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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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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03, 2015 22:19에 작성됨.

   1월입니다. 먹구름 낀 하늘은 한낮에도 캄캄하고 바람은 아플 정도로 시립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도 차갑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만지는 것마다 꽁꽁 언 것처럼 딱딱하고 싸늘합니다. 덜컹거리는 유리창이 창틀에 걸린 얼음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녹차를 우려냅니다. 바스러질 듯 바싹 마른 찻잎들은 뜨거운 물을 머금으면서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움츠러들었던 마음도 그 모습처럼 풀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무실은 쓸쓸했지만 차를 마시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누군가 들어와 따뜻한 한 잔을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모서리가 뾰족한 네모 상자를 쌓아놓은 것처럼 생긴 사무실의 낡은 소파는 갈색 모조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값싼 모조가죽은 금방 닳아지는 탓에 여기저기가 갈라지고 뜯어져 격자모양 안감과 그 아래에 깔린 노란 스펀지가 훤히 드러나 있습니다. 계속 앉아 있다가는 추운 날씨에 딱딱하게 굳은 가죽 조각들이 더 바스라질 것 같습니다. 소파가 낡아가는 게 신경 쓰인 저는 찻잔을 들고 나무걸상에 가서 앉습니다. 높은 걸상에 앉아 사무실을 둘러보니 어쩐지 어수선한 기분이 듭니다.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 여기저기 어질러진 모습이 평소보다 더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산만한 모습이 마음에 걸립니다. 새해의 시작을 어수선한 곳에서 시작하면 어쩐지 일 년 내내 정돈되지 못한 나날을 보낼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좋은 일은 서두를수록 좋고, 마음먹은 날이 길일이라고 합니다. 저는 따뜻한 차를 마저 마시고선 홀로 새해맞이 청소를 시작합니다.

 

   손걸레에 물을 적십니다. 차가운 물에 젖은 손이 싸늘한 공기에 마르면서 새빨갛게 변합니다. 손은 아프지만 사무실을 깨끗하게 할 생각으로 꾹 참고선 얼얼한 손가락을 꽉 쥐어 걸레의 물기를 짜냅니다. 먼저 얼룩덜룩한 탁자를 닦습니다. 공기가 건조한 덕에 유리덮개에 쌓인 마른 먼지와 지저분한 때는 쉽게 사라져버립니다.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반짝거리는 길이 생기는 걸 보니 마음이 뿌듯합니다. 마음이 들뜨고 손놀림이 빨라지자 청소에 조금씩 탄력이 붙습니다. 비뚤어진 책상과 의자를 정돈하고 프로듀서님과 코토리 언니의 서류는 엉키지 않도록 책상위에 놓인 모양 그대로 열을 맞춰둡니다.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책과 파일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으려고 책꽂이를 보니 정돈이 가지런하지 않습니다. 빈틈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종이나 책들을 반듯하게 정돈하기 위해 그것들을 보이는 대로 모두 끄집어내 책상 위에 늘어놓습니다. 가사집이나 악보, 이런저런 기획서와 지시서가 뒤엉킨 종이더미는 여기저기가 빛 바라고 구겨지고 말려 있어서 깔끔하지 않고 지저분합니다. 어느 것부터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막막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잡다한 종이들을 솎아내자니 그 속에서 낯선 촉감이 느껴집니다. 종이들 사이에 두툼한 뭔가가 끼어 있던 것입니다. 종이틈 사이를 뒤져보니 손바닥만 한 편지봉투가 나옵니다. 엉망인 종이들 사이에서도 그 봉투만큼은 깔끔하고 빳빳합니다. 누군가 꼭꼭 숨겨두려고 한 모양입니다. 제가 정리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쓰레기통이나 파쇄기에 들어가 영영 사라졌을 거라 생각하니 괜히 다행스러운 기분이 듭니다.

