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단편] 치하야 초코퐁듀 (千早 Choco Fondue) - 2

댓글: 0 / 조회: 187 / 추천: 0


관련링크


본문 - 02-25, 2024 01:51에 작성됨.

 치하야의 요구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키사라기 치하야가 이런 요구를 해 올 줄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시이 미키나 이부키 츠바사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같은 것은 아니었다. 치하야답다면 치하야답달까, 명확한 이유가 있었고, 그것은 의외로 논리적이었기 때문에 안 돼, 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그런 합리적인 이유와는 별개로, 키사라기 치하야의 요청이다. 그에게는 거절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키사라기 치하야의 걸어온 삶을 알고 있을진대, 매몰차게 안 돼, 라고 말할 심성의 소유자는 아니다, 이 프로듀서는. 다시 말해, 키사라기 치하야의 기분을 다운시키고 싶지 않다.


 키사라기 치하야에겐 참 무른 사람이다.


 그리고 그 요구의 결과로, 그는 잘 입지 않던 사복을 꺼내 입고 오다이바의 커다란 플라자 앞에서 키사라기 치하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민 상담이 있다, 그렇게 말했으면서, 주말에 여기에서 만나자는 말을 마지막에 해 버리면, 그 저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쪽이 바보가 아닐까.


 평소라면 모른 척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도 없었다. 키사라기 치하야에게 맡긴 악곡의 이해를 위해서, 라는 말이 덧붙여졌기 때문이다.


 그래, 프로듀스의 일환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트렌치코트의 깃을 접어 내린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것이, 아마도 한두 시간만 더 있으면 여기도 영업을 마치리라.


 다행히 늦지 않게, 저 멀리 키사라기 치하야의 모습이 보인다. 파란색 코트와 하얀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던 것일까, 평소의 치하야보다 따뜻하게 입고 온 모양이다. 일본의 겨울 정도는 따스하다고 느끼는 그는 그런 모습을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코트를 보자 하하, 작게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프로듀서, 많이 기다리셨나요?”


 “아니야, 나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


 “모처럼의 휴일 저녁인데, 제가 불러내어 죄송합니다.”


 “치하야의 부탁인데, 만사 제쳐두고 와야지.”


 “후후, 말씀만으로도 정말…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치하야의 미소를 본 프로듀서 또한 미소로 화답한다. 하지만 이내 조금 짓궂은 말투로 그녀의 코트를 가리키며,


 “그 코트, 내가 사 준 코트 맞지?”


 라고 실실 웃으며 말한다. 물론 치하야를 놀리기 위함이다.


 765 프로덕션 초창기, 노래하는 일 이외의 거의 모든 일을 거부하던, 키사라기 치하야가 어려웠던 시기였으리라. 겨울에도 매우 춥게 입고 다니던 그녀의 관리 차원에서―겸사겸사 환심도 조금 사볼 겸―선물한 코트다.


 코트를 받을 때는 이런 걸 자기한테 왜 주느냐는 얼굴이었지만, 막상 잘 입고 다니는 것이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간도 꽤 지난데다가 유행도 지났기 때문에 버리거나 어디 구석에 던져놓고 방치하지 않았을까,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치하야는 그런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양손으로 코트의 깃을 꼬옥 잡으며 그녀답지 않게 헤실헤실 웃었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프로듀서도.”


 “아, 그래. 그렇지. 내가 선물한 코트니까 뭐.”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닌데, 조금 아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이거대로 키사라기 치하야의 감정이 풍부해졌다는 뜻이니 좋은 것이다. 나이에 맞는 감정을 보이는 것은 소중하다.


 치하야가 조금 더 그 나이대 소녀와 같은 꿈을, 기분을, 행복을 느끼게 하고 싶어 일부러 발렌타인 데이의 노래를 맡긴 것이기도 하다. 초콜릿에 사랑을 담아 두근두근 건네는 그런 감정, 분명히 키사라기 치하야의 내면에도 존재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프로듀서의 선물에 대해 답례를 해야 했는데, 지금 와서는 조금…그럴까요?”


 “됐어. 치하야가 잘 입고 다녀 주는 것만 해도 충분한 답례니까.”


 “후후, 그런가요. 하지만 반지는 끼고 다니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그 반지.”


 예전에 치하야에게 백금 반지를 하나 선물한 적이 있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친애의 의미로,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아이돌과 프로듀서가 되었을 때, 한번 선물한 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 신뢰의 증표였다. 키사라기 치하야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그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치하야 또한 신뢰의 증표로 생각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치하야의 말처럼, 아무리 그래도 반지를 끼고 다니는 것은 조금…조심스러우리라. 혹여나 파파라치 같은 놈들에게 반지의 존재가 들키게 된다면, 괜한 오해를 사는 것과 더불어 이것저것 뒤처리가 골치 아파진다.


