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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 下

댓글: 8 / 조회: 1538 / 추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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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22, 2014 09:26에 작성됨.


『[네, 765 프로덕션의 P입니 … 오, 이게 몇 일만이야?]』
『[그래, 지난주에 보고 한번도 못봤구나. 요즘에 뭐 우리 둘다 바쁘니까, 둘다 어떻게 시간 맞을 때 아니면 얼굴도 못보네.]』

『[나? 지금 치하야 스케줄 와서 대기하는 중이야. 응, 들었지? 이번에 치하야 올드휘슬 출연하는거. 그거 사전 미팅하는겸 해서 같이 왔어.]』
『[에? 난 어차피 오든 말든 치하야가 똑부러지게 할테니까 그냥 치하야 마사지만 해주면 된다고? … 뭐, 뭔 소리야!!!!!]』
『[정말이지, 생방 같은데서 그런 얘기 했다간 큰일나! 치하야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젠 명실상부한 톱아이돌이니까 말도 조심해야한다고.]』
『[응, 알겠지? 정말? … 또 말만?]』

『[응, 응, 아 내일 스케줄 비냐고?]』
『[어 … 잠시만. 응, 내일 하루카랑 치하야는 유닛 녹음이고, 페어리는 오전 스케줄이고, 나머지는 내일 오프고 … 오, 간만에 오후엔 오프네. 점심 무렵 때부터는 별거 없겠는데?]』
『[응, 어, 아 … 내일 시간 되냐구? 아니, 그건 또 왜?]』
『[응? 내일 세시에 ☆●역? 학교 근처네? 내일 오후 스케줄 없어?]』
『[아 … 맞다, 내일 학교 가기로 했구나. 근데 또 마침 단축수업이라니, 운좋네.”
『[아니, 근데 아무리 스케줄이 빈다고 해도 … 그게, 아니, 뭐 ☆●역이라면 번화가는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인파가 몰린다던가, 얼굴을 쉽게 알아본다던가 하는 염려는 없겠지만 …]』
『[뭐라고? 잘 안들려. 응? 에, 뭐라고? 뭐라고??? 잠깐만, 끊지 말아봐. 아니, 진짜 내일 한시에 ☆●역?? 응?]』





이젠 구시가지가 되어버렸음에도, ☆●역 근교는 낡은 단지가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고즈넉한 풍경으로 남아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고, 사람들의 목소리보다도 저 멀리 지나가는 전철 소리와 참새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온다. 도시의 여느 풍경마냥 붉은색 벽돌로 외벽이 감싸진 건물을 바라본다. 끝이 좋지 않았던 유대인 학자 하나는 도시를 마치 문헌처럼 독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세월이 오랫동안 벽을 깍아내렸다기보다는 한획한획 그 흔적을 끄적여놓은 것 같았다. 그 겹겹이 덮여씌워진 글자들 깊숙히 어딘가 나도 있었다.

오후 세시가 되기엔 아직 5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생각해보면 리츠코는 오늘 왜 여기서 보자고 했던걸까. 사무실에 들릴 틈도 없이 사방을 오다니는 리츠코에게 굳이 따져물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곳에 굳이 오랜만에 다시 들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기예보에서는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했는데 하늘은 여전히 꾸물거리기만 할 뿐 여전히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왜 굳이 지하철역 쪽에서 보자고 한걸까. 마침 비가 온다고도 아니 차도 안 끌고 나오기는 했지만, 리츠코가 굳이 여기에서 보자고 한 것도 뭔가 이채롭다.

 … 그러고보니 예전 그때도 점심을 먹고 난 오후였던 것 같았다. 다만 그때는 분명 화창한 날씨였던 것 같았다. 햇볕이 따가운데도 공연히 역전으로 나가 오늘처럼 한적한 역 앞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역 앞은 한적했지만, 분명 그땐 지금보단 좀더 들떴을 것이다.

또다른 전철이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린다. 한시가 거의 다 되어가는 듯 하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을 마치고 하교하는 초등학생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주부, 그런 일상을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별다른 기척도 없었는데 불현듯 몸을 돌렸다. 버릇처럼 몸을 돌렸다든가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예전 어느 순간 향했던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스쳐지나가던 발자욱 소리 하나가 멈추었다.





