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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입거리 티타임)5. 어둠 속의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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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7, 2022 01:04에 작성됨.

모두 안녕. 내 이름은 스오 모모코, 19살 난 여배우이자 아이돌이야.

응? 11살 아니었냐고? 나 참, 대체 기억이 어느 때에 머물러 있는 거야? 당신들이 기억하는 모습을 벗어난 지 벌써 8년이나 지났어. 뇌내 타임라인 업데이트 좀 해.


뭐, 다른 건 됐고. 나는 지금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혼자 히로시마의 어느 바다로 가고 있어. 혼자 말이야. 여름이 끝나서 철 지나버린 바다로 향하고 있지. 나의 이 여행에 딱히 목적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야. 촬영이나 로케, 기타 스케줄 때문에 바다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냥, 갑자기 가고 싶어졌어.

게다가, 사실 어느 바다로 가고 있는 건지도 잘 몰라. 그저 괜찮은 해안가가 있다고 하니까 가는 거지. 물론 해안가에 이름이 있기야 하겠지만, 기억도 안 나. 이름 같은 게 뭐가 중요해? 바다이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래도 한 가지 기억나는 건, 그 바다가 다른 섬들이랑 인접해 있다는 것 정도? 그럼 아마 남부 지역의 해안가겠네.


출발할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특별히 말할 사람도 없고. 설령 그런 사람이 있어서 말하기라도 한다면, 주변에서는 걱정을 무척 많이 해. 내 유명세에 혼자 어딜 간다는 게 마냥 전망이 밝기만 한 일은 아니니까. 혹여 사생팬에 의해 해코지당한다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이유로 다친다거나 하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

그렇게 걱정해주는 게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지치거든. 나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까 내 앞가림은 스스로 잘 할 수 있다고. 그냥 잘 다녀오라고 말해주는 게 나로서는 편해.


혼자 가면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겠냐고? 상관없어. 적어도 지금은 나 혼자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니까. 다른 사람이랑 같이 가면 외롭지 않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야. 괜히 부담된다고나 해야 할까. 그러니까 나 혼자 가고 있는 거야. 아무와도 만나지 않을 거고.



기차는 쉼 없이 달려가고 있어.

아침 7시 반에 열차에 탔는데, 10시가 다 되어가도록 달리는 중이야. 히로시마가 이렇게 먼 곳이었던가? 너무 오래 걸리니까, 핸드폰으로 기차 노선도를 찾아보았어.


"도쿄에서…. 히로시마까지…."


그렇게 찾아보니까, 대략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네. 지금까지 왔던 만큼 더 걸리는구나.

그럼 눈 좀 붙여야겠어. 최근까지 바쁘게 스케줄을 해오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잠이 부족해지고 말았거든. 지금이라도 자둬야 나중에 더 피곤하지 않을 것 같아. 게다가 어차피 히로시마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전철이나 버스도 몇 번 더 타야 하거든.

그러니까, 조금만 자고 있을게.



그렇게 생각하고 커튼을 친 뒤 눈을 붙인 게 불과 몇 분 전의 일 같은데, 눈을 떠보니 어느새 히로시마역에 도착해 있었어. 잠도 많이 못 잔 것 같은데, 이럴 때만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란 말이야….

살짝 비몽사몽 한 눈으로 짐을 챙긴 뒤(사실 짐도 가방 하나 말고는 별로 없지만), 플랫폼에 내려서 쿠레 선이 있는 곳으로 향했어. 거기서 JR 서일본 전철을 타야 목적지로 갈 수 있어. 정확히는 중간에 카이타이치에서 또 갈아타야 하지만.


"엄청 복잡하고 머네…. 20살 되면 제일 먼저 면허부터 딴다…!"


극장의 지반을 다진 아스팔트보다 더 굳게 다짐했어. 이거 진짜 차 안 쓰면 돈은 돈대로 나가고 시간은 시간대로 걸리잖아!

사실 이 정도의 걸리적거림을 모르진 않았어. 원래 일본의 지하철 노선은 여기저기 엉켜있기로 유명하니까. 다만 실제로 경험해보니 느낌이 또 다르네. 특히나 도쿄 전철이 아니라 지방 도시 전철이니까 더더욱 그런 것 같아. 이런 복잡한 노선을 이용하며 출근하는 사회인들에게 경의를.


아무튼 그건 그거고, 빨리 전철을 타야겠어. 아키지 라이너를 타면 2개의 역을 패스하고 바로 카이타이치로 가니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거야.

해서 빨리 산요본선 히로시마역 플랫폼으로 달려갔어. 빨리 가야 조금 기다릴지언정 늦지는 않을 테니까.


서둘러 걸음을 옮기면서 지하철 노선 시간표를 확인하는데, 문득 한 가지 정보가 눈에 띄었어. 카이타이치에서 갈아타지 않아도, 처음부터 쿠레 선을 타면 곧바로 목적지까지 간다고 하네?


"뭐야, 쿠레 선 타면 되는 거였어?! 중간에 갈아탈 필요 없이?!"


진작에 이걸 타야 했어. 하마터면 괜한 시간 낭비할 뻔했잖아.

그래도, 조금 빨리 가야겠어. 곧 있으면 열차가 도착한다고 하네.


걸음을 서둘러서 역사로 향했고, 딱 맞춰서 쿠레 선 전철을 탈 수 있었어. 우연의 일치인지 타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고, 나도 편하게 의자에 앉아 갈 수 있었지. 지금부터는 다시 한번 오랜 시간 동안 기차 여행을 떠나는 거야. 내 홀로여행의 목적지는 쿠레 선의 거의 끝자락이니까.


분명히 아까 다 잤다고 생각했었는데, 피로를 미처 다 못 풀었는지 좌석에 앉아서 한 정거장을 지나자마자 눈이 감겨왔어. 물론 지나야 하는 역은 많고 시간도 조금 걸릴 테니 잠깐 잠들어도 안 될 건 없지만, 혹시 소매치기가 지갑이라도 훔쳐 가면 어쩌나 싶어서 편히 눈 감고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아. 


결국 지갑이 든 주머니를 강하게 누른 채, 눈을 감고 얕은 수면을 취했어.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언제라도 깰 수 있게 말이야.

다행히도 긴 시간 동안 내 지갑이나 핸드폰, 가방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고, 덕분에 나는 마음 놓고 전철을 탈 수 있었어.



내가 얕은 렘수면에서 깨어났을 땐, 열차가 히가시히로시마의 카자하야 역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어.


"카자하야...아직 좀 남았네…."


전철 안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어. 그동안 많이 타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중간에 내린 건지.

도착할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다시 눈을 좀 붙일까 싶기도 했지만, 피로는 이미 다 풀렸고, 이제 더는 잠이 안 오네.


'...잘 자버렸다.'


보통은 `잘 잤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이상하게 `잘 자버렸다`라고 생각했어. 소위 말하는 '쾌면당한' 셈이지.