 그러니 치하야가 미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곤란할법한 선물을 줬었던 과거의 프로듀서가 미안해야 할 것이다.


 “치하야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 아이돌이니까, 오히려 끼고 다니면 곤란하지.”


 “알고 있어요. 그래도 프로듀서가 주신 반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고마워.”


 “굉장히 기뻤으니까요, 그때.”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는 키사라기 치하야는, 굉장히 순수하여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슬그머니 말을 돌린다.


 “그렇구나. 아무튼, 여기 온 목적을 이루러 가 보는 게 어떨까?”


 “그렇네요.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었는데,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하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무리한 부탁일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치하야 혼자서는 해결하지 못할 난제다. 물론 프로듀서 본인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아는 지식이 있으니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야. 그런데 정말로 나로 괜찮겠어? 초콜릿 만드는 데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들을 사는 것을 도와달라니.”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담당 프로듀서잖아요.”


 “하지만 이런 건 나보다 하루카나 미나코가―”


 “담당 아이돌들에게 무거운 짐을 들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프로듀서?”


 “…….”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이쪽은 무거운 짐을 들어도 되는 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치하야라면 그녀의 담당 프로듀서가 자가용을 가지고 왔다는 것쯤은 예상했으리라.


 “그러면, 가 볼까요? 프로듀서가 잘 알려 주셔야 합니다.”


 “그 전에 잠깐, 이걸 써 줄래?”


 “이건…안경인가요? 그리고, 털모자…?”


 프로듀서가 내민 것은 동그란 안경 하나와 하얀색의 작은 털모자였다. 갑자기 이걸 왜…라는 생각도 잠시, 키사라기 치하야는 가희이기 이전에 아이돌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곤 그것을 받아들었다.


 “변장은 해야지. 스캔들 나는 건 조심스러워.”


 “후후, 스캔들…인가요.”


 털모자는 머리에 꼭 맞았다. 긴 생머리를 가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얼굴형을 어느 정도 가릴 수 있는 것이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에야 그녀가 키사라기 치하야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안경에는 도수가 없었고, 동글동글한 렌즈가 매우 커서 키사라기 치하야의 분위기를 확 다르게 만들어 주었다. 프로듀서의 세심한 배려다. 하지만 세심하지 못한 한 마디를 꼭 던지고야 만다.


 “이렇게 보니까 놀러 나온 여고생 같네.”


 그 말에 볼을 부우―, 부풀리며 눈을 가늘게 뜬다. 도대체 이 프로듀서는, 가끔 이렇게 생각 없는 말을 던진단 말이다. 이래서야 하루카도 고생이리라.


 “그거야, 일단은 저도 여고생이니까요.”


 “아……미안. 미안. 가벼운 농담이었는데…미안해, 치하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것인지 깨달은 프로듀서는,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며 치하야 앞에서 쩔쩔맨다. 다 큰 성인이 여고생 앞에서, 프로듀서가 담당 아이돌 앞에서 쩔쩔맨다니. 그 상황에 푸흡, 작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신경 쓰지 마세요, 프로듀서. 그보다 문 닫기 전에 빨리 가죠.”


 “그러네. 빨리 다녀오자.”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은 플라자의 문을 열고 안쪽으로 한 걸음 걸어갔다. 빠르게 사고 나와야지, 프로듀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안쪽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환한 조명과 수십 개의 가게, 그리고 거의 모든 가게마다 놓여 있는 초콜릿, 그리고 또 초콜릿이었다.


 아무래도 발렌타인 데이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으니 수많은 초콜릿을 들여놓는 것은 상인이라면 당연한 선택이었으리라.


 “엄청나네―.”


 “그렇네요. 사랑이란 것은 이렇게 화려한 것이었나요.”


 “꼭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


 목표로 하는 곳은 4층의 가게. 실내장식과 가정용품을 파는 곳이기 때문에 볼이나 중탕기 같은 주방용품도 팔고 있다.


 혹시나 안 파는 것일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치하야가 가겠다고 하자마자 조사를 끝내두었다. 그야, 키사라기 치하야의 담당 프로듀서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조금 느긋하게 걸어도 된다. 어차피 오늘은 휴일이고, 키사라기 치하야의 스케줄은 다 끝났고, 플라자의 영업 종료 시각까지는 조금의 여유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키사라기 치하야와 약간의 잡담,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곳을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문제없다.


