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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의 노예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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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26, 2014 01:59에 작성됨.

 

 

0

 

“다친 데는 없지?”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초여름이었습니다.

 

“피, 피가··· 머리에서 피가 나요···!!”

 

그 사람은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백발.

스테인드글라스보다 반짝이는 붉은 눈.

하얗다못해 투명한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은 처음 보는 나를 위해 이렇게 피를 흘려주고 있었습니다.

나를 구하기 위해, 두려워서 심장마저 떨리는 부조리한 폭력에 맞서고, 전리품

인 것처럼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별 거 아냐.”

 

감정의 조각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무성의한 대답.

저를 구해준 행동에 어떤 이유도 붙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저이기에 구해준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던 사람은 누구라도

구해주었을 것입니다.

 

첫 만남부터 그 사실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시야에 담은 순간, 부드럽게 요동치는 심장의

고동소리에 황홀해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1

 

“정말··· 보고 싶었어요, 선배···.”

 

붉은빛이 섞인 갈색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가녀리고 작은 동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작은 소녀.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에,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가녀린 분위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소녀.

 

그때 이후로 처음으로 만나는 오가타 치에리였다.

 

“치에리···?”

“선배, 이쪽으로···.”

 

치에리는 내 몸을 부축하며 강변의 벤치로 나를 이끌었다.

사실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녀석에게 이렇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치에리도 마찬가지고.

 

치에리가 나에게 의지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나 역시 치에리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 교훈을 1년 전에 뼈저리게 깨달았는데도.

지금의 나는 어쩔 수 없이 치에리에게 의지하고 있다.

 

핑계는 좋구나.

꼴사나워서 구역질이 날 정도야, 나.

 

“자, 여기··· 앉으세요.”

 

치에리는 조심스럽게 나를 벤치에 앉혔다.

그리고 어디서 구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우롱차

캔을 내밀었다.

 

“좋아하셨죠···?”

“···고마워, 치에리.”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우롱차를 선뜻 받아들었다.

사실 누가 봐도 지금의 나는 지독한 몸살에 걸린 환자처럼 보였다.

식은땀은 기본이고, 오한으로 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 거울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안색도 굉장히 창백했을 것이다.

 

이 정도는 그냥 인간으로서의 선의라고 봐도 괜찮겠지?

 

솔직히 치에리가 나에게 더 이상 정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르고 멋대로 도망쳐버렸으니··· 나를 원망하고 있을게

분명하고, 나 또한 이 녀석의 원망을 그대로 받아들일 셈이다.

 

치에리가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건 어디까지 그녀가 착한 아이기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따뜻한 우롱차를 한 모금 넘겼다.

순식간에 퍼지는 온기에 방금 전까지 엉망진창이던 머릿속이 확 가라앉는

감각이 느껴졌다.

 

“덕분에 살았어, 치에리. 아니, 이제 ‘오가타’ 라고 불러야 하나?”

“······.”

 

치에리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본다면, 아마 이것은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단번에 긍정하지 않은 것이다.

 

“뭐랄까··· 1년 전보다는 키가 컸구나?”

“······.”

 

치에리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시선을 나를 향하지 않고 노을빛이 반사되는 강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공허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이었을까?

 

“그게··· 다른 애들은 잘 지내고 있어? 이가라시나 사쿠마나 미즈모토도···

오가타의 친구들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배은망덕하기는 하지만 이건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물론 치에리가 나에게 친절을 베푼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사람 말을 무시하고

있을 거라면 굳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올 필요도 없었잖아.

 

그래. 일단 그래도 여기서 명분은 치에리에게 있다.

내가 이 녀석에 한 짓을 생각하면··· 오히려 맞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니까.

 

“선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치에리가 말을 꺼내는 바람에 엄청 놀랐다.

하마터면 벤치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어째서인가요···?”

 

“응?”

 

“어째서··· 저희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거예요?”

 

순간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치에리의 목소리가 무섭게 느껴졌다.

등줄기에 액체 질소를 들이부은 느낌이다. 전신에 내달리는 공포가 신경을

뻣뻣하게 굳혀버린다.

 

“오가타··· 그건···.”