이대로 멍때리고 있기도 좀 그러니, 핸드폰을 켜서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어. 밀리언 블로그에는 동료 아이돌들의 소식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왠지 모를 격세지감을 느꼈어. 다들 예전과는 확실히 많이 달라졌거든. 더는 옛날의 그 사람들이 아니야.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옛날에 비해 많이 컸대. 아마 키 얘기겠지.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만큼 당연하겠지만, 확실히 나도 옛날 모습에 비해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게 느껴져.

게다가 성격적으로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 어렸을 때는 누구에게든 까칠하게 대하면서 연예계 선배로서의 모습을 중시했었는데, 정작 나보다 선배인 사람들은 나처럼 하지 않더라고. 나만 너무 자존심 세운 건가 싶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 때, 내가 변하게 된 것 같아. 몸과 정신 모두가 어른스럽게 변해가고,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된 것 같아. 그러면 지금의 나는, 당신들의 기억에서 벗어난 나는, 어른이 되었을까?



"이번 역은 타다노우미, 타다노우미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어른의 관한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가 내려야 할 역에 가까워졌어. 


"이제 내려야겠네…."


오랫동안 앉아있다 보니까, 다리가 뻐근해. 열차가 플랫폼에 서고 문이 열릴 때 내리면서 느낀 거지만, 순간적으로 내 다리가 나무토막이 된 줄 알았어. 걷는데 감각이 전혀 없더라고. 배우로 활동하면서 오랜 시간 앉아서 연기해온 덕분에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타다노우미 역 바깥으로 나오니, 작고 평범한 주택단지들이 눈앞에 펼쳐졌어. 이렇게 보니 타다노우미 역도 역사라기보다는 동네 마을회관 같은 느낌이네. 모르는 상태로 보면 전철역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아.

주택단지를 5분 정도 걸어가다 보니, 페리 선착장으로 가는 길목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였어. 나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해. 내가 가야 하는 목적지는 페리를 타고 가야만 도착할 수 있거든. 기차나 전철은 이전에도 많이 타봤는데, 페리는 연기 활동할 때조차도 타본 적이 없어. 오늘 처음 타보는 거야. 그래서인지 더 기대되고 있어.


아마 여러분들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도대체 목적지가 어디기에 이렇게도 먼 길을 가는 거야?'


음, 혹시 오쿠노시마라고 알고 있어? 히로시마 밑에 있는 작은 섬이야. 일본 본토인 혼슈를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섬으로는 오미시마가 있지.

그곳에는 왜 가는 거냐고? 사실 오쿠노시마에는 '토끼섬'이라는 이명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토끼가 아주 많이 살고 있어. 그 토끼들을 보고 싶은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거야. 단 하루라도 좋으니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바닷가에서, 해안가에서, 많은 토끼 사이에서 힐링을 받고 싶은걸. 그리고, 그러기 위해 이곳에 왔는걸.


10분 정도 더 걸어서, 페리 선착장에 도착했어. 페리 탑승을 위해서는 승차권을 사야 한다는데, 이거 대체 어디서 사야 하는 거야?


"여긴 또 처음이라…. 딱히 매표소 같은 곳도 보이지 않고…."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면서 찾아봐도 매표소는커녕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보이지 않았어.


`어떻게 된 거지….`


결국 나 혼자 두리번거리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게 더 낫겠다 싶었어. 마침 근처에 카페도 있겠다, 카페 종업원에게 물어보기로 했지.

해서 `래빗 아일랜드`라는 이름의 건물로 들어갔어. 근데 카페인 줄 알았는데 카페가 아니더라고. 토끼의 먹이를 비롯해 갖가지 기념품들을 팔고 있는 잡화점이었어. 게다가 토끼 먹이가 진열된 서랍장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있더라고.


[오쿠노시마에 입장하시기 위해서는 토끼의 먹이를 구매하시는 것이 필수입니다]


확실히, 토끼들의 섬이니만큼 터줏대감들에게 바칠 공물을 구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지.


"아니, 그나저나 토끼 먹이는 토끼 먹이고, 티켓은 대체 어디서 파는 거야?"


하며 고개를 드는데, 사람들이 키오스크 앞에 줄을 서 있었어.


"뭐지, 저게? 뭐길래 줄을 서 있는 거야?"


해서 봤는데, 난토, 저게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티켓판매기였어!


"여기 있었네…. 아까는 괜히 힘만 뺐어."


어쨌거나, 이제 승차권을 구매해야겠지. 사람들을 따라 줄을 섰어. 2분에 한 번씩 앞으로 갈 수 있었고, 10분 정도 지나서야 가는 데 310엔, 왕복 620엔을 내고 승차권을 구매할 수 있었어. 티켓 발권받은 김에 토끼의 먹이들도 같이 샀었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더라고. 토끼도 그만큼 많은 거겠지.


잡화점 바깥, 그리고 선착장 옆에 있는 대기실에서 페리가 오기를 기다렸어. 아침에는 30~40분 간격으로, 오후에는 시간대별로 15분에서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대. 다행히도 나는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어. 대략 10분 정도를 기다리니 페리가 도착하더라고.


"빨리 왔네. 타이밍이 좋았어."


나처럼 페리에 탑승하려는 승객들을 따라 줄을 섰고, 승차권을 확인받은 뒤 탑승했어. 겉에는 작은 유람선처럼 되어 있었는데, 안쪽은 버스 내지는 케이블카 같았어. 페리를 처음 타보는 나로서는 모든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지.


탑승객들이 모두 승선하고 입구가 닫히자, 본격적으로 페리가 출발하기 시작했어.


"드디어 출발한다!"


난생처음으로 출항하는 페리에, 나는 몹시 흥분하고 말았어. 예전 같았으면 그런 내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 최대한 안 그런 척했을 텐데, 지금은 주변인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흥분했지.


페리가 히로시마의 타다노우미를 떠나 물살을 가르며 오쿠노시마 섬으로 향했어. 오쿠노시마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미리 잡아둔) 호텔 숙소로 가서 짐을 푼 뒤, 토끼들을 만나러 가야겠네. 토끼섬 오쿠노시마에 와서 토끼를 만나지 않는다는 건 바보같은 일이니까.



10여 분간의 질주 끝에, 페리는 오쿠노시마 섬에 도착했어.


[토끼들의 낙원 오쿠노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내리실 때 두고 내리시는 물건 없는지 확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나도 짐을 챙긴 뒤, 페리에서 내려 뭍을 밟았고, 이정표를 따라 호텔행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어.

버스를 타고 호텔까지 가는 길에서부터


호텔에 도착해서는 제일 먼저 숙소 체크 인을 했어.


"저 306호 예약했던 사람인데요."


"아, 네~스오 모모코 고객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네, 여기 스페어 키 드릴 테니까, 이걸로 방의 불을 켜시면 되고, 비밀번호는 스페어 키 옆에 적혀 있으니 입력하시면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스페어 키를 건네받은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예약한 객실로 들어갔어. 호화롭다거나 고급스럽다거나 하는 방은 아니었지만, 나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지.


"뭐, 나름 괜찮은 곳이네."


