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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입거리 티타임)4. 날개가 부러진 흑조(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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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02, 2022 10:37에 작성됨.

그날 밤, 정확히는 하루가 넘어가고 시작된 새벽에, 내가 거실에서 볼륨을 줄인 TV를 보고 있을 때, 히오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TV 소리를 끈 뒤 히오리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히오리?"


"프…. 프로듀서…."


"히오리! 괜찮아?! 많이 아픈 거야?! 진통제, 진통제는 맞았어?"


"맞긴 했지만…. 너무 아파요…. 이게 맞자마자 바로 효과가 도는 게 아니라서…."


"효과가 돌려면 얼마나 걸려?"


"맞고…. 한 15분 정도 있어야 해요…."


"15분…. 알았어. 15분 동안 히오리를 붙잡고 있을게. 쓰러지지 말아줘!"


"감사드려요, 프로듀서...으으으…."

"살려주세요, 프로듀서…. 너무 아파요…."


"히오리…. 히오리…. 힘을 내!"


"흐으으…. 아아…."


심각하다. 그 어떤 때보다도 더 괴로워하고 있다. 이런 고통을, 통증을, 히오리는 매일 밤 겪고 있었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또다시 쓰려온다. 다시 한번, 히오리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대체 왜…. 히오리는 왜 이래야만 하는 걸까.


예전부터 병마의 심각성 자체는 알고 있었다. 담당의와 간호사의 증언도 있었고, 히오리 본인도 자주 얘기해주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무식하고 멍청한 바보라도, 그것도 단지 소리만 들릴 뿐임에도 불구하고 히오리를 괴롭히는 병마가 장난 아니게 강함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흐, 흐로듀사....흐아아아....으으으..."



"히오리...히오리...제발..."



너무나 강한 통증 탓에, 히오리의 혀조차 이젠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 하고 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못 듣겠어. 대체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거야.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대체 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왜 이렇게 망가져 버린 거야,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안 돼,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이럴 수는 없어,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싫어,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듣고 싶지 않아,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신이시여,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제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더 이상은,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이건 싫다고,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말도 안 돼,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신이시여, 자비 없는 분이시여, 어째서 히오리가 이렇게 망가져야만 하는 겁니까? 그녀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대체 왜 히오리가 이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는 겁니까? 지금 그녀는 신체적인 제약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고립마저도 겪는 중입니다. 회사에서는 저 이외의 다른 누구도 히오리를 만날 수 없게 했는데, 제가 그 회사를 나와버림으로써 이제 아무도 히오리를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체 왜 그래야 한단 말입니까? 히오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신이시여, 차라리…저를 치시옵소서. 제가 모든 고통을 전부 다 받을 테니, 히오리만은, 그녀만은 살려주시옵소서….



히오리가 온갖 고통이란 고통에 다 시달리는 소리를 들으며, 15분을 버텼다.


"하아…. 아…. 프로듀서…."


히오리가 점차 진정되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야 진통제의 약효가 돌기 시작하는 것 같다.


"히오리, 이제 괜찮아? 진정이 돼?"


"네, 프로듀서…. 이제,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안심한 나머지, 눈물이 흐르며 목소리가 떨려왔다.

나는 히오리의 비명과 아픔, 그리고 슬픔이 가득했던 오늘 밤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지옥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분명 이런 곳이겠지. 신이시여, 히오리의 영혼을 구원해주소서.


"...프로듀서."


"응…. 히오리…."


"...저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


"...프로듀서도 보셨죠. 제 몸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 

"몸은 실시간으로 망가져 가고, 고통은 끝나지 않아요."

"이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 죽지 않을 만큼 아픈 병이라는 게, 너무나 힘들어요."


"...이해해…."


"...프로듀서,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응, 히오리. 말해줘."


"...저를, 죽여주세요."


예전 같았다면, 히오리가 이렇게 말하면 약한 소리 하지 말라고, 조금만 더 힘을 내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 이렇게 고통에 찬 절규를 듣게 되니, 내가 히오리였어도 그냥 죽고 싶었으리라.


"모두가 저를 버렸을 때, 유일하게 저를 찾아와주신 분, 프로듀서예요. 부모님조차도 저를 이렇게까지 많이 찾아와주시지는 않았어요."


"그들은 너를 버리지 않았어. 마노와 메구루를 생각해봐. 동료들은 아직도 너를 찾고 있어."