“왜!!!”

 

치에리가 소리를 질렀다.

 

 

“왜 저희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건가요?!!”

 

 

이제야 알았다.

치에리는 내 말을 고의로 무시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들리지 않았다.

내가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불렀다는 사실에 모든 의식이 쏠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치에리, 아직 너는.

너는 아직도ㅡ

 

“역시 쿄코쨩인가요···?”

“그렇지 않아.”

“거짓말··· 선배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쿄코쨩밖에 없으니까··· 선배에게

그럴 제안을 할 사람은··· 쿄코쨩밖에 없어요···.”

“그게 아니라니까. 쿄··· 아니, 이가라시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거짓말!!!”

 

 

 

 

그 작은 몸에서 나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외침이, 폭탄을

터뜨리는 것처럼 치에리의 몸속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멍청하게도 나는 압도당해버렸다.

 

정말 멍청한 일이지.

남들에게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으며 시선을 끈다.

타고난 유약함에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충분히 압도하는 기세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적을 만들지 않는 재능에 가까운 상냥함.

모두의 앞에서 반짝반짝 빛날 수 있는 우상(idol)의 재능.

 

그런 그녀의 재능을 제일 먼저 발견한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오가타··· 아니, 치, 치에리··· 너 설마 쿄코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지?

그렇지? 그런 거 아니지···?”

“쿄코짱이··· 걱정되시나요···?”

“당연하잖아!! 지금은 이렇게 비틀렸지만··· 그래도 너희는 내 소중한 사람들이

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런 소중한 사람들을··· 선배는 버리고 떠났군요···.”

“아···.”

“아니··· 아니에요··· 선배는 저희를 버린 게 아니에요··· 도망친 거죠···?”

 

나는 너희들을 버린 게 아니야.

그저 도망쳤을 뿐.

 

나약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절망해버렸다.

그리고 그 절망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왜··· 도망치신 거죠···? 선배는···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절망해버렸으니까.”

“도대체 무엇을요···?”

“내가 왜 도망칠 수밖에 없었을까? 내가 왜 견딜 수가 없었을까? 그 이유를

말해줘? 다름 아닌 소중한 너희들이 내 절망이었으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치에리는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리다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눈에 굵은 물방울이 글썽글썽 맺혀갔다.

 

“그렇네요··· 선배는··· 피해자인가요···?”

“아니, 나는 피해자가 아니야.”

 

도망쳤다는 건 표현이 그나마 좋은 것이다.

너희를 그냥 남겨두고 도망쳤으니··· 그건 너희를 버렸다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원하느냐 원하지 않았느냐의 차이에 불과해.

 

“아니요··· 선배는 피해자에요···.”

 

치에리가 나를 보는 그 시선은 정말 불유쾌했다.

정말 꽤 오랜만에 보는 동정의 눈빛.

 

그것은 싫은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선배는 나를 위해 다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저뿐만이 아니지요? 저희 모두를 위해서··· 선배는 뭐든지 했어요··· 특히

저를 위해서!!!”

“하지 마!!!”

 

제발 그것만은 그만둬.

그것은 내 가장 끔찍한 절망이야!

 

“치에리, 제발 부탁이야. 제발 그것만은 잊어줘. 너는 내가 구해줬다고 생각하

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야!!”

“선배는 저를 구해줬어요!! 이 세상에서 오직 선배만 저를 구해줬다구요!!!

선배가 아니었으면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만!! 말하지 마!!!”

 

제발 부탁이야.

그것만큼은 정말ㅡ

 

 

“선배는 그 사람을 죽여줬으니까···!!!”

 

 

찌잉, 하고 머리가 울렸다.

손에 들려있던 우롱차 캔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눈물샘마저 풀려버렸는지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건 아닌데.

정말 이런 건 아닌데.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내가··· 내가··· 그 사람을 죽인 건···.”

 

덜덜 떨리는 입을 간신히 고정시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너를 구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리고 덕분에 저는 구원받았어요.”

“그렇지만··· 이런 게 아니야. 나는 너에게 감사받고 싶지 않았어. 그 일은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내 마지막 일이었어. 그 일만 끝나면··· 나는 너희들

에게··· 그리고 너에게 미움 받아도 상관없었으니까. 아니, 나는 너희들에게

미움 받아야만 했어!!”

