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단편제] 누구야, 너?

댓글: 12 / 조회: 3114 / 추천: 0


관련링크


본문 - 03-03, 2013 19:17에 작성됨.

                                                                    
                                                                    
                                                                    
                                            

 2월 16일.
 
 오늘은 하교가 두 시간이나 늦어 버려서 제시간에 사무실에 출근하지 못했다. 우리 사무실 문 앞에 쭈그려 앉아 작은 소포의 테이프를 뜯고 있던 상관은, 날 보자마자 돈을 안 주는 것도 아닌데 시간만큼은 잘 좀 지키라고 투덜댔다.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그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 때마다 정말 지겹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다.
 
 내 자리로 되어 있는 작은 나무 책상은 그 사람의 커다란 책상과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비서라는 직위에 있어도 그가 처리해야 할 작은 일들은 모두 내가 하고 있어, 책상 사일 왔다갔다할 일이 적지 않은데도 그는 내 책상을 가까이에 두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 까닭이 궁금한 적은 더러 있었지만 지금까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 별로 중요한 이유도 아닐 것이다. 남의 일을, 그것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실례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매일 부쳐야 할 편지나 정리할 서류들을 그의 책상에서 받아가는 게 귀찮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모를 것이다.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사람이니 알 리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그가 반쯤 뜯다 만 소포를 들고 어기적어기적 자기 자리에 걸어가 의자로 쑥 들어가는 모습이 괜히 신기하게 느껴진 건 그런 걸 본 적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상관의 책장에는 파란색 링 바인더가 잔뜩 채워져 있었다. 그 외의 다른 프로듀서의 사무실에 들어가 본 적은 딱 한 번 있었고 오래 전이지만, 희미하게 기억하는 그 곳의 풍경과 여긴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지하라서 그런지 공기도 여간 탁한 게 아닌데 그 흔한 산세베리아 화분도 없고, 형광등이 환하게 켜져 있어도 언제나 음산한 기분 나쁜 곳이다. 가뜩이나 그와 나는 말수도 적은 편이라, 누군가 우리 둘이 일하는 모습을 본다면 가혹한 환경에 놓인 나머지 실의에 빠진 사람들쯤으로 여길 수도 있단 생각도 가끔 했다. 사실, 그렇게 좋지 않은 환경이라고는 해도 견딜 수 없다는 감상은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 언제 끝나리라는 기약도 없이 하루 종일 뛰어다니며 보컬 트레이너의 보조를 해야 했던 전의 생활보단 백배 나았다. 지금은, 하교한 후 상관이 출근하기 전까지 녹음실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무대에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됐지만, 적어도 아이돌을 하고 있었을 때가 아니라 비서인 지금 오히려 나는 더 많이 노래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지금의 상관이 어째서 비서를 필요로 했는지, 어째서 비서를 보컬 트레이닝 룸에 와서 찾았는지 몰랐다. 이 사무실에 짐을 풀기 전에는 그리로 옮기고 나면 알게 되겠지, 하고 생각도 했지만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는 단지 엉망진창으로 널부러진 파랑 링 바인더들을 맡기며 어떻게든 좋으니 정리를 좀 해 보라고 지시했을 뿐이다. 그것을 끝내고는 또 시시한 잡일을 부탁하고, 그리고 그 날 퇴근하기 전에 비상시에만 사용하는 부녹음실 열쇠를 덜렁 맡겼다. 자기 사무실 문을 여는 것은 반드시 자신이어야 하니, 일찍 오면 녹음실에 가 있으라는 굉장히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들었지만, 나는 그 편이 훨씬 좋아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 일들의 계속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와서 노래를 했고, 그가 와서 녹음실 문을 팡팡 치면 정리하고 나와 사무를 보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많은 시간을 보낸 지금, 여전히 나는 그를 잘 몰랐고, 궁금해했고, 묻지 않았다. 그의 사생활은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가 그날그날 처리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만 알고 있으면, 상관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의 업무에 관해서는 꽤 잘 알고 있다. 그에게 지시하는 사람과 그 자신을 제외하면 나보다 그의 일에 밝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굉장히 특별한 종류의 프로듀서이기에 회사 홈페이지의 직원 소개 페이지에도 그의 명함은 올라가 있지 않다... 라고, 상관에게 직접 들었다. 아무도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를 것이다. 오늘도 그는 윗사람으로부터 일을 하나 받아왔다. 이런 날은 나도 역시 바빠졌다. 방금도, 그의 목표가 된 프로덕션에 대해서 조사해 보다가 돌아온 참이다. 그는 예전부터 내가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업무기밀을 들고 나가면 안 된다는 게 이유다. 몇 달 묵은 기사를 스크랩하는 것이 기밀과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말은 절대적이다.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을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절대적인 지시이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내일을 생각하면 지금 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적게 자서 지친다는 것을 체감해 본 일은 없지만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좋은 성과를 볼 수 있다는 말은 분명히 일리가 있다. 그것도 상관의 말이다. 난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일기장 한가득 그의 말에 영향을 받은 흔적만 남아있는 것 같다. 기분이 이상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2월 19일.
 
