 이미지를 구축할 지는 솔직히 노부오로서도 단언할 수 없었다.

 

"너무 과도한 밀어주기는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어. 자네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상관없습니다. 이미지만 구축하면 되거든요."
"이미지?"
"아니, 이미지조차도 아닙니다. 타카가키 카에데에 대한 호기심. 그것만 각인시키면 끝입니다."

 

일단 잡은 기간은 이번 분기 전부. 그리고 이번 분기 마지막에 이 일련의 아이돌 광고 영업을 끝낼 화룡정점이 기다리고 있다. 이를 꽉 문 카즈키의 눈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딱히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많은 미디어에 노출시켜 이미지를 강제시킵니다. 기간은 이번 분기 한 달이죠. 아마 이사님도 아실 겁니다. 타카가키 양의 뮤직비디오 데뷔, 언제로 잡혀있었죠?"
"분명 이번 분기 마지막… 오호, 과연."
"예, 정체를 드러내는 건 그 때입니다."

 

간접광고(PPL, Product Placement)

 

그 어떤 정보도 공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흘릴 기회를 주지 않는다. 단역으로 끊임없이 얼굴을 내밀며 어떤 식으로든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그게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상관없다. 어차피 대놓고 얼굴 박아놓는 무리한 밀어주기가 아닌 이상에야 크게 거부감 갖는 일도 없을 것이고, 단역으로 끊임없이 얼쩡거리면 어떤 식으로든 인상에는 남기 마련이다.

 

연예인 마케팅에 가끔 사용되곤 하던 신비주의 노선이지만, 이 방법은 오히려 제품 광고에 더 어울린다. 그렇기에 이건 예능 활동이라기보다는 광고, PPL에 가깝다. 다만 이번에는 식품이나 휴대전화가 아닌 사람을 광고한다는 것만이 다를 뿐.

 

"검증은 충분히 됐습니다. 촬영시의 각도, 화면 노출 시간, 방영 시간대.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서 노출 시간을 극대화시켰습니다."
"…과연 그렇군."
"모든 정보는 뮤직비디오 공개 후에 오픈될 예정입니다. 세 달 동안 쌓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타카가키 카에데를 찾는 것도 그 때부터가 될 테죠. 지금 당장 어쩌리라는 건 기대 안 합니다."

 

아무리 바닥부터 시작한다지만 여기는 346이다. 업계 그 자체를 뒤흔드는 대기업, 아니 업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공룡. 모든 방송에 마음껏 온갖 파워를 휘둘러댈 수 있는 이 괴물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면서 우리들이 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거다. 영세 사무소로는 시도할 수 없는, 전 방송사를 포괄하는 전방위 인간 광고.

 

"그깟 예능 안 뛰어도 사람 하나 띄우는 건 일도 아닙니다. 두고 보시죠. 승부는 세 달 후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푸, 하하! 푸하하하하!"

 

결국 듣다 못한 노부오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언뜻 들으면 비웃는 것 같지만 노부오는 이런 걸로 실없이 웃기나 할 만큼 가벼운 남자가 아니다. 흡족한 웃음을 들으며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자니, 비로소 웃음을 멈춘 노부오가 지팡이를 짚은 채 웃음기 섞인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하핫, 과연! 대충 뭐하고 싶은 건지 알겠어!"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해줄 말은 많은데 의미는 없을 거야! 어디 한 번 발악해보게!"

 

이렇게 사람 웃겨주는 친구는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내가 사람을 잘 고르긴 했어.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야. 이런 바보는 실로 오랜만 아닌가. 이 짧은 시간 동안 방송이라는 물건의 심리와 구조를 거기까지 파악하다니.

 

물론 아직은 부족하고 걸리는 게 많은 계획인 것이 현실이지만, 이런 바보짓이라면 한 번 걸려줘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노부오가 카즈키의 얼굴을 향해 지팡이를 휙 치켜들었다.

 

"뭐 걸리적거리는 거 있거든 얘기하게나. 내가 치워줄 수 있는 만큼 치워주지. 뭐, 안 그래도 조만간 자네한테 커다란 걸림돌 하나가 툭 튀어나올 것 같긴 한데."
"걸림돌… 설마."
"오늘 아침에 보고 올렸지 않나? 벌써 임원 선까지 올라갔어. 제 자리만 지키고 있는 멍청한 부장들이라면 모를까, 그 친구라면 아마 자네가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이는지 얼추 눈치 챘을 것 같은데?"

