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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호시이 자매의 더블데이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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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4, 2012 22:20에 작성됨.

   햇빛이 밝은 점심 무렵. 아침에 잠깐 내린 비를 머금은 잎사귀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강의가 끝났는지 한 건물에서 우르르 학생들이 걸어 나왔다. 그 중에 검정 뿔테 안경을 콧잔등에 걸친 여성이 있었다.
   늘씬한 다리를 감싼 청바지에 캐주얼한 후드티를 입은 여성의 몸매는 유독 눈에 띠었다. 편한 복장임에도 여성의 비율이 워낙 좋다보니 학생들 사이에서 도드라져 몇몇 남학생들의 시선을 끌었다.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성은 학생 사이에 섞여 대학교 교내를 터벅터벅 걸었다. 등에 멘 연갈색 가방의 끈이 느슨한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살짝 흔들렸다.
   이윽고 좌우 갈림길에서 여성은 발을 멈췄다. 가방 색과 비슷한 자신의 단발 머리카락을 가볍게 손으로 쓸어 넘기며 여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때, 여성의 뒤에서 누군가 불쑥 뛰쳐나와 달려들었다.
   “나오~!”
   “꺄악!”
   여성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여학생은 여성, 나오를 꾹 끌어안았다. 여학생이 볼을 자신에게 비벼대며 달라붙자, 나오는 질색하며 몸을 떨었다.
   “더우니까 떨어져! 갑자기 뭐야! 아키코!”
   “지나가는데 우리 이쁜이가 보여서 달려들었징. 후후. 나오는 오늘도 스타일 좋구나.”
   “니 이쁜이가 된 적은 없네요. 그래서, 뭐야?”
   나오는 히죽 웃는 아키코로부터 멀찍이 떨어지며 되물었다. 그러자 아키코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뭐라니?”
   “니가 이렇게 달라붙는 건 뭔가 부탁이 있다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앗, 친구의 순수한 호의를 무시하다니. 나는 나오가 생각하는 것처럼 속물적인 친구가 아니라구. 난 정말 예쁘고 천사 같은 나오님을 보기 위해서…….”
   “빨랑 말해. 나 간다?”
   늘어지려는 미사여구를 나오는 딱 잘라버렸다. 그러자 아부를 떨던 아키코는 씩 웃었다.
   “나오님, 나 대신에 전화 하나만 받아주라!”
   “전화?”
   “응, 전화! 오늘 나한테 올 전화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처리하기 어려운 거라. 이렇게 똑 부러진 나오라면 분명 잘 처리할 것 같아서.”
   아키코는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나오를 흘끔흘끔 바라봤다.
   리포트 자료를 빌려달라는 등 분명 공부 관련 부탁일 거라 생각한 나오였기에 아키코의 부탁은 의외로 간단했다. 오히려 색다른 부탁에 괜히 호기심이 생겼다.
   “전화라면 뭐 귀찮은 판매 전화 같은 거야? 그런 거라면 내가 해줄테니 자세히 말해봐봐.”
   나오는 완전히 몸을 돌려 아키코를 마주했다. 이런 태도의 나오면 이미 반 이상 넘어왔다는 거기에 아키코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오는 듬직해서 좋아! 전화는 그냥 걸려온 걸 거절해주면 돼!”
   “거절이라고? 어떤 전화인데?”
   “응, 소개팅 전화야.”
   “……뭐?”
   나오는 귀를 의심했다. 천진무구한 얼굴로 이 여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소개팅 전화라니까. 나 지난 주 초에 남친이랑 싸워서 깨졌었잖아. 그래서 홧김에 이번 주말에 소개팅하기로 했는데, 그만 지난 주말에 남친이랑 화해했지 뭐야!”
   아키코는 헤실헤실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자친구와 화해해 다시 얼마나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는 지가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나보고 너 대신 소개팅 거절해달라고?”
   “응! 바로 그거!”