 자료가 부족하다는 말이 이토록 견딜 수 없었던 건 처음이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내게 어째서 진척이 이렇게 더디냐고 정말 의아한 듯이 물어왔다. 자료가 없다고 해 봤자 변명같이 들릴 거라는 건 알지만, 라인 프로덕션에 대한 언급이 있는 자료는 출처나 매체의 종류를 막론하고 정말 적었다. 그가 납득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그가 내게 맡긴 조사는 언제나 이틀 정도면 충분한 결과물이 나왔다. 그러니까,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결과물 말이다. 지금까지 그가 내게 알아보라고 지시한 프로덕션들은 모두 입지가 있고 유명한 프로덕션들이었고 나 역시 넘쳐나는 자료를 신빙성을 따져 가며 분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적이 많았다. 이렇게까지 인지도가 부족한 프로덕션을 만난 건 정말로 처음이다. 신비주의 컨셉 같은 굴러다니는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영세한 연예 사무소가 성공할 수 없는 이유'같은 기사에 예시로 적히는 사무소라는 건 처음 봤다.
 
 상관은 내가 더듬더듬 늘어놓은 이유를 듣곤 뭘 생각했는지 자료실로 들어가 종이 뭉치를 잔뜩 안고 나왔다. 그리고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결코 그를 미워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란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등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떨렸다. 어째서 내가 제대로 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2월 21일.
 
 어린애같은 짓을 했다고 말하고 사과했지만, 상관은 여전히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원래 말이 없는 편이니 평소에 비해 더 조용히 있었다고 해도 기분이 상했단 걸 알아챌 리는 없겠지, 라는 건 나의 착각이었다. 솔직히 말해, 조금 놀랐다.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 기분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편이었다. 잘 몰랐지만, 지난 이틀 동안은 어리광만 부렸던 것이다. 고등학생씩이나 되어 어리광을 부리고, 그것을 깨닫고, 그리고 나면 부끄러움에 괴롭다.
 
 그는 오늘 라인 프로덕션에 입사했다. 아마 한 달 정도는 수습기간을 가질 것 같다고 한다. 굉장히 여유로운 말투였던 것이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았다. 상관은 한 번도 일에 그런 식의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일에 철저했고 항상 의외의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행동했다. 그러는 건 꼭 사기꾼과 닮았다. ...아니 원래부터 그가 하는 일은 사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무튼, 지나치게 일이 술술 풀리는 게 나로서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업계의 상식 같은 건 단지 사환 같은 걸 하고 있을 뿐인 나에게는 먼 이야기지만, 입사시험도 없는 프로덕션은 드물지 않나? 게다가 상관은 그 곳에 책상을 마련한 오늘 당장 라인 프로 소속 아이돌들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빼내온 것 같아 보였다. 상관의 작업 대상 프로덕션을 고르는 윗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데를 고른 걸까. 조금 의아했지만, 사무실에 있던 자료는 너무 적어서 그것으론 그 프로덕션에 대해 특별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어제 잠정적으로 생각한 대로 비밀스러운 프로덕션이라기보단 아무것도 없는 프로덕션으로만 보인다. 상관은,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은 전혀 우려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윗사람의 안목을 믿는 것일까.
 
