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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이시 츠무기] 35. 궁극의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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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08, 2024 00:14에 작성됨.

35. 궁극의 희생



 이전에 소설들을 읽을 때에, "What if", 또는 "Alternative ending" 이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핵심 인물이 분기점에서 원작과는 다른 행동을 했을 때에 일어나는 것을 풀어가는 이야기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참 좋아했었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도 이런 상상을 종종 하곤 했다. 만약... 츠무기가 283의 아이돌이 아니었다면...? 765나 346같은 규모가 되는 사무소에서 일하게 됐으려나? 어쩌면 다른 사무소 소속이 아니라 아예 아이돌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스카우트 하기 전까지만 해도 카나자와에서 조용히 학교를 다니던 아이였으니까. 만약 츠무기가 아이돌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바보같은 프로듀서에게 모진 말을 듣고는 슬프게 울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멍청한 프로듀서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을 각오를 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무능한 프로듀서 때문에 이를 악물어가면서 자신의 고통을 억누르고 발목을 접질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어리석은 프로듀서가 눈 앞에서 칼로 찔리는 걸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1번 링크의 BGM을 들으시면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츠무기? 왜 그래, 무슨 일 있..."


  푹


  "어...?"


 이상하게도, 찔리고 난 직후에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온 몸에서 힘이 빠지는 동시에, 옆구리를 관통해 들어온 칼날이 이내 타는 듯한 통감을 안겨주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선을 허리로 내리자, 선명한 붉은색이 점점 자신의 존재감을 하얀 와이셔츠에 드러내며 물들여가고 있었다.


  '방심했다... 암바를 풀기 전에 확실하게 제압했어야 하는데, 이 놈은 분명 떨어진 칼을 들고는...'


 지금 일어난 상황을 고통으로 인해 혼란스러워 하는 머리가 채 정리하기도 전에, 뒤에서 날아오는 발길질에 얻어맞고는 꼴사납게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그렇게 꼴사납게 지면에서 몇 바퀴나 굴렀을까,


  "하아... 이런 개같은... 손목 부러지는 줄 알았네. 병원비 물어내줄거야, 앙?!"


  "..."


  "이 자식을 어떻게 죽여주지? 뒤질 때까지 패버려? 아니면 칼로? 확 그냥 마!"


 양아치는 그러고는 칼을 들고 눈 앞에서 까딱이기 시작했다. ...이제 외통수, 체크메이트다. 지금 가능한 행동은 기껏해야 손을 조금 움직이는 것뿐, 흉기를 든 적을 제압하는 건 이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선 절대 불가능하다. 그리고 눈 앞에서 실컷 조롱하기 시작하는 양아치도 이를 매우 잘 알고 있는지,


  "큭큭큭... 어떻게 요리해주랴? 네 입으로 직접 말해줄래? 아, 물론 이자는 확실히 쳐준다고? 복수는 50배로 돌려주는 거잖아, 안 그래? 야, 말 안 하냐? 어?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쳐 대답하라고!"


 그리고는 발길질이 이어졌지만 어째서인지 고통이 점점 무뎌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눈앞 시야의 가장자리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


 양아치의 위협과는 별개로, 정말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욕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마취 주사를 맞은 것처럼 온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걸 모르는 양아치는,


  "하... 이 자식 봐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놈이 강한 것 같냐? 이 끈질긴 놈."


 그렇게 내뱉고는 다시 발을 들어 올리다가, 이내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는 듯, 피식 웃고는 들고 있는 칼을 다시 고쳐쥐었다.


  "아~. 이걸 잊고 있었네~. 나 정도 되는 사람이 말이야. 결국엔 있잖아, 죽이는 건 의미 없다고."


  "뭐...?"


  "죽이는 건 의미 없어. 가장 소중한 걸 부숴야지... 낄낄낄..."


 그리고 그 비열한 시선을 자신의 눈 앞에 있는 한 아이에게 향하고는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츠무... 기..."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앞을 올려보자, 몇 미터 옆에 서있는 츠무기는 아기 고양이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도망쳐줬으면 마음이라도 편했겠지만,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그녀의 무릎은 츠무기가 엄청난 두려움으로 인해 채 도망가지 못했다는 반증이었다. 그리고는 그걸 본 양아치는,


  "큭큭큭... 그래 그래... 그거면 좋겠구만..."


