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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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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03, 2014 19:27에 작성됨.

(히비타카 글입니다, 백합에 내성이 없으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저기, 타카네?”
 “무슨 일이신지요, 히비키.”
 성에가 가득 낀 창문 너머로 어렴풋하게 흩날리는 눈이 보인다. 구름에 가렸지만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햇빛이 눈을 반짝이게 하며, 뿌연 창문을 뚫고 그 존재감을 빛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코타츠 안에 굳은 듯이 앉아 이따금 안경을 추켜올리며 책을 보고 있는 타카네와, 코타츠 밖으로 상체만 빼놓은 채 누워서 햄조에게 해바라기 씨를 연신 먹여주고 있는 히비키가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스케줄을 원망하며, 아니. 어쩌면 둘 중 누군가는, 아니면 둘 모두 이런 상황에 고마워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기분이었든, 이런 날에는 누군가의 집에 모여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두 사람에겐 하나의 낙이었다.
 “가끔은 밖에도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히비키, 한파를 피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는지요.”
 분명 자신이 ‘추우니까 오늘은 타카네의 코타츠를 빌리겠다고!’ 라고 말하며 들이닥쳤던 것이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 히비키는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그, 그치만! 오래간만의 휴일인데, 집에만 있으면 분명 후회할 거라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바닥에 대고 오물거리며 말하는 히비키를 보고, 타카네는 소리내어 웃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귀까지 빨개진 채 코타츠 안에서 바둥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코타츠의 난로보다도 새빨간 색으로 변해 있으리라. 둘의 다리가 코타츠 안에서 엉켜갈 즈음, 타카네는 안경을 추켜올린 뒤 읽던 책에 책갈피를 끼워넣고, 엉킨 다리를 낑낑거리며 빼낸 뒤 코타츠에서 일어났다. 히비키가 바닥에 데드마스크를 찍을 듯이 묻었던 얼굴을 슬쩍 들어올려 일어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다시 웃었다.
 “히비키는 여전히 서툴군요. 후후.”
 “우갸-! 타카네는 심술쟁이라고!”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조심스레 벗어놓은 채, 타카네는 주섬주섬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저기, 타카네?”
 “무슨 일이신지요, 히비키.”
 “우리, 변장이 너무 단순하지 않아?”
 어쨌든 방송에 꾸준히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둘이었기에, 사람이 많든 적든 변장을 하는 게 습관이 된 둘이었지만, 변장을 하는 기술은 아직도 한참 발전이 필요한 모양이다. 타카네는 검은 롱코트에 안경을 쓰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었을 뿐이고, 히비키는 묶은 머리를 푼 채 차이나코트의 깃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것이 변장의 전부였다.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이라도 눈치챌 법한 허술한 변장이었지만, 근방에 사람이 거의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녀들이 아직 그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은 것인지, 아직까지 그녀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알아보는 자가 없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건 그것대로 좀 신경이 쓰인다고.”
 타카네는 불안한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히비키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머리에 전구가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히비키를 불렀다.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합니다.”
 “왜?”
 “이 넓은 세계에, 둘만 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지 않겠어요?”
 히비키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웃거릴 뿐이었다. 타카네는 멍하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뒤에 남겨둔 채 먼저 앞으로 향했고, 같이 가자며 뒤에서 따라오는 히비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저기, 타카네?”
 “무슨 일이신지요. 히비키.”
 가게 문에 달린 주렴 너머로 여전히 눈은 새하얀 모습을 드문드문 드러내었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게 안에서는 연기가 여기저기서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주방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이리저리 치솟으며 육수를 끓이고 면을 삶아내며, 챠슈를 익혀낸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후루룩거리는 소리. 타카네는 조용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그 모든 것들을 음미하며 라멘이 완성되어 자신의 앞에 도달하는 것을 기쁘게 기다리고 있었다. 라멘을 먹는 것보다 라멘을 먹는 타카네를 보는 것이 더 즐거운 히비키는 그녀의 옆에 앉은 채 타카네보다는 약한 기대감으로 같은 라멘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같이 외출했는데, 라멘은 그만 먹었으면 했다고.”
 “좋지 않사옵니까. 라멘은 일본의 문화의 상징이랍니다.”