침대 옆 의자에 가방을 올려놓은 뒤, 핸드폰과 토끼 먹이가 담긴 봉투를 챙겨 호텔 바깥으로 나왔어. 호텔 앞의 자전거 대여소에서 600엔 정도 내고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는데, 지금은 그다지 자전거 타고 싶은 마음은 안 들어. 게다가 이 화창한 날씨와 맑은 하늘, 시원한 바람, 정해진 길 없이 그냥 걸어도 좋을 것 같아.


호텔 앞을 나서자마자 토끼들의 습격을 받고 말았어. 밝은 갈색 털을 가진 토끼들이 짧은 다리를 이용해 뛰어오지 뭐야. 내 주위에 붙어서 북슬북슬한 털이 내 다리를 간지럽혔어.


"아하핫, 간지러워."


몸을 숙여 토끼 한 마리를 안아 들었어. 내게 안겨서 고롱거리는 토끼, 정말로 귀엽네. 아기 한 명 안고 있는 것 같아. 이제 겨우 호텔 앞에서 몇 마리 만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어! 분명 외곽 쪽으로 나가면 지금보다 더 많은 토끼가 있을 텐데, 그때는 정말 기분 좋아서 어떻게 해?!


이 토끼들은 나를 따라다니곤 해. 내가 앞으로 가면 토끼들도 앞으로 뛰어가고, 내가 발길을 돌리면 토끼들도 몸을 돌렸지. 물론 나에게만 그런 건 아닐 거야. 내가 아니라 다른 관광객들과 만났더라도, 그렇게 잘 따랐을 거고. 그래도 좋아. 이렇게 귀엽고 북슬북슬한 토끼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정말 성불할 것 같아. 아리사 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걸.


내 품에서 고롱거리는 토끼를 내려놓은 뒤, 아까 래빗 아일랜드에서 사 온 토끼 먹이를 주었어. 사실 어떻게 먹이는 건지 잘 모르겠어. 땅에 이렇게 놓고 먹여야 하는 건가? 손에 올려놓고 먹여줘야 하나? 토끼한테 먹이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 하지만 먹이를 대충 줄 수는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보자.

손에 올려서 주기도 하고, 땅에 하나하나씩 두고 먹이기도 했어. 다행히 토끼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문제없이 잘 먹었고, 나중에는 다들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 토끼가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편의상 표정을 지었다고 할게.


토끼에게 먹이를 준 뒤,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앞으로 걷기 시작했어. 역시 토끼들은 계속 나를 따라왔지.


"나는 저 앞으로 가려고 해. 저기에도 너희의 친구들이 있을까?"


그러자 토끼 몇 마리가 고롱고롱거렸어. 마치 나의 말을 긍정하는 듯이.


"그렇구나. 고마워. 이제 다녀올게. 더 멋진 세상을 보기 위해. 그리고 너희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말하며 토끼들에게 손을 흔들었어. 그리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지. 토끼 몇 마리가 나를 따라오려는 듯 뛰다가, 이내 그 자리에 멈춰 섰고, 눈을 감고 잠들었어.

잠든 토끼들,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선 토끼들, 모두 뒤로한 채, 내게 펼쳐진 길을 걸어갔어.



다들 알겠지만, 오쿠노시마는 작은 섬이야. 그래서 시간을 조금 투자하면 한 바퀴 돌 수 있지. 사실 이건 자전거 기준인데, 나처럼 도보로 둘러본다고 해도 한 바퀴 다 돌 수 있지 않을까? 정 안 되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한 번 더 돌지 뭐.


그렇게 걸어가면서, 토끼들을 계속 만났어. 오히려 토끼들을 만나지 못한 적이 없을 정도로. 토끼섬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여기저기에 토끼들이 즐비했지.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어. 호텔 앞에서 2시간에 200엔 내면 빌릴 수 있는 자전거를 몰고 가다가 실수로라도 토끼를 치면 안 되잖아. 천천히 달리면 괜찮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떨릴 거야. 토끼들이 알아서 비켜준다고 해도 왠지 안심이 안 되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도보로 여행하는 게 자전거보다 백 번 낫다고 다짐하게 돼.


오쿠노시마의 숲길로 들어가며, 수많은 토끼들의 환영인사를 받게 되었어. 


"토끼 씨, 안녕. 여기서도 만나네."


한 마리 한 마리의 눈을 맞...추기는 조금 어려워서, 뭉뚱그려 불렀어. 한 마리 한 마리의 눈을 다 맞추며 인사한다면, 목표했던 길의 반도 가지 못한 채 날이 져버릴걸. 

토끼들을 만날 때마다, 봉투를 열고 먹이를 주었어. 어차피 먹이는 많이 있어, 이 섬을 한 바퀴 다 돌면서 만나는 토끼들 모두에게 먹이를 준다 해도 충분할 정도로.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먹이를 받아먹는 토끼들은 무척 귀여웠어. 어쩜 이렇게 귀여운 생물이 다 있는 걸까? 여기 있으면 힐링이 되는 것 같아. 지금까지 연예계에서 보고 들으며 또 경험한 온갖 폐단들로 인한 정신적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야. 마음 같아서는 도쿄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 오쿠노시마에 머물면서 토끼들을 돌보고 싶어.



혹시 국사를 공부해본 사람이 있으려나? 있다면, 혹시 중일전쟁 시기에 독가스 실험과 제조를 하는 공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 1929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6,616톤의 독가스를 만들어냈다고 해. 어찌나 잔학한 실험과 제조를 해왔는지, 그리고 당시 정부는 이를 숨기고 싶었는지, 지도에서 공장이 있는 곳을 아예 지워버렸다고 해.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사실, 오쿠노시마가 그곳이야. 토끼들의 낙원이라는 의미의 토끼섬으로서 유명한 오쿠노시마, 이곳의 또 다른 이명은, 과거 일본 제국의 잔학한 야욕이 서렸던 '독가스 섬'이야.

잔학무도한 전쟁을 위해 세워지고 쓰였던 만큼, 가동 방식도 비인도적이었어. 무려 초등학생 소년소녀들을 히로시마에서 데려와 '신체에 악영향을 가져오지 않으니 비인도적이지 않다'라는 말로 기만시켜 일하게 하기도 했다고 해. 물론 독가스가 신체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 리 없지. 소년 소녀들은 그 이후로 기관지염이나 폐암 등 각종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어.

나 참, 자국민들, 그것도 초등학생 수준의 어린이들조차 속이고 끌어들이면서까지 전쟁을 하고 싶었을까? 이기고 지는 것 이전에,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잖아.


길을 걷고, 토끼들을 만나고, 먹이를 주고, 쓰다듬어주고, 그렇게 오쿠노시마를 여행하다 보니, 과거 독가스 공장이었던 곳에 도착했어. 전쟁도 다 끝나고 진상이 밝혀진 지 한참이라, 지금은 텅 비고 아무것도 없어. 외벽은 심히 낡았고, 어떤 건물은 담쟁이덩굴로 가득 덮여있기도 했지. 하지만 지금 가동 안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가동한 적이 있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이곳 독가스 공장은, 이 나라가 전쟁에 미치기 시작했다는 증거 중 하나니까.