 마치 아무 힘 없이 부들부들 떠는 아기 양을 굶주린 승냥이가 입맛을 다시며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얼마간 실실 웃으며 츠무기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손에 쥔 칼을 앞으로 들어올리면서,


  "이쁜이 얼굴에 칼집을 몇 개 좀 내주면 아주 좋아 죽겠지?"


  "!!"


  "큭큭큭... 차라리 네 놈을 죽여 달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건 안되지. 네 여자친구한테 이렇게 해주는 것이 너에겐 더 큰 고통일거 아냐?"


  "이 개같은 새..."


 간신히 팔을 들어 앞으로 뻗었지만 절대 닿을 리 없었다. 설령 뻗은 손이 양아치에게 닿는다 하더라도,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운 좋게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과연 놈을 저지할 수 있을까? 그 사실을 깨닫자 무력감이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지킬 수 없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악인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츠무기가 양아치의 칼에 베이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한다.


  "츠, 츠무..."


 문득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방심하지 않고 첫번째로 쓰러뜨린 녀석을 잘 제압했더라면. 애초에 이 곳으로 츠무기를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츠무기를 아이돌로 스카웃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츠무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그때 ...어...렸...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한다고 해도 현재를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무리 후회한다 한들 지금 눈 앞에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는 연신 낄낄대며 웃어대는 양아치와, 극도의 두려움에 빠져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츠무기가 처한 상황이 달라질 리는 없으니까.


  「그때 ...어...렸...야 했는데...」


 그런 츠무기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츠무기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도대체 무슨 잘못을 지었길래 이런 악랄한 폭거를 겪어야 하는 건가...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 다짐했지만 결국엔 말뿐. 말로만 잘난 듯이 내뱉을 뿐, 츠무기를 지킬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력하게 쓰러진 채 츠무기에게 다가가는 양아치를 쳐다보기만 할 뿐, 결국 진 것이다. 승률 0%의 절망적인 현실. 이길 확률이 0%라면 당연히...


  '당연히 1%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해야지.'


 설령 몸을 일으킬 수 있다 하더라도 칼 든 괴한을 제압하는 것은 지금 상태에서 무리이다. 하지만 더욱 절망적인 것은 몸을 일으키는 것마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권총 같은 화기가 있었더라면 가능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원거리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쓰러진 채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일까...


  '그렇지만... 마침 원거리 무기가 있었지...'


 간신히 떨리는 팔을 들어 호주머니에 손을 넣자, 차가운 쇠막대기의 촉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쇠젓가락...?"


  "앗차... 그걸 주려는 건 아니니까 좀만 기다려봐."


  "쇠로 된 젓가락은 장식품으로 본 적은 있는데... 이것도 기념품인가요? 그렇다 치기에는 이 젓가락은 아무 장식도 없는데..."


  "아냐 아냐 별 거 아냐! 그거 말고 줄 게... 아 설마 사무소에 두고 나왔나..."



 방금 전에 츠무기와 골목을 걸어가고 있을 때에 가방에서 떨어져 나온 쇠젓가락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었는데, 다행히도 젓가락이 온전히 주머니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저 그 뿐. 이것으로 모든 상황을 역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저 젓가락 하나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길 확률을 1%라도 올릴 수 있다면, 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이것 말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패가 있나?'


 동요하는 마음을 다잡고는 떨리는 손을 들어 주머니에서 쇠젓가락 하나를 꺼내서 가볍게 손에 쥐었다. 하지만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와중에도 마음의 한 구석을 잠식한 의구심이 자꾸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만에 던지는 것이니 실패할 확률이 너무 높다. 힘이 부족해서 중간에 떨어지는 것이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츠무기를 맞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죄책감에 압도되어 앞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과연 할 수 있을까? 과연 이게 최선의 방법일까? 과연 이게...



  "...님, 그래서 있지 말입니까. 던지시는 손이 총이고 이 칼이 총알인 겁니다. 세게 던지는 것이 능사가 아니지 말입니다. 처음에 위로 팔을 치켜올린 뒤엔 이제 그대로 원을 그리듯 팔을 내리며 던지는 겁니다. 사거리 조정은 방금 알려드린 대로 팁던지기, 반바퀴 던지기에 조금씩 조정을 더해가며 하시면 되고, 결국엔 끝없는 연습이지 말입니다. 잘 안되더라도 끊임없이 던지시고 숙달하면 될겁니다."