 

폼으로 이사를 단 게 아니니 말이다. 카즈키의 얼굴을 가리키던 지팡이를 슬그머니 문밖으로 옮긴 노부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다나카 그 친구가 급하게 찾는 모양이야. 곧 연락이 가긴 할 건데, 미리 살짝 알려주는 걸세."
"……."
"가서 한 번 제대로 갈아엎고 오게나."

 

기어코 올 것이 왔다. 긴장에 찬 얼굴로 마시로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3주 전의 부장급 회의는 다나카 라인이 자신에게 보낸 경고였다. 먼저 안 굽히고 오면 혼구멍이 날 줄 알라는 경고. 그 경고를 무시한 채 혼자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당황할 거라는 것도 예상 내였고, 일단 움직임을 보인 이상 저쪽에서 먼저 자신을 찾으리라는 것도 그리 새삼스럽지 않은 귀결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요우조가 자신을 불러봤자 새삼스레 긴장이라도 할 리 없었다. 올 게 왔다는 각오를 다진 채 신관 최상층의 집무실 문앞에 섰다. 가볍게 숨을 가다듬고선 똑똑 노크를 하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살그머니 문을 열기 무섭게 싸늘한 한 마디가 대뜸 고막을 관통했다.

 

"내가 충분히 경고했다고 생각하는데."
"…….“
"말귀가 어두운 친구 같지는 않고, 내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거대한 존재감. 일대일로 맞닥뜨리자 더 정신을 아찔하게 위협하는 그 압박감에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사무실로 발을 옮기자 창문만 바라보던 고개가 휙 앞으로 돌아왔다. 찌를 듯이 날카로운 시선이 심장을 난도질내지만 그 고통을 꽉 움켜쥔 채 오히려 눈에 힘을 주고 당당하게 그와 마주한 카즈키의 등골로 땀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디 설명이나 해보게."
"…뭘 말씀이십니까?"
"혼자서 발악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아예 우리랑 척을 지겠다는 건가?"

 

마음이 달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런저런 예의를 싫어하는 건지, 요우조의 본론은 실로 직설적이기 짝이 없었다. 말없이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카즈키의 태도에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가볍게 한숨을 내뱉은 요우조가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시로 과장, 생각을 해보게. 자네가 담당하는 아이돌 프로듀스… 누가 더 도움을 많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음반사업부? 거기는 원래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박쥐니까 상관없어. 이기는 쪽 편을 들게 되는 게 당연해. 하지만 지금 이쪽에는 영화사업부가 붙어있지. 아이돌을 기르게 된다면 언제가 됐든 우리와 함께 발을 맞춰야 해. 다른 부서들은 솔직히 말해 자네들 발목을 잡으면 잡았지, 도움은 줄 수 없다고."

 

아직도 이 회사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으니 좀 직설적으로 얘기해야겠다. 조그만 눈을 부릅뜬 요우조의 눈동자에 입을 꾹 다문 카즈키의 얼굴이 번들거리며 비쳤다.

 

"그 오오타 이사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그런 바보 같은 이유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내가 이사 이전에 인생 선배로서 충고하지. 그 라인은 떨쳐버리게. 어차피 오래 못 갈 라인이야."
"…….“
"누가 실세인지 파악이 안 되는 건가? 그 영감은 어차피 명퇴가 오락가락하는 퇴물이야. 게다가 쓸데없이 고집만 세서 있던 사람도 떨어지고 있지. 조만간 자네도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여전히 카즈키에게선 대답이 없다. 이 친구 말을 잃었나. 조금 여유를 찾은 얼굴로 책상에 기댄 요우조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하고 말을 이었다.

 

"아이돌 프로듀스 계획은 346의 차세대 프로젝트일세. 아마도 향후 346의 주력 사업이 될 가능성이 높아. 이 중요한 사업을 시작부터 이런 멍청한 힘싸움으로 삐걱거리게 하고 싶지는 않네.“
"……."
"기회는 충분히 줬다고 생각하네. 할 말 있나?"

 

꽤나 노골적인 추파다. 조금 뺄 줄 알았는데, 그만큼 몸이 달았다는 건가?