『와후후훗!!!!!』
『으악, 아미 밖에서까지 뭐하는거야??』
『오오, 오빠 난 줄 어떻게 알았어?』
『뭐 다른건 차치하고 … 일단 지금 이 상황에서 너 말고 이런짓을 할 녀석이 있겠냐!』
『흥흥흥, 역시 오빠는 아미에 관해선 전부 아는구나?』
『뭔가 오해살만한 얘기는 하지말렴, 아미』

『헤헤, 오빠 안녕!』
『 … 반성한거야, 아미?』
『미소녀 아미에게는 한 점 부끄럼도 없다! 지롱~』
『나원 참 … 하여간 학교에서 바로 오는거 아냐? 사복은 언제 갈아입었어?』
『톱스타 아미쨩을 얕보지 말라구! 환복은 1분내에 마치는거야말로 톱아이돌의 기본중의 기본!』
『 … 어쩐지 물건너 나라 신병 훈련소 같은 얘길 하는구나 … 어쨌건 팬들 눈에 안 띄려면 확실히 사복을 입고 변장을 하는게 낫겠지만.』
『후훙훙~ 뭐 그런 것도 아주 없진 않겠지만~』
『그치만?』
『이야~ 아무래도 버젓히 교복을 입고 꽃다운 10대 소녀가 다가가면 안되는 그런 금단의 영역에 다가가는 건 아미로서도 좀 걸린다고 해야하나 … 』
『도대체 10대 소녀가 다가가면 안되는 금단의 영역이 뭐 … 가 아니라, 또 뭔 소릴 하려는거야, 아미!』
『오오오. 오빠가 아무리 아미를 사모한다 해도 사람들 앞에서 아미 이름 막 그렇게 크게 불러도 되는거야? 부끄럽네~』
『 … 』

『하여간 오늘은 아미랑 재밌는거 잔뜩 할테니까, 각오하라구 오빠!』
『 … 그러고보니, 아미 너』
『응응? 왜? 재밌는거라도 발견한거?』
『너 오늘 화장한거야?』
『으,응? 눈에 띄어?』
『당연하지,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미가 바뀐걸 내가 모를 것 같아?』
『 … 흐흥, 역시 아미가 한 파칼하지? 』
『파탈Fatal이겠지. 그리고 아미, 왜 오늘 화장을 한거야?』
『그 … 그거야 당연히 … 』
『마미랑 내기해서 진거지?』
『응?』
『요즘 중학생들은 깜찍하네. 아니, 우리 때도 여자애들이 졸업사진 찍는다던가 할 때는 딴에 예뻐보인다고 화장을 한다고 하긴 … 아악!』
『흥, 메롱이다!!!』





“오빠 … 가 여기에 왜 있어?”
“아미 … ?”

선글라스에 모자를 푹 눌러써서 언뜻 알아보기 힘든 그 모습은 내 앞에 우뚝 멈춰섰다. 스마트폰이라도 만지고 있었는지 액정에 놓여있는 손가락은 어느새 우뚝 멈춰있었다.

“오늘 한시에 릿쨩이랑 여기서 보기로 했었는데 … 혹시 오빠가?”
“아니, 그건 사실 나도 마찬 …”

뭔가 묘한 표정으로 바뀌어가는 아미에게 얼른 말을 걸었다.

“오늘 이리로 오라고 릿쨩한테 들은거야?”
“응, 어제 저녁에 문자로 받았는데 … 오빠?”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아미가 차 밖으로 뛰쳐나갔던 이후로 아미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쩐지 이야기를 돌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미, 그때 이후로 마미랑 화해했어?”

그 말을 듣자 아미는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내색을 하지 않으려했다. 역시 예전부터 아미한테는 이렇게 강수를 두는 편이 좋았다.

“아니, 그때 뭐 마미랑 싸운 것도 아니고 …”
“그치만 그때 이후로 마미랑 말 안하고 있는거지?”
“…”

평소답지 않게 살짝 풀이 죽은 아미를 보며 미소지었다.

“아미가 먼저 사과하는거다. 알았지?”
“ … 응, 사과해야하는건 아미야.

잠시 내 눈을 피하던 아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마미한테도 물론 사과해야하지만, 오빠한테도 사과할게. 그때 내가 오빠에 관한 일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됐어. 정말 미안해.”
“나한테는 사과 안해도 돼. 그때 나한테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
“아니, 아미가 오빠에 관해서 짜증나니 어쩌니 한 거야. 그건 분명 아미 잘못이야.”

잘 기억나지는 않았는데 그러고보니 그런 식으로 얘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아무래도 개의치 않지만 말이지. 어쨌건 나한테 거듭 사과하는 아미를 보니, 불현듯 어제 리츠코랑 약속이 있다며 전해준 마미가 어쩐지 평소랑은 묘하게 다른 태도였던게 기억이 났다.

그래 … 마미는 그런 아이였다. 정말 좋아하는 자기 여동생이랑 아직 말도 못 꺼내면서도, 이렇게 귀여운 꾀를 내고는 하는 그런 아이였다. 갑작스레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빠 … ?”
“아니아니, 미안해, 아미. 딱히 딴 생각한건 아니고 …”

묘한 표정을 짓는 아미를 바라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싱긋 웃어보였다.

“아미, 뭐 겸사겸사해서 바람이나 쐬지 않을래?”

아미는 정말로 평소 같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아미가 정말로 미안하다면, 같이 크레페라도 하나 사먹으러 가자.”

아미의 표정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웃고 있을테지만, 나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이 근방에서 이렇게 같이 걸어보는건 『처음』이잖아. 어때, 아미. 잠깐 시간 내 줄 수 있어?”

