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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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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6, 2012 17:08에 작성됨.

캐릭터는 아마미 하루카.
제시어는 동거입니다.

동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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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떡이는 숨소리. 그건 거친 남자의 숨소리와는 다른 작고도 가는 숨소리였다. 웬만하면 듣기 싫을 것 같은 헐떡이는 소리마저 상대방으로 하여금 다른 감정을 들게 만드는 높고 매끄러운 숨소리. 이런 소리로 숨을 쉬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 목소리도 아름다울 거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겠지만, 그 목소리를 가진 소녀는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저 앞에 있는 상대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이 채 나오지 않는 소리를 낼 뿐이다.
“하으…… 하아…… 프, 프로……”
“하루카……!”
프로듀서라 불린 남자는 하루카의 손목을 꽉 잡았다. 약간 너무 강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프로듀서에겐 그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정도로 프로듀서는 하루카를 간절하게 기다렸으니까. 1초가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제 더 이상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저 행동할 뿐. 그는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잡고 있는 하루카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늦었다, 서두르자!”
“아, 네! 그, 그 전에 프로듀서, 저, 물 좀…….”
“차 타고 가면서! 이미 방송 시작했겠어!”
프로듀서의 손에 이끌려 차를 탄 하루카가 물을 마시는 사이, 프로듀서는 서둘러 차를 급발진시켰다. 급발진, 급제동이 엔진 수명에 치명적이라던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사장님에게 업무용 차를 늘려달라고 해야겠다 다짐하는 프로듀서였다.

하루카의 10번째 지각일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했어, 하루카.”
“치하야~~”
하루카는 헤실헤실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건 하루카보다도 늘 졸려하는 미키와 같은 표정이었다. 늘 밝고 기운찬 하루카이지만, 이런 빡빡한 스케줄에는 지칠 수밖에 없다. 아침 일찍 사무실을 나갔다가 밤이 다 깊어서야 들어온 거니까.
“요즘 바쁜 것 같네.”
“어쩔 수 없지 뭐. 아하하. 그리고 그건 치하야도 마찬가지잖아?”
“나는 노래만 부르는 방송들 위주니까. 오히려 즐거워. 신경 쓸 일도 없이 노래하면 되니까.”
두 사람이 받는 스케줄의 양상은 크게 다르다. 치하야가 받는 건 주로 가요 프로그램이 중심이 되고 그 이외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매우 적다. 반대로 하루카는 양쪽이 비슷한 정도. 하루카에게는 그게 더 성격에 맞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두 프로그램의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가요 프로그램은 자신이 노래할 때, 즉 5분 정도의 시간을 제외하면 신경 써야 할 일은 거의 없다. 반대로 예능 프로그램은 몸을 움직이는 종류라면 말할 것도 없고, 토크쇼라 해도 언제 카메라에 잡힐지 모르니 계속 신경 쓰고 있어야 한다. 소모되는 정신력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같은 프로덕션 동료인 호시이 미키 같은 경우에는 토크쇼 중간이라도 당당하게 졸아버리지만, 그게 또 그림이 된다는 게 미키의 사기 같은 점이고. 게다가 의식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도 졸아도 될 타이밍에 졸고 있다.
“하루카는 많이 힘들 거잖아?”
“아니, 엄청 팔팔한걸! 기운이 넘친다니까!”
“좋겠네, 젊다는 건.”
구석에서 코토리 씨가 중얼거렸지만 두 사람은 전혀 듣지 못 했다.
“하지만 오늘도 지각하고. 요즘 못 일어나고 있는 거 아니야?”
“아하하. 그, 그러려나. 아하하.”
“역시 너무 무리하고 있어.”
“그렇지 않아, 치하야. 나도 이렇게 활동하는 게 정말로 즐거운걸.”
그렇게 말하는 하루카에게 치하야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갔다. 하루카의 얼굴에 밀착하기 직전에 멈춘 치하야는 그대로 하루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하루카는 갑작스런 치하야의 행동에 당황했는지, 치하야?! 하고 말했지만 치하야는 그 얘기를 듣지 않고 하루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다. 만지면 분명 부드러울 것만 같은 피부. 뭔가를 바른 건지 보통보다 약간 붉은 입술. 그리고 빠져들 것만 같은 눈동자. 치하야는 하루카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그대로 손을 뻗어 그 얼굴을 쓰다듬고는 천천히 입을 살짝 벌리고,
“다크서클.”
“에?”
“다크서클이 있어.”
하고 말했다. 그 말에 하루카는 허둥지둥하며 손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치하야의 손에 의해 메이크업이 지워진 눈 밑에는 분명 거무스름한 것이 있었다. 하루카는 거울속의 자신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서, 설마 진짜로 생겼을 줄은 몰랐어…….”
“아이돌한테 있어서 얼굴은 중요하잖아? 신경 써야지.”
서류 작업을 하던 코토리가 기지개를 켜듯이 몸을 뒤로 젖히며 그렇게 말했다. 하루카에게 거꾸로 된 코토리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보다 훨씬 연상인, 이미 성장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났을 그녀의 피부가. 화장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보기에도 확연히 그 나이 대에 비해 좋아 보이는 피부다. 평소의 하루카와 비슷할 정도니까. 그걸 본 하루카는 살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2X살인 지금도 저 정도라면 자신과 같은 나이였을 때는 어땠을까. 하는 마음.
