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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이시 츠무기] 24.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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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11, 2023 01:01에 작성됨.

24.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니 말이야.



  "츠무기! 츠무기! 기다려!"


  "..."


 신칸센을 타고 카나자와 역에 내리고 기차역 밖으로 나서자, 저만치에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익숙한 인영이 한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은발과 가만히 있어도 드러나는 기품... 정말이지, 그녀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갔지만, 어째서인지 츠무기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츠무기! 기다려 보라니까!"


 말이 들리지 않는 듯이 걸어가기만 하는 츠무기를 뒤따라잡고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멈추게 했다. 하지만 츠무기는 그녀답지 않게 빠른 속도로 어깨 위에 얹힌 손을 쳐내고 휙 뒤돌아서며,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차가운 눈으로 빤히 쳐다보며 노려보았다. 그렇게 냉정하게 올려다보는 츠무기의 위세에 위축이 되어 순간 얼어버렸다. 정말로 보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많았는데. 하지만 얼음같이 냉랭한 시선을 보내는 그녀를 보자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길래 감히 제 몸에 손을 대는 거죠?"


  "츠, 츠무기... 그게 무슨... 나, 나잖아..."


  "저는 당신 같은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뭐, 뭐...?"


 츠무기는 누군지 모른다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보내는 시선에는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것과는 다른 그런 적대감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명한 적의를 가지고 거부하는 츠무기에게 말을 더 걸었다가는 마음에 한번 더 큰 상처를 받을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여기서 놓칠 수는 없었다. 만약 츠무기를 여기서 놓친다면 영원히 이를 후회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츠무기, 제발 부탁이야! 잠깐이라도 좋으니 내 말을..."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에...?"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제 삶이 이렇게 망가져 버리지 않았을 텐데..."


  "츠, 츠무기..."


  "애초에, 당신이 그 전에 죽어버렸으면 됐을 텐데..."


 츠무기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저주를 듣자 기껏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평정심이 점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아, 아냐... 이런 모진 말을 하는 건 츠무기 너가 아냐...! 말도 안돼...!"


  "그럼... 당신이 온갖 모진 말을 해서 저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말이 되고요...? 그렇게 잔인한 말을 하는 사람은 애초에 당신이 맞긴 했나요?"


  "그... 그건..."


 믿을 수가 없었다. 앞에 서 있는 아이가 다른 사람이 상처 받지 않을까 고민하며 말을 신중하게 하는 츠무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츠무기를 바라보자, 비통하게 노려보는 그녀의 눈은 하늘과 같이 푸르른 유리색이 아닌,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와 같은 어두운 파란색이었다.


  "당신이 전에 말했었죠...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고."


  "무, 뭐...!? 나, 나는 너에게 그런 말을 절대 한 적이...!"


  "... 그러니 죽어주세요. 당신의 죄는 당신이 죽어서 속죄해야 하니까요."


 그 말을 하며 츠무기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츠무기가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내밀은 것은...


  "권...총...? 츠, 츠무기... 너 도대체 어떻게 이걸..."


  "..."


 츠무기는 물어보는 말에 답하지 않고는, 받으라는 듯이 계속 총을 손에 들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데, 사고가 정지해버려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십여 초 동안 정적이 흐르자, 츠무기는 입을 열고는,


  "그렇군요... 역시 자기 자신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당신은... 죽기 싫은 거군요..."


  "읏..."


  "당신이 목숨을 내놓기 싫다면... 다른 희생양이 대신 죽어야 하니까요."


 라고 말하며 자신의 관자놀이에 들고 있는 총을 겨누었다.


  "자, 잠깐만... 츠무기, 이게 뭐하자는..."


  "끝까지 당신은 자신이 살기 위해 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군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츠무기..."


  "이런 당신을 지금까지 믿고 따랐다니... 어쩌면, 바보는 당신이 아니라 저였을 지도 모릅니다."


  "츠무기, 제발... 부탁이야...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내 말을..."


  "그럼, 잘 있으세요. 저는 지금까지 당신을 만나 정말로 불행했습니다."


 권총을 스스로에게 겨눌 때부터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던 츠무기는, 이내 어둡고도 어두운 파란 눈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그녀는 지금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비통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역시, 전 이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싫습니다."


  "잠깐만...! 잠깐!!"


  탕!