가식적인 웃음도, 수줍은 두근거림도, 떨리는 불안감도 아닌 그런 마음으로 아미에게 말을 꺼냈다. 나도 아미도 잠시 말을 멈춘 채 서있었다.

“전부터 생각했던거지만 말야.”
“응?”

아미의 표정 너머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어쩐지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오빤 꼭 아이돌 노래 가사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
“뭐야, 그게.”

현직 톱 아이돌이 그런 얘기를 하는건 여러모로 수수께끼스러웠다. 다만 그 알 수 없는 비유가 썩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자, 그러면 서둘러야 한다고. 요즘 아이돌곡들은 점점 짧아지는게 대세니까.”
“우와, 그럼 러닝타임이 끝나면 오빠도 픽 하고 넘어가버리는거야?”
“아니, 아무래도 요즘엔 디지털 싱글이 잘 나가서말야.”
“그럼 확실히 서두르는게 낫겠네.”

아미가 내 앞을 슥 지나가며 부드러운 바나나향이 남겨졌다. 역전에 있는 크레페집을 향한 채, 아미는 이젠 미소를 지으며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자, 오빠,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구?”
“이럴 때일 수록 천천히 여유를 향유해야한다니까.”
“시끄러워, 소비사회의 기생충.”
“쳇.”





『우와와, 레몬 슈가 크레페다☆』
『오, 보기부터 아주 그럴듯 해보이네.』
『그치그치? 아미가 오자고 한 거 잘 한 것 맞지?』
『그래그래, 아! 네, 메이플 크레페 여깁니다. 네, 고맙습니다.』
『후훙훙, 오빠 것도 아무래도 맛있어보이네.』
『우물우물 … 오, 확실히 맛있네. 아미도 한 입 먹어볼래?』
『에? 아, … 아니, 그게 아니라 … 흥! 오빠 것보다 아미 크레페가 훨씬 더 맛있으니깐!』
『 … 뭐야 그건. 하여간 그게 그렇게 맛있어? 나도 한 입 먹어볼까?』
『그 … 그것도 곤란하다구! 내가 다 먹을거라구!』
『아, 아미 크레페 치사하네.』
『흐흥! 아 … 아미가 크레페 좋아하는거 이제야 안거야?』

『근데 오늘은 갑자기 왠 단축수업이야.』
『내일 우리 학교 발표회! 그래서 오늘 전 반 다들 환경미화여서 일찍 끝난거라구~』
『호오, 그런데 마미는 어디에 있고?』
『마미네 반에서 환경 미화중이지~』
『그럼 아미는?』
『에?』
『아미네 반은 환경미화가 없는걸까?』
『아 … 아하하 … 그게 말이지, 오빠? 오늘 아미네 반에서는 환경미화를 잘하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애가 나타났다거나 … 음 … 』
『흐음, 그랬어? 응?』
『우우우우 … 』

『정말이지, 아미, 그러면 안된다고?』
『그치만! 오빠랑 모처럼 데이트인데 … 』
『하여간, 뭐 일단 도로 돌려보내진 않을테니까. 일단 먹던 크레페부터 다 먹자.』
『아, 그러고보니까 마미도 여기 크레페 정말 좋아하는데.』
『으음 … 아무래도 지금 하나 싸가는게 낫겠지?』
『우우우우 … 뒤늦게 혼자 먹었다는 거 알면 마미 삐져버릴거야 … 』
『그러면 뭐 내가 사든지 하지 뭐. 그럼 뭘 좋아하려나, 마미는.』
『후후훙 … 천재미소녀 후타미 자매는 둘이면서 또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페를 두었을 때 두 소녀는 결코 메워질 수 있는 협곡을 두고 금색 대야에 손을 씻는 것이었다!』
『 … 뭔 소린지 알 수가 없잖아.』
『그러면서도 자매는 결국 노랑색 과일, 그 끊어질 수 없는 자매애의 상징 속에서 여전히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아, 뭔소린지 모르겠다. 저기요. 여기 바닐라 크레페 하나 포장해주시겠어요?』
『너무해 → !!』





“여기 바나나 크레페 오랜만이네.”
“잘 안 오나 보구나, 이거 크레페 맛있는데.”
“아무래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사간 후에는 좀처럼 안 오게 되네.”

테라스 카페 한 켠에 앉은 채 나는 크레페를 한 입 베어물었다. 진한 카라멜 내음이 찐득히 흘러들어왔다. 아미는 얌전한 모습으로 야금야금 크레페를 먹고 있었다.

“아미는 이젠 크레페도 조신하게 먹네.”
“응? 호 … 혹시 이상해?”
“아니 뭐, 그냥 어릴 때 모습이랑 많이 달라져서.”

갑자기 그 말을 듣자 마자 아미는 손에 우걱우걱 크레페를 밀어넣기 시작했다.