 “그런데 꼭 초콜릿을 만들어 볼 필요가 있어?”


 “직접 만든 초콜릿을 주고 싶은 소녀의 마음이잖아요? 초콜릿을 직접 만든다, 는 것부터 이해해보고 싶어요.”


 “그렇구나. 만들어서 팬 분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네.”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아, 프로듀서. 저기, 저쪽으로 한번 가 볼까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자, 치하야는 소매를 주욱 잡아당기며 손가락으로 한 가게를 가리킨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크레페 가게였다.


 단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던가, 속으로 의문을 표했지만, 평소에는 부탁이라거나 어리광이라거나 전혀 하지 않는 키사라기 치하야의 말이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그마한 손에 이끌려 가게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프로듀서의 궁금함을 느꼈던 것일까, 치하야는 후후 작게 웃으며 대답을 내놓는다.


 “사실 스케줄 끝나고 식사를 못 해서요.”


 “그랬구나.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미안하네.”


 “괜찮아요. 프로듀서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나도 같은 거.”


 그렇게 말하니 이내 치하야가 ‘딸기 크레페 두 개 주세요.’라며 메뉴를 주문한다. 그리고 그녀가 계산하려는 것을 재빨리 제지하고, 어른의 카드를 꺼내 결제한다. 아무리 그래도 담당 아이돌에게 먹을 것을 얻어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예전에 코트를 사 주실 때도 이렇게 막무가내셨죠, 프로듀서는.”


 “그때는 너도…아니, 됐다.”


 그 당시의 키사라기 치하야는 막무가내를 넘어선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러니까 프로듀서의 말에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어색한 분위기도, 주문한 크레페가 나오자 자연스레 사라졌다. 크레페를 하나씩 받아들고 가게를 나와, 다시 다른 가게 주변을 걷는다.


 “먹으면서 조금 걷는 건 어떤가요, 프로듀서?”


 “영업 종료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으니까…그럴까?”


 “그러면, 한 층 올라가서 걸어요, 저희.”


 그렇게 말하며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2층은 대부분 음식점이었기 때문에, 3층으로 올라가 옷이라도 보려는 심산이리라.


 다만 키사라기 치하야가 언제부터 패션에 신경을 썼던가, 그것부터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알지 못 하리라. 이 모든 것이 아마미 하루카의 머리에서 나와 키사라기 치하야에게 주입된 것임을. 오늘의 키사라기 치하야는 그녀의 친구가 조언을 가장한 세뇌대로 행동해보고 있음을 말이다.


 그런 치하야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프로듀서는 이내 예의 태평한 얼굴로 딸기 크레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거의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조금 귀엽다고 키사라기 치하야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 또한 프로듀서를 따라 딸기 크레페를 한 입 베어 문다. 달콤한 생크림의 맛과 새콤한 딸기의 맛이 입에 가득 퍼진다.


 문득, 아마미 하루카의 말이 생각난다. 키사라기 치하야가 이 수줍은 소녀의 사랑 노래에 어떻게 감정을 실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직접 체험해 보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해 보지 못했던 두근거리는 일. 키사라기 치하야가 원하는 이성과의, 살짝 아쉬울 정도의 짧은 데이트.


 거기에 추가로, 발렌타인 데이에만 할 수 있는 일. 직접 만든 초콜릿을, 선물해 주기.


 실제로 선물하지는 않더라도, 선물을 위한 초콜릿을 만드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키사라기 치하야라면 뭔가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친구의, 아마미 하루카의 조언이었다.


 그 조언을 키사라기 치하야는 납득하고야 말았다. 그야, 치하야 본인도 가사에 조금 더 감정을 싣고자 가사의 내용대로 행동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


 막상 그 조언대로 행동하고 있자니, 아직도 입 안에 남아 그녀를 들뜨게 만드는, 그런 새콤달콤한 맛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프로듀서는 어떤 기분일까. 지금 이때를, 프로듀서는 어떤 마음으로 보내고 있을까.


 키사라기 치하야가 프로듀서를 보고 있는 것처럼, 그 또한 키사라기 치하야를 보고 있을까. 키사라기 치하야와 단둘이 함께하는 이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들뜬 것인가, 키사라기 치하야답지 않게. 고개를 휘휘 내저어 빨갛게 달아오른 온기를 털어낸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프로듀서는 그녀의 옆에서 걷고는 있었지만, 그 시선은 다른 가게들을 향하고 있었다.


 “저런 의상도 괜찮을 것 같은데. 으음….”


 3층에 있는 옷가게들에 진열된 의상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일 생각이라도 하고 있겠지. 저 의상을 누구에게 입히면 어울리겠다, 참고해볼까…같은, 그런 생각들이리라.