 

   저는 그 봉투를 처음 보는 게 아닙니다. 하늘색 봉투의 한쪽 구석에는 제 글씨체로 '하기와라 유키호'라고 적혀 있습니다. 살짝 번진 연필 글씨를 보니 까맣게 잊고 있던 재작년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는 미래의 누군가가 우연히 읽어주길 바라면서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운 기분이 들어 청소를 잠시 접어두고 편지지를 펼칩니다. 무슨 내용을 적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첫 인사말을 읽는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편지 속의 저는 사무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돌 후보생이었습니다. 저는 걱정도 참 많았습니다. 이 편지를 읽는 사람이 이상한 오해를 할까 봐 고민하는 걸로 편지지 한 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납니다.

 

   저는 편지지를 한 장 넘깁니다. 저는 조금 속상한 듯 편지를 적어놓았습니다. 그 시절 저는 실수도 참 많이 했습니다. 데뷔를 할 수나 있을지 걱정하면서 이리저리 도망치기만 하는 제 자신을 무척이나 나무랐습니다. 편지 속의 저는 대사를 잊었습니다. 가사를 틀리고 음정을 맞추지 못하고 인터뷰에서는 엉뚱한 대답을 해 기자 분을 곤란하게 했습니다. 프로듀서님께 지적받았던 말들이 떠올라 가슴이 뜨끔합니다. 프로듀서님은 저를 위해서 조언해주셨겠지만 저는 혼나는 것만 같아서 너무 무서웠습니다. 호의를 나쁘게 받아들였던 것만 같아 스스로가 바보 같이 느껴집니다. 옛날의 저 역시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참 바보 같죠?’

 

   그 혼잣말이 꼭 지금의 제게 묻는 것 같아서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습니다. 읽기 시작했을 때 지었던 웃음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신인상을 타면서 첫 걸음을 최고의 자리에서 시작했을 텐데, 저는 데뷔한지 1년이 지나서도 그저 그런 아이돌입니다. 춤을 잘 추거나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지도 못합니다. 수수하고 어리숙한 모습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작아지기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나 이렇게 스스로를 혼냅니다. 난 틀렸어, 난 안 될 거야 하면서 우는 소리를 먼저 합니다. 저는 좀 더 강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울리지도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아이돌을 시작한 것도 가만히 있어서는 스스로를 더 미워할 것만 같아서 간신히 용기를 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저를 보고 손가락질 할 것만 같았습니다. 블로그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제 흠을 찾아내려고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나쁜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보기 싫은 모습을 바꿔보겠다고 말하면서도 저는 그런 보기 싫은 모습을 언제나 버리지 못했습니다. 전혀 기억나지 않았던 편지의 내용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글자를 읽어나가는 제 마음이 편지 속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저를 꾸짖기 위해 써져 있는 것만 같습니다. 가슴 아픈 편지는 이런 말로 끝맺었습니다.

 

   ‘그렇지만 하기와라 유키호는 변할 거예요.’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이미 코끝은 아프도록 저려오고 있습니다. 재작년의 저는 미래의 스스로를 믿으며 응원의 말을 남겼지만 저는 내년에도 그 때와 똑같은 말을 오늘 같은 마음으로 적을 것만 같은 걱정스러운 기분이 듭니다. 저는 타고난 것도 없습니다. 노력이 결과를 내는 것도 남들보다 느립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못 하고 뒤떨어지는 사람은 금방 잊히고 아무도 바라지 않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불안해하면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작년 송년회에서 프로듀서님은 올해처럼만 하자면서 응원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는 희망을 품으면서 각오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읽어보니 그런 기대가 모두 헛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감히 스스로를 칭찬해도 되는 것일지 불안합니다. 지금 제가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긴다 해도 그것은 어쩐지 사실을 무시하는 거짓말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소리를 내지 않게 꾹꾹 목소리를 눌러가며 차가운 손으로 눈을 훔칩니다. 잊고 있었던 손끝의 통증이 다시 느껴집니다. 시린 손은 쥐고 비비고 입김을 불어 봐도 여전히 빨갛고 얼얼할 뿐입니다. 저는 골라지지 않는 숨을 간신히 가다듬으며 편지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습니다. 부끄러운 편지지만 함부로 다룰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오늘처럼 저는 옛날에도 많이 울었습니다. 지난날의 그 하기와라 유키호가 느꼈을 아픔이 오늘의 걱정에 더해집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간신히 이겨냈는데도 꿈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허탈한 마음에 청소를 마저 할 기운도 나지 않습니다. 편지를 가방 속에 숨겨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저는 스케줄이 잡혀 있고, 집에 간다 해도 갑자기 돌아온 저를 보며 아버지와 제자 분들이 자초지종을 물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습니다. 답답합니다.

