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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이시 츠무기] 34. 제 여자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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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19, 2024 00:12에 작성됨.

34. 제 여자친구입니다.



  "그래. 이번 일이 끝나면... 이번 일만 다 끝나면 그때 한번 저 도쿄 타워에 같이 가는 거야."


  "그러면 오늘 가도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지금 바로 갈 수 있는 곳을 왜 굳이 다른 날을 잡아서..."


  "그럼 「W.I.N.G.」 도전을 더 열심히 할 동기가 하나 더 생기는 거잖아? 이건 츠무기도 나도 모두 포함."


  "하아... 여기에 데려온 것도 저를 더 열심히 일하게 혹사시켜서 성과를 내게 하기 위해 데려온 거라니... 당신은 사람인가요?"


  "하지만 좋은 풍경이었죠?"


  "정말이지... 바보입니까, 당신은. 지금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 웃고 있고..."


 사원 옆에 있는 언덕에서 도쿄 타워를 비롯한 도쿄의 풍경을 감상하고 나서 사무소로 천천히 걸어서 돌아가는 길. 프로듀서가 하는 바보같은 말을 듣고 그를 째려보자, 그는 악동과도 같은 미소를 짓고는 제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습니다.


  "아니, 당신! 그렇게 머리를 쓰다듬으면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습니까! 머리카락을 정돈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소요되는지 알고는 그렇게 하는 건가요!?"


  "아니 츠무기~. 그렇게 매번 성낼 필요 없잖아? 그렇게 자꾸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흰머리가 늘어나는 거 아냐? 아직 어른도 안됐는데 백발투성이면 안될 노릇이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있잖아.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봐. 알 이즈 웰."


  "아니 제 머리는 흰머리가 아니라 은발이라구요!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만데 그런 것 구분 하나... 잠깐... 가슴에 손을 얹고...? 가슴...?"


  "츠무기 씨? 갑자기 불안한데 설마..."


  "당신은 아까부터 제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시선이야 어찌어찌 참아준다 하더라도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건 도저히...!"


  "아니 츠무기 네 가슴 쳐다본 적 없다고! 그리고 시선도 참아준 적 있기나 해!? 전에도 나보고 가슴 쳐다본다고 막 뭐라고 했으면서!"


  "역시 그때 쳐다본 게 맞았군요!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그렇게 프로듀서의 바보같은 행동들에 따끔하게 한 소리를 하면서, 해가 점점 저물어가 어둑어둑해지는 골목을 걷고 있는 와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프로듀서라는 직함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아이돌의 희로애락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에... 에... 엣취!"


  "츠무기, 춥니? 뭐, 온도가 낮은 건 아니더라도 일교차가 크니까 지금 같은 때 감기 걸리는 사람들도 종종 있으니까."


  "훌쩍... 딱히 추운 건... 에, 엣취!"


  "잠깐만 기다려봐."


 별로 추운 건 아닌데 재채기가 자꾸 나오자 프로듀서는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이내 무언가를 꺼내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걸 저에게 내밀었습니다.


  "이거 마셔!"


  "이건... 단팥죽 캔...? 왜 이런 게 가방에서..."


  "츠무기는 전통 음식 중에서도 엄청 달달한 걸 좋아하잖아? 전에 디저트 가게 갔을 때도 단팥죽을 맛있게 먹길래 혹시 몰라서 사놨지. 추운데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일단 마셔."


  "앗, 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단팥죽 캔... 어렸을 때부터 단팥죽을 좋아해서 자주 먹곤 했었습니다. 캔에 담긴 건 자주 먹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걸 프로듀서는 평소에 들고 다녔다는 것이겠군요. 저에게 주기 위해서. 그것도 언제 줄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평소에 가방에 넣고는 저에게 주기 위해서...


  "마침 잘됐네. 이 참에 그것도 해줘야겠다."


  "그것?"


 프로듀서는 제 물음에 답하지 않고 자신의 가방을 이리 저리 뒤적이다가, 이내 무언가 땡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습니다. 프로듀서의 가방에서 떨어뜨린 물건을 대신 주워주기 위해 몸을 숙이자 이내 그것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보이진 않는...


