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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 한섭 망한지 1년쯤 돼서 우울해서 쓴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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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16, 2023 17:09에 작성됨.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절대로 모릅니다.

 

보이 미츠 걸이라는 클리셰가 왜 클리셰가 되었는지 또한 앞에 말한 바로 설명이 됩니다. 만남은 어떠한 일의 기폭제가 되지만, 그 어떠한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도 알 수 없고 때론 이미 일어난 예전의 일조차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대신 부재하게 된다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관계의 끝. 단절. 삶의 한 에피소드가 끝나게 됩니다.

 

"유리코씨... 수고했어요..."

 

", ."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요. 서로 못 본다고 해서 단절되는 것이 어디 있나. 한 사람이 관계를 그리워하며 잊지 않는다면 언젠간 다시 이어진다는 낭만적인 일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있잖아. 안나쨩. ..."

 

"...."

 

"...역시 아니야. 안나쨩. 그냥 집에 갈 거지?"

 

"...같이 게임... 할래...?"

 

안나쨩이 같이 게임을 하자고 합니다. 안나쨩은 약 3일 간의 간격마다 게임을 하러 가자고 말을 하고, 저는 네 번의 한번 꼴로 거절을 해요. 흘러가는 루틴이 익숙해서 이런 것까지 어느새 기억이 나기 시작했어요.


"아냐. 괜찮아."

 

프로듀서씨가 있을 땐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프로듀서씨가 사라진지 오늘로 1년이 되었습니다. 아니요. 좀 더 됐지요. 유명한 구절을 빌려봅시다. 오늘 프로듀서가 사라졌습니다. 아니면 어제였나. 잘 모르겠습니다.

 

프로듀서씨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나나오 유리코라는 사람은 프로듀서씨의 손에 이끌려서 아이돌이 되었거든요. 낯가림이 심한 제가 사람들 앞에 서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방송에도 나가고, 많이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습니다.

 

분명 겪은 일은 셀 수없이 많았고, 느낀 감정도 많았지만, 인생의 곡절이란 단어의 나열로만은 표현 못할 것 같아서 이를 다 늘어놓는 것 만으로 그걸 재현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던 8월의 어느 날이었어요. 시어터에 프로듀서씨가 출근하지 않았어요. 다들 프로듀서씨가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하루의 바퀴는 정말 놀라울 만큼 어긋나지 않고 돌아갔어요. 저는 프로듀서씨가 없이 영업을 하러 갔고, 안나쨩은 라이브를 하러 갔고, 다들 자신의 일정을 위해서 어딘가로 갔고... 프로듀서씨는 다음 날에도 오지 않았어요.

 

다음 주, 다음 달에도요. 펭귄은 추운 남극바람으로부터 서로 무리짓고 뭉치고 부대껴서 서로의 온기를 맞대며 살아남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펭귄과는 다릅니다. 사람의 무리는 펭귄보다 훨씬 크고 두터워 보이지만,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뭉치고 무리짓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 온기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세명이 채 되지가 않아요.

 

그 세 명 중 한 명이라도 사라진다면, 다가오는 추위는 훨씬 더 쑤시고 아리고 시리게 됩니다. 베겟머리에서 이불을 부여잡고 엉엉 울기도 하고, 하루종일 심란하게 지내기도 했습니다. 아니, 심란하기야 지금도 심란합니다.

 

프로듀서씨가 어디 갔냐는 질문도 해봤지만, 어디로 갔다, 사라졌다, 아니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는, 제가 원하는 그럴싸한 답변조차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장님은 프로듀서가 안 보이는 건 어쩔수가 없고, 불가항력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진짜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리츠코씨가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에요.

 

우리중에서 프로듀서씨를 만날 수 있는, 아니,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얼마 안되는 사람인 레이카씨랑 타카네씨는 둘 다 프로듀서씨는 잠에 드셨다고만 해요.

 

언제 깨어나냐고 물으니까 그건 모르겠다고 했어요. 얼마나 깊은 잠인지, 잠이 문자 그대로의 잠인지, 아니면 함의가 있는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어요.