여기 근처에는 독가스 자료관이 있어. 이왕 독가스 공장 건물들을 보았으니, 자료관을 들르지 않을 수 없겠지. 지금 시간이 3시 25분, 조금 촉박하긴 한데, 서두르면 조금이라도 둘러볼 수 있을지도 몰라.

왜 촉박하냐고? 입장 시간이 3시 40분까지고, 4시에는 폐장하거든. 정말로 서둘러야 해. 서둘러야 하나라도 더 볼 수 있어. 이럴 때 자전거가 없는 게 좀 아쉽네. 자전거라도 있었으면 더 빨리 갈 수 있었을 텐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 덕에, 나름 여유롭게 자료관에 도착할 수 있었어. 근데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게 있었지. 무인 매표소에서 표를 사야 한다는 거야.


"어, 뭐야. 유료입장이야? 돈 내야 해?"


아니, 사실 유료 입장인 걸 몰랐던 건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할까. 문득 괜한 지출을 더 감행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할까? 이왕 왔으니 들어가 볼까? 사실 그냥 돌아가도 상관없기는 한데….`


2분간 고민하다가, 결국엔 들어가기로 결심했어. 19세 이상은 150엔만 내면 돼. 가격이 그리 비싼 것도 아니고, 또 여기 독가스 섬에 대한 이해를 종지부 찍을 마음으로 여기 온 거니까.


매표소에서 150엔을 내고 티켓을 발권받아 자료관 안으로 들어갔어. 그 안에는, 과거 일본 제국이 여기 오쿠노시마에서 진행했던 가스 실험의 보고와 그 현장, 여파가 담긴 사진과 문구들이 가득했지. 난 이걸 보면서 생각했어.


"...이런 짓까지 해가며 얻고 싶었던 건, 과연 뭐였을까."


아시아의 패권이었을까, 아니면 승리를 통한 단순한 집단만족이었을까. 설령 어느 쪽이었대도, 이런 짓까지 해야 했을까.

정말로, 정말로 미친 짓이었어. 미친 짓이었고, 미친 짓이고, 앞으로도 미친 짓으로 역사에 남을 거야.


자료관 관람을 마치고, 다시 바깥으로 나와 길을 걸어갔어. 다시 한번 토끼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야.

독가스 공장 터를 벗어나 숲길을 가로질러 등산로를 지나니, 오쿠노시마의 끝자락인 바닷가가 보이기 시작했지.


쏴아아, 쏴아,


저 바다가 파도를 치며 나를 환영해주고 있어. 그리고 해안가의 토끼들도 나를 맞이해주었지.


바다를 보자마자, 나는 발걸음을 돌려, 바로 호텔로 돌아갔어. 여러분들은 내가 왜 그러는지 아마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바다 보고 싶다며? 왜 그냥 돌아가는 거야?"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나라도 그렇게 말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바다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아. 지금 본 바다는 내가 보려고 했던 바다가 아냐.

내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바다의 모습은, 시간이 지난 뒤에 나타날 거야. 그때 난 다시 바다를 만날 거야.



등산로를 지나고, 숲길을 가로지르며, 독가스 공장 터를 벗어나 자전거도로의 끝자락에 닿으니, 어느새 호텔에 도착했어. 그런 나를 반겨주려는 듯이 토끼들이 달려와 내 다리를 감쌌지.


"아하핫, 간지럽다니까."


토끼털은 보송보송해서 만지면 정말 기분이 좋아. 게다가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이렇게 나를 감싸주는데, 내가 어떻게 기분이 안 좋을 수 있겠어? 없던 피로도 풀리는 느낌인걸,

토끼들이 어찌나 나를 잘 따르는지, 호텔 안으로 들어갈 때도 몇 마리가 같이 들어왔다니까.


"응? 너희도 같이 들어오는 거야?"


"앗! 너희는 들어오면 안 돼!"


호텔리어 분께서, 나를 따라서 호텔에 들어오는 토끼들을 발견하셨는지, 모두 다 한꺼번에 안고 밖으로 나가셨어.

거 날짜도 이제 10월이고 바깥이 좀 춥긴 하니 안에 들어올 수도 있지. 매정하시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서, 샤워하고 난 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어.


"하아..."


오래 걸어다녀서 그런지 좀 피곤해. 쉬면서 TV라도 봐야겠네.

하며 TV를 켜자, 내가 예전에 출연했었던 토요일 저녁 드라마가 재방영하고 있었어.


"아, 저 드라마…. 그러고 보면 저 드라마 촬영했던 게 벌써 몇 년 전이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이렇게 다시 보니까 부족한 점이 눈에 너무 잘 띄어.


"저 때 좀 흥분했었지. 그럴 타이밍이 아니었는데."

"좀 더 웃으면서 말할 걸 그랬어. 뭔가 어색하잖아."

"살짝 더 차분하게 걸어갔으면 좋았을걸."


지금까지 스스로 여배우라고 자부하면서 살았는데, 나이가 들고 연기 경력이 어느 정도 생기니까, 부족한 점이 보여서 부끄러워졌어. 역시 연기의 왕도는 끝이 없다는 걸까.


"그래도 저 회차에서는 나름 잘했던 것 같아."

"앞으로도 더 잘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앞으로는, 내가 작품 내에서 했었던 연기를 자주 복기하면서, 이를 반면교사 삼아 더 나은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공부해야겠어.


드라마가 다 끝나고 채널을 돌리니, 이번엔 음악 방송이 방영되고 있었어. 내가 출연했던 무대는 아니고, 요즘 인기몰이하고 있다는 혼성 유닛의 무대야.

그 무대를 보면서, 남몰래 격세지감을 느꼈어. 왜냐하면 내가 아이돌로서 활동했던 시절에는 스피드메탈 분위기의 음악과 혼성 유닛이라는 건 무척 마이너한 트렌드였거든. 마이너하니까 트렌드조차 아니었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내가 한창 아이돌로 활동할 때는 그랬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아이돌 음악의 판도가 바뀌니까 문화와 트렌드도 쏜살같이 달라졌네.

...나도 아직은 아이돌이고, 19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이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겠지?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요즘은 우리 극장 동료들 중에서도 방송 무대에 서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다들 자기 일하느라 바쁘지. 연예계를 아예 떠난 사람도 있고, 연예인과 다른 일을 겸업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며, 연예계에 있으면서도 음악은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음악을 하기는 해도 방송에는 잘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어.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야. 연예계에 머물러있고 비정기적으로나마 음원도 내는 아이돌이기는 하지만 음악방송 스테이지에는 거의 안 올라가는. 사실상 노래부르는 여배우 느낌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환경도 옛날에 비해 많이 변한 게 느껴져. 그리고 그 변화가 원망스러워. 내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이 프로듀서와(나이를 먹고 언니·오빠라는 호칭은 잘 안 부르게 됐어) 동료들인데, 그 동료들이 나와 멀어지면, 나는...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어버린단 말이야. 물론 거자필반 회자정리,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난 아직 헤어질 준비가 안 됐다고. 만약 지금에라도 헤어지게 되면, 난 정말로 나이에 안 맞게 울지도 몰라.