  "쇠젓가락...?"


  "앗차... 그걸 주려는 건 아니니까 좀만 기다려봐."


  "쇠로 된 젓가락은 장식품으로 본 적은 있는데... 이것도 기념품인가요? 그렇다 치기에는 이 젓가락은 아무 장식도 없는데..."


  "아냐 아냐 별 거 아냐! 그거 말고 줄 게... 아 설마 사무소에 두고 나왔나..."


 쇠젓가락을 주워서 프로듀서에게 건네주자 성급히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는 마저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애당초 가방에서 젓가락이 나온다는 상황도 이해할 수 없지만, 도대체 무얼 찾길래 이렇게 바보처럼 자기 자신의 물건을 뒤지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츠무기. 발목은 지금 어떠니?"


  "제 발목 말입니까? 걷는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갑자기..."


  "으음... 큰 지장은 없다고 하긴 해도 아직 조금 아프진 않아?"


  "뛰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아프다고 체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 아까도 당신에게 지적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명확히 말해줘야지, 그렇게 갑자기 아프냐고 묻는다면..."


  "음... 아까 사무소에서 붕대를 꺼내다가 빠진 거일까... 츠무기,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옆에 약국 가서 파스 하나 사올게! "


  "아니 잠깐만요! 괜찮다니... 까..."


 제 말을 들은 체 하기도 전에 저 멀리 뛰어가는 프로듀서. 바보같은 사람... 괜찮다고 했는데 굳이 번거롭게 약국까지 가서 파스를 사러 가다니... 그렇게 수고스럽게 약국까지 뛰어가는 건 분명 저를 위해...


  "바보같지만... 바보같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골목 밖으로 뛰어나가 이제 시야에서 벗어난 프로듀서가 있었던 곳을 바라보고 있자, 문득 가슴 한편이 조금씩 욱신거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왜 이럴까요... 격한 운동을 한 것도, 무언가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것에 깜짝 놀란 것도 아닌데 왜...


  '난 츠무기가 우선이야.'


 대체 왜...


  '난 츠무기의 팬이니까.'


 왜 지금 떠오르는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이전에 그 사람이 해줬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바보같은 사람... 매번 바보같은 장난이나 치다가 때때로 저렇게 듣는 사람을 낯간지럽게 하는 말을 내뱉는 그 사람. 평소에는 제가 생각하는 바를 전혀 알아주지 못하는 벽창호와도 같지만, 어쩔 때는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가 생각하는 바를 눈치채고는 앞서서 나서주는 그런 사람. 평소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어쩔 때는 믿음직스러운 그 사람. 저는 그 사람을...


  "으!! 아니, 아니다! 내 그카겠나!?"


 그렇게 말도 안되는 생각을 쫓아내고자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때까지 고개를 젓고 있을 때였습니다.



  "크으~. 실화냐!?"


  "킥킥킥... 진짜라니까? 생각보다 쉽게 넘어오더라고? 그 다음에... 얼레?"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자, 프로듀서와 함께 걸어왔던 좁은 골목길 뒤에서 걸어오는 두 명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야, 야! 쟤 봐봐. 엄청 귀엽지 않냐?"


  "우오오!! 오랜만에 초 미소녀 발견했다고!! 오늘은 좀 럭키하잖아?"


  "야, 근데 쟤 머리도 은발에다가 눈도 파란색인데 외국인 아니냐?"


  "낄낄낄... 외국인이면 어때? 외국인이면 안되는 거냐고!!"


  "에...?"


 저를 바로 앞에 두고는 면전에서 저급한 말투로 신나서 떠드는 두 남자를 보자 이내 머리가 새하얘졌습니다. 얼른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낄낄대며 천천히 제 쪽으로 걸어오는 둘을 보면서도 조금씩 뒷걸음칠 뿐, 발목이 아프기도 해서 그러지만 동시에 다리에 힘이 빠져서 도저히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 맞네!! 전에 인터넷에서 보니까 흰색 머리에 파란 눈의 러시아 여자애가 있었는데, 얘도 러시아 사람 아냐?"


