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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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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3, 2013 03:08에 작성됨.

*얀은 없지만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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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욱, 투욱.
사람들 물살에 밀리며 겨우 역에서 빠져나오자 차가운 빗방울이 내 양복을 두들겼다. 겨울비라 하기에는 너무 늦고, 이른 봄비라 하기에도 너무 이른 비. 그 비를 개찰구를 빠져나와 역 입구에서 바라보며 난 난처함에 인상을 썼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을 때 내린 비다. 오늘은 야근 없이 일찍 끝나기에 일기예보를 무시하고 온 것이 화근이었다. 희미하게 어둑한 하늘에도 진한 먹구름이 눈에 띄었다. 그냥 잠시 지나치는 비가 아님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마냥 기다리다가는 잘못해 역에서 노숙을 하고서 그대로 아침에 후줄근한 차림으로 바로 출근하게 될지도 모른다.
난 들고 있던 가방을 머리에 쓰고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달음박질도 얼마가지 못했다. 그 사이 빗물이 내리는 것이 아닌 때린다란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해져 계속 무시하고 달리기가 힘들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난 근처에 있던 라면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저녁도 아직 인데다 찬 빗물을 맞고 나니 따듯한 국물의 냄새가 평소보다도 매력적으로 내 코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라면가게의 낡은 문을 옆으로 밀었다. 앞뒤로 미는 형식이 아닌 예스러운 좌우로 미는 문이었다. 가게 안은 바깥의 찬 공기에 닿자 금세 하얀 김이 나타났다. 급히 문을 닫았지만 이미 안경에는 하얀 김이 잔뜩 묻어 앞이 보이지 않게 된 후였다. 난 들고 있던 짐도 내려놓을 겸 언뜻 보이는 근처의 빈 자리에 앉아 안경을 벗었다.
주인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딱히 주문을 재촉하지 않았다. 손님이 많은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이 작은 고난을 무시할 정도로 여유 없는 곳은 아니었다. 안경을 닦고 있을 때 옆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돼지고기 차슈라면으로 주시겠습니까? 옆의 분 것까지 해서 두 그릇으로 말이죠. 제 거는 특대로, 옆의 분은 대자로 주시길 부탁드리옵니다.”

그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오랜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꽤 긴 시간이 지났다 여겼지만 사실은 짧았던 시간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그렇게 변하지는 않았다. 난 안경에 서린 김을 닦아낸 후 그것을 쓰고 옆을 보았다. 내 옆에는 서렸던 김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은발을 한 기묘한 여인이 웃으며 앉아있었다.
모자와 안경을 쓰며 나름 정체를 숨기려하고 있었지만 틈으로 삐져나오는 그녀의 특징들이 바로 정체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숨길 수 없는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나도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오랜만이야 타카네.”
“네, 귀하도 그간 무강하셨는지요?”  
“뭐, 그럭저럭. 너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자 말이 끊기고 말았다. 하얀 김이 가게의 창문에 어리고 고소하거나 매운 냄새들이 가게 안을 맴돌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라면의 맛을 미리 알려주려 애쓰고 있었다. 타카네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면을 보고 있었지만 옆에 앉아있는 타카네가 날 보고 있다는 것을 어쩐지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그녀와 만나는 것은 껄끄러웠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멋대로 사무소를 떠났기 때문에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도 느끼고 있었다.
라면을 기다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멋대로 떠나서 미안해.”

그녀들이 나를 원망하든 안하든 난 그 일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과부터 하였다.

“…….”

타카네는 말이 없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내 사과에 바로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부정해 내 사과를 괜찮다며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화가났다는 것이다. 그녀가 내 몫까지 미리 라면을 시킨 것은 이런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 위한 것일 지도 모른다.
그녀는 라면이 올 때까지 말이 없었고, 난 어쩐지 숨 막히는 것을 느끼면서 내 몫의 라면 그릇을 받았다. 그녀는 라면을 먼저 한 젓가락 집어먹었고, 그런 그녀를 따라 나도 같이 라면을 먹었다.
찬비와 찬바람에 시렸던 몸이 따듯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라면의 느끼한 듯 하면서도 고소한 돼지기름의 맛을 입에 머금으며 느낄 수 있었다.