 그녀의 말과 거의 동시에, 주방장의 격한 동의의 말과 함께 그녀의 앞으로 진한 돈코츠 라멘이 도착했다. 그녀는 옆머리를 쓸어 넘기려다, 자신이 오늘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었다는 것을 깨닫고 왼손을 내린 채 젓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비키는 질렸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시킨 라멘이 도착하자 젓가락부터 급하게 움직이다가 풀었던 머리를 라멘 국물에 빠트릴 뻔하였다. 머리를 간신히 정리하고 조심스럽게 라멘을 먹던 히비키는, 옆에서 성에가 낄까 안경을 벗어둔 채 라멘을 먹고 있는 타카네의 머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타카네는 왜 평소엔 머리를 안 묶는 거야?”
 “이미-지라는 것 때문이라고, 프로듀서가 말하시더군요.”
 ‘은색의 왕녀’ 라는 그녀의 타이틀은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칼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다. 타카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사무소 나름의 세일즈 포인트가 그녀의 머리카락이기 때문에, 아마 그녀의 머리가 다른 식으로 묶이는 일은 적어도 방송에서는 없지 않을까. 히비키는 덕분에 그녀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없다는 것에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라멘을 입에 물었다.
 “가끔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예쁠 텐데 말이지.”
 “그러는 히비키야말로, 포니-테일 대신 그렇게 길게 하고 다니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푸어학?!?”
 그리고 그 라면을 고스란히 다시 그릇 속으로 떨어트리며, 히비키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타카네를 보았지만, 그녀는 히비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라멘에 집중할 뿐이었다.

 “저기, 타카네?”
 “무슨 일이신지요. 히비키.”
 “너무 춥지 않아?”
 눈발이 점점 약해지며 해가 구름 너머로 조금씩 수줍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바람은 그치지 않고 추위를 불러와 거리를 돌아다니려는 사람들에게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공원 한복판에 서서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에게도 그 심술은 이어졌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눈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을 구경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그 심술이 제대로 먹혀들고 있었다.
 “추운데도 나오자고 하였던 건 히비키가 아닌지?”
 “그, 그랬긴 하지만 말이지.”
 추위는 크게 신경쓰지 않은 채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웃으며 지켜보고 있는 타카네와는 달리, 히비키는 장갑이 없는 맨손에 입김을 연신 불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히비키, 많이 추우면 집으로 돌아갈까요?”
 “우갸-! 그건 됐다고! 잠깐 여기서 기다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람처럼 어디론가 달려가는 히비키의 뒷모습을 타카네는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잠깐 기다리라는 그녀의 말이 없었다면 아마 너무 추운 나머지 도망가는 줄 알았을 정도로 재빠른 달리기였다. 아마 히비키가 그녀를 두고 혼자 집에 가는 일은 없겠지. 타카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아이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마 그녀도 춥지 않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히비키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으니 그녀로써는 드물게, ‘짓궂은’ 행동을 해 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으리라. 눈앞의 아이들의 웃고 우는 모습을 히비키와 오버랩하며, 그녀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 때 그녀의 등에서 가벼운 충격이 느껴지나 싶더니, 그녀의 앞으로 캔커피를 쥔 두 개의 손이 슬쩍 자리를 잡았다.
 “히비키?”
 “추우니까 타카네 좀 빌릴게!”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채 날개뼈에 얼굴을 부비는 히비키의 감촉을 느끼며, 타카네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 하나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히비키는 그녀가 커피를 잡지 못하도록 손을 버둥거렸다.
 “손이 시려서 사 온 거지, 타카네를 주려고 사온 게 아니라고!”
 “이런, 그럼 둘 다 히비키가 마실 건가요?”
 히비키는 대답 없이 캔커피를 쥔 손을 코트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타카네의 코트 주머니 안으로.
 “히비키?”
 “손이 시리다고 했잖아?”
 “그러시다면 히비키의 외투 주머니에 넣는 것이 편리하지 않겠어요?”
 히비키가 그녀를 끌어안는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등에 얼굴을 파묻은 히비키의 얼굴을 타카네는 볼 수 없었지만, 코트 너머에서부터 날개뼈를 타고 전해져 오는 온기가, 그녀가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음을 짐작케 하였다.
 “돼, 됐으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불편하니까!”