  "쩝... 얌마, 영어는 어떻게 비빌 수라도 있는데 러시아 말은 어떻게 할 거냐?"


  "어이 어이... 막히면 일단 지르고 보는 거 잊었냐? 할 줄 아는 러시아어 다 가져와!!"


  "야, 그러고 보니 누가 말해줬었는데? 게임 할 때 러시아 사람 만나면 하는 인사라고. 그 뭐였지... 워넌 쑴까... 뭐시기였는데..."


  "오 그러냐? 알았어, 그럼 해본다!?"


 도무지 예상하지 못한 이런 상황에 당황해버린 저에게 한 명이 다가오고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저기 그 뭐냐... 헬로우? 워넌 쑴까? 야, 못 알아듣는데?"


  "쯧, 나와봐. 방금 니 입으로 말하지 않았냐? 일단 지르고 보라고! 크흠... 헤이 유, 드링크 사케. 고?"


  "에...?"


 어이가 없는 말들이지만, 주변의 상황으로 인해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적이 많지 않은 골목 어귀라 그런지 주변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설령 주변 사람이 본다 하더라도 저를 도와주러 올까요? 도망친다고 해도 이 사람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르겠고...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을 따라가는 건 절대로 싫은데...


  "아~! 답답해서 미치겠네! 그냥 따라오면 되잖아!"


  "히, 히익!"


 그러다 그 중 한 명이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제 손목을 낚아채려 하자, 다행히도 붙잡히기 전에 뒷걸음치고는 그 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본 옆의 남자가,


  "큭큭큭... 어이 어이... 부끄러워하는 모습 최고잖아? 근데 있잖아, 언제까지 피할 거야, 엉? 이제 슬슬 가자니까?"


  "으, 으으...!! 도, 도, 도와..."


 후들거리는 발이 지면에 고정된 듯 이제 더 움직여지지 않는 저에게 앞의 남자가 점점 손을 뻗어왔습니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캉!


  "으억!? 뭐, 뭐야! 어느 자식이 던진 거야!?"


 갑자기 어느 쇠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앞의 남자가 머리를 부여잡고는 주변을 이리 저리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저 또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당황하고 있자, 이내 그 남자의 머리에 금속음을 내고는 떨어진 것이 제 발치로 굴러왔습니다.


  "이건... 단팥죽 캔...?"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자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넥타이도 대충 헐렁하게 메고, 정장의 상의는 입지도 않고 와이셔츠 소매를 팔꿈치 위로 걷어 올려 자신을 더욱 변변찮게 보이게 하는 그 익숙한 인영이. 지금도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하지만 어째서인지 느낌이 평소와는 다른 그 인영이.



  상단에 BGM 링크를 첨부하였으니 들으시면서 보시면 좋습니다.



  "이 자식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엉!?"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거참 죄송합니다, 허허..."


 츠무기에게 찝쩍대며 손을 대려고 한 이매망량의 무리가 다행히도 그 관심을 츠무기에게서 떼고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렇게 캔을 놈에게 던졌으면 안됐다. 좋게 좋게 구슬려서 가능한 이 곳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았을 것이리라. 하지만 아직 미숙한건지, 아니면 츠무기를 괴롭히려는 놈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건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도 전에 손이 멋대로 가방에서 새로 산 단팥죽 캔을 꺼내고는 츠무기에게 자신의 마수를 뻗는 양아치한테 던지고 있었다.


  "하, 이거 기껏 기분 좋아지려고 했는데 성질 나오게 하네. 진짜 뒤지고 싶냐?"


  "이봐, 형씨. 미안하면 성의를 보여야지, 앙?"


 그리고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 양아치들은 자신들의 폭력적인 면모를 전혀 숨기지 않고는 그 적대감을 여실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구는 놈들에게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지만, 이런 상황의 대처법은 명확하다. 더군다나 혼자서 길을 걷다가 시비가 걸린 것도 아니고, 지켜야하는 누구와 함께 있는 상황에선 무모한 짓거리를 해선 안되는 법이다.


