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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타카] 검은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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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07, 2015 16:17에 작성됨.

 

   치하야는 눈물이 나오는 게 멈추지 않아 너무나 분했다. 치하야의 모든 것을 뒤흔드는 그 거친 감정은 굴욕감이나 수치심에서 샘솟은 억울함은 아니었다. 다만 그 쓰라린 기분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분명한 비참함이었다. 꽉 앙다문 치하야의 이 사이에서 신음이 끊어질 듯 이어졌고 감정을 토해내는 뜨거운 숨이 코와 입에서 거칠게 터져 나왔다. 누구보다도 노력파인 자신이, 부단함을 가장 중요시했던 사람에게 거절당했다는 냉정한 사실이 뼈아팠다.

 

   “시죠 씨...”

 

   치하야는 자신을 밀어낸 한 사람의 이름을 차마 억누르지 못하고 울음과 함께 내뱉고 말았다. 그 목소리는 텅 빈 치하야의 방에 차갑게 울렸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치하야 눈앞에 놓인 편지를 적셨다. 흰 종이가 눈물에 젖어 우그러들었다. 치하야는 자신이 내뱉은 한마디를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괴로운 소리를 냈다.

 

   시죠 씨를 좋아해요.

 

   죽을 만큼 용기를 내 전한 한마디였다. 치하야는 살면서 그 같은 과감함을 쥐어짠 일이 없었다. 가수가 아닌 아이돌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름의 신념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중요한 결단에는 언제나 동료들과 나누는 깊은 생각이 함께 했다. 용납하고 싶지 않은 실패는 모질게 먹은 마음으로 다음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아왔다. 서툴고 눈먼 과감함이란 치하야에게는 다른 사람의 어리석은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치하야는 불 꺼진 방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찌할 바 모르게 가슴을 태우는 감정을 처음 느끼고 그것이 누군가를 향한 애정과 애착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 치하야는 경험해보지 못한 초조함과 불안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침착한 판단은 가슴의 뜀박질과 타는 듯한 갈증에 파묻혀버리고 말았고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섣부른 행동과 욕심이 물밀듯 치밀었다. 치하야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져 한숨 쉬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밤마다 자신의 낯선 감정을 자책하고 스스로와 타카네를 위해서라도 아픈 애정을 감추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게 서툰 치하야는 제 가슴마저 철렁 내려앉게 한 마디를 타카네의 앞에서 읊게 되었다.

 

   ‘시죠 씨를 좋아해요.’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행동력은 치하야의 마음속에 여태껏 존재한 적이 없었다. 입술을 다문 치하야는 물 쏟은 어린애처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타카네 앞에 서서, 감추던 마음을 꺼낸 자신에게 원망도 하고 격려도 하며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타카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첫 고백은 가혹하게도 실패와 거절의 말로 돌아오고 말았다. 치하야의 마음에 후회와 자책이 한순간에 몰아쳐 밀려왔다. 차갑고 새카만 감정의 파도가 치하야의 마음을 삼켰다. 자신이 경솔했음을 사무치게 느꼈다. 같은 여성임을 알면서도, 그리고 상대와의 관계가 어떻게든 전과는 다르게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백이란 한 사람의 일방적인 마음을 무작정 내미는 것임을 알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갈망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제 행복만을 찾은 자신이 미웠다. 실연의 장면을 다시 떠올린 치하야는 울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달 같은 사람. 시죠 씨. 당신은 정말 달 같은 사람이에요. 언제나 제 곁에 떠오르고, 늘 당연한 듯이 제 주위를 도는 당신은 늘 달 같은 분이에요.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당신은 너무나 멀리에 있는 분이었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시죠 씨.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제가 했던 말 다 잊어주세요.’

 

   거친 숨을 쉬는 가슴이 힘겹게 오르내렸다. 아픈 목에서 흘러넘친 한숨은 고요한 공간에서 쓸쓸하게 흩어져버렸고 뜨거운 오열은 싸늘한 공기에 온기를 잃고 말았다. 실연의 감정이 울컥울컥 밀려와 치하야의 마음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만들었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 시죠 씨는 나를 피하실까? 시죠 씨의 시선이 신경 쓰여. 시죠 씨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 싶어.’

 

   치하야는 타카네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치하야는 언제나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답니다.”