“작별인사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았나요?”

한 젓가락을 먹고서 그녀는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물었다. 라면을 먹으며 말하는 대도 묘한 기품이 그녀에게 서려있었다. 난 젓가락질을 잠시 멈추고 라면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약간 붉으면서 감색 빛이 감도는 라면은 기름기인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름 정갈했던 꼬볼꼬볼한 면은 내 젓가락이 한 번 왔다가자 금세 자기들멋대로 흐트러져 섞여있었다.

“너희들을 보며 사과하기에는 명목이 없었어.”

난 겨우 그리 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할 침묵이나 이어질 질타를 피하려는 듯 곧장 라면을 집어 먹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따라 같이 라면을 먹으며 나에게 짧은 시간을 주고서 말했다.

“이유가 있어 그만 둔 것이 아닌가요? 정당한 이유라면 저희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어떤 이유가 있든 날 믿고 용서해줄 수 있을 거란 말이었다. 그것은 그녀들의 프로듀서였던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이유는 그녀들에게 바로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당당한 이유가 아니었다.

“정당한 이유가 아니야.”
“말할 수 없는 것이옵니까?”
“당시에는.”
“그럼 지금은요?”
“난 도망친 거였어.”

대답한 후 면을 집어 후룩하고 소리를 내어 먹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느긋하게 라면을 먹다가 내 대답을 듣더니 아예 젓가락질을 멈췄다. 평소라면 진작 반 이상은 비었을 라면 그릇이 지금은 그다지 양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말이옵니까? 제 부족한 소견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타카네는 내심 냉정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평소 날 믿고 따르던 그녀로서는 나의 그 말이 충격이었던 듯 했다.

“말 그대로야. 난 도망친 거야.”
“저희들의 일은 늘었습니다.”
“그랬지.”
“인기도 많아졌었습니다.”
“맞아. 인기와 지명도가 많이 늘었었지.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작은 사건에 흔들리지 않을 입지도 쌓아갔었습니다.”
“쿠로이 사장의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말이야.”
“…….”

그녀는 말이 없었다. 바삐 움직여야할 그녀의 젓가락은 멈춘 상태였다. 

“……그럼 어째서?”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묻고 나서 그녀는 기다리지 않고 다시 라면을 먹었다. 물은 자신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지 먹는 속도는 현저하게 느렸다.
난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기다린 후 답했다.

“현실은 괴로운 법이니깐.”

내 말에는 스스로 느낄 정도로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꼭 입안에 가득 머금었던 담배연기 같은 그 답답함은 보이지 않는 단어에 찐득하게 엉켜있는 듯 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럴 것이다. 즐거웠던 그 분위기 속에서 어떤 괴로움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 그녀들은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니다.

“원래 난 아이돌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 그런 날 타카기사장님이 감이 왔다며 멋대로 권했던 거지. 타카기 사장님 말대로 재능이 있었는지는 몰라.”
“당신은 우릴 훌륭하게 이끌어주었었습니다. 당신에게는 틀림 없이 재능이…….”
“잘하는 것만이 재능을 증명하지 않아.”

차갑게 끊어낸 칼날 같은 말에 그녀는 입을 멈추었다. 난 말하면서 계속 라면에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놀란 듯 숨을 들이쉬다가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며 난 천천히 입을 열어갔다.
오늘 그녀의 먹는 속도는 굉장히 느리다. 천천히 이야기해 나가도 좋았다.

“내가 아이돌을 그만둔 이유는 그 일이 지나치게 즐거웠기 때문이야.”

이해할 수 없는 내 변명에 타카네는 말없이 이어질 말을 기다렸고, 이어 계속 말했다.

“아이돌들을 프로듀스 하는 건 즐거웠어. 하지만…….”