 제아무리 눈치 없는 키사라기 치하야라 할지라도,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지나다니는 다른 여자들에게 눈길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게 어디냐,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기며 말한다.


 “프로듀서.”


 “어? 아…치하야. 왜, 무슨 일이야?”


 “일하러 오신 건 아니잖아요?”


 “어…….”


 치하야의 말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이 상황 또한 어떤 면에서는 업무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키사라기 치하야라는 담당 아이돌을 보조하는 것, 업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그렇게 말을 하면 키사라기 치하야의 내면 깊숙이 봉인되어 있던 치하야 스파이럴이 다시금 시작될 것만 같았다. 배드 커뮤니케이션의 느낌이란 것이다.


 “그냥, 치하야가 저런 옷을 입어 보면 괜찮지 않을까~싶어서. 카디건이나 폴라 티셔츠가 잘 어울리기도 하고.”


 “흐응…그런가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비쭉거리는 것이 올바른 선택지를 고른 것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쿡쿡 웃으며 입꼬리를 느슨하게 푼다.


 “스테이지에서 입을법한 의상은 아닌걸요.”


 “당연히 아니지. 사복으로 어떨까 싶었을 뿐이야.”


 “날씨가 조금 풀리면 입을 수 있겠네요.”


 “아무래도 지금 입기에는 치마가 조금 짧지.”


 “하지만 뭐랄까…입으면 어울릴 것 같긴 합니다.”


 “확실히. 치하야가 스타일이 좋아서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프로듀서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살짝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툭 내뱉은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다. 프로듀서도 남자라는 것일까, 그리고 키사라기 치하야 또한 여자라는 것일까.


 바보 같아, 속으로 투덜거린다. 하지만 그런 속내와는 달리, 키사라기 치하야의 입은 프로듀서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시면, 프로듀서와 나중에 다시 한번 와야겠네요.”


 “…나랑?”


 “네. 프로듀서가 골라주신 옷이니, 프로듀서가 한 벌 사 주시겠죠.”


 이렇게 말하면 곤란한 표정을 짓겠지. 그리고 그러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에둘러 거절하리라. 하지만 괜찮다. 그 곤란하거나 당황한 표정을 보고 싶은 것뿐이니까.


 “그러자. 라이브 끝나면 치하야에게 어울리는 옷이라도 사러 갈까.”


 “아…….”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오히려 이쪽이 당황한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키사라기 치하야의 옷을 고르고 사러 단둘이 쇼핑하자는 뜻인가. 그러니까, 이건 그……데이트 약속인 걸까.


 “…그럴까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옆에서 같이 걷던 그를 살그머니 올려다본다. 크레페의 생크림이 입가에 조금 묻어 있는 것이 귀엽다, 그렇게 느껴진다.


 타카츠키 야요이가 입가에 생크림을 묻힌 채로 말하고 있었다면, 키사라기 치하야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그에 대한 답이 나오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치하야……?”


 무언가에 홀린 듯 프로듀서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스윽, 손가락을 움직여 생크림을 닦아낸다. 당황한 프로듀서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귀엽잖아, 프로듀서도. 작게 웃으며 손가락에 묻은 생크림을 입에 가져간다. 휴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달콤하네요.”


 “치하야, 너…갑자기 무슨…!”


 “프로듀서가 칠칠치 못하시니 어쩔 수 없었어요.”


 “…….”


 그는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작은 한숨과 함께 ‘그러면 안 돼’라며 투덜거리듯 한마디 던질 뿐이었다.


 하지만 키사라기 치하야는 그것으로 만족하지는 못하였을까, 살그머니 프로듀서의 옆으로 다가와 몸을 밀착시킨다. 그리곤 크레페를 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그의 손을 잡는다.


 “이것도 안 되나요, 프로듀서?”


 깜짝 놀란 그는 황급히 손을 빼려 했지만, 자신을 올려다보는 치하야의 얼굴을 보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렇게 주인에게 배신당한 강아지 같은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손의 그 옅은 온기를 거부하지 못한다. 키사라기 치하야의 손은 예나 지금이나 가늘고 차가워, 그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가냘픈 손을 살며시 쥐었다. 온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덧없이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그랬을까,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프로듀서.”


 “아…미안, 치하야.”


 하지만 생각보다 조금 세게 잡았던 것일까, 치하야의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보자,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남성의 힘이다 보니 아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과는 달리, 키사라기 치하야는 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남성이 손을 마주 잡은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남동생의 자그마한 손과는 다른,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손과는 다른, 단정하지만 투박한, 그러면서도 안심이 되는 커다란 손. 아주 잠시 잡았을 뿐인데도 손이 따스해지는, 그런 감각.