  "아하하... 형님들, 실수로 손에서 미끄러진 건데 너그럽게 봐주시면 안될까요?"


  "이 자식... 눈을 어따 두고 다니길래... 얼레?"


 연신 줏대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사과를 하면서 츠무기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서있자, 양아치 중 한 명은 그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위화감을 느끼고는 이내 그 궁금함을 입 밖으로 내었다.


  "어이, 샌님. 당신 뭐라도 돼? 여기 귀염둥이 남친이라도 되는 거야?"


  "네. 제 여자친구입니다."


  "!!"


 양아치들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츠무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당최 알 수 없었지만, 다행인지 츠무기는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츠무기의 반응을 본 양아치들은,


  "큭큭큭... 뭐야, 그렇게 되는 거냐?"


  "어이 어이 어이!! 제법이잖아!! 샌님 주제에 이런 초 미소녀가 여친이라니! 쩌는데?"


 라며 서로를 바라본 채 저속한 웃음을 짓고는 깔깔댔다. 그런 광경을 보니 점점 불안해졌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뭐라고 말하든 간에 결과는 같았을 것이라. 지나가는 행인이든, 직장 동료든, 남자친구든 간에 이 양아치들이 보일 반응은 단 하나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그 불안한 예상은 곧 현실로 바뀌고 말았다.


  "이봐, 샌님. 다행히 우리가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말이야. 그냥 가게 해줄게. 다만, 여친은 두고 가. 별 짓 안하고 그냥 놀기만 할 거니까 괜찮지 않아?"


  "킥킥킥... 저기 샌님보다 우리가 더 재미있게 해줄 테니까! 어때, 귀염둥이 쨩!"


 양아치들은 자신들이 캔에 맞았다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리고는, 저들의 관심을 츠무기에게로 다시 돌렸다. 양아치들이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츠무기를 두고 가면 놈들에게서 벗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에 칼을 들이민다 해도 그런 걸 용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츠무기를 잡고 도망가야 하나? 하지만 발목의 부상으로 츠무기는 뛸 수가 없다... 얼마 가지 못해 바로 잡혀버리고 말겠지. 그럼 맞서 싸운다? 싸우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다. 격투에서 1대다 상황은 최대한 피하라고 배우지 않았었나?'


 하지만 저급하게 츠무기를 쳐다보며 웃어대고 있는 양아치들과, 바로 옆에서 아기 고양이마냥 온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츠무기를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온갖 불리한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게 몇 날 며칠이고 훈련하지 않았었나? 상대가 120kg의 거구라도, 총이나 칼을 들었다 하더라도, 1대다 상황이다 하더라도 할 수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내가 츠무기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 누가 할 것인가?'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이내 긴장감으로 인해 심장이 미친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사실, 두려웠다. 어쩌면 심하게 다칠 수도, 운이 더럽게 나쁘면 죽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좀먹고 있었다. 그렇게 불안감의 편린이 지금 당장 이 곳에서 도망쳐버려야 한다고 꼬드기고 있을 때에, 문득 이전에 스파링을 할 때 들었던 벽력같은 일갈이 떠올랐다.


  '후퇴하지 마! 맞서 싸워! 더 이상 후퇴할 수 없을 때에 자네는 어떻게 후퇴할 건가? 지켜야만 할 것이 있는데도 이렇게 후퇴할 건가?'


  '아니 그렇지만 도저히 싸움이 되지 않는데...'


  '싸움은 힘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자네도 이걸 잘 명심하고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길지 잘 생각해보게.'


 그 말을 듣고 나서도 무술에 조예가 깊은 상대들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지만, 명심하게 된 사실은 하나 있었다. 어떻게 해서 상대를 이길 수 있을지 끊임없이 궁리해서, 이길 확률이 0%면 그걸 1%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지에 대해 짧게 생각을 끝내자, 서로를 바라보고 낄낄대며 웃던 양아치들은 이내 비열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는 다시 말을 걸었다.