“저도 신경 쓰는걸요~ 매일 비타민도 먹고 있고, 저번에 프로듀서 씨가 준 영양 크림도 바르고 있고요.”
“쯧쯧, 하루카는 지금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다크서클이 문제인 거잖아? 뭐, 비타민도 좋긴 하지만 역시 다크서클에는 충분한 수면이 제일 좋다니까.”
“충분한 수면 말이죠…….”
“지각하는 것도 잠을 충분히 못 자서 그런 거 아냐?”
“그런 걸까…….”
지금 하루카에게 있어서 가장 먼 것이 충분한 수면이다. 그건 어쩔 수가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케줄이 있고, 트레이닝도 꼬박꼬박 하고 있고, 거기에 학교 공부까지 해야 한다.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계속 학교를 빠지는 건 인정되지만 성적까지 보장해주는 건 아니니까. 적어도 시험만은 잘 봐야 한다.
“코토리 씨는 피부가 굉장히 좋으시네요……. 부럽다.”
“하루카도 참, 당연히 그래야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주름 생기지 말라고 마사지도 하고, 거칠어 보일까봐 각질 제거도 하고, 영양 크림에 팩에……. 우후후, 이렇게까지 안 하면 피부가 유지가 안 될 거라는 게…….”
“코, 코토리 씨 무섭네…….”
“응, 그렇네.”
“나도 이제 아이돌도 아니니까 이렇게 까지 할 필요 없나 싶기도 하지만 말이지……. 벌써 2X살인데 아직 남자 한 번 못 만나고……. 절박해질 수밖에 없잖아……. 후후후……. 알고 있다고. 딱히 남자를 꼭 만나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건……. 요즘에는 혼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도 좋다고……. 하지만 못 만나는 거랑 안 만나는 건 다르고……. 만나보고 남자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말이지……. 후후…….”
두 사람에게는 뒷부분은 들리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뭔가를 중얼거리며 어두운 표정으로 웃는 코토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코토리 입장에서는 관리를 잘 못하는데도 저 정도인 하루카나 치하야가 부러울 뿐이지만.
“하지만 하루카. 지금 상황에서 바뀌지 않는다면 상황은 계속 나빠질 거야.”
“그럴까…….”
하루카는 탁자 위에 있던 잡지를 넘기면서 그렇게 말했다. 흘려듣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치하야도 그럴 거라고 생각 하는지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어이, 하루카. 슬슬 막차 시간 아니야?”
“아, 맞아! 고마워요, 프로듀서 씨! 프로듀서 씨는 안 가시나요?”
“좀 봐야할 서류가 있어서 늦게 갈 것 같아. 데려다줄까?”
“아니, 괜찮아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내일 봬요, 프로듀서 씨~!”
“그럼 저도 슬슬…….”
“그래, 다들 내일 봐.”
하루카와 치하야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사무소를 나왔다. 어느덧 싸늘해진 공기가 두 사람의 피부를 감싼다. 귀뚤귀뚤 우는 소리가 가로수 밑 화단에서 들려오고 있다. 그런 풀벌레 우는 소리를 배경으로 사람들은 모두들 바쁜 듯이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거나 벌써부터 한잔 했는지 비틀비틀 걸어가며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그런 도시의 흔하디흔한 초가을의 풍경 속을 두 사람은 걸어가고 있었다. 다만 복장은 조금 전과는 약간 달랐다. 두 사람 모두 마치 커플 티처럼 입고 있던 후드티의 후드로 머리를 덮고 있다. 검은 후드티를 입은 치하야는 거기에 하얀 캡까지 눌러쓰고 있고 하루카는 가방에서 꺼낸 안경을 쓰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입고 있는 청바지와 함께 어딘지 모르게 편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지만, 적어도 첫눈에 하루카와 치하야라는 것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으으~ 이제 오늘도 끝이네~”
“그렇네.”
“치하야. 그렇게 하고 있으면 덥지 않아?”
“여름에는 좀 더웠지만 지금은 괜찮아. 나도 하루카처럼 안경을 사는 게 좋을까?”
“그, 글쎄……. 그보다 여름에도 그렇게 눌러 쓰고 다닌 건 대단한 것 같은데. 아하하.”
“참으면 되니까.”
치하야는 그 한마디로 간단하게 얘기를 끝내버린다. 누구라도 결코 그렇게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문제를. 프로듀서라면 열사병이라도 걸리면 안 된다며 말렸을 것이고 코토리라면 탈모나 비듬, 피지 등의 문제를 얘기하고 못 하게 했겠지. 그리고 아마 미키라면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행동양식이 전혀 다른 미키가 치하야에 대해 그런 존경을 보내는 건 어떻게 보면 신기한 일이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이렇게 감추고 다니지 않아도 됐는데 말이지.”
“그랬지. 그래도 이렇게 바빠진 거 좋지 않아?”
“물론 좋아. 노래를 부를 기회도 좀 더 늘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점은 좀 하루카는 불편하지 않을까 해서.”