“아미, 사람들 다 쳐다본다. 그럴거면 선글라스는 왜 끼고 나왔어.”
“후 … 해치웠다아 …  켁!”
“그렇게 먹으니 걸리는게 당연하지. 자, 내꺼 아메리카노라도 마셔.”
“으, 응 …”

벌컥벌컥 아메리카노를 마시고는 씁쓸해하는 표정을 짓는 아미는 결국 그리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하아, 덕분에 살았어 오빠.”
“그렇니까 갑자기 그렇게 먹어치우려고 하지 말라고. 하여간 그 텀블러 나 좀 줘.”
“응, 무슨 텀블러?”
“내꺼 아메리카노 있는 텀블러 말야. 나도 좀 마시자.”

아미는 잠시 멈칫하다가 툭 하고는 테이블에 텀블러를 내려놓았다.

“자, 여기!”
“어, 그래. 근데 그냥 건네줘도 되지 않았어?”
“ … 오빠는 치사한걸까, 무심한걸까 … “
“응? 지금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어쩐지 뾰로통해진 아미를 달래다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기분이 참 묘하다.”
“응? 어떻길래? 이렇게 오랜만에 나와서?”
“정말, 아가씨한테 꼬치꼬치 캐묻는건 좋은 버릇이 아니라구.”
“이게 다 아가씨의 심기를 살피는거랍니다.”
“후후, 오빠도 녹록치 않네.”
“아무렴, 이제 프로듀서 몇 년차인데.”
“그렇네 … 정말이지.”

저 너머 아기자기한 풍경을 보면서 아미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여간 오늘 아가씨의 기분은 비밀이랍니다!”
“거참, 까다로운 아가씨네.”
“뭐 이오링한테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지만 말이지~”

읏차 하더니 아미가 벌떡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서니 아미는 그 하얀 손을 내 앞에 내민다.

“ … 아미?”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고개를 돌린 채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에 나는 아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여기에 들어가보자 오빠!』
『우악! 여기 여자애들 팬시점이잖아?』
『오~ 오빠 생각보다 잘 알고 있네?』
『당연히 알 수 밖에 없지! 누가 보더라도 십대 여자애들 밖에 없잖아?』
『자, 자. 부끄러워마시고~』
『으 … 꼭 나까지 들어가야하겠니.』

『확실히 이런데에는 꼭 학용품 종류만이 아니라 화장품이나 다른 액세서리들도 파는구나.』
『그치그치? 여기 과자도 있다궁~』
『흐음, 확실히 이런 다양성으로 십대 소비자들을 사로잡는구나. 오, 여기에 이런 것도 파는데?』
『펜던트들이네~ 오빠도 펜던트 하고 싶어?』
『그럴리가 없잖아. 뭐 나보다도 말이지 … 』
『응? 와아! 이 펜던트 꼭 루비 같아!』
『이 하트 모양 펜던트 맘에 들어? 아미?』
『응응!』





“ … 이걸 사달라고?”

아미는 교복을 입은 여중생과 여고생들로 가득찬 10대용 팬시가게로 나를 이끌었다. ‘처음 오는 곳’이었다. 이런 팬시가게는 10대들이 좋아할만한 여러 상품들을 다양하게 구비하지만, 당연히 그 상품들의 가격대 및 질은 10대의 구매력에 맞춰질 따름이다.

“응.”

아미가 나를 끌고간 곳은 엑세서리 진열대, 그중에서도 펜던트 진열대였다. 그곳에서 아미는 어느 펜던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하트모양 펜던트였다. 은으로 도금된 것 같은 틀에 꼭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보석이 박혀있었다. 아니, 사실 이건 결국 푸르게 색이 입혀진 큐빅일 것이다. 그 디자인부터 결국 10대들이나 할만한, 2000엔도 하지 않을 그런 펜던트.

“아미, 한가지만 물어볼게.”
“응.”
“무슨 생각인거야?”

아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똑바로 아미를 쳐다보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미는 눈을 맞추어주지 않았다. 아미는 그저 아까 크레페 가게에서부터 놓지 않은 손을 좀더 꽉 쥐었을 뿐이다. 그 손은 어쩐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 … 처음이잖아. 오빠랑 이렇게 오는거.”
“ … 그래 『처음』이지.”

그래 『처음』이었다.

『자, “Smoky Thrill” 대박 기념! 아미한테 주는 선물이다!』
『으, 응? 아미한테 정말로 사주는거야? 이 루비 목걸이?』
『뭐 … 진짜 루비는 아니고 붉게 물들인 큐빅이겠지만 … 응! 내 선물!』
『에, 아니, 그, 아니 진짜로 오빠한테 목걸이를 받으면 설렌다던가, 아니, 진짜로 오빠가 악세서리를 사준다든가, 그렇다든가 하는걸, 기, 기대한건 아니지만서도, 뭐랄까 … 』
『정말 뭐라는거야, 아미. 자, 한번 해볼래? 아니다, 특별히 내가 직접 해줄게. 자, 가까이 와봐. 아미.』

“실례합니다, 이거 펜던트 계산 어디에서 하면 됩니까?”