 친구의, 아마미 하루카의 따스함과는 다른, 프로듀서만의 온기. 그런 느낌. 설레는 감각. 콩닥거리는 심장.


 온몸이 감싸이는 느낌.


 “있잖아요, 프로듀서.”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만끽하고 싶다. 그래서 키사라기 치하야답지 않은 얼굴로, 키사라기 치하야답지 않은 말을 한다.


 “손, 다시 잡아주실 수…있나요?”


 그러면서 팔은 올리지 않은 채로 손바닥을 폈다. 곤란한 표정의 프로듀서다. 하지만 키사라기 치하야는 프로듀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알고 있는 프로듀서라면 분명, 무르다.


 “……가게 앞까지만이야.”


 봐, 그러니까 거절하지 못하잖아. 가희의 만면에 미소가 핀다.


 그리고 그녀가 불러야 하는 노래의 가사를, 그 느낌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음을, 키사라기 치하야는 그제야 깨달았다.


 *  *  *  *  *  *  *  *  *  *


 “오늘, 감사했습니다.”


 차에서 내린 뒤, 키사라기 치하야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를 태워 준 운전자, 프로듀서는 운전석에서 손을 흔들었다.


 “정말 괜찮아? 집까지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무겁지는 않아요.”


 “그래…그렇다면 다행이네.”


 초콜릿을 만드는 데에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에, 양손에 하나씩 작은 봉투를 드는 것만으로도 필요한 것을 사 오는 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키사라기 치하야의 자취방은 당연하게도 정리 같은 것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이사 박스도 지금까지 그대로고, 주방 집기 같은 것도 여기저기 널려 있다. 애초에 집에서 뭔가 활동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방을, 프로듀서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물론 예전에 765 프로덕션의 몇몇 동료들과 프로듀서도 한번 와 본 적이 있다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그때의 감정과 지금의 감정이 같을 리 없다.


 그러니까 차에서 내리려는 프로듀서를 제지하고, 그를 돌려보내는 것이다.


 “내일…그러니까 일요일까지는 별다른 스케줄은 없으니까, 뭔가 필요하면 연락해. 언제든 도와줄 테니까.”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일은 하루카가 도와줄 거예요.”


 “초콜릿 만드는구나. 하루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


 “저는 못 믿으시나요?”


 “솔직히 치하야 너, 요리해본 적 없잖아.”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사실이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반드시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 또한 진짜다.


 “그래도 모처럼 치하야가 직접 만드는 초콜릿인데, 라이브 때 추첨으로 팬 분들에게 선물하는 건 어때? 치하야가 직접 만든 초콜릿이라면 분명, 팬 분들도 좋아해 주실 거야.”


 “……딱히 팬 분들께 선물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만.”


 “어라, 그러면 따로 줄 사람이라도―”


 그렇게 말하다가, 그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발렌타인 초콜릿이라면 일반적으로 남성에게 줄 테고, 팬 분들이 아니라면 가족이리라. 그리고 키사라기 치하야의 남자 가족이라면, 지금 거의 만나지 않는 부친을 제외한다면……괜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실언이다.


 그래서 담당 아이돌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프로듀서의 반응에도 치하야는 후후, 작게 웃을 뿐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게 아닌데. 프로듀서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닌데.


 “그렇네요. 따로 줄 사람이 있거든요.”


 “……하, 하하.”


 조금 놀리고 싶었을까, 끝맺지 못한 프로듀서의 말을 일부러 긍정한다. 그가 당황하여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귀엽다. 나이도 제법 많이 차이가 나는데, 남자는 몇 살이고 아이 같다는 것일까.


 “프로듀서도 아는 사람이에요.”


 “그, 그래? 그렇구나…하, 하하…….”


 조금 더 그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밤이 너무 늦었다. 내일의 스케줄도 레슨도 있으니, 그를 놀리는 것은 이쯤 해야 할 것이다. 이 사소한 수수께끼의 정답을 유도하기 위해, 키사라기 치하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무실에 있는 사람이고, 으음…그래요, 어른이네요.”


 “그래, 사장님이구나.”


 “…….”


 이 사람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뭐, 사장님께 드리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만요, 틀렸어요.”


 “그렇다면…오토나시 씨와 아오바 씨로구나. 사무원분들께 평소의 감사를 하기에는 딱 좋긴 하지.”


 “그건 따로 준비할 생각입니다.”