 

프로듀서씨에 대해서 저는 나름대로 많은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프로듀서씨가 숨긴 비밀도 조금쯤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프로듀서씨에 관해서 단언할 수 있는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프로듀서씨는 아직까지 극장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럼에도 극장은 잘만 돌아갔고, 저도 모든 활동을 아무런 지장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음 날은 또 왔고, 극장으로 가니 프로듀서씨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곗바늘은 움직이고, 해는 차고 기웁니다. 오늘은 제 솔로 라이브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투명한 프롤로그와 공상문학소녀를 부르고, 그 외 제가 속했던 여러 유닛의 곡들을 저 혼자서 부르기로 했습니다.

 

의상이 어떤지를 체크해줄 사람도 없이 저 혼자서 의상을 입고 준비한 뒤 대기실로 갔고,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서 대기하다가 무대로 가서 익숙한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이 세상은 참 신기한 곳입니다.

 

듣던 노래를 계속 들어도 팬분들은 환호를 해 줍니다. 보았던 안무를 계속 보아도 팬분들은 응원봉을 흔들어주었고, 중간의 쉬는 멘트가 몇번 겹치는 부분이 있어도 팬분들은 늘 크게 호응해주었습니다. 제가 같은 책을 읽고 또 읽는 것과 비슷한 심정인 것 같지만, 그렇다기엔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그런 이질감을 생각할 순 없었습니다. 무대 뒤에서 그 이질감을 떠올리기엔 그 이질감이 너무 휘발적이라 다시 잡으려 하니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무대 뒤편으로 가서 이젠 얼마 느껴지지 않는 여운을 느끼려고 가만히 서 있자니, 지금 저의 옆에 가득한 이 빈자리가 너무나 의외인 것 처럼 느껴집니다.

 

라이브가 끝났을 때, 제 옆에서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줄 사람이 없고, 영업이 끝나고 나면 요즘 재밌게 읽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말할 사람이 없고, 아침에 극장 건물을 열고 마중나올 사람이 없고, 늘 저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 없습니다.

 

분명 내가 아는 나라면, 나나오 유리코가 기억하는 나나오 유리코라는 사람은 분명 이 사실을 기억하고 나서는 울어야 했겠지만, 눈물이 나오지가 않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고 나니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나 소중했던 존재가 이렇게나 버려질 수가 있나 생각을 해봐도, 프로듀서를 버렸다기엔 그 빈자리가 아직도 큽니다. 하지만, 빈자리는 크기만 할 뿐,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서 제가 무언가를 하는 데 더이상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답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저에게는 앞으로 할 일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았어요. 저는 지금도 라이브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나나오 유리코라는 아이돌은 TV에도 나오고 라디오에도 나오고 광고에도 나오고 있는걸요.

 

저는 지금 모든 것을 가졌어요. 적어도 제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은요. 프로듀서씨가 저에게 안겨주려고 했던 모든 것들을요.

 

프로듀서씨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다보니, 프로듀서씨의 이름이 뭐였던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자리에서 계속 머리를 쥐어짜봤지만... 기억이 안 나네요.

 

그렇네요. 나나오 유리코라는 이름은 있지만. 프로듀서씨는 유리코라는 이름을 계속 불러줬지만, 전 프로듀서씨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네요. 프로듀서씨라고만 불렀어요. 생각해보니 프로듀서씨가 저에게 이름을 불러준 적이 있었던지도 기억이 안 나요.

 

그러면서도 저는 또 프로듀서씨가 혹시라도 제 눈 앞에 안 보이는 어디 있을까 해서 눈을 꾹 감았다 떴어요.

 

다시 한번 빈 자리를 살펴보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가 않아요. 웃음도 안 나오고, 울음도 안 나오고, 놀라지도 않고, 화도 안나고, 그렇게 아무것도 안 느끼는 이런 스스로에게 질리지도 않았어요.

 

전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어요.












한섭 섭종 소식이 들린지 1년이 좀 넘었습니다.

 

P가 사라진다고 해도 시어터속 세계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살아있지 않을까. 다들 계속 라이브도 하고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그러다가 잠들고. 다시 깨어나고. 그러지 않을까 싶었어요.

 

이건 한섭을 위한 일종의 씻김굿 같은 것입니다. 씻김굿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레퀴엠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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