 
 2월 24일.
 
 그는 또 하루 종일 라인 프로 이야기만을 늘어놓았다. 이제 나도 그 여자애의 신상명세를 술술 말할 수 있을 지경이다. 일을 하는 거야, 라고 말해서 어떻게 되는 수준은 이미 옛적에 벗어난 것 같다.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렇게 쏙 마음에 든 걸까 하고 틈만 나면 [라인 프로] 바인더를 훑어봤지만 팬들을 끌어당길 수 있을 만큼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긴 그가 프로듀스했던 아이돌들이 전부 처음부터 재능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재능을 섬세하게 끌어내는 것이 프로듀서의 능력이고, 상관은 그런 것을 정말 잘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아가씨는 아이돌로서는 부적격이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나 역시 그다지 아이돌에 적합하지는 않았고 여전히 그에 대해서는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다지 내 의견이라고 하는 게 의미를 가지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파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기존에 라인 프로에 근무하던 프로듀서는 굉장히 감각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아이에 대해서 내가 접한 것은 대략적인 정보일 뿐인데도, 벌써 이 아이에게선 돈 냄새와 아가씨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특히나 선재 사진은 굉장히 부담스럽게 찍혔다. 아하, 사진을 보면서 쓰다 보니 뭐가 부담스러운 부분인지 구체적으로 알 것 같다. 이마가 너무 두드러져 보이는 사진이라, 이마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프로덕션, 지망생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이상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상관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2월 28일.
 
 그는 영상실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오늘도 8시 즈음에 커피를 한 잔 타서 갖다주었을 뿐 할 일이 없었다. 상관이 일에 푹 빠질 때면 나도 이상하게 박탈감에 젖는 것 같다. 아니, 박탈감이 아닐까. 기분 나쁘게 찐득거리는 이 느낌의 정체와 근원을 도무지 모르겠다. 난 이 사무실 안에 그가 붙어앉아 있는 쪽이 더 좋다.
 
 
 3월 2일.
 
 내가 온 지 얼마 안 되어 그가 영상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그 길로 퇴근했다. 목적지는 듣지 못했지만 라인 프로에 갔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그 사람이 나가면서 나를 내쫓고 사무실 문을 잠가버려서, 오늘은 퇴근시간까지 녹음실에 있었다. 하지만 노래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답답하고 거북한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바로 집으로 돌아올 걸 그랬을까. 아니, 역시 집은...
 
 오늘은 자기 전에 좀 생각해보고 싶어서 그 아이에 대한 자료를 그가 영상실에 들어가 있을 때 몰래 가져왔다. 이런 짓을 한 건 처음이지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는 자료를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하거나 소중하게 보관하거나 그러는 사람이 아니다. 더군다나 뭐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가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다. 나쁜 생각이지만, 어쩐지 이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왠지 상관이 이번 일을 맡으면서 나도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늘어났지만, 눈에 띄는 문제는 아직 없다.
 
 상관은 반듯한 글씨체로 통계와 아이돌의 사진 옆에 꼼꼼하게 메모를 해 두었다. 확실히, 이것은 외부에 반출되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각각의 아이돌에 대한 라인 프로 프로듀서의 계획도 상세히 적혀 있다. 업계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법한 어린아이가 세 명, 그리고 이미 데뷔했지만 몇 번의 실패한 무대 경험을 가지고 있을 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아이돌이 하나. (그리고 그 애가 상관이 관심을 두고 있는 아이돌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돌이라고 칭하기엔 나이가 과한, 요새의 트렌드에서는 좀 오래 전에 벗어난 듯한 여자 하나. 소속 아이돌에 지망생까지 합해서 이 다섯 명이 전부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의 자료에 유독 메모지가 많이 붙어 있었다. 영상실에 틀어박히기 전 그가 거의 노래를 부르다시피 한 아이의 이름이 성명란에 적혀 있었다.
 