아미의 손을 붙잡은채 카운터로 향했다. 계산을 하는 동안 아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가게 문을 나섰을 때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정말로 … 사준거야?”
“당연하지, 바보. 바로 옆에 있었잖아.”

나도 모르게 아미에게 쿠사리를 줬다. 아미는 여전히 내 눈을 피한 채 딴 곳을 보고 있었다.

“내 눈 똑바로 봐. 후타미 아미.”

평소에는 하지 않는 살짝 강압적인 말투로 말하자 아미는 화들짝 놀라며 내 얼굴을 향했다. 선글라스 너머로 그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나는 알 것만 같았다.

“너도 그렇게 말했고, 나도 그렇게 말했어. 오늘 이렇게 『처음』으로 같이 여기에 온거잖아?”

그렇게 말하며 나는 아미의 어깨 너머로 팔을 둘렀다. 숨을 헉하고 멈추는 아미에게서 알싸한 바나나 내음이 난다. 목걸이끈 후크가 유달리 들어가질 않아 괜시리 짜증이 난다.

“처음이니까, 이런 것도 선물해주는거야. 알겠지, 아미?”

팔을 풀자 아미가 내쉬는 숨이 나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석양빛 밑에서 아미의 얼굴은 붉게 비치고 있었다. 그 밑으로 싸구려 큐빅이 박힌, 톱 아이돌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그런 펜던트가 걸려있었다.

“오빠는 … 정말 어디선가 튀어나온 것 같은 사람 … ”

아미가 갑작스레 나를 포옹해 올 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아미의 얼굴은 여전히 볼 수 없었다.

“처음이니까, 정말 처음이니까, 이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거야.”

아미의 목소리가 아래에서 웅얼웅얼 들려왔다. 쉽게 놓치지 않겠다는듯 아미는 나를 꾸욱 앉고만 있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방방 뛰어다니더니 벤치에 앉자마자 이렇게 쿨쿨 자는건 또 뭐야.』
『뭐, 한창 성장기니까 수면시간이 긴거야 그렇다고 하지만 … 』
『하여간, 이렇게 푹 자고 있으니까 귀엽네.』
『 … 사무실에서도 말썽만 피는 대신 이렇게 공주님처럼 얌전히 자고 있으면 좋을텐데.』
『아, 이제 벌써 어둑어둑해져가는구나.』
『슬슬 돌려보내야겠네.』

『아미. 이제 슬슬 일어나자.』
『으음 … 아미, 5분만 더 …』
『자자, 밖에서 자다간 감기걸린다고. 일어나자~』
『으응 … 에, 오빠?』
『네네, 아미의 프로듀서랍니다. 일어나야죠?』
『에에, 지금 무, 무릎배게?』
『 … 뭐, 내가 해준거라기보다는 아미가 그냥 여차저차하다보니 무릎을 배고 쿨쿨 잔거지만.』
『우와, 우와, 우와아!!!』
『잠깐만, 아미. 갑자기 그렇게 바둥대지 말라고?』

『자, 정신차렸지? 아미?』
『 … 응.』
『그럼 이제 날도 저물고 하니까 후딱 집으로 갈까?』
『잠깐만, 오빠.』
『응?』
『우리, 역까지 천천히 걸어가자.』
『왜? 할 말이라도 있어?』
『응, 아미 할 말이 있어.』





“오빠, 슬슬 일어나야지.”

자그마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뜨니 이미 해는 뉘엿뉘엿지고 있었다.

“자, 잠꾸러기 오빠. 밖에서 자다간 감기 걸린다구.”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꾸벅꾸벅 아미의 어깨에 기대 졸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벤치에서 보는 풍경은 달라짐이 없었다. 아까 막 벤치에 앉았을 때나, 꿈 속에서 봤을 때나.

“이 동네는 정말 예쁘네.”
“그치? 내가 살던 곳이긴 하지만 … 한결 같이 변하지 않아 이 곳은.”

우린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다 말없이 일어났다. 손을 잡는 일 같은건 없었다. 다만 팔을 흔들며 걸을 때마다 우리들의 손가락은 서로 자꾸만 부딪혔다. 그렇게 툭툭 부딪히는 것이 아프기도 하련만, 아미는 그렇게 걷고 있었다.

“있잖아 오빠.”
“응?”
“그런 예쁜 풍경은 정말 한결 같을거라고 생각해?”

서로 묵묵히 앞을 보고 걸어가면서 아미는 문득 내게 말을 걸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다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미는 그렇다고 생각해.”
“그렇구나.”
“한낮에 골목을 쏘다니던 애들이 이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이 고장을 떠나고, 그 자리엔 다른 아이들이 뛰놀지만, 이런 밤만큼은 언제나처럼 그대로가 아닐까 싶어.”