"단지, 아마이 사장이 강하게 묶고, 통제하고 있을 뿐이야. 그들도 불쌍한 사람들이지."


"프로듀서는 제가 행복할 때 함께 웃어주셨고, 제가 아플 때 저를 위해서 울어주신 유일한 분이에요. 정말로 감사드려요, 프로듀서."

"프로듀서가 저를 행복하게 해주셨기에, 죽는 것 또한 프로듀서의 손으로 죽고 싶어요."

"만약 프로듀서가 저를 죽게 해주신다면, 그것은 고통뿐이었던 시간 속의 마지막 행복이 될 거예요."


"..."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히오리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정말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정말로, 괜찮겠어?"


"괜찮아요. 이제 더는, 견딜 수가 없어요. 이 병이 낫는다면 좋겠지만, 도저히…. 안 되겠어요."


히오리는 내 인생의 빛이고, 유일한 희망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283 프로덕션의 사무원으로서 일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고, 퇴사한 지금도 계속해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기쁘다.

그리고 지금 그 빛이, 스스로 소멸하기를 원하고 있다. 만약 그 빛이 사라지게 되면, 나는 앞으로 무엇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맹인에게는 지팡이가 필요한데, 그 지팡이가 없어졌으니 이제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주변으로부터 무엇이 올지도 모른 채.



아침이 밝았다. 난 어느새 잠들었던 건지, 눈을 떴을 땐 TV를 보던 소파에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전화는 끊겨져 있었다. 내가 잠결에 그랬던 건지, 아니면 히오리가 그랬던 건지.


다시 히오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뚜루루,


신호음이 서너 번 정도 가더니, 곧이어 히오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안녕, 히오리. 좋은 아침이야."


"네.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도 오실 건가요?"


"아, 응. 오늘도 가려고."


"감사합니다. 오늘 저를 죽여주실 건가요?"


아, 그러고 보니 히오리가 새벽에 그런 얘기를 했었지. 제발 죽여달라고.

처음엔 지나친 통증에 제정신이 아닌 나머지 극단적인 말을 내뱉은 건 줄 알았는데, 이 아침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이제는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보고 싶어. 정말로, 죽어도 괜찮겠어?"


"네. 정말 괜찮아요. 고통스러운 질병 속에서 살아가는 삶보다. 차라리 죽어서 편안해지고 싶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더 이상은 거절하거나 설득할 수 없었다.

히오리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면 내가 뭘 망설일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최대한 편안히 눈을 감겨주리라.



히오리가 있는 병원으로 가기 전에, 우선 동네 약국에서 수면제를 구매했다.

처음엔 약사가 나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수면제를 달라고 하니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기야 하겠지. 그렇기에 나도 최대한 피곤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매일 수면제를 한 알씩 먹고 있어요. 물론 다른 곳에서 병원도 다니고 있죠. 그래도….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못 자요."


그렇게 필사적으로(?) 어필한 끝에, 마침내 나는 수면제를 얻을 수 있었고, 절대 과복용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듣고서야 겨우 병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사실 수면제를 가지고서는 죽기가 힘들다고 한다. 옛날의 수면제라면 가능했겠지만, 지금의 수면제는 각각의 성분이 대폭 약화하였기에 과다섭취를 한다고 해도 죽지 않는다.

만약 졸피뎀이나 펜타닐을 구할 수 있었다면, 수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르게 죽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들은 마약류 약물들, 나 같은 일반인들은 감히 볼 수도, 구할 수도 없다.

혹은 항우울증약이라면, 마약은 아니기에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약들은 정신과 의사의 진단 하에서만 처방받을 수 있는데, 나도, 히오리도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이 없기에 항우울증약도 갖고 있지 않다.

또 하나 좋은 방법은 빙초산이다. 예로부터 빙초산은 강산성 조미료로서 많은 어린이와 사람들의 몸에 상처를 남겨왔다. 구하기도 쉽고, 죽기도 쉽지. 이럴 줄 알았으면 수면제 말고 빙초산을 살 걸 그랬어. 그러면 굳이 피곤한 척 안 해도 되었을 텐데.


결국 동네 마트에 가서 빙초산 한 통을 구매했다. 이거라면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겠지. 일반적으로 빙초산은 냉면이라든가 츠케모노에 넣어 먹으니까.


그렇게 약과 소스에 깃들은 두 사신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내가 283 프로덕션에서 나온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군. 그때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라고 다짐했었지.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은 내가 이 병원에 오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겠어.