운명아, 운명아. 조금만 걸음을 늦춰주면 안 될까? 시간아, 시간아. 조금만 더 천천히 가주면 안 될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눈을 떴어. 아무래도 TV를 보다가 잠들었나 봐. 음악 방송은 한참 전에 끝나 있었고, 옛날식 보험광고만 하염없이 흘러나왔어.


"으음…. 지금 몇 시지…?"


핸드폰을 켜서 확인해보니, 저녁 7시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어.


"꽤 오래 잤네….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일반적으로 이 시간쯤 되면 다들 저녁 식사를 하고는 해. 그러니 나도 저녁 식사를 해야 할 텐데, 근처에 식당이라든가 있으려나?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어. 내려가서 호텔 직원분께라도 여쭤보려고.


"실례합니다. 말씀 좀 여쭤보아도 괜찮을까요?"


"예, 말씀해주세요~어떤 일이신가요?"


"제가 저녁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여기 근방에 괜찮은 식당이 있나요?"


"식당 말씀이신가요? 그런 거라면 호텔 식당을 이용해주세요. 지금도 열려있답니다."


"아, 호텔 식당도 있나요? 감사합니다."


사실 호텔 식당이 있는지는 잘 몰랐어. 입구 쪽에서 보면 잘 안 보이거든. 접수처 오른쪽에 있는 길목에서 좀 들어가야 식당이 있다고 하더라고. 다시 보니까 식당이라고 써진 이정표도 있었네….



여하튼, 호텔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접시에 음식들을 담아왔어. 비록 여기가 크지는 않아도 호텔 식당이라 그런가? 뷔페식이란 말이지. 원하는 대로 골라서 먹을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배가 많이 고프지 않기도 하고, 또 너무 많이 먹으면 나중에 뒤처리가 조금 성가실 테니, 적당히 먹고 다시 방으로 가려고 해.


그렇게 다짐했건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음식들을 산더미만큼 쌓아놓고 만 나를 볼 수 있었어.


"아이고 맙소사…."


분명히 조금만 먹겠다고 다짐했는데, 내 손과 입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 같네.

사실, 이 여행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종영했던 사극이 있는데, 내가 거기 출연하게 되었었지. 배역을 위해서 빡세게 다이어트를 했었는데, 종영하고 오늘 이렇게 뷔페에 오게 되니까 그 반동으로 리미트가 풀려서 이렇게 많이 먹게 됐나 봐.

...이렇게 된 이상, 먹다가 죽지나 말자!


포크와 젓가락을 들고 음식들을 집어 먹기 시작했어. 그 와중에도 여배우로서 품위를 지켰지. 추잡스럽지 않게, 하지만 먹음직스럽게. 그것이 나 스오 모모코의 식사 방식이야!

그렇게 한 그릇, 두 그릇, 세 그릇을 비우고도 배가 안 차서 디저트도 먹었어. 배가 안 고픈 줄 알았는데 다 착각이었던 것 같네. 사실 난 배가 고팠던 게 틀림없어.


그렇게 먹고 또 먹고 나서야 저녁 식사를 끝냈어.


"잘 먹었습니다~"


이렇게 포식한 게 얼마만일까? 정말로 기나긴 다이어트와 식단 조절의 시간이었어. 이렇게 포식하고 나니까, 비로소 내가 자유로워졌다는 게 1차적으로 느껴져.



식사를 마치고, 다시 숙소로 올라갔어. 커튼을 걷어 바깥을 보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졌어. 밤이 된 거지.


"이제 슬슬 준비해야겠네."


이때를 기다렸어. 해가 지고 온 하늘에 어둠이 덮일 때, 그때 비로소 내가 목표했던 걸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딛는 거야.

간단한 먹을거리가 든 클러치백을 들고 숙소를 나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갔어.



호텔 앞을 나서자, 직원분께서 내게 말을 걸어왔어.


"이 시간에 나갔다 오시려고요?"


"바람이 좀 쐬고 싶어서요."


"밤이라 좀 쌀쌀해요. 감기 걸리시지 않게 조심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말한 뒤, 호텔 문을 나섰어.

몇 발자국 정도 걸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토끼들이 달려와 내 주변을 감쌌지.


"안녕, 토끼 씨. 오늘도 날 반겨주네."


뭐, 지금 나온 사람이 내가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 토끼들은 사람을 정말 좋아하나 봐. 이렇게 아무런 경계심 없이 달려들고 몸을 비비는 걸 보면. 내가 토끼 같았을 시절의 모습과는 완전 다르지. 누구에게든 무척 까칠했으니까. 그때 조금만 더 너그럽고 붙임성 있었다면 좋았을걸.


토끼들의 배웅을 뒤로 하고, 밤의 어둠으로 덮인 길을 떠났어. 어둠으로 덮였다고는 해도 앞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기에, 특별히 빛에 의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넘어지거나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걸어갈 수 있어.



토끼들의 호위와 차가운 바람의 손길을 받으며 숲길을 가로지르고, 그 끝자락에 있는 독가스 공장 터에 도착했어.


"아, 여기. 독가스 공장…."


사실, 이 밤에 여기 오니까 살짝 무서웠어. 불빛 하나 없이 온통 어둡지, 여기저기 무너졌지, 여기에 얽힌 사연은 끔찍하지. 금방이라도 여기에서 명을 달리했던 사람의 원혼이 나타나 나를 덮칠 것만 같다고, 난 그저 여기를 지나가려고 왔지 담력시험 하려고 온 게 아니란 말이야.


"호텔 앞에서 자전거 빌려올 걸 그랬어. 그럼 더 빨리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했을 정도야. 그만큼 여긴 어두워지면 무척 으스스해.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더 빠르게 걸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뛰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빌었지.


"제발 귀신만 붙지 마라….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붙어…!"


어찌나 무서웠는지, 나중 가서는 눈까지 꼭 감고서 걷는 내 모습까지도 볼 수 있었지 뭐야.

게다가, 조금이라도 눈을 뜨면 왠지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돌연 내 발목에 묘한 촉감이 닿아 간지러움이 느껴졌어. 독가스 공장의 원혼이 머리칼로 내 다리를 감싼 것만 같았지.


"꺄아아악?!?!"


앞뒤 생각 못 하고 비명부터 질렀어.


"엄마!!! 살려줘!!!"


극도의 공포감에 질려서 차마 눈 뜰 엄두도 나지 않았지. 그냥 비명만 빽빽 질렀어.

한참 후에 실눈을 떠서 대충 앞을 살펴보니, 토끼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주변을 돌면서 고롱거리고 있었던 걸 볼 수 있었어. 그리고 동시에, 나는 어느새 공장 터를 벗어나 있었지.


"휴우…."