 

   타카네는 언제나 위를 바라보았다. 정진이란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기며 각오를 다지던 모습은 치하야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했었다. 타카네 역시 그랬던 것 같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같은 꿈을 꾸고 있었고, 치하야는 타카네를 보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즐거운 성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런 시죠 타카네가 자신을 인정해 주던 것은 치하야에겐 너무나도 큰 행복이었다. 노래를 위해 노래하던 치하야는 언제부터인가 타카네를 위해 노래하고 있었다.

 

   ‘정점을 꿈꾸시던 시죠 씨. 나와 같은 곳을 보시던 시죠 씨.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것을 품고 계시던 시죠 씨. 무엇을 감추고 계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내가 가진 어두운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나만큼은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마음을 알고 싶었어. 나누고 싶었어.’

 

   치하야는 그 뜨거운 마음을 차라리 홀로 삭일걸, 하고 후회했다. 치하야는 아픈 것은 자신 혼자만으로도 충분한 일이라 생각했다. 가망 없는 설렘을 타카네에게 억지로 들이밀어 자기 외롭게 사랑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된 지금의 순간이 너무나 괴로웠다. 치하야는 두 손으로 얼굴의 눈물을 훔치고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번져나가는 잉크를 뿌옇게 만들었다.

 

   타카네의 마음에는 치하야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정중한 거절의 편지에는 타카네가 짊어진 사명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타카네는 그 사명 외의 것에 눈을 돌릴 생각이 없었다. 편지의 글은 몇 수 앞을 읽는 듯, 글을 읽는 치하야의 마음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에는 치하야의 행동이 값싼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말마저 덧붙여져 있었다. 그 잔인한 배려에 치하야는 감사도 원망도 하지 못했다. 괴로움으로 움츠러드는 몸을 책상 위에 힘없이 뉘일 뿐이었다.

 

   치하야는 치하야 자신을 위해 고백했고, 타카네 역시 타카네 자신을 위해서 치하야의 고백을 거절했다. 치하야는 거스를 수 없는 삶의 목표와 신념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음악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에 타카네의 생각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시죠 씨는 그 소중한 꿈을 잃어버리는 것이 싫으셨던 거야.’

 

   하지만 치하야의 마음에는 미련이 남았다. 그렇게 꽉 막히고 영영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자신도 이렇게까지 변하고 말았다. 유일한 삶의 목표에 새로운 감정을 덧칠할 수 있었다. 치하야는 타카네도 자신처럼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구보다 풍부한 감성을 지닌 타카네라면 자신보다도 더 절절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타카네의 닫힌 문을 한 번 더 두드려보고 싶었다. 타카네가 문을 열고 자신을 받아줄 때까지, 숨 막힐 정도로 진한 향기의 애정을 자신에게 쏟아줄 때까지 기다리고만 싶었다. 고집을 부리고 억지를 쓰면 언젠가는 상황이 달라질 것만 같은 막연하디 막연한 희망마저도 생겼다. 갑작스럽게 마음속을 밝히는 그 기대감에 치하야는 헐떡이던 숨을 가라앉히며 몸울 웅크려 앉았다.

 

   ‘전화해볼까.’

 

   치하야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연락처에 저장된 시죠 타카네라는 이름에 전화를 걸고 연결음이 울리는 것을 듣고 싶었다. 여보세요 하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편지해볼까.’

 

   타카네가 유려한 글씨로 적어주었듯 치하야도 자신의 글씨체로 정돈된 글을 써 타카네에게 보내고 싶었다. 두서없고 거칠기만 한 말보다는 여과되고 다듬은 생각이 타카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더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전해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타카네를 직접 볼 면목이 없었다. 치하야는 타카네의 집 주소도 몰랐다.

 

   치하야는 지나가는 타카네를 무작정 붙들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 간절히 이야기를 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타카네의 가느다란 팔목을 붙잡고 외딴 방으로 들어가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어떤 말을 듣게 되든 다시 한 번 타카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눈과 눈을, 손과 손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설령 겁먹고 당황한 타카네의 눈을 다시 한 번 보는 게 새로운 후회를 낳을지라도 치하야는 타카네의 손을 잡고 세차게 뛰는 자신의 맥을 전하고 싶었다.

 

   “시죠 씨를 좋아해요.”

 

   치하야는 고개를 숙이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이내 힘이 빠져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약한 숨이 밀려왔다가 멀어졌다. 그 숨을 따라 마음에 엉겨붙은 슬픈 감정이 파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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