아이돌들의 명성이 높아지며 그녀들은 나날이 아름다워지고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프로듀스로서 기쁘고 보람찬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 따라 그녀들의 아이돌로서의 시간도 지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아이돌을 은퇴하고 배우나 가수, 예능, 모델 등으로 자리를 잡아갈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전문 프로덕션으로 이직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남아서 우리 사무소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말이다. 어쩌면 모두 좋은 아이들이니 사무소에 남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두는 사람은 나온다. 당장 아즈사씨만 해도 이 업계에 끝까지 몸을 담으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미나 마미도 너무 어려서 모르고, 야요이도 집안 사정만 좋아지면 일을 그만둘지도 모른다. 아이돌들이 떠나는 것은 슬프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일 갖고 좌절하거나 서운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하게 되었다. 모두 순탄하게 풀릴까? 나는 그 일을 계속 맡을 수 있을까? 사무소가 커지면서 새로운 아이돌들도 입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아이돌이 오면 지금까지 했던 일을 또 반복해야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익숙한 일이니 예전처럼 힘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시 했던 일들을 처음부터 반복하게 된다. 그것을 지금처럼 즐길 수 있을까? 지금 아이돌들과 즐기던 것처럼 일을 해나갈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 때는 지금과 다르다. 일이 더 쉬워지지만 동시에 기준치가 생겼으니 그만큼 그 아이들에게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 아이돌이 서서히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난 예전처럼 기뻐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왜 그 정도 밖에 못하는 지 질책하며 레슨을 시킬 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안만큼 그 아이들을 교육하고, 어느 정도로 아이돌에게 요구하는지 알기에 그 만큼만 아이돌에게 요구할 것이다. 그래, 단순 회사의 업무처럼 말이다. 
단결이니 동료니 하는 그런 훈훈했던 감성들은 잊어 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프면서 또한 불안해졌다.
과연 난 그 일들을 끝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어느 곳도 그렇지만 아이돌 업계는 특히나 입소문이 심한 곳이다. 한 번의 실수로 바로 떨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업계다.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따로 조사를 하며 그것이 아닌 경우 복귀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업계는 그렇지 않다. 잘못해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지간한 연줄과 실력, 권력이 없으면 다시는 돌아오기 힘들다.
쉽게 말해 잘나가고 있다 해도 앞날이 불안하고, 아이돌이 아닌 프로듀서인 난 위험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지 못한다. 물론 사무소가 커지고 아이돌이 성공함에 따라 보너스와 월급이 올랐지만, 대기업의 직원들 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다. 그들도 언제 짤릴 지 모른다지만 그래도 나름의 안정성은 있고 경력이 되어 잘린 후 다른 회사에 입사하기 소월하며 동시에 그 만큼의 위치에서 시작하게 된다.
거기다 이 업계는 비슷한 수준의 인간들을 만나면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다. 온갖 더러운 뒷소문과 더러운 일들이 오가는 곳이다. 찬란해 보이는 것은 카메라 앞의 아이돌이다. 카메라가 꺼진 후의 아이돌에게는 질 나쁜 소문이 흐르고, 실제로 베게영업이니 하면서 그런 일들을 하는 아이돌도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아이돌의 뒤에는 업계사람들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 우리들은 돈 좀 만질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 볼 때는 그저 심부름꾼 같이 보일 뿐이다.
차라리 일반 회사원이면 그러려니 하면서도 성실하단 시선으로 보지만 우리를 보는 것은 그렇지 않다. 많이 벌거나 성공하면 뒤에서 무슨 일을 한 것이 아닌지 의심부터 하고 본다. 즉, 성공할수록 즐겁기 보다는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며 아이돌들에게 나쁜 일이 가지 않도록 신경 쓰게 된다. 실제로 우리 아이돌들에게도 베게영업 같은 질 나쁜 일은 아니지만 좋지 않은 이미지의 일들이 오고는 했다. 물론 모두 거절했지만, 그것도 지쳐갔다.
나는 우연히 눈에 띄어 아이돌 업계에 입사한 사람이었다. 결코 이 모든 것을 예상하거나 상상하지 못했고, 오히려 카메라 앞의 그녀들을 동경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그런 것들을 알아가는 것은 괴로웠다.
주위 친구들은 회사에 치여 살며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일을 하는 나를 부러워하는 듯 했지만 난 그것을 부정했다. 차라리 그런 평범한 회사 일을 하고 싶었다. 사실 타카기 사장님을 만나기 전에는 평범하게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내 이야기를 듣고 대기업에서 일하던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회사에 한번 지원해 볼래? 확실히 장담은 못하지만 그래도 도와줄 수는 있는데.”