 “그러면 역시 프로덕션의 동료들이구나. 하루카나 미우라 씨도 초콜릿 만들어서 가져올 테니, 서로서로 교환해서 먹어보는 것도 좋겠네.”


 “……네, 그렇네요.”


 그 둔감함인지 둔감한 척하는 것인지 모를 발언에, 키사라기 치하야는 할 말을 잃고 혀를 내두르고야 말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프로듀서에게 줄 건데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부끄러움이라고 불리는 이성의 한 조각이 그것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더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지금 예고하는 것보다, 당일에 직접 만든 초콜릿을 들이밀자. 그러면 프로듀서는 절대 거절하지 못 하리라.


 물론 평소의 답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그때는 절대로 말할 것이다.


 진심이라고, 진짜라고.


 그러니 그때를 위해, 발렌타인 데이의 하이라이트를 위해 지금은 잠시 내려놓자.


 “아무튼, 너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 보자.”


 “네. 프로듀서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다. 그는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고, 이내 운전대를 잡고 차에 시동을 건다.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다. 하얀 입김이 올라온다. 안경에 김이 서려 시야를 가린다.


 “……바보 같아.”


 작게 중얼거린다.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파르르 떨리는 것이 긴장이라도 한 것이리라.


 더 이상 프로듀서의 자동차가 보이지 않는다. 뭘 하는 걸까, 나는. 속으로 자조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그리곤 몸을 돌려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난방을 끄고 나왔기 때문에 분명, 방안은 차갑겠지.


 하지만 여기보다 서늘하진 않으리라. 프로듀서가 가버린, 이곳보다는.


 *  *  *  *  *  *  *  *  *  *


 살면서 가장 어렵고 힘겨운 일이다.


 그런 생각을, 키사라기 치하야는 부엌의 조리대 앞에서 하고 있었다.


 옆에는 아마미 하루카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지금의 키사라기 치하야는 누가 보아도 초콜릿을 만들려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전쟁에 나가는 병사와도 같은, 그런 결연한 얼굴로 이를 꽉 물고 있었다.


 “저기, 치하야…쨩?”


 “응, 하루카. 나는 준비됐어.”


 주먹을 꽉 쥐며 각오를 다지는 치하야를 보며, 하루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고작해야 수제 초콜릿을 만들 뿐이다. 딱히 어려운 과정도 없거니와 여기, 과자 만들기가 취미인 아이돌, 아마미 하루카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키사라기 치하야가 요리해본 적 없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실패하게 두진 않을 것이다.


 “치하야 쨩, 긴장 풀어.”


 “기, 긴장한 적 없어, 하루카.”


 “……말이 떨리고 있다고, 치하야 쨩.”


 지금도 꿀꺽, 하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온 방 안에 다 들릴 지경이다. 하여간 귀여운 친구다. 당장 뺨이라도 주욱주욱 잡아당기고 싶은 기분이다.


 그런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하루카는 요리용 라텍스 글러브를 낀다. 손에 쫀쫀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꽤 좋다.


 “일단, 장갑부터 낄까?”


 “아, 으응…….”


 그리고 옆의 친구에게도 라텍스 글러브를 하나 넘긴다. 치하야는 그것을 받아들고, 그녀의 손에 천천히 끼운다. 손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오묘하다.


 “일단, 어제 사 온 초콜릿을 잘게 부수자. 치하야 쨩은 다크 초콜릿이지?”


 “그게, 으응. 프로듀서가 단것을 그리 좋아하시는 편이 아니니까….”


 “…….”


 딱히 화이트 초콜릿이라고 더 달다거나, 다크 초콜릿이라고 덜 달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미 하루카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중요한 것은 키사라기 치하야의 마음 아니겠는가. 프로듀서 씨의 취향에 맞춰 준비하려는 그런 귀엽고 기특하면서도 소녀 같은,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을, 아마미 하루카는 지켜주고 응원해주고 싶을 뿐이다. 당장 오늘의 연적이 된다 해도, 최소한 키사라기 치하야와는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고 싶으니까. 그런 우정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화이트 초콜릿을 잘게 부수어 보울 안에 넣었다. 옆에서 키사라기 치하야 또한 아마미 하루카가 하는 것처럼 다크 초콜릿을 잘게 부수어 보울 안에 넣는다. 그 손이 조금 떨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행히 실수하진 않았다.


 “그러면 이제…우유, 우유가 어딨지?”


 “냉장고 안에 있어. 오늘 아침에 사 와서 아직 안 뜯었어.”


 “냉장고 안쪽…어디지…아, 여기 있다.”


