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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의 노예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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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20, 2014 03:14에 작성됨.

 

0

 

오늘이야말로 나는 죽기로 결심했다.

등교하자마자 교무실로 들어가 담임선생님에게 자퇴서를 건네 드렸다.

 

건네 드리자마자 뺨을 세게 얻어맞았지만.

 

“아프네···.”

 

담임은 26세의 미인 여교사였고, 뭔가 애수에 차있는 그 분위기 때문에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다.

화분에 심어져 있는 귀한 난초 같은 느낌?

아니, 이런 비유는 이상한가?

소문으로 듣자면 최근에 남편을 잃었다고 하는데··· 애초에 그 선생님이 결혼

이나 했을지 의문이다.

평소에 남을 잘 돌봐주는 성격으로 봐서 결혼은 했을 것 같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선생님은 미망인인가?

 

뭐, 어쨌든 이제 상관없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이야말로 나는 죽기로 결심했다.

16세라는 굉장히 어중간한 나이로 인생을 마감하기로 했다.

 

“조용하네.”

 

오전 시간대의 학교 옥상에 누군가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우리 학교는 옥상에 학생이 들어갈 수 없도록 잠가놨지만.

굳이 학교를 최후의 장소로 삼고 싶은 건··· 나에게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녀석들에게 피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

옥상에서 투신 자살이라는 스마트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죽고 싶지는 않아.

기왕 마지막 가는 길이니··· 조금이라도 유니크하게 가는 게 좋겠지.

 

철컥.

나는 손안에 들려있던 권총을 장전했다.

묵직하고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의외로 기분이 좋았다.

 

6연발 리볼버.

예전에 연쇄 살인범의 살해 현장을 조사하던 강력계 형사에게서 슬쩍한 물건.

자기 총을 잃어버린 그 형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나는 이 총을 내 머리를 향해 쏠 것이다.

그리고 내 인생은 거기서 종료된다.

 

러시안 룰렛을 할 여지도 없이 여섯 발 전부가 장전된 리볼버의 총구를 관자

놀이에 밀착시켰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습니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굳이 할 말이 있다면.

 


“모두 안녕.”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 방아쇠 위에 얹은 손가락에 무게를 실었다.

이제 1밀리만 더 움직이면 모든 게 끝나ㅡ

 


“권총 자살이라니. 굉장히 특이하구나, 당신.”

 


무심코 총을 내려버렸다.

조금 짜증이 나서 신경질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하긴 내 인생이 그렇지.

뭘 하든 이렇게 방해가 들어온다.

 

“···여기 출입금지인데.”

“알고 있어. 예뻐 보이는 남자아이가 다 죽을상을 하고 몰래 들어가고 있어서

따라와 본 거야.”

 

예뻐 보이는 남자아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선생님 이후로 이 녀석

처음이다.

어떻게 보면 예쁘다는 말을 이 녀석에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검은 생머리가 인상적인 요즘 여고생이었다.

셔츠의 단추를 하나 정도 풀고, 학생 전용 넥타이를 건성건성 멘 걸로 봐서

성격은 꽤나 쿨한 편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매끄러운 수정의 원석을 연상시키는 소녀.

 

“당신, 이런 곳에서 자살하려는 생각이야?”

“···나를 말리려고?”

“별로. 단지 궁금해서 그랬어. 총기 소유가 불법인 일본에서 권총으로 자살

하려는 일본인이 있다는 사실은 꽤나 유니크하니까.”

“······.”

“상처 받았어? 예의상 한 번 정도는 말려줄 걸 그랬나?”

“딱히.”

 

왠지 의욕이 확 꺾인다.

적어도 이 녀석 앞에서 자살하고 싶지는 않다.

어쩔 수 없이 내 인생의 종료는 다음번으로 미뤄야할지도.

 

“그나저나 당신은 정말 예쁜 아이구나.”

 

녀석이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 머리카락을 허락도 없이 만져댔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왠지 좋은 향기가 난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투명한 피부··· 질투 날 정도네.”

 

그렇지만 이 외모 때문에 좋은 꼴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 한 번도.

한 번도.

 

“당신, 지금 죽으려고 한 거지?”

“누구 덕분에 실패했지만.”

“앞으로도 자살할 계획 또 있어?”

“일단 네가 사라져준다면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어.”

“한 마디로 언제 죽어도 괜찮다는 뜻?”

“아마도 그렇겠지.”

 

아마도가 뭐냐, 아마도가.