 

 

ㅡ너희들은 나를 미워했어야만 했다고!

 

 

“너는 나한테 감사해서는 안 돼, 치에리!!! 나는 사람을 죽여서 너를 구했다!!!

결과가 어쨌든 나는 사람을 죽였지?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야. 너는 그런

죄를 저지른 나를 미워해야만해!! 경멸해야만 했었어!!! 그리고 너는 나 같은

녀석이랑 더 이상 연관되지 않고 그대로 빛나주기만 했으면 그만이라고!!!”

 

나는 그것만으로 좋았는데!

내가 시궁창으로 뛰어드는 것만으로 끝나면 해피 엔딩인데!

 

“그렇지만 너는 내가 그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했지?! 오히려

나를··· 나를···!!!“

 

 

“좋아해요, 선배.”

 

 

음정 하나하나가 내 머리를 세게 때린다.

나는 너희를 떠나기 위한 마무리로 그 일을 실행에 옮겼다.

너희들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 미뤄왔던 그 일을, 경멸과 증오를 각오하고

죄를 저질렀다.

 

“그때 확실히 깨달았어요.”

“그만··· 이제 그만···.”

“저는 선배를 좋아하고 있어요···. 언제나 선배 곁에 있고 싶고··· 선배에게만

미소 짓고 싶고··· 선배와만 얘기하고 싶고··· 오로지 선배의 모습만 눈에 담고

싶을 만큼···.”

“부탁이야, 치에리. 그 말만은 하지 말아줘. 부탁이니까, 제발 부탁이니까!!”

 

그러나 치에리는 잔인하게 비수를 꽂는다.

 

 

“저는 선배를 사랑하고 있어요···.”

 

『 저는 선배를 사랑하고 있어요···. 』

 

 

1년 전 마지막 그 모습과 달라진 게 없다.

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깊어져버렸다.

내가 구하고 싶었던 치에리는··· 오히려 내 절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해, 제발!!!”

“가엾은 선배···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괴로웠죠···?”

“부탁이니까··· 제발 그만해줘···.”

“치히로 씨에게 그런 일까지 당하고··· 저는 왜 선배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걸까요···? 저도 선배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은데···.”

“···뭐?”

“하지만 안심해주세요, 선배. 이번에는··· 이번에는 제가 선배를 도와드릴

거예요. 예전처럼 선배를 잃지 않아요··· 잃지 않을 거야···.”

 

잠깐만. 이거 뭔가가 이상해.

 

“네가 어떻게 치히로 씨를···?”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팍! 치에리가 내 가슴팍을 세게 밀쳐냈고, 기운이 빠져있던 나는 버티지 못한

채 강변을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하필이면 밑에 있던 뾰족한 돌멩이가 명치에 맞았다.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나는 간절히 산소를 원했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

는지 어느새 밑으로 내려온 치에리가 내 머리를 붙잡았다.

 

“잃지 않을 거야··· 잃지 않을 거야··· 잃지 않을 거야··· 잃지 않을 거야···.”

 

고장 난 인형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치에리는 내 머리를 잡고 강물 속에 처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산소를 요구했던 폐가 미친 듯이 요동친다. 죽음보다 더 괴로운

산소에 대한 갈망이 끔찍할 정도로 나를 유린했다.

 

“선배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이건 그냥 선배가 저를 떠난··· 심술···?”

“컥! 커헉!! 큭··· 쿨럭!!”

 

이럴 때 귀엽게 말하지 말라고.

알 수 없는 살의까지 솟구친다.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인지 치에리를 향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쿄코쨩은 잘 있어요···.”

“···다행이네.”

“쿄코쨩은 선배를 위해서 그런 제안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선배가 쿄코쨩을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저도 쿄코쨩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건 내가 쿄코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길가의 돌멩이와 똑같은 취급을

할 것이라는 말과 똑같았다.

어디서 이렇게 비틀어진 걸까?

처음부터 그럴 수밖에 없도록 정해진 걸까?