앞만 묵묵히 보고 걷고 있었기에 아미의 얼굴은 보이질 않았다. 보폭도 짧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발짝 한발짝 역에 가까워오고 있었다.

“오빠는 그런 거리가 좋아?”

내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아미는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도 거리엔 여전히 해가 지면 전깃불이 하나둘 들어와. 그리고 이렇게 가끔이라도 이 거리를 찾아올 때, 아마 그 거리는 웃고 있을 거야.”
“아미는 시적이구나.”
“그러게. 역시 곡을 써야할지도 몰라.”

어느새 역사에 다달아 있었다. 묵묵히 역사를 지나가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아미가 향하는 방향과 내가 가는 방향은 서로 반대다. 아무말 없이 아미쪽 플랫폼으로 향해 내려갔다. 전철이 근접해온다는 신호가 들릴 때까지 우린 다시금 말없이 서있기만 했다.

“오빠, 이렇게 처음으로 데이트를 해보네.”
“그래, 『처음』이었지.”
“아미 … 는 있잖아.”

지하철 신호음이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미는  그 두꺼워보이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단 한번도 변하지 않았어. 거짓말 따위 하지 않아, 지금부터만큼은.”




『있잖아, 오빠. 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쿵쾅쿵쾅거려.』
『미키미키가 오빠한테 안길 때면 화가 나. 하루룽이 만들어주는 과자는 내가 먼저 뺏어먹고 싶어.』
『마미가 … 마미가 집에서 오빠 얘기를 하면서 부끄러워 할 때면 가슴 속을 꼭 마미가 꾹꾹 찌르는 것 같아.』
『아미는 말이지, 오빠가 정말로 좋아.』
『오빠가 XSM을 플레이할 때 그 옆에 붙어서 함께 보고 싶어.』
『오빠가 레몬 슈가 크레페를 먹는걸 보고 싶어.』
『그니까 … 그니까 오빠.』




내 눈을 올려다보는 그 눈에서는 어쩐지 푸른 빛깔이 났다. 하얗게 부서지는 대신 그 푸른 빛깔은 호수 전체를 감도는 것만 같았다.

분명 오랫 동안 본 것만 같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본 것만 같은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있었던 것 같지만 내가 외면했던 그 눈빛을 나는 이제서야 똑바로 직시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데도, 나는 입을 열려했다. 아무 것도 쥐지 않은 주먹을 나도 모르게 꽉 쥐었다.

열차 신호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만치 아미도 내게 한발짝 더 다가왔다. 『처음』인 그 모습에서 나는 『없었을』 몇 년 전의 일을, 꿈에서 보곤 하던 그 모습을 다시 발견했다.

“오빠, 오빠는 정말 동화 속의, 아이돌 노래 속의 왕자님이야.”
“왕자님 … 이라 …”
“응, 누가 뭐래도 확실한걸, 이건.”

푸른 눈빛과, 가슴 팍의 푸른 빛이 함께 일렁였다. 바나나향이 콧잔등을 간질였다. 그래 정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변한 것은 나만일지도 모른다.

“오빠 … 오빠는 나도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나는 … 나는 동화 속의 왕자님이 될 수 있는걸까?”
“물론이야. 오빠는 왕자님인걸.”
“그렇다면 … 분명 동화 속의 주인공인거야. 우리 모두.”
“그렇게 말해주는구나. 기뻐. 그렇게 믿을게. 아니 정말로 그럴꺼야.”

일렁이던 푸른 빛이 넘쳐 흘렀다. 그리고 너무나도 활짝 핀 그런 미소를 펼쳤다. 부서지지 않는 파도에 적셔짐에도 그 미소는 풀이 죽지 않았다. 그렇게 그 미소는 나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전철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고 항상 끝이 났어. 파파가 읽어주던 그림책은.”



그렇게 내 왼쪽 귓잔등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 뭔 소리 한걸까? 아미가? 하하핫!』
『 … 아미 … 』
『아니, 정말 그냥 아미가 한번 해본 소리라니까? 음후후, 오빠 설마 속아넘어간거야? 오빠도 참 순진하기는!』
『 … 미안해 … 아미 … 』
『아니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겁니까 대장? 아무 것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지 영문을 모르겠지 말입니다?』
『아미 … 정말 … 나는 … 』
『어, 어? 우, 울지마? 우 … 울지 말라고 오빠? 그, 아무 것도 『없었는데』 우 … 울면 안된다고?』
『아미 … 정말 미안해 … 』
『그 … 그 … 그러면 안된다고. 어? 뭐지 이게?』
『아미 … 』
『응? 하 … 자, 잘 모르겠네. 그러면 오, 오, 오빠? 내, 내일 … 보자? 응? 내일 사무소에서? 빠이빠이!』




「그때 누군가 달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던 것만 같다.」
「아무 것도 없었던 거야!”라고 들리며 뛰쳐나가는 아미의 모습을 나는 더 보지 못했다.」





“파파의 룰은 두가지였어. 9시가 땡치던가, 아니면 그 이야기가 끝나던가, 그러면 우린 항상 불을 끄고 자는거였어.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거라고 했으니까, 그 이야기는 이제 끝나고 이제 잘자요 인사를 하는거야.”

