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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사랑은 집착이 되어야 하는가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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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27, 2014 00:13에 작성됨.

단편 '내가 있을 곳' 과는 약간의 연관이 있습니다.


실패한 사랑은 집착이 되어야 하는가 (上)


옛날 꿈을 꾸었다.
어릴 적의 꿈.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깨기 전까지 그곳은 꿈이 아니었다.
깨어서야 그것이 꿈이라고 알았다.
깨어버린 꿈은 무서운 일상의 속도로 내 곁에서 멀어져갔고
그렇게 나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잠에서 깨자, 어제 마셨던 맥주캔과 켜진 TV가 보인다.
그리고 땀으로 축축한 셔츠와, 지끈거리는 두통이 느껴진다. 

나는 어른이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나 있는, 밤새 자란 수염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P side


겨울도 슬슬 막바지라, 이전보다 약간 늦은 시각에 저녁놀이 마중을 나온 모양이다.
석양을 등진 채로 나란히 걷는 나와 아이돌.
평소엔 수많은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꿈을, 그녀 자신을 전하는 그녀의 표정은 역광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몸에서 뻗어져 나온 긴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거리를 나란히 걷고 있다.
평행한 거리감이 기분 좋다.

녹화가 끝나고 돌아가는 저녁의 공원은 이렇듯, 언제나 감상에 젖는다.

달성감과 피로감. 약간의 후회와 반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하루도 노력해준 그녀들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음날이 되면 벌써 전부 과거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린다는 쓸쓸한 기분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오늘도 하루가 무사히 끝났구나 하는 현대 직장인의 흔한 안도가 있다.

하지만 오늘의 하루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림자의 발걸음이 멈춘다.

"무슨 일이야?"
"저기…"

그녀가 몸을 이쪽으로 돌리자, 역광으로 보이지 않던 그녀의 표정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직감적으로 느꼈다.

안 된다.

어떠한 판단보다 우선하여 나온 감정은 그것 이었다.

그녀가 말을 끝까지 하는 순간 그녀와 나의 관계가 아주 큰 변화를 맞게 될 것임을 알았다.
내 대답이 마음의 흉터가 될 수도 있기에, 이 소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모순된 감정. 
하지만 도망치지 않는다. 그녀의 프로듀서로서 끝까지 듣고 대답해주어야 한다. 그것 역시 프로듀서의 '일' 이니까.

나에게는 이미 정해진 대답이 있다.

결론이 서면, 이유를 만들기는 쉽다.


그렇게 마음먹고 그녀, 내 앞의 후타미 마미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마미가 결심한 듯 나를 올려다본다. 항상 장난기 많고, 재기발랄한 빛이 감도는 그녀의 눈은 약간 가라앉은 채 흔들리고 있다.
눈과 눈이 마주친 그때,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작은 손을 꾹 쥐고 있는 게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을까? 마미는 입을 열었다.

◇◆◇


"오빠, 마미 배고파"

저기 저 식당 가보자~ 하면서 겨울 거리를 총총 뛰어가는 마미의 뒤를 따라가면서 방금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면서 쓸쓸하게 얼버무리려는 모습에 안도한 나 자신에게 어쩐지 화가 났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대답해줄 수 있어? 네 마음을 말이야. 하고 또 다른 내가 속삭이면 분노는 빠르게 사그라졌다. 정말로 책임감 없는 분노다.

마미. 내 담당 아이돌.
류구로 활동하는 아미와는 이야기할 시간도 부족해져서 외로울 텐데 내색한 번 제대로 하지 않는 착한 아이.

그녀가 힘들어하면 어떤 문제보다도 앞서 도와줄 것이고, 그녀가 기쁘면 나도 누구보다 기뻐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프로듀서로서, 마미가 잘 따르는 오빠로서의 책임감이다.
그녀가 만약, 만에 하나라도 나에 대해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요구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자기 물건을 자기가 사는 장인은 없다.

예전 아즈사 씨와의 술자리에서 아이돌이란 무엇일까요 - 하고 질문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명백한 대답을 요구받은게 아닌 혼잣말 같은 것이었지만.
당시엔 신출내기 프로듀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질문 받는 일 보다는 질문 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았던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만큼은 어느정도의 사명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대답했던 것이다.