 

   저는 한숨을 쉽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빈 찻잔이 눈에 들어오자 입에 남은 녹차 맛이 씁쓸합니다. 저는 찻잔을 들고 다용도실로 갑니다. 커피포트에 남아 있던 물은 이미 차게 식어 있습니다. 물을 마저 받고 스위치를 눌러 커피포트가 부글거리기를 기다립니다. 잊고 있던 사무실의 적막함이 온몸을 감쌉니다. 사기잔을 쥔 손이 떨립니다. 눈물도 툭툭 떨어집니다. 이젠 스스로가 바보 같다거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안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그저 슬프고 울적할 뿐입니다.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는 분명했지만 이 무거운 마음을 다시 가볍게 할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 답답함을 풀어도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저는 이런 마음을 평생 지고 가야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이 끓는 소리와 커피포트의 스위치가 자동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달칵하고 들립니다. 저는 훌쩍거리며 찻잎 담긴 봉지를 열고 물을 부어 새로 녹차를 우려냅니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찻잔은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뜨겁지만 차갑고 기운 없는 손에는 그 열기가 오히려 편안합니다.

 

   하지만 차가운 손과 몸은 따뜻한 차가 달래준다지만 가슴을 찌르는 슬픈 마음은 어떻게 달래야 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합리화일 뿐입니다. 프로듀서의 조언은 감사했지만 스스로의 부족한 점을 다시 깨닫게 해서 슬픕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래로만 가라앉습니다. 조바심이 납니다. 이 생각 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빙 돕니다. 차를 마시고 또 마셔 봐도 가슴속에 타는 갈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고, 스스로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제 자신을 보며 자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흐린 눈을 마저 훔치고 숨을 고릅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가슴을 아프게 한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합니다. 편지 속에서 스스로를 바꿔볼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다시 읽는 마음은 여전히 화끈거리며 아프지만 눈에 힘을 주고 다섯 장의 편지를 차근차근 읽어나갑니다. 발전을 위한 이렇다 할 힌트는 찾지 못하더라도 실패하고 힘들어했던 옛날의 자신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다 해도 저는 모든 힘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그건 누가 시킨 것도 아니라 제가 바라고 바라서 이뤄낸 행동이었습니다. 저 하기와라 유키호는 여전히 보잘것없는 아이돌입니다. 저는 춤도 노래도 외모도 재주도 그저 그런 사람이지만 조금 더 노력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편지지를 읽고 있으니 눈에 맺혔던 눈물도 거의 다 말라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 문장을 소리 내서 읽습니다.

 

   “그렇지만 하기와라 유키호는 변할 거예요.”

 

   청소를 마저 하기로 합니다. 창밖은 여전히 우중충했고 몸에는 아직 기운이 돌아오지도 않았지만 조금이나마 웃음이 나옵니다. 사무실을 깔끔하게 만들겠다는 다짐부터 이뤄본다면 올해 남은 일들에도 분명히 힘을 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저에게 노력하는 사람이라 한 프로듀서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저는 편지를 차곡차곡 접습니다. 편지지를 쥐는 손은 조금 전보다는 따뜻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접은 편지를 넣으려고 봉투를 펼치자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그 봉투 안에 얇디얇은 화선지 쪽지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그 쪽지를 꺼내 읽어봅니다. 쪽지에는 낯익은 세로쓰기로 멋진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당신은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더 울음이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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