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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만남,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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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5, 2012 18:52에 작성됨.

캐릭터-삽질무쌍하기와라 유키호
제시어-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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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마, 그 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겠지요. 그러나 제게 있어서 그 날은 아마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런 추억.
당신의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저는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과거, 만남, 그리고

하기와라 유키호는 아이돌이다. 뭐, 그렇게 말해도 아직 그렇게 유명한 건 아니지만. 요즘처럼 연예계에 아이돌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중 많은 수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채 그대로 묻혀버리기 일쑤인 상황이고, 유키호 역시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얼굴을 숨길 생각 없이 길에 나가도 알아보는 사람은 극히 소수. 그 알아보는 소수조차도 대부분은 ‘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정도일 것이다. 단지 그 정도의 인지도. 그 정도의 인기.

하지만 나는 유키호가 성공할 거라고 믿고 있다. 그녀의 프로듀서라서 그렇지도 하지만, 그 점을 빼놓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프로듀서로서 그녀가 실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도록, 그녀가 점점 실력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하지만,

“하기와라 씨, 자꾸 시작이 늦잖아!”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정상에 도달하는 건 아직 먼 것 같다.
댄스 트레이너의 말을 듣지 않아도,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엉성한 춤 실력. 유키호의 단점 중 하나이다.
유일한 단점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게 슬프지만 그래도 유키호는 분명 자기 말대로 단점이 많다. 가장 큰 것은 역시, 그 성격이겠지만.

반대로,
난 그 성격 때문에 유키호가 성공할 거라고 믿는다.

“좀 더 손을 높이 뻗어!”
“아, 네!”

뭐, 내가 여기 있어도 도움될 건 없고. 트레이닝이 끝나면 지쳐있을 테니까, 뭔가 음료수라도 사올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고, 목을 타고 내려가 온 몸을 감싼다. 마치 물과 같이.
꽤나 춥네. 이따가 갈 때는 더 추워지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근처 편의점에서 스포츠 드링크를 사서, 다시 곧장 연습실로 돌아간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는 다른 열기가 내 몸을 녹인다.
그 열기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하기와라 유키호. 그녀이다. 한번에 엄청난 열을 발휘하여 타오르는 불길이 아니라 조금씩 타오르는 숯불과 같이, 천천히. 그러면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의지로 조용히.

잘못된 동작을 하나하나, 천천히 수정해나간다. 얼굴에 땀이 맺히고 호흡이 격렬해져도, 다리가 조금씩 후들거리고 팔에는 힘이 빠져도.
그래도 오직, 단 하나.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신을 조금 더 바꿔나가기 위해서 움직인다.
그 모습은 솔직하게 말해, 아름답다.
하기와라 유키호는 그 외모보다도 뛰어나고, 소심한 성격을 넘어설 정도의 고집을,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하기와라 유키호의 아름다움. 결과만을 보는 대중들은 앞으로도 알 수 없을, 나만이 알고 있는 하기와라 유키호.

아니, 이게 아니라 이제 슬슬 중단 시켜야지.
너무 과다한 연습은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스케줄에도, 다른 트레이닝에도. 더 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선생님,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어떨까요? 유키호도.”
“아, 시간이 어느새 이렇게…… 너무 늦어졌네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수, 수고하셨어요…….”

셋이서 마주보고 인사를 하고, 댄스 트레이너가 먼저 나간다. 꼿꼿하게 서있던 유키호는 문이 닫히는 순간 쓰러지듯이 주저앉는다.
잠깐 놀라서 달려갔지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단순히 심하게 지친 것 뿐인 것 같다.

“자, 유키호. 마셔. 스포츠 드링크야.”
“프, 프로듀서……. 고마, 워요.”

유키호에게 음료수를 내밀자, 유키호는 살짝 미소 지으며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도 유키호 옆에 앉을까 했지만, 그러면 아마 또 유키호가 곤란해 하겠지. 약간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다.

“수고했어 유키호.”
“아, 아니에요…… 전 아직, 멀었는걸요.”
“아하하, 그건 부정 못 하겠지만 말이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유키호의 표정은 약간 울상이 되며 입에서 한숨이 나온다.
정말로, 주눅들기 쉬운 성격이구나.