내가 생각해도 어중간한 대답이다. 마치 지기 싫어하는 어린애처럼.

 

 

“좋아, 팅 하고 왔어.”

 

 

여자애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팅 하고 왔다니?

설마 이 여자애 전파계인가?

그 전에 난 빨리 죽고 싶으니까 좀 사라줘졌으면 하는데.

솔직히 엄청 방해다.

 

“나는 아이돌을 하고 있어.”

 

아이돌?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단어의 등장에 나는 무심코 여자애와 눈을

맞추고 말았다.

 

“이제 갓 아이돌 사무소에 들어간 신입이지만.”

“···그래서 아이돌 같은 귀하신 몸이 나한테 무슨 볼 일이야?”

“말했잖아. 팅 하고 왔다고. 말 그대로야.”

 

여전히 내 하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이제 갓 사무소에 들어간 나지만··· 아직 나를 맡아서 키워줄 사람을 발견

하지 못했어. 나의 재능을 이끌고 키워주면서 성장시켜줄, 그리고 언젠가

톱 아이돌의 자리인 ‘신데렐라’로 이끌어줄 프로듀서를 말이야. 그 누구도

나에게 명확한 느낌을 주지 못했어.”

 

이번에는 내 양손을 꽉 쥐면서 여자애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찾아냈어. 너라면 가능해. 너라면 나를 신데렐라로 만들어줄

수 있을 거야.”

 

무겁다.

이 녀석이 나에게 보내오는 시선 하나하나가 너무 무겁다.

도대체 너는 나에게 뭘 기대하고 있는 거야?

 

“이미 한 번 버린 목숨이지? 그렇다면 내가 그 목숨을 가져갈게. 나에게

네 목숨을 맡겨줘.”

 

이미 버린 목숨이라는 말이 내 가슴 깊숙한 곳을 찔렀다.

그렇다. 이미 버린 목숨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자살을 방해받았다고 다시 살고 싶다는··· 그런 낭만적인 전개 따위는 나에게

없다.

 

나는 죽음을 바라고 있다.

이런 삶을 살 바에야··· 그냥 죽는 편이 낫지.

 

그렇기에 나는 내 목숨을 버리려 했고, 이 여자애가 버려진 내 목숨을 가지고

싶다고 한다.

 

찰칵.

어느새 내 목에 작은 가죽 벨트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개에게 채우는 것 같은 목줄. 이런 게 채워지면 조금은 기분이 나빠질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쁘지는 않다.

 

“나의 것이 되어줘.”

 

어자애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저 차가운 모습에서 저런 미소도 나올 수 있구나.

 

“너의 목숨을 나에게 맡겨. 나를 이끌어줄 아이돌 프로듀서가 되는 거야.”

 

아아, 알겠다.

이 여자애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정확하게 알겠다.

목숨을 버렸으니 어디 한 번 바닥까지 가보라는 거겠지.

 

“이름이 뭐야, 너?”

“시부야 린.”

 

시부야 린인가.

 

 

“그 제안··· 받아들일게.”

“다행이네. 다시 자살하겠다고 우기면 스턴건으로 기절시켜 끌고 갈

생각이었거든.”

“야, 너···.”

“그럼 당신도 이름을 가르쳐줘. 당신의 이름은?”

 

이름이라.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참으며 내 이름을 조용하게 입에 담았다.

여자애, 시부야 린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좋은 이름이네.”

“퍽이나.”

 

어쨌든 나는 이 녀석에게 내 목숨을 맡기기로 했다.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

이 녀석이 나를 어떻게 다루든 나는 그저 따라갈 뿐이다.

 

어차피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이제 아무래도 좋다.

 

휘익!!

갑자기 시부야 린이 내 목에 채워져 있는 목줄을 확 잡아당겼다.

 

코끝이 서로 부딪칠 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

시부야 린은 내 눈앞에서 보석처럼 웃으며 말했다.

 

 

“신데렐라의 노예가 된 것을 환영해.”

 

 

1

 

“선배가 나빠!!!”

 

아프다.

진짜 미칠 듯이 아프다.

도대체 뭐로 얻어맞은 거지? 저기 내 피가 잔뜩 묻은 의자가 나뒹구는 걸로

봐서 의자로 얻어맞은 것 같다.

 

도대체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야?

학교 의자로 정수리를 세게 얻어맞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럴 거면!! 이럴 거면 왜 나한테 처음부터 잘해준 거죠?!”