 

치에리는 잔뜩 젖은 데다 진흙투성이인 내 머리를 꼬옥 껴안으며,

 

“쿄코쨩··· 마유쨩··· 유카리쨩은 에히메에 있습니다··· 곧 돌아올 거예요.”

 

잠깐만.

이거 설마?

설마?!

 

 

“아이돌과 프로듀서··· 예전처럼 다시 선배와 함께하게 되어서 기뻐요.”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의식은 저절로 끊어져버렸다.

 

 

2

 

 

『 살아줘. 』

 

『 그리고 행복해줘. 』

 

『 더 이상 내일을 볼 수 없는 내 몫까지. 』

 

 

3

 

 

“그건 무리야···.”

 

뜻 모를 변명을 중얼거리며 나는 눈을 떴다.

나는 전형적인 여성용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이마에는 차가운 물수건의

감촉도 느껴지고.

아니, 뭣보다 이 방은 어딘가 낯이 익은 느낌이다.

분명 예전에 본 적이 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어났구나.”

“미후네 선생님···.”

“원래처럼 이름으로 불러줘도 좋을 텐데.”

“네네, 미유 선생님.”

 

그렇구나. 여기는 담임선생님의 집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미후네 미유.

 

아주 오래 전에 전에 딱 사흘 정도 신세를 진 적이 있다.

길거리를 헤매다가 거의 굶어죽게 생긴 나를 그녀가 주워왔다고나 할까?

그때는 그녀가 고교 교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어쨌든 이틀 만에 우연히 그녀가 교사라는 사실을 알았고, 신원불명인데다

위험한 일에 얽혀있는 남자애를 데리고 동거해봤자 그녀의 경력에 흠이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바로 다음날 몰래 떠나버렸다.

 

그러다 올해 초에 그녀를 다시 만났다.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형태로.

만나자마자 울먹이며 뺨을 때리는 바람에 꽤나 놀랐었지.

 

그러고 보니 여자에게 뺨을 얻어맞는 건 내 인생에서 단 두 번인데··· 그게

전부 이 사람의 작품이다.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강변에 쓰러져 있었어. 아침 일만 생각하면 그냥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이 사람 전형적인 야마토 나데시코처럼 보여도 은근 뒤끝 있다.

자퇴서를 내자마자 내 뺨을 세게 때린 것만 봐도 의외로 한 성질하는 성격인

것이다.

 

“이마가 불덩이라서··· 걱정이 돼서 데려왔단다.”

“옛날부터 폐만 끼치네요.”

“자각하고는 있구나.”

 

역시 아침 일을 마음에 두고 있어! 두고 있다고!!

 

“아침에는 의기양양하게 자퇴서를 냈으면서··· 이게 뭐니? 정말 어쩔 수 없이

손이 많이 가는구나.”

“아하하··· 하하···.”

 

만약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자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면 따귀 정도로 끝나지

않겠지?

미유 선생님이 날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말이다.

 

“저기 그럼 지금 몇 시인가요?”

“밤 9시. 누나라는 분께 얘기는 드렸으니 안심하렴. 오늘은 늦었으니 자고

가도 좋아.”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하여간 대책 없이 사람이 좋은 것도 문제다.

이러니까 학기 초에 클래스의 학생들이 미유 선생님을 물로 봤지.

내가 옆에서 조금이나마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폭주하는 학생들에게

질질 끌려 다녔을 거다.

 

“그만 가볼게요.”

“이제 열이 막 내렸는데 괜찮겠니?”

“문제없습니다. 옛날에는 몸살에 걸려도 일을 했는걸요.”

 

이건 진짜다.

 

“신세 졌습니다. 이제 앞으로 미유 선생님과 만날 일은 없겠지만요.”

“자퇴한다는 말··· 다시 생각해볼 수는 없겠니?”

 

현관 앞에서 신발 끈을 묶고 있던 내 등 뒤로 미유 선생님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슬프게 말하면 괜히 마음이 약해진단 말입니다.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이잖아. 모든 걸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잖니.”

“자퇴가 꼭 인생을 포기한다는 건 아니잖아요. 갑자기 한 방에 인생역전에

성공한다거나.”

“다 알고 있어.”