  상단에 BGM 링크를 첨부하였으니 들으시면서 보시면 좋습니다.



  "츠무기...! 츠무...기..."


 꿈... 이었나. 츠무기가 떠난 이후로 두 가지 꿈을 번갈아 꾸고 있었다. 첫 번째 꿈은 공원의 한적한 벤치에서 츠무기와 함께 앉아있다 그녀에게 고백하는 꿈이고, 두 번째 꿈은 츠무기가 기차역에서 매정하게 거부하며 저주하는 그런 꿈이었다. 어느 꿈이든 깨고 나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만, 저번 주부터 첫 번째 꿈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하아... 지금이... 11시인가...? 퍽이나 늦게 일어났구만."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에 주변을 둘러보자, 정리가 안되고 산만하게 어지럽혀져 있는 방에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는 맥주 캔과 위스키 병이 눈에 들어왔다.


  "쓰읍... 분리수거 하긴 해야 하는데... 나가기 귀찮아..."


 집 바로 앞 편의점에 먹을 거나 필요한 물품 일부를 구매하러 나가는 것을 제외하곤 약 일주일 동안 밖에 나가지 않았다. 집 밖에 나가지 않아 분리수거를 하지 않으니, 집에 수십 개씩 쌓여있는 캔과 병들이 불필요하게 큰 부피를 차지하는 건 둘째 치고 불쾌한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다만, 항상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 나갔다 올 때나 잠에서 깰 때를 제외하면 후각이 금방 적응하여 별 문제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집 정리나... 읏..."


 계속 누워있을 수도 없기에 뭐라도 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도저히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해진 방을 정리하기 위해 쓰레기 봉투에 쓰레기들을 담는 와중, 꿈에서 본 내용들이 머리에 맴돌았다.


  "하... 구제불능에 아무 쓸모도 없는 자식... 너가 대신 죽어버렸어야지... 츠무기 말대로..."


 자기 혐오와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서 들고 있는 맥주 캔을 옆으로 집어던지자, 운이 더럽게도 없는 것인지 뚜껑을 닫지 않은 위스키 병을 쳐 쓰러뜨리고 안에 남아있던 내용물이 조금씩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짜... 되는 것이 없네... 언젠 되는 게 있었냐만..."


 엎질러진 캔과 병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중간 중간에 손이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애써 손을 움직이려 했었지만, 중간에 뭐가 가로막는 듯 움직이지 않는 손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느릿느릿하게 널부러져 있는 난장판을 치우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한탄했다.


  "그 때... 츠무기에게 모진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때... 츠무기에게 따뜻하게 말을 했더라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는 손을 애써 부여잡고, 밀려드는 후회에 압도되기 전에 쓰레기 정리를 이어서 했지만 그게 쉽게 되지는 않았다. 몇 번이고 들고 있는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쓰레기를 치우면서 옆에 세워져 있는 캔이나 병을 쓰러뜨리기 일쑤였다.


  "그 때... 츠무기에게 좀 더 솔직했더라면..."


 하지만 후회한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후회한다고 과거로 되돌아가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건가..."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츠무기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츠무기의 손을 잡아볼 수만 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츠무기를 안아볼 수만 있다면...


  "애초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 이 모양 이 꼴은 아니겠지."


 흘린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입힌 상처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있던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이 당연한 현실이지만 과거로 돌아가서 츠무기에게 했던 잘못을 바꾸고 싶은 소망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술... 다 떨어졌었지 아마. 사러 가기 귀찮은데..."


 며칠 만에 외출을 하기 위해 옷을 대충 걸쳐 입고 쓰레기 봉투들을 들며 나서려는 찰나, 일주일 전에 사무소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사무소에서 모리노 양과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마침 택배가 온 때였다.



  "프로듀서 님~. 프로듀서 님 앞으로 택배가 왔어요~."


  "네? 사무소로 택배 오게 한 건 없는데요?"


  "어디보자~. 여기 발신인이~ '시라이시 츠무기' 라고 적혀있...네요...?"


 하즈키 씨의 말을 듣자, 마음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츠무기한테서... 택배..."


 뭐랄까, 뜬금없다고 해야 할까. 갑자기 츠무기가 택배를 보내는 영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츠무기가 지금까지 무언가를 선물한 적이 없을 뿐더러, 더더욱 오디션을 중도 포기하고 사라진 시점에서 그럴 가능성은 더더욱 낮다. 그렇다는 것은, 이 택배는 선물이 아닌 다른 성격의 무엇일 것이리라. 하지만 개봉하기 전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기에,


  "하즈키 씨, 커터칼 좀 잠시 빌리겠습니다."