 보자... 상관의 메모에는 '무대 공포증-조명?'이라는 표기가 있었다. 며칠간 그가 찾아 헤매던 것은 그 아이의 무대 공포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었다. 여기서의 극복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될까. 프로듀스에서의 방해물이기도 하지만, 그 아이를 이 회사로 데려오려면 하자가 없다는 것을 윗사람에게 납득시켜야 한다. 그에게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그가 일하는 과정을 어느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지켜봐왔으니까, 눈치로 알고 있다. 무대 공포증은 그런 면에선 치명적이다. 그것도 무대를 못 올라가서 무대 공포증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아이는 실제로 무대에 올라가 공연을 할 때마다 가사를 잊어버리거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감을 잃어 노래하지 못하게 되는 모양이라고 했다. 인기를 얻기는커녕 경험 없는 신인이라는 기삿거리만 잔뜩 제공하고 끝났을 것이 틀림없었다. 며칠 전 상관은 내 무대 경험에 대해 물었다. 내게도 무대 공포증 비슷한 게 있었는가 궁금했던 것일 터다. 무대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면 제대로 대답해줄 수 있었겠지만, 그런 적이 없다. 사장이 오디션 이후 나를 아이돌로서 바라봐줬던 것은 단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 7일 이후에는 언젠가는 데뷔시켜 주겠다는 듣기 좋은 이야기도 없이, 레슨용 스튜디오에서 노예처럼 일했던 것이다.
 
 아무튼, 조명, 이라고 적힌 것은 그가 찾아낸 정답일까, 많은 오답 중의 하나일까. 뛰쳐나간 이유와는 확실히 관련이 있어 보였다. 무대 공포증의 원인이 조명...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다. 상관이 일에 대해 조금 더 말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3월 5일.
 
 오후 시간을 녹음실에서 보낼 수 없게 되었지만, 그에게 보탬이 될 수 있어 기분이 좋다. 말은 하지 않지만, 보답을 하고 싶다고는 생각해 왔다.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분명히 구원을 받았다. 답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이다.
 
 스튜디오의 간판을 철거해 달라는 이야기는 직원으로서도 조금 황당했던 것 같지만, 그의 이름을 대자 군말없이 그대로 해 주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전하자, 생각 밖으로 칭찬을 들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조금 기뻐해도... 아니, 그렇다고는 해도 그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고용되었을 뿐이니까, 또 일을 하면서 노래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게 좋아서, 그래서 이 기묘한 비서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관으로서는 나에 대해서 좀 더 생각을 하고 있는 티를 내지만 글쎄, 그는 사기꾼이니까. 잘 모르겠다. 게다가, 칭찬했을 때는 단지 들떠 있을 뿐이었는지도 모르고. 요새 자꾸만 기분이 왔다갔다하는 건, 정말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문제가 될 건 없으니...
 
 부모님은, 거의 얘기를 나누지 않지만, 내가 학교보다 일에 충실한 것 같다는 점을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 학교에서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째서인가. 라고 말해보는 것은 사춘기의 학생 같아서 싫다. 결국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는다. 악순환이라는 것은 알지만, 도무지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특히 지금처럼 문 밖에서 뭐가 날아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뭘 해도 소용없다는 기분이 들 뿐이다.
 
 
 3월 7일.
 
 일이지만 하기 싫은 것은 또 처음이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껄끄러운 기분이 드는 일을 떠맡은 것은 처음이다. 그 아이는 스튜디오에 들어올 때마다 찜찜한 듯이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 의중을 모르겠다. 상관은 자신이 빌린 스튜디오라는 것을 밝히지 않은 것 같았다. 작업의 일환일까? 그는 입버릇처럼 프로듀서와 아이돌의 관계에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가 연기하는 건 늘 덜떨어진 사회 초년생 프로듀서 지망자였다. 매번 똑같은 사람을 연기하면 위험하지 않냐고 물었던 적에는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면 위험하지 않느냐는 답을 받았었다.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작업'에 동참한 적이 없어서 그럴 뿐 이것은 언제나 내가 느껴야 했을 기분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내가 그의 사기 행각에 조력을 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나 역시, 그 동안 많은 아이돌 지망생들을 속여 왔던 걸까. 그리고 그 아이도...
 