잔뜩 긴장되고 무서웠던 게 한순간 풀리니, 나도 모르게 휘청거렸어. 그 와중에도 토끼를 밟거나 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지.

다시 정신을 차린 뒤 길을 나섰어. 이제 두려울 건 없어. 호텔로 돌아갈 때 이 길을 다시 한번 가야겠지만, 그때는 지금만큼 겁먹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도로를 지나고, 등산로를 지나쳐서, 드디어 바닷가에 도착했어.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아래에, 밤바다는 전과 다름없이 파도를 치며 나를 환영해주었어.


"그래. 저거야. 저런 바다를, 보고 싶었어."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보기 위해서 먼 길을 왔던 그 바다, 밤의 바다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어.

바다에 닿기 위해 모래사장으로 내려갔어. 모래사장이라고는 해도 그다지 부드러운 모래는 아니라서, 걷을 때의 그 기분이 나질 않아. 뭐라고 해야 할까, 사람을 위해 준비된 곳은 아닌 것 같다고 하는 게 어울리려나?


그럼에도 바닷가로 내려갔어. 이 밤바다를 보고 싶어서 지금 이 시간까지 기다려온 거니까.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파도 소리도 더욱 크게 들려와. 단지 소리뿐만이 아니라, 마음에 다가오는 시원함까지도 계속 커져.


얼마나 내려갔을까? 적당한 위치를 잡아서 그 자리에 앉았어. 그리고 클러치백에서 따뜻한 보리차가 담긴 보온병을 꺼내어, 뚜껑에 차를 따랐지.

내 뺨을 스치는 다소 차가운 바람, 동시에 따뜻한 차로부터 올라와 내 뺨을 데우는 김. 이 두 가지의 조합은 정말이지, 화보로 찍는다면 분명히 A급 사진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만약 누군가와 같이 이곳에 왔다면, 그는 분명 내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카메라를 꺼내서 이 모습을 찍었을 거야.


차를 마시면서 바다의 파도 소리를 감상했어.

이 밤에도 바다는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파도를 일으키며 지면을 적셔. 만약 내가 바다였다면, 해가 졌을 때 모든 일을 끝내고 아주 작은 파도조차 일으키지 않은 채 잔잔하게 있었을지도 몰라. 하늘이 그렇듯이 나 또한 조용하게 있고 싶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얼마 만에 보는 밤바다인지 모르겠어. 바다 자체는 아이돌 활동과 드라마 및 영화 촬영 차 몇 번 와본 적 있지만, 대부분 아침 혹은 낮에 오고 늦어도 해가 질 때쯤 철수했던 터라, 밤바다를 보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야. 그래서인지, 이 자리에 있으니 마음이 무척 편한걸.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감상하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어. 그 어두웠던 하늘에 별 하나, 별 두 개, 별 몇 개가 아니라, 수많은 별이 모여 별의 궤적을 이루고 있었지. 내가 지금껏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어.


"우와…!"


핸드폰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어. 카메라를 켜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지. 이걸 찍지 않는다면, 이 바다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모른 채 있다 가는 것과 같아. 

카메라를 켜서 별의 궤적을 연속 촬영했어. 내가 사진을 잘 찍는 스타일은 아니라 그런지, 눈으로 보이는 것들을 모두 카메라 렌즈에 담아내지는 못했지. 만약 사진 촬영 전문 아리사 씨가 이 별의 궤적을 찍었다면 나보다는 잘 찍었을까?


한바탕 사진을 찍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도 들더라.


"저 별의 궤적에, 내 손이 닿는다면…."


그렇게 생각하면서, 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지. 금방이라도 별의 궤적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어.

만약에, 단 하나라도 좋으니까, 이렇게 손을 뻗어서 별을 따다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행복할 텐데.

별을 따 누구에게 줄 거냐고? 음, 과거의 나에게 주고 싶달까. 미래의 내가 주는, 희망의 별을 품고, 더욱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고 싶어.



이렇게 손을 뻗고 있으니까, 문득 예전에 영화에서 맡았던 배역 하나가 생각나. 무용학과 선배이자 주인공의 라이벌이었는데, 꽤 냉소적이고 독한 캐릭터였어. 비유하자면, 옛날에 연기했었던 라스트 액트리스의 모니카 같은 성격이랄까?

라이벌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서, 촬영 기간 내내 무용을 배웠어. 어려운 건 차치하고서라도, 무용이 요구하는 능력과 그 느낌은 아이돌 댄스와는 또 다르더라고. 그래서 지금도 무용을 하는 법을 결코 잊지 못해.

그러고 보니…. 내가 춤을 추는 장면도 이렇게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동작으로부터 시작되었었지, 아마?


그때를 추억하며,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어. 그리고 스텝을 밟기 시작했지. 평평한 무대가 아니라 모래사장이라서 다소 발이 빠지는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느낌조차 내겐 무척 새롭고 좋은걸.


생각해보면 나, 지금까지 춤을 출 일은 무척 많았어. 공연을 위해서 춤을 추었던 적도 있고, 연기를 하기 위해 춤을 추었던 적도 있었지. 그러나 진심으로 춤추어본 적은 없었어. 전부 '누군가의 오더에 의해', '해야 하니까', '잘 해내는 것이야말로 프로다운 일이니까' 해왔을 뿐.

하지만 오늘 밤은, 정말로 나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아.


스텝을 밟고, 팔을 움직이며 별의 궤적을 조명 삼아 춤을 추고 있어. 분명히 지금 나를 보는 관객도 없고, 촬영하는 것도 아니지. 그럼에도 지금껏 그 어떤 때보다도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춤추고 있어.

만약 누군가 이런 나를 보고 있다면, 내가 필시 저 별들에 홀린 나머지 정신없이 춤추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상관없어. 나는 지금 그 누구도, 무엇을 위해서도 아닌, 전적으로 나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춤을 추고 있는 거니까.


연기를 위해 무용을 배웠다고 말하긴 했지만, 지금 내가 추는 춤은 그때의 무용과는 달라. 그렇다고 아이돌 댄스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고.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그래, 지금껏 단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춤이라고 하는 게 좋겠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조차도 본 적이 없었던, 그런 춤이야. '어떻게 움직여야겠다' 하는 그런 계획 없이, 오로지 본능과 흐름에 맡기는 그런 춤이라고.

보통 자기 내키는 대로 추는 춤은 얼마 못 가 동작이 굼뜨게 되거나 버벅거리기 마련인데, 내 몸은 굼떠지지도, 안무에 버퍼링이 걸리지도 않았어. 오히려, 내 마음이 이끄는 춤이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는 듯이 더욱 원활하게 움직여갔지. 적어도 지금 순간만큼은 발레도, 사교댄스도, 아이돌식 댄스도 아닌, '별빛 아래 가장 아름다운 움직임'이 있을 뿐이었어.


예전에 아유무 씨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절도나 박자감이 아니야. 물론 그것도 중요하긴 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춤을 통해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전달될 수 있어야 하지."


그러네. 지금 나는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걸까. 사실 나도 잘 몰라. 특별히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니거든.