“내가? 왜?”
“패션 잡지도 자주 보고 있고. 역시 예쁘게 입고 돌아다니고 싶지 않아?”
“그런 거 아냐~ 어차피 나, 치하야처럼 늘씬하지도 않고 미키처럼 몸매 좋거나 예쁘지도 않고.”
치하야는 그 말을 듣자 고개를 살짝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큿.
그걸 본 하루카는 하하, 하고 웃으면서 얘기를 돌린다.
“치하야는 집이 근처지. 좋겠다~”
“하루카는 지금 집에 가면 바로 자는 거야?”
“물론 그렇게! 하고 싶긴 한데…… 아직 공부도 덜 했으니까. 그리고 신곡 가사도 아직 다 못 외웠고…….”
“하루카, 요즘 너무 피곤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루 정도는 일찍 자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야~ 다들 이 정도는 하잖아?”
“그럴까……. 집이라도 가깝다면 좋을 텐데. 그럼 적어도 잠은 빨리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루카의 집에서 사무소까지의 거리는 2시간 정도이다. 이걸 왕복으로는 4시간. 그 정도의 시간을 하루카는 통근에 쓰고 있다. 물론 그 4시간이 무익한 것은 아니다. 신곡 가사를 외운다거나 단어장을 들고 다니며 보거나 하지만 집이나 연습실에서 하는 것과는 효율이 다르다.
무엇보다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이라는 그 시간은 새벽과 밤. 그러면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건 수면이다. 하루카가 수면 부족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나 하나 때문에 이사할 수도 없으니까. 아직은 할 만 하니까.”
“그렇겠지. 혼자 나와 사는 건 무리이려나…….”
“나는 무리~ 분명히 외로움 탈걸. 헤헤.”
“그럴까. 나랑 같이 산다면 좋을 텐데.”
치하야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걸어가다 문득 멈춰서 돌아봤다. 하루카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치하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약간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안경테가 붉어서 그게 비쳤다는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치하야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왜 그래 하루카?”
“괜찮아 그거?!”
“으, 응? 무슨 얘기야?”
“같이 산다고 한 거.
“응? 난 하루카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와아~! 고마워 치하야!”
그렇게 외치며 하루카는 치하야의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누가 봐도 명확한 환희. 아무런 꾸밈없는 기쁨으로 행동하는 모습. 만면에 가득한 미소. 그 모습을 본 치하야는 자연스레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본인이 의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즐거워하는 게 분명했다.
“그럼 부모님한테 물어봐야겠다~ 아, 나 이제 가볼게. 내일 봐 치하야~!”
“아, 응. 내일 봐.”
하루카는 개찰구 안에 들어가서도 뒤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다가 넘어진다. 깜짝 놀란 치하야가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 전에 이미 하루카는 일어나서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플랫폼으로 올라가버렸다.
정말이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선 치하야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모두들 지나가면서, 아니면 아예 멈춰선 채로 치하야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일행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까지가 치하야의 귀에도 들려왔다. 그 목소리들은 치하야의 이름을 소곤거리고 있다.
순간 치하야의 머릿속을 바로 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고마워 치하야~!라며 크게 외치던 하루카의 해맑은 얼굴. 내일 봐 치하야~!라며 외치며 승강장으로 가던 하루카의 얼굴. 그걸 떠올린 순간 치하야는 바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 자리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가슴속으로 하루카……! 하며 외치면서.
어느 초가을 밤의 일이었다.

하루카는 치하야의 집에 와있었다. 하루카가 실례합니다~ 하면서 들어오자 치하야는 차를 내오겠다며 주방에 갔다. 아무것도 없는 휑뎅그레한 집을 하루카는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훑어봤다. 군데군데 박스들이 쌓여있는 게 마치 이사 직후의 집으로 보인다. 벌써 여기에 살게 된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사람이 사는 느낌이 나지 않는 살풍경한 방이다. 집이라기보다 잠깐 쉬어가는 휴게실이라는 이미지. 그런 가운데 딱 하나 사람 사는 곳처럼 만드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밝게 웃는 두 어린아이의 사진. 누나와 동생을 찍은 그 사진만이 유일하게 인간미를 풍기는 물건이었다.
“그건 그렇고 용케도 허락 받았네. 의외였어.”
“아, 나와서 사는 거?”
“응. 하루카의 부모님이라면 왠지 허락 안 할 것 같았거든.”
“처음에는 그러셨는데, 치하야랑 같이 살 거라고 하니까 모두들 괜찮다고 하셨어!”
“에, 그, 그래?”
“신뢰 받고 있는 거야, 치하야!”
“그렇구나.”
치하야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하루카는 그걸 보고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치하야. 그럼 우리 같은 방 쓰면 되는 거야?”
“응? 일단 방에 공간은 남으니까 그러면 되지 않을까. 하루카가 방 따로 쓰고 싶다고 하면 창고로 쓰고 있는 곳이 있기는 한데 거기서 집을 빼고…….”
“아, 아니야. 나도 그냥 같이 쓸게.”