   손가락으로 나오를 휙 가리키며 아키코는 윙크를 던졌다. 나오는 바로 몸을 돌렸다.
   “안해.”
   “엑? 자, 잠깐만!”
   떠나가려는 나오의 손을 아키코는 황급히 붙잡았다.
   “나, 나오야. 내 얼굴 봐서 이번 일만 도와줘. 나 진짜 싫은 소리 남에게 못하는 거 너도 알잖아. 응?”
   “그래도 이런 일은 니가 해야지! 아님 그 잘난 남친한테 해달라고 하던가!”
   “어떻게 그래. 주선자가 내가 건너 아는 선배라 그렇게 하기 민망하단 말야.”
   “너도 참. 그럼 나는 안 민망하겠니? 아무튼 안해.”
   나오는 아키코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자 아키코는 나오에게 더욱 끈덕지게 매달렸다.
   “으엥, 그냥 안하겠다고만 해주면 된다니까. 또 전화가 아니라 메일로 올 수도 있어. 메일이면 그냥 ‘죄송하지만 사정이 생겨서 안할게요.’라고 하면 되잖아. 응?”
   “그렇게 쉬우면 니가 하면 되잖아. 왜 나한테 그래?”
   아키코 말대로 메일이라면 손가락을 몇 번 놀리면 목소리도 들을 필요 없이 끝이니 무척 간단했다. 남한테 대신 거절해달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다.
   나오의 지적에 아키코는 자신의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에헤헤, 그, 그게. 사실 내 번호가 아니라 나오 번호를 알려줬거든.”
   “뭐?”
   “남친이랑 완전히 헤어진 거 아니니까. 홧김에 하는 거지만 내 번호를 그대로 알려주는 건 왠지 좀 그래서, 헤헤.”
   나오는 남친을 들먹이며 미안하다고 웃는 아키코의 얼굴을 보고 미간을 확 찡그렸다. 나오는 아키코의 얼굴 낯짝이 얼마나 두껍나 손가락으로 꼬집어 가며 확인하고 싶었다.
   나오는 확 밀려오는 짜증과 화에 뒷목을 부여잡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대신 아키코의 탱탱한 볼을 손가락으로 세게 꼬집었다.
   “아야야야!”
   “니 맘대로 내 번호를 말해주면 어떡해! 내 번호가 니 거냐!”
   “자, 잘못했어요!”
   “잘못하면 다야! 너 때매 누군지도 모를 남자랑 약속을 깨야 되는데!”
   “앗? 해주는 거야? 아얏!”
   해준다는 말에 화색이 되는 아키코의 볼을 나오는 꼬집은 손으로 쭉 당겼다가 툭하고 놓았다. 아키코는 빨개진 볼을 쓰다듬으면서도 나오의 승낙에 좋아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그래, 해줄게. 내 번호로 온다는 데 어쩌겠어. 대신!”
   나오는 오른손 검지를 뻗어 아키코의 오뚝한 코를 꾹 눌렀다.
   “나중에 정말 거하게 뜯어 먹을 테니 그렇게 알아. 니 지갑 다 털어버릴 거야.”
   “지, 지갑을 다?”
   “그래, 다!”
   지갑을 다 턴다는 말에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아키코를 나오는 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나오의 기세에 아키코는 겁먹은 소동물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 아키코에게 나오는 흥, 하고 콧방귀를 한방 뀌곤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나오는 귀찮은 일에 말려든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그냥 거절만 하면 되니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남자친구가 있으면 잘 살 것이지 소개팅은 왜 잡아서 귀찮게 하는 거야. 누군 그럴 남자친구도 없구만!’
   나오는 걸어가다 이 사태의 원인을 떠올리자 더욱 화가 났다. 남자친구랑 싸워서 홧김에 저질렀다는 아키코의 말.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뻥 차버려야지. 쟤가 나중에 한 소리 들을 정도로.’