 

이유는 없었는데.

 

“이유가 없다고요?! 남이 멋대로 기대하게 만들어놓고서 이유가 없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선배?! 그런 건 위선일 뿐이잖아요!!”

 

이제 제발 좀 그만.

내 마음 속 애원과는 상관없이 다시 한 번 의자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어떻게든 의식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몸은 후들후들 움직이지 않는다.

 

“저를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왜 그렇게 상냥하게 대해주신 거죠?!

어째서 저를 이끌어주신 건가요?! 어째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어 놓은

건가요?!!”

 

여자애의 절규를 눈앞에서 듣는 건 상상 이상으로 괴로운 일이다.

매번 있었던 일이지만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냐, 역시 아니야.”

 

도대체 뭐가 아니라는 건데?

안타깝게도 이 녀석은 내 궁금증에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대신 더 위험한 걸 꺼냈다.

 

“선배는··· 선배는 고장 난 거예요.”

 

반짝반짝 빛나는 칼날.

마음을 꺾이게 만드는 그 날카로움.

어째서 여고생이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가지고 있는 거야?

 

 

“그 여자··· 그 계집애가··· 선배를 고장 나게 만들었어··· 사실 선배는 원래

부터 엉망진창이었죠? 그 계집애가 그걸 이용한 거야··· 선배를 손에 넣으려고

일부러 망가뜨린 거야··· 선배를 고장 냈어··· 고장 냈어···.

 

죽여 버릴 거야.

부드러운 가죽을 벗겨 악기로 만들 거예요.

그 악기의 연주에 맞춰서 선배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 드릴게요.

 

선배가 너무 좋아하는 내 목소리로.

선배가 너무 좋아하는 나의 노래를 들려드릴 거예요.

 

하지만··· 그 전에 고장 난 걸 수리하는 게 우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난 도대체 뭐한 거야?

이번에도 나는 멀쩡했던 여자아이를 망쳐버렸다.

너무나도 빌어먹을 이 상황에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고쳐드릴게요, 선배. 모든 게 끝나면··· 그때는 나를 좋아해주세요···

선배··· 이걸로 언제나 함께···.”

 

내 살점을 파고드는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정말로 짜증나는 건··· 이 상황에서도 나는 울지 못했다.

 

2

 

사실 조금 긴장했다.

자신의 노예가 되어달라고 부탁한 소녀 시부야 린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진짜

아이돌 프로덕션이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신데렐라 프로덕션.

 

단 하나의 톱 아이돌 ‘신데렐라’의 칭호를 만들어낸 것도 바로 이 프로덕션

이다. 내 주인이 된 시부야 린이 이런 곳의 아이돌로 활동하고 있을 줄은.

솔직히 조금 놀랐다.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네?”

그러나 린은 내 반응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이래보여도 나름 놀라고 있는데 말이다.

내 감정 변화의 폭이 다른 사람에 비해 너무 적어서 그런 걸지도.

아니면 이런 곳에 익숙해서 그런 걸지도.

 

답이 전자인지 후자인지 정할 수는 없었다.

 

“일단 따라와. 눈도장이라도 찍어놓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벌써부터 다른 아이돌과 만나도 괜찮을까? 일단 나는 신참이니까··· 우선

다른 프로듀서들부터 만나는 편이···.”

“그럴 필요는 없어.”

 

린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이 사무실에 프로듀서는 당신 한 명 뿐.”

 

 

잠깐만.

그건 좀 이상하잖아.

내가 듣기로 신데렐라 프로덕션은 그 아이돌의 숫자가 상당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프로듀서가 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아예 없었다는 얘기잖아?

 

“설마 당신을 내 전속 프로듀서로 스카우트한 줄 알았어? 사무소에 허락도

없이 그런 짓은 무리야. 물론 비중은 내 쪽이 더 높겠지만.”

“그럼 이때까지는 프로듀서 없이 어떻게 한 거야?”

“아주 유능한 사무원 씨도 한 명 있고··· 스카우트는 트레이너 씨들도 많이

해왔으니까. 거기다 제 앞가림할 수 있는 어른 아이돌도 있어. 애초에 이렇게

아이돌이 많은 사무소다보니 프로듀서를 고용하는 것도 돈이 많이 들잖아.

우리 사무소는 재정이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야.”

 

뭐냐, 이 자급자족 시스템은?

린에게 스카우트 당한 게 조금 후회되기 시작했다.