복도에도 이곳저곳, 방에도 이곳저곳에 박스가 쌓여있다. 창고에 있는 짐들도 아마 여전히 박스로 싸뒀을 거고, 그걸 뺀다면 복도와 거실이 대참사다. 살풍경한 건 지금도 충분한데 그런 식이 된다면 살풍경이 아니라 피난민 같이 될 거다.
“그래? 그럼 침대를 이쪽에 하나 더 놓고……. 아니면 좀 더 넓은 침대를 하나 사서 같이 써도 될 것 같아.”
“더, 더블베드?! 그래도 되는 거야? 치하야!”
“으, 응. 왜 그래?”
“으응, 아니야. 나 어릴 때부터 누구랑 한 방 쓰거나 같이 자거나 한 적 없었으니까. 헤헤, 두근거리네!”
“그럼 가구 보러 갈까? 일단 필요한 게 침대랑 옷장이랑……. 아, 책상도…….”
“책상은 괜찮아~ 마루에 탁자 있잖아? 그걸로 같이 쓰면 되니까.”
치하야는 잠시 하루카의 집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하루카의 방에는 분명 책상도, 책꽂이도, 서랍도, 스탠드도 있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 인형 같은 것도 잔뜩 있었다. 그런 하루카의 모습이 치하야는 순수하게 부러웠다. 자신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버린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쓸데없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런 걸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건 바람직하고 좋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비록 지금 하루카가 자신을 배려해주는 건 알고 있지만 가급적이면 하루카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
“그럼 책꽂이랑 서랍장만 사자. 크지 않은 거라면 큰 문제는 없을 테니까.”
“으음, 그러려나. 그래, 그렇게 하자~ 지금 보러 갈래?”
“지금?”
치하야는 그 말을 듣고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게 보였다. 딱히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다. 치하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집세랑 생활비 말인데. 치하야가 보증금이랑 계약금은 다 냈으니까 집세나 생활비는 가급적 내가…….”
“절반씩. 어차피 보증금은 나갈 때 돌려받을 거니까.”
“에……. 응, 알았어!”
치하야와 하루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하루카의 모습을 치하야는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루카는 얼굴에 뭐가 묻었어? 하며 얼굴을 만지작거린다. 그 행동에 역시 다른 기색은 없고, 밝고 활기찬 평소의 하루카의 모습 그대로였다.
“으응, 아니야.”
하루카와 같이 살게 되면 이 활기를 나누어받을 수 있을까? 그러면 나도 뭔가 변할까? 치하야는 그렇게 생각했다.
“맞아, 인형도 살까?”
“에, 치하야. 그래도 괜찮아?”
“응,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초가을 저녁의 일이었다.

“치하야. 같이 목욕할래?”
짐 정리가 끝나고 물을 받아놓은 치하야에게 하루카는 그렇게 말했다. 치하야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말이 없었다. 없었지만 그래도 그 행동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겉으로도 뻔히 보일 정도였다. 제일 처음에는 무반응인 채로 멍하니 있다가 그 순간이 지나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고 이어서 살짝 얼굴을 붉혔다가 그리고 가슴 앞에서 주먹을 꼭 쥐고 한마디.
큿.
그리고 약간 굳은 표정으로 하루카를 향해서 입을 연 그 순간,
“치하야는, 싫은 거야?”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게…….”
“난, 치하야랑 목욕하고 싶은데.”
“에, 그게…….”
“신선하잖아? 그리고 바다 갔을 때도 같이 목욕했었고.”
“그, 그랬지.”
“그러니까 같이 하자. 응?”
치하야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루카는 기쁘게 웃으면서 치하야의 손을 잡아끌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치하야는 왠지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게 썩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함께 욕실에 들어갔다.
샤워기로 몸에 물을 끼얹고 머리를 씻는 동안 치하야는 하루카에게 등만을 보이고 있었다. 하루카는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치하야가 곁눈질로 하루카를, 정확히는 하루카의 가슴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두 사람은 씻는 걸 끝마치고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두 사람이 들어가기엔 조금 비좁은 욕조라서 둘 다 웅크린 채로 들어갔다. 하루카는 내심 뭔가 좀 아닌데,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치하야. 내 위로 올라올래?”
“아니.”
빠르게 거절당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하루카는 아하하, 하고 웃으면서 약간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치하야는
“내가 더 키가 크니까 하루카가 올라와.”
“에……. 응!”
하루카는 알기 쉽게 기뻐하는 표정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치하야가 다리를 뻗는 걸 기다렸다. 치하야가 다리를 내리는 게 하루카의 눈에는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눈처럼 새하얗고 눈부신 다리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내려갔다. 턱에 닿던 무릎도 천천히 내려가서 욕조 바닥을 향했다. 그리고 다리가 내려감에 따라 그 뒤에 가려져 있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쇄골 밑에 있는 그것은 다리보다도 하얀, 설백보다 하얀 순백색을 띄고 있었다. 보기에도 부드러워 보이는 그것은 물에 젖어 특유의 느낌을 내고 있었다. 하루카는 그것을 보고
“타월이네.”
“응?”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하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치하야의 위에 앉아서 몸을 기댔다. 등에는 물에 젖은 타월의 감촉이 닿고 있었다.