  "어이, 우리는 여기 귀염둥이랑 놀고 싶어서 말이야. 그래서 언제쯤 슬슬 꺼져줄..."


  "아하하... 우리 형님들께서 생각하시는 건 잘 알겠지만..."


  "엉?"


  "아무래도 그딴 선 넘는 요구는 들어주기 좀 어렵달까..."


 그 말을 듣자, 한 명이 얼굴 표정을 잔뜩 구긴 채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서 있는 츠무기의 어깨를 뒤로 살짝 밀며 빠져 있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난 뒤, 앞으로 두어 걸음 나서서 그 양아치와 대면했다.


  "이 자식이... 드디어 정신이 나가버린 거야, 앙!?"


  "하하하...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말로 해결을 보는 건 어떨까요?"


  "...웃기냐? 쳐 맞고 싶어? 한주먹 거리도 안되는 게 어디서..."


 라고 양아치는 말하며 오른손으로 멱살을 세게 움켜쥐었다.


  "하하... 그러게요. 한주먹 거리도 안되는 게 어디서."


  "뭣..."


 멱살을 잡고 있는 양아치의 오른손을 쥐고 녀석의 엄지 손가락 끝을 꾸욱 눌러서 밀자, 이내 밀려오는 고통으로 인해 놈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크아아아앗!! 이거 놓... 으아아앗!?"


  반응할 시간을 주기 전에 잽싸게 팔을 끌고 잡아당기자, 멱살을 잡고 있던 양아치는 엄지손가락에 밀려드는 고통 때문인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는 맥없이 끌려왔다.


  "쳐 죽여... 끄아아아!! 항복! 항보오옥!!"


 그리고 끌려오는 모멘텀을 이용해서 잡고 있던 손목에 리스트 락(wrist lock)을 걸며 넘어뜨리자, 양아치는 처음 보여줬던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바닥에 꼴사납게 자빠지고는 꺾인 손목을 풀어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순순히 풀어주게 되면 다시 달려들 수도 있기에, 리스트 락을 걸고 있는 손을 들어올린 뒤에 무릎 옆에 붙여서 암바를 걸었다. 붙잡고 있는 팔에 압박을 유지한 채로, 꼴답잖게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놈은 무시하고는 몇 미터 앞에 있는 다른 양아치에게 위협을 가했다.


  "당장 꺼져. 안 그러면 이 팔을 부러뜨려 버릴 테니까."


 몇 초 동안 아무 말 없는 침묵이 지속됐다. 앞의 양아치는 자신의 상대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췄는지 판단하는 듯 적대감을 가득 품은 채 노려볼 뿐이었다.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의 친구가 당했는데 손쉽게 친구를 저버리고 떠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니까. 순순히 물러났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상대해야 하는 적이 두 명에서 한 명으로 줄어들었단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대치했을까, 이내 앞에 서있는 양아치는 저급한 미소를 흘리면서,


  "어이, 샌님. 유도? 아이키도? 주짓수? 뭐 좀 배웠나 보지?"


  "그거 다 포함된 거로. 잘 아는 거 같은데, 그럼 이제 꺼져."


  "허, 너라면 순순히 꺼지겠냐?"


 이내 녀석은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촥! 하는 소리와 함께 꺼내들었다. 해가 거의 다 져서 어둡기도 하고 놈과의 거리도 어느 정도 있기에 그것이 무언지 명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에 들고 있는 그것이 반사하는 시퍼런 빛은 보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할 수밖에 없다.


  "큭큭큭... 자, 이제 누가 형님이지?"


  "..."


 어느 정도 계산에 넣기는 했지만, 제일 피하고 싶은 상황에 마주쳐 버렸다.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술 학원들에선 무술을 조금만 배우면 흉기를 든 괴한을 제압할 수 있을 것처럼 알려주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몇 년이나 훈련한 군인이나 경찰도 칼 든 상대를 제압하려 하면 본인도 부상을 입는 걸 감수해야 한다. 수 년 경력의 베테랑 경찰이 칼에 맞아 순직하는 경우는 많진 않지만 항상 있어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할 때는 흉기를 든 상대를 마주했을 땐 최대한 도망가라고 한다.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니까. 하지만, 군인이나 경찰이 흉기를 든 적을 마주했다고 도망칠 수는 없는 법이다. 반드시 제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고한 이들도 다치거나 죽을 수 있기에.