“그래도, 유키호가 이렇게 계속 노력하다면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해.”
“저, 정말인가요……? 전 겁쟁이에, 소심하고, 춤도 엉망인데다가, 또…….”
“응, 난 정말로 멀지 않았다고 생각해.”

내 말에 유키호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없다. 직접적으로 유키호에게 영향을 주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내가 스케줄을 잡고 방송을 잡아도, 결국 결과는 유키호가 내는 것이다.
내가 보컬과 댄스의 연습을 시켜도, 결국 연습은 유키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유키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작은 위로 정도뿐이니까.
그건 그렇고, 평소보다도 더 많이 피곤해보인다. 역시 피로가 쌓인 거겠지.
아이돌이라는 직업은 설사 인지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고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힘들면 잠깐 누워서 쉬어. 아직 막차 시간까지 좀 남기도 했으니까.”
“아, 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키호는 그 자리에 드러눕는다. 그렇게나 피곤했던 걸까.
나도 벽에 살짝 기대어 편하게 앉는다. 나도 이렇게 하고 있으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누구에게나 휴식은 필요하니까. 유키호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와서…….

쌕쌕?
놀라서 유키호 쪽을 바라보니 유키호는 그새 잠들어있다. 너무 빠르잖아, 그렇게 잠시 마음 속으로 딴죽을 걸어봤지만 그래도 이렇게 지치도록 하고 있는 유키호가 안쓰러워서, 차마 깨우지를 못하겠다.
뭐, 막차시간까지는 좀 남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연습실의 불을 꺼주고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유키호에게 덮어준다.
그 때, 약간 놀라서 다시 아까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와 앉아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향기가, 났다.
오늘은 스케줄도 없어서 유키호가 화장을 하거나 향수를 뿌리지도 않았고, 애초에 연습실에 같이 올 때만 해도 그런 냄새는 전혀 없었다.
저렇게까지 격렬하게 몸을 움직인 다음에는 땀 냄새가 나야 정상일 텐데. 그럼 저 향기는 유키호의 땀에서 나오는 걸까.

자신의 땀 냄새와는 전혀 다른, 공기 중에 자연스럽게 퍼지는 달콤한 향기.
그러고 보면 물건을 건네주거나 하면서 손이 닿거나 할 때도, 자신의 거친 손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감촉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삽질을 많이 하는데도.
만져본 적은 없지만 아마 머리카락도, 분명히 부드럽지 않……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을 감는다. 뭐, 분명히 하기와라 유키호라는 존재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딱히 이성적으로, 연애감정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잠깐의 순간적인 감정은 좋지 않아.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내 머릿속에는 예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노래가사가 흘렀다.

What are little boys made of? What are little boys made of? Frogs and snails And puppy-dogs' tails, That's what little boys are made of.
What are little girls made of? What are little girls made of? Sugar and spice And all that's nice, That's what little girls are made of.




“……서, ……듀서”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무슨 소리지…….

“프, 프로듀서……!!”
“유, 유키호?”

나를 부른다는 걸 알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유키호는 나에게서 약간 떨어진 채로 나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아, 나도 깜빡 잠이 든 거구나. 유키호는 남자를 대하는 게 서투니까 흔들어 깨우지도 못하고 그냥 소리로만 부르던 것 같다.

“미안, 유키호! 깜빡 잠들었어!”
“괘, 괜찮아요, 프로듀, 서……. 제가 먼저 잠든 거고…….”
“아니, 미안해. 빨리 돌아가자. 오늘은 수고했어, 유키호.”
“저기, 그, 그게…….”

돌아가자는 말에 유키호는 왠지 말을 망설이고 있다. 순간 혹시나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아차, 막차시간이 지나버렸네. 나야 뭐 어떻게든 갈 수 있지만 유키호는 꽤 어려운 문제겠지.

“미안, 나 때문에.”
“아, 아니에요…… 먼저 잠든 건 저였고,”
“아니, 내가 누워있으라고 해서 잠든 거였고. 또 그걸 바로 깨우지 않았던 것도 나잖아? 뭐, 시간 맞춰 깨울 생각이었지만.
그러니까, 책임지고 바래다줄게.”
“아, 그…… 그, 네……. 부탁드려요 프로듀, 서……”

역시 성격상 꺼려지는 건지 잠시 망설였지만, 이대로라면 집에 들어갈 방법이 없기 때문인지 유키호는 승낙했다.
유키호가 옷 갈아입는 동안 차 빼놔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유키호에게서 재킷을 받아입고 아래로 내려간다.
재킷에서는, 어렴풋한 향기가 났다.



