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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16, 2014 01:25에 작성됨.

 

 

 

 

'입국심사 끝내고 나오면 위아래로 하얀 옷만 입은 사람이 있을거야'

'위아래로 하얀 옷?'

'어. 신발까지'

 

LA공항에서 알게된 사실은 생각보다 흰 옷을 입고있는 사람이 무척 많다는 것이다.
약 3명 중 한 명 꼴로 상하의 중 하나는 무조건 흰 옷이었다.
그래도 신발까지 전부 흰 옷을 입은 사람인데 찾기 쉽지 않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수많은 얼룩말 사이에 백마 한 마리를 숨겨놓는다고 친다면, 그쪽은 잘 찾을 수 있겠냐고.

 

그렇게 20분정도 사람들 사이에서 헤매던 찰나.

 

'탁'

 

누군가가 내 어깨를 뒤에서 잡았다. 놀랐다.

 

"저기.."

"읏..!"

'찰싹-"

 

예상하지 못했던 접촉에 당황한 나. 잽싸게 그 손을 쳐내고 뒤로 돌아섰다.
나보다 키가 살짝 작은 단발머리 여자가 서있었다. 나만큼 당황한 표정으로.
내 어깨에 올렸던 손은 그 자리에 굳어있다. 빙하에 갖힌 맘모스와 같은 모습으로.

 

서로 놀란 우리 둘은 그렇게 마주보고 가만히 서있었다.
마치 중대한 대결을 앞두고 눈싸움을 하던 도중, 폼페이 화산재에 휩쓸려 그대로 굳어진 모습으로.
그 당황스러운 정적을 깬 것은 나였다.

 

"누,누구세요?"

"아...혹시 키사라기 치하야양? 맞아요?"

"어...네"

 

여자가 위아래로 - 신발까지 - 하얀 옷을 입고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챘다.
내가 알아보겠다는 표정을 띄우자 그녀는 한 쪽 손에 든 종이를 들어 내게 보여줬다.

 

'키사라기 치하야 님'

 

내가 찾아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나를 먼저 찾다니.
내 얼굴을 어떻게 알고 그랬을까.

 

"당신 프로듀서가 사진을 보내줬어요"

 

내 생각이 들려요?

 

"실물이 훨씬 예쁘네요"

"아, 감사...합니다.."

"가요. 밖에 차 세워놨어요"

"네.."

 

하염없이 넓은 주차장엔 끝없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여자의 안내를 받으며 5분쯤 더 걷자 그녀의 차에 도착했다.
차는 - 차마저도 - 흰색 승합차였고, 탑승자는 나와 그녀 둘 뿐.
아이돌 연습생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넓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애초에 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 부터가 과분하기 이를 데 없다.

 

일본에서부터 싹튼 '이상하다' 라는 생각.
프로듀서의 확신 아래 잠들기는 했지만, 다시금 두 눈을 뜨고 뇌리를 스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받을 대우가 아니다. 받아선 안 되는 대우다.

 

하지만 내 몸은, 의심을 이어나가기엔 너무나도 지쳐있었고,
또 때마침, 차 밖에 이어지는 LA의 광경은 너무나도 멋있었고,
게다가 자동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말도 안 되게 감미로웠고,
그래서 나는 잠들었다. '아무렴 어때' 라고 생각하면서.

 

'설마 장기라도 털리겠어' 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잠에서 깨어 눈을 뜬 곳은, 왠지 모르게 호텔방이었다.
손을 바닥에 짚고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감각. 바닥이 아니다. 침대다.

 

호텔방은 좁은 편이었다.
화장대는 침대 끝자락에 앉아서 쓸 수 있도록 가깝게 붙어있었다.
화장대 오른편에는 쓰레기통과 작은 냉장고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왼편에는 화장실로 통하는 문이 하나 있었고, 그리고 끝.

 

그리고 생각해보니, 내가 잠 든 곳은 여기가 아닌데?
여긴...어디?

 

눈을 감기 전에 있던 장소, 눈을 뜬 후에 있는 장소가, 다르면, 혼란스럽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돌아본다.
따로 찾는 것은, 없지만, 뭐라도, 찾고싶다.
이 혼란을, 잠재워줄, 무언가.

 

"아"

 

두꺼운 메모지 뭉치 옆에 메모지 한 장이 뜯긴 체 놓여있다.
따로 종이를 탐내는 사람도 없건만, 나는 재빨리 종이를 낚아챈다.
종이가 말하길.