굳이 가슴을 봐야 하는 건 아니다. 아니지만, 저렇게나 가리고 있으니까 신경 쓰이는 게 사람 마음이다. 하루카는 그런 마음에 충실하게 움직이는 것뿐이다. 반대로 치하야는 아무래도 작다는 게 콤플렉스니까 가리고 싶어지는 거다. 바다에 갔을 때는 아즈사나 타카네라는 강대한 산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덜 보였지만, 이렇게 둘만 있으니 하루카도 평균 이상으로 크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지금 이 순간이 기분 좋다는 건 같았다. 둘 다 따뜻한 물에 잠겨서 느긋하게 있었다.
“저기, 치하야.”
“응?”
“역시 가슴 신경 쓰여?”
“큿.”
치하야는 대답 대신 순간적으로 짧게 혀를 차는 듯한 소리를 냈다. 본인도 해놓고 당황한 것 같았지만 그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아, 아니. 딱히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니지만…….”
“아직 성장기니까~ 괜찮지 않을까?”
“비슷한 얘기 했던 것 같은데. 이 시점까지 이렇게나 없으면 더 이상 자랄 일이 없다고 생각해.”
“포, 포기해버렸구나.”
하루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한마디.
“주무르면 커진다던데.”
“응?”
“치하야. 주물러줄까?”
“아, 아니. 괜찮아.”
“아, 내가 말실수를 했네. 주무르게 해주세요.”
“그게 무슨 애기야 대체……. 그리고 주물러도 효과 없으니까.”
“에?”
“응?”
당황하는 것 같은 하루카의 반응에 치하야는 무슨 일이지 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지금 한 대화를 다시 돌이켜봤다. 주물러줄까?→아니.→주무르게 해주세요.→그런 거 효과 없어. 아무 문제도 없다. 치하야는 그렇게 생각했다.
치하야는.
“치하야……. 해봤구나.”
“윽?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상대는 누구였어?”
“상대가 있을 리가 없잖아?! 혼자 한 거야!”
“혼자서 가슴을 열심히……. 그 정도로 절박했던 거네.”
“읏, 하루카 비켜줘.”
“싫어~”
하루카는 치하야 위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치하야를 마주 본 채로 누웠다. 그리고 치하야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치하야는 뜻밖의 행동에 어떻게 대처하지 못하고 그냥 가만히 멈춰있었다.
“하루카?”
“이렇게 있으니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
“…….”
“좋다…….”
눈을 기대고 가만히 안겨있는 하루카의 머리를 살짝 안으면서 치하야도 눈을 감았다. 확실히 이렇게 느긋하게 있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는 치하야였다.
“앞으로 같이 목욕 자주 하자.”
“싫어, 피곤해.”
“아하하, 앞으로 장난 안 칠 테니까. 응?”
동거하게 된 첫 날의 일이었다.

“슬슬 잘까?”
“응, 시간도 늦었으니까.”
하루카는 풀고 있던 문제집과 공책을 덮고, 치하야는 워크맨과 이어진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하루카는 학교 공부, 치하야는 신곡을 확실히 익히기 위해 같은 노래를 벌써 한 시간째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부르는 것도 아니고 듣기만 계속 한다는 건 의외로 상당히 정신적으로 지치는 일이었지만 치하야는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두 사람은 이미 잘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곧장 불을 끄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치하야가 창가 쪽, 하루카가 바깥쪽에.
“잘 자, 치하야.”
“응, 하루카도 잘 자.”
그렇게 말하며 치하야는 눈을 감았다. 하루카도 잠시 눈을 감고 있었지만 곧 눈이 떠졌다.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잠이 들겠지, 하고 생각하며 가만히 천장을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으니 이상하게도 평소와 달리 감각이 예민해지는 느낌이었다. 서랍 위에 놓인 시계의 초침 소리가 평소보다 귀에 더 잘 들어왔다. 째깍, 째깍, 째깍, 째각. 살짝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자 어느새 30분이 지나있었다. 고개를 다시 위로 향하자 창밖에 떠있는 보름달이 눈에 들어왔다. 보름달을 바라보던 하루카의 시선은 곧 달빛이 떨어지는 치하야의 옆얼굴로 향했다.
달빛을 받아 더 하얗게 빛나는 피부가 눈부셨다. 커다란 눈은 지금은 꼭 감겨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코는 오뚝하게 솟아있다. 입은 꽉 다문 채로 쉬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하루카는 치하야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혹시라도 깰까 싶어 차마 만지지는 않았다. 그저 나지막이 한마디.
“치하야…….”
“왜?”
“엑!? 아, 안 자고 있었어?”
“응, 왠지 잠이 안 와서.”
치하야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떴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하루카를 향했다.
“우연이네, 나도 왠지 잠이 안 오거든.”
“그래.”
치하야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얘기를 귀찮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하루카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아, 이거 왠지 부끄럽네. 하루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곡 연습은 잘 돼가?”
“응, 다음 주면 녹음인데 아마 그 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소리 내서 노래해도 되는데.”
“안 돼, 하루카 공부하는데 방해될 거고. 그리고 옆집도 있으니까.”