 일 리터짜리 우유 두 팩을 꺼내어 보울에 하나씩 나누어 붓는다. 그리고 냄비 안에 물을 채우고 불을 중불로 맞춘 뒤, 잠시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문득, 치하야에게 물어본다.


 “유당 제거 우유를 사 왔네, 치하야 쨩?”


 “프로듀서가 유당불내증이 있으니까.”


 “……어라.”


 아마미 하루카도 모르던 정보가 키사라기 치하야의 입에서 나오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듀서가 유당불내증이 있었다고? 한 번도 말하거나 내색한 적이 없었는데.


 그 사실을 키사라기 치하야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작은 의문이 검은 마음이 되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려는 찰나,


 “프로듀서가 그런 우유만 드시니까, 불내증이리라 생각했을 뿐이야.”


 “아, 아하하―.”


 그런 아마미 하루카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을까, 변명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뭐야, 별일 아니었잖아…라는 생각도 잠시였다. 키사라기 치하야는 분명, 두려울 정도로 막강한 라이벌이 될 것이 자명하리라.


 “치하야 쨩은, 프로듀서 씨를 잘 보고 있구나.”


 “……딱히, 보였을 뿐이야.”


 “흐응…그래?”


 그렇게 얼굴 붉히면서 말해도 신빙성 없거든! 속으로 소리를 빼액! 질렀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친구다.


 냄비 안의 물이 살며시 끓어오르자, 우유와 초콜릿을 섞은 보울을 냄비 안에 집어넣는다.


 “이렇게 중탕하면서 초콜릿이 우유에 다 녹을 때까지 계속 저어주면 돼.”


 “으응….”


 “프로듀서 씨 드릴 거라면,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술이라도 넣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우리는 술을 구매할 수 없잖아.”


 “그렇지. 아쉽네에~ 모처럼이니 딸기 퓌레라도 사서 넣을 걸 그랬나?”


 “사 왔어야 했어…?”


 아마미 하루카의 말에 키사라기 치하야가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그 표정은 반드시 사 왔어야 하는 재료를 사 오지 않았나, 하고 우려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친구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아마미 하루카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한다.


 “전-혀 그럴 필요 없어, 치하야 쨩. 그냥 해 본 말이야. 오히려 딸기 퓌레를 넣으면 더 달아지니까, 프로듀서 씨에게 드리는 건 밀크 초콜릿으로 충분해. 응.”


 “……그렇구나.”


 짧은 말이었지만, 치하야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것을 아마미 하루카는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친구를,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둔단 말인가.


 “일단, 다 녹은 초콜릿을 여기, 틀에서 굳히자.”


 “아, 아앗…!”


 그래, 자신이 녹이고 있던 초콜릿의 상태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이 친구를,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둔단 말인가. 분명 아마미 하루카가 아무것도 안 하고 내버려 둔다면, 초콜릿이 아닌 어떤 음식이 나올지…감히 생각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금 이곳에는 아마미 하루카가 있다. 특기에 과자 만들기를 적을 정도의 아이돌이다. 그녀가 있는 한, 초콜릿 만들기의 실패란 없다.


 “아, 혹시 치하야 쨩…하트 모양 틀, 필요해?”


 히죽히죽 웃으며 그렇게 친구를 떠본다. 평소의 키사라기 치하야라면 ‘필요 없어’라며 단칼에 거절하겠지만, 지금이라면 달라고 하지 않을까. 프로듀서 씨에게 줄 초콜릿을, 하트 모양으로 만들고 싶지 않을까.


 “괜찮아. 프로듀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후후, 치하야 쨩 답네.”


 그렇게 고개를 내저으며, 키사라기 치하야는 네모난 틀에 초콜릿을 붓고, 플라스틱 주걱으로 고르게 펴 준다.


 아마미 하루카는 친구의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금세 알아차린다.


 담당 아이돌이 담당 프로듀서에게 초콜릿을 주는 것 자체는 그럴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발렌타인 데이에, 그것도 하트 모양으로 만든 수제 초콜릿을 준다면…분명 프로듀서 씨의 성격상 부담스러워하겠지.


 그러니까, 최소한의 탈출구 정도는 만들어 두는 것이다. 혹여 프로듀서 씨가 부담스러워 거절하려 해도, 의리에요, 그 작은 한 마디로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키사라기 치하야의 생각일 뿐이다. 아마미 하루카의 눈으로 보자면, 단순히 겁을 먹은 것뿐이리라.


 그야 당연하다. 아마미 하루카가 아는 프로듀서 씨라면, 키사라기 치하야가 주는 것을 거절할 리가 없다. 뭐어…아마미 하루카는 한번 거절당한 과거가 있지만, 그것이 키사라기 치하야에도 적용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프로듀서 씨라면 분명히, 키사라기 치하야에게 무르니까.