 
 3월 15일.
 
 결국 다시 일하러 나왔다. 아니 노래하러 나왔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에 대한 회의를 거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프다고 둘러대고 집에 누워 있었던 지난 며칠간 죄책감은 더 짙어졌다. 그러나 노래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 일을 그만두면 나는 더 이상 자유롭게 노래할 수 없다. 어딘가, 나를 끝까지 봐 줄 프로덕션이, 프로듀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라고 하는 그런 꿈 같은 이야기는 이제 믿기 어렵다. 그런 것은 널리고 널린, 나처럼 버려진 지망생들의 로망이 낳은 거짓말일 뿐이다. 상관도, 냉정하게 평한 적이 있었다. 아니 아주 자주 그랬다. 너는 꼴통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론 어떤 프로덕션에서도 너 같은 걸 데려가려고 안 해. 아니 아이돌로서는 글러먹었지. 아이돌 주제에 대중이 기대하는 것을 보여주기 싫다는 건 대체 뭐냐 그게. 꼴통이지."
 
 그 말이 단지 나를 이 지하 사무실에 가두기 위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는 건, 그가 능숙한 사기꾼이라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그가 나를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묶어둬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상상해 보는 건, 그것만으로도 우습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꼴통일 뿐이다. 패배자.
 
 
 3월 16일.
 
 일에 전력을 쏟아붓기로 했다. 녹음실 열쇠를 돌려주고, 사무실 열쇠를 받았다. 장담을 할 수는 없지만 이 아이의 헤드헌팅이 끝나면 나도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터무니없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가 이 회사로 데려온,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프로듀서의 의견을 따라 소속 기획사를 그만두고 함께 이적한 아이돌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말해본 적은 없지만 그러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아마도 상관은 크게 화를 낼 것이다. 그는 절대로 이적한 그의 작업대상들과 만나지 않았다. 그는, 프로듀서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헤드헌터일 뿐이었다. 아이돌과 프로듀서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약속은 신뢰다, 그것과 함께, 그러니까 나처럼 그 신뢰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버리는 사람은 프로듀서라고 부를 게 아니야. 그냥 사기꾼이지. 하고 말하는 게 그의 입버릇이었다.
 
 스튜디오의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만 봤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아이는 상관을 완전히 믿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수습 딱지를 떼기도 전에 이적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막상 자신을 데려온 후엔 홀연히 종적을 감추고 사라진, 자신이 굳게 믿었던 프로듀서를 떠올리며,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할까.
 
 
 3월 18일.
 
 뭐가 문제인 것일까. 그의 말이나 표정에서 날카로운 독기가 가라앉지 않는다. 나도 내 직감을 믿지 않지만, 작업에 차질이 생긴 것 같았다. 아니면 단지 어제 사무실에 온 사장과 내가 얘기를 나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사장이랑 관련되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다. 이유는 들은 적이 없지만 굉장히 싫어하는 것은 틀림없다. 일전에 녹음실에서 여느 때처럼 노래를 부르다가 사장과 마주쳐 떨떠름한 기분으로 안부를 묻다가 상관에게 끌려갔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녹음실 열쇠를 뺏으려고 했기 때문에, 나 역시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울면서 다시는 사장과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모든 걸 던져버리고 뺏기지 않으려 했던 것을 내 손으로 되돌려준 나 역시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그럴 때의 상관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긴, 생각하니 그 때와 지금 그의 기분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때는 순수한 분노였다면, 지금은 고민일까.
 