  "앗..."


 하즈키 씨와 세 아이돌이 보는 앞에서 커터칼로 택배의 테이프 부분을 조심히 잘라내고는 상자를 열었다. 선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예상과는 다르게 상자 안에는 선물이 들어있긴 했었다.


  "이건... 전에 츠무기의 생일 때... 생일 때 선물로 줬었던..."


 5월 29일, 츠무기가 사무소에 온 지 몇 달 안된 시점이었다. 그때 츠무기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하려고 그녀의 생일을 모르는 척 하다가, 츠무기가 토라지는 모습을 보여줄 때 꺼내서 줬던 선물. 유리 풍경(風鈴)이었다.


  "츠무기..."


 그녀에게 줬던 선물을 조심스레 상자에서 꺼내 들었다. 츠무기의 눈과 같은 푸른 하늘색의 풍경은 평소에도 그녀가 소중히 관리한 것인지 먼지가 전혀 붙어있지 않았다. 그 당시 츠무기는 크게 기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마음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흠이 없는 것으로 봐선 츠무기 본인도 이걸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게 오랜만에 보게 된 풍경을 다시금 보자 예전 일들이 떠올랐지만, 이어 그 생각들은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그럼... 츠무기가 이 풍경을 내게 다시 돌려준 이유는...'


 지금까지 주변에서 두어 번 들을까 말까 한 이야기가 있었다. 헤어지게 된 연인들이 결별하면서 이전에 받았던 선물들을 버리거나, 선물을 줬었던 전 연인에게 다시 돌려주는 경우가 있었다고 들었다.


  '츠무기는... 그렇다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한다 하여도 눈 앞에 있는 풍경이 드러내는 존재감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명확히 했다.


  "츠무... 기..."


 생일을 잊은 줄 알고 삐진 츠무기에게 풍경을 선물로 주던 순간과, 츠무기가 뺨을 때리고는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던 순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선물을 받으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얼떨떨해하는 그녀의 표정과, 보는 사람도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애달프게 슬퍼하는 그녀의 표정이 떠올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츠무... 기... 내... 소중했던..."


 그렇게 몇 초 동안 풍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을까. 츠무기가 사라졌을 때부터 고민을 했지만, 드디어 결심이 섰다. 그 결심을 이행하기 위해, 들고 있던 풍경을 조심스레 상자 안에 넣고는 사장실 문을 거칠게 노크했다.


  "사장님, 들어가겠습니다."


  "음!?"


 사장님의 답변을 채 기다리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LP판을 들고 서 있는 사장님은 갑작스런 재방문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평소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자네. 무슨 일로..."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음... 그, 필요한 내용은 자네에게 다 설명했다고 생각하네만..."


  "사장님. 저 퇴사...가 아니고. 일단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당황한 사장님은 더욱 놀라며,


  "휴, 휴가? 크흠, 자네에게 2주 안에 해야 하는 게 있다는 걸 잊은 것이 아닌가?"


  "좀 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럼,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


 이제 한계다. 이제 무리다. 이제 더 나아갈 수 없다. 더 이상 이 직업을 이어나갈 원동력과 힘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마저 없어진 지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아이돌이 없는 프로듀서는 그 존재 가치마저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황한 사장님에게 휴가에서 언제까지 돌아오겠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휴가를 가겠다고 통보한 뒤에 사장실 문을 닫고 나섰다.


  "저~. 프로듀서 님~?"


  "프로듀서... 님..."


 그러자 하즈키 씨와 세 명의 아이돌들은 걱정되는 듯이 쳐다봤지만, 미안하게도 그들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 정말 죄송했습니다..."


 츠무기가 택배로 보낸 풍경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둔 채, 소지품을 챙기고는 도망치듯 사무소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휴가를 나가고 나서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집에서 폐인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츠무기를 그리워하며 예전 일의 후회만 할 뿐이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키리코... 코가네... 하즈키 씨... 나 같은 게 뭐라고..."