어차피 학교에 자퇴서까지 던져놓고, 아예 목숨까지 버리려고 한 주제에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한다는 자체가 웃기지만.

 

 

“어서와, 신데렐라 프로덕션에 온 것을 환영해.”

 

 

린이 안내해준 CG프로덕션의 사무실은 생각보다 큰 편이 아니었다.

아니, 아이돌의 숫자를 고려해본다면 작은 축에 속한다.

 

“굉장히 아늑한 느낌이 드네···.”

 

그래도 이 분위기는 마음에 든다.

팬시한 디자인의 가방이나 화장도구.

포근한 느낌의 봉제 인형.

손때가 살짝 묻어있는 책들.

모델들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는 여성 잡지.

사무실 곳곳에 놓여있는 여자아이들의 흔적에서 이 사무소를 향한 그녀들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책상 밑에 있는 버섯 화분은 그 존재 의미를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머나, 린짱.”

“안녕, 치히로 씨.”

 

녹색 사무원 옷을 입고 댕기머리를 한 젊은 여자.

나이는 아마 20대 중반쯤으로 보이고 상당한 미인이었다.

아마 이 사람이 CG프로덕션의 그 ‘유능한 사무원’인 것 같은데, 사실 저 정도

비주얼이면 당장 아이돌로 뛰어도 문제가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같이 오신 분은? 설마 린짱의 남자친구 분인가요?”

“인사해. 이번에 스카우트한 우리 사무소의 새 프로듀서.”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히 미인이고 온화한 인상이기는 한데.

 

소름이,

온몸에 오한이 달린다.

 

마치 내 몸속의 모세혈관까지 하나하나 흩어보려는 것 같은 저 시선.

들여 보다 못해 도려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처음 뵙겠어요. 센카와 치히로라고 해요.”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처음 뵙겠습니다.”

 

센카와 씨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와 악수를 나눴다.

의외로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손의 온기는 인간답다니.

 

“우후후~ 멋진 분이네요. 린짱은 어디서 이런 분을 스카우트한 건가요?

납치라도 해온 건가요?”

“날 뭐로 보는 거야? 주인 없는 물건을 주워온 것뿐이야.”

“그런가요?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완벽하지만.”

 

센카와 씨는 이리저리 날 흩어보았다.

아까 전 순식간에 날 흩어본 건 없었던 일이었다는 것처럼.

 

“오히려 아이돌로 스카웃하고 싶은 정도인데요? 어때요? 저희 사무소에서

아이돌로 활동하는 건? 안 그래도 남성 아이돌 기획을 고려중이기는 한데.”

“그건 안 돼.”

 

린이 센카와 씨와 나 사이를 슬쩍 가로막으며, 약간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은 내 거야. 내 소유물이라고.”

“에··· 저기, 린짱?”

“내가 먼저 주운 물건이지? 남의 물건을 빼앗지 마.”

 

린은 역시 날 철저하게 물건 취급하고 있다.

나에게 무슨 애정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단순히 자신의 물건을 빼앗기기

싫다는 소유욕.

애정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차갑다.

 

“그렇지만 아까운데···.”

“너도 빨리 한 마디 해.”

 

갑자기 나에게 화살이 날아왔다.

나는 린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최대한 머리를 짜내가며 말을 꺼냈다.

 

“저는 아이돌 같은 일은 못해요. 누간가를 뒷받침하는 일이야 잘할 자신이

있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은 좀 꺼림칙해서요.”

 

좋아, 적당하게 자연스러웠다.

린도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센카와 씨는 못내 아쉬웠는지 끄응 신음소리를 내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기도 뭐하지만 내 외관이 유니크한 건 사실이다.

백발에다 붉은 눈. 투명할 정도의 하얀 피부.

말해두지만 이건 천연 색상이다.

내 외모는 둘째 치더라도 일본인이 가질 수 없는 이국적인 느낌이 어쩌면

팬들에게 어필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옛날에 알던 그 아이만 해도···

 

그만하자.

우중충한 이야기를 꺼내서 뭐하게?

 

“그럼 저희 신데렐라 프로덕션의 첫 번째 프로듀서가 되신 걸 축하드려요!!”

“···이렇게 빨리 결정해도 되는 건가요?”

“괜찮아요. 사장이란 사람은 그냥 돈만 받아먹는 전형적인 높으신 분이니까.

그냥 돼지라고 생각해주세요.”

“웃는 얼굴로 은근히 심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 사장이라는 사람 우리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면 분명 울었을 거라고.