차를 타고 유키호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들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유키호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은 드물고, 잡담이라면 더더욱 드무니까 이럴 때는 내가 얘기를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대화거리를 머릿속으로 찾으며 힐끔 유키호가 앉은 조수석을 본다.

유키호는 어딘지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으로 경직된 채 앉아있다. 아, 긴장하고 있다. 늘 그런 거지만.
뭐, 그냥 평범한 얘기를 하는 게 좋겠지.

“오늘은 수고했어.”

틀렸다. 이건 아까도 충분히 했던 말이잖아. 유키호는 아까와 마찬가지인 의례적 대답을 한다. 그리고 다시 침묵.
이게 아니라 좀 더, 뭐랄까.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라던가…… 그런 거 없나?

‘사랑해’

아니, 이게 아니지! 그렇게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격렬하게 일갈하고 다시 생각한다.
그래, 유키호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해보자. 평소에 하고 싶던 그런 말.

‘결혼해줘’

이게 아니라고! 아니, 물론 지금 유키호가 입고 있는 하얀 코트도, 하얀 부츠도, 하얀 베레모도 전부 엄청나게 잘 어울리지만! 평소에도 유키호의 색이라고 하면 역시 순백이지만! 그래서 머릿속으로 ‘아, 웨딩드레스도 잘 어울리겠네. 화려한 것보다는 청초한 쪽으로’라고 생각한 적도 많지만! 그게 내가 유키호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잖아!

뭐, 평범한 대화를 해야지. 평범하게 평소에 하고 싶던 말.

“유키호는 굉장히 열심히 하네.”
“아, 아니에요……. 저는, 많이 모자라니까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안 하면,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그 노력하는 의지는, 남들의 몇 배는 된다고 생각해.”
“그, 그런가요…….”
“오늘만 해도 트레이너 선생님. 불편했지?”

늘 하던 트레이너가 급한 일이 생기면서 바뀐 트레이너는 남자였다. 남자를 어렵게 느끼는 유키호가 결코 편했을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유키호는 트레이너를 보는 순간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그런데, 내가 오늘은 쉴까 하고 물어보자 유키호는 괜찮다며 연습을 강행한 것이다.

“바뀌겠다고…… 마음, 먹었으니까요. 싫다고 해서,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나를 대하는 게 전보다 자연스러워진 것도 참고 노력하는 거구나.”
“아니에요……! 프, 프로듀서는 좋아하는 걸요……!”
“그, 그러니.”

유키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된다. 아무래도 순간적으로 부정하려고 기세가 올라서 한 말인 것 같은데.
아, 분위기가 다시 어색해졌다. 아까랑은 좀 다른 느낌이지만. 아까는 할 얘기가 없고 그 침묵이 불편했던 거라면, 지금은 양쪽 다 좀 쑥스러워 하는 느낌이다.
뭐, 그래도 유키호가 날 좋게 생각해준다면 솔직히 기쁘지만.

“프, 프로듀서, 방금 그 말은…….”
“알고 있어. 그렇게 깊은 뜻은 안 두니까 오해할까 걱정하지 마. 날 좋게 봐준다니까 고마운걸.”
“아……. 예, 그, 그렇죠.”

왠지 모르게 유키호가 뭔가 아쉬워하는 느낌이 든다. 뭐지?
뭐, 일단 원래 얘기로 다시 돌리자.

“그러고 보니까, 어떻게 해서 바뀌겠다고 마음먹었던 거야? 이렇게 강하게 생각하기는 힘들 텐데.”
“그, 그렇죠……. 이유를 말한 적이, 없었네요…….”

유키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유키호네 동네에 다다를 때쯤

“프, 프로듀서……. 제가 말하는 곳에……. 잠깐 같이 가줄 수 있을까요?”