“···어디까지요?

“···다 알고 있어.”

 

못 당하겠다.

역시 어른이라는 건가?

 

“미유 선생님은··· 유독 저에게만 친절하시네요.”

“손이 많이 가니까.”

 

미유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점이 옛날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닮았어.”

“······.”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일찍 결혼을 했어. 아들도 있었어. 그렇지만 교통사고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단다.”

“···아들입니까?”

“너를 보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자꾸만 생각나. 손이 가는 점이나··· 그리고

남에게 상냥한 점도.”

 

선생님이 미망인이라는 소문을 듣기는 했는데 그게 진짜였구나.

어쨌든 미유 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아들을 연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배려해준 것도, 유독 잔소리를 많이 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자기 아들

에게 향하지 못했던 모성애의 발로였을지도.

 

젠장, 이런 얘기까지 들으니 자꾸만 죄책감이 생기잖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렇구나.”

 

자퇴를 취소할 수는 없다.

나는 이미 목숨을 한 번 버렸고, 그 목숨을 다른 사람이 주웠다.

목에 채워져 있는 목줄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제 그만 확실히 자각해라.

나는 이제 시부야 린이라는 신데렐라의 노예라는 현실을.

 

 

“힘들면 언제라도 찾아오렴.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미유 선생님의 집을 나섰다.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던 한 마디를 듣지 못했다.

 

 

“너는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랑 닮았으니까···.”

 

 

3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른들에게 있어서 9시 정도는 밤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본방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거리에서 한 잔 걸치러 가는 들뜬 어른들이 널려있었고,

주위에 민폐를 끼쳐대며 핑크빛 오오라를 뿜어내는 눈꼴사나운 커플들도

있었다.

 

난 솔직히 주정뱅이보다 저 커플들이 더 짜증나지만.

 

“배고파···.”

 

아침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거기다 아까 속을 게워내기까지 했으니 지금까지 허기를 느끼지 못한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나는 대충 요기나 할 요량으로 가까운 곳에 있던 로손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디어디··· 칼로리 바가···.”

 

평소 애용하던 칼로리 바를 찾던 나는 진열대를 보고 그대로 굳었다.

 

[ 청색의 가희 키사라기 치하야가 홍보하는 ○○칼로리 바!! ]

 

젠장 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나는 주저하지 않고 편의점을 뛰쳐나왔다.

허기고 뭐고 식욕이 싹 가셨다.

비어있는 속인데도 또 구역질이 나려한다.

 

“하루 정도 굶는다고 인간은 죽지 않아···.”

 

스스로도 그 결정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집에 돌아가서 일찍 자자.

어차피 내일부터 아침 일찍 CG프로덕션 사무소에 출근해야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 천상의 가희 키사라키 치하야의 라이브 무대입니다!! ]

 

대형 스크린을 가득히 채우는 아이돌, 키라사키 치하야의 모습이 내 망막에

깊숙이 새겨진다.

 

역시 성공했구나, 치하야.

솔직히 기뻐.

 

너의 과정에 나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더 기뻤을지도 모른다.

나만 없었더라면ㅡ

 

“됐어. 이제 네거티브한 생각은 그만.”

 

내일부터 새로운 아이돌들과의 일상이다.

더 이상 얽매이지 말자.

치에리는··· 어떻게든 되겠지. 우선 지금은 너무 피곤해.

 

나는 귀에 뮤직 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꽂고 일부러 음량을 크게 튼 채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치하야의 노랫소리는 내 귓가에 빠짐없이 흘러들어왔다.

 

4

 

늦은 밤의 공원.

가로등 하나 밖에 켜지지 않은 쓸쓸한 공원에 한 소녀가 벤치에 앉아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오가타 치에리.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뭔가를 한참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좋아.”

 

살짝 눈을 뜨며 치에리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휴대전화를 꺼내 다이얼을 조심스럽게 누른다.

 

통화 대기음이 울리고 그 기다림은 짧았다.

 

“여보세요···?”

 

오가타 치에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ㅡ쨩의 소중한 오라버니를 찾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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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저에게 얀데레는 좀 부담스럽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코스믹 호러가 더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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