 
 3월 21일.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진다. 나의 추측이 맞다면 사장은 정기적으로 그에게 보고서를 독촉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이런 일은 처음이다. 그렇다면 그는 보고서를 미루고 있다는 얘기다. 보고서를 올리지 못할 이유가 있는 걸까? 보고서에 거짓말을 하고 싶은 걸까? 무대 공포증 때문인가?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다. 사기꾼이고 제멋대로인 그라고 해도, 행동원리는 분명히 있었다. 잔뜩 취해서 들어온 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프로듀스란 건 아이돌을 제 색깔로 빛나게 해야 의미가 있는 거야. 끝내, 잭팟을 터트리지 못하면, 그 프로듀스는 실패한 거야. 그건, 악질이야."
 
 가끔, 그의 사고방식이 사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두 사람의 행동 양식은 분명히 다른 것이 사실이지만, 닮은 데가 있었다. 나는... 나라면, 악질이라고까지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프로듀서라면, 재능 있는 아이돌을 좋은 프로덕션으로 데려와 키우는 게 어떤 의미에서든 정당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일에 사명감까지 느끼고 있는 상관은, 이상한 사람이다. 병든 사람이다. 그런 게 아닐까. 아무튼, 거짓말을 해야 할 정도로 자질을 인정할 수 없는 아이돌을 데려와 키우겠다고까지 생각하는 건, 그답지 않은 일이다.
 
 다들 잠든 시각에 귀가해도 집안의 흉흉한 분위기가 가시질 않는다. 식탁에 찢긴 종이가 있는 걸 봤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이혼 양식이었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들여다보니 맞았다. 착잡한 마음은 없다. 오히려 가볍다. 나쁜 생각일까. 그치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괜찮은 걸까.
 
3월 24일.
 
 취중진담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날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늘이, 아마 거의 마지막이 아닐까. 내겐 오늘 하루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충분히 도움이 된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엔 그렇게 고주망태가 되어서는, 무슨 얘길 나눴는지 기억만 해도 신통방통한 건가.
 
 계속 그 아이 이야기만 하는 상관을 보면서 드는 이 찐득찐득한 불쾌한 감정이 뭔지, 이제 슬슬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런 이야기보다도 그 아이의 일이다. 선재로 간만에 본 그 애는 이제 분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라인 프로에서 그 애를 담당했던 프로듀서도 대단히 애정이 많았지만 혹여 무리하게 무대에 올려 자존심을 다치게 할까 우려해 본인이 의지를 보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란다. 상관이라면 내막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방법이라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섬세하지만, 상품의 마음이라는 것에는 그다지 연민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다치게 하더라도 그 아이돌을 팔리게 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할 사람이었다. 아마 방법은 자세히 몰라도 그는 이번에도 그 아이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 의지를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철저하게 프로듀스했을 것이다. 그는 사기를 치기 위해서 진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와 신뢰라는 것을 쌓아, 정말로 프로듀서 같은 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적 얘기를 꺼낼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꼴통이야, 걔도. 아니, 사실은, 거기 있는 모든 녀석들이 꼴통이야. 아이돌이건 사장이건 프로듀서건, 심지어 사무원도, 꼴통 아닌 놈들이 없어. 그 중에서도 이 마빡이 녀석이 제일 꼴통이야. 으이그..."
 
 상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근히 즐거운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제 헤드헌팅 따위는 그만두면 된다. 그것이 서로 시간과 마음을 낭비하지 않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동시에 그는 그걸 주저하고 있었다. 상황이 복잡한 것 같았다.
 
 "굳이 여기로 데려오지 않아도 그 애는 성공해. 팔린다. 분명히, 걘 할 수 있는 애야. 그곳과 잘 맞는 것도 있고, 스스로가 대단한 녀석이기도 해. 아무튼, 그렇단 말이야."
 
 그렇다면 내버려두고 오면 되는 것을.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눈을 꿈적이면서 대답했다.
 
 "그 애를 그대로 크게 내버려두면, 사장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게 분명해. 그는 확실히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쓰레기같은 프로덕션에 나를 보낼 생각을 할 리 없어. 다 그런 애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는 이미 그 아이를 눈여겨보고 있는 거야. 내가 경고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그 싹을 잘라버릴 정도의 감이 있어. 이대로 내버려두면, 오히려 가망이 없어."
 