아이돌

그것은 꿈을 파는직업이다.
타인의 동경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자꾸자꾸 꿈을 키워서 팬들을 그 안에 담아간다.
그리고 그걸 돕는 게 바로 프로듀서의 일이다.

나의 대답을 들은 아즈사 씨의 표정은 드물게도 읽기 힘들었지만, 이윽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즈사씨는 나보다는 연하지만 때때로 더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술기운 탓인지 잠깐 멍해진 머리를 흔들고, 아즈사 씨에게 묻는다. 

"제 대답이 이상한가요?"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듯이 아즈사 씨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결국, 아즈사씨는 '후후…퀴즈로 해둘게요.' 하면서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애초에 정답이 있는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아무튼, 그 이후로도 내 아이돌과 프로듀서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대 전제.
아이돌과 프로듀서는 영원히 평행한 관계. 
같은 방향을 향하지만, 그것이 겹쳐질 일은 없다.

이 관계를 둘 중 한 명이 무너뜨리면
설령 그것이 아이돌부터 행해진 파괴라 하더라도
그것은 아이돌로서의 아이돌을 지켜내지 못한 프로듀서의 잘못이다.

아까 마미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마미의 쓸쓸한 표정을 떠올리며 그것이 마미를 조금 더 신경 써달라는 항의표시 정도로 생각하기로 애써 마음먹었다.
나는 그녀들의 모든 감정을 받아들여 줄 수 있지만, '마음'은 받아들여 줄 수 없으므로.

"오늘은 기분이야.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맛있어 보이는 걸로 마음껏 시켜"

분위기있는 식당의 테이블에 앉아 최대한 여유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어, 진짜? 오빠 괜찮아?" 

마미가 약간 놀란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자, 고개를 끄덕여준다.
마미는 내 말을 듣자 메뉴판에 있는 사진들을 열심히 훑어보면서 음식 이름들을 하나씩 웅얼거리고 있다.

마미는 항상 이렇다.

메뉴판을 받으면 쓱 보고 바로 결정하는 아미와는 달리, 마미는 항상 메뉴판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 결정한다. 쌍둥이라고 해도 이런 부분에서 묘한 차이를 보이는 점이 신기하다. 하지만 재밌는 건 둘이 시키는 메뉴는 항상 거의 똑같단 말이지. 

내 마음 속 분위기를 바꿀 겸, 마미를 슬쩍 놀려주기로 했다. 
 
"많이 먹고 쑥쑥 커야지, 우리 공주님"

아얏! 
마미가 메뉴판으로 날 때렸다!

"오빠, 마미는 이미 어른이거든!"
"흠"
"뭐야 그 반응은……"

뭐.
마미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많이 성장했다.
프로포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신적인 측면이다.
아미와 마미를 처음 봤을 때, 마미는 아미의 그림자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이든지 항상 아미가 먼저 시작하고, 그다음이 마미의 차례였다.
물론 성격이나 밝음, 재능에 차등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니지만 단지 행태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마미가 언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놀랐다. 코토리씨가 2○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다음 정도로.

하지만 아미와 마미의 정식 데뷔가 정해지고, 아미는 리츠코 밑에서 류구코마치로 따로 활동하면서 둘은 조금씩 달라졌다.
마미에겐 조금 쓸쓸한 일이겠지만, 나는 그 사실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마미가 아미의 그림자처럼 보였던 그 느낌은, 점차 어른스러움이라는 매력으로 변해 마미의 몸과 마음에 깃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 사실을 마미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마미는 나에게 있어서 쭉 아이인 채로 있었으면 하니까.

그게 서로에게도 좋다고 생각하고.

"어른은 자신을 어른이라고 굳이 주장하지 않아"
"그럼 오빠는 어른이야?"
"나는 당연히 어른이지"
"방금 어른은 자신을 어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고……"
"어…"

오늘 아침의 꿈이 기억의 수면 밑에서 갑자기 소생한다. 
어른이라……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어른이다. 일단, 어른의 조건이란 일본의 민법에 명시되어 있다.