 

“그럼 바로 교육을 시작할까요? 신데렐라 프로덕션의 프로듀서가 해야할 모든

일들을 제가 기초부터 착실하게 알려드릴게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서류 무더기들을 책상 위에 쾅!! 내려놓으면서 센카와

씨가 말했다. 완전 의욕 만땅이다, 이 사람.

 

“난 이만 스케줄이 있어서 가볼게.”

“데려다 줄까, 린?”

“신참 프로듀서는 어서 교육이나 받으세요. 하지만 이번만 봐주는 거야? 다음

에는 날 제대로 에스코트하도록.”

 

어련하시겠습니까.

린이 떠난 사무소의 출입문 쪽을 바라보며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됐다.

CG프로덕션의 사무원에게 채용이 결정된 데다가, 저렇게 자기 물건이라고

도장까지 찍어놓으니··· 이제 와서 물릴 수 없을 것 같다.

딱히 물릴 생각도 없기는 하지만.

 

나는 이미 목숨을 버렸고, 린은 내가 버린 목숨을 주웠다.

그러니까 이제 내 목숨은 린의 것.

즉 나는 린의 소유물.

앞으로 그녀를 위해 뛰어다닌 충실한 노예라는 것이다.

 

“자··· 이제 저는 뭘 하면 되는 건가요, 센카와 씨?”

“린짱은 정말 굉장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프로듀서 씨?”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저의가 뭘까?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었던 나는 일단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린짱은 아이돌 세계에 갓 입문한, 경력이 얼마 되지 않은 아이에요.

그런데 벌써 이 시기의 다른 아이들과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일을 받아오고

있죠. 겨우 15살의 여자아이가 혼자서 이 모든 것을 한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하겠죠.”

“그래요. 린은 정말 타고난 아이에요. 원석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죠.

아직은 조금 딱딱하기는 하지만··· 그 타고난 재능이 린을 더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어주죠. 저 아이라면 신데렐라의 자리도 꿈을 아닐 거예요.

“톱 아이돌인가요···.”

“그리고 또 하나. 사람 보는 안목도 뛰어나네요.”

“네?”

 

내가 되묻기 위해 입을 열자마자 눈앞의 시야가 비틀어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촤르르륵.

방금 전에 센카와 씨가 쌓아놓은 서류 무더기가 사무소 바닥으로 쏟아지는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을 스카우트 해올 줄이야. 린짱의 안목에는 감탄했어요.”

 

 

센카와 씨는 내 양 손목을 세게 붙잡은 채로 날 밀어붙이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각도가 기울어지면 센카와 씨가 날 덮치고 있는 모양새다.

물론 성적인 의미로 말이다.

 

“역시 심상치가 않았는데···.”

 

설마 이 사람··· 알고 있는 걸까?

아직은 모른다. 아직은 확실히 알 수 없어.

일단 마지막까지 발악해보기로 결정했다.

 

“저는 센카와 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도무지···.”

 

 

“키사라기 치하야, 아마미 하루카.”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젠장.

 

젠장! 젠장!

 

왜 여기서 그 이름들이 튀어나오는 건데?!

 

 

“우후후~ 사무원의 정보력을 얕보면 곤란하답니다? 아차~ 시죠 타카네도

있었던가요? 거기에 오가ㅡ”

“그만!! 이제 그만두라고요!!!”

“으응? 의외로 대범하지 못하시네요. 겨우 이름을 들려드렸을 뿐인데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시고··· 귀엽네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당신···?”

 

내 질문에 “우후후, 어떨까요?” 라고 대답하며 희롱하듯이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는 센카와 씨의 그 행동에 몸서리가 쳐졌다.

행동 하나하나가 악마를 보는 것만 같다.

처음에 느꼈던 그 한기는 절대 착각이 아니었어!

 

“당신은 의외로 유명인이에요. 물론 이쪽 업계 사람들 이야기지만.”

 

센카와 씨의 손가락이 내 뺨을 쓸고 내려와 쇄골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미 죽었다, 아직 살아있다 라고 소문만 무성했지만 이렇게 살아

있네요?”

 

툭, 투둑, 투둑.

센카와 씨는 능숙하게 내가 입고 있던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어냈다.

등줄기에 얼음물을 들이부은 것 같은 소름이 온몸을 내달린다.

 

“그리 멀쩡한 꼴은 아닌 것 같지만요. 과연~ 이런 꼴이 된다면 저라도 무서울

거예요.”