 하지만 아마미 하루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등을 떠밀어주는 것 정도밖에는 없다. 결국 프로듀서 씨와 키사라기 치하야 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마미 하루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네모난 틀 안에서 굳어버린 갈색의 초콜릿 덩어리를 보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달콤해야 할 텐데. 초콜릿도,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도.


 “일단, 다 굳은 것 같으니, 잘라 볼까?”


 그 말에, 키사라기 치하야는 고개를 끄덕인다. 살짝 손을 떨고 있는 것이, 긴장이라도 하는 모양이리라. 고작해야 초콜릿을 자르는 것뿐인데. 하지만 실패하면 어쩌지 같은 생각이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친구의 손을, 아마미 하루카는 조심스레 맞잡는다. 깜짝 놀랐는지 치하야가 손을 빼려 했지만, 그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치하야 쨩. 천천히, 힘 빼고.”


 “아……으응.”


 그제야 자기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힘을 빼고 아마미 하루카의 움직임에 손을 맡긴다. 천천히, 그러면서도 단번에 초콜릿을 자른다.


 “고마워, 하루카.”


 그런 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잊지 않는다. 키사라기 치하야 혼자서는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 키사라기 치하야를 선뜻 도와주는 아마미 하루카의 존재는, 프로듀서를 제외하면 치하야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동료이리라.


 “별말씀을. 그리고 아직 코코아 파우더 안 뿌렸잖아.”


 “후후, 그렇네.”


 서로를 보며 쿡쿡 웃는다. 그리곤 코코아 파우더를 작은 체에 올리고, 옆면을 톡톡 건드려 고운 파우더만 초콜릿 위에 뿌린다.


 “이러면 완성! 나머지는 잘 포장해서…프로듀서 씨에게 드리면 되는 거야.”


 “초콜릿은 처음 만들어 보는데…잘 만들어졌으면 좋겠어….”


 “그럼, 잘 만들어졌는지 확인해 볼까?”


 그렇게 말하며 아마미 하루카는 초콜릿을 한 조각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조금 많이 만들기도 했거니와, 만들고 나서 맛도 안 보고 초콜릿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하지만 정작 초콜릿을 만든 당사자는 초콜릿에서 시선을 회피한다. 자신이 없는 거겠지, 아마미 하루카는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다.


 무리도 아니다. 요리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 온 키사라기 치하야이지 않은가. 처음 만들어 보는 수제 초콜릿의 맛을 두려워할 수 있는 것이다, 충분히.


 “자, 치하야 쨩.”


 그래서 집어 든 초콜릿 조각을 그녀에게 내민다. 키사라기 치하야야말로 아마미 하루카보다 먼저 이 초콜릿의 맛을 보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먹어봐도 될까?”


 “안 먹어보고 프로듀서 씨 드리려고?”


 “그, 그런 건 아니…야.”


 말끝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아마미 하루카가 건넨 초콜릿을 받아든다. 그리고선 결심했다는 듯 주먹을 꽉 쥐며 초콜릿을 입으로 가져간다.


 그래, 그렇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아마미 하루카가 도와줬다곤 하지만, 그 키사라기 치하야가 직접 만든 초콜릿이다. 그것도 주고 싶은 사람에게 정성을 가득 담아, 마음을 가득 담아 만든 것.


 “나도 하나 먹어볼게.”


 그렇게 말하며 다른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그리고 혀에 느껴지는 달콤한 감각, 부드러운 향기, 그리고 따스한 마음.


 가게에서 파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맛이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키사라기 치하야는 살짝 눈매를 찌푸리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입을 연다.


 “조금…너무 달지 않아?”


 “괜찮아, 이 정도는.”


 “프로듀서에겐 조금 달 것 같―”


 “괜찮아.”


 키사라기 치하야의 걱정을 딱 잘라 부정한다. 걱정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초콜릿이 조금 더 달고, 조금 덜 달고,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직접 먹어보니 확실히 알겠다. 지금 이 상태, 지금의 이 초콜릿이 프로듀서 씨에게 드리기엔 가장 완벽하다.


 “하지만…….‘


 ”괜찮아, 치하야 쨩. 내가 보장할게.“


 아마미 하루카가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 이 정도는 달콤해야, 발렌타인 데이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어차피 달지 않게 만들어도 분명, 이가 녹아버릴 정도일 것이다.


 키사라기 치하야가 프로듀서에게 주는 초콜릿은, 어떻게 만들어도 달콤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0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