유키호의 말을 듣고 간 곳은 작은 놀이터였다. 그네 몇 개와 작은 정글짐, 시소가 있는, 그 정도일 뿐인 작은 놀이터.
유키호는 거기서 자신의 이야기를 얘기했다.




어렸을 때는, 정말로 남자가 무서웠어요. 그렇다고 막 악마로 보일 정도로 그랬던 건 아니지만요.
게다가 제가 겁을 먹고 행동하는 게 재미있던 건지, 남자애들은 절 많이 괴롭혔어요. 그래서 점점 더 남자가 싫어지고, 겁났어요.

그 날도, 아, 그 날이라는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예요. 남자애들 둘이 제 물건을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았어요. 이 놀이터에서의 일이었는데, 아마 플라스틱으로 된 모종삽이었던 것 같아요.
모래산을 쌓고 있는데, 모종삽을 가져가서는 저를 놀리는 거예요. 그래도 저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있었어요.

“어이, 하기와라. 이런데서 땅이나 파고 뭐하는 거야.”
“너 같은 애를 보고 있으면 그, 그, 슬퍼진다고……?”
“우울! 우울이야 우울!”
“아, 그래. 너 보고 있으면 우울해진다고! 쓸데없이 차분하기만 하고……?”
“음침! 음침이야 음침!”
“그래, 음침하다고!”
“맨날 혼자서 놀고!”

그렇게 말하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달라고도 못하고 거리를 벌린 채로 그냥 서있기밖에 하지 못했어요. 분홍색이고 노란 꽃도 붙은 예쁜 물건이었는데.
그래서 울 것 같아져서 눈물을 참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야, 남자란 애들 둘이 여자애 하나 놓고 뭐하는 거야.”

그 순간은 정말, 잊을 수 없어요. 뒤에 있던 정글짐 위에 서있던 여자아이가 말한 거였어요. 저보다 나이는 좀 더 위로 보였어요.
단발머리에 남자애가 입을 법한 씩씩해 보이는 반바지를 입은 아이는, 그대로 정글짐에서 뛰어내렸어요.
진짜, 그 순간은 잊을 수 없어요. 길지 않은 머리가 찰랑거리면서 떨어져 내리는 그 아이가, 제 눈에는 절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보낸 천사 같았어요. 실제로 얼굴도 예뻤으니까요.

“너, 넌 뭐야!” “몇 학년이야!”
“몇 학년인지가 뭐가 중요해. 그보다 남자애 둘이서 여자애 하나 괴롭히고.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뭔 상관이야!”
“아니면 그건가? 얘 좋아하는 거야?”

순식간에 그 두 남자애의 얼굴이 빨갛게 됐어요. 그러자 그 여자애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어요.

“아, 아니야!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그래! 너 바보냐!”
“그렇지만 너희 말 하는 게 그렇잖아. 혼자서 땅 파면서 노는 게 불만이라는 거 아냐? 같이 놀고 싶은데.”
“아, 아니거든!”
“그리고 뭐랬더라. 차분해서 보고 있으면 우울해진다고 했지? 그 말은 계속 보고 있다는 거네?”
“아, 아니라니까 임마!”
“꺄악”

순식간에 두 사람이 그 여자애에게 다가가서 멱살을 잡았어요.
그 여자애는 싸울 생각도 안 하고 가만히 서서

“괜찮아? 저 여자애가 보고 있는데 나 때려도 돼? 나 반항 안 할게.”
“으으…… 너, 나중에 두고 봐!” “어, 야! 같이 가!”

두 남자애들은 그렇게 가버렸어요. 그 여자애는 떨어져있는 삽을 주워 제게 내밀며 말했어요.

“자, 힘들었지?”
“아, 으, 응……. 고마, 워…….”
“아, 뭘 이런 걸 가지고. 쟤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원래 남자애들은 바보라서, 좋아하는 애면 괜히 괴롭힌다니까.”
“……왜?”
“응? 그, 글쎄. 왜일까. 아하하.”

그 아이는 그렇게 웃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았어요. 그리고 같이 모래산을 쌓았어요.

“그런데 왜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던 거야? 뭐라고 해주면 좋잖아.”
“그, 나……. 남자가 무서워서…….”
“응? 남자가? 남자가 무서울 게 뭐가 있어?”
“그, 그치만…….”