   나오의 끌어 오르는 화는 쏟아낼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누군지도 모를 소개팅 상대로 향했다. 나오가 잔인하게 거절할수록 소개팅 상대방의 기분도 나빠져 그게 주선자까지 흘러들어가 아키코의 평판도 깎이리라. 나오는 좋은 머리를 이용해 온갖 차가운 단어를 이리저리 생각해냈다.

   * * * * * * * * *

   뚜르르, 뚜르르르.
   방송국 대기실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퍼졌다. 진동으로 해놓지 않은 프로듀서의 핸드폰이 경쾌한 벨소리를 내며 주머니 속에서 울었다. 주위의 시선이 프로듀서를 향해 확 쏠렸다.
   프로듀서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어 소리를 죽였다. 벨소리는 사라졌지만 전화는 끊어지지 않아 발신자가 뜬 핸드폰 액정이 반짝였다.
   프로듀서를 가운데에 끼고 양 옆에 나란히 앉아 방송 대본을 체크하던 아이돌 아마미 하루카와 호시이 미키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전화에요?”
   “허니, 누구인거야?”
   “그냥 아는 친구야. 한동안 연락 없더니 웬일이지. 잠깐 전화 받아도 될까?”
   “괜찮아요.”
   하루카와 미키는 프로듀서의 친구란 말에 흥미가 당겨 어느새 읽던 대본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액정에 뜬 이름이 아이돌 쪽에선 보이지 않았기에 두 아이돌은 귀를 쫑긋 세웠다. 딱 붙은 거리는 아니지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이정도면 핸드폰의 내용이 거의 다 들린다.
   아이돌과의 관계가 워낙 길어 딱히 숨길 필요도 없었기에 프로듀서는 스스럼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루카와 미키는 슬쩍 몸을 기울었다. 남의 전화를 훔쳐 듣는 건 실례지만, 정작 장본인끼리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사이였다.
  「아, 아카바네냐? 그동안 잘 지냈지?」
   경쾌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로듀서의 대학 때 친구였다. 대학 다닐 때 프로듀서가 같이 어울리던 그룹의 한 명이었다. 흔히 남는 게 없다고 평가하는 대학교 친구치고는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몇 안 되는 친구다.
   “오랜만이네. 나야 잘 지냈지. 하는 일은 잘 되냐?”
  「하하, 일이야 뭐. 그나저나 너 지금 시간 되냐? 잠깐 할 이야기 있는데.」
   “잠깐이면 괜찮아. 무슨 일인데?”
  「너 소개팅 해라.」
   “뭐? 소개팅?”
   뜬금없는 친구의 말에 프로듀서는 놀라 되물었다. 그리고 전화 내용을 옆에서 다 듣던 두 아이돌의 눈이 땡그랗게 커졌다.
   “소개팅이요?!”
   “허니, 소개팅이라니!”
   하루카와 미키는 눈을 밝히며 프로듀서를 바라봤다. 지긋이 바라보는 게 아니라 프로듀서의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는 수준이라 프로듀서는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어라, 갑자기 왜 이렇게 시끄러? 여자 목소리 같은데?」
   “아무 것도 아냐. 그보다 소개팅이라니.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무 것도 아니라는 부분에서 하루카와 미키의 시선이 한층 더 격렬하게 바뀌었지만 프로듀서는 애써 무시했다.
  「일 때매 바쁜지는 알지만 너 계속 혼자잖아. 그래서 이 형님이 소개팅 자리 하나 물어왔다는 거 아냐. 거기다 상대가 누군지 아냐?」
   “누구에요!”
   “누구인거야!”
   “…누군데 그래?”
   프로듀서 대신 대답하는 하루카와 미키를 피하며 프로듀서는 핸드폰을 손으로 감쌌다.
  「왜 이렇게 시끄러? 암튼, 상대가 바로 여대생이다, 여대생! 거기에 교대 쪽이라 나중에 잘하면 선생님도 될 수 있는 재원이라고! 여대생에 잘하면 여교사까지! 로망이지!」
   “…프로듀서 씨, 그런 취향이셨어요?”