 

하지만 뒤이어 생각해보자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아이돌 프로듀스 프로젝트는 사장과 회장 선에서 기획된 프로젝트다. 이사 둘의 내부 투쟁으로 날려먹었다간 좋은 꼴은 못 보니, 더 크기 전에 본때를 보여줘서 이쪽으로 끌어올 생각을 하는 거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단 내가 적이라는 판단만 든다면, 요우조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회쳐버린 다음 프로젝트를 자기 멋대로 끌고 나갈 거다. 살아남으려면 여기서 무슨 말이든 해서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야 한다. 내심을 보여서도 안 되고, 헛소리를 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능력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능력?"
"어느 라인인가 이런 걸 떠나,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이를 악 문 채 오히려 요우조 앞에 맞서서 목을 쭉 폈다. 뜻밖의 대답이라는 듯 눈매를 일그러뜨리는 요우조를 향해 목울대에 힘을 잔뜩 준 카즈키가 눈을 부릅떴다.

 

"오오타 이사님께 은혜를 입은 것도 맞고, 다나카 이사님이 절 좋게 봐주신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은혜나 이런 문제를 떠난, 저 자신의 문제입니다. 제 능력과 경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제가 한 번 증명해보려는 겁니다.“
"…하!"
"정 힘든 일이 있다면 도움을 청하겠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겁니다. 그게 설령 아무리 터무니없는 일이라 해도 제가 맡은 직무 내에서는 제 최대한의 능력을…."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별안간 터진 웃음소리가 드넓은 사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순간 움찔한 카즈키가 몇 발짝 뒤로 물러나고, 한참이나 터뜨리던 웃음을 뚝 그친 요우지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런 카즈키를 노려봤다.

 

"미꾸라지처럼 잘도 도망 다니긴."
"…!"
"좋아. 생각이 그렇다면 이번 한 번은 속아주지. 그런데, 자네가 한 말이 결국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있는 건가?"

 

그래,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의식하고 뱉은 대답이니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밀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눈앞의 저 괴물을 힘주어 응시했다.

 

"자넨 지금 나와 오오타를 상대로… 아니, 이 346이라는 회사 자체를 상대로 영업을 건 거야. 자네를 팔아보겠다고, 자네의 능력을 증명해보겠다고 말이지."
"…그렇게 되는 셈이군요."
"그런데 이건 정말 불공평한 영업이야. 성공도 실패도 알 수 없고, 이득과 손해 또한 불명확하지. 그럼 이 우습지도 않은 내기를 좀 그럴듯한 영업으로 만들기 위해선 말이야."

 

콰앙!

 

순간 느닷없이 팔을 번쩍 치켜든 요우조가 책상을 후려쳤다. 예상 못한 괴성이 심장이 쿵 떨어질 뻔했던 걸 겨우 가다듬고, 하얗게 질려서 경련하는 얼굴에 온 힘을 집중하는 사이 하얀 이를 드러낸 요우조가 맹수 같은 눈초리로 눈앞의 젊은 과장을 노려봤다.

 

"메리트와 디메리트가 필요해. 성공과 실패의."
"메리트와, 디메리트…."
"물론 메리트는 지금 자네가 설정했어. 지금 하고 있는 그 바보짓의 성공. 그렇다면 만약 그게 실패했을 경우, 자네는 뭐 어쩔 생각인가?“

 

이건 도망치지 못할 줄 알아라. 도망치면 그 순간 뒤통수에 칼을 쑤셔 박아주마.

 

쉽게 말해 내기를 걸자는 거다. 지금 자기 도움마저 뿌리치고 벌이고 있는 이 일련의 발악이 실패할 경우, 넌 뭘 걸 수 있을 거냐. 성공과 실패의 기준점을 잡고 자신에게 이 영업의 결말을 설정하자는 요우조의 협박, 아니 폭압이다. 자기 모가지 정도는 정말 간단하게 쳐 날릴 수 있는 이 회사의 요괴이기에 가능한 강렬하기 짝이 없는 협상 제의다.

 

그의 말마따나 질문의 핵심을 비켜가며 요리조리 잘 도망 다니긴 했다만, 이건 도망칠 수 없을 거다. 이미 물러날 곳은 없다. 등 뒤에는 벽, 눈앞에는 요괴 고양이. 물려죽거나, 아니면 빠져나가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

 

"…3개월 후,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

 

그리고 죽기 싫다면, 이대로 아무 것도 못 하고 저 요괴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싶지 않다면.

 

"3개월 후 타카가키 카에데 양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됩니다. 그 공개 직후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타카가키 양의 이름을 올려놓겠습니다."
"만약 실패할 경우엔?"
"그 때에는…."

 

무슨 짓을 해서든, 무슨 발악을 해서든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그 때는 제가 퇴사하겠습니다."

 

고양이와 쥐의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고양이와 쥐의 싸움이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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