저는 제가 설명할 수 있는 한 제가 남자를 무서워하는 이유를 설명했어요. 그랬더니 그 아이는 놀던 걸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했어요.
너무 고마웠어요. 그때까지 제 얘기에 그렇게 고민해준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 애는 한참을 그렇게 고개를 파묻고 있다가 들면서 말하길

“음, 어제 TV에서 본 건데 말이야!”
“……?”
“그러니까 타조는 무서운 상황이 되면 머리를 땅 속에 묻는대!”

순간 무슨 얘기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그래도, 그 애가 열심히 얘기하는 거니까 열심히 들으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피하면 되는 거야!”
“땅 파고, 들어가야 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타조가 그렇게 머리만 파묻는다고 실제로 피해지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도 타조는 그렇게 한다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럼 자기가 느끼기에는 피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래.”
“응…….”
“그러니까 너도, 남자를 상대할 때, 피했다고 생각해. 그럼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달됐습니다.
아마 그 아이는 제게, 마음가짐을 조금만 바꾸면 달라진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걸 이해했다고 표현하지 못했어요.

“아, 미안……. 이렇게 말해도 이상하기만 하겠네. 아니야, 잊어버려.”
“아, 아니……. 그게, 아니…….”
“맞아. 나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난 이제 가볼게~”
“자, 잠깐……!”

있는 힘껏, 제가 그 때 낼 수 있을 가장 큰 소리로 내서 그 아이를 불렀어요.
그 아이는 가려다 말고 저를 돌아보았지요.

“어, 어느 학교 다녀……?”
“나 이 동네 안 살아. 다음 주면 돌아가는걸.”

다음주, 다음 주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어요. 처음으로 저를 구해준 사람인데. 처음으로 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준 사람인데. 그때까지밖에 보지 못한다니.
제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열심히 고민했어요.
아까 한 말을 알아들었다고 하는 건, 말로 그렇게 동의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어요.

“사, 3일 후에……!”
“응?”
“3일 후에, 여기로 나와줘…….”

그 아이는 무슨 일인지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알겠다고 해줬습니다.
그리고 크게 손을 흔드는 그 아이에게 작게 손을 흔들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하루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 날 창고를 뒤졌어요. 그 전날까지 가지고 놀던 플라스틱 모종삽 따위는 더 이상 저한테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고 아버지랑 같이 일하는 분들이 쓴다던 큰 삽은 제게는 너무 컸어요.
그래서 찾은 게, 접이식 야삽이었어요. 그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날부터, 놀이터를 파기 시작했어요. 어차피 이런 외진 놀이터, 저 말고는 오는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첫날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점차 요령이 붙어서 잘 파졌어요.
그 남자애들이 “하기와라, 뭐하는 거야?!” 같은 말을 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도 없었어요.
그렇게 약속한 3일 뒤가 되었을 때

“흑……. 으으…… 윽……”

더 팔 수가 없었어요. 이 놀이터의 모래는, 콘크리드 위에 한 7cm 정도 깔린 것에 지나지 않는 얇은 거였으니까요.
저는 그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깊디깊은 구멍을 판 모습을. 더 이상 누군가를 무서워하면서 아무것도 못하는 게 아니라, 설령 그게 단순히 구멍을 파는 거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뭔가를 해낼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아이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전 파내지 못했어요. 지금이라면 쉽게 파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아직 어려서 힘도, 기술도 없었으니까요.
결국 그렇게 저는, 또, 이루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어요.

“윽…… 흐윽, 흐윽…… 윽……”
“수고했어.”

그때, 머리 위에 손이 올라와서 쓰다듬어주었어요. 작고, 부드럽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믿음직한 손. 돌아보니 그 아이가, 본인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어요.
그 아이는 분명,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알았던 거겠지요.

“괜찮아, 너는 정말로 열심히 했어.”
“흐윽, 그, 그렇지만……”
“고마워. 내 말을 이렇게나 생각해줘서.”

그 아이를 붙잡고 그대로, 잠시 울었어요. 생각해보면 그 아이는 참 곤란했겠네요.
그리고 이런 저런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아이돌이라는 것에 대한 관심도, 그때 한 대화 때문에 생겼어요.