   “허니, 미키는 아직 중학생인 거야. 그래도 어린 게 좋지 않아?”
   프로듀서를 바라보는 아이돌들의 시선은 따가웠다. 프로듀서는 하루카와 미키에게 아니라고 손을 휙휙 흔들며 부정했다.
   “여대생이든 여교사든 바빠서 시간 안 돼. 프로듀서 일로 요즘 얼마나 바쁜데. 난 괜찮으니까 그냥 다른 사람 알아봐줘.”
   “프로듀서 씨! 역시!”
   “허니!”
   두 아이돌들에게 말한 건 아니지만 하루카와 미키는 과연 프로듀서라며 감탄했다. 딴 여자에 눈을 돌리지 않고 프로듀서 일에만 집중하려는 모습에 두 아이돌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야야, 그러지 말고. 그리고 니가 그렇게 나올 거 같아서 그쪽엔 이미 하겠다고 말해놨어. 물론 니 번호까지 알려줬지.」
   “뭐?”
   프로듀서는 어이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루카와 미키의 표정이 굳었다.
  「학교 다닐 때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 빠져나갔잖아. 그걸 쭉 지켜본 난데 허술하게 일을 진행시키겠냐. 이미 쌀이 익어서 밥이 됐으니 넌 퍼먹기만 하면 돼. OK?」
   “NO에요, NO!”
   “딱 잘라 거절해버려! 허니!”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리네. 암튼 자세한 건 메일로 보낼 테니 확인하고 이번엔 꼭 잘해라. 제수씨 좀 봐야지.」
   “야, 잠깐!”
   그걸로 전화는 뚝 하고 끊어졌다. 전화가 끝났다며 액정에 뜨더니 곧 사라지곤 검은 대기 화면으로 변했다. 프로듀서는 순식간에 일을 진행시킨 친구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소개팅이라니. 전혀 생각에도 없는 일이 생겼다.
   의자에 앉아 난처한 표정을 짓는 프로듀서를 하루카와 미키는 큰 목소리로 불렀다.
   “프로듀서 씨!”
   “허니!”
   어느새 두 사람은 의자에 일어나 우뚝 서서 프로듀서를 내려다보는 상태였다. 프릴이 달린 방송용 의상을 입은 두 사람은 귀여웠다. 프로듀서를 포위한 듯 선 두 사람에게선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소개팅 안할 거죠?”
   “맞아! 허니, 소개팅하면 안 돼!”
   프로듀서는 소개팅 절대 하지 말라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는 두 사람의 기세에 눌려 움찔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소개팅은 생각도 안한 거라 고개를 저었다.
   “안할 거야. 그리고 내가 그런 거 나갈 시간이 어디 있어. 우리 아이돌들 챙기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그렇게 말하며 프로듀서는 두 사람과 시선을 맞췄다. 괜찮으니까 믿으라고.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가 담긴 프로듀서의 시선을 받으며 두 아이돌은 다른 쪽으로 해석했다.
   내겐 너희밖에 없으니 그런 건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감격에 젖어 두 아이돌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프로듀서 씨…!”
   “역시 허니인 거야! 미키, 오늘 방송 힘낼게! 허니한테 꼭 멋진 모습 보여줄 테니까!”
   “저도 힘낼게요! 파이팅이에요, 파이팅!”
   미키와 하루카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저마다 의지를 불태웠다. 내팽개쳐 놓았던 대본을 다시 든 두 사람의 사기는 프로듀서의 눈에 확 보일 정도로 좋았다.
   “그래. 열심히 하면 좋지.”
   휙 바뀐 두 사람의 태도를 의아해하면서도 프로듀서는 바람직한 모습에 칭찬을 건넸다.