“그렇구나. 난 치하야가 노래 부르는 거 정말 좋아해.”
“고마워, 후후.”
“오늘처럼 노래 들으면서 콧노래로 따라 부르는 것도 듣기 좋아.”
“그래? 다행이네.”
다시 대화가 끊긴다. 치하야는 미소를 지은 하루카를 바라보다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나 좋아해?”
“응. 좋아해.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같이 살거나 하지 않는걸.”
“어떤 점이? 역시 노래?”
“노래도 있지만. 치하야가 좋아. 진지하고 성실한 성격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일직선인 점이.”
“그래?”
“그리고 요즘 들어서 웃게 된 것도 있고.”
“나, 잘 웃던가?”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서 가끔 웃는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오고 예쁘게 보여.”
“그렇구나.”
그런 얘기를 들은 치하야는 미소를 지었다. 본인은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건 하루카가 정말로 좋아하는 미소였다.
“그럼 치하야는 나 좋아해?”
“응.”
“왜?”
“항상 밝고, 주변 사람들을 끌어당기니까. 의지가 되니까.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도와준 사람이니까.”
“그렇구나~”
“그리고, 가끔 실수하니까 눈을 뗄 수가 없는 점도.”
그건 단점이잖아~ 하며 하루카가 화를 냈다. 화라고 해도 칭얼대는 정도라 치하야는 웃으며 넘겼다. 그리고 다시 대화가 없어지고 치하야는 다시 눈을 감았다.
“치하야, 자?”
“잠들 뻔했어.”
“미안.”
“왜 그래? 잠이 잘 안 와?”
“응, 좀 그렇네.”
“하루카 잠깐 머리 좀 들어볼래?.”
치하야의 말에 하루카는 순순히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러자 치하야는 하루카의 머리 밑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이른바 팔베개라는 것이었다.
“치하야?”
“어릴 때 유우랑 같이 자거나 할 때 이렇게 했었거든. 그럼 유우가 빨리 잠들었던 기억이 나서…….”
“불편하지 않아?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팔 저릴텐데.”
“괜찮아. 조금 그리운 느낌도 들어서.”
“그렇구나……. 잘 자, 치하야.”
“응, 잘 자.”
동거를 시작하고 일주일이 되던 날의 일이었다.

“다녀오셨어요~ 밥부터? 목욕부터? 아니면 나. 부. 터~♡”
“오늘은 일찍 끝난 모양이네, 하루카.”
“다녀오셨어요~ 밥부터? 목욕부터? 아니면 나. 부. 터~♡”
“나부터에는 물음표가 없다는 게 그쪽으로 해달라는 얘기는 아니지?”
“다녀오셨어요~ 밥부터? 목욕부터? 아니면 나. 부. 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치하야의 눈앞에는 그런 광경이 있었다. 하루카는 현관 앞에 앞치마를 입은 채로 무릎 꿇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는 하루카의 얼굴을 보고 치하야는 멍하니 있었다. 같은 대사를 계속 반복하고 있는데 대답해주길 바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럼 하루카부터 할까?”
“헤헷, 사실 오늘 저녁 내가 미리……. 엣?!”
“하루카부터 할게.”
치하야는 그렇게 말하며 하루카에게 손을 뻗었다. 하루카는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뿐이다. 치하야가 하루카의 어깨를 잡아 일으킬 때가 되어서야 하루카는 제정신이 들었는지 흠칫 뒤로 물러선다.
“치, 치하야? 왠지 눈이 무서운데, 아하하…….”
“그런가? 난 잘 모르겠어. 하루카의 눈동자가 조금 더 가까이에 있으면 내가 비춰보일 것 같은데.”
“치하야~ 아까 그건 농담이야?”
“응, 알고 있어.”
치하야에게서 뒷걸음질치던 하루카는 어느새 복도를 전부 지나 방까지 도착해있었다. 그대로 더 뒤로 가면 식탁이라서 더 이상 갈 수도 없다. 하루카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머릿속으로 필사적으로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하루카.”
치하야가 다시 한 번 하루카의 어깨를 잡더니 침대를 향해 돌리고 그대로 쓰러뜨렸다. 하루카는 꺅, 하고 작게 비명을 지르며 침대위에 눕게 되었다. 깜짝 놀라 감았던 눈을 뜨자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치하야의 얼굴이 가까이에 보였다. 치하야는 하루카의 몸을 완전히 덮듯이 엎드려있다. 다리도 치하야의 다리에 감싸여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치, 치하야……. 농담이라니까?”
“하지만 하루카가 그런 제안을 해줬으니 기쁘게 받아들여야지.”
“으, 치, 치하야…….”
“하루카. 눈을 감아.”
하루카는 순식간에 증기가 끓어오르는 듯한 기세로 머리에 피가 올랐다.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단숨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어쩌지? 어라, 농담이었는데? 치하야, 예쁘다. 이대로 당해버리는 거야? 치하야 캐릭터 바뀌었어~! 그 이외에도 수많은 생각들이 차올라 어찌할 수 없던 하루카는 결과적으로 치하야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치하야가 몸을 움직이는 듯한 천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카는 걱정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대에 차서 눈꺼풀이 부서져라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저녁은 스파게티인 모양이네.”