 

'좋은 밤이에요 치하야양. 잘 잤어요?

호텔에 도착해서 깨우려고 했는데, 완전 깊게 잠들었더라고요.

게다가 잠든 모습이 이뻐서 깨우기 싫더라구요.

결국 치하야양 등에 엎고 호텔 체크인 해버렸네요.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별로 신경 안 써요.

스튜디오 구경시켜주고 싶었는데, 피곤하니 어쩔 수 없죠.

어차피 녹음 스케줄은 내일부터니까 오늘은 편히 쉬어요.

화장대에 저녁식사도 사뒀어요.

치하야양이 너무 가벼워서 갑자기 모성애가 발동했네요.

비싼거 아니니까 부담없이 먹구요.

푹 쉬고 내일 봐요.'

 

낯선 호텔 침대 위에서 갑작스레 깨어난 후 읽게된 편지가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눈을 뜨고서 나는 엄청난 혼란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왠지 모르게 여자가 써놓고 간 편지는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때마침 호텔 창 밖 하늘을 수놓은 노을은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고,
게다가 호텔방 에어컨 온도는 너무나도 적절한 온도에 맞춰져 있었고,
마지막으로 여자가 사온 음식은 돈까스 덮밥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삶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아 화장대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오물 오물'

 

맛있다. 따뜻해.

 

'냠 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친절해.

 

'우물 우물'

 

혹시 이건.. 그런거 아닐까?

 

'냠 냠'

 

최후의 만찬...같은거.

 

'꿀꺽 꿀꺽'

 

녹차도 맛있네.

 

'오물 오물'

 

아니..녹차가 문제가 아니잖아...
이 지나친 친절함.. 기분이 너무 좋아서 되려 수상해.
설마 장기라도 털리겠느냐만...

 

'짭 짭'

 

음식 선택도 수상한걸. 미국인데 돈까스 덮밥?
죽기 전에 고향음식 마지막으로 맛봐라. 이런거 아닐까?

 

"잘먹었습니다"

 

....모르겠다. 자자.

 

외국에 나와서 그런건지, 오늘 나는 내가 생각해도 평소와는 많이 다르다.
항상 냉정하고 이성적이라고 자부해왔는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친절함을 온 몸으로 경험해놓고도, 이성은 커녕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왜? 왜이럴까?"

 

'너무 걱정하지마. 아무 일 없을거야'

 

"...."

 

나는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죽으면, 다 당신탓이에요. 프로듀서"

 

들리지도 않을, 닿지도 않을 말을 허공에 내뱉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

 

"다시 갈게요"

 

다섯번째다.

 

"한 번만 더 가볼게요"

 

'한 번만 더'는 세번째다.

 

"정말 좋은데 한 번만 더 해볼게요"

 

정말 좋으면 왜 한 번 더 하라는거에요?

 

"좋아요. 완전 좋았어요"

"한 번 더 할까요?"

"흐흥. 아뇨.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 많았어요 치하야양"

 

음원 녹음은 생각보다 단순한 작업이다.
노래의 음정과 가사등을 숙지한 다음, 녹음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프로듀서가 - 모두가 아는 그 프로듀서가 아니다. 녹음 프로듀서. -
만족할 때 까지 같은 부분을 계속 부르면 된다.
프로듀서가 만족했다면 다음 부분을 또 계속 부르고, 그리고 넘어가고.

 

노래 부르는 것은 좋아하지만, 녹음하는 것은 싫어해요.
우스갯소리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녹음 스케줄은 3일 일정으로 잡혀있다.
오늘은 2일째.
밀폐된 공간에서 계속 노래를 부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하아..."

 

내가 지금 소파와 혼연일체가 된 상태에 빠져있는 이유다.

 

"치..하..야..양!"

'스윽'

"읏, 차거워.."

 

뒤돌아보자 그 때 그 단발머리 여자가 서있었다.
손에는 캔커피 하나를 들고있다.

 

그러고보니 잊은게 있었는데.

 

"아, 토루키씨"

 

이 사람이 토루키씨다.