병원에 도착했다. 오늘도 역시 문병 담당 레지던트분이 나를 맞아주신다. 이분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아쉽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도 방명록에 이름을 쓴 뒤, 히오리가 있는 403호로 올라갔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병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을 닫은 뒤, 걸어 잠갔다. 이제껏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 둘의 기분은 고양되기 시작했다.


"안녕, 히오리. 좋은 아침이야."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 히오리는 왠지 모르게 들떠있다. 목소리가 그래.

지금껏 그녀를 괴롭혀왔던 기나긴 고통과의 싸움을 끝내고, 드디어 죽을 수 있기 때문인 걸까.


히오리에게 마실 거리를 따라주며 말했다.


"몸은 좀 어때?"


"지금은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그 어떤 때보다도 좋은 느낌인걸요."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히오리의 안색이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평소에는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와서 안색이 어두웠는데, 오늘은 오히려 밝게 느껴진다.


"후후, 그래? 그렇다니 다행인걸. 조금은 건강해진 느낌이야."


"조금이 아니라 많이 건강해질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

"유서는 썼어? 부모님께는 말씀드렸고?"


"유서는 어제 프로듀서가 잠드신 이후에 써두었어요. 부모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저를 뜯어말리실 것 같아서."


분명 한 사람의 부모라면 그러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자기 자녀가 죽겠다고 하는데 누가 방관할까?

히오리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고, 반대로 히오리의 부모님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유서, 괜찮다면 잠깐 볼 수 있을까? 무슨 내용을 썼는지 알고 싶어서…."


"네, 괜찮아요. 그렇다고 해서 딱히 유산을 어떻게 나누겠다 같은 말은 안 썼지만요."


"유산도 있었구나…."


히오리가 침대 옆의 서랍에서 꺼내어 준 유서를 읽어보았다. 그 안에는 질병에 대한 고통, 283 프로덕션에서 히오리와 동료들에게 가했던 부당한 행위, 먼저 떠나가는 것에 대한 사죄, 그리고 프로듀서인 나를 용서하라는 말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나에 관한 이야기도 있네."


"네. 혹여 프로듀서가 저를 죽여주신 것이 드러났을 때, 어디까지나 프로듀서가 저의 부탁으로 그렇게 하신 거라는 걸 알리고 싶었으니까요.“


고마운 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맙지 않았다. '과연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줄까?' 싶었기에.

비록 히오리 본인이 원했다지만, 결국 내가 그녀를 죽였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겠지.


"프로듀서."


"응, 히오리."


"...그동안 정말로 감사했어요. 많이 부족한 저를 이끌어주시고, 힘들 때 같이 있어 주시고, 좋은 친구들도 만날 수 있게 해주셨죠,"

"프로듀서와 함께 있는 모든 날들이, 정말 행복했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히오리가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말은, 이제는 정말로 히오리를….

지금까지 히오리는 내 인생의 빛과 같았고,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였으며, 나아가야 할 길의 이정표였다.

나를 지탱해주고, 눈을 뜰 수 있게 해주었던 그 모든 것을, 이제 내 손으로 없애야만 한다.


"...히오리."


"네, 프로듀서."


"네가 죽겠다고 했으니, 그 방법을 선택하게 해줄게."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좋아?"


"빨리 죽을 수 있는 쪽을 선택하고 싶어요."


"빨리라…. 빠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하게 죽는 건 마시는 쪽이야."


"그렇다면 마시는 걸로 주세요."


히오리의 선택에 따라, '마실 것'인 빙초산을 꺼냈다.


"이거야."


"아, 빙초산…."


"이야기는 들은 적 있지? 원액 빙초산은 몸에 화상을 입힌다는 걸."


"그게 제가 죽을 방식이군요. 어서 주세요."


"잠깐만 기다려. 병원 이불이랑 시트에 묻으면 안 되잖아. 컵에 따라줄게."


말한 뒤, 아까 차를 따라 마셨던 컵에 빙초산을 채웠다.


쪼르륵,


빙초산이 가득 차오르고,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가 이 병실에 퍼져간다.

오묘한 빛깔을 띠는 빙초산의 수면 너머로, 히오리를 데려갈 사신이 보이는 것만 같다.


히오리에게 빙초산이 담긴 컵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프로듀서. 다시 한번, 그동안 정말로 감사했어요."