   두 사람이 눈에 불을 키며 대본을 펄럭펄럭 체크하고 있을 때, 프로듀서의 핸드폰이 징하고 울렸다. 하루카와 미키는 대본에 눈이 팔려 알아차리지 못했다. 프로듀서는 핸드폰을 슬쩍 꺼냈다.
   친구로부터의 메일이었다. 프로듀서는 아이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심스레 메일을 확인했다.
  「이름은 아사쿠라 아키코고 나이는 22이야. 번호는 ……이니까 오늘 내에 꼭 연락해! 오늘 안에 연락 주겠다고 그쪽에 말해놨으니까. 너 꼭 연락해라. 니 생각해서 해준 건데 안 하면 너한테 평생 여자친구가 안 생기는 저주를 걸어 줄 테니 그렇게 알아.」
   무시무시한 내용이 쓰인 메일에 프로듀서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소개팅 상대의 이름을 읽었다.
   ‘아사쿠라 아키코, 22살. 이름하고 나이만 봐선 잘 모르겠네.’
   으레 소개팅하면 보내오는 사진도 없어서 프로듀서는 이름과 나이만으로 상대방을 상상해야했다. 교대를 다니는 22살 여대생. 한창 좋을 나이 때다. 프로듀서는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상대를 떠올리려 했지만, 아는 여대생조차 없는 그에겐 역시 무리였다.
   ‘뭐,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방송에 집중하자.’
   프로듀서는 핸드폰을 끄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앞에는 하루카와 미키가 대본을 읽으며 서로 합을 맞춰나갔다. 오늘 말할 토크 거리를 연습하는 하루카와 미키의 모습은 현역 아이돌답게 반짝거렸다. 대기실의 미약한 조명으로도 두 사람은 빛났다.
   그 모습을 보며, 프로듀서는 소개팅 상대가 누구든 이 아이돌들만큼 예쁘겠냐며 생각했다.
   ‘어째 나 팔불출 아버지 같네.’
   자기 딸이 세상에서 가장 귀엽다고 생각하는 팔불출 아버지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그렇게 혼자 생각하며 프로듀서는 피식 웃었다.
   그 날 방송에서 미키와 하루카는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방송은 여러 명이서 같이 하는 토크쇼 형식이었는데 두 아이돌은 입에 신이라도 내린 것처럼 방송을 이끌었다. 재밌는 이야기는 말할 때마다 빵빵 터졌다. 방청객의 반응도 뜨거웠다. 방송이 끝나자 방송국 관계자가 프로듀서에게 달려가 두 손을 꼭 잡으며 오늘 최고였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프로듀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잘했다고 칭찬했고, 하루카와 미키도 밝게 웃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오늘 하루의 일은 끝이 났다. 프로듀서는 하루카와 미키를 차에 태우곤 둘을 바래다주기 위해 방송국을 떠났다.

   * * * * * * * * *

   시간은 슬금슬금 지나 어느새 밤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의 창문 사이로 밤하늘이 보였다. 별이 반짝이고 달이 둥그레 뜬 밤. 모두가 하루를 끝내고 쉬러 들어갈 시간에 나오도 그녀의 집에 있었다.
   나오는 트레이닝복 같은 편한 차림이었다. 짦은 반바지 아래론 새하얗고 뽀얀 다리가 쭉 나와 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나오의 머리카락엔 물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나오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침대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힐끔 바라봤다.
   핸드폰은 묵묵부답이다. 새까만 액정만이 떠있을 뿐.
   ‘왜 연락이 없는 거야!’
   닦은 수건을 휙 던져 의자에 걸곤, 나오는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앉았다. 충격에 침대가 살짝 출렁였다. 나오는 늘씬한 손가락을 움직여 핸드폰을 두 손으로 쥐더니 뚫어지게 액정을 노려봤다.
   혹시나 해 나오가 버튼을 누르니 핸드폰은 씻기 전과 똑같았다. 다만 시간만 11시에 가깝게 변해있을 뿐. 메일이나 전화는 하나도 없었다.