 아이돌들과 하즈키 씨에게 제대로 된 말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도망쳐 나왔지만, 일주일이 약간 넘는 시간 동안 몇 번 집 앞까지 찾아와서는 안부를 물으려고 했다. 세 명에겐 정말 미안하게도 울리는 초인종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걱정이 되는지 주변에서 먹을 걸 이것 저것 사서 현관 앞에 두고 가곤 했다.


  "언젠가 보답하긴 해야지... 다음 주 즈음에 마지막 휴가를 끝내고 사무실에 선물 좀 사들고 가야겠다..."


 천년만년 휴가를 보낼 순 없으니 언젠가 사표를 내기 위해 사무소로 돌아가긴 해야 한다. 일도 하지 않는 주제에 사무소의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면 안되니 말이다. 그러면 이제 283 프로덕션은 원래 있던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다. 인품과 자질이 의심되는 프로듀서 하나가 이젠 없어질 거니까.


  "읏차... 그럼, 나갔다 올까?"


 쓰레기 봉투들을 양 손에 잔뜩 든 채로 신발을 대충 구겨 신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술과 먹을 것만 조금 사올 것이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가끔 사무소에서 누군가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오면 초인종을 누르기에, 아무도 방문했던 낌새가 없었던 오늘은 현관 밖에 아무 것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집을 나서려 하자 현관 옆에 놓여져 있는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이건... 츠무기가 보낸... 택배..."


 하지만 전에 볼 때와는 다르게 택배 상자 위엔 쪽지 하나가 붙어있었다. 대충 휘갈긴 필기체를 보니 멀리서도 선배 프로듀서가 쓴 메모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상자에서 쪽지를 떼내고 거기 써있는 내용을 보니,


 풍경 아래에 편지가 있었는데 네가 못 본 듯 하니 여기 집 앞에 두고 간다.


 라고 쓰여있었다. 확실히, 그때 상자 안에 들어있던 풍경에 온 신경이 집중돼서 다른 것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긴 했었다. 긴가민가했지만, 설마 선배 프로듀서가 이런 걸로 거짓말 할 이유는 없기에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풍경 아래에 편지가 깔려 있었다. 츠무기가 쓴 편지답게 아주 화려하지도 않고 수수한 편지지가 그렇게 선물 아래에 숨어있었다.


  "그럼... 도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 읽어볼까..."


 츠무기는 심성이 고운 아이이기 때문에 차마 원망과 저주를 편지에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받은 상처를 감안하면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는 않을 것이리라. 그렇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편지를 읽으려고 했다.



  프로듀서에게.


 프로듀서. 정말 죄송합니다.



 편지의 서두에 써있는 글을 보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에 치밀었다.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츠무기 네가 죄송하다고 하는 건데..."


 그 누구보다 상냥한 츠무기는 자신이 받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먼저 죄송하다고 했다.


  "츠무기 네가 대체 무슨 잘못을 지었다고..."


 자신이 믿은 사람으로 인해 배신감이 들었어도, 츠무기는 마지막까지 저주는커녕 사과를 했다.


  "그런 순수하고 상냥한 너에게 나는 도대체..."


 후회가 물밀듯 밀려들고 있었다. 후회와 죄책감에 압도되어 눈물이 양 눈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츠무기에게 잘못을 했던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받았을 아픔을 다시금 생각해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난... 츠무기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츠무기는 떠나는 와중에도 사과를 하기 위해 수고스럽게 편지를 써줬는데도.


  "그런 너에게 난... 어떻게 해야..."


 편지를 써준 츠무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츠무기는 이미 떠나버리고 없는데. 그렇게 후회를 하며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흘리던 찰나, 몇 년 전에 어느 누구와 했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너도 이제 그만 후회하는 게 좋아."


  "..."


  "사람이 후회를 왜 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야... 예전에 했던 잘못들 때문... 이지 않습니까?"


  "예전에 했던 잘못을 앞으로 하지 않기 위함이지. 예전에 했던 잘못 때문에 스스로 고꾸라져 있기 위함이 아니라."


 그때도 지금처럼 자존감이 땅을 치던 시절이었다. 전에 했던 잘못으로 인한 죄책감과 후회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던 때였다. 


  "후회에 압도되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기엔 우리의 삶은 짧아. 가만히 있으면,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거든."


  "그럼... 지금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내가 알려줄 수 없어. 너 말고는 아무도 알아낼 수 없는 거거든."


  "..."