 문득 이전에 이 기술을 배울 때 들었던 말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항상 그랬었다. 당시에는 이걸 써먹을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이런 걸 익혀서 실전에 쓸 일이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훈련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어쩌다 쓰이게 될 일이 생기면 그땐 충실하게 그 빛을 보여주기 마련이었다.


  '과연 이게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 말고는 낼 수 있는 패가 없기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수없이 긴 시간 동안 연습했으니까. 반드시 해낼 거니까. 그 누구보다 소중한 그녀를 지켜야 하니까...'


 그리고 점점 흐려가는 시야 속에 간신히 보이는 양아치를 조준했다. 그 시야에 보이는 양아치는 츠무기가 겁먹고 벌벌 떠는 모습을 충분히 즐긴 것인지, 이내 졸렬한 웃음을 지으면서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츠무기는,


  "으, 으으... 아, 안돼... 제... 제, 제발..."


 그녀는 눈에 눈물이 잔뜩 고인 채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조금씩, 다리를 절면서 뒷걸음치다 이내 다리에 힘이 빠진 건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까 기회가 될 때 도망쳤으면 좋았으련만... 하지만 그렇게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키며 후회한다 하더라도 현재가 달라질 일은 없다. 칼을 든 양아치가 점점 그녀에게 가까워지자 츠무기는 눈물로 가득한 두 눈을 질끈 감고는,


  "프... 프, 프로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점점 흐려지는 의식과 어두워지는 시야를 간신히 붙들며, 거꾸로 들고 있는 쇠젓가락이 들려있는 오른손을 양아치에게 향해 휘둘렀다. 그렇게 팔을 휘두르자, 손에 들고 있는 쇠젓가락이 곧이어 손가락을 빠져나와 앞의 표적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1초도 안되는 시간에 젓가락이 날아가서 표적에 명중했겠지만,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쇠젓가락이 천천히 회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쇠젓가락은 느리게 목표를 향하며 돌더니, 이내 반바퀴를 회전하고는 양아치의 허벅지에 그대로 꽂혀버렸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러고는 아까 발목을 짓밟혔을 때처럼 온몸을 비틀며 아스팔트 바닥을 이리저리 뒹굴었다. 그렇게 고통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는 놈은, 얼마 있지 않아 기절한 건지 아니면 더 이상 소리칠 힘이 없는 건지 조용해졌다. 쓰러진 놈이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기에 잔뜩 긴장한 채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쇠젓가락을 쥐고 있었지만, 10초가 지나도, 20초가 지나도 놈은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깨닫자,



  2번 링크의 BGM을 들으시면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다 끝난건가..."


 츠무기를 위협하는 놈이 쓰러진 것을 확인하자 온몸의 긴장이 풀려버렸다. 분명 몸의 한구석이 아플 텐데, 아픈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인지 한가한 휴일에 낮잠을 잘 때와 같이 기분 좋게 몸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난... 죽는 건가...'


 이 정도로 큰 자상인 경우에는 제때에 지혈을 하지 않게 되면 정말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준비성이 뛰어난 건지, 아니면 지나친 편집증인건지, 마침 가방에는 평소 들고 다니던 붕대가 들어있었다. 이걸 어찌어찌 잘 활용한다면 구급차가 올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로 손을 가방에 뻗어 붕대를 꺼내면 되지만, 어째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힘이 점점 빠져가서 팔을 들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드디어... 죽는 건가... 이대로 죽는 건... 전부터 바랐던...'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자, 그대로 닫힌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긴 삶은 아니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것들도 많고 하고 싶은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슬슬 한계였다.


  「제가 이런 걸 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나 있나요? 이렇게 해서 이기면 제가 당신께 고맙다고 말할 줄 알았던 건가요?」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 더는 감출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애써 활기찬 척. 겉으로는 애써 즐거워하는 척. 이상적인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 본래의 모습을 가면으로 가렸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이게 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지 않습니까!」


 츠무기에게 상처받는 일이 있어도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츠무기는 아직 어린 아이기에 그럴 수 있으니까. 츠무기는 담당 아이돌이기에 그녀의 모든 것을 당연히 받아줘야 하는 것이니까. 츠무기는... 그 누구보다 가장 소중한...