 

긴팔 상의로 가리고 있던 내 몸에 새겨진 흉터들.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는 부위만 골라서 집요함이 느껴질 정도로 남아있는

칼자국들.

 

아직도 살이 떨리는 그 날의 악몽을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센카와 씨는 그중에서도 쇄골 근처에 난 흉터를 할짝, 핥았다.

축축한 느낌이 간지러우면서 기분이 나빴다.

 

“아직 그녀들은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걸 모르고 있어요.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죠.”

“······.”

“당신으로서도 곤란하죠? 그 아이들이 당신을 찾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저도 무서운걸요. 특히 당신에게 이 흉터를 선사한 그 아이라면··· 이번에는

흉터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그래서 센카와 씨는 저에게 뭘 원하시는데요?”

“그리 시리어스한 건 아니에요. 단순히 욕구불만을 해소할 상대? 아, 그리고

기왕이면 치히로 씨라고 불러주세요.”

 

쿵!!

센카와 씨··· 아니, 치히로 씨가 날 더 세게 밀어붙이더니 사무소 바닥에 깔아

눕혀버렸다. 바닥에 부딪힌 등이 꽤 아팠다.

 

“기왕이면 상냥하게 이름으로 불리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스륵, 스륵, 옷이 스치는 작은 소리가 고막으로 파고든다.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누구였는지 잊어버렸고 누구였는지 기억해내기도 싫다.

그렇게 내가 우울한 회상에 젖어 무기력하게 깔려있는 동안, 어느새 옷이

스치는 소리가 멈추었다.

 

이제부터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면 눈을 감는 편이 좋다고 나는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비웃듯이 치히로 씨가 말했다.

 

 

“처음이니까 서비스로 어떤 플레이라도 응해드릴게요? 대신 제 욕구불만

확실하게 풀어주세요. 당신은 우리들의 노예니까.”

 

 

3

 

 

너덜너덜해진 기분이다.

악몽은 절대 지워지지 않고 다시 반복된다.

 

지금의 내 상황이 딱 그랬다.

 

목숨을 버리려고 했던 벌을 받았다고 스스로를 달래보려 해도··· 뭔가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억한 감정에 짜증이 치밀었다.

 

등자색 석양으로 채색되는 강변을 걷던 나는··· 결국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풀숲에다 뱃속을 게워버리고 말았다.

 

“우우우··· 우엑!! 우에에엑!!”

 

어째서냐?

어째서 이런 게 반복되는 건데?

다를 게 없구만.

간신히 그 지옥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고 모든 걸 정리했다 여겨 안심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때의 지옥은 계속 남아 다시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건 지옥에 발만 담근 정도다.

만약 다시 그 지옥과 정면에서 조우한다면···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 지옥의

밑바닥에 삼켜져 다시 기어오를 수 없을 것이다.

 

“젠장··· 어째서야? 어째서 나만···!!! 어째서!!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아무리 분풀이를 해도 들어줄 이가 없는데.

유일한 마음의 위안이었던 미후네 선생님은 더 이상 만날 수도 없다.

자퇴서 때문에 뺨까지 맞았는데 무슨 낮짝으로 찾아뵐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동거인에게 말할까?

그 사람은 쓸데없이 착해빠져서 안 돼.

애초에 나 같은 녀석을 거둬서 같이 살고 있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다.

길치라는 점이 문제이기는 해도··· 그 사람만큼은 이 지옥에 단 1밀리그램도

얽히게 하고 싶지 않다.

 

“젠장··· 젠장··· 어떻게 해야··· 젠장···!!”

 

이 상황에서도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빌어먹을!!

처 빌어먹을!!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억지로 속을 게워냈더니 위장이 배배

꼬이는 느낌이다.

난 위장이 꼬이는 듯한 복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주저앉을 뻔했다.

누군가가 갑자기 나를 상냥하게 부축해주면서 내 등을 따스하게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선배···?”

 

뇌리에 불꽃이 튀기는 느낌이다.

이 목소리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고통에 허덕이는 것과 동시에 오한을 느끼며 옆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에,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가녀린 분위기

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그때 이후로 처음으로 만나는 오가타 치에리였다.

 

 

 

“치에리···.”

 

“정말··· 보고 싶었어요,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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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보다 얀을 그리 잘 쓰는 편도 아니고~ 오히려 적당하게 굴리는 정도로만 끝나니까요~ 

 

 

 

다만 해피엔딩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는 게 우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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