  "귀염둥이 쨩 때문에 이거까진 안 쓰려고 했는데, 이제 슬슬 기브업 하지 그래? 쳐 뒤지기 싫으면 말이야."


  "히, 히익...!"


  "..."


 뒤에서 공포로 가득 찬 츠무기의 목소리를 듣자 다시금 각오를 되새길 수 있었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츠무기를 위해서 그 무엇이든 할 거라 다짐했으니까. 그렇게 얼마간 대치하고 있었을까, 붙잡고 있던 놈의 팔을 놓아주자, 이내 앞에서 칼을 든 양아치가 다가왔다. 그렇게 접근하는 녀석에게,


  "...팔 놔줬으니 이제 그냥 가도 되는 거죠, 형님들?"


  "...뭐?"


 양손을 들고 얼빠진 목소리로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자, 칼을 든 녀석은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들고 있는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 자식이... 지금 장난치는 거냐? 이딴 짓거리를 하고는 그냥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엉? 배에 칼빵 한 번 맞아봐야 정신을... 읏!?"


 양아치가 오른손에 든 칼을 배 앞에서 까딱까딱 흔들며 방심을 하자, 재빨리 왼손을 들어 놈의 손목을 잡고는 그대로 머리까지 올려서 리스트 락을 걸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양아치는 고통스러운 표정과 동시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놈이 당황함을 이겨내고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 이전에, 신속하게 오른손을 들어 손목으로 그대로 칼등을 내리쳤다.


  "이 개같... 끄아아아아아아아아!!"


 칼등을 손목으로 내리치는 동시에 양아치의 쇄골 방향으로 칼등을 누르자, 양아치는 본인이 들고 있는 칼로 자기 자신의 쇄골을 짓누르게 되고는 곧이어 피가 녀석의 옷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통증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인지 요란하게 자빠져서 나뒹굴기 시작했다.


  "도, 도와...! 피, 피가!! 피가... 크아아아아앗!"


 확실하게 마무리를 하기 위해 쓰러진 녀석의 발목을 짓밟자, 엄청난 고통이 밀려드는 것인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이리 저리 구르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놈.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실전이었으면 쇄골이 아니라 목을 그어버렸을 거니 운 좋게 생각해라."


 그렇게 내뱉고는, 뒤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츠무기를 향해 돌아보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츠무기. 다친 데는 없지? 이제 괜찮으니까 얼른..."


  "으... 으으..."


  "츠무... 기?"


 어째서인지 츠무기는 아직도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이 향하는 곳은 쓰러져 있는 양아치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츠무기... 어째서..."


  "히, 히익..."


 그녀에게 손을 더 가까이 내밀었지만, 츠무기는 뒷걸음질 치면서 무서운 무언가를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주었다. 츠무기가 왜 몇 걸음 떨어진 채 피하려고 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입술과 동요하는 눈동자가 무엇 때문인지는 이제 모를 수가 없었다.


  "미안해, 츠무기... 이번에도 너를 위해서, 라고 해도 이해해줄 수 없겠지... 정말로 미안해."


  "아... 프로듀서... 그게 아니... 읏... 죄송... 읏!?"


 두려움에 떨고 있던 츠무기는 그 말을 듣자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눈으로 사과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사과하려는 그녀는 이내 무언가를 보고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경악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츠무기? 왜 그래, 무슨 일 있..."


 


  "어...?"


 이상했다. 이런 장면을 영화에서 봤을 때에도 이랬었는지는 다시 기억을 되살려 봐야 하겠지만, 어쩐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까의 싸움으로 인한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처음엔 아프지 않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와 별개로 힘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츠무기... 미안... 해...'


 츠무기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했다는 죄책감과, 츠무기를 끝까지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악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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