“ … 너 … !”

눈을 뜨자 내 앞에 있던 그 아이는 어느새 전철에 들어가 있었다. 여전히 그 미소는 그대로였다. 파도가 흘러간 흔적만이 희게 남아있었다.

“환상은 없었던거 잖아. 그런거지?”

“너, 그렇게 또, 『없었던』 것으로 해버릴거야? 진심이야?”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듯 나를 향해선 변함없이 그 미소만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빤 아무 것도 몰라. 나하고 닿을 수는 없는걸?”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았다 한들, 나만큼은 변했을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어라, 미안 오빠. 책이 덮이면 이제 아기는 코하고 자야한다고?”
“시끄러워! 아이가 어쩌고 하기엔 이젠 주름살이 져서 민망하다고!”

어머, 그건 유감이라면서 피식 웃는다. 열차가 곧 출발한다는 구내방송이 들려온다. 내가 소리를 친들 그 웃음에는 변함이 없다. 동화 속의 주인공들이 그런 것 처럼.

“곤란하기 짝이 없네. 오빠, 그런건 현대 부조리극에나 어울려?”
“아아, 난 전통 동화 따위는 신물이 난다고.”

열차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내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네.”

옆을 바라보는 눈가가 반짝였다.


“나, 믿지 않지만 … 닿을 수 있다는 것 믿지 않지만 …”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빠가 정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한번만 기다려볼게. 절대 안 믿을거지만 ... 한번만.”
“ … 내가 책장을 덮는게 아니라, 오빠가 책장을 덮게 해줄게.”



문이 닫혔다. 열차가 떠나갔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창문으로 보이는 입술만을 봤을 뿐이다. 하지만 잘못 보았을리가 없다.

그래, 나는 지금에야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변하지 않았다 한들 나는 확실히 변했다. 그러니까 나는 결심했다. 이대로 책을 덮게 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것은 내가 되어야한다. 누군가가 그냥 그 책장을 넘겨버리는 것을 놔둘 수가 없었다.

단지, 아주 잠시, 오래도록 쳐다보았던 모습, 매일 쳐다보았던 그 모습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누구보다도 매일 달라졌던 모습, 매일 쳐다볼 때마다 달라졌고, 어느새 내가 모를 것 같은 그 곳으로 가버린 모습이 잠시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응, 갈게.’

누구에게도 입을 벌려 말하지 않을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역을 뛰쳐나갔다. 지금 이 시간이 되면 30분에 한번씩이나 전철이 왔다. 전철을 기다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차라리 뛰어가는게 나을 것이다.

내가 잘 아는 그 곳으로 나는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스케줄이 잡히기 시작한 이후로 내가 이렇게 뛰어본 것이 얼마나 될까. 그동안 유산소 운동이라도 열심히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랐다. 나도 모르게 멈춰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단지 몇 개를 건너고 신호등 몇 개를 건넜다. 지하철은 멀리 우회해가는 그런 골목을 몇 개나 지나쳤다. 점점 익숙한 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점점 발은 느려지기 시작했다. 벽에 반쯤 쓰러진채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횟수는 점점 잦아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지하철을 타는게 시간상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 이 두근거림을 어떻게 견뎌낼 수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미 깜깜해진 주택가는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데서 고성방가를 내지르는 것은 경찰에 경범죄로 끌려가기에 딱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해야할 일이 있다.



“후타미 아미, 빨리 튀어나지 못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주택가는 조용하기만 했다. 잠시 후 나는 다시 한번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주변 집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창문을 열어 내 얼굴을 살펴보는 집도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한번 고함을 내지르려 하는 찰나였다.


“미쳤어, 오빠??”


대문을 열고 저지 차림으로 뛰쳐나오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니, 이젠 더이상 여자아이는 아니었다. 나는 그 사랑스러운 여자를 품에 껴안았다.


“뭐, 뭐하는거야 오빠! 지금 제정신이야?”
“아아, 제정신은 아닐지도 몰라. 나도 모르겠어!”


머리를 푼 그 사랑스러운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예쁜 얼굴에 그 눈은 잔뜩 충혈되어있었고 얼굴엔 눈물자국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너무도 예뻤다. 너도 충분히 변했다고, 정말이지. 너는 아름답다고.

그리고 꽉 쥐어져있었던 것만 같은 무언가가 땡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오래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싸구려 붉은 빛 펜던트가 땅바닥에 떨어져있었다. 요란한 하트모양, 여중생들이나 할 그 싸구려 펜던트는 여전히 영롱했다.


“오빠,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아무 것도 『없었던』 거잖아. 『없었던』 걸 이러면 안되잖아!”
“없었던 것으로 했지? 그 모든 걸 말이지? 그래, 너 마음대로 해. 아무 것도 없었어, 우리 사이엔.”