그 제의에 난 거짓말처럼 바로 응했다. 그렇게 애정을 갖고 프로듀서 일을 해왔으면서 이것을 그만둘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 기뻐한 것이다. 그만큼 힘들었고 한계가 왔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날 힘들게 했다. 난 혼자가 아니다. 보답해야할 부모님이 계셨고, 그 부모님이 원할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미래의 아내도 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이 불안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나 혼자 실패하고 망가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의 실패는 날 이만큼 키워주신 부모님에게도 폐가 되는 것이다.
난 곧장 타카기 사장님께 사과를 하며 사표를 냈다. 바로 그만두지는 못하고 후임이 올 때까지 한 달을 일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싫지 않았다. 어쨌든 이 일이 싫은 건 아니었으니깐.
난 불안한 미래와 안정된 직장 중에서 결국 평범하지만 안정된 일을 선택한 것이다.
날 믿고 같이 일해 준 아이돌들에게 미안했다. 결국 힘들어 도망가 버린 것이니. 사장은 그런 날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 걱정을 덜어주었다. 지금의 사무소라면 좋은 프로듀서를 고용할 수 있으니 아이돌은 걱정하지 말라고.
난 한 달 동안 평소처럼 일하며 아이돌과 헤어질 준비를 했다. 그리고 새로운 프로듀서가 오자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그대로 아이돌과 인사도 없이 회사를 도망치 듯 떠났다. 사장은 나에게 아이돌과 작별인사라도 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도망가면서 그녀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덕분에 작별 식도 없이 난 업계에서 떠나게 되었다. 아이돌이나 업계사람의 연락은 번호를 바꾸면서 간단히 끊겨버렸고, 취직 준비를 위해 이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돌이 갑작스럽게 떠난 날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그 이후로는 친구의 조언으로 면접과 서류를 준비해 회사에 지원하고, 겨우 붙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난 아이돌 업계에서 떠나 평범한 회사원이 되고 지금도 잘 다니고 있었다.



타카네는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 말없이 라면을 먹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충격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믿었던 프로듀서가 자신들을 내팽개치며 도망간 것이니 말이다. 물론 뒷일을 준비하고 떠난 것이지만 그래도 초창기에 함께한 사람이 떠난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말도 없이 말이다.
비겁한 사람이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다.
솔직히 말해 이후 난 그녀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모른다. 떠나고서 가끔 뉴스를 봤지만 그조차 시들해져 버렸다. 업계를 떠나자 거짓말처럼 연예개의 일에 흥미를 잃게 되고,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 사무소에는 누가 떠나고 남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은퇴한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나도 라면을 먹기 시작했고, 내 몫의 라면을 다 비웠을 때는 이미 그녀는 다 먹은 후였다.
우리는 계산을 하고서 말 없이 가게에서 나왔다. 빗줄기가 많이 약해졌다.
타카네는 가게 천막에서 하늘을 보다가 무심코 물었다.

“지금 하시는 일은 즐거우신지요.”

그 말에 난 하얀 입김만을 내뱉다가 하얀 입김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시간 만큼 끊어서 짧게 대답했다. 

“즐겁지는 않아. 하지만, 불안감은 없어.”

즐겁지 않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예전처럼 나타나지는 않는다. 
안정감.
이것이 가져다주는 미래의 안식은 즐겁지 않아도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거기다 대기업의 사원이란 직함은 다른 이들에게서 부러움과 존경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단순 유명 아이돌의 직함하고는 그 시선이 틀렸다. 
아이돌의 일은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서나 그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기업의 이름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높은 평가를 듣게 된다. 실제로 어머니 말에 의하면 대기업에 다니면서 괜찮은 선자리도 들어오고 있다는 듯 했다. 그렇다고 선을 볼 생각은 없다. 아이러니 하지만,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였던 프로듀서의 일을 할 때마다 지금의 일이 여자들을 만날 기회가 더 많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롭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연애가 가능한 여자들을 만날 기회가 늘었다.
프로듀서 일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해도 모두 그 대상이 업부 대상이고 차갑게 말하면 상품과도 같았다. 결코 내가 손댈 수 없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내연애가 금지도 아니고, 스캔들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소개팅도 할 수 있다. 안정감만큼 연애도 더 자유로워졌다. 
실제로 같은 회사 내의 여사원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기도 했다.