“에?”
눈을 뜨자 치하야는 어느새 하루카 위에 없고 주방에서 레모네이드와 잔을 꺼내고 있었다. 하루카는 순간적인 상황변화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당연하게도 폭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 하~ 야~!”
“무슨 일이야 하루카?”
“무슨 일이야? 가 아니야! 난 분명히 당해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각오하고 있었는데!”
하루카는 치하야한테 울상을 지으며 주먹으로 때렸다. 당연하지만 세게 때리는 건 아니다. 하루카의 그런 모습에 치하야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마디. 툭 던지듯이 말했다.
“각오하고 있었다는 건 내가 하루카를 받아가도 괜찮다는 거야?”
“에? 아니, 아니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다는 건 아니지만 치하야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한 것뿐이고 치하야가 좋다면…….”
“슬슬 저녁 먹자.”
“정말, 치하야~!”
치하야는 하루카를 두고 먼저 자리에 앉았다. 스파게티 면은 어느새 불어있었다. 치하야는 한 입 먹고는
“불었어.”
“정말, 치하야가 그런 짓 하니까 그렇잖아~!”
“그렇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장난을 시작한 하루카 때문이지만.”
“그, 그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만…….”
“뭐, 그래도.”
치하야는 맞은편에 앉는 하루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맛있어.”
“말뿐이라도 고마워……. 아하하……. 다 식었고.”
“아니야. 정말로, 맛있어. 하루카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으, 그렇게 말하면 부끄러운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루카는 기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치하야도 하루카를 마주 보며 미소지었다.
동거를 시작하고 2주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다. 치하야는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종이에는 신곡의 가사와 안무가 그러져있다. 낮에도 연습했던 안무지만 복습해두는 거다. 실제로 몸을 움직여서 하는 게 제일이겠지만 그랬다간 아랫집에 피해를 주는 걸 테니까 그럴 수는 없고.
한편 하루카는 그런 치하야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펴놓은 문제집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는 상태. 그저 치하야를 바라보면서 으읏, 아냐, 그렇지만 하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 그러다가 못 참겠다는 듯이 입을 열고
“저기, 치하야. 역시 저녁은 먹는 편이…….”
“미안, 집중할 수 있게 해줄래?”
“아, 응.”
치하야의 반응에 하루카는 바로 수긍하고 자기도 다시 문제집을 향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 손이 문제를 푸는 일은 없었다.
치하야가 제대로 된 밥을 먹지 않게 된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그동안 치하야는 사무실에서 오는 길에 있는 편의점에서 주먹밥이나 빵 같은 걸 하나 사서 먹고 있다. 그러다가 오늘에 이르러서는 아예 저녁을 굶기에 이른 것이다.
“치하야, 많이 힘든 것 같네.”
“힘들지 않아. 나한테는 이게 제일 중요한 일이니까.”
“그래……. 하지만 계속 안 먹으면 가슴 자라지 않을 거야~?”
“큿…….”
“그냥 있는 반찬으로 간단하게 차려줄 테니까 먹을래?”
“……. 응.”
치하야의 말에 하루카는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간다. 남아있는 된장국에 불을 올리고 계란말이와 밑반찬을 꺼내서 그릇에 옮겨 담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치하야는 여전히 계속 신곡 연습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치하야의 모습을 보고 하루카는 작게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루카가 고개를 돌린 직후에 치하야 역시 부엌에 있는 하루카를 바라봤다. 자신을 위해 열심인 하루카의 모습을. 그걸 본 치하야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동거를 시작하고 3주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집중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그, 그렇지만 나는 치하야가 걱정돼서…….”
“그렇게 말하는 하루카는 일보다 내 쪽을 더 신경 쓰고 있잖아. 일은 괜찮은 거야?”
“다, 당연하지. 문제없는걸!”
“프로듀서의 말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은 방 한가운데에 서서 얘기하고 있었다. 하루카는 괴로운 표정으로 치하야를 바라보고, 치하야는 차가운, 그러나 확실히 기분 나빠하는 표정이었다.
일의 발단은 단순했다. 늘 그렇듯이 치하야가 또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았고 하루카가 그걸 챙겨주려고 한 것.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치하야가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이다. 적어도 하루카가 생각하기에는. 하지만 치하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카는 기본적으로 정이 많다. 친근하다. 붙임성이 좋다. 늘 먼저 말을 걸어준다. 그래서,
그래서. 방해된다. 귀찮다.
“얼마 전에 했던 방송에서도 대본 다 못 외웠었지? 애드립으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왜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는 거야? 전혀 다른 얘기잖아?”
“하루카가 나한테 너무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야.”
“하지만 치하야가 너무 자신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만해!”
“에, 치하야…….”
“난 충분히 나 자신을 위해 행동하고 있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중요한 일이 있으면 집중하고, 그리고 잘못되지 않았어. 그런데, 하루카는 자기 일까지 제쳐두고 나한테 신경 쓰잖아.”
“그, 그렇지만…….”
“그래서, 집중할 수가 없어.”