내가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 모습에 그녀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래 그럴 것이다. 나도 내가 지금 무슨 정신으로 이러고 있는건지 모르겠으니깐.


“하지만 말야. 이젠 나는 결코 너를 놓지 않을거야.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게 『처음』이라면 말이지, 앞으론 다시는 『처음』이 될 일은 않을거라고. 알겠어?”


눈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한 그녀의 품에서 레몬 내음이 내 코 속을 파고 들었다.


“나와 함께 해줘, 아미. 이젠 너를 더이상 놓치지 않아.”


돌연 아미는 고개를 내 가슴팍에 파묻었다. 그리고 아미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손으로는 내 등짝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아팠다. 하지만 나는 아미를 껴안고 있는 내 팔을 놓지 않았다.


“오빤 나빠! 오빤 나빠! 악질! 변태! 사기꾼!”


웅웅거리는 소리가 계속 내 품 속에서 들려왔다. 나는 더더욱 힘있게 아미를 껴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진정을 했는지, 아미는 내 품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화장이 번진 눈물자국에 콧물 자국에, 묘령의 처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아미, 얼굴이 엉망진창이라구?”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오빠!”

어이, 그건 이오리한테 배운 말투냐? 이렇게 딴지를 걸려던 것을 속행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내 입술에 닿아오는 어느 입술이 가만 놔두지 않는 탓이었다.


“오빠, 아미도 말이지, 『처음』으로 말할거야.”


까치발을 든 채로 아미는 여전히 상기된 표정이었다.


“왕자님, 12시가 지나도 당신을 떠나지 않을거야. 낮 열두시가 되고, 다시 밤 열두시가 되도 떠나지 않을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떠나지 마.”
“공주님의 분부대로.”


그래, 페이지가 일방적으로 혼자 덮이게 놔두지 않을거다. 페이지를 덮는 것은 누구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야. 그건 나와 아미가 덮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불을 끄고 ‘이제 잘 시간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씨였다.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30분은 남았다. 조바심이 나서 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이런 하얀옷에 땀이 지면 꼴불견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그랬다간 난장판이 될 것이고, 오늘 모든 예식은 망쳐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분노에 찰 것이고, 그 사람들이 사회적 혼란을 일으킬 것이고, 이는 일본의 국내소란을 낳을 것이고, 이는 이웃나라 정세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것이고, 그리고 세계는 멸망할 것이 틀림없었다. 큰일이다!

“그러니까 마미, 나 신부대기실 좀 들여보내줘.”
“각하.”

물론 아미가 웨딩드레스 입은 건 이미 웨딩촬영할 때 다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 때 입는 웨딩드레스는 또 다른 법이었다. 이런건 원래 신랑이 제일 먼저 봐야하는것 아닌가? 그런 정당한 논거에 따라서 나는 신부대기실에 대한 출입권을 요구했지만,

“각하.”
“어째서?”
“신부대기실에 오는건 신부 친구들이지 신랑이 아니라구! 오빠는 밖에서 빈객들 맞이하고 있으면 된다니까!”
“그치만 그치만~ 손님들 아직 본격적으로 오시기 전에 한번만 보고 갈게, 응? 마미?”

흰 턱시도를 입은채 꿈틀꿈틀거리는 나를 마미는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결혼식에서 흰 색은 신부의 색이라고 하던가, 마미는 엷게 붉은 빛이 감도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실버 넥클레스가 얌전하게 드레스 속으로 들어가 묘하게 보라빛으로 감돌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 하여간 좀 들여보내달라고. 마미. 응? 형부의 부탁이잖아?”
“하 … 이런 사람이 앞으로 형부라니, 정말 앞으로 걱정되네 오빠.”

한심하다는듯 나를 쳐다보는 마미 앞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있잖아 오빠.”
“왜, 마미?”
“오빠는 행복해?”
“그럼!”
“오빠는 행복하겠지?”
“물론이지!”

마미는 환하게 웃었다. 푸른 빛 호수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오빠와 아미는 내가 뜨거운 눈빛으로 봐줄테니까.”
“응.”
“각오하고 있으라고?”
“암, 대비하고 있으마.”

쿡쿡하고 웃더니 마미는 결국 내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특별히 봐주는거니까, 금방 들어갔다 나와야해.”
“알았어, 알았어.”

묘하게 흩날리는 바나나향을 맡으며 나는 신부대기실 앞에 다가갔다.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몬 같은 청량한 빛이 그 안에서부터 비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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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열렸던 '온리마미전' 때 내려고 했던 글인데 결국 오늘에야 내게 되네요.

... 불민한 글쓴이의 실력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마미의 이야기를 쓰고자 한 글입니다.
글 쓰는 사람이 글이 아니라 이렇게 덧붙이는 말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이 글은 '거짓말'을 하는 글입니다.

글 제목에 주목을 하며 읽어주셨기를 바라며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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