"만약 다음 세상이 저희에게 존재한다면, 그때는 서로 건강한 모습으로, 인연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해요."


말을 마친 히오리가 빙초산을 입술에 가져다 대려 하던 그때,


"잠깐만, 히오리. 기다려줘."


내가 말했다.


"왜 그러시나요, 프로듀서?"

"...역시, 아직은 제가 죽는 것을 감당하기가 힘드실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어째서…?"


"..."


또 다른 컵 한 개를 꺼내어, 그곳에다가도 빙초산을 가득 채웠다.


"나도 같이 죽자."


이 말에, 히오리는 매우 놀랐다.


"네?! 아, 아니 어째서…. 어째서 프로듀서도 죽음을 택하려 하시나요?!"


"...히오리, 너는 내 어두웠던 인생의 빛이었어. 방황 속의 이정표였고, 맹인의 지팡이였어. 네가 내 곁에 있어 주었던 삶은 정말 행복했어."

"...네가 없으면, 나는 또다시 어둠 속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넘어지고 말 거야. 네가 없는 삶, 그건 내게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어."

"그런 삶을 살아가느니, 너와 함께 저세상으로 떠나가는 쪽을 선택할 거야."

"...히오리, 나를 잡아줘. 내 손을 잡아줘. 저세상에서도 같이 있고 싶어.“


나의 마지막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히오리의 유서 옆에 나의 유서를 올려놓았다.

나는 히오리가 처음으로 죽음을 간구하는 말을 들었을 때, 결코 그녀 혼자 죽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 다시 한번 히오리와 통화를 하고 난 뒤, 이 유서를 썼다.

내 유서 안에는 큰 내용은 없다. 그저 암울했던 인생을 회고한 뒤 히오리를 만났던 게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는지를 기록했을 뿐이다.


히오리는 내 인생 모든 것과도 같았다. 그녀가 살아있으면 나도 살아있을 것이고, 그녀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라고 스스로 맹세하였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맹세를 지킬 것이다.

히오리의 아픔은 단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언제나 나의 마음속에 뼈저리게 전해져 왔다. 다만 그 누구도 이를 알지 못했다. 하즈키 씨도, 마노와 메구루도, 아마이 사장도, 심지어 히오리 자신조차도. 히오리가 망가져 가면 내 마음도 망가져 가고, 고통이 완화되면 내 마음속에서도 그리된다. 

물론 100% 완전히 전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팠어도, 그 아픔이 히오리 본인이 느꼈던 병마의 고통을 완전히 전해주지는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부분적으로나마 전해진 고통마저도 나에게는 너무나 처절하게 느껴졌다. 나도 이렇게 아팠는데, 당사자인 히오리는 얼마나 더 괴로워하며 그 속에서 죽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걸까.


지금 히오리는 고통뿐이었던 삶을 마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그리고 나도, 히오리 없이는 어둠뿐일 이 세상을 함께 떠나려 한다.

히오리가 나의 손을 잡아주었을 때, 정말로, 정말로 기뻤다. 나와 히오리가 같이 갈 수 있겠구나. 이 손을 절대로 놓지 않으리라.


"히오리, 시작할까? 우리 인생의 마지막 티타임을."


"...네, 프로듀서. 저희의 티타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즐겨봐요."


"건배."


"건배."


투웅,


컵을 부딪쳐 건배한 뒤, 거리낌 없이 빙초산을 들이켰다.

너무나 강렬한, 신맛이다 못해 쓴맛이 온몸을 감쌌다.


'크윽…. 커헉….'


속이 타오른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우리 안의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다. 나도, 그리고 히오리도, 빙초산이 우리 몸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녹여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 꼭 잡은 두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빙초산으로 인해 녹아버린 피가 묻어도, 히오리의 찢어진 피부로부터 흘러나오는 진물이 서로의 손에 엉겨 붙어도, 고통을 참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악력을 강하게 쥐어도, 우리는 절대로 손을 놓지 않았다.


점점 의식이 흐려지고 시야가 몽롱해진다. 우리의 몸 안이 녹아내리고 불타면서 느껴지던 고통도 이제는 무뎌지는 것만 같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컵을 들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술을 움직이며, 최후의 문장을 읊었다.


한 잔은 떠나버릴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너와의 영원했을 삶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부서져 버린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모든 걸 알았음에도 그저 보고만 있었던, 빌어먹을 신을 위하여.