   ‘오늘 안에 연락 온다고 했는데……. 아키코가 거짓말한 거 아냐?’
   기다림에 지친 나오는 아키코의 부탁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키코의 말대로라면 소개팅 남자가 오늘 안에 나오의 번호로 연락을 했어야 했다. 근데 시간은 벌써 11시. 오늘이 한 시간 정도만 남은 상태였다.
   ‘아 진짜 뭐야. 연락 줄 거면 빨리 주던가. 이러면 왠지 내가 목 빠지게 남자 연락 기다리는 거 같잖아!’
   아키코한테 받은 스트레스를 소개팅 남자를 뻥 차는 걸로 해소하려 했던 나오의 계획은 아직까지도 이뤄지지 않았다. 나오는 핸드폰을 손에 쥐며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뒹굴었다.
   소개팅 남자의 번호도 모르니 나오가 직접 연락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나오는 대답 없는 핸드폰을 노려봤다.
   ‘뭐라도 좋으니까 연락 좀 해줘!’
   띵동.
   그때 기다리던 핸드폰 대신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현관 초인종 소리에 나오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간에 누구지?’
   집엔 부모님도 일 때문에 아직 들어오지 않아 나오 혼자였다. 나오는 핸드폰을 한 손에 쥔 채로 방을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나오는 현관 옆 벽에 붙은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인터폰의 화면엔 초인종을 누른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새까맣고 부스스하게 보이는 머리에, 안경을 쓴 남자. 아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오는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세요?”
   나오는 옆 테이블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현관 밖으로 말하는 버튼을 눌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호시이 씨구나. 나 미키 프로듀서야. 미키 바래다주러 왔어.”
   “바래다주는 거면 그냥 미키 내려놓고 가도 되잖아요. 뭘 굳이 초인종까지 눌러서 귀찮게 해요.”
   “그, 그게. 미키가 차 안에서 잠들어 버려서…….”
   화면 속의 프로듀서는 볼을 긁적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디에서도 항상 잘 자는 미키의 특징을 떠올리곤 나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얘는 조심성 없게 또. 알았어요.”
   나오는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 밖엔 프로듀서가 서있었다. 나오는 정장 차림의 프로듀서가 깔끔해 보이기보단 왠지 후줄근해 보였다. 주름 잡힌 흰 셔츠는 프로듀서에게 셔츠를 다림질해줄 사람도 없다는 게 훤히 보였다.
   프로듀서는 사람 좋은 인상이지만 예전 일이 있었기에 나오는 영 이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오는 자기보다 큰 프로듀서를 힐끔 쏘아보며 말을 내뱉었다.
   “미키는 어딨어요?”
   “저기 차 안에 있어.”
   집 옆에 주차한 차 옆으로 두 사람은 걸어갔다. 열린 조수석 문안에서 미키가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자고 있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입도 우물우물 움직였다.
   나오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곤, 갑자기 프로듀서를 째려봤다.
   “혹시 미키가 자는 틈에 이상한 짓한 거 아니죠?”
   “절대 안 해! 프로듀서인 내가 그럴 리 없잖아.”
   “글쎄요. 당신은 이런저런 전적이 있으니. 흥.”
   나오의 매서운 말에 프로듀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오가 말하는 전적은 미키와 나오가 프로듀서의 집에 찾아와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전부 사고였기에 프로듀서에겐 죄가 없었다. 하지만 나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오의 머릿속에서 프로듀서의 평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오는 프로듀서를 뒤로 하고 미키를 업었다. 나오보다 약간 작은 미키를 업은 나오의 모습은 불안해보였다.
   “내가 도와줄까?”
   “괜찮으니까 손대지 마요. 이 변태.”
   “변태 아니라니깐…….”
   여대생에게 듣는 변태 소리에 타격을 받은 프로듀서가 힘없는 목소리로 변명했지만 나오는 듣지 않았다.