민법 제4조. 나이 20세로써 성년이 된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볼 때, 20세의 나는 아직 어린애였다. 그 당시에도 나는 중, 고등학교 때의 자신을 어린애 취급했었다. 지금의 나 역시 나중에는 늙은 나에 의해 어린애가 되겠지.

시간이 지나면 불확실한 명제가 확실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확고하던 진리가 불확실해지는 경우는 많다. 이 케이스도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마미는 나에게 있어 어린 소녀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어른으로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이다. 
뭐 그래 봤자 누구에게나 시간은 똑같이 흐르기 때문에 나에게는 영원히 어린애겠지.

그러므로 어른과 아이는 주관적인 판단도 포함해서 결정되는 것이지만……
하고 생각하며 마미를 응시한다. 마미는 내 눈을 보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아까 공원에서 마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답변은 하나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거짓말을 했다. 

나는 침묵한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본 마미는 포기했는지, 눈을 내리깔면서 말했다.

"알았어, 그냥 아이취급해…… 됐지?"

그래.
그걸로 됐어.

평소라면 축 처진 마미를 북돋아 주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침묵하기로 한다. 

나는 몹시 비겁한 어른이므로.

침묵 속에 마미는 메뉴판을 덮더니 작은 파스타 하나만을 시켰다.

여하튼 어른이 되면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명백한 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매우 쉽다.


Mami side


"~~~~!!"

나는 침대에 엎드려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소리 질렀다.
아미는 오늘 돌아오지 않는다.

'바보 바보 바보옷!!!'

차일까 봐 고백하지도 못하다니 자신의 한심함에 눈물이 나온다.
오빠를 만난 지도 벌써 1년. 처음에는 약간 못 미더웠지만 그래도 상냥한 오빠였던 그는, 어느새 내 마음에 쿡 박힌 채 나올 줄을 모른다.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간질간질해 지면서 동시에 아파온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가 더 가슴에 깊이 박혀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마음이 더 이상 자신 안에서 갈무리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때, 나는 결심했다. 고백하기로.

'하지만…'

아까 저녁. 녹화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쓸쓸한 석양이 나와 오빠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나란히 걷고 있지만, 결코 겹쳐지지 않는 그림자를 보고 있자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충동적으로 오빠를 불러세웠다.
하지만
오빠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알 수 있었다.
눈에 담겨져 있는 결의, 나에 대한 미안함, 하지만 명백한 의사.

'거절……'

오빠가 하려던 말은 적어도 고백에 대해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니었을거야.
그래서 나는 너무나 무서워졌다. 
오빠가 나를 보지 않는다는것. 그것이 내 마음에 싹튼 연심의 행방을 뚜렷하게 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고백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아이인 척을 한다. 그것이 내 임시방편일 뿐인 해답.

이런 아이 같은 방법 만을 반복하는 나를, 오빠는 어떻게 생각할까?
오빠 앞에서 감정을 숨기고, 장난을 치지 않는 것 만으로는 안 되는 걸까?
평소라면 순식간에 해치웠을 법한 일도, 오빠 앞에서는 최대한 시간을 들여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빠는 알고 있을까?
수많은 상념이 머리를 헤집는다.

마미가 지금보다 어른이라면, 오빠가 조금 더 나를 바라봐줄까?

"……읏!"

검은 감정이 치솟는다.

나도 알고 있어!
사실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거.
되고 싶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말야
고백하지 않는 게 아이다운 거라면, 고백해서 차이는 것은 어른스러운 거야?
그런 식으로 상처 입고 아물고를 반복해서 어른이 된다고? 

그런 건… 몹시 싫단말야… …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오빠의 말에 순간 발끈해서, 모처럼 오빠가 쏘는데도 파스타 하나만 시켜버리고 말았다. 
'나를 어른 취급 해주세요' 같은, 마치 아이의 투정과도 흡사한 작은 반항.