 그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는 프로듀서가 아니다. 그 애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 그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자, 그가 웃었다.
 
 "사기 치는 동안은 프로듀서 맞잖아."
 
 정말이지 웃기는 사람이다.
 
 
 3월 27일.
 
 그는 기운을 차린 것 같다. 취한 날의 이야길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거짓말인 것 같지만, 따져 물을 이유는 딱히 가지고 있지 않다. 어느 쪽이든, 상관이 결단을 내린 건 분명했다. 사장에게 보고서를 넘긴 것이다. 거짓말을 했을까, 진실을 말했을까.
 
 할 일이 늘었다. 부탁받은 게 많아서, 내일은 학교를 쉬기로 했다. 상관은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괜찮다고 답했다.

 
 4월 1일.
 
 출근하자마자 상관의 의자가 빙그르르 돌고 있는 것을 봤다. 기분이 좋아 보여서,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일을 그만둔단다. 나도 모르게 책상을 내리치면서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더니, 라인 프로에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 애의 전속 프로듀서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잠시 후엔 또 장난이라고 한다. 솔직히, 상관이 만우절 농담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인 걸 오늘에 와서야 알았다. 정말 싫다. 장난에 걸린 건 둘째치고,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여 버린 것 같아서 불안하다. 나는, 의존적인 사람은 아니다. 만일 내가 정말로 의존적인 인간일지라도, 그런 걸 상관이 알게 되는 건 싫다.
 
 
 4월 3일.
 
 접수계원들은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물어오는 걸까. 오늘은, 예의 그 3인조 남자 아이돌 그룹이 스프링페스에서 데뷔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흘리고 나갔다. 사장이 스프링페스를 참관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도 역시 틀린 정보는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무대가 있기 때문에 사장이 겸사겸사 간다고 한다는 가설은 그럴듯하다. 그 애가 하고 많은 페스를 놔두고 하필이면 우리 프로덕션의 페스에 출전한다는 것도, 뒤에서 상관이 유도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 그룹과 그 아일 같은 페스에 내보낸다는 계획에 무슨 의미가 숨어있는 것인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더 적어두고 싶은 것이 있지만 내일은 홀 쪽을 그와 함께 찾아가보기로 했으니, 일찍 자는 것도 좋겠다.
 
 
 4월 5일.
 
 답을 얻어냈다.
 
 머릿속으로 그려 봤던 장면과는 달리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내가 그의 계획을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에 상관이 심하게 놀라버렸기 때문에 예상했던 설전은 없었다. 그는 내 말을 모두 시인했다. 생각보다 충격적이진 않았다. 이미 내 안에서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추궁하기도 전에 상관은 허심탄회하게 말해 왔다. 웃기는 일이지만, 그 아이는 상관과의 직업적인 의리를 지킨다고 프로젝트 유닛 결성에 강하게 반대했던 모양이다. 무엇이 그 애를 성공으로의 확신에 차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프링페스 참전도 그 프로듀서의 3인 유닛에 대한 열망을 꺾기 위해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성공한 무대를 가져 본 경험이 없는 아이돌 주제에 굉장하다 못해 지나친 자신감이 아닐까. 아무튼 그 아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렇고, 상관은 역시 조명에 장치를 해 둔 것이 맞았다. 결국 그는 보고서에 사실대로 적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무대에 올라가기엔 큰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말았던 것이다. 사장은 그래도 만약이라는 심정과 더불어 새로이 데뷔하는 스타의 탄생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페스를 참관하러 오는 것이고, 페스에서 조명 사고가 터져 그 아이가 완벽하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도록 하는 게 상관의 희망인 것이다.
 
 싫으면 가서 모든 걸 말해버려도 좋다는 말을 듣고, 일찌감치 집에 왔다. 그리고 계속 누워서 고민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 그는 너무 거칠다. 하지만 자꾸 이유 같은 건 몰라도 좋아, 단지 그를 따라야 한다, 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어서, 괴롭다.
 