   나오는 미키를 집안에 내려놓고, 현관 밖에서 기다리는 프로듀서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 됐으니까 어서 가요. 훠이훠이.”
   “그렇게 안 해도 갈게. 밤늦게 미안했어.”
   그렇게 말하는 프로듀서에게 나오는 잘 가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바로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쾅하고 큰 소리와 함께 굳건히 닫힌 현관문을 보며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미운 털이 박힌 모양이다.
   프로듀서는 차 안으로 들어가 집을 향해 운전하기 전에 혹시 방송국 관계자로부터 연락이 왔나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직 연락은 없었다.
   “오늘 안에 연락해주겠다고 했는데. 이 사람 또 까먹었나.”
   연락 주기로 한 사람이 연락 까먹기로 유명한 사람이어서 프로듀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중에 직접 연락하면 되니. 그렇게 생각하곤 핸드폰을 빈자리에 던져놓으려는 순간.
   “맞다, 소개팅!”
   프로듀서의 머릿속에서 잊고 있던 약속이 떠올랐다. 친구가 만들어준 소개팅 자리와 상대방 번호. 오늘 안에 꼭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하던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프로듀서는 황급히 시간을 확인했다. 밤 열한 시 반. 아슬아슬하게 오늘은 지나지 않았다.
   ‘끙, 이거 연락은 해야 되겠는데. 근데 벌써 이렇게 늦었으니……. 어쩌지.’
   거절한다고 해도 연락은 해야 했다. 상대방은 프로듀서 쪽에서 연락할 거라고 알고 있을 텐데, 연락을 아예 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다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프로듀서는 핸드폰을 손에 들었음에도 머뭇했다. 또 이 시간까지 기다리는 상대에게 소개팅하지 말자고 보내는 건 더더욱 예의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프로듀서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는 와중에 시간은 흘렀다. 열한 시 삼십오 분. 순식간에 오 분이 지나버렸다.
   ‘일단 연락이라도 하자. 그럼 어떻게든 되겠지.’
   소개팅 여부는 나중에 하더라도 연락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프로듀서는 핸드폰을 켜 메일을 작성했다. 상대방 번호도 확실히 입력하고. 최대한 정중한 내용으로.
   여러 번 메일 내용을 확인한 다음, 프로듀서는 송신 버튼을 꾹 눌렀다.

   * * * * * * * * *

   프로듀서로부터 미키를 받아 씻고 잠들게 한 나오는 그녀의 침대에 대 자로 누워 있었다. 그 뒤로도 소개팅 상대방의 연락을 기다리던 나오는 이제 거의 반 포기 상태였다.
   ‘그쪽에서 하기 싫었나 보네. 괜히 쓴 소리 할 필요 없으니까 잘된 거야.’
   혼자 납득하며 나오는 연락을 향한 미련을 버리려 했다. 그런데도 나오의 한 손은 여전히 핸드폰을 쥔 상태였다.
   눈을 감고 완전히 포기하려는 순간.
   계속 죽어있던 나오의 핸드폰이 징하고 크게 울었다.
   나오는 눈을 번뜩 뜨며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그리곤 손을 재빨리 움직여 핸드폰을 확인했다. 깜깜했던 액정엔 ‘메일이 왔습니다.’라는 알림이 떠있었다.
   “왔다!”
   나오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 질렀다. 기다리면서 소개팅 남자를 향해 생긴 애증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벌써 시간이 밤 열한 시 반이 넘었지만, 지금의 나오에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황급히 손을 움직여 나오는 메일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메일. 메일의 제목도 ‘늦어서 죄송합니다.’였다. 나오는 100% 소개팅 남자한테 온 메일이라고 확신하며 메일을 열었다.
   메일의 내용은,



   이 글은 ‘호시이 자매의 가정방문’에서 이어지는 글이니 안 보신 분은 먼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편은 나오의 턴. 제목이 호시이 자매인 만큼 미키의 턴도 있으니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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