하루카의 눈이 찌푸려진다. 웃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절대로 헷갈릴 수 없는 표정. 하루카는 오른손을 들어 황급히 눈을 가리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리고
“미안, 나 오늘은 집에 돌아가서 잘 테니까.”
겉옷조차도 챙기지 않고 변장용 모자와 안경만을 들고 집에서 뛰쳐나갔다. 바깥으로 나가자 찬 공기가 하루카의 피부에 스며들었지만 하루카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모자와 안경을 쓴 채로 전철역을 향해 달려갔다.
잘해주고 싶었다. 친구니까. 잘해주고 싶었다. 소중하니까. 잘해주고 싶었다. 좋아하니까. 그래서 노력했는데.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지 않는 치하야를 위해서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주변에서는 몇몇이 하루카를 알아보고 쳐다보고 있었지만 하루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신경 쓸 수 없었다.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들리지도 않았다. 무슨 정신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하루카는 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치하야는 현관 앞에서 쪼그려 앉아있었다. 미안해 하루카. 그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어. 하고 말하면서. 하루카가 자신을 위해서 그런다는 건 치하야도 잘 알고 있다. 싸구려 자기만족과는 다른 순수한 호의. 치하야도 하루카에 대해서는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그랬는데, 왜 이렇게 화를 낸 걸까. 왜 귀찮다고 느낀 걸까.
실제로, 귀찮기는 했지만.
“나, 바보구나.”
동거를 시작하고 4주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하루카, 빠뜨린 건 없는 거지?”
“으음~ 없지 않을까? 아마도.”
하루카는 커다란 캐리어백을 옆에 두고 치하야와 얘기를 하고 있다. 둘 다 웃고 있지만 어딘지 어색했다. 그리고 서로가 그걸 이미 잘 느끼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동거가 끝나는 이유가 싸움이었으니 어색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겠지.
“정말 가구 안 가져가도 돼?”
“응, 내 방에 놓아둘 곳도 없는걸. 치하야가 써줘.”
“하다못해 인형이라도…….”
“아니, 치하야한테 주고 싶어.”
“그래…….”
두 사람은 말없이 잠깐 서있었다.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윽고 하루카가 헤헤 하고 웃으면서 캐리어백을 잡았다. 이제 정말, 가려는 거겠지.
“그럼 치하야. 나 이만 가볼테니까. 내일 사무소에서 봐.”
“응.”
“그럼 잘 있어, 치하야.”
“하…….”
치하야는 닫히는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차마 잡을 수 없었다. 자기가 쫓아낸 사람을 자기가 부를 수는 없었으니까. 그 문이 닫히는 걸 끝까지 보지도 못한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입술을 꽉 물고 발치에 떨어지는 눈물을 쫓으며 나지막이 하루카, 하고 중얼거렸다. 그런 치하야의 귀에 들린 소리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니라,
“왜, 치하야?”
“에?”
아끼는 친구의 목소리였다.
“하루카. 간 거 아니었어?”
“치하야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아서. 가려다가 말았는데. 울고 있었구나…….”
“아, 아니야!”
치하야는 황급히 얼굴을 닦으면서 그렇게 둘러댔다. 그런 치하야의 모습을 하루카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치하야는 하루카가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거라고 알아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도 될지 알 수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기, 치하야.”
“응?”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거 알아?”
“응?”
“나도 들은 얘기인데 말이지, 추위에 떨던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몸을 기대서 온기를 나누는 거야. 그런데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너무 멀어지면 추워진대.”
하루카의 말에 치하야는 멍하니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 수가 없었으니까.
“나도 치하야도, 서로의 가시에 찔린 거네. 그래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네.”
“아니야, 하루카는 잘못 같은 건…….”
“아니야. 나도 분명, 잘못했는걸.”
관심이, 호의가, 애정이, 아끼는 마음이 가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하루카는 몰랐다. 그리고 서로 찌른 것이다. 너무 가까웠으니까.
“그러니까, 최대한 따뜻하면서도 찔리지 않을 거리를 찾고 싶어. 물론 치하야가 괜찮다면. 아하하.”
“난…….”
“……. 난 이제 가볼게. 걱정하지 마, 계속 볼 거잖아?”
“응.”
“내일 사무소에서…….”
“……테니까.”
“응?”
치하야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하루카는 말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치하야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외쳤다.
“버리지 않을 테니까! 인형. 침대도 안 바꿀 테니까. 그러니까…….”
“치하야.”
하루카는 치하야를 꼭 껴안았다. 치하야는 하루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하루카는 가슴속에서 상처를 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응. 가끔 놀러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나 여전히 치하야를 좋아하니까.”
“나도 하루카, 좋아하니까.”
상처를 줘버렸다. 서로가 그렇게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데도, 정말로 아끼는 친구인데도. 정도를 지나쳐버렸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시작하자. 지금은 다시 예전만큼의 거리로 돌아갈 거고 잠시 서먹서먹할지도 모르지만, 이번에는 상처주지 않게 조금씩 거리를 좁혀 나가보자.
하루카는 그런 마음을 담아 치하야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줬다.
동거하기로 하고 5주째가 되던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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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사이트에서 열린 아이마스 단편제에 냈던 팬픽입니다.
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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