 

아이돌 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애매한, 고작 연습생에 불과한 나.
그런데도 굳이 공항까지 나를 배웅하러 나온 것도 모자라,
자기 차를 끌고 나와서 호텔에다 데려다 준 사람.
게다가 호텔에서 녹음실에 갈 때도 이 사람이 데리러 와주고,
녹음이 끝난 후 호텔에 갈 때도 나를 데려다준다.

 

도무지 나에게 왜 그런 호의를 배푸는 걸까.
부정한 의심이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불법 장기 매매범이라는 의심은 접기로했다.

 

"많이 피곤하죠?"

"네. 아무래도 처음이라.."

"이제 내일 하루만 더 하면 되니까 힘내요"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호텔로 가야죠? 차 타러 가자구요"

"아, 네. 매번 고맙습니다"

"흐흥"

 

==============

 

"저기..토루키씨?"

"응? 치하야양이 먼저 말을 다 거네?"

 

백미러를 통해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밀폐된 자동차 안.
그 안에는 그녀와 나. 단 둘
개인적인 의문을 풀기엔 더없이 좋은 상황.

 

"저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세요?"

"응?"

"그러니까.. 전 실질적으로 데뷔도 안 했고.. 인지도도 없는데.."

"..."

"솔직히 지금 받고있는 호의가 제게 맞는 건지 모르겠네요"

"음..."

"왜죠?"

 

그녀는 백미러로 나를 살짝 보고는 다시 앞을 응시했다.
그리고 침묵.

 

그것은 고통처럼 참기 어렵고, 진공처럼 답답하고, 햇빛처럼 끝없는 정적이었다.
사실 1분정도밖에 되지 않는 조용함이었지만, 그다지도 힘들고, 답답하고, 긴 조용함.
먼저 입을 뗀 것은 토루키씨였다.

 

"내일 말 해줄게요"

"네?"

"내일 얘기해줄테니까, 지금은 내일 있을 녹음에 집중하자구요. 우리"

"...알겠습니다"

"흐흥. 착하네요"

"..."

 

호텔에 돌아온 후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선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봤다.
무늬없이 따뜻한 벽지로 도배된 천장에는 간단하게 생긴 형광등이 메달려있다.

 

"후우.."

 

사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볼 일은 아니다.
호의를 준다면, 의심없이 주는대로 감사하게 받으면 그만이다.
말 그대로, 쓸 데 없는 생각을 품고있는 것이다.

 

성격상, 확실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못한다.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에는, 이유와 논리가 존재한다.
어떤 이유로 인해 어떤 일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구조 밖에 있는 일들은 내게 모두 불가사의한 일이다.
논리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게는 필연적으로 의심할 대상이 된다.

 

하지만 몇시간에 걸친 녹음일에 지쳐버린 상황에서,
도무지 근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일을 계속해서 의심하다보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지금 자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그렇게 나는 잠든다.
사실, 모두가 그렇게 잠든다.

 

==============

 

"다시 갈게요"

 

다섯번째다.

 

"한 번만 더 가볼게요"

 

'한 번만 더'는 세번째다.

 

"정말 좋은데 한 번만 더 해볼게요"

 

우리 이거 어디서 한 번 하지 않았어요?

 

"좋아요. 완전 좋았어요"

"한 번 더 할까요?"

"....왠지 익숙한 대화 흐름인걸..?"

 

녹음이란, 이다지도 단순하다.

 

"이제 됐어요. 완전 성공"

"다행이다.."

"수고했어요 치하야양"

"토루키씨도요. 그리고 다른 스텝분들도.. 감사합니다"

'짝짝짝짝'

 

정감어린 박수소리와 함께 3일동안 치뤄진 녹음작업은 끝났다.
홀가분하면서, 뭔가 아쉽고, 신나면서도, 어딘가 허무하다.

 

스텝들 한 분 한 분께 인사를 드리고 스튜디오 소파에 몸을 앉혔다.
녹음 마지막 날이었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휘저으면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그 집중력을 다시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면 적지않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

 

"휴우.."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역시 아직 아마추어구나.
녹음은 노래만 잘 부른다고 해서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치하야양? 무슨 생각해요?"

 

뒤에서 발랄한 음성으로 나를 부른 것은 오늘도 토루키씨였다.

 

"아, 수고하셨습니다"

"응. 치하야양도 수고!"

"바로 호텔로 가실거죠?"

"아....니! 호텔 가기전에 다른 곳에 갈거에요"

"네?"