하지만 지금 내 꼴을 보면 너무나도 명백하다.
이렇게나 어른 취급을 받고 싶어하는 사실 자체가 아이라는 증거나 다름없잖아.
나는 아직 아이다. 정확히는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아이다.
하지만 어른들에게 어떻게 해야 어른이 되느냐고 질문해도 아무도 명쾌하게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런 아이 같은 방법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미가 고백하지 않는다면, 마미는 오빠를 계속 사랑할 수 있어."

아이이기 때문에 어른이 되는 방법조차 모른다.
아픈 사실이 또 하나 가슴에 박히는 거 같아, 침대 위에 놓인 커다란 곰 인형을 강하게 껴안았다.
나는 대체 언제까지 아이로 있어야 하는 걸까.


아미가 보고 싶다.

◇◆◇


다음날.

오늘은 오프였지만, 아미도 없는 집에 혼자 있어도 울적해질 뿐이라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겨울이 끝나감을 알리는 듯, 그간 채 내리지 못했던 비가 내리고 있었다.
릿쨩은 류구랑 야외촬영이 있는 날이지만 날씨가 이래서는 어떨까나.
오빠는 미키미키의 TV 녹화를 보조해주러 갔을 것이다. 사무소에 가도 지금은 오빠가 없겠구나.
오락실이나 들렀다 갈까……


오락에 몰두하다 보니 너무 긴 시간 동안 있었던 거 같다. 아 피곤해졌어.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사무소에 도착하니 히터로 따뜻해진 공기가 반가워서 웃음이 나온다. 
음… 미키미키와 오빠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네.
어른스러운 자태로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 얇은 책을 읽고 있는 피요쨩에게 인사한다.
책의 표지는 음…… 모르는 체 해두자.

"안녕 피요쨩~ 다른 사람들은?"
"어머나 마미쨩 안녕, 오늘 오프 아니니?"

피요쨩은 소파와 TV가 있는 휴게실 쪽을 가리켰다. 뭐 휴게실이라고 해도 칸막이가 쳐져 있을 뿐이지만.
휴게실에 가보니 거기엔 아즈사 언니를 사이에 두고 유키뿅과 하루룽이 좌우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건너편 소파엔 아미와 이오링이 어깨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다.    
아즈사 언니는 책을 들고 있었는데, 드물게도 평소에 읽던 잡지같은게 아닌 하드커버의 시집이다. 기묘한 조합이네. 문득 피요쨩의 얇은 책이 생각나서 서글퍼졌다. 
아즈사 언니는 페이지를 넘기더니 작게 웃는다.

"4월은 잔인한 달이래. 후후. 표현이 특이하네"
"자…잔인한 달……"

4월에 생일이 있는 하루룽이 '우우…'하며 작게 좌절하는 시늉을 하자, 유키뿅이 쿡 하고 웃는다.
뭐야 이 썰렁한 만담. 하루룽의 랭크 만큼이나 썰렁하다구.
그나저나 잔인하다니, 작가는 4월에 안 좋은 일이라도 많이 있었던 걸까?
나도 유키뿅 옆자리에 앉아서 시를 들여다보았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황무지… 죽은자의 매장이네. 아즈사 현대 영시에 관심 있었나 봐?"

아즈사 언니가 낭랑한 목소리로 거기까지 읽었을 때 눈을 감고 있던 이오링이 눈을 살짝 뜨며 말한다. 
이오링 깼어? 아니 그보다 이오링은 저 시 알고 있어? 대단해! 역시 이마는 폼으로 넓은 게 아니구나!

"이오링, 4월이 잔인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흐음. 실제로는 많은 해석이 있지만…… 4월이 잔인하다는건 시인의 의식에 대한 일종의 역설적 표현이라고 할 수있어."
"......?"

???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내 표정을 읽은 이오링은 음…하면서 표정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고른다. 아무래도 쉬운 비유가 생각나지 않은 것 같다.
하루룽이 약간 흥분된 얼굴로 '아 어쩐지 알 것 같아!' 하고 말하자 아즈사언니와 유키뿅과 이오링마저 하루룽에게 집중한다.
하루카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 가령 자신이 프,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랑 단 둘이서 서로 사, 사랑하고 있다고 상상해 봐."
"……"

아, 이거 어디까지나 상상이니까! 하고 쓸데없는 데서 묘한 다짐을 받는 하루룽.
그런 상황을 상상하고 있는 걸까? 다들 얼굴이 살짝 발그레 진다.
나, 나 같은 경우에는 오, 오빠랑 같이 있는 꿈일까나… 헤헤……
그 와중에 이오링 만이 '너희는 초등학생이야?' 같은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거린다. 
계속해봐 라는 뜻이겠지. 하루룽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날 죽… 아니 사라져버린 거야. 그리고 그 세상에는 혼자만 남게 되고"
"!!"