그 말을 끝으로, 나와 히오리는 하나가 된 듯 손을 붙잡고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이어서 다음 소식입니다.

인기 아이돌 유닛 '일루미네이션 스타즈'의 멤버 카자노 히오리 씨가 오늘 아침 병원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카자노 히오리 씨의 곁에는 담당 프로듀서로 추정되는 여성이 함께 누워 있었으며, 경찰은 카자노 히오리 씨와 담당 프로듀서의 유언장, 주변 상황을 통해, 병마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결국 빙초산을 먹고 동반자살을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유가족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매우 슬퍼하고 있으며….]


하즈키는 뉴스를 껐고,슬픈 표정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연예부 기자팀이신가요? 예, 저는 283 프로덕션의 사무원 나나쿠사 하즈키라고 합니다."

"네. 다름이 아니라, 내일 기자회견을 좀 열 수 있을까요? 그, 이번에 있었던 카자노 히오리 사망 사건에 관련된 일입니다. 네, 네."

"그러면 내일 아침 11시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종료되었고, 하즈키는 방에 들어가 히오리의 프로듀서가 건네주었던 봉투를 개봉하였다. 그 안에는 히오리와 프로듀서의 유언장과는 또 다른 내용의, 아마이 사장이 프로듀서에게 했던 모든 말들과 이를 고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히오리의 프로듀서는 283 프로덕션을 떠나기 전에 이 봉투를 주며


'훗날 세상이 다시 한번 히오리의 이름을 부를 때, 그때 사람들 앞에서 이것을 열고 읽어주세요.'


라고 말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었다. 하즈키는 이 내용을 세상에 발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히오리를 위하여, 프로듀서를 위하여, 그리고 283 프로덕션을 위하여.


다음 날,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하즈키는 프로듀서가 건네주었던 기록을 낭독하며, 아마이 사장이 카자노 히오리의 불치병 투병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려 했고, 283 프로덕션의 모든 아이돌과 직원들이 히오리의 병문안을 가지 말 것을 강요하였으며, 설령 그 명을 어기고 문병을 하는 사람에게는 고발과 해고 처분을 내렸다는 사실들을 전부 폭로하였다.


이 발표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즈키를 시작으로, 점차 283 프로덕션 소속 아이돌들 사이에서도 내부고발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아마이 사장이 검찰 조사와 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처음에 아마이 사장은 혐의들을 부인하였으나, 증언이 속속들이 나와 점차 그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끝에, 아마이 사장이 자신의 혐의를 모조리 인정하였고, 최종 선고에서는 징역 40년을 선고받게 되었다.


아마이 사장이 없는 283 프로덕션은 잠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기도 했으나, 하즈키의 주도로 혼란을 바로잡고 다시 제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위치를 바로 선 후 가장 먼저 히오리의 영혼에 사죄를 표하였고, 조촐하게나마 히오리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또한 히오리와 함께 죽어간 프로듀서의 영혼에 명복을 빌어주기도 하였다.


"잘 가, 히오리. 그리고, 프로듀서님."


"비록 우리는 사장님의 압제 속에 지냈지만, 둘에게 최선을 다해주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사죄할게."


"하늘에서는 부디 아픔 없이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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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보았습니다.

이 글은 Weissmann항께서 만드신 스레드 '티타임'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네 번째 티타임의 주인공은 카자노 히오리이고, 카테고리는 '병실'+'음독'입니다. 점점 티타임이랑 관련이 없어지고 차를 마시는 것도 마지막에 잠깐 나오기는 했지만, 음독도 티타임이라면 티타임일까요.

사실 이 글은 순번으로 따지면 4번째임에도 불구하고 3번째로 만든 작품입니다. 물론 이 글을 완성하고 나서는 다음날에 바로 3편 집필에 착수하긴 했지만요. 게다가 쓰다 보니 어느새 내용이 무척 길어져서, 다른 글 같았으면 A4용지 15장 정도였을 분량이 A4용지 25장으로 늘어나고 말았네요.

저에게 있어 3편 주인공인 아키와 4편 주인공인 히오리는 이미지적으로 무척 대립되는 것 같아요. 아키에 대해 '그대와 함께 사랑하며 살고 싶다'라고 생각한다면, 히오리는 '그대와 함께 죽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최대한 반영하여 쓴 글이구요.

5편은 언제쯤 나올지 모르겠네요. 8월 중반 지나기 전에 완성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미나미도령 앞으로도 간바리마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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