뭐, 굳이 표현한다면, '마음의 자유'려나. 여기 오쿠노시마에 와서 토끼를 보고, 바다와 맞닿고, 하늘을 수놓은 별들의 궤적을 만남으로써 자유를 느낄 수 있었지. 오랜만인지, 아니면 처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음이 정말로 편안한걸.

바닷바람이 행복하게 춤추고 있는 나의 뺨을 스쳐 가며 힘을 줘. 별의 궤적은 저 하늘을 수놓아 가득 채우지. 파도치는 소리는 내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이고, 모래사장은 나를 드러내야 할 스테이지이자 행복이라는 연기를 선보여야 하는 촬영장이야. 모든 것이 완벽해. 모든 게 행복하지. 아아, 이런 행복을 언제 또 느껴볼 수 있을까?



자유로움에 잠겨 춤을 춘 지 얼마나 지났을까? 목이 말라서, 숨도 돌릴 겸 잠시 멈추어 섰어. 보온병에서 보리차를 따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예상치 못한 귀여운 손님들이 와 있었지. 토끼들이 숲에서 나와 이 모래사장에 온 거야.


"아, 안녕. 토끼 씨 여러분. 내가 춤추는 거 보고 있었어?"


살짝 부끄럽다고 생각할 뻔했어. 웬 인간이 나타나서 허우적거리며 춤추고 있는 걸 본 토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인간은 갑자기 나타나서 뭐하는 걸까뿅"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란 말이지.

비록 내가 다른 사람들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긴 했지만, 막상 들켰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어.


'저 하늘을 수놓은 별의 궤적은 조명이고, 바다는 음악이며, 모래사장은 스테이지야. 그리고 나는 무대의 공연자이지.'

'지금까지는 나 홀로 춤을 춰왔고, 본능에 몸을 맡겼지. 그러나 지금 오쿠노시마 섬의 토끼라는 관객들이 나를 찾아왔어. 나의 자유를 알기 위해 온 거야.'

'그러니, 나 역시 관객들에게 화답해야겠지. 누군가의 오더나 보수 때문이 아닌, 오로지 내 자신의 자유로움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춤을 추기 위해 자리를 재정비한 뒤, 웃으며 말했어.


"관객 여러분, 이제부터 스오 모모코의 스페셜 야간 공연이 시작할 거야. 부디 늦지 않게 와서 자리를 채워줘~"


그러자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토끼 몇 마리가 모래사장으로 깡충깡충 뛰어왔지. 다른 토끼들도 잠시 후에 뒤이어 다가왔어.


"와줘서 고마워, 여러분! 이제부터 특별 공연을 시작할게~"


미소를 머금으며 관객 토끼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어. 전과 다름없이, 아니, 이제는 조금 더 별의 궤적에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야. 이번에는 정말로 별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걸.


팔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곧게 펴고, 다시 한번 스텝을 밟았어. 무겁지 않고 가볍게, 그러나 아까보다 힘차게. 물 흐르듯이, 그러면서도 절도 있게.

지금 내가 추는 춤은 아까와 같은 춤이 아니야. 아까의 느낌과 지금의 그것은 무척 다르니까.

게다가 지금은 나를 봐주는 관객들이 있어. 비록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 작은 동물일지라도, 나를 보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실이 주는 분위기와 느낌은 아까와 결코 같을 수 없지.


파도 소리에 맞춰 몸을 움직였어. 그리고 별에 홀린 듯 하늘을 바라보았지. 나 자신조차도 다 알지 못한 마음이 하늘에 닿기를 바랐어. 그리고 내 자유로운 마음이 이 바다를 넘어서 온 땅에 퍼져나가기를 바랐지. 만약 여러분들이 문득 자유로움을 느끼는 때가 온다면, 나로부터 전해진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해줘.


내가 춤을 추는 동안, 토끼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어. 그중 몇 마리는 내 근처로 오기도 했고.


'토끼들을 밟지 않게 조심해야겠는걸.'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지. 최대한 조심하려고 해도, 막상 춤을 추기 시작하면 무아지경이 되니까. 오히려 토끼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는 걸 인식한 게 신기할 정도야.

결국 중간에 어텐션 자세를 취한 뒤, 말했어.


"관객 여러분~무대에 너무 가까이 오면 안 돼! 네 발짝만 뒤로 가줘!"


나의 이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뒤로 물러나는 토끼도 있었지.


"고마워, 여러분! 그럼 이제 다시 한번 무대를 시작할게!"


말하고, 다시 한번 춤을 추기 시작했어.

다시 하늘을 쳐다보니, 밤하늘을 가득 수놓은 별의 궤적 한가운데에 달이, 그것도 만월로 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지.


`보름달….`


잠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달을 향해 팔을 뻗었어. 뻗은 손의 손가락 사이로 달빛이 새어 나왔고, 내 눈을 적셨어.

그 순간, 나는 또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어. 이번에야말로 정말 무아지경으로 움직였지.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정말로 달에 홀려버리고 말았네.

처음에는 그저 춤을 추고 싶어서 춘 거지만, 지금은 내 자신도 도저히 멈출 수 없을 정도야. 마치 빨간 구두의 주인공 카렌 같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심지어 자신을 길러준 할머니가 죽었다 해도 춤을 멈출 수가 없었지. 난 지금 몇 시인지도 모르겠어. 10시인지, 11시인지, 하루가 지났는지, 어떤지. 그저 춤만 추고 있을 뿐인 거야.


근데, 생각해보니까 딱히 상관없을 것 같아. 지금까지 살면서 미친 듯이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라도 '미친 듯이 몰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몰두가 언제 끝날지는 전혀 알 수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팔을 움직이고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었어.

정말이지, 이렇게 춤을 오래, 많이 춘 적이 또 언제 있었던 걸까? 살면서 이렇게 춤을 많이 춘 적이 없었어. 시간을 초월하고, 영혼을 불태우며, 몸을 휘둘러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아무래도 오늘 밤은, 미쳐버릴 때까지 춤을 추게 될 것만 같아. 어떤 의미로든지 절대 잊을 수 없는 하루가 될 거야.


달빛과 별의 궤적을 조명 삼아,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맞춰 모래사장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었어. 어떤 춤을 추고 있는지에 관한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그만두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저 즐겁게 춤추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지.

아까 내가 그렇게 말했었지. 내가 이 춤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있고, 그것은 마음의 자유라고. 거기다가 또 한 가지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나는 한 번쯤 이렇게 미친 듯 춤춰보고 싶었다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아마 옛날의 나였다면 펄쩍 뛸 소리였을 거야. 내가 그런 저급한 생각을 하다니 말도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었겠지.

하지만 나이를 먹고 어른에 가까워진 지금에 이르니,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게 아예 말도 안 되는 일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껏 나는 프로의식에 갇혀서 스스로 금욕주의 내지는 강박증 수준으로 옭아매었으니.

어쩌면 말이지, 그 마음은 단순히 춤에 대한 욕구를 넘어서, 프로의식에 억눌려있던 자유가 폭발한 게 아닌가 싶어.