“아이돌, 좋아…… 해?”
“응, 멋있잖아. 그렇게나 예쁜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 꿈을 위해서 노력해. 화려한데도 그 아래에서는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
그래서 동경하고 있어. 나도 언젠가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결심했어요.

“나, 아이돌이…… 될 거야……!”
“응?”
“아이돌이, 될 거야…… 그래서 강해질래…… 그래서 언젠가는, 너처럼……”
“나?”
“너, 너처럼…… 멋있는 여자가……!”


“나 남자인데?”


“………………뭐?”
“아니, 그러니까 난 남자야.”

그 아이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어요. 순간 멍해져서 아무 생각도 못 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 아이는 다시 제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봐, 남자 무섭지 않지?” 하고 말하면서 일어났어요.




“그리고, 그 아이는…… 그대로, 가버렸, 어요…… 아마 저한테, 남자가 그렇게 무서운 게 아니라고 알려주려고, 그렇게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우리 둘은 나란히 그네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누고 있다고 말해도 얘기는 대부분 유키호가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저 맞장구만을 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유키호가 이렇게 많이 말하는 건 처음 봤네.

“그 뒤로, 그 아이를 본 적은…… 없었어요. 그 동네 사는, 아이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 그래서 아이돌을 하자고 마음먹은 거야?”
“네, 그 아이가, 절……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제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으니까요……”

그 아이는 이미 충분히 잘 알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게 나거든.


아니, 진짜 나라고! 그리고 물론 내가 그때 머리 길게 기르기는 했지만 그렇게 여자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도 못 했었고!
게다가 별 생각 없이 한 얘기가 유키호한테 이렇게 크게 남을 거라고도 생각 못 했어!
일단 미화가 너무 심하잖아 유키호!! 난 그렇게 멋있지도 않다고!! 정글짐에서 뛰어내리지도 않았어! 그냥 천천히 내려왔어!

뭐, 그렇다고 지금 사실을 밝혀서 유키호의 추억을 깨버릴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의지가 꺾일 것 같은 날이면…… 이 곳에 와요.”
“그 아이가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하겠지.”
“기뻐, 할까요……?”
“그럼. 내가 한 말이 유키호가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의지가 되었다고 알면, 누구라도 기뻐할 거라고.”

그렇게 말하자, 유키호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지금까지 해온 자신의 노력이 보답 받은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자부심이 있는 미소였다.
그래, 내가 했던 아무 것도 아닌 말이 유키호에게 이렇게 큰 의미로 남았다면. 그건 분명 기쁜 일이지.
앞으로도, 유키호를 지켜나가자. 내 말을 이렇게까지 들어주고, 이렇게까지 용기를 얻는 이 아이를.



“만약, 그 아이를…… 다시…… 본다면, 꼭…… 하고 싶던 말이, 있어요……”
“무슨 말인데?”

유키호는 그네에서 일어나며 이미 다 먹고 식어버린 커피캔을 그네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 정면 앞으로 걸어온다. 평소에 취하는 거리보다도 훨씬 가깝게.

“유키호?”
“나, 나는…… 이렇게 열심히, 당신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고 있어요…… 비록 당신이 저를, 잊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아마, 그 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겠지요……. 그렇지만……! 제게 있어서, 그 날은 아마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런 추억이에요…… 당신의,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저는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를 좀더, 지켜봐줘요…… 그리고 옆에서, 저를 지켜줘요……!”


“…………내가 그 아이라면, 그런 말을 들으면 영광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단지 프로듀서를 하고 있을 뿐이고, 유키호의 강인함에 감탄할 뿐인. 그런 사람이니까.
유키호는 다리를 굽혀 쪼그려앉아서, 조심스럽게 내게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는다. 이유도 모른채로 잡힌 손을 통해, 유키호의 떨림이 내게도 전해진다.

“그, 그럼…… 약속한 거에요. 프로듀…… 서.”
“뭐?”
“말했…… 잖아요. 세세한 부분 하나까지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에, 유키호는 그럼 내가 그때 그 아이라고 알고,

“이번에는, 그때처럼 멍하니, 보내지 않을 거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유키호의 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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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이트에서 키루님이 여셨던 아이마스 단편제에서 썼던 글입니다.
글의 주제는 유키호 하악하악
 
첫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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