 
 4월 10일.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내일 학교를 가기 전에 어머니께 이혼을 했는지 어떤지 여쭤봐야 하는 걸까. 궁금하지 않지만, 글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으면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할는지 알 수 없다.
 
 내가 비겁한지 어떤지는 나중에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일단 그에게 일은 계속 하겠다고 말했다. 계속 고민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를 되새기는 건 낭비기도 하고, 이제 와 손을 뗀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든 마음 속에 거뭇한 응어리가 남을 것이다. 결코,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가...
 
 
 4월 13일.
 
 불안하다. 그 여자는 아직도 내가 보낸 메일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읽었다는 것을 확인해도 이 찜찜한 기분은 떠나지 않을 것 같다. 그 메일이 이쪽의 의도대로 읽힐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상관은 단지 의심할 건덕지 정도만 되면 충분하다고 했고, 또 내게 맡긴 것을 보면 일에 크게 틀어버릴 요소는 아닌 게 거의 확실하지만 말이다. 혹은, 효과가 너무 커서 그 프로듀서가 스프링페스 참전을 없었던 일로 하는 건 아닐지, 이런저런 불안 요소가 차례차례 머릿속에 맴돈다. 상관의 일에 이토록 관여해 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나 고민하게 된 것도 처음이다.
 
 조금 우스운 기분이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되길 은근히 바라고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4월 27일.
 
 그의 계획대로 잘 될까? 페스는, 이제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5월 5일.
 
 일은 완벽하게 끝났다. 나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계획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조명을 조작하는 데에 조금 차질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가 현장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 모두 완벽하게 해냈다. 무대를 관람하러 온 사장은 이제 그 아이가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지 못했고 끝까지 극복하지 못하고 스러져 갈 수많은 별들 중 하나라고 믿을 것이다. 상관은 그 아이를 잘 안다고 말했다. 그 아이는 이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을 견디지 못해 날뛰며 일을 내고야 말 것이라고 했다. 확실히, 분노를 동력원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나도, 의지가 아닌 무언가를 동력원으로 삼고 있으니까. 동시에, 그는 앞으로 그가 맡아서 프로듀스해야 할 남자 아이돌 그룹을 제대로 성공시켰다. 그 아이의 실패와 대비되어 그들의 무대는 틀림없이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그가 유능한 것은 분명하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사기꾼이다.
 
 몰래 대기실에 갔다가 그 애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애는 프로듀서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곧 프로듀서가 어디에 갔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그리고 곧 다른 프로듀서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아이돌을 성공하게 만들 집념이 넘치는 프로듀서에게 그가 이번 페스를 성공시키기 위해 라인 프로에 잠입한 사람이었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걸레짝이 된 의리라는 것을 내던지고 자신을 돋보이게 해 줄 유닛 결성을 수락할 것이다. 상관의 생각대로라면, 아마 리더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사장이 방심한 틈을 타, 보기 좋게 성공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그녀의 유닛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한 사람의 배신에 대한 기억은 흉터로 남아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프로듀서라고 치면 정말 악질이었다. 나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표를 냈다. 상관은 납득했다. 길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명함 하나를 밀어주었을 뿐이다.
 
 "너 같은 꼴통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가 알지."
 
 사무실을 나가려고 보니, 그 곳에서 들고 나갈 만한 것이 없었다. 잡기가 조금 있었지만, 그것은 다음으로 비서가 될 사람을 위해 남겨두었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하는 말을 들었지만, 어떻든 상관없었다. 그의 사정을 상관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인 것이다.
 
 아무튼, 깨끗하게 그 지하 사무실, 아니 프로덕션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상관, 아니 아니... 그라면 나와의 계약 관계를 깨끗하게 처리해 줄 것이다. 사장에게서 나를 지켜 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해 줄 것이다. 그는 재능이 있으니까.
 
 그는 나의 신뢰를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를, 나의 첫 프로듀서쯤으로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
 
일단 마감을 지키기 위해 두 부분으로 나눴습니다. 내일까지 마무리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0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