  "그러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니 말이야."


 갑자기 이때의 일이 떠오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들은 말이 정답이었다. 예전에 했던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후회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후회라는 감정이 드는 이유는 전에 했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더 나아가서, 지금이라도 고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가능한 모든 수를 쓰는 것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 것이다.



 과거의 회상을 마치고, 눈 앞의 편지를 다시 들어보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앞으로 해야 할 행동이 명확해졌다. 츠무기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해야 한다. 다시 아이돌 활동을 해줄 수 있냐고 부탁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녀에게 했던 모진 행동들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


  "그래. 여기서 절망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으면 평생 후회할 테니까."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둬보지도 않고 집에서 폐인처럼 있을 수는 없다. 들고 있는 쓰레기 봉투들을 집 안의 현관에 그대로 두고는, 옷장으로 가서 옷걸이에 걸려있는 업무용 정장을 꺼내들었다.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매번 입었던, 틈만 나면 소매를 접어서 걷고 넥타이도 대충 매서 츠무기가 때때로 잔소리를 하던 그 정장을 꺼내서 갈아입었다.


  "지금 빨리 준비하고 출발하면 15시 즈음엔 도착할 수 있겠지."


 핸드폰을 꺼내 카나자와로 출발하는 가장 빠른 신칸센 열차가 언제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지 않고 바로 출발하면 못해도 14시에는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14시에 역에서 내리고 츠무기의 아버님께서 운영하는 포목점으로 바로 이동하면 15시 이전일 것이다. 일단 포목점에 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츠무기와 만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되든 간에, 츠무기를 만나야만 한다.


  "그래. 이제 가볼까."


 가만히 있으면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고 기회를 놓쳐버리게 된다. 설령 실패하여 좌절한다 할지라도,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한다. 그러니, 이제 츠무기를 직접 만나러 카나자와를 향해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 역은 언제 봐도 크단 말이지. 카나자와가 깡시골이라고 츠무기를 자주 놀리곤 했었는데..."


 두 시간 반 정도 신칸센을 타고 카나자와 역에 내리자, 거대하고 특이하게 생긴 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쿄만큼은 아니어도 이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답게 카나자와 역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퇴근 시간은 아니어서 사람이 그렇게 붐비지는 않지만, 기모노를 입은 관광객들, 즐거운 듯 수다를 떠는 학생들로 역사에는 활기가 넘쳤다.


  "추억이네... 우연히 카나자와에 왔었다가 츠무기를 봤었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그렇게 예쁘고 재능이 있는 아이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얼마 전까지는 매일 보는 츠무기였기에 당연하게 여긴 것이었지만, 츠무기의 모습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빼어난 외모에 윤기나는 은발, 저 하늘과도 같은 유리색 눈. 가히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할 정도로, 사람들이 수십 수백 명이 서 있어도 츠무기가 돋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래...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츠무기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진 않았지. 머리 색 때문에라도 톡 튀니까."


 이전에 역에서 헤매는 츠무기를 찾을 일이 있었는데, 수색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단박에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부근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다시피한 은발이야 말할 것도 없고, 츠무기에게서 드러나는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정확히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끔 길을 걸어가는 와중에도 저렇게 츠무기가 길을 걷고 있노라면 바로 알아볼 수 있었지... 음?"


 믿기지 않아 여러 번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보이는 저 은발 머리의 소녀를 보고 있는 눈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일 수 있기에. 하지만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저기 역 밖 멀리에서 보이는 츠무기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츠무... 기..."


 츠무기를 못 본지 몇 달이 된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일주일하고 며칠 더 될 뿐이었다. 이 정도의 기간 동안 츠무기를 못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츠무기를 처음 봤을 때에는 다시 그녀와 재회하기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몇 년 만에 그녀를 보는 것과 같이 눈에서 눈물이 고여 시야가 뿌옇게 되기 시작했다.


  "츠무기! 츠무기! 기다려!"


 절대 놓칠 수 없다. 츠무기를 다시 한번 만나야 한다. 그녀에게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어리석은 고집일 수도 있다. 개인적인 욕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비난을 듣더라도, 다른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더라도 여기서 멈출 수 없다. 그러기에 그녀의 이름을 간절히 외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역 밖에 나서자, 하늘은 언제든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먹구름이 잔뜩 흐리게 껴있었다. 카나자와는, 비가 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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