오빠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무섭다. 

"그건 사실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깨면 거기엔 가족도, 친구들도, 그리고 그 사람도 있어.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다행이야. 오빠가 있어줘서.

"그런데, 꿈이 아닌 현실에서는 그 사람이 자신을 결코 돌아봐 주지 않는 거야. 그도 친구들도 가족들도 행복하게 웃고 지내지만 꿈속처럼 자신을 사랑해주지는 않아."

그건……

"슬퍼진 나머지 나는 다시 잠을 청해. 적어도 꿈속에서는 그가 나를 좋아해줬는데… 다시 꿈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 시에 대한 연애론적 해석은 아마도 네가 처음일거야."

끝까지 듣더니 이오링이 무언가 기가 막힌듯한 어조로 말한다.
헤헤 그런가, 하고 부끄러워하는 하루룽. 
하루룽, 그거 아마도 칭찬이 아닐 거라 생각해… 이오리 지금 끝까지 들어서 손해봤자는 표정 짓고 있잖아.
그리고 그 비유 뭔가 얀데레스럽구……

그러자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던 유키뿅이 처음으로 입을 연다.

"그렇구나. 결국 눈을 뜨면 자신을 빼고도 완성된 세상이기에 비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래서 잔인하다고 표현한 걸까"

가끔 시를 짓는 게 취미인 유키뿅에게는 그 감성이 와 닿는 모양이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꿈속이 더 행복할지도 몰라. 하지만 결국엔 불행하고 비참해지는 거 아니야?
뜻 모를 불안감에 새어나온 의문을 부딪히자 유키뿅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긴 했지만 이어지는 말은 내 의문에 대한 완전한 긍정은 아니었다.

"다시 잠든다고 해서 똑같은 꿈을 꿀 수 있을까? 이미 깨어버린 이상 그 꿈은 끝나서 사라져버려. 그리고 언젠가 꿈은 깨니까 꿈과 현실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여기 있는 '겨울'이 뜻하는 게 아마 그것일 거야. 겨울은 반드시 지나고 4월 - 봄이 오잖니. 하고 유키뿅은 시집에 있는 시구를 손가락으로 짚는다.
졸린 걸까. 멍해진 머리로 유키뿅의 손가락 끝 만을 응시하고 있자, 유키뿅은 그 손을 옮겨 내 머리로 향한다. 
나를 살짝 끌어당겨 기대게 한 채로 내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는 유키뿅.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뭔가 어린애가 된 기분이지만 싫지 않았다.

아즈사 언니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쿡 웃으면서 말한다.
때때로 아즈사 언니는 몹시 어른으로 보인다. 바로 지금과 같은 미소를 지을 때에.
하지만 나는 이 아즈사 언니의 아련한 미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슬퍼지니까.

"옛날에 부모님이 1000일 밤만 더 자면 어른이 된다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나네. 어쩌면 꿈에서 깰 때마다 사람은 한 꺼풀 성장한다는 소리였을지도" 

저기, 아즈사 언니.
그럼 아이는 꿈에서 1000번 정도 깨야 어른이 되는 거야? 사무소의 히터 때문일까,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유키뿅의 손 때문일까. 몽롱해지면서 점점 눈꺼풀이 감긴다.

어린 나는, 아즈사 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단지…… 아즈사 언니의 목소리가 약간 슬프게 느껴진다.

"항상 꿈에서 깰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게, 어른이라고 생각해" 
 
어른이라는 말이 가슴속에 맴돈 채로, 나는 잠에 떨어졌다.


깨어나니 사무소에 오빠가 있었다.

무척 슬픈 꿈을 꾼 거 같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中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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