“최근의 톱 아이돌이 누군지 아십니까?”

타카네는 공허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난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다. 타카네는 고개를 숙였다.

“저였습니다. 다른 사무소의 몇 명도 그에 가깝지만, 현 톱 아이돌은 저이옵니다.”

타카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랑하며 밝힐 수 있는 일이지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목소리는 슬펐다.

“……대단하구나.” 

허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나라면 그 소식에 정말 놀라워하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 톱 아이돌이란 칭호는 연예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찌되든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아이돌의 음악에 열광하는 것은 학생들과 팬인 소수의 어른들 뿐이다. 평범한 회사원들은 끽해야 유명 아이돌 한, 두 명의 이름을 아는 것이 한계였다. 
톱 아이돌은 틀림없이 당시의 나에게도 최고의 목표였다. 그랬는데 지금은 그 단어에 어떤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아, 1등을 한거구나. 대단한데.’ 정도의 작은 감탄. 그것도 무미건조한 그런 감성이었다.

세상 모두에게 사랑 받는 아이돌.

그 목표에 어울려주었었지만, 그것의 단어는 정확하게 말하면 좀 다른 것이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사랑받는 아이돌

-이란 것이 정확한 말이었다. 당시에는 알면서도 전자의 단어를 믿으려 했다. 지금에 와서는 후자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타카네는 아직 빗줄기가 떨어지는 천막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젖어가는 등을 보이며 날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톱 아이돌이 되면 말없이 떠난 귀하가 저를 봐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군요.”

타카네의 여자로서는 큰 키가 왜속하게 보이며 떨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윤곽선이 되어 흔들렸다.

“당신은 떠나고서 저희를 전혀 봐주지 않았습니다. 톱 아이돌이 되었거만, 당신은 전혀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타카네는 뒤돌아보았다. 빗줄기인지, 눈가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톱 아이돌이 되면 당신이 기뻐해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혹은 연락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허나, 전혀 아니었군요.”

타카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의 냉정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흰 머리카락들이 얼어붙은 듯 목덜미와 옷에 달라붙어 있었다. 
굉장히 추워보였다.
난 짧게 사과를 했다.

“미안.”
 
-짜악!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 사이에 내 뺨을 때린 소리가 같이 퍼져갔다. 타카네는 화난 표정으로 날 때렸다가 이내 손을 내렸다. 여전히 눈가에서는 빗물인지 모를 물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 입은 씰룩이면서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사과를 하시니 이 정도 화풀이는 용서해주시겠지요.”

그리고 등을 돌리고서 짧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앞으로도 무강하시길.”

빗속을 비틀거리며 떠나가는 그녀를 난 붙잡지 못했다. 입고 있던 옷을 덮어주거나 택시를 불러줄 수 있었지만 그런 작은 친절도 베풀지 못하고 끝내 이렇게 그녀를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엮였던 옛 업계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시죠 타카네와 만남을 마지막으로 난 옛 업계에 대한 작은 미련마저 끊을 수 있었다. 그 뒤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다가 좋은 관계를 맺어오던 회사동료와 사귀게 되었고, 그 뒤로 또 시간이 지나 애인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자식을 낳게 되고, 자식이 중학생이 되었을 쯤에야 우연히도 자식이 즐겨보는 프로에서 아이돌을 보게 되었다.
더 이상 내가 아는 아이돌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때 같이 했던 765 아이돌도, 전설처럼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던 아이돌들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아이돌이 그 때와는 다른 감각의 유행곡을 부르며 웃으며 춤추고 있었다.
솔직히 좋은 노래인지는 모른다. 그냥 인기가 있으니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구나- 하는 감상을 가질 뿐이었다.
난 아이와 함께 텔레비젼을 보다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평범한 일상. 그런 일상 속에서 난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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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차라리 얀을 써줘요! 란 말하기 없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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