  「...하? 당신은 제가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지금 같은 상황에도 그딴...!」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해도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도 상처가 낫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견뎌야만 했다. 받아들여야만 했다. 왜냐면 이는 전부 자업자득이었으니까.


  프로듀서. 전 이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싫습니다.」


 그렇기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바보처럼 모든 것이 재미있는 척. 그런 모습을 지금까지 연기해왔지만 이제 임계점에 다다른 것이다.


 '이제 전부 상관 없어... 어쩌면 좋은 기회인 거지... 이렇게 죽는 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츠무기를 구하고 죽는 것. 그건... 그것은 전부터 바랐던...


  '전부터 바랐던... 궁극의 희생...'


 좋은 기회였다. 이전에 츠무기를 크게 상처입히고 울게 만들었을 때 그 죄책감에도 차마 죽지 못한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니까. 애당초 죄악이 아니라 하더라도 죽을 용기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운이 좋게도, 크나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고서도 이 고통이 끝나게 된 것이다. 이제 츠무기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퍽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주 먼 미래에 저세상에서 그녀를 다시 보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아니, 그럴 리 없지... 츠무기같이 착한 아이가 가는 곳과, 그 누구같이 악한 죄인이 가는 곳은 같을 리 없으니까...'


 쓴웃음이 나왔다. 이제 죽어서도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후회가 들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츠무기와 한 군데라도 더 많이 놀러가는 것인데. 츠무기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는 것인데. 츠무기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듣는 것인데. 그렇게 마지막까지 후회하며 쓴웃음을 짓는 와중에,


  "...!"


 어디선가 날카롭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당최 무슨 말인지 머리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 ...!!"


 "츠무기... 미, 안... 아하하... 그, 래도... 무사하니... 다, 행..."


  "...!!"


 누군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 수 있었지만, 그 말이 무엇인지는 이제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츠, 무기... 지, 지금까지... 정말 미, 미안... 부디 요, 용서를..."


  "!!!"


 누군가 고사리같은 손으로 가슴을 내리치는 것은 어슴푸레하게 느껴졌지만, 그 느낌도 옆구리에 칼에 찔린 상처와 마찬가지로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츠무기... 이... 있잖아... 나는... 난 사실 너를..."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어느 부자의 일화가 떠올랐다. 창고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수확을 얻은 부자 이야기. 잔뜩 모은 재물로 몇 년동안 일하지 않고 잔치를 벌일 생각에 싱글벙글했지만, 이튿날 갑자기 죽게 되어 그 모든 것이 헛되게 된 부자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엄청 감명깊게 읽었었다. 시간은 모두에게 무한히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으며 그 날이 언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주변의 소중한 이가 영원히 옆에 있을 것만 같이 대한다. 고마운 일이 있어도 '나중에 고맙다 하지 뭐' 라고 하거나, 잘못을 해도 '언젠가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겠지' 라고 여긴다. 그러다 언젠가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면 그들은 전까지 자신이 하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며 후회하게 된다.


  "츠, 무기... 나는... 난 너를..."


 당장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게 그녀에 대해 생각하는 걸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로 한계였다. 먹먹하게 들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연신 가슴을 내리치는 무언가의 느낌도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


  "시, 라이시... 츠무... 기... 저는... 당신을... 좋..."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말을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는 의식이 어둠에 완전히 잠겨버리기 직전, 떠오른 것은 은발의 어느 소녀. 매사 진지한 표정으로 어른스럽게 행동하지만 때때로 허당인 모습을 보여주는 귀여운 소녀. 아이처럼 장난을 치고 있자면 엄격한 학교 선생님처럼 손가락질하며 매섭게 설교하는 그런 까칠한 소녀.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자주 소심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필요할 때에는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표출하는 그런 기특한 소녀. 평소에도 정말 예쁘지만 본인이 나설 무대를 위해 자신의 모습을 꾸밀 때에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소녀. 의식이 꺼져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그 소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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