만약 그런 거라면, 남김없이 폭발시켜야지. 미련도, 내 안에서 배출되지 못해 남겨진 것도 없을 때까지.


열심히 춤을 추었어. '열심히'라고 하는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내 몸은 내 통제를 벗어난 느낌이야. 이성 대신 본능적인 자유가 온몸을 지배하지.

아무튼 열심히 춤을 추고 있어. 토끼 관객들의 앞에서, 인간이 출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춤(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래)을 추고 있다고.

지금 몇 시인지, 하루가 지났는지 안 지났는지, 그런 건 이미 머릿속에서 잊었어. 떠올리려 해도 '그런 건 아무런 필요도 없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그것을 지워버리지.

만약 내 지인들, 예를 들어 극장 동료들이나 프로듀서, 엄마랑 아빠, 내 팬들, 또는 나랑 호흡을 맞춘 적이 있던 연기자들. 그런 사람들이 이런 나를 봤다면, 놀라는 걸 넘어 소름 끼쳐 했을 거야. 내가 단 한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알 게 뭐야. 지금은 다른 사람들 눈치 보면서 있는 시간이 아닌걸. 지금 이 순간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야.



그 이후로도 얼마나 춤췄는지 모르겠어. 달빛에 홀려서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다 보니, 토끼 관객 몇이 퇴장하는 것도 몰랐지 뭐야.

파도 소리가 들리는 모래사장을 누비며 미친 듯이 춤췄고, 결국엔 내 발자국이 남겨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어.


"하아...하아…."


숨이 차올랐고, 다리가 후들거렸어. 이제 몸에 힘이 하나도 없네.

그런 와중에도, 손은 변함없이 저 달과 별을 향해 뻗고 있었지. 손가락 사이로 달빛이 새어 나왔고, 내 눈을 적셨어.

나는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말했어.


"달이, 아름답네."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희고 작은 구름이 떠 있는 맑은 하늘이었어. 별의 궤적과 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지.


"으으으…."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 봤던 그 해변이었어. 전과 다름없이 파도가 밀려와 모래사장을 적시고 있었어. 그리고 토끼들이 내 주변에 모여서 기대어 자고 있었지.


"어제 그렇게 춤추다가 탈진했나 봐…."


쓰러질 당시의 상황이 잘 기억나질 않아. 미친 듯이 춤춘 건 기억나는데, 그 뒤의 일은 도저히 모르겠어. 다른 일은 없었겠지?


내가 쓰러져 있던 곳으로부터 3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보온병과(춤추다가 건드렸는지 보리차가 다 쏟아져 있었어) 클러치백을 챙겼어. 클러치백 위에 있던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침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지. 지쳐서 탈진한 것 치고는 꽤 일찍 일어났는걸.


해변을 벗어나, 등산로를 지나고, 도로를 가로질러, 공장 터를 빠져나가, 자전거 도로를 건너, 호텔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옮겼어.

등산로를 지날 때, 아침 등산을 하는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어. 아침부터 무척 부지런한걸.

도로를 가로지를 때,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이 시간부터 출발해도 갈 만한 곳은 없을 텐데. 아니면 배를 타고 히로시마로 돌아가려는 건가?

공장 터를 지날 때, 다 쓰러져가는 건물들이 보였어. 어젯밤엔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는데, 날이 밝으니까 더 이상 무섭지도 않네.

자전거 도로를 건널 때, 도로 위에서 고롱거리며 잠든 토끼 몇 마리를 보았어. 그러다가 치이면 어떡하려고. 자전거가 오지 않는 틈을 타, 토끼들을 도로 가장자리 풀숲에 옮겨놓았어.

그리고 호텔에 도착하자, 토끼들이 달려와 나를 반겼어.


"아하핫, 간지럽다니까."


나를 계속 따라오는 토끼들을 겨우 떼어놓고 호텔 로비로 들어가자, 호텔리어가 놀라며 말했어.


"아니, 고객님! 어젯밤에 나가셔서 들어오시지 않으셨던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이 질문에, 순간 고민했어.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차마 오쿠노시마 해변에서 미친 듯이 춤추다 탈진해서 쓰러졌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데….


"예….뭐, 갑자기 그럴 사정이 생겨서요."


대충 둘러대고 얼버무린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어.

객실에 들어서자, 불이 켜지지 않았음에도 햇빛 때문에 밝은 걸 볼 수 있었어.


"밤바다만 본 뒤에 돌아와서 자려고 예약한 숙소였는데, 갑자기 자유로움을 폭발시킨 덕분에 여기서 자겠다는 계획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제 시간도 다 되어가니 미리 짐 챙겨서 아침 먹다가 체크아웃해야겠어. 사실 짐이라고 해도 딱히 뭐가 있지는 않지만.


짐을 챙겨서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어. 마침 식당도 막 개장한 참이어서, 나는 따뜻하고 시원하고 신선한 조식을 먹을 수 있었지. 주로 시리얼이라든가 쿠키, 작은 주먹밥, 우유 등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들로 구성되어 있었어. 아침부터 자극적인 거 먹으면 속이 망가지니까.


아침을 든든히 먹고, 객실 체크아웃을 한 뒤, 짐을 챙겨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어.

클러치백 안에는 히로시마의 타다노우미로 가는 페리 티켓이 있지. 이건 어제 객실에다가 놓고 갔어. 바닷바람에 날아가 버리면 곤란하잖아? 계획 밖의 지출을 해야 하고. 그러니까, 차라리 객실에다가 놓고 가는 게 더 안전해.


10분 정도 후에 도착한 셔틀버스를 타고 페리 선착장으로 향했고, 거기서 또 페리를 타고 타다노우미로 출항했어.

비록 하루뿐인 여행이었지만,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 아니, 많은 일이 있었다고 느껴진 것에 가까울지도 몰라. 어젯밤의 '스테이지'는, 내가 지금껏 춰왔던 모든 춤 중에서 가장 열심이었으니까. 잊고 싶어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야.



내 이야기 들어주어서 고마워. 이제 나는 쿠레 선을 거쳐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돌아가고 있어. 

지금까지는 오쿠노시마의 동행자로서 함께 했지만, 나중에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도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지금까지 스오 모모코였어.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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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보았습니다.

이 글은 Weissmann항께서 만드신 스레드 '티타임'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다섯 번째 티타임의 주인공은 스오 모모코이고, 카테고리는 '해변'+'댄스'입니다.

이번 편부터 한 가지 계획을 도입했습니다. 바로 '아이돌의 변화'인데요. 앞으로는 경우에 따라 아이돌들에게 몇 가지 변화를 줄 예정입니다. 모모코 편에서는 나이 변화를 주었죠. 다른 아이돌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주어질까요.

이 글은 지난 주 금요일에 착수했었는데, 아이디어 진행이 잘 안 되기도 했고, 또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래서 분량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조금 적을 거예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집필했습니다.


미나미도령 앞으로도 간바리마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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