 등에 닿는 뜨거움을 느끼며 타카네는 소리내어 웃으며, 히비키의 손이 걸리지 않도록 앞으로 다소곳하게 모았던 손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 캔커피를 감싼 히비키의 손을 살짝 감싸잡았다. 잠깐 손을 움찔거리던 히비키는 곧 가만히 그녀의 손바닥을 느끼기 시작했다.
 “따뜻하네요, 히비키.”
 히비키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느새 나란히 선 두 개의 눈사람이 만들어지고, 눈사람에게 줄 옷가지를 찾기 위해 아이들이 떠나고 나자 공원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저기, 타카네?”
 “무슨 일이신지요, 히비키.”
 “머리, 잠깐만 풀어주지 않을래?”
 그녀는 한쪽 손을 주머니에서 빼어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은발의 긴 머리가 눈처럼 흩날려, 히비키의 머리를 감쌌다. 마치 히비키의 검은 머리 위로 눈이 쌓인 듯한 모습이었다.
 “이제 진짜 따뜻하다고!”
 “후후, 그것은 다행이네요.”
 히비키의 따뜻함을 계속 보기 위해서라도, 은발의 왕녀는 겨울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잠시 생각한 이후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태양이란 것은 원래 사시사철 빛나니까. 그녀의 마음에 구름을 드리우지 않는 한, 그녀는 계속 따뜻한 모습으로 자신의 옆에서 빛나줄 것이라고 타카네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기, 타카네?”
 “무슨 일이신지요. 히비키.”
 “왜 이런 자세로 서 있는 건지 설명해주지 않을래?”
 운 나쁘게 러시아워가 겹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 두 사람이었고, 행여나 서로 떨어질까 절대 손을 놓지 않고 간신히 지하철 문 구석으로 자리를 잡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사람들에게 계속 밀리며 구석으로 밀려들어가다 보니 타카네가 히비키를 뒤에서 껴안다시피 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앞으로 네 정거장만 더 지나면 됩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히비키.”
 “불편하다는 건 아닌데 말이지…….”
 히비키의 머리에 턱을 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녀였기에, 히비키는 자존심 비슷한 무언가가 상하는 기분을 느꼈다. 자존심이라기엔 조금 쪼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타카네가 자신보다 크다는 것에 알 수 없는 분함을 느꼈다. 키만 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히비키도, 방금 전에 저를 이런 식으로 안아주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말하지 말라고!”
 그런 부분에서의 자각이 없는 타카네를 원망할 수밖에 없는 히비키였다. 옆에 앉은 채 수다를 떨던 아주머니들이 자신들을 새로운 대화의 주제로 만들려는 듯한 말들이 들려오자, 그녀는 또 다시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타카네는 그녀의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히비키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이 마당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제는 더 이상 몰릴 피도 없을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카네는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히비키.”
 “왜, 타카네?”
 어느새 처음 출발했던 곳인 타카네의 집 근처에 도착한 두 사람은, 거의 그쳐가는 눈을 맞으며 집을 향하고 있었다. 어느새 바람도 거의 그쳐가고, 해는 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었다. 겨울 낮에 보기 드문 석양이 드리운 늦은 오후도 이제 거으 끝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응? 내가 뭐 한 게 있었나?”
 그나마 조금씩 떨어지던 눈이 완전히 그치고, 태양이 지평선 끝자락에 살짝 걸쳐진 채 밤의 시작을 알리려 할 즈음이 되어서야 그들은 집에 도착했다. 타카네는 집을 향하겠지만, 히비키는 아직 조금 더 걸어야 한다. 현관을 눈앞에 두고, 둘은 멈춰섰다.
 “확실히, 특별히 히비키가 저에게 무언가 해 준 것은 아닙니다만.”
 “타카네, 말을 안 하면 무슨 소린지 모른다고…….”
 석양을 등진 채, 타카네는 만면 가득 미소를 띄우며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톱 시크릿… 이옵니다.”
 그 모습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던 히비키는, 결국 그녀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걸 늦게야 깨달았다.
 “우갸-! 치사하게 나한테까지 그럴 거야?!”
 “후후후, 또 뵙도록 해요, 히비키.”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타카네가 현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둘은 손을 흔들었다. 타카네는 문을 닫고 옷걸이에 코트를 걸치며, 주머니에 든 캔커피를 꺼내며 웃었다. 히비키는 한참이나 그녀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후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주머니 안에는 아직 따뜻한 캔커피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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