"우리 치하야양 수고 많았으니까 맛있는 저녁 사줄게요"

"에. 그러지 마세요. 매일 데려다주시는 것도 죄송한데.."

"흐흥. 착하기도하지. 됐으니까 따라와요. 내가 사주고싶어서 그래"

"으..음... 감사합니다"

"가요!"

 

그리고서 그녀는 나를 작은 일식집으로 데려갔다.
일식이라...그러고보니.

 

"지난번 돈까스덮밥도 혹시 여기서 사오신 거에요?"

"....치하야양 천재?"

 

천재는 무슨. 건너편이 내가 묵는 호텔인걸요.

 

별 얘기는 안 했지만, LA날씨는 생각보다 훨씬 더웠기에, 우리는 나란히 냉모밀을 시켰다.
냉모밀은 마치 그 이름처럼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꿈꿔왔던 시원함에 매료된 찰나.

 

"치하야양"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다.

 

"네?"

"나한테 뭐 물어볼 거 없어요?"

"...아"

 

과도한 친절

 

"저한테.."

"잠깐만"

"네?"

"내가 길게 쭉 얘기할테니까 들어줘요. 궁금해하던 것도 얘기 해줄게요"

".."

"내가 배푼 친절함은 90%정도가 치하야양 프로듀서 몫이에요"

"네?"

"공항에 데리러 오는 것. 녹음실과 호텔 사이에서 이동수단을 제공하는 것"

"...."

"전부 다 당신 프로듀서가 나한테 시킨거라구요"

 

...이게 뭐야?

 

"왜...그걸 다.."

"응?"

"왜.. 그렇게 시키는..대로..하셨어요..?"

"왜냐면요.. 이 곡을 무슨일이 있어도 치하야양한테 주고싶었거든요"

"..잠자는 공주..를요?"

"그래요"

"그건 또..왜요?"

"치하야양이 내 한을 풀어줬거든요"

 

거의 모든 작곡가들은 누구를 생각하며 곡을 쓸까?
부르는 사람? 듣는 사람?
부르는 사람이라는 대답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정답은 듣는 사람이다.
듣는 사람. 대중의 귀를 최대한 인식하며 곡을 쓰는 것.
작곡가 입장에서 그리 기분좋은 일은 아니지만...

 

"먹고살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구요, 또 그렇게 돼요."

 

그렇게 생존을 위해 곡을 쓰다보면, 대중을 신경쓰지 않더라도 작곡가의 이름으로 곡을 팔 수 있는 위치에 오른다.
하지만 거의 모든 작곡가들은 그 때가 되면 잊는다.

 

"내가 쓰고싶은 곡이..뭐였지? 내 취향은 뭐였지? 내가 어떤 곡을 좋아했더라?"

 

아니면 두려워진다.

 

"내 노래를 들어주던 사람들이, 내가 쓰고싶은 대로 쓴 노래를 좋아해줄까?"

 

결국에는 포기한다.

 

"모르겠어. 그냥 쓰던 대로 쓰자.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왔잖아?"

"..."

"그런데 데모CD에서 치하야양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뭐랄까 마치 계시를 받는 느낌이었어요"

"계시요?"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내가 쓰고싶던, 정말 내가 좋아했던 그런 노래가 반짝하고 생각이 나더라구요.
잠자는 공주는 5시간만에 완성한 거에요. 그걸 어떻게 했나 몰라.
만드는 과정은 정말 전혀 생각이 안 나요. 신기하죠?"

"네..."

 

토루키씨는 프로듀서가 시키는 대로 했다.
잠자는 공주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주고싶었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해.

 

"프로듀서는 뭘 알고 이런걸 시킨거죠?"

"그 사람은.... 아마 처음부터 다 알고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노래를 만든 다음날에 차분한 마음으로 그 사람한테 전화했어요.
처음 전화하니까 안 받는 거에요. 그래서 3분 정도 후에 다시 전화했어요"

 

========

 

"사실 처음 전화 하셨을때 일부러 받지 않은겁니다."

"...여보세요?"

"3분만에 다시 전화를 주셨네요. 토루키씨"

"아..."

"보통은 아예 다른 날 다시 전화를 하거나 사무원한테 이야기하던데..
우리 치하야한테 곡을 주고싶으셔서 안달이 나셨나봐요?"

 

=========

 

"프로듀서..."

"내가 다시 전화를 한 걸 보고 알아낸거죠...무서워라.."

"..."

"그래서 다 얘기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곡을 주고싶다고. 그런데.."

"그런데?"

"더 무서운 건 그 다음이에요"

 

=========

 

"그래서, 곡을 주고싶어 안달이 나셨지만, 녹음은 미국에서 할 수밖에 없다 이거죠?"

"곡을 주고싶어 안달...하.. 그래요. 전 이제 쭉 미국에서 일 할 생각입니다"

"....곡을 주신다니 영광이지만 받을 수 없을 것 같네요"

"..네? ㅇ..왜죠?"

"사무소 사정상 제가 바쁘기때문에 치하야와 미국으로 동반할 수 없습니다"

"치하야양만 보내면 되는 일 아닙니까?"

"...말이 되는 말씀을 하십쇼"

"네?"

"어린애 혼자 어떻게 거길 보내겠습니까"

"...."

"물론 치하야는 자기 앞가림 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지만,
그 먼 곳까지 홀몸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걱정되거든요"

"...그렇군요"

'하....지만 걱정없이 보낼 방법이 있긴 해요. 들어보시렵니까?"

"네?"

 

==========

 

"...죄송합니다. 프로듀서가 폐를.."

"흐흥. 아녜요. 작업 정말 즐거웠어요. 차 태워준거 밥 사준거 하나도 안 아까워요"

"감사합니다"

"아무튼 그 90%가 프로듀서 몫. 호텔에 업고 들어간 거랑 돈까스덮밥은 10%. 내 몫이에요. 여기있는 냉모밀이랑."

"아..정말 고맙습니다"

"흐흥..아, 면 다 불었네.."

 

........

 

결국,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토루키씨가 나에게 곡을 줄 '의향'이 있다는 것
토투키씨와 그녀의 녹음 스텝들이 '6개월동안 미국에 체류' 한다는 것
미국 내 이동수단을 토루키씨 쪽이 '먼저' 제공해주겠다 했다는 것.

 

그리고 프로듀서가 나를 '흔쾌히' 미국에 보냈다는 것.

 

복잡한 기분으로 호텔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적절한 에어컨 온도와 아까 먹은 메밀면의 시원함이 기분좋게 어우러진다.

 

천장을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르게 프로듀서를 생각하고 있다.
그 처진 눈가. 피곤한 눈. 긴 머리카락. 서류가 들린 손.

 

그 모습을 머릿속에 굴리던 나는 문득 깨닫는다.

 

내 손에 휴대폰이 들려있다는 사실.
그의 번호를 입력하고 있다는 사실.
통화버튼에 손가락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

 

"...요즘엔 다 자동로밍.. 되겠지?"

 

'딸깍'

 

===========

 

자동문이 열리고 공항 라운지로 들어섰다.
나와 관계없는 여러 사람들이 내가 아닌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출구쪽으로 걸어가던 찰나.

 

'탁'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번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야"

"아, 프로듀서?"

"응"

"...바빠서 못 나온다면서요"

"당연히 거짓말이지"

"..."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 사람은.

 

프로듀서를 따라 나는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LA에서 본 태양과 똑같은 태양이 도쿄 상공에도 떠있었다.
물론 태양을 감싼 기온은 이 쪽이 훨씬 낮았지만.

 

"저 없는동안 뭐 하셨어요?"

"뭐...일 했지"

"무슨 일요?"

"..쓸데없는 거 물어보지마. 귀찮게"

"정말..."

 

이윽고 우리는 프로듀서의 승합차에 다다랐다.
차 안은 이상하게 바깥보다 추웠다.

 

"그런데 프로듀서"

 

얼음장같은 시트에 앉으며 내가 말했다.

 

"우리 이제 뭐해요?"

"응?"

"그러니까.. 향후 일정이랄까... 그런거요"

"데뷔해야지"

"아"

 

그렇구나. 연습생으로 생활한지 몇달째. 확실히 이 쯤 되면 데뷔할 때도..

 

"데뷔 날짜는 언제에요?"

"내일"

 

그 순간 나는 차가운 시트와 함께 얼음처럼 얼어버렸다.



=============================================

..면목 없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연재 아직 안 끝났어요!

설날 끝나고 여러가지 일들이 생겨버려서...

아무튼 죄송합니다. 다음번엔 더 빨리 올릴거구요.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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